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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파초는 외롭지 않다
보름 여 동안 경찰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석진은 전과 다름없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본서에서는 짭새 신분이 노출된 것이 아닐까 우려했지만 도중에 그만 둔다면 더욱 의심받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하고 다시 나가도록 조치하였다.
대학 졸업학기를 맞아 졸업예정자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였다. 바로 취업 때문이었다. 석진은 4년간 학적부에 올라 있는 학생이기는 하였지만 경찰로 복무하느라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고, 제대와 동시에 취업을 보장한다던 경찰 특채 제도도 전과 달라져서 보장이 엷어지는 바람에 이만 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또 한 가지 그의 가슴에 구름처럼 잠겨있는 걱정이자 문제는 바로 설희네였다. 그것을 문제라고 표현한 것은 어쩌면 자기의 문제이지, 그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안 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석진은 그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모두가 지난 일이라고 도리질하며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꿈같던 일들이 지난 2년 동안 그의 뇌리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아픈 기억은 도리어 잘 잊히지 않기 때문일까.
그러니까 84년 초여름, 설희 모녀와의 운명적인(?) 만남 후 설희네 집을 방문하면서부터 시작된 삼촌으로의 지위 획득, 그리고 설희 엄마 은숙에 대한 석진의 애정 감정, 열여섯 살짜리 설희의 석진에 대한 따름 등으로 이어지는 기묘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한 사랑의 탑 쌓기.
그러나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가 마지막이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마지막이라는 말 역시 석진이 사내답지 않은 행위를 저지르고 나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내린 결론이었다. 아무튼 석진의 일방적인 사랑탑은 무너져 내렸고, 석진은 그 앞에서 속울음을 울어야 했다. 돌이켜 보면 생각할수록 기막힌 일이었다. 그건 술이 원수였다. 아니 포장마차에 들어선 것이 잘못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자기의 나약한 정신이 문제였다. 그런데 문제는 설희가 석진의 하숙집을 찾아내면서 더 확대되고 말았다. 하숙집 여주인이 석진이 약혼녀와 외출했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나서 설희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고, 그로부터 그녀의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 가기 시작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설희는 처음에는 석진의 배신행위에 대해 분노하고 괴로워하면서 가끔씩 먼 하늘을 쳐다보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
‘세상에, 그렇게 자상하고 멋있는 오빠가 감쪽같이 우리를 속이다니…. 그리곤 다른 여자와 약혼을 했고, 곧 결혼한다니…. 남자들은 다 그런가. 아냐 거짓말일지도 몰라. 내가 공부에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 꾸며낸 연극인지도 몰라.’
설희의 순수한 감정은 여전히 살아 있어 무시로 그녀를 괴롭혔다. 잊어버리자고 몇 백 번을 도리질해도 그의 모습은 영영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설희는 몇 가지의 환영에 시달렸다. 신세계 백화점 입구에서 눈을 맞으며 그를 기다리다가 우연한 일로 그가 그녀의 볼에 입술을 대준 기억. 그의 긴 팔에 어깨를 꼬옥 감싸 안겨 집으로 걸어오던 눈 내리던 크리스마스이브가 떠오를 때면 오빠가 원망스럽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그립기도 하였다.
지난 해 제야의 종소리가 들리던 밤에는 오빠가 그 여자와 밤을 지새우겠지 생각하니 자꾸만 눈물이 나와 혼자 제 방에서 TV를 크게 틀어놓고 눈물을 글썽이다가 엉 엉 소리 내어 울기도 하였다.
‘그 여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우리 학교 미술 선생보다 더 예쁘고 세련된 여잘까. 그보다 오빠가 그 여자를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혹시 부모님들이 언약한 사이라서 할 수 없이 맺어진 관계는 아닐까. 그렇다면 그 결혼은 불행해질지도 모르는데….’
별별 상상을 다하느라 설희는 새해가 오는 줄도 몰랐다.
설희 엄마 은숙은 석진이 발을 끊은 지 2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더 말이 없어지고, 장사에도 재미를 잃어 갔다. 마음이 기쁘지 않으니까 몸도 더 빨리 무너지는 것 같아 가게 문 열기조차 번거로웠는데, 요즘은 방학 때라 문방구 경기가 별로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내게 웬 바람이 불어 닥쳤담….’
