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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맑은 물 흐르는 곳 (나들목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들풀처럼
(논문) 예수의 수난, 그 비극적 진정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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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차정식 교수 (한일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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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상' 1999/10.
비극이 사라지지 않는 세상의 ‘비극’
온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행복을 생의 궁극적 지표로 삼고 이를 추구하며 살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이 세상에 비극 이야기가 그치지 않는 데에는 필경 곡절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마다 복에 겨워 마치 불온한 일탈을 통해 색다른 쾌락을 추구하듯 탈일상적 삶의 통풍구를 위해 비극에 빠져드는 것일까. 아니면 허망한 죽음으로 끝나는 삶의 실존적 질곡 앞에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인생관을 비추는 거울로서 비극을 요청하는 것인가. 하여 비극은 그처럼 선험적인 위상을 지닌 삶의 생래적 일부이거나 삶을 삶답게 하기 위한 필요악인가.
그러나 이런 가능성은 좀 사치스러운 감이 있다. 오히려 단순하게, 이 세상에 비극 이야기가 그치지 않는 이유를 사라지지 않는 비극적 삶의 현장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고대 폼페이의 최후 같은 불가피한 천재지변이나 국가간 전쟁에서부터 사사로운 질투나 원한으로 인한 살해, 복수극은 그 후일담을 재료 삼아 비극을 탄생시키기에 적절한 문학적 공간을 제공해준다. 금세기 최대의 참사라고 하는 터어키 지진을 보라. 그곳에서 죽었거나 죽었을 것으로 거의 단정되는 4만 명이 넘는 목숨들은 대개 성인군자(聖人君子)도 못되고 그렇다고 극단적 악한도 아닌 평범한 양민들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하루아침에 무더기로 날벼락을 맞은 그들의 재난을 그 어떤 위무의 언사로 정당화하더라도 비극은 비극인 셈이다. 가깝게는 거의 날마다 신문지면과 TV 화면을 장식하는 사건 사고 소식을 접할라치면 어느 하나도 안타깝지 않은 게 없을 정도로 비극스런 면면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우리의 요지경 세상 속에 노출되는 온갖 부조리와 모순적 현상들은 비극적인 현실을 더욱 비극스럽게 하고, 그럴수록 이에 의미를 부여하는 다채로운 지적인 노력도 상승가를 타게 된다.
비극은 비극을 양산한다. 앞의 비극이 생의 일부를 이루는 크고 작은 비극적 사건의 체험을 아우른다면 뒤의 비극은 그 체험을 승화하는 차원에서 다각도로 의미화하려는 문학적 시도를 가리킨다. 이처럼 비극스런 사건이 지속되는 한 그 형상화로서의 비극은 언제나 대중적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다. 문학의 현실 반영적 기능에 대해서는 리얼리즘 논쟁을 통해 이미 지루한 공박이 교환된 바 있지만, 리얼리즘 문학이든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이든 어떤 식으로든 사람살이의 다채로운 현실을 비추어주는 기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삶의 내면을 완곡히 추상적으로 드러내느냐, 외적 환경과 당대 인간의 전형적 모습을 정공법으로 구체화시켜 보여주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세상과 삶의 드러냄이란 견지에서 ‘비극’은 그 가운데 한 방식을 양식화한 문학 장르에 해당된다. 아니, 문학 장르로 세부적인 규정을 받기에 앞서 이는 삶을 이야기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특정한 삶의 체험이 비극적이라고 해서 이를 형상화한 작품으로서의 비극이 마냥 슬픔과 고통의 진창일 수만은 없다. 거기에는 그 슬픔과 고통의 근저를 이루는 삶의 다양한 풍경이 먼저 펼쳐지고, 그 풍경의 구조가 탐지된다. 나아가 그 부정적 정서의 반전이 전개되고 그 반전의 반전으로 상황이 꼬여감에 따라 그 비극적 긴장은 절정으로 인도되곤 한다. 그러므로 비극이 반드시 ‘불행한 종결’(unhappy ending)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비극도 그럴듯한 희망의 징조를 가지고 파국에 이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헬라의 고전적 비극 작품의 경우에서 보더라도 비극이 늘 우리들의 상식적 통념대로 비극스럽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제대로 잘 끝나는 편이다.
기독교 ‘비극’의 종말, 니체의 승리?
