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는 위대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떠나는 여름휴가다. 아들이 결혼한 이듬 해, 백운계곡의 물놀이 이후 거의 육칠년 만이다. 그때 나는 물속에 사람이 많아 들어가지 않았는데 제들끼리 노는 것이 좀 부담스러웠던지 이후로는 나를 초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섭섭하다거나 노여워하지는 않았다. 분위기에 동조하지 못하는 나의 원죄도 있으려니 생각하고 그러려니 했다.
노심초사, 아들이 혼인하고 육 년 만에 손자가 태어났다. 부모가 된 본인들은 물론이고, 외가와 친가, 세 가정에 웃음꽃이 피었다. 아기는 각기 다른 행성을 운항하던 궤도를 한 곳으로 향하게 하는 이음의 힘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았다.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그 어렵다는 사돈댁을 드나들며 친분을 쌓았고, 이번 여름휴가에는 초대까지 받았다. 물론 손자를 돌보는 일이 팔 할 이지만,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어른대우를 받는 것도 좋지만 베푸는 재미는 더 뿌듯하다. 손자를 안고 있으면 작고 보드라운 살의 감촉이 포근하게 감겨오고, 품안에서 잠이 들면 세상의 어느 누가 온전히 제 전부를 내게 맡길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이른다. 정답고 아끼는 마음이 세상의 어떤 애정보다 따뜻하고 특별하다.
무창포 해수욕장, 조그만 풀장이 딸린 펜션에 여장을 풀었다. 서해바다와 초록 섬의 조망이 이글거리는 7월의 태양아래여서 더 시원하게 보였다. 요즘 들어 처음 보는 사물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해서인지 한참 바다를 보고 있는 아이를 안고 해변으로 향했다. 평일이어서일까, 뜨문뜨문 서너 명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을 뿐, 휴가철답지 않게 한산한데 밀려드는 파도소리가 사람들의 함성보다 오히려 요란하다.
아이를 내려놓기에는 물 부서지는 소리가 크고 너울도 약간 심한 편이다. 혹시나 싶어 가장자리에 살포시 내려놓는 시늉을 했더니 무서운 듯 내 옷가지를 잡은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다부지게 고쳐 안고 천천히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허리에 잠겼다 싶으면 가슴 높이에서 가슴쯤에서 멈추면 너울은 금방 어깨위로 빗금을 치며 일렁거렸다. 조손祖孫이 한창 파도타기에 재미를 붙일 즈음 백사장을 가로질러 아들부부가 튜브를 들고 오고 있다.
“어! 엄마가 물속에 있네!” “우리엄마 물속에 들어가 있는 거 처음 보는데?” 별일이란 듯 말끝에 억양을 실어 외쳤다. 삼십대 후반의 아들이 처음 본다는 나의 입수入水, 별일은 별일이다.
다섯 살, 여름날의 한 장면이 흑백 영상으로 이어진다. 부모님은 두 살 어린 남동생과 나를 여름휴가에 데리고 갔다. 포항 죽도 해수욕장이었다. 사람들이 많았고, 파라솔도 많았고, 모래사장 한쪽에 엎어 놓은 나무보트도 많았다. 처음 보는 모습들이라 신기했다. 보트 사이를 숨바꼭질 하듯 이리저리 다니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방송을 듣고 미아보호소로 찾아온 아버지는 지금의 내가 손자를 안 듯 나를 번쩍 안았다. 여름이 오면 우리 가족은 가끔 바다를 찾았지만 오랫동안 나의 피서지는 엄마 옆이었다.
지척에 바다를 품은 부산, 그곳 사람들의 혜택 중 하나는 쉽게 하는 해수욕일 것이다. 나는 다시 여름바다로 나섰다. 연일 따가운 햇볕과 친구들이 불러내는데 딱히 거절할 구실이 없어 마지못해 따라나선 길이었다. 어릴 때 다친 마음이 만만치 않았지만 내 몸에서는 이미 달이 뜨고 있었으니 이제 미아가 될 나이는 지났다. 라는 안심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광안 해수욕장의 여름은 늘 자글자글 끓는 느낌이었다. 햇볕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도 그랬지만, 물에서 머리만 내 놓은 모습이 냄비에서 끓어대는 기포 같아 보였다. 커다란 타이어 튜브는 친구 서 너 명이 매달려도 성글어서 근처에 있던 아이와 그 엄마까지 함께 어울렸다. 우리들의 물놀이는 잠시 평온했다.
어떤 아저씨가 다가왔다. 튜브 가장자리를 잡는 듯이 하다가 오히려 중앙으로 들어와 튜브를 확 뒤집어버렸다. 허우적이며 일어서려는데 누군가의 손이 내 머리를 눌렀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다시 물속으로 꼬꾸라졌다. 그때 딱딱한 무언가가 내속으로 쑥 들어왔다. 손가락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난 순간에도 수치스러움에 말을 못하고 속만 끙끙 앓았다. 왜 하필 나였을까. 혹시 다른 친구들도 당한 것일까. 분하고 억울했다. 징그럽고 소름끼치는 일은 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해수욕이라면 몸이 떨렸다.
