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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무익한 말 한마디 속에 담긴 심장 - 심판 날에 반드시 심문받게 될 모든 언어
마태복음 12장 34~37절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12: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12: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여러분, 일상 속에서 가장 많이 쓰고, 또 가장 많이 상처받는 게 무엇일까요? 바로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루를 보내면서 이런 말을 참 쉽게 합니다.
“에이 목사님,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이에요.”, “내 성격이 뒤끝이 없어서 그래,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그런데 참 신기하지요?
칼에 베인 상처는 꿰매면 몇 주 안에 아물지만,
십 년 전 눈 지긋이 감고 누군가 내게 툭 던졌던 그 독한 말 한마디는 여전히 심장에 박혀서 피를 흘리게 만듭니다.
어릴 때 부모님께 들었던 “너는 왜 그 모양이니?”라는 말 한마디가 마흔이 되고 쉰이 된 지금까지 영혼의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지울 수 없는 칼자국을 남겼을지 모릅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를 너무나 가볍게 취급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흔드는 준엄한 경고를 던지십니다.
우리가 쏟아낸 그 수많은 말들이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서 고스란히 울려 퍼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 입은 작지만, 인생의 키를 쥐고 있습니다(야고보서 3:4~5)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성경은 우리의 혀를 거대한 배를 움직이는 '작은 키(Rudder)'나 온 산을 태워버리는 '작은 불씨'에 비유합니다.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인생 전체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뜻이지요.
최근 한 심리학 연구소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평범한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하루 동안 자기도 모르게 사용하는 부정적인 단어의 횟수를 측정해 본 것입니다.
놀랍게도 불평, 원망, 짜증의 말을 많이 뱉은 사람일수록 그날 저녁 실제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확연히 높게 나타났습니다.
내 입에서 나간 말이 가장 먼저 내 귀로 들어오고, 내 뇌를 지배하며, 내 인생의 환경을 어둡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신앙과 현실의 괴리는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주일에는 거룩한 입술로 찬양을 부르는데, 월요일 출근길에는 세상 사람과 똑같이 불평의 언어를 쏟아냅니다.
여기 아주 오래된 실화가 하나 있습니다.
영국의 한 시골 교회에 매주 예배를 드리러 오지만, 입만 열면 다른 성도들을 흉보고 비난하는 성격이 거친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그분을 조용히 부르더니 잉크가 가득 찬 병과 맑은 물 한 컵을 가져오셨습니다.
그리고 집사님 보는 앞에서 검은 잉크 한 방울을 투명한 물에 툭 떨어뜨리셨습니다.
순식간에 물 전체가 시커넓게 변해버렸지요.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집사님, 이 잉크 한 방울이 물 전체를 망치듯, 집사님이 무심코 뱉은 비난 한마디가 교회의 온 성도들의 마음을 이토록 흐려놓습니다.”
야고보서 3장에 나오는 '혀'는 헬라어로 '글롯사(γλῶσσα)'입니다.
이는 신체 기관인 혀를 뜻하기도 하지만, 영혼의 고백과 언어 체계 전체를 의미합니다.
작은 글롯사가 인생 전체를 파멸로 이끌 수도, 거룩함으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삶의 적용
우리는 말을 내뱉고 나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말이 내 인생의 방향을 비극으로 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무심코 한 말이 내 가정을, 내 교회를 흐려놓는 잉크 방울이었구나”라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당장, 내 입에서 불평이 나오려고 할 때 3초만 입술을 닫고 침묵해 보십시오.
요약: 지극히 작은 혀가 인생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므로, 내 언어의 파괴력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이 우리의 말을 심문하시는 이유: 말은 심장의 출구입니다(마태복음 12:34~36)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예수님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눈멀고 말 못 하는 사람을 고쳐주신 위대한 신성한 사역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기심에 눈이 멀어 “저자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며 악독한 말을 내뱉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의 언어를 보시고 이 독설을 쏟아내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경고하신 '무익한 말'의 헬라어 원어는 '아르고스(ἀργός)'입니다.
이 단어는 부정 접두어 '아(ἀ-)'와 '일, 노동'을 뜻하는 '에르곤(ἔργον)'이 합쳐진 말입니다.
즉, '일하지 않는 말', '책임 없는 말', 더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치 없는 말'을 뜻합니다.