성서문학을 비극과 무관한 것으로 보는 시각은 니체의 음험한 계략을 기독교 쪽에서 무덤덤하게 수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일찍이 고전문학을 전공한 니체는 인간의 의지를 나약하게 만드는 근대 서구 기독교의 퇴폐적 인습을 타도하기 위해 그 대안을 헬라의 비극 세계에서 찾았다. 이로써 그는 십자가에 죽은 송장에 목을 매는 인간의 나약함을 디오니소스적 열락을 통해 도전하고 가짜 구원의 환상 속에 매몰된 당시 서구 기독교의 미신적 행태를 비판하는 도구로 삼았다. 그에게는 당시 서구 기독교야말로 인간의 삶 가운데 담긴 적나라한 비극적 환상에의 투시를 결여하고 치열한 고뇌와 투쟁 의지도 지니지 못한 채 허울뿐인 할렐루야!를 외치는 한갓 속빈 강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여 그는 기독교와 이교도, 크리스천과 헬라인을 고전적 비극의 정신 유무에 따라 대립적으로 파악하고 기독교를 반비극적 종교로 규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기독교의 가공스런 대적자인 그의 그러한 개념 규정을 교회가 그대로 수용하여 비극을 넘어선 기독교를 전망한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이다. 그때 니체가 본 것은 당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억누른 교권의 횡포와 교리주의적 체제하에 압살된 주체적 신념이었고, 이는 기독교의 자기 성찰이란 견지에서 새겨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이 부분에 대해서 둔감했다. 정작 그가 제대로 보지 못한 부분은 기독교의 뿌리를 제공한 성서에 그가 내세운 헬라적 비극 세계가 그 외양을 달리하여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니체의 이러한 경직된 이분법의 오류를 교회가 그대로 접수함에 따라 결국 성서로부터 비극의 숭고한 가치를 추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로써 교회가 그 대적의 장단에 춤을 춘 꼴이 된 것이다.
서구 기독교에서 비극이 더 이상 성서적 신앙과 무관한 것인 양 이해되어온 것은 다분히 묵시문학적 비전 일변도로 그 신앙의 색깔이 규정되어온 사정과 무관치 않다. 그러나 비극적 환상의 귀결이 기계적 구도에 의해 예정된 묵시문학의 세계는 진정한 의미의 비극 세계와 거리가 멀다. 거기에는 인간이 자신의 실존적 삶의 현실과 극대화된 의지를 내세워 부대끼며 신이 부여한 운명(fate)을 자신의 주체적 운명(destiny)으로 바꾸고자 하는 치열한 노력이 결여되어 있다. 그 대신 두드러진 특징은 그 비극적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환상적 자기 최면이나 이를 망각하기 위한 저 세상으로의 도피 본능일 뿐이다. 서구 기독교는 묵시문학 일변도의 신앙 색깔을 창출하고 이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비극을 넘어서’를 외칠 만도 했다. 특히 19세기를 전후하여 제국주의적 식민 지배를 통해 대규모로 살상당하거나 억압받은 이민족들의 끔찍한 비극적 현실을 그들은 외면하거나 망각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서 자체에 이미 비극은 엄정한 삶의 일부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바울과의 싸움에 진력한 니체가 과소평가하고 서구의 근대 기독교가 적당히 무시한 부분이다. 요즘 서구학계에서도 구약성서의 삼손 이야기와 욥기를 하나님이 개입한 비극적 서사(divine tragedy)로 읽을 정도로 비극은 그 왜곡된 개념 규정의 탈을 벗고 되살아나고 있다. 나아가 복음서의 이야기(특히 마가복음)와 그 주인공 예수의 비극을 논할 만큼 니체의 이분법적 망령은 미미하나마 서서히 극복되어가는 추세이다.
이를 위해서는 비극의 문학 장르를 그 고전적 개념에 비추어 재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마땅하다. 특히 기독교의 대부인 예수가 보여주는 삶의 비극적 단면, 나아가 이를 형상화한 수난사화의 비극문학적 위상이야말로 그 객관적인 평가가 긴요하리라 본다. 내가 이 글의 나머지 지면에서 주로 다루고자 하는 논제는 바로 이러한 것들이다. 이로써 예수 수난의 정신사적 유산 가운데 교리적 편향성으로 인해 건강하지 못한 믿음을 만들어낸 측면을 되짚어보고 이에 대한 극복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족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시학》의 비극관
비극에 관한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Poetics xi, 16-17)는 아직도 고전적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비극은 한 마디로 적절한 확대경 속에 투사된, ‘고상하고 온전한 행동의 한 모사’이다. 그것은 여러 종류의 수사적 장식에 의해 예술적으로 고양된 언어를 사용하되, 그 언어는 연극의 다양한 부분에서 다채롭게 적용된다. 양식 분류상 비극은 서사(narrative)가 아닌 극(drama)의 형식 속에 나타나며 연민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목적을 지닌다.