그녀는 한때 열기에 들떴던 자신을 힐난하며 지난날들을 잊으려 애를 썼다. 대신 두 딸을 향한 정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 동안 설희네 집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수희는 여상을 졸업한 뒤 집안일을 돌보고 있었다. 외할머니는 수희가 집안 살림을 맡게 되면서부터 충남 가수원의 외할아버지 댁으로 내려가셨다. 작년에 칠순을 지나신 외할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서 늘 걱정하시던 외할머니였다.
설희는 H여고에 진학하였고, 지금은 2학년. 그녀는 이제 모든 면에서 어른스럽게 변해 가고 있었다. 주위에서는 설희를 보고 모델로 진출해 보라며 추천해 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날 정도로 그녀의 외모는 출중했다. 특히 신사동 K사진관에서는 그녀의 전신사진을 쇼윈도에 걸어 놓겠다며 사진모델로 나서 줄 것을 요구해 오기도 하였다. 그 때마다 설희는 ‘내가 무슨 동물원 원숭이냐’며 차갑게 거절해 버리곤 하였다. 대개의 아이들이 그런 곳에 제 사진을 못 걸어서 안달인데, 설희는 냉정했다. 그녀는 몸도 마음도 몰라보게 어른스러워졌다. 그러면서도 석진이 차지했던 마음의 빈자리가 너무 썰렁하리만치 넓게 남아 있어, 평소에 조잘대기를 좋아하던 그녀를 침묵을 되새김질하는 소녀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석진은 설희에게 아빠의 정을 대상(代償)케 해준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다시 만나 그의 진심을 확인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된 3월 어느 토요일, 설희는 석진의 하숙집을 찾아갔다. 아무래도 무슨 결말을 내지 않고는 새 학기를 맞아 공부에 몰두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날은 개교기념일이어서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금호동 산동네를 오르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만난 하숙집 주인은 석진이 일년 전에 이사를 갔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나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약혼녀가 아파트라도 미리 장만했는지도 몰라. 돈 많은 부자집 딸 같던데, 호호호, 동생은 참 좋겠 수. 오빠가 부잣집 사위가 되면 혹시 알우? 큰 도움이 될지. 아이쿠, 내 정신 좀 봐. 가스불 켜 놓고선….”
호들갑을 떨고 나더니 주인 여자는 창에서 사라졌다. 석진의 변심이 보다 분명해진 순간이었다.
‘그래, 오빠는 그녀와 함께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곳을 떠난 거야. 왜 그랬을까. 어째서 우리를 그토록 감쪽같이 속이며 몰래 달아나야 했을까.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었을까.’
산동네를 내려오면서 설희는 자기가 왠지 측은하고 불쌍해 보여 싫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지막 믿음까지 버릴 수 없다는 오기도 생기기 시작했다. 적어도 석진 오빠를 직접 만나 그의 진실을 들어보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뭔가 크게 잘못 되었다는 느낌만 더 강하게 솟구칠 뿐이었다. 그녀는 급기야 석진이 다니는 대학을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대학을 찾아가서 확인해 보면 알겠지. 그래, 설희가 그렇게 만만한 애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해.’
그녀는 내친김에 서둘러 버스를 타고 H대학을 찾아갔다. 그녀는 본관으로 찾아가 학생과 앞에 도착했다. 일부 짓궂은 남학생들이 휘이익! 휘이익! 하고 휘파람을 불어 주었다.
‘그래, 학생과에 알아보면, 석진 오빠가 다니는 곳을 알 수 있겠지.’
학생과 앞에는 학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창구 앞에 길게 늘어서 있던 학생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자, 그녀는 이미 닫혀 버린 창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창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뭉툭하게 생긴 여직원이 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더니 용건을 물어 왔다.
“언니, 저… 사람을 찾는데요.”
“사람을 찾아요? 여긴 파출소가 아닌데요.”
그녀는 보오얀 얼굴의 애송이를 신입생으로 본 듯 막말로 대하였다. 설희는 목덜미까지 빨개지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 채 ‘저, 저어…’만 연발하였다.
