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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흥 안양 기산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봉명제
2008년도 장흥군의 "참살기좋은 마을가꾸기사업"에 기산마을이 "팔문장 문화마을 가꾸기사업"으로 선정되어
마을 주민들의 합심된 힘으로 사업이 완료되어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을 주민 여러분 모두다 고생하셨습니다~!
^^*
세월속에서도 청노송이요,서리바람 속에서도 대쪽같은 곧음을 ~
選 詩下賜 선시하사, 명종임금에게서 선시 십권을 하사받는 그림입니다,
아침에 매화꽃 소식을 접합니다,
부급종사, 책장을 짊어지고 선생님을 찾아가 공부하는 그림입니다,
옥녀 송학, 옥녀봉 대숲 소나무에서 살았던 학의 그림입니다,
봉명흥학, 봉명재 서재에서 남계선생님 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위하여 달려가는 학동들의 모습입니다,
등과 귀향,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고향에서 환영받는 금의 환향입니다,
설중 매향
碑文과 詩文그리고 문집에 대하여 설명드립니다,
우리 마을은 팔문장님들의 빛나는 업적과 얼로인하여 후손들이 정신적 영향과 더불어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너 나 없는 마음속에 팔문장님들의 시가비를 세우고 현창 시켜드리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진즉에 실현하지 못한데 대한 죄송스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금번에 참 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이명흠 군수님 한봉준 전임 면장님
백형갑 신임 면장님 김문호 개발과장님 박광규 행복마을 계장님 이봉간,김종일 담당관님들의
각별한 배려속에 팔문장 전통 문화마을 가꾸기 사업의 성과를 낼수 있었습니다,
사업을 진행해 오는동안 알게 모르게 도와주신 추진위원 여러분 특히 백인천님과 백문선님
노종건님 백형보님 재경향우 회원님들의 열열한 도움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먼저 표합니다,
비문과 시문은 추진위원회 총회를 거쳐서 확정되어
석물 공장에서 제작되어 오늘 세워지는 비문입니다,
비문과 번역시문이 확정 되기까지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특히 팔문장 중에서 기봉님과 옥봉님은 자료가 풍부하였지만
서곡, 죽곡님의 자료는 그나마 기양사나 장흥 문화원에 문집이 있어서
그런대로 자료 확보가 쉬웠습니다만,
남계,지천님의 자료는 광산김씨 종친회장 김중채님 한테까지 연락을 했어도
종중에도 자료가 없었습니다,
동계공님도 기양사나 종손, 문화원에도 자료가 없었으며
장희구박사 논문중에 광주 백남윤님이 시본을 소장하고 계신다고 되어 있었지만,
백남윤님도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당님 역시도 진사시가 있다고해서 화합 차원에서 진사시를 세워 드리기로 협의되어
추진한것 이었는데 70년전 아래 사랑채 불이나서 문집이나 시본이 소실되고
종가에 소장 되고있지 않았습니다,
명강님 역시도 말만 있다고 되어 있었지만, 내 놓으신 분은 없었습니다,
다행이도 김규정 선생님께서 한학을 연구중에 계셔서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알았던 인연으로
국립중앙 도서관에서 찾아서 동계공 삼강록 문집과 詩4편이 포함된 복사본을 , 그리고 풍잠을 제외한
팔문장님의 시문, 명강님의 시문, 노진사님의 차운詩 등을 보내 주셔서
아쉬운대로 시가비 현창사업에 모양을 갖출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보내주신 시문들은 백수인 교수님께서 바쁘신 업무중에도 흔쾌히 번역을 해 주셨습니다,
특히 월송 백남식님 께서는 비문을 지으시고도 이름 올리시기를 극구 사양 하시었고
고증과 교정 부분에 많은 수고를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위에 도와주신 분들의 덕택으로 시가비 건립에 첫 단추를 꿸수있는 계기가 된것같습니다,
수고 해주신 여러분께 머리숙여 감사 드리는 바입니다,
팔문장님들 중에서 어디에도 풍잠님의 시나 문집은 찾을길이 없었습니다,
화순 능주등 교분이 있었슴직한 분들의 문집을 뒤지고 혹시 차운시라도 찾고자 지금도 김규정님께서
수고를 하시고 계십니다만, 찾을길이 막연하다고 전해 오십니다,
더욱 아쉬운점은 안그래도 풍잠공님에 대한 팔문장 시비가 장흥향중에서 치곡 조여흠님과
있었던 것으로 어른들께 기 들었었기에 반드시 문집이나 詩문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했습니다만, ...