비극이 행동하는 인간의 모사(模寫)라는 것은 이 문학적 형태가 가공의 신을 주인공으로 하기보다 구체적인 인간의 삶을 다루는 양식임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러나 극적인 장면의 연출을 요하는 규모있는 문학적 틀을 전제로 하여 성립된다. 비극이 ‘고상하고 온전한 행동의 모사’가 되어야 하는 이유의 일단이 바로 거기에 있다. 특정 인물의 행동은 극적 모사에 의해 고상하게 그려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천박한 인상을 끼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자와 후자의 경우를 각각 비극과 희극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플라톤 철학의 맥락에서 ‘모사’(mimesis)라는 말은 그 문자적 의미를 넘어 형이상학적 차원의 함의를 전한다. 플라톤의 유명한 ‘동굴의 비유’가 말해주듯, 인간의 모든 앎은 실재의 반영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러니 실재의 반영을 이르는 모사야말로 인간 세계와 모든 활동을 특징짓는 단어이다. 즉, 이미지, 은유, 신화 등에 나타난 인간의 모든 지식은 모두 실재하는 것의 모사로 존재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림이든, 비극이든, 철학적 담화든 그것은 현상계에서 실재하는 것을 드러내는 모사적 양식으로 사용될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개념에서 또다른 중요한 핵자는 ‘연민과 두려움’을 촉발하는 비극의 실질적 기능이다. 연민의 정서는 등장인물이 억울하게 불운한 지경에 빠졌을 때 생기는 청중의 반응이다. 이에 비해 두려움은 등장인물이 당하는 불운이 청중의 입장에서 마치 자신의 것처럼 인지될 때 발생한다. 그 감정이입적 반응이 적절한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 주인공은 도덕적으로 지나치게 뛰어난 존재일 필요가 없고 동시에 극단적으로 타락한 인간이어서도 안된다. 오히려 평범한 인성을 지닌 존재로서 그는 대단한 악행이 아닌 그저 그런 실수로 말미암아 비운에 떨어지는 인간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비운과 맞부대껴 싸우는 자답게 그 비극의 주인공은 상당한 명성과 존경을 받을 만한 영웅적 존재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그가 저지르는 결정적 실수(hamartia)는 도덕적 죄악이기에 앞서 순식간의 오판 같은 지적인 오류로서 주인공이 처한 비극적 상황을 극대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말로 보통 ‘정화’(淨化)로 번역되는 카타르시스는 연민과 두려움의 정서적 결과물로서 그 정확한 함의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먼저 이를 ‘도덕적 정화’로 보는 시각이 제시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도덕적 덕목에 있어 지나침이나 결핍, 중용이 존재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맥락에서 연민과 두려움의 감정을 언급한 적이 있다(Nichomachean Ethics, 1106b, 15-23). 그러므로 카타르시스란 비극을 보는 청중들이 그들의 과잉되거나 결핍된 덕목을 연민과 두려움의 감정 속에 조율하여 적절한 중용의 상태에 이르는 과정으로 이 개념을 파악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카타르시스를 ‘의학적 정화’로 보는 해석이 존재한다. 16세기에 처음 개발되어 19세기 후반에 인기를 얻은 이 해석은 축적된 연민과 두려움 같은 고양된 감정의 상태를 치유하는 효과란 견지에서 카타르시스의 실용적 의의를 강조했다. 그러나 정작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이런 측면에서 예의 개념을 설명하는 증거를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입장은 후대 의학과 정신분석학의 발전에 발맞추어 그 학문적 틀에 카타르시스의 의미를 확대 해석한 결과로 볼 수 있겠다.
그 외에도 비극의 서사적 구성이 전개됨에 따라 연민과 두려움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도덕적 타락 따위의 비극적 행실이 정화된다는 이른바 ‘구조적 정화’의 관점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시각들보다 설득력이 있는 해석은 카타르시스를 ‘지적 정화’로 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무엇보다《시학》자체가 비극을 일종의 ‘모사’로 보면서 그 궁극적 목적을 배움의 경험에서 찾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즉, 비극은 인간의 실존 속에 감추어진 연민과 두려움의 현상과 관련하여 청중들에게 납득될 만한 상쾌한 해명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카타르시스란 비극이 전개됨에 따라 그 어떤 도덕적 판단에 앞서 복잡하고 섬세한 삶의 한 비극적 단면을 지적으로 명쾌하게 설명하는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때 연민과 두려움은 정화에 이르게 하는 단순한 수단이나 촉매제가 아니라 실질적 대상이 되는 셈이다.
후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관에 비추어 고금의 비극문학을 해석하는 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지적되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악의 본질 문제를 제기하고 또 이와 관련된 인간 동기의 모호함에 집착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비극문학은 등장인물의 행태를 통하여 도덕적 모호성을 야기하고 다양한 갈등의 정황을 유발하기 일쑤다. 그것은 수평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자기 성찰적 교훈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이에 대한 인간의 힘이 지닌 한계를 주목하게 만든다. 이는 결국 수직적인 차원에서 인간 삶의 극단적 정황과 마주서게 함으로써 초월적인 것을 향한 갈망, 즉 구원을 추구하는 경향을 낳는다. 그러나 숱한 헬라의 비극문학이 증명하듯, 초월자로서 신의 위상은 대체로 이야기의 극적인 전개를 위해 고안된 ‘기계 장치’(deus ex machina)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다시 말해, 비극은 신을 말하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간의 주체적 신앙의 대상으로 떠올릴 뿐, 이로써 이야기 구도 전체를 압도하지 않는다.
고대의 비극이 교훈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도덕적 삶을 고양하는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개인이 몸담고 살아가는 당시 사회의 실상을 드러내고 그 이상적 모델을 향한 열망을 주입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비극에서 종종 등장하는 합창단이다. 그 합창단은 일반적으로 주역을 맡은 인물이나 신적 존재와 별도로 평범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여 그들의 합창 대사는 평범한 청중들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이야기 전개의 접촉점을 제공하거나 중재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 가운데 해당 비극이 제공하는 주된 논점에 대한 청중들의 이해 수준도 심화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비극의 교훈이 모든 인간의 문제를 속 시원히 해결해주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비극은 삶의 다양한 경험을 다루되, 특히 악의 근원과 고난의 의미를 탐색하는 질문들을 꾸준히 제기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확실한 대답 대신에 그것을 청중과 함께 발견하는 과정으로 점철된다. 이는 비극이 그 서사 전개에 신화적 요소를 도입하면서도 지상의 인간적 경험을 무시하지 않는 증거로 보인다. 우리가 일상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듯, 특정한 개인의 삶 자체가 절대적 선이며 절대적 악일 수는 없다. 오히려 선 가운데서 악을 보며 악을 통해 선에 이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한 시시비비도 상황과 맥락에 따라 그 경계가 흐려지는 것이 현실에 가깝다.