그제야 몽녀(그렇다. 그녀의 별칭으로는 몽녀가 제격이다)는 자기의 말이 너무 거칠었다고 생각했음인지, 어느 단과대학 누구를 찾느냐, 아니면 직원을 찾느냐, 직원이라면 서무과로 가보라고 하였다. 설희가 조금 펴진 얼굴로 학생이라고 말해 주자 그녀는 학과와 이름을 대라고 하였다. 설희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저어… 사학과에 다니는 고석진 씨라 구요. 오빠거든요.”
설희는 더 이상 망설이다가는 낭패를 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빠르게 말해 버렸다. 오빠라는 말까지 불필요하게 덧붙이면서.
“잠깐만요. …가만, 지금 고석진 씨라고 했어요?”
“네.”
“동명이인인가? 우리 학생과에도 그런 이름이 있는데….”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눈을 들어 책상 너머로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석진은 학생과 직원이었다. 하지만 직원들은 같은 과에 근무하면서도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다니는지 자리를 지키지 않고 빈둥대다시피 하고 있는 석진을 대학 총장이나 이사장의 일가붙이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있을 뿐, 그가 학부에 적을 두고 공부하는 ‘짭새’인 줄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만큼 약삭빠르게 처신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뺀질이처럼 놀아야 더 의심받지 않을 수 있음을 그는 터득하고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몽녀는 다시 사학과 학생명단을 뒤적이더니
“오라, 사학과에도 고석진이라는 학생이 있네요. 하지만 토요일이라 강의가 없거든요. 가까운 사람부터 확인해보죠 뭐.”
하더니 명단을 펼쳐놓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석진씨! 고 석진씨! 안 계세요?”
몽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사무실 한 구석에서 ‘없어요. 그 친구가 어디 자리에 붙어 있나요.’ 하는 퉁명스런 대답이 들려 왔다.
“조금 기다려 보세요. 가만 있자, 토요일이지만 그가 나타날 거예요. 혹시 찾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실망하진 마세요. 월요일에 사학과에 올라가보면 되니까요.”
그녀는 이렇게 친절하게 말하며, 설희의 모습을 아래위로 살펴보며 속으로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어쩜 저렇게 잘 생겼을까. 꼭 성처녀 같아. 아냐, 슈퍼 모델 같아.’
설희는 복도 의자에 앉아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뒤 몽녀의 얼굴이 있던 창이 다시 열리더니 여직원 두엇이 밖을 내다보고 자기들끼리 시샘과 경탄의 눈초리를 보내 왔다.
3월이라지만 뚝섬의 바람은 제법 찼다.
설희는 땀이 식자 한기가 들었다. 그리고 언제까지 이렇게 무작정 기다릴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설혹 이름이 같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오빠는 아직 학생인데, 교직원이라니…. 아무리 손을 꼽아 계산해 봐도 졸업 후 취업과는 셈이 맞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니 세찬 바람이 그녀를 움츠리게 하였다. 설희는 옷깃을 바싹 세우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때 석진은 학생 회관에서 몇 가지 정보를 얻어듣고, 보고서를 구상하면서 급히 학생과 사무실로 올라오고 있었다.
오늘은 토요일, <주간정보보고>를 하는 날이었다. 직원들이 일찍 퇴근하고 나면 일을 하기가 훨씬 수월하여, 그는 토요일 오후 시간을 활용하고 있었다.
석진이 조금은 무거운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서자 미스 몽이
“이봐요, 석진 씨. 여동생이 찾아왔어요. 조금 전까지 저기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못 봤어요?”
하고 말하면서 대단한 미인이더라는 말을 덧붙였다.
누굴까. 이 시간에 내가 여기 근무하고 있는 줄 알고 찾아올 여자가…? 혜지는 사전 연락 없이 올 애는 아니고. 그렇담, 누굴까? 혹시 여동생 은주가 아닐까?
그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사무실에 돌아온 그는 혹시나 하여 전에 있던 하숙집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주인은 오전에 웬 여학생이 다녀갔는데, 재작년인가 크리스마스날에 한 번 왔던 여동생이라고 말하였다.
‘크리스마스에 찾아 왔던 여동생이라 구?’
