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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 하늘빛
- 청자의 빛을 찾아 떠난 목포 해양유물전시관
목포는 항구다
목포역에 왔다. 목포역은 호남선의 종착역이다. 내게 목포는 여전히 생소한 곳이다. 92년 여름 군대 가기 전 친구와 함께 제주도를 가기 위해 무궁화호를 타고 목포역에 내린 적이 있다. 저녁에 떠나는 제주행 배를 타기 전 유달산과 노적봉을 구경하고 온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목포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이난영이 노래한 ‘목포의 눈물’과 그의 노래 제목과 같은 ‘목포는 항구다’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식민의 한이 담긴 ‘목포의 눈물’에 위안을 받을 세대는 아니었고, 목포는 그저 떠나기 위해 들르는 곳이었다.
이제 목포역은 KTX의 종착역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영산강이 바다로 나아가듯 바다로 나아간다. 마침 대합실에는 청자 상감 매병 사진 하나가 크게 걸려 있었다. 태안반도 마도 앞바다에 난파되었다가 발견된 고려시대 곡물 운반선인 마도2호선에서 발견된 것이다. 관광안내소를 기웃거리니 역시 같은 사진이 1면을 장식한 목포 해양유물전시관 안내 리플릿이 보였다. 리플릿을 열고 청자 삼감 매병과 신안선 유물 사진을 보는 순간 미지의 물고기가 나를 툭 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확 끌렸다. 미지가 다시 숨 쉬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가봐야겠다. 가서 알아봐야겠다.
하지만 이제 내게 목포는 만나는 곳이다. 하늘과 바다와 육지가 만나고, 서해와 남해가 만나고, 영산강이 바다와 만난다. 쇄국정책을 폈던 조선의 작은 포구였던 목포는 1897년 개항과 더불어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근대와 만나고, 식민지 항구가 되었다. 그래서 일본식의 근대문화유산을 만나려면 일본의 식민지 전초 기지 역할을 했던 인천, 군산, 마산, 부산, 목포 같은 항구도시로 가야 한다. 옛 항구도시의 적산가옥과 관공서 건물들을 둘러보며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할까? 대못처럼 박힌 식민의 흔적을 상기할까 쇄국의 비극적 경험을 되새길까? 이난영의 부른 ‘목포의 눈물’은 이러한 상념을 부추기기에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나는 목포에 만나러 왔다. 어쩌면 화해하러 왔는지 모른다.
이런 상념을 던지며 찾기에 목포 해양유물전시관은 안성맞춤이다. 외부와의 교류에 소극적이었고 조선과는 달리 외부에 문호를 적극 개방했던 600년 전 고려의 해양교류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만남의 길목에 목포가 있기 때문이다. 우연인지 최근 BTS가 미국의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일이 벌어졌다. 문재인 정부의 중재로 북한과 미국이 싱가포르에서 정상회담을 하기로 했다. 어느 때보다도 우리는 소통과 관계가 만들어내는 평화의 시대를 지향하고 있다.
나는 박물관을 그렇게 만나러 간다. 박물관을 통해 과거를 만나고 지역을 만난다.
지역박물관을 찾다
성장한다는 것은 미지와 만나며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알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공부와 여행은 닮았다. 미지의 영역을 탐색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앎의 즐거움과 각성이 있다. 그 맛 때문에 공부와 여행을 놓지 못하는 것 같다.
김해박물관이나 나주박물관처럼 지역의 박물관들은 시간을 거슬러 가까이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미지의 세계다. 우리는 언제나 권력에 의해 중심과 주변의 차별을 내면화한 채 살아간다. 신라는 가야,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중심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당연하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같은 한반도에서 살았고 신라보다 앞선 문화를 이룩했던 가야, 백제, 고구려가 미지의 영역에 매몰되고 말았다. 가끔 나는 지역의 박물관에서 묻혀버린 역사를 재발견하는 경험을 한다. 하지만 이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중화주의를 내면화했던 조선시대와 일제의 식민경험을 통해 수백 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외시켜온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 군부지배의 개발독재를 통해 근대화되면서 우리는 자기 소외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런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우리사회에 근대화가 완결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시작된 1990년 대 이후이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경제 외의 문화적 영역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면서였다. 더 이상 삶의 의미를 경제적인 숫자에만 매달리지 않고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우리는 다양한 미지의 영역과 대면하기 시작했다. 그 중요한 한 가지 방법이 여행이었다.