이에 따라 비극은 추구하고 탐색하는 대상이 선이든 진리이든 정의이든, 그것에 다다르는 과정을 중시하지 그 결과나 이를 판별하는 교조적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다. 비극의 결말이 폐쇄적인 모범답안으로 귀착되지 않고 개방된 상상으로 연계되는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따라서 비극의 대단원을 ‘불행한 종결’(unhappy ending)이라 부르거나 그 역으로 ‘행복한 결말’(happy ending)이라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 앞서 제시한 비극의 특징을 염두에 둘 때 오히려 우리는 비극의 말미부를 ‘개방된 결말’(open-ending)이라 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도 그럴 것이 비극의 영웅들이 끊임없는 재난의 수렁에 직면할지라도 그 의연한 부대낌을 통해 어둠과 맞서 싸우는 한, 그 어둠은 또다른 새벽의 전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설사 그 어둠이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라 하더라도 그 의연한 죽음과의 부대낌이 풍기는 희망의 전조마저 부인할 수 없는 법이다. 그와 같은 인간의 비극적 초상이 카타르시스를 통해 청중들과 공감대를 형성한다면 또다른 영웅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미완의 결론은 도리어 생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진리를 향한 싸움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배경적 장치로 기능한다. 이미 모든 이들에게 모든 문제가 송두리째 해결된 마당에 아무런 인간의 노력이 필요 없게 될 터이고, 비극 또한 그 존재 가치를 상실케 될 터이기 때문이다.
수난사화의 장르 문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록한 복음서의 후미부를 우리는 통칭 ‘수난사화’(passion narrative)라 한다. 4복음서의 기록에 두루 나오는 이 부분은 그 사건의 순서와 내용에 있어 대체로 일치하기 때문에 양식비평적인 견지에서 비교적 일찍이 전승되어 복음서 자료로 편입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아마도 이 기록은 그것을 전승한 신앙공동체의 예전적 필요에 의해, 또 예수의 죽음을 구원론적 견지에서 신학화하려는 변증적 목적으로 인해 예수와 관련된 가장 민감하고 긴요한 자료로 유통되었을 것이다. 이는 복음서보다 먼저 씌어진 바울 서신이 예수의 생애와 행적보다 죽음에 압도적인 집중을 보이고 있는 사실에서도 넉넉히 증명된다.
수난사화에 대한 그간의 학문적인 논의는 여러 각도에서 이루어져왔다. 그 중 가장 빈번한 논제가 된 것은 마가복음의 수난사화가 가장 오래 묵은 것이라는 전제하에 그 이전 단계의 수난사화(pre-Markan passion narrative)가 존재했었는지, 그렇다면 그 구성 내용은 어떠했는지, 또 복음서 내에서 수난사화의 출발점을 어디서부터 잡아야 하는지에 관한 것들이다. 더불어 종종 토론되는 것이 이 글의 흐름과 밀접히 관련되는 수난사화의 문학적 장르 규정의 문제이다.
수난사화의 문학적 양식 내지 장르에 관하여 가장 통상적인 규정은 이른바 양식비평가들에 의해 제기된 ‘수난사화’라는 명명 그 자체이다. 이러한 장르 규정에는 예수의 수난 이야기가 그 주인공의 독특한 역사적 위상을 고려할 때, 또 그 수난의 유별난 신학적 의미에 비추어, 전무후무한 양식적 특징을 지닌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는 복음서의 문학적 양식이 기존의 어떤 문학 양식과도 다른, 전혀 새로운 양식이라는 확신하에 ‘복음서’(euangelion)라고 동어반복적으로 규정하는 것과 비슷한 전제다. 이 전제는 일견 타당한 전제이지만 수난사화의 양식을 다른 관련 문헌들과 구조적으로 비교 검토하고 이로써 그 문학적 위상을 열린 문화사적 맥락에서 평가하는 작업을 훼방한다. 그러므로 수난사화의 양식을 보편적 문학 장르의 범주에서 재정의하는 시도가 후속 연구 과제로 남겨지게 된 것은 필연적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유대교 문헌에 나오는 ‘핍박과 신원의 이야기들’(stories of persecution and vindication)을 수난사화의 장르 모델로 설정하는 시도가 제기된 바 있다. 예컨대 창세기 37장 이하의 요셉 이야기들, 아히칼(Ahikar) 이야기, 에스더, 다니엘 3, 6장, 수잔나 이야기, 솔로몬의 지혜서 2, 4-5장, 마카베오2서 7장, 마카베오3서 등이 그 범주에서 다루어질 만한 자료들이다. 이 문학 장르를 이루는 세부적 구성요소로 거론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도입(introduction); 자극적 발단(provocation); 적대자의 음모(conspiracy); 주인공의 결단(decision); 신뢰(trust); 순종(obedience); 적대자의 고발(accusation); 재판(trial); 정죄(condemnation); 주인공의 항의(protest); 기도(prayer); 주변의 후원(assistance); 가혹한 시련(ordeal); 다양한 대중들의 반응(reactions); 주인공의 구원(rescue); 신원(vindication); 칭송(exaltation); 인증(investiture); 환호(acclamation); 적대자의 반응(reactions); 적대자를 향한 징벌(punishment). 마가복음의 수난사화 역시 이러한 구성요소들을 골고루 공유하는 특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특수한 문학 장르에 배타적으로 적용되기보다 웬만한 서사담론이라면 으레 등장하는 것들로서 예의 입론이 설득력을 발휘하기 위한 조건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은 더구나 그 서사적 초점이 예수가 의인으로서 받는 핍박과 그 신원에 있지 않다. 오히려 화자의 시선은 예수가 당한 수난의 구원론적 의미와 죽음을 통한 예언의 성취에 집중되어 있다. 예수가 받은 궁극적 신원이라면 필시 그의 부활이 될 터인데 이 후속 이야기는 수난사화와는 별도로 취급해야 할 또다른 항목인 것이다. 이처럼 예수의 수난과 죽음 이야기는 단순한 핍박 이야기라고 보기 어렵고 후대에 흥행한 순교담과도 차별화되어야 한다.
