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33)
제압하다
그가 밟고 있는 게 축구공인 줄 알았다
가랑비 부슬부슬 내리는 아침나절 판잣집 즐비한 골목길 수상한 소리 속으로 제복이 누군갈 밟고 서 있었다 젖은 흙바닥에 한 여자를 엎어놓고
구둣발이 얼굴을 밟아 제압하고 있었던 것
등뒤로 한쪽 팔 꺾어 움켜쥔 채
이마에 난 땀 닦고 있었다 으으으으, 뒤틀린 입술에서 끊임없이 신음이 새어나오고 몸빼바지 가랑이가 축축하게 젖어드는데 몸집 작고 마른 남자 하나가 쪽문 안으로 급히 사라졌다 내 눈길을 감지한 제복의 동료가 뒤늦게 제지하는 척했다
뭔가 준동하는 게 있었지만 금새 냉정을 되찾았다
공무를 집행하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시민의식 때문이라고
다시 말하면, 흙탕에 뒹구는 여자의 뚱뚱한 육체가 혐오스러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못 본 척 그 곁을 지나쳤다
그런데
그날 이후 아무리 똑바로 누워 자도 새벽잠 깨면 바닥에 뺨 대고 엎어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축구공 껴안듯 지구를 껴안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만 구둣발 바닥을 핥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제압하지 않았다 오로지 내가
나를 제압한 것이었다
- 장옥관(1955- ),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문학동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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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목격자는 지나가고, 저는 좀 흥분하여서 사건의 현장에 더 머물렀습니다. 정도의 문제이기도 하겠습니다. 정도正道가 아니라, 정도程度입니다. 분량이나 한도, 수준을 말하는, 넘쳤다거나 지나쳤다고 할 때의 그 정도입니다. 정도가 지나치기는 한 것 같지요. “몸집 작고 마른 남자 하나가 쪽문 안으로 급히 사라”지고, 목격자의 “눈길을 감지한 제복의 동료가 뒤늦게 제지하는 척했다”고 하니까요. 이 보고서만으로는 사건의 개요는 알 수가 없어서 시시비비를 가리겠다고 나설 형편은 아닌 듯하니 저처럼 “뭔가 준동하는 게 있었지만 금새 냉정을 되찾”고 현장을 벗어난 목격자의 행동은 굳이 나무랄 것이 없어 보입니다. 아무리 공권력이라도 이건 ‘정도를 넘었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하다가 마침내 생각이 ‘폭력’에까지 이른 뒤 누군가에게 이 현장을 전달해야지 하는 생각을 한 뒤 저 역시 일단 현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목격자가 생각나 찾았더니 목격자의 정황이 말이 아니군요. ‘피해를 당한’ 이를 대신하여 절치부심하는 건 아니겠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제압”했다며 후회막심한, 연민이나 측은지심 같기도 한 표정을 보자니 따라 심사가 아립니다. 애초 시인이 품은 말은 이것이었을까요. 초점 따라 생각과 대응이 다릅니다. 사건은 하나라도 초점 따라 갈래가 여럿입니다. 시야 옳고 그른 갈래가 없습니다만 세상일은 아닐 겁니다. 갈래마다 정도程度도 정도正道도 다 있는 갈래여야 할 겁니다. (20240214)
첫댓글 아무도 나를 제압하지 않았다 오로지 내가
나를 제압한 것이었다
정도程度도 정도正道도 다 있는 갈래여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