미지는 외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내부의 식민지가 있는 것처럼 한반도 안에 내부의 외부들이 존재한다. 나는 지역의 박물관들에서 의외로 놀라운 역사를 재발견하곤 했다. 전혀 몰랐던 것들을 작은 박물관에서 만나기도 한다. 외국여행을 하며 외국 박물관을 둘러볼 때는 한국의 역사도 세계사의 관계 안에서 바라봐야 함을 느꼈다. 하지만 국내 박물관을 통해서는 우리 안에 잊혀진 수많은 가닥의 다른 역사가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국내의 박물관 여행도 또 다른 외부의 여행이 된다. 어느 것이나 이해를 위해서는 발품과 노력이 필요하다.
청자의 빛을 찾아
내 딴에는 남도에 와 비로소 청자의 빛을 이해하게 되었다. 강진은 청자의 고장이다. 곳곳에 재현한 청자 기념물들이 보인다. 학교에도 관공서에도 은행에도 거리에도. 하지만 내가 알던 한국의 맑은 가을하늘을 닮았다는 그 비취빛이 아니다. 칠량의 청자박물관에서도 실망을 하고 말았다. 청자 빛깔이 너무 이상화되었던 것일까? 아무리 봐도 청자는 가을하늘에 비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보다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청자에 새겨진 다양한 문양이었다. 강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모란, 국화, 연꽃, 갈대, 버드나무, 대나무, 물고기, 큰기러기, 백로, 나비 등이었다. 이곳에 살며 보아온 것들이 고려청자에 새겨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청자의 하늘빛은 어떨까? 청자의 그 나라 하늘빛은 사실 강진의 하늘빛 바다빛이 아닐까?
이즈음 이런 의심도 들었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제작했다고 자랑하는 것처럼,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일종의 편집증처럼 우리가 작은 부분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같았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니 세계 최고의 고려청자니 하는 말들은 섬 아닌 섬이 되어버린 반도 민족의 열등의식에서 나온 자기미화가 아닐까? 물론 금속활자도 훌륭하고 고려청자도 훌륭하다. 하지만 세계사적 관계와 영향을 무시한 채 세계 최초와 세계 최고를 말하기엔 우리 지식이 아직 너무 부족하다. 자신의 위치도 모르는 채 자랑하는 것이야말로 창피한 일이다. 알면 알수록 겸손해진다. 우리의 자부심이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래서 더 청자의 하늘빛이 우물 안 개구리의 자화자찬이 아니기를 바란다.
내가 강진에서 발견한 것은 신비한 하늘빛이 아니라 하늘과 바다에 가득 찬 넉넉한 하늘빛이었다. 남해와 서해는 펄과 섬이 발달해 있다. 나는 우리가 찬양하는 고려청자의 빛이 이러한 풍토를 반영한 빛깔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엔 갯벌과 더불어 흐릿한 회청의 하늘과 바다가 있다. 이것이 고려청자의 빛깔이다. 그리고 고려청자의 빛깔은 수많은 청자의 빛깔 중 하나다. 중국의 수많은 청자들처럼 고려청자도 그 지역의 풍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12~13세기는 고려청자의 전성기다. 이 시기 고려청자는 강진과 부안에서 집중적으로 생산되었다. 당시 청자의 주된 산지는 부안과 강진인데, 이미 188곳의 청자 가마터가 발견된 강진이야말로 단연 청자의 고향이 될 만하다. 왜냐면 수많은 명품들이 바로 강진의 가마터에서 구워진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려청자에 강진의 자연물들이 무늬로 새겨지고 강진의 하늘빛이 빛깔로 드리워진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것을 나는 머리가 아니라 눈과 발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강진의 대구면에 남아 있는 고려청자박물관은 비록 많은 수의 고려청자를 전시하고 있는 것으 아니다. 하지만 강진의 자연과 풍토가 어떻게 청자에 아로새겨졌는지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목포 해양유물전시관
목포 해양유물전시관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운영하고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1981년 신안선 보존처리를 위해 설치된 보존처리장에서 시작해 서남해안의 난파선들의 수중발굴 경험을 쌓아가며 한국 수중고고학의 수준을 높여오고 있다.
