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주(肉體舟)를 탄 선장(의식. 혼)은,
인생 항로의 혼의 수행에 출항하면,
10%의 표면 의식이 되고, 90%의 의식은 잠재되어
오랜 전생윤회 동안에 배운 자신의 과거세의 경험을 잊고,
그 상념의 상태, 업의 수정, 혼의 정화를 하여
이 세상에 나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불의 자식으로서의 자각을 많이 잃어버린다.
악(惡)의 상념행위는 인간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 때문에 육체주(肉體舟)가 가진 안, 이, 비, 설, 신, 의(意)의 육근에 휘둘려,
번뇌가 만들어 낸 분노나 비난, 질투, 원한 등,
중도를 잊어버린 상념행위에 의해,
의식의 중심인 “마음”에 구름을 만들어 버려서,
신불로부터의 빛을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잠재의식의 무한한 불지(佛智). 영지(英智)를 개발할 수 없다.
육체적, 물질적, 경제적인 외면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본래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육체적 현상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저 세상과 이 세상과의 왕래는,
혼, 즉 선장의 원자체(原子體)인 배와, 광자체(光子體)인 배의 환승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의 의식(혼), 선장은, 본래 태어난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증멸(增滅)이 있는 것도 아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원리는,
물질계, 의식계를 불문하고,
“색심불이(色心不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이 세상이 전부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기때문에,
육체의 오관에 현혹되어 마음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관은, 이 세상의 현상을 객관적으로 포착한 결과를 보일 뿐이며,
그것이 절대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눈으로 보는 범위는,
가령 일곱 가지 색의 무지개의 색채를 확인하는 것밖에 없다.
자외선 이후의 세계도, 적외선 이후의 세계도
그것을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에 반해, 마음의 눈은,
그 마음의 조화도에 의해,
차원이 다른 세계를 꿰뚫어 보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연(緣)의 실(絲) – 유(類)는 유(類)를 부른다 –
자주 인연이 있다거나 인연이 없다거나 말한다.
이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지식이나 이치가 아닌 보이지 않는 실로 묶여있다.
의식의 세계, 저 세상에서 약속하여,
부부, 부모 자식, 형제, 친구 등의 관계로 묶여 있는 것이다.
각각의 과거세를 조사해 보면,
마치 짜낸 천처럼,
반드시 어딘가의 시대에서 어떠한 관련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옷깃만 스쳐도 몇 생의 인연>이라고 하는 속담처럼,
이 지상계의 인류는 모두 신불의 자식이며, 형제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전생 윤회의 과정 중에,
반드시 어딘가에서 인연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단, 그 인연의 깊고 얕음은 있다.
인연의 실의 원근에 의해 다른 것이다.
시골에서 도시로 나오면, 동향사람들과 친하게 되어가는 비율이 많고,
게다가 학우가 되면 그 친밀감은 깊어진다.
또 외국에서는, 같은 국민, 같은 민족끼리 모이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친밀감이라고 하는 관계도, 인연인 것이다.
하나의 가정의 경우도, 특히 부모자식, 형제라고 하는 관계는 깊은 인연으로 묶여져 있다.
부친이 예술가라면 자식도 그 길로 들어가는 것처럼,
법률가의 가족에는 또 그 전문가가 된다고 하는 식으로,
직업의 경우도, 같은 목적의 생명,
즉 과거세에서 함께 배운 관계라든지
저 세상에서 관계가 있었다든가 하는 인연이,
동일한 방향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개구리 새끼는 올챙이> 에서도,
<동지(同志)>에서도, 인연이 같은 류(類)라고 말할 수 있어 묘하다.
지금 현세에 육체를 갖고 있는 인류는,
그러한 의미로 모두 동시대의 동급생, 이라는 것이 된다.
하나의 나라의 동시대에, 같은 동료로서 태어나는 것도,
반드시 과거세에서의 약속에 의한 것이다.
일찍이 고타마 싯다르타가 인도에서 불교를 설법했을 당시,
많은 제자들이, 중인도를 중심으로 나왔다.
이 신리(神理)의 씨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구원하여
그 신리(神理)는 불멸이었다.
중인도에 모였던 사람들의 대다수는,
애틀란티스 제국이나, 지금의 남미 안데스산맥의 그 시대에
관련있는 사람들이 약속에 의해 인연과 접촉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에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가까운 지역에는 반드시 천사가 태어나,
빛의 천사의 증명자로서의 사명을 갖고 협력하기 위해 탄생했다.
바울로, 베드로, 시몬, 요한 등은,
모두 전세에서 약속하고 온 빛의 천사들이었다.
이러한 빛의 천사들도, 육체를 가져 버리면
자신의 사명을 잊고 마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인생 항로의 타는 배인,
육체의 번뇌에 지배되어,
눈 앞의 것에 마음을 현혹당하고 말기 때문에,
본성을 깨닫는 것이 곤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본성을 구하고,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곳,
그곳이 이 현상계이기 때문에,
여기에서의 수행은, 즐거움이기도 하며,
고통이기도 한 인생이라고 하는 이유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지식만으로 모든 것을 알려고 하여도,
역시 본성을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지(智), 정(情), 의(意)의 삼체(三體)가,
하나로 조화되어, 생활과 연결되어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의 창이 열리면, 미해결의 문제는 차례로 풀려간다.
그때, 그 사람은 자기의 사명의 중대함을 깨닫고,
모든 중생에게, 자기의 마음속에서 풀린 과거세에서 배운 신리를,
현대의 생활과 밀착된 방편에 의해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것은 배웠기 때문에 해명했던 것이 아니고,
잠재의식의 90% 속에 있는 마음의 지혜의 샘에서 솟아 나오기 때문이다.
학력이 모든 것,
머리가 좋다는 등으로 키워진 사람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바라는 추구심과 생활 노력의 일념력(一念力)은,
그러한 지식과는 관계없이,
우리 영도자(靈道者)의 지도령(指導靈)들에 의해 그 길은 열려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