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에 있는 남강 이승훈 선생 동상
시련을 통해 빚어진 거목, 남강 이승훈
허명섭 박사의 이야기를 통해 보는 한국교회의 역사
남강 이승훈 선생
남강 이승훈(李昇熏, 1864-1930)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산학교나 3.1운동의 주역 등을 떠올린다. 그는 교육자와 민족운동가로서 세인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그가 ‘대승적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기독교신앙과 민족운동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었던 그릇이 큰 기독교인이었다. 그가 교육구국운동이나 민족운동에 주체적이며 행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사상적 배경도 기독교 신앙이었다.
이승훈은 늦깎이 신앙인이었다. 그는 45세 경에 기독교로 입교했는데, 도산 안창호와의 만남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용동이라는 곳에서 칩거하던 그는 1907년경 안창호가 미국에서 돌아와 연설한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으로 나왔다가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가지고 나라 일을 하겠습니까?”라는 내용의 안창호 연설에 큰 감동을 받았다.
연설이 끝나자 그는 연단 앞으로 나아가 13-4세 연하인 안창호의 손을 굳게 잡았다. 거목은 거목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두 거목의 만남은 이처럼 연령을 초월하여 이루어졌다.
이승훈은 다음날로 새로운 삶의 표시로 상투를 잘랐고, 귀향하여 강명의숙(講明義塾)과 오산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민회 가입은 물론 태극서관 설립, 마산 도자기회사 창립 등에 적극 참여하며 안창호의 국권회복운동과 호흡을 함께 했다. 이런 맥락에서 이승훈의 사상은 안창호의 실력양성론과 맥을 같이했다.
그는 오산학교를 설립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지금 나라가 기울어져 가는데 우리가 그저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총을 든 사람, 칼을 빼드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더 귀중한 일은 백성들이 깨어 일어나는 일이다. 오늘 이 자리에는 7명의 학생 밖에는 없지만 후에는 70명, 700명이 되기를 바란다”
즉, 오산학교는 당장의 무력투쟁이 아니라 백성들을 깨우고 내일을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는 일을 위해 세워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족지도자들의 이러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말 한국은 일제에 의해 강점되고 말았다. 이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이제는 일제의 정책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적인 소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어둠으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원성이었다. 하지만 이승훈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범인들처럼 낙망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려고 했다. 그 희망의 근원지는 기독교였다.
당시 오산에서 그와 함께했던 김도태는 이렇게 증언한다. “나라는 망하고 민족은 분산되어 가는 이때 누구든지 이제는 방법이 없다. 이제는 일제의 정책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고까지 부르짖는 사람이 있게 되고 본즉 모든 점에서 낙망하게 되었다. 선생은 분연히 [일어나] 우리가 낙망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우리는 우선 정신상의 수양을 쌓아야 하고 그 수양을 쌓으려면 예수교를 믿어야 한다고 하여 동내에 예수교회당을 짓고 ….”
당시 한국교회는 나라 잃은 설움과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의 낭떠러지 속에서 이 민족의 백성들이 유일하게 부를 수 있는 희망의 노래였다. 그래서 이승훈은 오산학교 내에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자를 청빙하여 이 민족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교회당이 설립된 지 40일 만에 그에게 혹독한 시련이 연거푸 불어 닥쳤다. 1911년 2월 ‘무관학교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그는 6개월 후 다시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갖은 고문과 악행을 당한 후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당하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당하는 이 고난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감옥에 둔 것”으로 생각했다. 옥중생활 2년 동안 그는 순연히 신앙생활에 헌신했다. 성경읽기와 기도는 중요한 일과였다. 그는 누구의 감시도 방해도 받음이 없이 조용히 이 생활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그가 성경을 여러 번 거듭 읽은 것도 감옥에서였고, 울면서 기도를 올린 곳도 감옥에서였고, 창살로 새벽빛이 비칠 때 그리스도의 성상을 멀리 우러러 본 것도 감옥에서였다. 신약전서만 100번 정도 탐독할 정도로 그는 성경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그의 생각과 행동은 성경에 사로잡혔고, 그의 심장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터질 것 같았다. 민족운동에 대한 신념이 도산 안창호를 만나고 나서 굳어졌다면 기독교 신앙은 감옥 속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이를테면 감옥은 “남강의 혼의 탄생지”였다. 그리스도와 긴밀한 만남이 이루어졌고, 그리스도와의 밀월여행을 통해 신앙의 달콤함을 깊이 맛볼 수 있었다.
그래서 1915년 2월에 출옥한 후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다. “감옥이란 이상한 곳인 걸, 강철같이 굳어서 나오는 사람도 있고 썩은 겨릅대처럼 흩어져서 나오는 사람도 있거든 …” 그는 시련을 통해 큰 그릇으로 빚어졌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3.1운동을 목전에 두고 가졌던 한 회합에서 종교인임을 구실로 거사에서 빠지려는 목회자들을 향해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이 백성이 모두 지옥에 있는데 당신들만 천당에서 내려다보면서 거기 앉아 있을 수 있느냐?”라며 질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시신마저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실험용 표본으로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겨레의 광복을 위하여 힘쓰라.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 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하여 쓰게 하라. 그리고 서로 돕고 낙심하지 말고 쉼 없이 전진하라”
참된 거목의 향취가 느껴지지 않는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너무 쉽게 말과 행동을 바꾸는 이 시대의 야누스적 소인배들과 얼마나 다른가? (2005.10.28. 크리스천투데이/ 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크리스천투데이 http://www.christiantoday.co.kr
남강 이승훈과 기독교.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