그러나,
한국 고전문학 번역원과 국립중앙 도서관에 소장된 자료중에서
팔문장님에 대한 소중한 자료를 확보할수가 있었습니다,
현재 이희승 국어대사전이나 인터넷 네이버등에 조선 팔문장이
옥봉님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만,
조선왕조 실록에서 팔문장에 대해 딱, 두번 기록이 나오는데 두번다
기봉 백광홍님으로 기록되어있으며, 그 명단은 백광홍,이산해,송익필,최경창,이순인,
윤탁연, 최립,하응림, 혹은 율곡이이,이렇게 여덟분 이라고 합니다,
후세에오면서 넣고 빼고 또는 글 잘하는 사람은 팔문장이라
통칭을 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기봉님은 조선팔문장 이시고 옥봉님은 최경창, 이달과 더불어
삼당시인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조선 팔문장이 나신 기산 마을에 동문수학 하셔서 진사 혹은 대과에
급제하신 분들을 한 울타리안에 장흥지역 팔문장으로 불리셨다고 사료됩니다,
특히,
금번에 김규정님께서 보내주신 국립중앙 도서관에 소장된 문집중에서
기산팔현에대한 서문을 강진성전면 월남리 원주이씨 이 금 님 문집에서
발견이 되었고,존재 위백규님의 4弟이신 서계 위백순님의 문집에서는
기산 팔현에대한,여덟분 모두에 대해서 사자성어 詩를 복사해 보내 주셨기에
조선왕조실록 복사 부분과 기산 팔현에대한 자료등 을 여기에 첨부합니다,
여기에 복사된 자료들은
1400~1900년대까지 기산을 중심으로 살다가신
선현들의 오백년에 걸친 자료들중 일부입니다,
마을가꾸기 사업의 말미에 준공식때 쯤,
모든 자료들 중에서 번역이 완료된 작품들 만이라도 묶고 미쳐 번역을못한 자료들은
복사를붙여서 소책자 문집을 만들어볼 요량으로 백수인 교수님과 김규정 선생님께
서문을 부탁 드리고 있으며, 군수님과 면장님, 그리고 문화원장님, 전교님, 추진위원장님,
월송님께 추천서와 인사 말씀을 부탁 드려놓고 있습니다,
준비중에있는 자료 일부를, 동계공님의 후계이신 백남송님께서 문집복사를
소원하셔서 비문을 세울때에 오신 귀하신 손님들께 참고 자료로 동계공 문집과
함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몇부 복사해 드린것입니다,
끝으로
이번에 미쳐 세워드리지못한 지천님이나 죽곡님은 추후 기회가되면
시가비를 세워드릴 계획이며 항차 장흥가단의 17수등을 시가비를
세워볼 계획도 추진중에 있다는것을 말씀드립니다,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2008년 10월 20일 기산이장 백광철 (올림)
낙원동산
장흥군에서 2008년도 공모사업으로 추진한 "참 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에 우리마을의 "팔문장 문화마을 가꾸기사업" 이 선정되었습니다. 이 사업은 우리 마을이 장흥군에서 "제 1 기산" 이라 불리며, 조선 중엽에 배출된 조선팔문장 중의 한분이신 기봉 백광홍 선생님등 장흥 팔문장 여덟분이 모두 우리마을에서 태어나 살다가신 분들로 선현들의 업적을 기리고 유서깊은 유적들을 복원, 보존 함으로서, 과거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러서도 전국에서 가장 살기좋고 명망있는 마을로 일구어 가자는 것입니다,
참 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한 이곳 낙원동산은 1977년 새마을 사업 당시 故 백낙형님이 마을회관부지를 희사해 주셨고, 그 분의 장자 백인천님이 ‘낙원거사 행적비’ 주변부지를 사용할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확보한 부지에 상금으로받은 사업지원비, 마을 자부담금 등을 보태 이 소공원을 조성 하였습니다.
특히 시가비 건립 과정에서 용산면 출신 洗石軒 金圭錠님은 문집 등 자료들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국립 중앙도서관, 한국고전번역원 등에서 어렵게 찾아 보내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고, 한시 등 자료의 번역은 조선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백수인님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팔문장 문화마을가꾸기’ 사업을 추진해 오는동안 토지사용을 승낙해 주신 여러분들과
온 정성과 사랑으로 도와주신 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참살기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에 도움을 주신분들의 공로와 우리마을 주민들의 마음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그 뜻을 새겨 이 비를 세웁니다.