혜지와 은주 말고는 자기 집을 찾아 올,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자기를 찾을 동생뻘 되는 여학생이 대체 누굴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의 머리에 섬광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설희다! 설희가 온 것이다. 그가 다시 하숙집에 전화를 걸어 그녀의 인상착의를 물어 보니 틀림없는 설희였다. 아아, 설희가 온 것이다. 자기를 잊지 않고 하숙집으로, 그리고 오늘은 학교로 찾아와 준 것이다. 혜지와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고 나서 죄책감에 사로잡혀 그들 모녀에게 전화조차 걸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멀리 도망친 석진이었다. 자기의 부도덕한 모습, 더럽혀진 양심을 은숙 누나와 설희에게 보일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아지랑이 같은 추억이 무지개 색으로 채색되어 남아 있었고,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빗줄기 속으로 그 무지개가 형형색색으로 구름다리를 만들면서 쏟아지곤 하여 가슴을 아리게 했었다. 그건 비가 아니라 순정의 눈물, 참사랑의 진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쯤 해서 그녀들을 잊기로 하였다. 그것이 그녀들을 위하는 길이고, 그녀들에 대한 애정을 곱게 간직할 수 있는 길이었으므로.
석진은 ‘짭새’ 일과 혜지와의 동거를 통하여 점점 교활하고 비속하게 변해갔고, 그런 자신의 변화에 대해 스스로 전율할 때도 있었다. 타락이란 단 한 번에 인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몸과 마음을 병들어 죽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그는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렇게 보낸 지난 2년 여 동안 그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들 모녀에게, 특히 순결한 설희에게 수없이 용서를 빌었다. 구차한 변명 같지만 석진이 혜지에게 더 흠뻑 빠져드는 데에는 자신의 이중 신분에서 오는 자책감과 과중한 스트레스, 그리고 은숙 모녀에 대한 죄의식 때문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이 그녀의 농밀한 몸을 탐하게 하고 술을 찾게 하고 스스로를 비속의 고기 덩어리가 되도록 방치하게 하였다.
석진은 괴로워했다. 의무 복무자이자 학생으로, 거기에다 교직원으로 신분을 위장하여 학원에 침투해서 동료들의 일거일동을 캐내어 보고해야 하는 자신의 일이 죽도록 미웠고, 그럴 때마다 그는 술을 입에 대고, 혜지의 육체에 빠져 허우적댔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종의 배신행위가 그들에게 얼마나 타격을 주고 있을 것인가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연락할 엄두조차 못내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설희가 자기를 찾아 금호동 하숙집과 대학까지 찾아왔었다는 데 대하여, 일말의 미안함과 함께 묘한 희열을 맛보는 이중 감정이 되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고 보니 설희는 이제 어엿한 여고생이 되어 있을 터였다. 어떻게 변해 있을까. 키는 얼마나 더 컸을까. 그 까만 눈동자와 깨끗한 이마, 반듯한 코, 얇으면서도 오밀조밀하게 생긴 입술, 그리고 선탠이 된 듯한 가무잡잡한 건강한 피부, 긴 목에 긴 다리는 얼마나 더 컸고 얼마나 예뻐졌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에게 설희는 더 이상 어린애로 비쳐지지 않았다. 설희의 모습에 더하여 은숙 누나의 이미지가 오버랩 되어서 일까? 정말로 그들이 보고 싶었다. 아니, 꼭 한 번 만나서 자기의 실수를 용서받고 싶다는 생각이 깊어가기 시작했다.
석진을 학교로 찾아갔던 날 밤, 설희는 잠을 못 이루고 꼬박 밤을 새우다시피 하였다. 그가 학생과에 근무하고 있다니, 무슨 일일까? 조기 취업이라도 된 것일까? 아냐, 다른 사람일거야. 암튼 이담에 꼭 한 번 만나 봐야지. 아니 만나서 담판을 하리라 생각하였다. 왜 말 없이 자기들 곁을 떠났는지. 그 여자는 누구인지. 진짜 결혼한 사이인지. 확실히 알고 싶었다. 아니 알아내야만 했다.
이튿날은 일요일이어서 설희는 늦도록 잠자리에 누워 많은 생각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머잖아 치러야 할 대학 입시를 앞두고 의미 없는 감정놀음에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 석진이라는 사람이 학생과에 있다는 말을 들은 이상, 그가 오빠인지 아닌지를 알아봐야겠고, 설혹 그가 진짜 오빠일지라도 먼발치에서 얼마나 변했는가 확인만 하면 자기의 마음이 깨끗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다음 문제는 지금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리하여 월요일 오후 자율 학습 시간, 설희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빠져 나와 가방을 멘 채 다시 H대학을 찾아갔다. 이제는 그저께처럼 떨리지도 않았고, 시골 풋내기처럼 촌스럽게 굴지도 않게 되었다.