그 대안으로 헬라문화적 맥락에서 한 영웅의 일생 가운데 마지막 나날들을 죽음에 이르는 과정으로 묘사한 ‘최후담’(teleute, 라틴어로는 exitus illustrium virorum)을 수난사화의 보편적 장르 범주로 채택한 경우가 있다. 가령, 헤로도투스, 투키디데스, 타키투스 등의 역사서나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에 나오는 전기적 기록을 보면 유명한 인물들이 죽음에 임해 보여준 에피소드들을 빠트리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고전적 위상을 차지하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얽힌 다양한 일화들이다. 그것은 당시의 지식인을 자처한다면 자신의 고귀한 죽음을 위해 누구라도 참고해야 할, 당당하게 죽음에 이르는 방식의 전형이었던 셈이다. 소크라테스의 경우에서 보듯, 영웅의 죽음은 용감무쌍하게 죽음과 대결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며 고통과 슬픔 따위의 감정은 짐짓 억제되어야 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 가운데 표출된 철학적 이상은 대개 죽음을 초극의 대상으로 여겨 그 비극적 현실을 무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귀한 죽음의 이상을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적용해볼 때 예수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란 견지에서 한편으로 수긍되는 점도 없지 않다. 가령 예수가 겪은 수욕과 불명예의 상징이었던 십자가 처형을 고귀한 의미를 지닌 구원론적 사건으로 읽고자 한 화자의 의도가 역력하다. 그러므로 ‘최후담’(teleute)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수난사화도 분명 예수의 최후를 고상하게 포장한 점을 극구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범주는 그 고상한 최후의 이면에 담긴 생동하는 인물 예수의 비극적 체험을 사장시킬 우려가 있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고상한 최후담으로 규정된다면 그것은 그의 죽음이 대속적인 가치를 지니고 성경대로 이루어진 예언의 성취라는 데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죽음 앞에서 고뇌하는 생동하는 주인공 예수의 비극적 초상은 놓치고 만다. 수난사화의 문학적 양식을 논함에 있어 그 외형적인 골격뿐 아니라 그 주인공의 구체적인 행태와 그 범례적 의의를 간과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수난사화가 그저 한 위대한 영웅의 고귀한 죽음 이야기였다면 굳이 예수의 절망적 탄식과 슬픔, 두려움, 고뇌를 그토록 사실적으로 까발릴 필요가 없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소크라테스 류의 최후담과 예수의 최후담은 의미론적으로뿐 아니라 양식사적으로도 갈린다. 이 대목에서 나는 고대의 비극문학을 수난사화의 장르를 밝히는 또 다른 해석적 틀로 삼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수난사화의 비극문학적 위상
단적으로 말해 수난사화를 고전적 비극문학과 수평적인 차원에서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문학관에 비추어 보더라도 수난사화가 비극의 범주에 포함되기에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그것은 복음서의 일부를 이루는 수난사화가 ‘이야기’(narrative)의 형식으로 되어 있지 ‘극’(drama)의 틀을 차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헬라의 비극문학이 추구하는 대중성과 교훈성을 복음서, 그것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운명을 걸고 매달린 예수 수난의 구원사적 교훈과 포개어 해석하는 것도 지나치다면 지나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도식적인 일치를 추구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작품들은 모두가 제각각의 개성을 내세워 천태만상의 차별적인 양식으로 자리매김될 것이다. 이를 감안하여 양식사적 소통의 질서에 초점을 맞출 때 유사한 점도 주목에 값하는 측면이 있다. 가령 플롯과 이야기 전개의 구조가 비극문학과 유사한 패턴을 취한다는 점에서 마가복음 전체를 고전적 헬라 ‘비극’의 테두리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간간이 제기되어왔다. 특히 마가복음서가 공중 모임의 자리에서 낭송되었으리라는 극적인 연출의 가능성까지 점쳐짐에 따라 그 상호 비교의 효용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복음서 가운데서도 특히 수난사화가 비극적 분위기를 한층 고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최초의 복음서로 알려지는 마가복음에서 수난사화 앞부분이 수난사화의 확대된 서문이라는 위든(T. J. Weeden)의 주장이 다소 과장된 것이라 하더라도 복음서의 줄거리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수난사화의 양식을 비극문학과 비교할 때 무엇보다 앞서 떠오르는 것은 예수가 겪은 인간적 고난의 비극적 면모이다.