2008년 9월 일 주민일동 세움
八文章 전통 문화마을
獅子山 南麓 가마등 (鼎嶝) 아래 자리한 우리 마을은
당대 八文章 輩出로 長興에 一岐山이라 전해 오고있다
鳳鳴齋
우리마을 古有書齋로 많은 鴻儒碩學을
배출 하였으며 興學契를 설립 유지하여 왔으나 勢不得己
철거하고 遺虛碑가 있다,
八文章
조선조 중엽 (1500 연대)에 남계 金胤 서곡 林賁 죽곡 林회
기봉 白光弘 동계 白光城 풍잠 白光顔 옥봉 白光勳
지천 金公喜 等 八賢이며 기양사에 配享되셨고
繼出名儒하니 조선조 후기 梧堂 盧瓘은 成均進士로
세인의 존경을 받으셨으며 孝星祠에 配享되셨다
明岡 白奉欽은 鳳鳴齋 訓長으로 著名하셨다
慶宴臺
參判 白繪의 네 아들이 登科함으로 마을뒤 광장 (진챙이)에
築臺하여 경연을 베푼 곳으로
八文章 또한 이곳에서 경연을 하였으므로 文章臺 라고도 한다
近世에 까지 마을 民俗놀이 祭典場으로 이용하여 왔으나
현재는 사유화 되고 경연대 碑가 그 흔적을 전하고 있다
특히 조선 팔문장중의 한분이신 岐峰 白光弘先生이 지은 關西別曲은
우리나라 기행가사의 효시로서 조선조 이후 모든 기행가사 문학의
모체라 한다
이러한 선현들의 명예로운 문화유산의 연유로
팔문장 문화마을 가꾸기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선현들의 遺址를 보존하고 길이 전 하고자 이 비를 세우노라
2008년 9월 水原人 白南植 謹識
문득 떠오른시
동계 백광성
가을날 맑은 물을 내 정신으로 삼고, 옥을 내 비장으로 삼으니
대바람, 매화 달은 내 시 속에 담겨지네.
시내 동녘은 흥하고 발전하여 보기는 좋다하나
낙북을 내 스스로 영원히 떠나온것을 누가 알리오,
偶題
秋水爲神玉作脾 竹風梅月入新詩
溪東謂興長相好 洛北誰知自永離
동계(東溪) 白光城(1527-1595) 명종 16년 사마시에 급제했다.
송강, 일휴당과 사귀었고 학포의 문하생이었다.
벼슬에 뜻을 두지않고 동계에 정자를 짓고 지내며 교육에 힘썼다.
(남계의 시가 번역 과정에서 착오로 복거로 교체함)
내가 사는 집
남계 김윤
추운 겨울에 이르러도 소나무 계수나무 향기 가득하고
짙푸른 구름 겹겹이 떠 빈 산을 채우네.
창가에 앉아 밤새우는 이야기로 하늘에 먼동이 하얗게 터오는데
술 외에는 매화향기조차 끼어들지 못하네.
卜居
松 桂芳 盟 到歲寒
翠雲浮重滿空山
一窓夜話天將雪
酒外梅香未入欄
남계(南溪) 金胤(1506-1571) 영천은 자신의 학문을 이을 사람은 윤과 분이라고 했다.
선조 3년 사마시에 급제, 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충의
오당 노관
한 잎 푸른 느릅나무 잎새가 자기 몸을 보호하고
당당히 충성과 의리로 마음껏 봄을 드러내네.
황실의 옛 이름 홀로 존경하고 아끼는
그대 참된 성품 우러러 부럽소.
忠義
一葉靑楡保一身 堂堂忠義露心春
皇朝舊號獨尊愛 景慕吾公性任眞
梧堂 盧瓘(1797-1882) 成均 進士로 世人의 尊敬을 받았다
사자산에 올라
명강 백봉흠
평지에서는 산이 가장 높더니
산에 오르니 내가 가장 높네.
높은 곳에 있는 것은 내 소원이 아니니
걸어 내려와 높은 자리 양보하네.
登獅子山
平地山爲頭 山上我爲頭
居高非心願 步下讓一頭
明岡處士 白奉欽( 1859~1909 ) 鳳鳴齋 訓長으로 著名 하였다
이성주에게 감을 보내며
서곡 임분
바닷가 가을은 빨리 찾아와 산밭에 감이 벌써 붉었소.
동글동글 이슬 빛이 맑고, 알알이 서리가 짙게 맺혔소.
맛은 당신께서 드시기에 알맞고 과육도 당신께 적합할 것이오.
가난한 집에 마땅히 드릴 게 없어 대바구니 가득 채워 보내드리오.
送枾李城主
海國秋來早 山園枾子紅
團團露色嫩 箇箇霜華濃
風味宜尊長 王更漿合相公
貧家無表物 緘送满筠笼
서곡(書谷) 林蕡(1501-1556) 8세 때 태수가 시를 짓게 할 만큼 신동으로 알려졌다.
중종 35년 사마양시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나라의 특명으로 정해군 장례를 집례했다.
여원에 와서 월출산을 바라보며
옥봉 백광훈
두 해 동안 서울 땅 나그네로 떠돌 땐
꿈에 본 고향 산 얼마나 정겨웠나.