나 어릴 때만해도 가끔 뉴스를 통해 도굴꾼 이야기들이 보도되곤 했다. 신안 해저유물선 인양으로 사회가 떠들썩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곳은 멀고 먼 곳이기에 어떤 보물들인지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바다 밑에 가라앉았다가 600년 만에 떠오른 배의 이야기는 어린 아이에게 얼마나 먼 이야기인가? 그것의 실체를 이제야 만나러 가는 것이다.
해양유물전시관은 바다에 접해 있으며 전시관 밖에도 실물의 배들이 여기저기 전시되어 있다. 내가 눈여겨보았던 것은 1전시실인 고려선실과 2전시실인 신안선실이다.
1전시실
1전시실인 고려선실에서는 고려시대 서남해의 난파선들과 고려시대 성립된 해운 조창제도를 보여주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강의 수로와 바다의 해로를 이용해 전국 13곳의 조창을 세우고 각지의 산물을 수도인 개경으로 운반했다. 고려청자의 산지가 부안과 강진과 같은 해안에 위치했었던 이유도 육로보다 해로를 통해 산물을 이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펄과 섬이 발달하고 조석간만의 차가 심한 서남해의 바닷길에서 조운선의 난파를 피할 수는 없었다. 특히 태안반도의 서쪽 끝인 신지도와 마도 주변 해협인 ‘안흥량’은 울돌목, 손돌목, 인당수와 더불어 4대 험조처의 하나인 관장목의 입구였다. 이곳에서 인양된 태안선과 마도 1,2,3,4호선의 보물들은 수만 점의 청자와 각종 상품 그리고 목간을 통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조운제도와 상품, 생활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고려시대의 경제제도와 생활상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먹고, 상품을 어떤 식으로 유통시키고, 청자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했는지도 소상하게 알게 되었다.
당장 내가 목포역에서 본 상감청자 매병만 해도 청자와 함께 출토된 목간을 통해 그 안에 참기름을 가득 채운 채 개경의 고위직에 선물로 보낸 것이라는 사연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꽃병으로 알고 있었던 것들이 참기름이나 꿀을 가득 채워 사용하는 고급스런 진상품 용기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더불어 크고 작은 도기 항아리들이 상품을 담아 운반하는 용기로 사용되면서 어느 정도 규격화되어 사용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탐진(강진)이라는 생산지 표시가 된 청자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경로로 어떻게 소비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사실들을 만날 수 있다.
태안선은 1131년 강진에서 개경을 향해 고려청자 25,000여 점을 싣고 출항한 도자기 운반선이었다. 강진의 푸른 하늘빛을 가득 싣고 목포를 돌아 개경을 향해 떠났다. 청자의 대부분은 접시, 대접, 완이었고 청자유병, 청자합, 청자발우 등도 있었다. 이 중 두꺼비모양 벼루와 사자모양 향로와 같은 독특한 모양의 수준급 작품이 나오기도 했다. 태안선의 출항시기와 거기 실린 고려청자의 산지, 그리고 목적지를 알 수 있었던 이유는 청자꾸러미와 함께 발견된 20점의 목간 덕분이다. 목간은 지금의 택배 운송장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한 목간엔 이러한 기록이 있다.
‘耽津縣在京隊正仁守戶付砂器壹(裏)’
‘탐진현(강진)에서 개경에 있는 대정 인수 집에 붙임, 도자기 한 꾸러미.’
태안선이 도자기를 가득 실었다면, 마도 1호선은 벼, 조, 피, 메밀, 콩 같은 곡식을 가득 실은 운반선으로 해남, 나주, 장흥의 곡식을 개경으로 운반하던 도중에 침몰했다.