비록 마가복음의 저자가 신학적인 견지에서 그 고난의 가치를 숭고한 것으로 드높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고난에 내재한 참담한 비극적 현실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죽음을 향한 고난의 과정은 너무나 억울하고 처연한 것이어서 독자들의 연민을 자아내기에 족하다. 더구나 박해에 처한 그리스도인 독자들이 그와 유사한 고난의 길을 감내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인간적 두려움의 정서 유발 또한 기정 사실로 비친다. 어디 그리스도인들 뿐이랴! 예수가 겟세마네에서 보여준 죽음 앞에 선 자로서의 공포, 고뇌, 절망적 슬픔(막 14:33-34)은 영웅의 호쾌한 제스처에 미치지 못하지만 반대로 지극히 저열한 인간의 남루한 초상도 아니다. 그것은 평범한 인간이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과 맞서 싸우며 비범한 초극에의 의지를 보여주는 고전적 비극의 세계와 통한다.
죽음을 대면하는 과정에서 예수가 보인 일시적 화해와 수용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죽음 직전 그의 마지막 탄식-“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은 끝까지 삶에의 애착을 포기하지 않았던 인간의 비극적 초상을 그려준다. 이 경우 엿보이는 신으로부터의 유기(遺棄)라는 주제는 신이 정한 운명과 한 인간이 스스로 걷고자 하는 여정 사이에 필연적 갈등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비극적이다. 더구나 마가복음의 신학적 관점을 투사해볼 때 예수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막 15:39)이 아니었던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그 어떤 훗날의 보상으로도 정당화하기 어려운 비극적 현실 자체이다. 그것이 수직적 차원의 비극이라면 그 과정에서 양념으로 등장하는 음모와 배신(그것도 측근들의 통렬한 부인과 변절), 적대자들과의 정치적 갈등은 수평적 차원의 비극을 표상하는 모티프로 읽힌다. 이는 모두 예수가 처한 비극적 현실의 농도를 더하는 데 기여한다. 특히, 베드로의 경우 닭의 울음이 표상하는 뼈아픈 후회와 절망의 분위기는 예수를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존재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기에 그는 측근으로 여긴 세 명의 제자조차 그의 기도 싸움에 동참하지 못한 상태에서 철저히 혼자로 남아 있지 않았던가(막 14:37).
그것까지는 견딜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의 고독과 절망을 극단으로 몰고간 가장 문제적인 대목은 하나님의 일관된 침묵이다. 이는 신학적으로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의 문제를 제기하거니와 마가복음의 서사적 흐름 가운데서 보더라도 매우 의아스런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예수가 세례 받는 장면에서 하나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는 하늘의 소리로 응답한 적이 있다. 나아가 변화산에서도 구름 속의 소리를 통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제자들)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아들을 향한 부친의 애정어린 관심이 확인된 바 있다. 그런데 겟세마네에서는 그 절박한 간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침묵의 저편에 숨어 미동도 않으신다. 그 하나님의 침묵을 모방이라도 하듯 예수는 대제사장의 추궁에 대해 침묵함으로써(막 14:61) 그에게 부여된 운명의 비극적 정조를 한층 더해준다.
예수의 절박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을 갑갑하게 여긴 누가복음의 한 후대 편자는 천사의 수종 장면을 억지로 삽입함으로써 하나님의 간접적 개입을 증명하려 했다(눅 22:43). 또 중세 때 나온 겟세마네 기도 그림들은 기도하는 예수 머리 위에 손가락이나 말씀의 두루마기, 성찬용 빵과 잔을 그려둠으로써 예수의 고독을 달래고 있다. 이 모든 노력들은 그 극진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예수 수난의 비극성을 피상적으로, 그러니까 필경 부정적 시각 일변도로 이해한 결과로 보인다. 그러므로 신의 침묵이란 수난사화의 소재는 비록 고전비극의 경우처럼 ‘기계장치적 신’이라는 이미지를 뒤집어씌우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할 듯하다. 하지만 적어도 표출된 서사 구도상으로 볼 때 그러한 신의 이미지는 분명 잔혹하고 소극적인 면이 없지 않다.
‘고상하고 온전한 행동의 모사’라는 비극문학의 정의에 비추어 수난사화의 원형은, 고상하지 못한 수난과 죽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적 열망의 비극성을 고양한 공로가 있다. 예수가 죽은 십자가가 수치와 고귀함의 표상으로 동시에 떠오르는 것은 그 비극의 역설적 풍경이다. 또한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내면화하고 의미화하는 과정에서 그 극한점을 향해 끝까지 내려갔다는 점에서 그가 취한 자세는 온전하고 완결된 구도를 취한다. 예수가 겪은 수난의 체험이 이후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예전적으로 재현되고 그 과정에서 그 수난의 본질은 추체험의 채널로 전승되기에 이른 것이다.