오늘 물속에 들어가게 된 것은 손자에 의한 손자를 위한 일이었다. 그런데 할미가 더 행복한 물놀이를 하고 있다.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물 밖을 고집하던 지난 시간들을 까맣게 잊은 채 손자의 첫 바다 나들이에 흠뻑 취해 있다. 무려 50년 만의 첫 입수라는 내 말에 아들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래서 손자는 위대하다!”라고 외친다. “그래 맞다. 손자는 위대하다.”나도 맞받아 외치며 웃었다. 노을이 번지듯 우리 가족의 웃음소리가 무창포 해변에 퍼진다. 깨엿을 깨문 듯 고소하고 달달한 한 나절, 요란하던 파도소리는 잦아들었다. 썰물이다
첫댓글 아......미렌1님.
단숨에 읽어 내려간 님의 글..잠시
뭐라고 댓글을 써야할지
망설였습니다.
아픈 기억을 털어낼 수 있는
계기가 된 손자님.
정말 손자는 위대한 존재 맞습니다.
참으로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심사위원장이라면
대상을 드리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페이지님!
손자 덕분에 오래 묵었던 트라우마
치료했습니다.
세상에서 손자가 제일 예쁜 존재지요 ㅎㅎ
제 눈에는
작가님 이십니다
대상감에 제청합니다ㅎ
단숨에 읽었어요
지난글도 찾아보고요
잘봤습니다
자주 뵙기를요^^
칭찬 감사합니다.
너무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행복합니다.
언젠가 한번 뵈올수 있겟지요.
다시 한번 감사 드려요.
손자는 그렇게나 위대 하군요..
글을 읽으며 저의 할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눈도 안보이는데 어찌 날 돌보셨을까..ㅎ
미렌1 할머님께서도 위대합니다~~
글이 너무 꽉차서 일단 댓글 먼저 읽어 보자 했음을 사과 드립니다~~
늘 건강 하시길요~^^
예전에 저의 할머니도 장애가 있으셨지요.
그래도 손주 사랑하는 마음은 넓은 바다였답니다.
저도 할매 생각 나요. 연실님 덕분에
할머니와의 추억 한자락 떠 올려 봅니다.
작가가 쓰신글 같습니다. 잘읽고 갑니다.^*^
소리님 그거 칭찬 맞죠? ㅎㅎ
감사합니다.
@미렌1 당근 빳다!!~ 칭찬 입니다. 지는 원래 말이 많아 "수다" 왕~ 인디... 글로서는 표현을 못해서 글도 몬써요. 내깐엔 극찬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푸름이님! 이렇게 호응이 높을 줄 몰랐습니다.
그러고 보면 여기 모든 분이 이쁜 손자 손녀들을 둔,
할머니 여서 그러가 봐요
황감한 마음입니다. ㅎㅎ
손자자랑은 돈내고 해야한다고들 하지요.
얼마나 자랑스러우시겠어요.
저도 두 손녀가 보물입니다.
그러게요~
우리의 보물들이 잘 커 주길 바랄 뿐이지요.
우리 할미들이 할이이야 사랑과 애정을
넘치도록 주는 거 말고 뭐 있겠어요. ㅎㅎ
댓글 감사합니다.
오랜 트라우마를 일순간에 털어내게 한 손자의 힘은 위대하네요.
반세기만에 입수, 개인적으로 영원히 잊지 못할 날이 되었겠습니다. 할머니에게 행복한 물놀이의 날을
만들어준 이쁜 손자가 건강하게 잘 성장하길 바라구요, 미렌1님도 늘 좋은 날들 되세요.^^
손자를 안고 물에 들어 갈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더랍니다.
근데 아들이 제가 물속에 들어가 있는거 첨 본다는 사실에
더 새삼스러웠습니다. 우린 1님도 행복한 나날 되세요~
그래요.
주말마다 오는 손녀들
귀찮을만도 한데
맛있는 거 해 먹일 생각에
반짝 힘이 난답니다.
참 글 솜씨가 좋으네요.
학교 다닐 때 상 많이 타셨겠어요. ^^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글짓기를 했어요.
선생님이 잘 한다고 칭찬한 덕입니다.
처음엔 시를 했는데, 수필을 하다보니
지금은 시가 멀어졌어요.ㅠㅠ
삭제된 댓글 입니다.
늘 평화님도 글재주 있으신거 같던데요
오늘 울 손자 여러사람에게 위대한 손자가
된것 같아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난-댓글을-쓰노라면..
몇개의 글들을 한꺼번에 읽은후
쓰게 되드라구요
미렌님의 글 -사돈이야기
손주이야기와 아들내외의 사랑등
찐한 가족사랑의 글
물속에서의 기억등 잘 감상하고 갑니다
손주는 위대하다-- - 잘 감상하고 갑니다
울방 방장님 납셨네요. 나
월욜날 백신 1차 맞았다우~
이제 뭐를 해도 낑길거유~
댓글 감사합니당
삭제된 댓글 입니다.
보리님 감사해요~~짧은 글이지만 그 말속에 포함된 큰 영혼의 힘도
함께 받을게요ㅎㅎ
축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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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글에 함께 미소 지으며
손자를 사랑하는 그마음 온전히
느껴지네요
왜 아니겠어요
손주의 까르르 웃음소리에 사랑이 뭉게뭉게 피어나셨겠지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