내 걸음을 멈추게 했던 상감청자 매병은 마도 2호선에서 발견되었다. 이 배도 마도 1호선과 같은 곡물운반선이었는데 청자매병 3점이 함께 실려 있었던 것이다. 특히 청자매병과 각각에 함께 묶여 있던 목간 두 점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중방 도장교 오문부 댁에 올림, 참기름을 단지에 채우고 봉함’
‘중방 도장교 오문부 댁에 올림, 좋은 꿀을 단지에 채우고 봉함’
이로서 그 동안 술을 담았을 거라는 매병의 용도 외에 꿀과 참기름 등을 담았던 용도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런 유물들을 보면 도굴꾼들에 의한 문화재 훼손이 얼마나 심각한지 실감하게 된다. 왜냐면 도굴꾼들은 값나가는 보물만을 가져가기 때문에 목간과 내용물 등 역사적 자료의 가치를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목간과 내용물이 함께 나온 청자매병이 그래서 더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삼강청자 매병은 내게 더 특별하다. 강진에서 생산된 상감청자 매병에 해남에서 생산된 참기름을 담았기 때문이다. 상감청자 매병의 빛깔과 무늬는 분명 강진의 풍토를 담고 있었다. 상감청자 매병의 빛깔은 강진의 하늘빛 물빛이고, 국화, 모란, 버드나무, 갈대, 대나무 등의 무늬는 강진의 자연물이었다. 고려청자에 담긴 사연을 읽으며 이 모든 것의 윤곽이 한꺼번에 파악하게 되는 것은 몹시 흥분되는 일이었다.
마도 3호선은 전남 여수 등 남부지역에서 출발해 당시 무신정권기 최고의 권력자 중 한 명인 김준과 그 측근과 관청에 보낸 곡물 외에 각종 진상품이 담겨 있었다. 개고기포, 전복, 홍합, 물고기 기름 등을 비롯해 각종 젓갈이 각종 도기항아리에 담겨 운반되었다. 총 45점의 크고 작은 항아리와 목간을 통해 도기항아리들이 상품의 용량과 규격에 맞게 제작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마도 4호선은 나주에서 광흥창으로 가는 조선시대 조운선으로 세금으로 낸 곡물과 분청사기가 실려 있었다.
복원된 고대 배를 통해 당시 선박의 특징과 규모 또한 알 수 있었다. 가장 큰 특징은 갯벌이 발달한 해안의 특징에 맞게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고, 중국배와는 달리 외판을 지탱하는 방식이 격벽이 아닌 가룡이라는 통나무를 사용한 점이었다. 나무못을 사용하는 등 순수 목재만으로 조립하여 해체와 재조립이 용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배의 경우 강과 근해를 항해하는 운반선이었기 때문에 규모가 클 수 없었다. 결국 고려와 조선시대 조운선 승선 인원은 10~20여명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전시실
이렇게 1전시실을 둘러보고 2전시실로 들어가자 우선 어마어마한 규모 차에 압도되고 말았다. 1전시실의 배가 국내용으로 근해를 항해하는 작은 운반선이었다면, 2전시실의 배는 국제적인 원양을 항해하는 거대 컨테이너선과 같았다. 규모에서 압도하고 양과 질에서 압도한다. 중세 해양실크로드의 거대한 모자이크에서 고려라는 한 조각이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조각이었다. 2전시실이 없었다면 해양유물전시관의 가치는 확 줄었을 것이다.
