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현실적이면서 반윤리적인 "제4차 세계대전론"
2001년 9월 11일, 이른바 9.11 사건 이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벌인 뒤, 미국 언론이(국내 언론을 포함해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이 쓰고 있을 때, 신보수주의자인 엘리엇 코헨은 <월스트리트저널> 2001년 11월 20일자, ‘제4차세계대전(World War IV)’이라는 글에서 “미국은 제3차 세계대전인 냉전에 이어서, 현재 제4차 세계대전 중이다”라고 주장했다.
코헨은 아프가니스탄은 단지 ‘제4차 세계대전’의 전선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제4차 세계대전의 적은 ‘호전적인 이슬람교도(militant Islam)"이며, 호전적인 이슬람교도란 서로 경쟁적인 입장에 서 있는 수니파, 시아파, 와하브파라고 규정했다.
이어서 노먼 포도레츠는 2002년 2월 <코멘터리>지에 ‘제4차 세계대전에서 이기는 방법(How to win World War IV)’이라는 글에서 코헨의 글을 인용하면서, ‘아주 독특한 주장’을 펼쳤다.
닉슨과 포드 대통령 시절이었던 1970년대부터 미국의 외교관들이 수단이나 레바논 등지에서 계속해서 살해되고, 대사관이 공격을 받았던 사실에서부터 9.11사건까지 지루하게 언급한 뒤 미국이 ‘공격’을 받고 있는 이유는 미국이 ‘힘’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9.11은 의심할 바 없이 미국의 힘에 대한 경멸의 산물이다. 미국 대통령이 그렇듯 오랫동안 테러리스트에 대해 힘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테러리스트에게 미국은 내리막길에 들어선 나라이기에, 한때 칼로써 이 세계의 많은 곳을 정복했던 호전적인 이슬람교도가 소생한다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는 게 포도레츠의 주장이었다.
포도레츠는 또한 이렇게 주장한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짧은 기간 내에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을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capitalist democracies)로 변모시켰다. 그리고 제3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중앙 유럽과 동유럽, 그리고 악의 제국의 오래된 심장부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생겨났다. 그런데 이슬람 세계만 유독 예외로 남아야 한단 말인가?”
전 CIA국장이었던 제임스 울시는 2002년 11월 16일에 행한 한 연설(<프런트페이지> 11월 22일자에 발표)에서 다시 엘리엇 코헨의 논의를 인용하면서, (1)제4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적은 누구인가 (2)미국은 왜 이 적과 전쟁을 벌이는가 (3)국내외에서 벌이고 있는 이 전쟁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이 연설에서 제임스 울시는 엘리엇 코헨과 마찬가지로 ‘제4차세계대전에서의 미국의 적’을 세 가지 그룹으로 규정했다.
첫 번째로 이란의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으며,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는 시아파 이슬람교도, 이들은 1979년 이란의 정권을 장악하면서 미대사관을 공격했고, 1983년에는 베이루트에서 해군 막사를 공격했다. 거의 4반세기에 가까운 기간 동안 미국에 대해 테러행위를 벌이고 있다는 것.
두 번째는 파시스트로서 이라크 및 시리아의 바트당을 말한다. 이들은 1930년대 파시스트 당을 모방하고 있는 전체주의자들이며 반유대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것.
세 번째로 수니파 이슬람교도. 이들 또한 근본주의자들이며, 그 근원을 따지자면 18세기까지 거슬러올라가고, 1950-6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로 이민하면서 뿌리를 내린, 사우디아라비아의 종교운동인 와하브(Wahhabi)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이들로서, 이들도 ‘우리(미국)’을 십자군, 유대인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
울시는 “적어도 1994년 이래로 미국은 이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이런 적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벌이려 하는가? 울시는 미국이 증오의 대상인 된 것이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경제적 자유, 남녀 평등 때문이라고 주장한다.(이런!)
