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子曰 多聞闕疑愼言其餘 則寡尤 多見闕殆愼行其餘 則寡悔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많이 듣고서 그중에 의심나는 것을 빼놓고 그 나머지를 조심스럽게 말하면 허물이 적을 것이요, 많이 보고서 그중에 위태로운 것을 빼놓고 그 나머지를 조심스럽게 행하면 후회하는 일이 적을 것이니, 말에 허물이 적으며 행실에 후회할 일이 적으면 녹봉은 그 가운데에 있다.”라고 하셨다. ○ 呂氏曰: “疑者所未信, 殆者所未安.” 여씨가 말했다. “의혹됨이란 아직 믿지 아니한 바이고, 위태롭다는 것은 아직 편안하지 않은 바이다.” 呂氏名大臨 字與叔 藍田人 여씨는 이름이 대림이고, 자는 여숙이며, 남전 사람이다. 程子曰: “尤, 罪自外至者也. 悔, 理自內出者也.” 정자가 말하길, “尤(원망)은 죄가 밖으로부터 이른 것이다. 후회는 이치가 안으로부터 나온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人以我爲尤 故曰罪自外至 我自知其非理而悔之 故曰理自內出 신안진씨가 말하길, “남이 나를 원망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죄가 밖으로부터 이르렀다고 말하고, 내가 스스로 그것이 이치가 아님을 알고서 후회하기 때문에, 이치가 안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愚謂多聞見者學之博, 闕疑殆者擇之精, 愼言行者守之約. 凡言在其中者, 皆不求而自至之辭. 言此以救子張之失而進之也.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보고 들은 것이 많다는 것은 배움이 넓다는 것이고, 의심나고 위태한 것을 빼놓는다는 것은 가려 택함이 정밀하다는 것이며, 언행에 신중하다는 것은 지킴이 요약된다는 것이다. 무릇 그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구하지 않으나 스스로 이른다는 말이다. 이것을 말함으로써 자장의 잘못을 구제하여 그를 나아가게 한 것이다. 新安陳氏曰 夫子分聞見言行疑殆對言之 朱子合而解之 學不博則無可擇 多聞多見 學旣博矣 必於多中精以擇之 闕其所未信未安者 則非泛焉厖雜之博 擇之旣精然後 加謹慎以言行其餘之已信已安者 而所守方得其約 約字與博字對 約字又自精字來 不精則其約也非切要之約 而苟簡之約爾 學之博 擇之精 守之約 九字斷盡此一章 三者不可闕 有如此 則言必當而人不我尤 行必當而己無可悔矣 신안진씨가 말하길, “공자께서는 聞見과 言行, 그리고 疑殆를 나누어서 대조하여 말씀하셨고, 주자는 이를 합하여 풀이하였다. 배움이 넓지 않으면 가려 택할만한 것이 없고, 보고 들은 것이 많으면 배움은 이미 넓은 것이니, 반드시 많은 중에서 정밀하게 가려 택할 것이다. 아직 믿지 않고 편안하지 않은 것을 제외한다면, 泛泛하게 뒤섞여 어수선한 넓음이 아닌 것이다. 가려 택하는 것이 이미 정밀한 연후에 삼가 신중함을 더하여 그 나머지의 이미 믿을 만하고 이미 편안한 것을 말하고 행한다면, 지키는 바가 바야흐로 그 요약됨을 얻을 것이다. 約자는 博자와 대조가 되는데, 約자는 다시 精자로부터 나온 것이다. 정밀하지 않다면, 그 요약됨도 역시 절실하고 중요한 요약됨이 아니라, 구차하게 간략한 요약됨일 따름이다. 배움이 넓고 가려 택함이 정밀하며 지킴이 요약된다는 이 9글자는 이 한 장의 뜻을 전부 다 단언한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빼놓을 수 없으니, 이렇게 함이 있다면, 말은 반드시 합당하여 남이 나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고, 행동은 반드시 합당하여 자기가 후회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祿在其中 餒在其中 仁在其中 直在其中 樂亦在其中 其訓皆同 신안진씨가 말하길, “녹이 그 안에 있다거나, 굶주림이 그 안에 있다거나, 인이 그 안에 있다거나, 곧음이 그 안에 있다거나, 즐거움 역시 그 안에 있다는 것은 그 뜻풀이가 모두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此章是敎人不以干祿爲意 