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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인청년당원은 김구 일미가 계획한 흉폭행위실행의 역할을 감당하고 이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자이나 그 간부 중 이미 이덕주라 칭하는 서리균(徐利均)과 유진식이라 칭하는 유진만(兪鎭萬)은 황해도에서, 주천현朱天懸이라 칭하는 유상근과 최흥식은 대련에서, 또 송진표(宋鎭杓)라 칭하는 장현근(張鉉瑾)과 김덕근(金德根)은 당관에 체포당했음으로... 홍구공원폭탄사건의 하수인 윤봉길에 수교한 90불, 최흥식에게 지급한 580불전후 3회에 걸쳐, 유상근에 지급한 1,000불전후 2회, 이덕주에 지급한 120원, 유진만에 수교한 60불, 김긍호(金兢鎬)에 지급한 50불 합계 1,900불의 흉폭행위자금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는 직후 알 자료가 없어 명료하지 않으나 본년 3월 20일 불계에서 한인측 김구, 김철, 조소앙 등이 상의하고 중국측 광동파 호용청(胡用淸) 등과 더불어 중한민족항일대동맹(中韓民族抗日大同盟)을 조직한 사실에서 추찰하여 아마 우 동맹의 중국측 간부를 통해 혹은 광동파 내지 19로군 간부로부터 지출을 받은 것으로 사료된다.[58] | ” |
—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보고서 |
4월 24일과 28일 사이에 조선총독을 처단할 임무를 띄고 국내로 파견된 유진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59] 이후 이덕주도 해주에서 체포됨으로써 조선총독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1932년 5월에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軍務部長)에 임명되었다. 5월 일본의 만철(滿鐵) 사장 등 인사들이 국제연맹 대표단 방문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 김구는 한인애국단원 유상근(柳相根), 최흥식을 3월말과 4월 27일 각각 만주 다롄으로 파견하였다.
유상근은 상해를 출발하기 2~3일 전인 4월 25일 임시정부 청사가 위치해 있는 보경리 4호 문 앞에서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 의거에 사용한 것과 같은 모양의 수통형과 도시락 모양의 폭탄 2개를 받았다. 2개의 폭탄 중 도시락 형태의 폭탄은 김구에게 돌려주고 수통형 형태의 폭탄 1개를 받아 자신의 거주지인 살파새로 188호 3층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이 폭탄을 갖고 4월 27일 상해를 출발하여 5월 4일 대련에 도착하였다.[60] 유상근보다 한 달 먼저 배편으로 상해를 출발하여 대련에 도착해 있던 최흥식은 북대산통(北大山通) 5호 한인어부조합 내 김정순(金正順)의 집에서 거주하며, 대련의 상황을 알아보고 있었다. 최흥식은 상해를 출발할 때 김구에게 먼저 대련의 상황을 확인하고 폭탄이나 권총을 사용하여 본장번(本庄繁) 일본 관동군사령관, 내전강재(內田康哉) 남만철도 총재, 산강만지조(山岡萬之助) 관동청장관 등을 처단하라는 비밀지령을 받았다.[60]
5월 26일 오후 7시40분 리튼 단장이 이끄는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조사단이 다롄역에 도착할 때 유상근, 최흥식은 혼조 시게루(本庄繁) 일본 관동군 사령관 등에게 폭탄투척을 계획하였으나 의거를 며칠 앞두고 다롄 우체국을 통해 보낸 비밀 전문이 일본군 정보망에 걸려 유상근과 정보원 최흥식, 폭탄 운반책인 이성원ㆍ이성발 등이 모두 체포됐다.[56] 이봉창의 동경 일본궁성 폭탄투척사건과 윤봉길의 상하이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의 영향으로 중국 정부는 김구에게 생활비와 공작활동비를 제공해 주었다.[61]
5월 상해 각 신문에 상해폭탄 의거의 주모자가 김구 본인임을 발표하고 상하이에서 탈출했다. 그 뒤 임시정부, 상해에서 항주로 옮길 때 군무부장에 취임하였으나,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사퇴하였다. 이후 가흥·해염 등으로 피신하여 광동인 '장진구'(長震球, 張震球) 또는 '장진'(長震, 張震)으로 행세하며 숨어지냈다. 김구의 친할머니가 장씨(張氏)였기 때문에 성을 장씨로 바꾼 것이다. 가흥에서 김구는 주애보라는 처녀 뱃사공과 위장결혼하여 일경을 피해다녔는데, 김구는 주애보와 부부 비슷한 관계도 부지중에 생겼다고 회고하였다. 하련생의 소설 '선월'은 김구의 가흥에서의 도피생활을 소재로 삼았다.
