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원 〈농부〉 - 서평
존재 원형의 탐구와 경건한 생명의 연속성
김 소 엽 (시인, 대전대 석좌교수, 한국문화예술총연합회 회장)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의 초기 문명발전의 모태는 궁극의 실존을 위한 농경의 형태에서 출발하여 구성되었다고 본다. 수십 세기 동안 전통의 맥락을 유지하고 있는 인간 고유의 불가피한 생활방식이기도 하다. 변증법적 물질계의 자연과학과 방황하는 정신 문화의 다양성이 혼재하는 현재의 세계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사이의 비이성적 충돌도 인간 가치의 한계점을 넘고 있다는 판단이다. 역사의 흐름에서 수반되는 수많은 일은 삶의 의미와 존재 원형에 관한 탐구를 자연스레 요구해 왔다.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소리들, 감성과 이성의 재창조라는 미학적 예술 행위의 구도를 통해서 말이다.
김 원 시인의 〈농부〉에는 근원적이고 순응적인 자연주의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숭고하고 외경스러운 생명의 방향성과 연속성이 내면의 리듬을 타고 상징적인 시적 언어로 농축되어 있다. 소망스러운 미래에 대한 예언자적 자유의지와 태도가 표출되어 있음도 물론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거룩하게 빛나는 그리움의 농부다. -〈농부 43〉
철학적 사유가 깃든 서정의 눈부심으로 노래하는 김 원 시인의 역작에 찬사를 보낸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인은 영혼의 농부다
유 승 우(시인, 문학박사)
김 원 시인이 《광화문 전설》에 이어 이번에는 《농부》라는 시집을 출간한다. 70편의 연작시를 엮었다. ‘농부’의 우리 옛말은 ‘짓을 아비’이다. ‘열매를 짓는 사람’이란 뜻이다. 열매는 하늘과 땅이 지은 생명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만이 일한다. 사람이 하는 일에는 ‘만든다’와 ‘짓다’가 있다. 만든 것은 ‘물건’이고, 지은 것은 ‘집’이다. 시는 영혼이 지은 영혼의 집이고, 시인은 영혼의 농부이다. 물건은 쓰기 위해 만들고, 집은 살기 위해 짓는다. 그렇다면 시는 시인의 영혼이 살기 위해 지은 영혼의 집이다.
누구의 가슴에서 우리는 고운 씨앗을 얻을까 -〈농부 1〉 전문
위의 시에서 ‘가슴’은 ‘영혼’의 은유이고, ‘씨앗’은 생명의 열매를 은유한 것이다. 우리의 일에서 농사만을 ‘짓다’라고 한다. 생명의 열매를 짓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도 ‘짓다’라고 하여 ‘작시作詩’라고 한다. 그러니까 시인은 가슴으로 열매를 짓는 영혼의 농부다. 다시 말해 영혼이 사는 영혼의 집을 짓는 사람이다. 시인의 육신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영혼의 집에서 언제나 살아 있다. 지금도 우리는 소월의 시에서 소월의 영혼을 만날 수 있고, 조선 시대 윤선도의 영혼도 그의 영혼의 집에서 만 날 수 있다.
밤이슬 차가워도 새벽에 눈을 뜬 부스스한 수줍은 열매에게 나를 바친다. -〈농부 22〉 전문
시인은 낮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다 잠든 밤에 일하는 영혼의 농부이다. 그래서 ‘밤이슬/ 차가워도/ 새벽에 눈을 뜬/ 부스스한/ 수줍은 열매에게/ 나를 바친다’고 하는 영혼의 노동자이다. 그래서 사람을 가리켜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한다. 참 좋은 이름이다. 이 이름을 우리말로 옮기면 ‘임금’이다. ‘임금’의 ‘임’은 하늘[天神]이고, ‘금’은 땅[地神]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임금’은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어 이룩한 사람의 이름이다. 하늘은 사람의 마음[靈魂]이 되고, 땅은 사람의 육신[肉身]이 되어 사람이란 몸을 이룬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임(영혼)’과 ‘금(육신)’을 모은 몸이다. 문법적으로는 ‘모으다 – 모음 - 몸’의 과정을 거쳐 사람[몸]이 된 것이다. ‘모음’ 까지는 〈1+1=2〉와 같은 차원이지만, ‘몸’은 〈영+육=1〉이 라는 하나 됨이다. 그래서 몸이란 말은 사람에게만 쓰인다. 기어 다니는 동물의 존재는 몸이라 하지 않는다. 소나 돼지는 살이 쪘다고 하지 몸이 좋아졌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으다’라는 동사의 주어는 무엇인가. 누가 ‘영靈과 육肉’을 모아 몸이 되게 한 것인가.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라고 했다.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육신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시어 생령生靈이 된 사람은 〈영+육=1〉이 된 몸이다. 그래서 사람은 곧 만물의 영장이며, 임금이다. 하나는 하나일 뿐 둘이 아니다. 몸은 임금일 뿐 영과 육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사람이다. 땅을 딛고 두 발로 걷는 만물의 영장이다.
철갑을 두른 섬짓한 문명의 타종소리 땅 한 줌의 인내와 삽과 호미의 용기를 점령하지 못한다 푸른 눈을 부릅뜨고 창검을 휘두르는 번쩍번쩍한 힘의 군병도 하늘 한 조각의 거룩과 들풀과 씨앗들의 눈부신 성벽을 허물 수 없다. -〈농부 69〉 부분
영혼의 농부인 시인의 세계는 ‘철갑을 두른/ 섬짓한 문명의 타종소리’나 ‘푸른 눈을 부릅뜨고/ 창검을 휘두르는/ 번쩍번쩍한 힘의 군병도/ 하늘 한 조각의 거룩과/ 들풀과 씨앗들의/ 눈부신 성벽을 허물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금력과 무력으로도 허물 수 없는 시의 세계인 것이다.
이런 진리를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라고 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곧 만물의 영장靈長인 ‘임금’을 의미하며, ‘남자와 여자’란 임금의 자녀인 ‘왕자와 공주’를 의미한다.
임금을 뜻하는 한자로는 임금 주主와 임금 왕王 그리고 임금 군君자가 있다. 이 중에 주主는 천신天神의 ‘임’이고, 왕王은 지신地神의 ‘금’이며, 군君은 ‘입으로 말을 하는 것의 상형’이므로 사람을 가리켜 ‘임금’이라 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사람은 다 임금[君]인 것이다. 그래서 김 군, 이 군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귀한 존재’라는 뜻이다.
그런데 시인은 싸워서 임금이 된 왕王이 아니라 내 몸을 불태워 빛을 주는 임금인 주主를 따르는 임금이다. 주主의 밑 부분은 임금 왕王 자가 아니고 촛대를 상형화한 글자이고, 위의 점은 촛불을 상형화한 것이다. 내 몸을 불태워 모두의 빛이 되는 주主는 예수님밖에 없다. 그래서 시집의 마지막 작품 〈농부 70〉은... ‘이제 땅과 하늘과 삶의 장막을/ 훌훌 벗어버리고/ 무수히 별꽃들이 피어나고/ 은하의 길들이 사랑을 노래하는/ 눈부신 천상의 집에 이르라/ 포근하신 꿈의 거처에 이르라’로 마무리된다.
영혼의 농부인 시인의 길은 멀고 멀다. 외로운 길이다. 그러나 시인의 길에 들어선 김 원 시인은 주主를 따르듯 외로운 길을 열심히 걸어가고 있다. 그는 영혼의 농사를 짓는 영혼의 농부이기 때문이다. 그의 길에 영광이 있길 기도하며 이글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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