蓋言行所當謹 非爲欲干祿而然也 若眞能著實用功 則惟患言行之有悔尤 何暇有干祿之心耶 주자가 말하길, “이 장은 사람들에게 녹을 추구하는 것을 뜻으로 삼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대체로 언행은 합당하게 하고 삼갈 바이지만, 녹 구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진짜로 착실하게 노력할 수 있다면, 오직 언행에 후회와 원망이 있는 것을 걱정할 것이니, 어느 겨를에 녹을 구하는 마음을 갖고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聞是聞人之言 見是見人之行 聞亦屬自家言處 見亦屬自家行處 聞見亦互相發 亦有聞而行者 有見而言者 不可泥看 聞見當闕其疑殆 然又勿易言易行之 聞이란 남의 말을 듣는 것이고, 見이란 남의 행실을 보는 것이다. 聞에는 또한 스스로 말한 부분도 속하는 것이고, 見에도 역시 스스로 행한 부분이 포함되는 것이다. 듣고 보는 것은 또한 서로 드러내어 주는 것인데, 역시 듣고서 행하는 것도 있고, 보고서 말하는 것도 있으니, 집착해서(구애되어) 보아서는 안 된다. 듣고 보는 것에 있어 당연히 그 의심스럽고 위태로운 것은 빼놓아야 하지만, 또한 쉽게 말하고 쉽게 행하지는 말아야 한다. 學本是要立身 不是要干祿 然言行能謹 人自見知 便有得祿之道 大槪是令他自理會身已上事 不要先萌利祿之心 又曰 若人見得道理分明 便不爲利祿動 배움이란 본래 제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지, 녹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언행을 능히 삼갈 수 있다면, 남들이 저절로 보아서 알게 되니, 곧바로 녹을 얻는 도가 생기는 것이다. 대체로 이것은 그 스스로 이상의 일들을 이해하고 체험하게 만드는 것이니, 먼저 녹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이 싺 트게 해서는 안 된다. 또 말하길, 만약 사람들이 도리를 보아서 터득함이 분명하다면, 곧바로 녹을 이롭게 여기는 것 때문에 동요되지 않을 것이다. 祿固人之所欲 但要去干不得 然德行旣修 名聲旣顯 則人自然來求 祿不待干而自得 녹이란 본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다만 가서 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덕행이 이미 닦여져 있고, 명성이 이미 드러나 있다면, 남들이 자연히 와서 벼슬하기를 요구할 것이니, 녹은 구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얻는 것이다. 多聞多見 人多輕說過了 將以爲偶然多聞多見耳 殊不知 此正是合用功處 不然則聞見孤寡 不足以爲學矣 들은 것이 많고 본 것이 많은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대부분 가볍게 말해 넘기고서는, 그것을 우연히 듣고 본 것이 많을 따름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바로 마땅히 노력해야 할 부분임을 전혀 알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이 너무 적어서 학문이라고 여기기에 부족할 것이다. 出言或至傷人 故多尤 行有不至 己必先覺 故多悔 然此亦以其多少言之耳 言而多尤 豈不自悔 行而多悔 亦必至於傷人矣 말을 내뱉어서 간혹 사람을 상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에, 원망함이 많은 것이고, 행실에 지극하지 않음이 있으면, 자신이 반드시 먼저 깨닫게 되는데, 이 때문에 후회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그 많고 적음으로써 말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말을 하여 원망함이 많으면, 어찌 스스로 후회하지 않겠는가? 행하여 후회가 많다면, 이 역시 반드시 남을 상하게 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聖人只敎他謹言行 因帶著祿說 聖人不敎他干 但云得祿之道在其中 正是要抹殺了他干字 성인께서는 단지 그에게 언행을 삼가라고 가르치면서, 祿이 매여 있음을 전제로 말씀하셨다. 