오늘 와 참모습 만나고 보니
꿈일까 두려워 고개를 드네.
到女院望月出山
二年辛苦客秦城 夢見鄕山別有情
今日却逢眞面目 擧頭猶怕夢中行
옥봉(玉峰) 白光勳(1537-1582) 명종 19년 진사가 되었으나 선조 10년에야 관직에 나섰다.
최경창 이달과 함께 3당시인으로 불렸다. 영화체에 뛰어난 명필로 유묵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관서별곡
기봉 백광홍
관서 명승지에 왕명으로 보내시매
행장을 다스리니 칼 하나뿐이로다.
연조문 내달려 모화고개 넘어드니
귀심이 빠르거니 고향을 생각하랴?
벽제에 말 갈아 임진에 배 건너
천수원 돌아드니 송경은 옛나라라
만월대도 보기 싫다 황강은 전쟁터라
가시덤불이 우거졌다.
산 해가 기울거늘
말채찍 다시 빼어 구현을 넘어드니
생양관 기슭에 버들마저 푸르렀다.
감송정 돌아들어 대동강 바라보니
십리파광과 만중연류는 상하에 어리었다.
봄바람이 불어와 화선을 비껴 보니
녹의홍상 비껴 앉아
섬섬옥수로 거문고 이어 타며
하얀 이 예쁜 입술로 채련곡 부르니
하늘 신선 연엽주 타고 옥하수로 내려온 듯
설마 나랏일에 바쁜들 풍경을 어찌하리?
연광정 돌아들어 부벽루에 올라가니
능라도 방초와 금수산 연화는 봄빛을 자랑한다.
천년 기양에 태평 문물은 어제인 듯 하다마는
풍월루에 꿈 깨어 칠성문 돌아드니
세마태 홍의에 객흥이 어떠한가?
누대도 많이 있고 산수도 많건마는
백상루에 올라앉아 청천강 바라보니
삼차 형세는 장함도 끝이 없다.
하물며 결승정 내려와 철옹성 돌아드니
연운 분첩은 백리에 펼쳐있고
천설 중강은 사면에 비꼈구나.
사방 거진과 일국 웅관이 팔도의 머리로다.
배밭에 꽃 피고 두견화 못다 진 때
진영이 무사하니 산수를 보려고
약산 동대에 술을 싣고 올라가니
눈 아래 구름이 바라봐도 끝이 없다.
백두산 내린 물이 향로봉 감돌아
천리를 비껴 흘러 대 앞으로 지나가니
반회 굴곡하여 노룡이 꼬리치고 해문으로 드는 듯
형승도 끝이 없다 풍경인들 아니 볼까?
작약 선아와 선연 옥빈이
운금 단장하고 좌우에 펼쳐 있어
거문고 가야고 봉생 용관을
불리거니 잇게커니 하는 양은
주목왕 요대상에 서왕모 만나 백운곡 부르는 듯
서산에 해 지고 동령에 달 오르고,
녹빈 운환이 반함 교태하고
잔 받드는 양은 낙포 선녀
양대에 내려와 초왕을 놀래는 듯
이 경도 좋거니와 원려인들 잊겠는가?
감당 소백과 세류장군이
일시에 동행하여 강변으로 순하하니
빛나는 옥절과 드높은 깃발은
장천을 비껴지나 벽산을 떨쳐간다.
도남을 넘어들어 배고개 올라 앉아
설한재 뒤에 두고 장백산 굽어 보니
중강 복관은 갈수록 어렵구나.
백이 중관과 천리 검각도 이렇듯 하였던가?
팔만 비휴는 계도 전행하고
삼천 철기는 옹후 분등하니
호인 부락이 망풍 투항하여
백두산 내린 물에 일진도 없도다.
장강이 천참인들 지리로 홀로 하며,
사마 정강한들 인화 없이 할 수 있나?
시평 무사함도 성인의 교화로다.
소화도 쉽게 가고 산수도 한가할 때 아니 놀고 어이하랴?
수항정에 배 꾸며 압록강 저어 내려
연강 열진은 창기 편듯 하였거늘
호지 산천을 역력히 지내보니
황성은 언제 쌓여 황제묘는 뉘 묘인가?
감고 흥회하여 잔 다시 부어라.
비파관 내리 저어 파저강 건너가니,
층암 절벽 보기도 좋도다.
구룡소에 배 매고 통군정에 올라가니,
대황은 장려하여 침이하지교로다.
제향이 어디인가? 봉황성 가깝구나.
귀서할 이 있으면 호음이나 보내곺다.
천배에 대취하여 무수를 떨치니,
박모 한천에 고적성이 시끄럽다.