수난사화가 이처럼 비극의 형식을 띤다고 할 때 그 이면에 담긴 신앙공동체의 삶의 정황이란 견지에서 그 형식이 또다른 모방과 추종을 불러일으키는 고난 대응의 정석으로 작용한 측면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로써 모사의 모사를 통한 카타르시스의 창출이 가능했으리라 여겨진다. 다시 말해, 예수의 수난에 대한 비극적 형상화가 당시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현재 독자들이 나름의 고난과 대결하고 그 영적, 신학적 의미를 지적으로 소화하는 차원에서 전형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으리라는 것이다. 그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문학관에 기대어 ‘카타르시스’의 한 경지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비단 저러한 내용상의 유사점 이외에도, 수난사화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비극문학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 먼저 고전 비극에서 메시지 전달의 중요한 창구가 되는 합창단의 역할을 떠맡은 주변인의 독백 또는 함축적 제스처가 눈에 띈다.
이에 대한 예증으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 겟세마네에서 벗은 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예수를 체포한 무리들에게 발각되자 그 홑이불을 버리고 발가벗은 채 도망친 한 익명의 젊은 청년이다(막 14:51-52). 그는 예수를 버리고 도망한 그 제자들의 황망한 심사를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더구나 그가 벗은 몸으로 엉겁결에 도망친 모습은 예수의 수난을 철저히 그만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희극적 비극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이로써 제시되는 비판적 메시지는 자기 코가 석자인 터에 아무도 남의 불운에 끼여들어 해를 당하고 싶어하지 않는 투철한 이기심과, 제자들의 잠으로 표상된 인간적 연약함에 대한 고발이다.
이렇듯, 관중들은 십자가상의 예수를 조롱하는 목소리로 고난의 현실을 승화하려는 신실한 독자의 의도에 찬물을 껴얹기도 하고, 한 사람의 구원을 담보로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추구하는 시도의 논리적 부당성을 따지기도 한다(막 15:29-32). 또 즉흥적으로 개입하여 예수의 절규에 이런 저런 토를 달며 그 수난의 후일담을 소문으로 양산시키는 무리도 둥장한다(막 15:35-36). 그런가하면 신실한 고백적 어조로 그의 죽음과 연루된 징조를 성스럽게 해석하여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목소리도 빠지지 않는다(막 15:39).
실제로 헬라의 대표적 비극작가인 아이스킬로스(Aeschylus), 소포클레스(Sophocles), 유리피데스(Euripides)의 작품들과 수난사화를 비교해보면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은 주인공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애끓는 듯 내뱉는 ‘절규조의 기도’(ejaculatory prayer)와 절망적 탄식이다. 그 기도에는 신이 정한 운명과의 대결의식과 더불어 임박한 죽음에 대한 자의식이 강렬하게 배어 있다.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와 십자가상의 자포자기적 영탄에 나오는 반복적 호소와 간구도 헬라 비극의 특징적 요소에 속한다.
신의 호칭을 재삼 연거푸 부르고 동일한 간구를 되풀이하는 것은 주인공이 처한 현재 공포와 슬픔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식으로 신의 뜻을 확인하려는 필사적 안간힘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운명을 가르는 극적인 위기의 시점으로서 특정한 ‘때’ 또는 ‘시간’이 강조되는 것도 양자간 유사한 점으로 보인다. 그 ‘때’인즉 물론 별 수 없이 죽어야 할 때이겠지만 동시에 그 운명을 통과하는 주인공의 결단과 수용의 때이며 클라이맥스에 해당되는 서사 구도상의 때이기도 하다.
예수 수난의 대물림, 그 희극적 풍경
누구라도 인정하듯 예수는 임박한 죽음의 현실과 진지하게 싸우면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운명했다. 그 죽음과 죽임의 과정은 예수의 치열한 대결의식이 있었기에 빛을 발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예수의 그 비극적 수난의 발자취를 뒤따르려는 제자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가령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자세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우려는 신념을 불태웠다(빌 1:21).
한편 순교담의 한 전범(典範)을 이루는 ‘폴리캅의 순교 이야기’(Martyrdom of Polycarp)를 보면 예수의 수난과 죽음은 서서히 그 비극적 가치가 탈각되면서 마냥 영광스런 장식적 제스처로 전락되어간 듯하다. 죽어가면서 남긴 기도에서 폴리캅은 겟세마네의 예수가 ‘치워달라’고 청원한 그 죽음의 잔을 영광의 잔으로 치환하여 자신의 죽음을 기꺼이 환영한다. 마치 그 영광된 죽음의 순간을 위해 살아온 것인 양, 그는 어떤 긴장과 내적 갈등의 심사를 드러내지 않는다. 교리적 정석대로 포장된 그의 기도 문구는 그 조리있는 구성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수사적이어서 인간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 신실한 영혼의 의탁에도 불구하고 이 기도에는 고통과 절망, 공포와 비애의 실존을 찾아볼 수 없다. 하여 이런 식의 달관어린 죽음 앞의 제스처는 바울에게 겨우 남아 있던 비극의 불씨, 그러니까 삶과 죽음 사이에 끼여 괴로워하는(빌 1:23) 인간적 고뇌조차 사장된 느낌을 준다. 이는 오히려 소크라테스가 죽음의 순간을 대면하며 보여준 당당한 초극 의지를 연상시켜주지만 사실 소크라테스에게도 그 최후의 순간 슬픔과 눈물은 있었다. 다만 그에게는 절제가 돋보였을 뿐이다.