‘제4차 세계대전’은 나치에 대한 전쟁과 비슷한 것이라는 논지를 펼치는 것이다. 그리고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 대한 미국의 대응과 비슷하게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중동의 적들(시아파, 수니파, 바트당 등)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들 ‘적’들이 이전에는 ‘부유한, 결단이 난, 허약한 국가’(rich, spoiled, feckless country)인 미국이 싸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생각을 뒤집을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울시는 미국의 인프라가 대부분 기술적으로 고도화되어 있으면서도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테러에 의해 손쉽게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작은 칼도 큰 칼과 마찬가지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 국내의 이슬람교도의 대다수는 테러분자가 아니지만, 이들 가운데에는 서양의 자본주의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는 자들이 있다고 말하면서 미국내 이슬람교도에 대한 경계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면서 그것이 “윌슨의 ‘14개조항’의 민족자결주의를 위해 제1차 세계대전을 이겼던 방식, 처칠과 루즈벨트의 ‘대서양헌장’을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을 이겼던 방식, 트루먼 대통령 때 시작되었고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가장 정확하게 표출된 고귀한 사상을 위해 제3차 세계대전을 이겼던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울시는 이것이 ‘국가간의 전쟁(war of countries)’이 아니라 ‘폭군에 대한 자유의 전쟁(war of freedom against tyranny)’이라고 규정한다. 또한 “미국이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 소련의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편이었음을 확신시킨 것처럼, 중동 민중의 편이라는 것을 확신시켜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엘리엇 코헨, 노먼 포도레츠, 제임스 울시, 이들의 말을 정리하자면,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은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마찬가지로 ‘제4차 세계대전’의 또 하나의 전선일 뿐이며, 적은 수니파, 시아파, 하와브파 등 호전적인 이슬람교도이다.
이들 호전적인 이슬람교도는 레오 스트라우스가 말하듯 ‘폭군’이다. ‘폭군’인 ‘적들’이 미국을 ‘부유한, 결단이 난, 허약한 국가’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힘’을 보여줌으로써 ‘폭군’을 제거하고 ‘나쁜 체제’를 변화시킴으로써 중동에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 명쾌한 듯이 보이는 논리다. 마치 폐쇄회로처럼 갇혀 있는 듯, 스트라우스적인 사고방식이 반복되고 있다. 그들의 말은 조금씩 용어가 다르긴 하지만 결국에는 동어반복이다. 단적으로 말해 이들은 같은 말을 지겹도록 반복하는 ‘광신도’와 비슷하다.
(1)우선 첫번째로 지적해야 할 것은, 이들의 주장이 미국식 자유, 미국식 자본주의,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자기도취적인 맹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식 자유, 자본주의, 민주주의란 결국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정치 경제 사회’이다. 나치가 아리안족의 ‘위대한 인종의 보존’을 주장하며, 홀로코스트를 저질렀듯이, 이들의 주장은 대안적 세계를 모색하고 있는 이 지구상의 숱한 이들의 ‘꿈과 희망에 대한 홀로코스트’를 저지르고 있다.
(2)두번째로 지적해야 할 것은, 대다수가 유대인인 신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이 철저하게 이슬람교도를 ‘적’으로 생각하는 이스라엘적인, 유대인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또한 노골적으로 개입했든 하지 않았든 이번 전쟁은 이스라엘이 원한 전쟁이었다. (울시 전 CIA 국장뿐만 아니라 현재 사실상의 ‘총독’ 역할을 맡고 있는 이라크 재건인도지원처장 제이 가너 등이 이스라엘의 극우파 정당인 리쿠드당이 후원하는 미국의 유대국가안보연구소(JINSA)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3)세번째로 지적해야 할 것은, 이들의 주장이 자기모순적이라는 점이다. 미국보다 더 자주, 더 적극적으로 독재정권을 지원한 국가는 이 지구상에 없다. 미국이 지금까지 문제삼았던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오로지 ‘친미적이냐 아니냐’만 문제삼았다. 미국의 이익에 봉사할 수 있는 국가냐 아니냐만 문제삼았던 것이다.