성인께서 그에게 추구하도록 가르치지 않았지만, 다만 녹을 얻는 도가 그 안에 있다고만 말씀하셨으니, 이것은 바로 他干이라는 글자를 지워 없애고자 하신 것이다. 又曰 人處己接物 莫大於言行 聞見所以爲言行之資也 自寡聞見而積之多 多聞見而擇之精 擇之精而於言行猶曰必謹焉 其反身亦切至矣 猶曰謹 足以寡尤悔 而己未敢必其絶無也 君子亦修其在己 而已祿之得不得 非所計也 故曰 祿在其中 本爲此而反得彼之辭 豈眞敎之以是干祿哉 또 말하길, “사람이 자신을 대처하고 외물을 접할 적에 언행보다 더 큰 것은 없으니, 보고 듣는 것이 언행의 밑천이 되기 때문이다. 듣고 보는 것이 적은 것으로부터 쌓여서 많아지는데, 견문이 많으면서도 가려 택하는 것을 정밀하게 하고, 가려 택하는 것을 정밀하게 하면서도 그래도 언행에 있어서 반드시 삼가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가 제 몸에 돌이켜 보는 것도 역시 간절하고 지극할 것이다. 삼간다면 원망과 후회가 적도록 하기에는 충분하지만, 내가 감히 그것이 절대로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군자는 또한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닦으니, 이미 녹을 얻고 얻지 못하고는 따질 바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녹은 그 안에 있다고 말한 것이므로, 본래 이것을 위한 것이지만 도리어 저것을 얻었다는 말이니, 이 어찌 진짜로 이로써 녹을 구한다고 가르쳤겠는가?”라고 하였다. 問學干祿章 曰 此是三截事 若人少聞寡見 則不能參考得是處 故聞見須要多 若聞見已多而不能闕疑殆 則胡亂把不是底也將來做是了 旣闕其疑殆 而又未能謹其餘 則必有尤悔 又問尤悔如何分 曰是大凡 言不謹 則必見尤於人 人旣有尤 自家安得無悔 行不謹 則己必有悔 己旣有悔 則人安得不見尤 此只是各將較重處對說 又問祿在其中 只此便可以得祿否 曰 雖不求祿 若能無悔尤 此自有得祿道理 若曰耕也 餒在其中矣 耕本求飽 豈是求餒 然耕却有水旱凶荒之虞 則有時而餒 學本爲道 豈是求祿 然學旣寡尤悔 則自可以得祿 如言直在其中矣 凡言在其中矣者 道理皆如此 누군가 學干祿 장에 대하여 물었다. 말하길, “이것은 세 단계의 일이다. 만약 사람이 들은 것이 적고 본 것이 적다면, 참고하고 고찰하여 옳은 부분을 터득할 수 없기 때문에, 듣고 보는 것이 모름지기 많아야 한다. 만약 듣고 본 것이 이미 많음에도, 의심스럽고 위태한 것을 제외할 수 없다면, 어지럽고 혼란스러워서 옳지 못한 것을 장차 옳은 것으로 삼을 것이다. 이미 그 의심스럽고 위태로운 것을 빼놓았으면서도, 또다시 그 나머지를 삼가 신중하게 할 수 없다면, 반드시 원망함과 후회함이 생길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원망함과 후회함은 어떻게 구분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이것은 대범한 것인데, 말을 삼가지 않는다면, 반드시 남에게서 원망을 받을 것이고, 남이 이미 원망을 갖고 있으면, 나 자신도 어찌 후회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행함을 삼가지 않는다면, 자신은 반드시 후회함이 있을 것이고, 자신에게 이미 후회함이 있다면, 남에게서 어찌 원망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그저 각자 비교적 중한 부분을 가지고 대비하여 말한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녹이 그 안에 있다고 하였으니, 단지 이것이면, 녹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비록 녹을 구하지 않더라도, 만약 후회와 원망이 없도록 할 수 있다면, 여기서 저절로 녹을 얻는 도리가 생겨날 것이다. 밭갈이에 굶주림이 그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밭갈이는 본래 배부름을 추구하는 것이니, 어찌 굶주림을 추구하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밭갈이에는 도리어 홍수와 가뭄, 흉년의 근심이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때로는 굶주릴 수도 있는 것이다. 