한편 김구는 이때 주애보와의 관계를 회고하면서 ]두고두고 후회되는 것은 그때 그녀에게 여비로 겨우 100위안을 준 일이다. 그녀는 근 5년 동안 나를 광저우 사람인 줄 알고 섬겨왔고 나를 보살핀 공로가 적지 않았다. 당시 나는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노자 외에 돈을 넉넉하게 주지 못한 것을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62]'라고 하였다. 이후 김구의 후손들은 주애보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63]
한편 1930년대 초부터 임정 창립 초기의 멤버였으나 임정을 이탈, 어느정도 거리를 두던 옥관빈이 일부 독립운동가들을 비난, 조소하였다. 그리고 이는 그대로 김구의 귀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 | 인성학교에 돈을 준 옥관빈은 우리나라 신문을 이용하여 자기를 과대선전하고 독립운동가를 비방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한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 먹고 살 길도 없고 무식하여 내가 쌀가마나 나눠[64] 주고 돈 몇푼 던져주면 모두 내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를 했다.[65] | ” |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자랑과 허영을 못마땅하게 봤던 그는 독립운동한다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 먹고 살 길도 없고 무식하여 내가 쌀가마나 나눠[64] 주고 돈 몇푼 던져주면 모두 내 밑에 와서 아부나 할 사람들이라고 멸시했다.[65] 이는 그대로 김구나 임시정부, 의열단, 아나키스트들의 귀에도 그대로 들어갔다. 임정에서 탈퇴한 뒤로 옥관빈은 흥사단 활동 등 일부를 빼고는 독립운동에 소극적이었고 때로는 일본 기업인들과도 교류를 했다. 더구나 옥관빈의 형 한명은 불조계에서 형사로 취직하기도 했다. 옥관빈은 독립운동 대열에서 이탈한 대신 공장을 운영하며 매상을 올려 부자가 되었다.
옥관빈은 상하이에서 유명 인사로 알려져 있었다. 더욱이 수백 명의 제약회사 노동자를 거느리고 있고, 많은 돈을 써서 신문사를 포섭하여 상하이의 고급 관리는 물론 재계와 종교단체까지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65] 호화스러운 저택과 고급 승용차에 거만한 언동 등 그의 위세는 너무나 당당했다.[65]
어느 날 이를 보다못한 김구가 정화암을 찾아갔다.[65] 김구는 즉석에서 정화암에게 옥관빈을 죽이자고 제의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한 그 언동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65] 정화암은 동의하였고, 백범하고 정화암과 안공근 셋이서 이야기를 했다.[65] 이어 옥관빈 암살을 지원하였다. 옥관빈은 그해 8월 1일 불조계에 살던 다른 흥사단원 이모의 처를 만나 몰래 간통하고 나오던 길에 남화한인동맹원 엄형순 등의 총격을 받고 절명했다.[66]
1933년 장쑤 성 자싱(가흥)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추격당하였다. 이때 현상금 60만원이 걸렸다. 그러나 상하이 법대총장 저보성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자싱으로 옮겼다. 1933년 5월 박찬익을 통해 장개석과 면담을 추진하였는데 중국 측에서는 진과부, 김구와 장개석의 면담을 주선하였다.[55] 5월 장개석과 만났으며, 면담에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훈련반 설치에 합의하여 한국인 92명을 입교시켜 훈련에 들어갔다. 이듬해 2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도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하였다. 4월, 강소성 가흥에서 어머니와 아들 김인, 김신을 다시 만났다. 1934년 12월 난징에서 중앙군관학교 소속 한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했다.[67] 의거와 피신 이후 한인애국단의 조직이 어렵게 되자 한인애국단은 자연스럽게 해체되고 한국특무대독립군으로 흡수, 개편된다.