이들은 이란에 대해서는 해외 망명 그룹들을 지원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팔레비 전국왕의 가족들을 내세워 이란에 진입하려 할 것이지만, 거꾸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왕가는 해체하려고 시도할 거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또한 신보수주의자들은 시리아의 바샤르 아사드 정권 타도와 국가 해체 등도 주장한다. 이른바 ‘중동의 민주화 도미노론’이다. 하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라크 내에서조차 미국은 이라크 민중의 거센 ‘반미의 물결’을 맞이하고 있다.
(4)네번째로 지적해야 할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독일과 일본에 ‘이식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를 전세계로 확장하겠다는 생각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역사란 오로지 앵글로-아메리카 형의 세계사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런 몰이해는 이번 전쟁에서 보듯 ‘다른 문화, 다른 문명’에 대한 철저한 파괴와 약탈의 양상으로 드러났다.
미국의 일본 점령을 연구했던 학자들이 “이라크는 일본과 다르다”라고 말했던 이유는 이라크가 오랜 기간 ‘반영 독립 투쟁’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이라크인들은 반영투쟁의 기억을 갖가지 문학과 예술의 형태로 간직하고 있고 그것을 내면화하고 있다. 그러기에 앞으로 반미투쟁의 역사가 전개되리라고 이들 학자들은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5)다섯번째로 지적해야 할 것은,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이 엄청나게 반윤리적이라는 점이다. 이번 이라크 전쟁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새롭게 등장한 미디어들이, 미국이 ‘관리’하고 ‘통제’하는 매스미디어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대안적인 뉴미디어들은 이제까지 폭로되지 않았거나 은폐되어 있던 미국의 반윤리적인 본질을 드러내었다. 신보수주의자들은 문화상대주의와 근대성을 비판하면서 그 비판의 근거로 ‘종교의 미덕’을 내세웠지만, 그 ‘미덕’이라는 것이 학살과 허위의 ‘미덕’이라는 것을 대안적인 뉴미디어들이 여지없이 밝혀낸 것이다.
뿌리내리기 vs 디아스포라
‘제4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있는 신보수주의자들은 ‘다음은 당신들 차례다(You"re next)"라고 말하고 있다. 이란, 시리아,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등등 이슬람국가들은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의 행보를 ‘두려움’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세계의 여러 언론에서도 이를 반영하듯 다음은 누구 차례인가 하고 따져들고 있다.
하지만 벌써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이 그 어떤 나라보다도 미국에 대해서도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있음을 깨닫고 이들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미국 내에서도 높아지고 있다. 미국이 ‘경찰국가, 수용소국가, 감옥국가’로 변해가는 데 대한 저항운동과 일반적인 민주주의의 요구를 지켜내려는 시민불복종운동은 주목할 만한다.
또한 미국의 정계 내에서도 이들에 대한 공격적인 비판이 전개되고 있다. 공화당뿐만 아니라 민주당에도 신보수주의자들이 침투해 있기에(예를 들어 미국 민주당 내의 신보수주의자 들의 중심은 조지프 리버만이다. 리버만은 2000년 대선에서 미국 역사상 최초로 유대계 출신 부통령 후보였다. 2004년 대선에도 출마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다음 선거에서는 신보수주의자들의 정책과 노선에 대한 비판이 하나의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전 행정부의 기조였던 국제주의, 외교 우선, 최저 군사행동, 기존 국제기구 중시 vs 신보수주의자들의 일방주의, 군사중심주의, 선제공격전략, 기존 국제기구 무시 등.