배움은 본디 道를 위한 것이니, 어찌 녹을 추구하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배워서 이미 원망과 후회가 적어졌다면, 저절로 녹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곧음이 그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릇 그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이치가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蔡氏曰 擇精守約固重 學博亦不可輕 聖人所以好古敏求 多聞擇從 多見而識 皆欲求其多也 不然 聞見孤寡 將何據以爲擇精守約之地耶 채씨가 말하길, “가려 택함이 정밀하고 지킴이 요약된 것은 본래 중요하지만, 배움이 넓은 것 역시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성인께서 옛것을 좋아하시고 민첩하게 구하시며, 많이 듣고 가려 택하여 따르며, 많이 보아서 아시는 것은 모두 그 많음을 추구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듣고 본 것이 너무 적으니, 장차 무엇을 근거로 하여 가려 택함이 정밀하고 지킴이 요약된 경지라고 여기겠는가?”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子張有務外求聞之失 故夫子敎以反求諸內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자장에게는 밖에 힘쓰고 좋은 소문을 구하는 잘못이 있었기 때문에, 공자께서 돌이켜 안에서 구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
3 | ○ 程子曰: “修天爵則人爵至, 君子言行能謹, 得祿之道也. 子張學干祿, 故告之以此, 使定其心而不爲利祿動, 若顔ㆍ閔則無此問矣. 或疑如此亦有不得祿者, 孔子蓋曰: ‘耕也餒在其中,’ 惟理可爲者爲之而已矣.” 정자가 말하길, “천작을 닦으면 인작이 이르는데, 군자가 능히 언행에 삼갈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녹을 얻는 방도다. 자장이 학문을 하면서 녹을 구하였기 때문에, 이로써 알려주어 그 마음을 안정시켜 이익과 녹에 의해 동요하지 않도록 해준 것이다. 만약 안연이나 민자건 같은 경우라면, 이러한 질문이 없었을 것이다. 혹자가 이와 같이 하여도 역시 녹을 얻지 못함이 있을 것을 의심하자, 공자께서 아마도 ‘밭갈이에도 굶주림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니, 오직 이치상 할 만한 것이라면, 그것을 할 따름이다.’라고 말씀하신 것 같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顔子終身簞瓢 閔子堅辭費宰 豈有此問 신안진씨가 말하길, “안자는 종신토록 단사표음을 하였고, 민자는 비읍의 읍재 자리를 한사코 사양하였으니, 어찌 이러한 질문이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學干祿 卽修天爵而要人爵者 富貴在天 無可求之理 言行在我 有反求之道 學者惟當求其在我者 則祿將不求而自至 故在其中三字 正爲干字而發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배우면서 녹을 추구하는 것은 곧 하늘이 준 벼슬을 닦아서 사람이 주는 벼슬을 구하는 것이다. 부귀는 하늘에 달려있으니, 추구할만한 이치가 없는 것이고, 언행은 나에게 달려있으니, 돌이켜 추구할 도가 있는 것이다. 배우는 자라면 오직 마땅히 나에게 있는 것을 구해야 하는데, 그렇게 한다면, 녹은 장차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를 것이다. 이 때문에 在其中 3글자는 바로 干자 때문에 발언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