1930년대 중반부터 중국 국민당 정권은 김구, 조소앙, 김규식, 김원봉 등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단체 통합을 주문한다. 그러나 의견의 대립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1935년 5월 임시정부 해산론이 나오자 김구는 임정 해산의 부당성을 지적한 임시의정원 제공 경고문을 발표했다. 7월 조소앙·김두봉 등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해체와 단일신당결성을 주장하여 한국독립당의 해체를 선언하였다.[68] 10월 김구는 가흥 남호의 선상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의원의 비상회의에서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에 선출되었다.[69] 김구는 남경중앙정부와의 관계와 명망으로 중국 국민당정부와 더욱 긴밀한 협조관계를 이루어 같이 항일운동에 힘쓰도록 협의하였다.[69]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엄항섭, 안공근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67] 그리고 김구는 곧 한국국민당이사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유명무실화된 임시정부에 대한 해산 주장이 일부 독립운동가들 중심으로 다시 제기되자, 김구는 이에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유지를 천명하였다. 임시정부의 유지를 주장한 김구 등은 1936년 10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김구는 임시정부를 강화할 것을 다짐하였다.[70] 8월 27일 환갑을 맞이하여 이순신의 陣中吟 [誓海魚龍動], [盟山艸木知]를 휘호로 썼다.
1937년 안공근을 상하이에 파견하여 안중근의 유족을 모셔오게 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 일로 김구는 종가부터 챙기는 것이 도리라며 안공근을 질타하였고,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71] 그 뒤 안공근은 김구의 대가족에서 이탈하였다. 1937년 김구는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정탐이 파악한 동향은 일본의 정보기관에 그대로 보고되었는데 당시 보고에 의하면 김구는 자신의 자동차를 갖고 있었으며, 김구는 국민당 정권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있었고, 김원봉은 장쉐량 일파에게 더 많은 자금을 받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72][73] 1937년 7월 10일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피서지이자 중국 고관들의 회의장소인 난징 서쪽의 루산(蘆山)에 초대되었다. 중화민국 정부측 대표자는 일본을 상대로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귀환하기 전 중국 정부 대표자로부터 사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았다.[74] 이후 김구는 한국독립당의 당의 무력조직인 한국독립당군의 조직을 준비하여, 1939년 1월 한국독립당군의 창설을 보게 된다.
안공근과 김구가 갈라선 이유에 대해 중일전쟁 이후 안공근이 자신의 큰형 안중근의 가족을 상해에서 탈출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널리 퍼져 있다.[75] 백범일지에 의하면, 1937년 10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공격해 오자,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을 제쳐두고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만을 모시고 난징으로 나왔다.[75] 당시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은 안공근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보다 곽낙원의 안위를 중시한 셈이었다.[44][76] 그런데 김구는 안중근의 부인과 가족들을 데려오지 못했다고 분개하였다. 이를 두고 사학자 오영섭은 이로 보아 안공근의 김구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44] 고 평가했다. 그러나 김구는 안중근의 가족을 데려오지 못했다며 안공근을 질타하고 꾸중하였다. 이후 김구는 다시 안공근에게 상해로 들어가 그의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을 모셔오도록 거듭 당부했으나, 안공근은 자기 가솔만을 데리고 나왔다.[44]