최근 2004년 대선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를 선언한 린든 라루쉬(Lyndon LaRouche)가 주도하는 잡지 <이아이알(Executive Intelligence Review)> 2003년 4월 18일자는 신보수주의자들의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토니 페이퍼트(Tony Papert)의 ‘레오 스트라우스의 비밀의 왕국’, 제프리 스타인버그(Jeffrey Steinberg)의 ‘부시의 용서할 수 없는 이라크 전쟁 이면에 숨어 있는 비열한 거짓말쟁이들’ 등이 그것이다.
‘네오콘(neocon)"이라고 불리고 있는 신보수주의자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다. 올초 노먼 포도레츠는 몇몇 재단이 후원하는 ’디스 위크 싱크탱크‘라고 불리는 한 대담 프로그램에 나와서 신보수주의자들이 대부분 유대인임을 시인한 바 있다.
신보수주의자=유대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교조(敎祖)라 할 수 있는 레오 스트라우스부터 유대인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자칭 타칭 신보수주의자로 불리는 이들은 모두 유대인적인 사고방식을 내면화한 인물들이다.
린든 라루쉬는 2003년 3월 21일에 발표한 물리적 기하학이라는 전략(Physical Geometry as Strategy)이라는 글에서 “이라크 침략에는 어떤 ‘전후(戰後)’도 있을 수 없다. 다만 전쟁이 계속될 뿐이다”라고 말하면서, 레오 스트라우스의 ‘유니버설 파시스트’적인 ‘학동들’이 부시 정권에 구축한 진지가 파괴되지 않는 한 전세계는, 그리고 중동은 전쟁을 피하지 못할 거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라루쉬는 이 전쟁의 이면에는 이스라엘이 있다는 것과 함께, 나치 독일을 전쟁으로 몰고 간 것이 ‘금융자본가의 이익(financier interests)’이었듯이 이 전쟁의 동인도 ‘금융자본가의 이익’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가설적인 이야기 한 가지를 덧붙이면서 이 긴 잡문을 끝내기로 하자.
먼저 첫 번째의 가설. 신보수주의자들이 말하는 ‘제4차 세계대전’이란 결국 유대인이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금융자본가들의 전쟁이다는 것. 즉 이 전쟁은 "금융자본가의 전쟁"이자 "유대인의 전쟁"이었다는 것.
이 가설에 따르면, 레오 스트라우스가 말하는 "나쁜 체제, 문명, 국가, 정체, 헌법, 레짐"이란 말하자면, 유대인 금융자본가가 자신들의 뜻대로 자본을 투자해서 이윤을 뽑아낼 수 없는 체제, 문명, 국가, 정체, 헌법, 레짐을 뜻하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유대교는 고대 이스라엘인의 종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무장한 예언자‘인 모세의 율법을 기본으로 고유한 종교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이른바 ’바빌론의 유수(Babylonian Captivity, BC 597~BC 538년) 이후의 일이다.
바빌론의 유수 이후 유대인들은 기본 경전(토라)인 ‘모세 5경’을 정리하면서 자신들의 역사를 재구축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전래되어 오던 홍수 설화 등이 ‘노아의 방주’ 이야기로 번안되어 "모세 5경"에 실리게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신보수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한 것은 유대인들의 종교사에서 큰 오점으로 남아 있는 ‘바빌론의 유수’에 대한 복수란 말인가? 가설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럴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두 번째 가설은 이 전쟁이 "금융자본가의 전쟁‘이자 ’유대인의 전쟁‘이라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언급할 수 있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듯, 유대인의 역사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역사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로 분산(分散), 이산(離散)을 뜻하는 말이다.
유대인이 자신의 고향에서 쫓겨나 세계 각지로 떠돌게 되었던 것은 외세의 정복에 의해 시작된 것이지만, 다른 한편 유대인들은 그렇게 떠돌았던 이유를 경제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어느 곳에서나 유력한 ‘상업자본가’, ‘금융자본가’(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겠지만)로서 존재했었기 때문이었다.