오후 다섯 시 가까이 되었을까.
설희는 학생과 입구의 커피 자판기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동명이인이라 면 그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그녀는 끈질기게 기다렸다. 많은 학생들이 드나들고 있어서 설희는 자기의 모습을 숨기기가 쉬웠다.
이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푸른 와이셔츠 차림의 키 큰 남자 하나가 자판기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설희는 설핏 그를 보았다. 아! 오빠였다. 분명히 고 석진 이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오빠였다. 그가 석진 임을 확인한 순간, 설희는 화장실 쪽으로 몸을 피하고 말았다. 콩닥콩닥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비쳐 본 화장실 거울에는 겁에 질린 제 얼굴이 상기된 모습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이젠 됐어.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 집에 가는 거야. 이제는 나만의 길을 가는 거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자판기 옆에서 동료들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는 전보다 얼굴이 좀 희어졌고, 살이 좀 빠진 것 같았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 옷매무새를 고친 후 어색해지려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거울을 보면서 울컥 서러움이 솟아올라서 그녀는 가슴을 다독였다.
‘아냐. 이젠 됐어. 설희야, 그만 조용히 가는 거야. 나의 길을 가는 거야. 벌써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오빤데, 난 고교생이야. 난 그에 비하여 너무 어리고 초라해. 그보다도 나에겐 할 일이 너무 많아. 괴로워할 시간이 없어. 오빠, 안녕! 그리고 행복해야 돼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린 채 뛰듯이 그의 곁을 스쳐 밖으로 나왔다. 그 때, 석진 옆에 서 있던 미스몽이, 뛰어나가는 설희를 알아보고 놀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저 학생이… 고형, 저 애가 어제 왔던 학생 같은데…”
“응? 누구?”
석진은 자기 곁을 지나친 여학생이 설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황급히 그녀의 뒤를 쫓았다. 부리나케 뛰어나간 석진의 시야에 학생 회관 건물을 막 돌아서려는 여학생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설희는 뒤에서 다급하게 쫓아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더 이상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자 쫓아오던 발자국도 멈췄다가 다시금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설희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서 있었다. 구두 소리도 그녀의 등 뒤에서 멎었다.
“혹시 설희…? 너, 설희 맞지?”
석진은 당황해 하며 낮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설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떨려서 뒤를 돌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 목소리는 분명 오빠의 것이었다. 붙박이별처럼 그 자리에 서 있는 설희에게 다가온 그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곤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아주 짧은 시간 그러나 긴 침묵이 이어진 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짜아식… 바람이 찬데, 그만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어설픈 그러면서도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설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설희는 그의 손이 닿자 자기도 모를 설움이 밀물처럼 몰려와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가 석진오빠라는 것만 확인하고 나서 가리라던 설희의 마음은 석진의 목소리를 듣고 나자 이왕 만난 김에 몇 가지 물어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두 사람은 상기된 표정으로 그러나 복잡한 감정을 안은 채 땅만 바라본 채 후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초봄의 옅은 석양빛이 두 사람의 얼굴에 묻어 있는 찬 기운을 숨겨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작은 카페 한 귀퉁이에 앉아 아무 말도 못한 채 엽차만 마시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감미로운 음악이 실내 분위기를 돋워 주었지만, 둘의 가슴에 고인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덮어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두 사람은 실타래처럼 꼬이고 얽힌 복합적인 감정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내야 할는지 몰라 한동안 침묵으로 대화하였다. 따뜻한 엽차 잔이 다 비워지고 나서 생크림 빵 조각과 커피 잔이 테이블에 놓였지만, 설희는 빵에 손을 대기는커녕 눈을 들어 석진을 바라 보지조차 못했다.
한동안 계속된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석진이었다.