“ | 나는 안공근을 상해로 파견하자 자기 가솔과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그런데 안공근은 자기의 가속들만 거느리고 왔을 뿐 큰 형수를 데려오지 않았다. 나는 크게 꾸짖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공근은 자기 식구만 중경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 편입을 원치 않으므로 본인의 뜻에 맡겼다.[77][78] | ” |
— 백범일지 중에서 |
백범일지의 기록과는 달리 안공근은 '자기 식구만 충칭으로 이주하게 한 것'이 아니라 중일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에서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을 자신의 가족들보다 먼저 피신[44]'시켰다.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보다 곽낙원의 안위를 중시한 셈이었다.[44]
오영섭에 의하면 '안공근이 김구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고 김구로부터 신망을 잃었으며 그로 인해 김구의 단체에 편입되기를 원치 않았다고 하는 위의 기록을 입증할 만한 다른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79] 큰형의 가족을 데려오지 못하면 온갖 비난이 안공근 자신에게 쏟아질 것임을 누구보다 안공근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큰 형의 가족을 함께 피신시키지 못한 것은 이미 일제의 수중에 떨어진 상하이의 현지상황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79]'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명분과 도덕과 의리를 중시하는 김구는 그러한 상황을 고려치 않고 원칙론에 입각해서 안공근의 형수와 조카들을 데려오지 못한 일만을 일방적으로 꾸짖는 말을 '백범일지'에 남겼다.[79]
중일 전쟁 발발 직후 김구는 이승만, 미주국민회와 연락을 취했다. 1937년 8월 김구의 애국단, 이승만의 동지회, 로스앤젤레스에 본부를 돈 국민회, 그리고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대표 지청천) 등의 공동명의로 중일전쟁에 대한 한국 광복운동단체연합회 선언문을 발표했다.[80] 중일전쟁을 계기로 조소앙, 지청천이 김구를 지지하며 그와 제휴하였고, 미국에 있는 이승만 및 국민회와도 연대하게 되었다.[80]
1938년 5월 후난성 창사 남목청에서 지청천 등과 회합을 갖고 민족주의 진영 3당의 통합 문제로 논의하던중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다. 현익철(玄益哲)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유동렬, 지청천 등은 치료를 받아야 했다. 김구는 심장 옆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는데 의사들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절명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81] 타고난 체력으로 그는 과다출혈을 하고도 오래 버틸 수 있었다.
총격 직후 백범일지에 의하면 네시간 이상 방치되었다가 김구는 병원으로 실려가 입원시켰다. 병원에 가서 치료후 퇴원하였으나 이후 가슴에 남아있는 총알로 인해 움직임에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그의 글씨체는 떨려서 구부러진 글씨를 썼는데 이를 일명 총알체라 한다. 김구는 이운한의 공범으로 강창제(姜昌濟), 박창세(朴昌世)를 지목하였다.[81] 1938년이후 민족정당의 통합을 역설하였으나 민족혁명당 대부분은 1920년대 초반의 임시정부에 대한 창조론, 개조론, 임정고수론 논쟁 당시 개조파와 창조파에 참가하거나 기울었던 인사들이므로 유명무실해진 임시정부를 무시하는 태도를 공공연히 취하였다. 그러나 김구 등 소수인사들은 임시정부가 3.1운동의 결정체이며 민족의 대표기관이므로 해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82] 한편 임시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진보적 민족주의자와 임정의 보수주의자들을 경멸하는 청년층의 비난도 받게 되었다.