존 칼빈(John Calvin)은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인간의 혀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해 창조되었으나,
타락한 인간은 그것을 이웃을 해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도구로 전락시켰다”고 경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심판 날에 우리의 말을 심문하시는 이유는,
말이 단순한 공기의 진동이 아니라 우리 '심장'의 상태를 그대로 뿜어내는 출구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교만이 가득하면 교만한 말이 나오고, 미움이 가득하면 가시 돋친 말이 나옵니다.
반대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가득하면 사람을 살리는 언어가 흘러나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받지만, 진짜 구원받은 사람의 믿음은 반드시 언어라는 열매로 증명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뜻하는 헬라어 '카르디아(καρδία)'는 인간의 지성, 감정, 의지가 결합한 영혼의 중심부를 뜻합니다.
즉 언어는 카르디아에 쌓여 있는 영적 잔고의 정직한 지출 내역서입니다.
내 입에서 거친 말이 나오는 것은 언어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내 심장(영혼)이 병들었다는 신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제 안에 은혜가 메말라 서 이런 독한 말이 흘러나왔습니다”라고 내 영적 가난함을 주님 앞에 인정해야 합니다.
내 입에서 거친 말이 터져 나왔을 때, 남을 탓하기 전에 골방으로 들어가 내 마음의 중심을 돌이켜 달라고 회개 기도를 드리십시오.
요약: 무익한 말은 마음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열매이기에, 심판 날에 하나님의 준엄한 심문을 받게 됩니다.
3. 현대 사회, 넘쳐나는 디지털 '무익한 말'의 감옥(잠언 12:18)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과거에는 말 한마디를 하면 공중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2026년 현재는 어떻습니까?
스마트폰 안의 카카오톡 메시지, 유튜브와 SNS의 댓글, 익명성 뒤에 숨은 인터넷 게시글…
우리의 언어는 단 일 초도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디지털 데이터로 박제됩니다.
현대인들의 언어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너무나 빠르고, 너무나 독하며, 너무나 가볍습니다.
깊은 묵상과 기도보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더 빠릅니다.
직설적으로 상대의 허물을 후벼 파는 것을 '솔직함'과 '쿨함'으로 포장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지혜라고 부르지 않고 '칼로 찌르는 행위'라고 말씀하십니다.
미국의 한 거대한 인터넷 데이터 센터에는 전 세계 사람들이 쏟아내는 수십억 개의 텍스트가 매초 저장된다고 합니다.
인간이 만든 서버도 모든 말과 글을 기록할진대,
온 우주를 창조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책과 심판대 사서에 우리의 언어가 기록되지 않겠습니까?
“너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네가 골방에서, 네가 스마트폰 액정 뒤에서 던진 그 가볍고 잔인한 말들을 다 듣고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잠언에 나오는 '함부로 말하다'의 히브리어는 '바타(בָּטָא)'입니다.
이는 '생각 없이 뱉다', '철없이 지껄이다'라는 뜻입니다.
생각 없이 툭 던진 바타가 누군가에게는 영혼을 도려내는 칼이 됩니다.
단톡방에서 주고받는 가벼운 험담,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의 조롱 섞인 댓글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무서운 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 문화가 다 그렇다고 해서 나도 내 손가락과 입술을 죄에 방임했구나”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수용해야 합니다.
오늘 누군가에게 카톡을 보내거나 메시지를 쓸 때,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 전 딱 한 번만 기도하고 보내십시오.
"주님, 이 글이 사람을 살리는 글입니까?"
요약: 디지털 시대의 가볍고 독한 언어 역시 하나님의 생생한 기록 장부에 고스란히 남게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4.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침묵의 죄'를 아십니까(잠언 31:8~9)
“너는 말 못하는 자와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우리는 흔히 욕설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이간질하는 것만 언어의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무익한 말(아르고스-일하지 않는 말)'의 또 다른 이면은 무엇입니까?
마땅히 작동해야 할 때 작동하지 않는 언어,
즉 '침묵해야 할 때 소리를 지르고, 정작 입을 열어야 할 때 비겁하게 침묵하는 죄'입니다.
내 곁에서 고통당하는 이웃이 있고 고독하게 눈물 흘리는 지체가 있는데도 귀찮다는 이유로
위로의 한마디를 아끼는 입술,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미안하다는 사과의 한마디를 끝까지 거부하는 완악한 혀,
죽어가는 영혼에게 복음의 생명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부끄럽다는 핑계로 꼭 닫아버린 입술…
이것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심각한 사명 방기요, 책임을 추궁받을 '무익한 입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어라는 놀라운 특권을 주신 목적은 오직 하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말로써 이웃을 세우고 살리라'는 거룩한 사명 때문입니다.