“설희 너…, 더 예뻐졌는데…”
하고 단 한마디밖에 건네지 못했고, 설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엷은 미소를 머금고 설핏 석진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석진은 설희의 미소를 보고 나서야 불안한 마음과 죄책감을 다소 떨쳐 버릴 수가 있었다. 설희는 2년 전의 풋내기 소녀가 아니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키도 몸매도 성인이 되어 있었다. 특히 그녀의 눈매와 얼굴은 그리움을 자양분으로 하여 자라난 고통과 번민 때문일까, 성숙한 내음으로 충만해 있었다. 석진은 그녀의 모습에 눈이 부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또 설희의 침묵이 더욱 그를 가슴 아프게 만들고 있었다. 대학 4학년생인 그가 지금 의무 경찰의 신분에다 학교 교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방법도, 어떤 여자와 동거하고 있다는 말도 설희 앞에서는 너무나 추잡하고 더럽고 비열한 짓거리여서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한편, 설희는 석진의 얼굴이 예전만 못해진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하숙집 여주인의 말에 의하면 약혼녀가 있다던데, 혹시라도 못된 여자의 꾐에 빠져 고통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녀는 그런 어른스런 생각을 하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앉아 그 동안 밀린 대화를 속으로만 나누었다.
‘그래, 지금 오빠가 불행에 빠진 거야. 내 예감이 맞았어.’
이렇게 생각한 설희는, 꼭 묻고 싶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오빠, 결혼은…어떻게, 언제…했어?”
석진은 설희의 질문에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하나.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두서없이 그러나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아냐, 아직 결혼 안…했어. 미안해. 나를 용서해 줘. 엄마와 할머니한테도… 죄 지은 심정이야. 허지만 난 지금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어. 너무나 큰 방황이지. 나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 아니 반드시 벗어나고 말 거야…. 그건 그렇고, 어디로 이살 갔던데? 연락해도 닿질 않으니….”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는 진실로 지금 자신이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 차렸다. 설희의 순결한 얼굴과 아름다운 눈빛이 그를 타락의 늪에서 구출하는 한 가닥 빛이 되어 그의 양심의 문을 세차게 두드렸던 때문일까.
한편 설희는 평소의 쾌활하고 당차던 오빠의 모습이 간데없어지고 어눌한 말투로 심정의 일단을 토로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속울음을 울고 있었다.
창 밖의 가로등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할 때 두 사람은 카페를 나와 한 시간 여를 더 걷다가 헤어졌다. 버스에 오르기 전에 석진은 설희의 왼손을 꼭 쥐어 주었다.
버스에 오른 설희는 차창으로 멀어지는 오빠의 긴 그림자를 훔쳐보면서 까닭 모를 슬픔에 잠겼다. 버스 안의 오디오에서는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리새’라는 듀엣이 부른 「그대 그리고 나」라는 노래였다.
‘…푸른 파도를 가르는 흰 돛단배처럼 그대 그리고 나, 낙엽 떨어진 그 길을 정답게 걸었던 그대 그리고 나, 첫눈 내리는 겨울을 좋아했던 그대 그리고 나, 때론 슬픔에 잠겨서 한없이 울었던 그대 그리고 나, 아아…, 마음을 달래려 고개를 숙이던 그대 그리고 나, 아아…, 우린 헤어져 서로가 그리운 그대 그리고 나……’
노랫말은 애절하게 차안에 흘러 넘쳤고, 피곤한 승객들은 눈을 감고 도시의 고단한 삶을 반추하고 있었다. 설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오빠가 불쌍하다는 생각, 그리고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여자의 직감이랄까. 석진은 지금 무엇엔가 홀려 있거나, 아니면 거대한 음모에 묻혀 자기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날 밤, 설희는 스스로 중대한 결심을 하였다.
석진 오빠가 그 약혼녀(?)라는 여자 때문에 저렇게 얼굴이 상했고, 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라고 직감하고서 뭔가 대책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먼저 그녀가 누군지, 어디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찾아내야만 했다. 설희가 좋아하는 석진 오빠를, 그렇게 듬직하고 서글서글하며 인정 많던 오빠가 설희네로부터 어느 날 갑자기 발을 떼게 만든 여자가 누구인지 밝혀내고, 반드시 오빠를 본 모습으로 되돌려 놓아야겠다고 설희는 결심했다.
설희는 그 계획을 실천할 시기를 여름방학으로 잡았다. 아무래도 학기 초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이 생기고, 또 수업을 소홀히 할 수가 없어서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며칠 동안 집중 추적하면 밝혀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첫댓글 설희ㅡ.곧 책으로 엮어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