1939년 1월 중화민국 정부의 허락을 얻어 한국독립당의 당군(黨軍)을 설립하였다. 한국독립당군은 뒤에 한국 광복군으로 개편된다. 1939년 4월 모친 곽낙원여사가 인후증(咽喉症)과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82세로 사망하였다. 아들이 일본군 타살사건으로 체포된 뒤에도 아들을 신뢰하였고, 아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뒤에도 늘 정신적으로 후원해주었다. 곽낙원은 사망하며 자신과 며느리의 유해를 반드시 고국으로 데려가라는 유언을 남겼고 김구는 노가산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가 광복뒤 서울로 운구, 이장하였다. 1939년말 충칭에서 김구는 각 단체의 통일을 추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김원봉, 김규식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단합하는 것을 반대한다[83]'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민족혁명당에서는 각 단체들의 연합단체 구성에는 찬동하지만 기왕의 조직을 해체하고 하나의 당을 만드는 데는 찬동할 수 없다[83] 고 하여 대동단합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1939년 김규식, 이상정 등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재선되었다.[84]
1940년 3월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이 병사하자 김구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주석(主席)에 선출되었다. 그해 승인거부되었던 구미외교위원부를 다시 승인하고 이승만을 구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했다. 9월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임되었고, 그해 9월에 중국 국민당 정부에 자금지원을 요청하여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군대인 대한민국 광복군을 조직하고,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 광복군 성립전례식을 개최하였다. 한국광복군은 1939년 1월에 결성한 한국독립당 당군을 확대 개편하고 한인 청년들을 추가로 모집하였다. 창설 초기의 인
그러나 중화민국 국가 주석 장제스는 광복군의 통수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 광복군은 중화민국군의 예하대로서 그 통수권은 중화민국 국민당군에 예속되었다. 4월 치장(朞江)에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이 통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여당으로서 (통합)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김구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68]
1940년 9월 김구는 중화민국 정부에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생활비 이상의 원조는 기대할 수 없으므로 미국에서 활동할 의향을 밝히고 중국정부에 여행증서를 발급해줄 것을 요구하였다.[83] 중국정부는 이곳에서 무엇인가 업적을 남기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충고하자 김구는 미국행을 단념하고 활동 계획서를 작성하여 중국정부에 제출하였다.[85]1940년 9월 워싱턴의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이승만을 임명하였다.[83] 이후 구미위교위원부위원장 이승만 등 재미인사들과 연락하여 미국 국방성과 접촉, 광복 직전에는 미군 특수사령부(OSS)와 합동 훈련으로 조선에 잠수함으로 광복군을 침투시킬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1941년 10월 반파쇼 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연안에서 개최된 동방각민족 반파쇼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대회의 명예주석단의 1인으로 선출되었다.[86]
1940년 민족혁명당 인사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41년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의 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그해 10월 임시정부의 승인에 관련된 문제로 중화민국 외교총장과 회동하였다. 그해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공표하는 한편, 12월 일본에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71] 1942년 2월에는 김성숙, 김원봉, 장건상 등 좌파[모호한 표현]들이 임시 의정원에 참여하였다. 5월에는 김원봉을 군무부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중국내 독립운동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분열된 이념 및 파벌 대립으로 인해 내부적 갈등이 많았다. 당시 임정 내부 좌·우파의 갈등은 1943년 민혁당측이 한독당의 김구(金九) 등 국무위원 5명을 암살제거하고 민혁당의 김원봉 등이 대신 입각(入閣)하겠다는 미수로 끝난 모의문서도 발견되었다.[87] 미국에 체류중인 이승만은 김구에게 항의하며, 이들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1943년 7월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과 회담하여 전후 한국독립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8월 민혁당과의 갈등으로 주석직 사임을 발표하였다가, 9월 다시 주석에 복직하였다.[71]1944년 4월 임시정부에서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의 권한을 강화하자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출되어 취임하였다. 8월 중화민국으로부터 한국 광복군 통수권을 되돌려 받았다. 8월 한국 광복군 통수부를 설치하고 통수부 주석에 취임하였다. 임시정부 주석 겸 광복군 통수부 주석으로 광복군의 통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이요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그는 광복군 통수부의 주석도 겸하여 당권, 정권, 군권을 모두 장악, 당·정·군의 삼위일체의 지도체제를 확입하고 광복군을 이끌며 그 확대, 발전을 도모하였다.[88] 9월 그는 중화민국 주석 장개석을 만나서 면담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였다.
그는 독자적으로라도 한국 광복군의 한반도 진주를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군사집단에 대한 관할, 감독, 지도권은 중화민국 정부에 있다는 국민당 정권의 경고로 실패하고 만다. 그는 미국에 체류중이던 이승만에게 수시로 연락하여 한국 광복군과 미국 육군, 공군과의 OSS 합동훈련 계획 진행 상황을 수시로 독촉하였다.
1945년 4월에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미육군 중국전구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같은해 초, 장남 김인(金仁)이 폐질환으로 중국 쓰촨 성에서 병사하였다. 7월 한국독립당 대표대회에서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재선출되었다. 8월 서안에 가서 미군 도노반 장군을 만나 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에 합의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8월 15일 섬서성에서 섬서성 주석 축소주(祝紹周)로부터 광복 소식을 접하였다. 외국의 힘으로 해방된 것을 통탄해하였다고 한다.