'신원하다'의 히브리어 원어는 '단(דִּין)'으로, '재판하다', '정의를 집행하다', '권리를 대변하다'라는 뜻입니다.
성도의 입술은 연약한 자의 권리를 대변하는 '단'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악한 말을 안 했다고 의로운 것이 아니라, 선한 위로와 복음의 말을 아낀 것도 하나님 앞에 죄가 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자존심 때문에 끝내 사과하지 않았고, 인색함 때문에 칭찬과 위로를 아꼈구나”라는 내 인색함을 수용해야 합니다.
오늘 예배가 끝나면, 마음속에 맴돌았지만 미뤄두었던 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따뜻한 감사와 사과의 한마디를 건네십시오.
요약: 마땅히 이웃을 살리고 복음을 전해야 할 때 입을 닫아버리는 비겁한 침묵 또한 무익한 죄입니다.
5.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이사야 6:6~7)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적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자, 여러분. 여기까지만 말씀을 들으면 이 자리에 살아서 걸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죄인들이기 때문이지요.
찬양하다가 돌아서서 원망하고, 기도하다가 나가서 형제를 판단하는 것이 솔직한 우리의 비참한 모습 아닙니까?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위풍당당하게 “주님, 내가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충성의 고백 같았지요.
하지만 불과 몇 시간 뒤, 작은 계집종 앞에서 “나는 저 예수를 도무지 알지 못하오!”라며 저주하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의 입술은 완벽하게 실패했고 파산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로 낙심한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죄를 캐묻지 않으시고 그저 숯불을 피워놓으신 채 세 번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은 베드로의 배신의 입술을 '사랑의 고백'으로 덮어주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대면했을 때
가장 먼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절규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제단의 불타는 숯불을 가져다가 그의 더러운 입술에 지져 주시며 “네 죄가 사하여졌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소망은 '결코 실수하지 않는 완벽한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날마다 우리의 입술을 씻어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수많은 언어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묵묵히 침묵하셨기에,
우리는 오늘도 예수의 이름 의지하여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장의 '사하여졌느니라'의 히브리어는 '카파르(כָּפַר)'입니다.
이는 '덮다', '속죄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불타는 은혜가 우리의 부정한 입술을 완전히 덮어버리셨습니다.
내 입술의 추함 때문에 절망할 필요가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내 언어를 정결케 하실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입술을 제어할 수 없으니, 오직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이 나를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은혜를 수용해야 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손을 입에 대고 기도하십시오. “주님, 오늘 내 입술에 십자가 파수꾼을 세워주시고, 오직 보혈로 정하게 하소서.”
요약: 우리의 소망은 입술의 완벽함이 아니라,
부정한 입술을 제단 숯불로 정케 하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있습니다.
[결론] 말은 습관이 아니라 영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루에 수천, 수만 마디의 말을 세상에 쏟아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말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내 영성의 깊이입니다.
언어는 내 인격의 숨길 수 없는 그림자이며, 입술은 내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나침반입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우리가 무심코 던진 독한 말 한마디 때문에 영혼이 찢겨나간 채 밤을 지새울 것이고,
또 누군가는 우리가 기도의 마음을 담아 건넨 "수고하셨습니다", "힘내세요, 내가 기도하고 있습니다"라는
작은 고백 하나 때문에 다시 살아갈 소망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된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언어의 질감이 달라야 합니다.
정죄와 비난보다는 격려와 회복을, 분노의 핏대보다는 십자가의 은혜를,
사람을 찌르는 독설보다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살리는 언어를 선택해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당장 문밖에만 나가도 현실의 거친 파도 속에서 우리는 또 넘어지고 실언할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완악한 입술을 친히 붙드시고, 하늘의 거룩한 언어를 날마다 과외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전 생애와 언어를 통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지기를 원합니다.
오늘 하루, 이번 한 주간, 저와 여러분의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굳게 닫힌 마음을 녹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달하는 거룩한 복음의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경고 “우리가 가볍게 던진 말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참고)
아르고스(ἀργός): 무익한, 책임 없는, 열매 없는 말.
카르디아(καρδία): 영혼의 중심인 심장(마음).
글롯사(γλῶσσα): 인생의 키를 쥐고 있는 혀(언어).
우리의 구원은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이뤄지지만,
구원받은 신자의 언어는 마음의 변화를 증명하는 거룩한 열매여야 합니다.
실패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입술을 날마다 덮으십니다(카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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