서양의 문명사에서 자신의 땅에 뿌리를 내린 농업 세력과 유력한 상인 세력이 ‘세계사적으로’ 맞부딪친 전쟁은 ‘포에니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농업국가인 로마가 팽창함으로써 무역으로 번영해온 상업세력인 카르타고와 충돌한 것이다. 그리고 BC3세기 중엽부터 BC2세기 중엽까지 1백 년이 넘는 전쟁 끝에 카르타고는 로마에 의해 멸망한다.
하지만 무역을 중심으로 번영을 추구하던 세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카르타고의 상층 귀족이었던 세력(여기에는 물론 유대인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들은 ‘각지로 흩어져’ 자신의 ‘부’를 유지하고 확대해 나간다. 또한 그 ‘부’를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에 영향을 끼친다.
이들은 베네치아(페니키아의 음운변동?), 암스테르담, 런던, 뉴욕 등 카르타고와 지리적으로 유사한 통상의 요충지를 거점으로 삼는다. ‘디아스포라’의 기나긴 여정이 거쳐간 지점들은 자본의 중심지였으며 ‘부’를 축적하기에 용이한 곳이었다.
금융자본가의 특징은 특정한 국가에 얽매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금융자본가는 고향이 없는 자로서 오로지 ‘부(자본)’만이 자신의 고향이라고 여길 뿐이다. (‘히브리Hebrew’라는 말 자체가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옮겨온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자본주의의 초기에 자본-임노동의 관계는 봉건 권력의 토지에 예속되었던 인간을 토지(고향)에서 이탈시켜 ‘떠돌아다니는 자’인 자본의 축적욕구에 종속되도록 임금노예로 바꿈으로써 가능했다. 이른바 인클로저 운동(enclosure)이다.
다시 말해, 유대인이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이 세계의 지배적인 금융자본가들, 그리고 그것을 이념적으로 드러내는 네오콘들은 전세계를 향해 지금 상징적인 의미에서 "인클로저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공동체의 해체, 금융자본이 자유롭게 이윤을 뽑아낼 수 없는 문명의 파괴과 체제의 전복, 이농, 노동시장의 유연성, 투기적 금융자본의 국경 없애면서 넘나들기 등등....
금융자본은 끊임없이 뿌리를 뽑으려 한다! 공동체의 뿌리를, 노동자의 뿌리를!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술의 발전은 본질적으로 인클로저 운동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떠돌아다니는 자’인 자본의 축적 욕구에 따라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근대문명의 상징인 기차가 그렇지만, 인터넷, 핸드폰, 노트북, PDA 등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등이 추구하는 디지털문명의 ‘자유로움’도 결국 근본적으로는 ‘떠돌아다니는 자’인 자본이 노동자의 정신과 육체를 기존의 장소와 지역에서 이탈시키기 위해 개발되었던 것이다.
디지털문명의 유목민적 속성을 철학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노마디즘"이 한편으로는 저항의 담론을 생성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 "탈주"라는 것도 결국 권력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탈주"라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터이다.
이런 의미에서 ‘금융자본가의 전쟁’ 그리고 ‘유대인의 전쟁’인 이라크 전쟁은 ‘뿌리 내리려는 자와 뿌리를 뽑으려는 자의 전쟁’이기도 하다. 이것이 이 가설의 결론이다.
뿌리를 뽑으려는 자에 대한 저항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뿌리를 내리는 운동이 되어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공통체라도 그것을 무참하게 파괴하려 하는 자본의 운동에 맞서는 것은 아주 느리게느리게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에 굳건히 뿌리 내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사고, 그런 행동, 그런 삶의 방식.....마치 한 그루 나무와 같은....
‘제4차 세계대전’은 ‘뿌리 내리려는 자와 뿌리를 뽑으려는 자의 전쟁’이기도 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거센 물결을 이루었던 "반전운동"은 바로 "뿌리를 뽑으려는 자"의 무자비한 공격에 대한 "뿌리 내리려는 자"의 방어이자 저항이었던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