8월 18일 김구는 중경 임시정부로 귀환하였다.[89]1945년 9월 3일 김구는 임정 국무회의 명의로 발표된 ‘당면정책 14개조’를 발표하였다. 당면과제에 의하면 ‘임정 입국→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전국적 보통선거 실시→정식정부 수립’등 임시정부에서 정규 정부수립 방안을 제시하였다.[29] 김구는 임시정부 자격으로 귀국을 원하였으나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의 환국을 추진했으나 미군정은 정부자격의 귀국을 반대, 존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은 개인 자격의 환국을 주장하였다. 11월초 국민당의 송별식에 초대되었고, 중국공산당의 송별연에도 참석하였다. 11월 3일 상하이 비행장에 도착한 뒤 임시정부 환국 제1진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중국을 출국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귀국을 놓고 서로 먼저 가겠다고 하였으나 민족혁명당계 김원봉의 양보로 김구와 한국독립당 계열이 먼저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시 민족혁명당의 당수였던 김규식도 한국독립당계와 함께 귀국했다.
귀국 무렵 김구 일행은 미국 헌병의 보호를 받았으며 김구의 개인경호원들도 무기를 소지하도록 허용되었다.[90] 김구는 11월 3일 임시정부 1진으로 귀국, 상하이 비행장에서 중국 국민당 인사들의 환송을 받고 출발하였다.
<백범 김구의 상해 임시정부 활동>
* 1919년(44세) : 중국 상해로 출국. 임시정부 성립. 경무국장에 취임.(국무총리 및 초대 대통령 이승만 선임)
* 1927년(52세) : 국무위원에 선임됨.
* 1028년(53세) : ‘백범일지 상권’ 집필 시작, 이듬해 완료
* 1931년(56세) : 상해 거류민단 단장 겸임. 12월 한인애국단 조직, 단장에 취임. 이봉창과 거사 준비.
* 1932년 : 이봉창 의거. 윤봉길 상해 홍구공원 의거 배후조종.가흥 피신. 5월에 임시정부, 절강성 항주로 이전.
* 1933년(58세) : 남경에서 장개석 면담.
* 1933~1934년 : 남경으로 이주
* 1934년(59세) : 낙양군관학교 분교에 한국 군관 양성기관 설립
* 1935년(60세) : 임시정부, 진강으로 이전. 11월 항주에서 한국국민당 조직.
* 1936년(61세) : 임시정부, 남경으로 이전.
* 1937년(62세) : 8월 남경에서 광복전선 결성. 중일전쟁으로 임시정부, 호남성 장사로 이전.
* 1938년(63세) : 5월 장사의 남목청에서 3당 통합 논의 중 이운한에게 피습. 9월 남해현에 임정 사무실 설치. 11월경 중국정부 임시수도인 중경 도착. 임정과 대가족은 광서성 유주 도착.
* 1939년(64세) : 5월 임정과 대가족 기강 도착. 김약산과 민족주의 단일당 통일 선언.
* 1940년(65세) : 4월 3당 통일로 한국독립당 창설. 집행위원장 취임. 9월 광복군 성립. 임시정부 중경 이전. 9월 17일 광복군 총사령부 중경에 설치. 10월 임정 임시헌법에서 국무위원제가 주석제로 바뀌면서 초대 주석에 선출됨.
* 1942년(67세) : ‘백범일지 하권’ 집필.
* 1943년(68세) : 장준하 등 일제 학병 50여 명 임정으로 탈출.
* 1945년(70세) : 미군 측과 작전 협의 차 서안 행. 일본 항복 소식 듣고 11월 상해를 경유해 환국함.
* 1946년(71세) : 2월 비상국민회의 조직.
* 1947년(72세) : 1월 국민회의 부주석 취임.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 결의안 지지.
* 1948년(73세) : 4월 김규식과 함께 평양행. 남북협상을 마치고 조국통일에 관한 공동성명서 발표. 5월 귀환.
* 1949년(74세) : 6월 26일 낮 12시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 총에 맞고 운명.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 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