천고 지형하고 홍진 비래하니, 이 땅이 어디인가?
사친 객루는 절로 흘러 알 수 없네.
서변을 다 보고 반패 환영하니,
장부 흉금이 조금은 나아지리라.
설마 화표주 천년 학인들 나 같은 이 또 보았는가?
어느 때 형승을 기록하여 구중천에 아뢸까?
미구 상달 천문 하리라.
기봉(岐峰) 白光弘 (1522-1556) 명종 4년 사마양시와 대과에 급제, 홍문관정자를 지냈다.
어명으로 반궁에서 公이 冬至 賦로 장원하여 명종으로부터 ‘선시 10권’을 하사받았다.
1555년 평안평사를 지내면서 가사 ‘관서별곡’을 지었다.
關西別曲
岐峯 白光弘
關西 名勝地에 王命으로 보실
行裝을 다사리니 칼 이로다
延詔門 달아 모화고 너머드니
歸心이 르거니 故鄕을 思念랴
碧蹄에 말가라 臨津에 건너
天水院 도라드니 松京은 故國이라
滿月臺도 보기 슬타 黃岡은 戰場이라
荊棘이 지엇도다 山日이 半斜컨을
歸鞭을 다시 와 九硯을 너머드니
生陽館 기슭에 버들죠차 프르럿다
感松亭 도라드러 大同江 보니
十里波光과 萬重烟柳 上下의 어뤽엿다
春風이 헌야 畵船을 빗기 보니
綠衣紅裳 빗기 안자 纖纖玉手로 綠綺琴 니며
皓齒丹唇으로 采蓮曲 브니
太乙眞人이 蓮葉舟 고 玉河水로 리
셜라 王事靡鑒 風景에 어이리
練光亭 도라드러 浮碧樓에 올나가니
綾羅島 芳草와 錦繡山 煙花는
봄비슬 쟈랑다 千年 箕壤의
太平 文物은 어제론닷 다
風月樓에 여 七星門 도라드니
細馬駄 紅衣예 客興이 엇더뇨
樓臺도 만고 山水도 하건마
百祥樓에 올나안 晴川江 라보니
三叉 形勢난 壯홈도 가이 없다
믈며 決勝亭 려와 鐵瓮城 도라드니
連雲 粉堞은 百里에 버려 잇고
天設 重崗은 四面에 빗겼도다
四方 巨陣과 一國 雄觀이
八道 爲頭로다
梨園의 피고 杜鵑花 못다 진 제
營中이 無事커늘 山水를 보랴야
藥山 東臺에 술을 실고 울나가니
眼底 雲天이 一望에 無際로다
白頭山 린 물이 香爐峯 감도라
千里를 빗기 흘너 臺 압프로 지가니
盤回屈曲야 老龍이 리치고
海門으로 드난 形勝도 이업다
風景인달 안니 보랴
綽約 仙娥와 嬋姸 玉鬂이
雲綿 端粧고 左右의 버려 이셔
거문고 伽倻皷 鳳笙 龍管을
부거니 니애거니 양은
周穆王 瑤臺上 의 西王母 만나
白雲曲 브난
西山에 지고 東嶺의 달 올아고
綠鬂雲鬟이 半含 嬌態고
盞 밧드 양은 洛浦 仙女
陽臺에 려와 楚王을 놀닷
이 景도 됴커니와 遠慮 이즐쇼냐
甘棠 召伯과 細柳 將軍이
一時예 同行야 江邊으로 巡下니
煌煌 玉節과 偃蹇 龍旗
長天을 빗기 지나 碧山을 쳐 간다
都南을 너머 드러 고 올나 안자
雪寒 뒤에 두고 長白山 구버보니
重岡 複關은 갈쇼록 어렵도다
百二 重關과 千里 劒閣도 이럿텃 하던도
八萬 비휴 啓道 前行고
三千 鐵騎는 擁後 奔騰니
胡人 部落이 望風 投降야
白頭山 나린 물의 一陣도 업도다
長江이 天塹인달 地利로 혼쟈 며
士馬 精强들 人和 업시 올쇼냐
時平 無事홈도 聖人之化로다
韶華도 슈이가고 山水도 閒暇 졔
아니놀고 어이리
受降亭의 여 鴨綠江 리 져어
連江 列鎭은 창긔 버듯 엿거늘
胡地 山川을 歷歷히 지보니
皇城은 언제 며 皇帝墓 뉘 무덤고
感古 興懹야 盞 고쳐 부어라
琵琶串 리 저어 坡渚江 건너 가니
層巖絶壁 보기도 죠토다
九龍쇼의 를 고 統軍亭의 올나가니
臺隍은 壯麗야 枕夷夏之交로다
帝鄕이 어듸오 鳳凰城 갓갑도다
西歸리 이시면 好音이 보고져
千盃에 大醉야 舞袖를 치니
薄暮 寒天의 鼓笛聲이 지지괸다
天高 地逈고 興盡 悲來니
이 히 어듸오
思親 客淚 졀로 흘러 모로라
西邊을 다 보고 返旆 還營니
丈夫 胸襟이 져그나 리로다
셜라 華表柱 千年鶴인들 날 가타니 보안난다
어늬제 形勝을 記錄야 九重天의 로료
未久 上達 天門리라
기봉(岐峰) 白光弘 (1522-1556) 명종 4년 사마양시와 대과에 급제, 홍문관정자를 지냈다.