이러한 순교적 죽음 이해의 담론을 통해 우리가 역사 속에서 보는 것은 조변석개식 강변에 목을 맨 수많은 순진한 생명들의 죽음, 그 희생의 파노라마이다. 그 와중에 시대적 분위기에 휩쓸려 얼떨결에 죽은 이들이 왜 없었겠는가. 교권주의적 강압에 눌려, 실제로는 살고 싶었지만 말 한마디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죽은 자들은 또 왜 없었겠는가. 가까이 우리 나라 교회사를 보더라도 조선후기의 주자성리학적 치세 이념에 천주교가 이단으로 매도되면서 순교는 차라리 고생스런 이 땅의 삶을 벗어나는 달콤한 도피처로 용인된 경향이 없지 않다.
나는 설사 지난 역사의 순교가 과잉 조장된 흔적이 있다손 치더라도 예수 천당!을 외치며 죽어간 그들의 내면적 진실을 놓고 왈가왈부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기본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문제시하고 싶은 것은 거기에 과연 예수의 수난담이 보여주는 치열한 비극적 풍경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하여 생명을 지닌 고귀한 존재로서 일관되게 자기의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가운데 죽음이 과연 지금 내게 내린 신의 최후 판결인지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그 의미를 따지려는 실존적 투쟁이 존재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노력이 없다면 그 누구의 죽음도 주체적이지 못하고 자율적으로, 잘 죽기 어렵다는 게 내 판단이다. 그것은 마치 벼락 맞아 순식간 즉사하듯 고작 죽음에 엉겁결에 치이거나 하나님이 정했으리라 여겨지는 운명의 즉흥적 판단에 맹목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특정 시점에 닥치는 특정 개인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결국 이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불가피한 실존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죽기 전에 누가 알랴!(죽고 나서도 그 판단의 때는 항상 너무 늦게 오는 것이니, 오, 이 불가해한 아이러니여!). 그러니 나는 삶의 문제든 죽음의 문제든, 신실한 자라면 누구나 끊임없이 하나님의 그 신성한 뜻을 자신의 뜻에 비추어 분별하며 조율해야 하는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시대에 여전히 난무하는 고난과 희생의 신학을 나는 의혹어린 눈초리로 직시한다. 이에 관한 여러 주장에 담긴 원론적 차원의 숭고한 뜻을 내 또한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저변에 담긴 의도가 좀 수상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수난이 그 수난 없음을 목표로 온몸으로 생명을 향한 열정을 불태운 것일진대 체제유지나 자기봉사적 의도로 유포되는 희생과 고난의 담론들엔 어쩐지 불온한 죽음의 그림자가 넘실댄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신학적으로 정당하다면 그것은 이 시대에 여전히 불의의 족쇄에 채여 고난 당하며 신음하는 무리들을 하나님이 외면치 않는다는 뜻 이외에 무엇이랴.
그러나 그 고난이 예수 수난의 모사라는 명분으로 미화되거나 신학적 명상의 대상으로 조장되어서는 안된다. 고난과 죽음은 선동용 구호를 위한 필요조건이 아니라 불가피한 실존의 늪으로 누구나 싸워 극복해야 할 보편적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 치열한 싸움의 현장에서 형상화되는 비극은 단순히 분위기 삼아 변죽을 울리는 장식이나 인습적 제스처로 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신앙의 이름으로 생명을 가벼이 여기거나 죽음을 이용하여 협박하는 처사 또한 고귀한 비극적 죽음에 이르는 길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모두 예수 수난의 건강치 못한 대물림이 초래한 웃지 못할 희극적 풍경일 따름이다.
자신을 자학적으로 매질하면서 예수의 수난에 동참한다고 생각하는 중세적 발상은 이제 타파될 때도 되지 않았는가. 생명의 학대를 희생적 고난의 미명하에 신앙적으로, 또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체질도 개선할 시점에 이르지 않았는가. 예수의 희생만으로 이제 족하지 않은가.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누구의 수난과 죽음을 강요한 적이 없는가. 우리 가운데 여전히 하나님을 가학성 이상성격자로 몰아붙이는 병폐는 없는가. 그러한 예수 수난의 부정적 유산이 청산되지 않는다면, 무고한 생명들은 여전히 신앙의 이름으로, 그러나 가장 비신앙적으로 계속 죽어갈 것이다. 고양된 비극의 정서 속에 내 고난과 죽음의 의미가 극적으로 내면화되지 않을 때, 나는 본다, 내 죽음이 한 덩어리의 쓰레기로 내팽개쳐지는 쓰라린 현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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