2전시실은 1976년 발굴이 시작되어 1984년까지 9년에 걸쳐서 발굴 조사한 신안선과 신안선의 유물들을 전시한 공간이다. 세계적 보물선이 신안선의 발굴과 함께 한국 수중고고학도 시작되었다. 그 시작은 참으로 황당하였다. 1975년 신안군 증도 앞바다에서 어부 최형근 씨의 그물에 청자꽃병을 비롯한 도자기 6점이 걸려 올라왔다. 하지만 그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고 마루 밑에서 방치되었다. 그것을 최 씨의 동생이 신안군청에 신고했지만 바다에서 값비싼 유물이 나올 리 없다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히려 보상금을 타려는 수작으로 치부했다고 한다. 이들이 중국의 청자로 밝혀진 것은 문화재관리국에 신고 된 후였다. 그 사이 ‘중도 앞바다에 보물선이 묻혀 있다’는 소문이 돌아 도굴범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전에도 어부들의 그물에 걸려 올라온 도자기들이 즐비했고 도자기의 가치를 몰랐던 어부들은 요강이나 개밥그릇으로 사용하거나 엿과 바꿔먹기도 했다고 한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잃어버린 유물들이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내 기억에도 어릴 적 신문이나 뉴스에서 신안선 도굴꾼 채포와 보물선 발굴 소식을 접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방문한 목포 해양유물전시관은 이렇게 발굴된 신안선의 보존처리를 위해 목포에 조그마하게 지어진 해저유물 보존처리소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로 발전하면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신안선은 1323년 당시 해양실크로드의 중심항구였던 중국 푸젠 성 취안저우 항에서 동남아시아에서 수입한 자단목과 약재, 향신료 등을 싣고 저장 성 닝보 항으로 출발한 뒤, 닝보 항에서 룽취안요와 징더전요 등 중국 각지에서 만든 도자기를 배에 가득 싣고 중국을 떠나 일본의 하카타 항과 교토를 목적지로 출항한 배였다. 최대 길이 34m, 최대 폭 11m, 100명 정도가 승선할 수 있는 200톤급 원나라 선박이었다. 도자기류가 23,502점이고, 동전이 28톤(약 8백만 개), 자단목 1,017점이 발견되었으니 규모와 내용면에서 엄청난 보물선이었다. 청자를 비롯한 각종 자기, 자단목, 약재, 향신료, 중국 돈, 금속, 석제, 유리, 식물, 문방구 등 각종 상품을 운반하는 거대한 무역선이었다.
고려청자 외에 중국의 각종 자기류를 대면하는 것은 일종의 문화충격이었다. 더불어 당시 중국의 자기가 세계 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한눈에 실감케 하는 것이었다. 비록 고려청자가 뛰어나긴 했지만 거대한 자기 시장의 일부에 불과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불어 일본의 해상무역이 얼마나 활발했고 그렇게 개방적이 됨으로써 일본이 점차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부강해질 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가 되며 우리가 일찍이 쇄국의 길을 걷게 된 데 반해 일본은 자의든 타의든 국제적 교류를 지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중세 해양실크로드도 유럽과 아라비아, 동남아, 중국을 잇는 세계 무역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어마어마한 교류사에 한 부분으로서 고려의 교류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영어 이름이 K0REA인 까닭도 바로 고려의 해외교류에 기인하지 않는가? 즉 남과의 교류를 통해 나의 정체성이 만들어졌던 셈이다.
나는 문화의 우열을 따지기보다 다양성에 집중하고 싶다. 내가 청자의 빛깔을 강진만의 하늘과 바다빛깔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중국의 각지에서 생산된 자기들이 저마다의 빛과 색과 무늬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 것만 제일 뛰어다단 말인가? 하나의 자기 척도로 본다면 말이 되겠지만 세상은 그런 게 아니다.
2전시실인 신안선실까지 봄으로써 비로소 전체의 큰 그림 안에 내가 서 있는 부분의 위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발견의 충격이었다. 웅장하다. 또 아름답다.
목포 해양유물전시관을 통해 나는 바다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목포는 떠나는 곳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와 새롭게 만나는 곳이었다.
여행의 목적
지식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생존을 위해서다. 하지만 우리가 생존을 위해서만 산다면 삶은 풍요로울 수 없다. 삶이라 한다면 생존의 차원을 넘어서 생명의 누림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아마 지식의 이차적 목적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의 확장은 만남과 교류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여행의 목적이 아닐까?
우리가 흔히 접하는 여행은 여유에서 나온다. 어느 정도는 생존의 문제를 해결한 상태에서 우리는 여행자의 마음을 느낀다. 그러나 여행이 여행다워지려면 보고 듣는 것에 의해 자극받고 새로워지고 넓어지는 것이 있어야 한다. 왜냐면 우리는 만나기 위해 떠나기 때문이다. 그래야 삶의 누림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