어명으로 반궁에서 公이 冬至 賦로 장원하여 명종으로부터 ‘선시 10권’을 하사받았다.
1555년 평안평사를 지내면서 가사 ‘관서별곡’을 지었다.
소소래사에 묵으며
- 기봉 백광홍 -
등나무 덩굴과 다래 줄기는 옛 길을 덮었고
사슴과 고라니는 뜰에 나와 뛰노네.
수행 중인 스님은 말이 없는데
빈창에 비친 바닷달만 차갑네.
宿小蘇來
藤蘿籠古逕 麋鹿出堂壇
入定僧無語 虛窓海月寒
기봉(岐峰) 白光弘 (1522-1556) 명종 4년 사마양시에 급제, 홍문관정자를 지냈다, 어명으로 반궁에서 公이 冬至 賦로
장원하여 명종으로부터 ‘선시 10권’을 하사받았다. 1555년 평안평사를 지내면서 가사 ‘관서별곡’을 지었다.
만수원에 붙임
- 기봉 백광홍 -
사자산 아래 호계 근방
만수원 높은 다락 낮 꿈이 기네.
생각은 서쪽 변방에 있는데 소식이 끊어지니
도리어 남녘 고을이 내 고향임을 잊고 있다네.
題滿樹院
獅山之下虎溪傍 滿樹高樓午夢長
西塞有思消息斷 却忘南國是吾鄕
기봉(岐峰) 白光弘 (1522-1556) 명종 4년 사마양시에 급제, 홍문관정자를 지냈다.어명으로 반궁에서 公이 冬至 賦로
장원하여 명종으로부터 ‘선시 10권’을 하사받았다. 1555년 평안평사를 지내면서 가사 ‘관서별곡’을 지었다.
최고죽의 부채에 붙임
- 기봉 백광홍 -
관서 명승지에 큰 강 셋 흐르고
곳곳마다 꽃피는 정자에 말 수레가 매어 있다네.
그대 백상루에 이르거든 물어나 보아주오.
푸른 창에는 강남을 꿈꾸는 이가 꼭 있을 것이니.
題崔孤竹扇
關西名勝大江三 處處花亭駐客驂
君到百祥樓下問 碧牕應有夢江南
기봉(岐峰) 白光弘 (1522-1556) 명종 4년 사마양시에 급제, 홍문관정자를 지냈다.어명으로 반궁에서 公이 冬至 賦로
장원하여 명종으로부터 선시 10권’을 하사받았다. 1555년 평안평사를 지내면서 가사 ‘관서별곡’을 지었다.
외진 곳에 살다
- 옥봉 백 광훈 -
<1>
외진 곳에 사니 후미져서 오는 이 드물고
일 없어 사립문은 낮에도 열지 않네.
꽃 가득한 작은 뜨락엔 봄기운 고요한데
한 마디 산새 소리가 푸른 이끼에 내려오네.
<2>
종일토록 사립문에 찾는 이 없고
때때로 먼 곳 새는 온갖 소리로 지저귀네.
매화꽃 다 지자 살구꽃 피어나고
가랑비 한 줄기에 봄이 더욱 깊어지네.
幽居
<一>
幽居地僻少人來 無事柴門晝不開
花滿小庭春寂寂 一聲山鳥下靑苔
<二>
竟日柴門人不尋 時聞幽鳥百般吟
梅花落盡杏花發 微雨一簾春意深
옥봉(玉峰) 白光勳(1537-1582) 명종 19년 진사가 되었으나 선조 10년에야 관직에 나섰다.
최경창 이달과 함께 3당시인으로 불렸다
영화체에 뛰어난 명필로 유묵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鳳鳴亭 봉명정 -丁景達(1542-1602)-
山濕今朝雨 산은 축축한데 오늘 아침 비가 내리니
溪含昨夜雲 계곡은 어젯밤 구름을 머금었지.
西林僧有路 서림사 스님 길이 있어
芝蕨自芸芸 지초와 고사리는 저절로 많다네.
鳳鳴亭 (二首) 봉명정 2수
綠楊江水野烟生 푸른 버들 강물은 들에 연기를 일으키고
舞蝶飛花滿鳳鳴 춤추는 나비 날리는 꽃은 봉명정에 가득하네.
人去酒醒春寂寂 사람은 가고 술은 깨었으나 봄은 조용하고 쓸쓸해
一聲鳴鳥下西城 한 마디 새 울음 소리 서쪽 성에 내려 오네.
小學書中悟昨非 소학책 가운데 어제의 잘못을 깨우쳤다 했으니
寒暄有語得依歸 한훤당(김굉필) 말씀 얻어 돌아와 의지하리.
優游涵泳無窮樂 조용히 학문의 깊은 뜻을 완미하는 끝없는 즐거움
顔孟何人亦庶幾 안회와 맹자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되려하는가?
挽白玉峯光勳 백옥봉 광훈을 애도하다.
半生長夢在淸閑 반평생 긴 꿈 속된 세상 떠나 조용해
礻/親却歸心到玉山 가까이 돌아 가려는 마음 옥산에 이르렀네.
灑落精神元不死 개운하고 깨끗한 정신은 원래 죽지 않았으니
詩聲筆跡滿人間 시인의 문장은 세상에 가득하네.
挽金進士胤 김진사 윤을 애도하다.
-梁應鼎-
痛惜金徵士 슬프고 애통하도다. 김징사여 !
魂隨萬里旌 그대 넋이 명정따라 만리를 가네.
依依婦巖月 부암 위의 달은 헤어지기 서운해 하는
能照舊心情 우리의 옛 마음을 비춰주리.
註) 徵士 - 조정에서 부른 학덕이 높은 선비
鳳齋數郡詩會 봉명재에서 여러 군의 시 모임을 열다.
-白奉欽-
白雲有客好相尋 오가는 나그네 서로 좋아 찾으니
滿壑風聲閉戶深 첩첩 골짜기 바람소리 문 닫힌 집에도 들리네.
數郡靑春詩士面 여러 군 젊은 시객들 대하니
萬家喜雨野人心 온 마을 시골사람 가슴에 좋은 비 내리네.
山暗燈光沉草閣 깜깜한 산 밝은 등잔 불은 초가집에 가라 앉고
月明夜色隱篁林 달밝은 밤경치는 대숲에 숨어 든다.
別後書臺君記否 그대는봉명재에서 헤어진 일을기록했는가 아니 했는가?
溪邊梅柳滿庭陰 시냇가 매화버들 뜰에 가득 그늘지네.
庚午季冬五六同年期會于社稷洞酒闌善初首題一絶諸人和之或卽席或追述 - 懷齋 朴光玉詩題
경오년(1570년,선조3) 겨울 12월에 동년(同榜及第人,함께 과거에 급제한 사람) 5,6인이 사직동 술집에 모였다.
박선초(朴好元,당시 형조참의)가 먼저 시 한 수를 짓고 모든 친구가 화답했는데 혹은 즉석에서 혹은 나중에 지었다. - 회재 박광옥시제
追和 뒤에 화답한 시 -南溪(金胤時叅奉)-
朝旭昇天歛海烟 아침해 솟아 오르자 바다연기 걷히고
松雲灑露上林前 솔구름은 상림 앞에 이슬을 뿌리네.
滿城多少公卿宅 성 안은 대부분 공경대부 집인데
幾許同寅有耆年 함께 공경하던 늙은 재상 몇이나 될꼬?
訪金南溪于長興邸次韻奉示(至月十九日夜) -朴光玉(1526-1593)-
장흥저택으로 김남계를 찾아가 차운을 지어 보이다.(동짓달 19일 밤에)
海客初經北地寒 섬 나그네 처음 추운 땅을 지나다
愁吟相望聳肩山 서로 시름에 젖어 용견산을 바라보았네.
數杯今夕城西酒 어젯밤 성 서쪽에서 두어 잔 술 들이켰더니
恰聽南溪水拍欄 흡사 난간을 치는 남쪽 시냇물 소리 들리는 것 같네.
滯客無何歲又寒 나그네 부질없이 또 일년이 지났으니
孤吟日日對南山 외로이 날마다 남산만 바라본다.
朝來偶得江湖信 아침에 우연히 세상 소식 들으니
梅竹依然滿舊欄 매화 대나무 변치 않고 옛 난간에 가득하다고...
翌朝復用前韻奉問 다음날 아침 앞 운자를 사용해서 시를
다시 지어 여쭘.
昨夜風威十分寒 어젯밤 바람끝이 매우 차갑더니
朝看木覓幻氷山 아침에 보니 나무들이 빙산으로 변했네.
應知病瘧南溪老 응당 알지 못하겠는가? 병에 시달린 남계 노인을
閉戶愁吟雪滿欄 문 닫고 시름에 겨웠는데 눈 만 난간에 가득하구려!!!
岐山鳳鳴齋 기산 봉명재 -宣始啓-
齋名不偶瑞禽鳴 서재 이름은 상서로운 날짐승 울음 짝하지 못한다.
一髮岐山文氣晴 작은 기산 문자 향기 맑아
玉女峯精一輩出 옥녀봉은 뛰어난 인재 계속 쏟아내고
德林峙秀八賢生 덕림재는 빼어난 팔문장 낳았으니
海鄕從此斯文蔚 세상은 이를 일러 사문이 성하게 일어났다 했네
東國當時吾道明 당시 조선의 우리 도는 밝아
自遠方來友朋樂 멀리서 벗이 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했다네
不惟登口盡詩聲 다만 시를 얻어 다 읊을 뿐이겠는가?
次聽溪齋韻 청계재 운을 차운하다. -宣泳完-
白玉群峰鎭海陽 백옥의 여러 봉우리 해양을 진압하고
一源溪水萬流長 한 근원 시냇물에 만가닥 물은 흐른다.
露下芙蓉秋澹澹 이슬맺은 연꽃은 가을에 담박하고
月寒竹樹夜蒼蒼 달빛 찬 대나무는 밤에 더 푸르르다.
千古文章已陳迹 천고의 문장들은 이미 옛 자취 되었으니
四時雲物更新光 세월의 운수 언제 다시 새롭게 빛을 발할까.
鳳飛龍臥今誰領 봉황새 날고 용이 누워 있는데 지금은 누구인고
往事商量獨踽凉 지난 일 헤아리며 홀로 외로이 길을 가네.
慶宴臺行鄕飮禮有感 -白奉欽(1859-1909)-
경연대에서 향음례를 행하면서 느낌이 있어
八賢三百有餘年 팔문장 삼백여 년
景慕遺臺設禮筵 우러러 사모하는 대 남아 있어 향음례를 베푼다.
秦漢江山嗟廢盡 진나라 한나라 강산은 다 없어 졌음을 탄식하며
宋明日月喜頒傳 송나라 명나라 문명은 내려 전해 옴을 기뻐하노라.
階列東西籩豆獻 섬돌에 동서로 제기를 진열해 향음례를 올리고
堂分上下瑟笙懸 당 위 아래에는 거문고 생황이 나뉘어 걸려 있네.
若令天下同斯習 만약 천하로 하여금 이 유습을 함께 익히게 한다면
孝友家家善俗遷 효도와 우애의 풍속이 집집마다 잘 옮겨가리.
懷鄕 고향을 그리워 하며 -金公喜-
靑山連界月明通 푸른산 경계 잇닿아 달은 밝게 통하니
相望秋天弟我同 서로 바라보는 가을하늘 아우와 나는 매 한가지.
黃髮壽觴遲晩菊 7,80 늙은이 축수하는 술 저무는 국화를 더디게 하고
白雲枯淚滴殘楓 흰구름 마른 눈물 남은 단풍에 물방울 지네.
生憎川嶺遲來駕 공교롭게도 시냇물과 고개로 남의 내방 드무니
却歎瓢旅繫佩銅 도리어 탄식하노라! 정처없이 흘러 떠 도는 나그네 돈을 매고 찻다고
陋地論心惟一紙 내가 사는 곳에서 마음에 품은 생각 서로 이야기한 것 다만 한번 써서
自今勸付向南鴻 이제 스스로 남쪽으로 가는 큰 기러기에게 힘써 당부하여 맡기노라.
鳳鳴齋講會 봉명재 강의 모임 -金玉燮(1878-1930)-
晩風來過讀書城 늦 바람이 책읽는 곳을 와 지나가니
禮義東方士習明 동방 예의지국 선비 풍습 밝네.
朋酒初巡山日暖 벗의 술잔 처음 돌자 산 해는 따뜻해 지고
詩歌三규柳鶯聲 시가 세번 마치자 버들꾀꼬리 소리지르니,
[註 :끝낼 규門/癸]
一局交爭看世態 한 판 서로 사귀고 다투는 세상 형편 보는 것 같아
長江無盡感吾生 긴 강은 다 함 없이 우리를 감동시키네.
明月溪南分去後 계곡 남쪽 밝은 달은 가는 뒤에 남아 분별하니
那堪夜夜此時情 어떻게 밤마다 이 때의 정취를 견뎌낼꼬?
鳳鳴齋書事 봉명재에서 글 공부하는 일
誅茅結屋築新樓 띠 베어 집 지어 새 누대를 세워
一鑑溪流淨不泥 거울 하나에 시냇물 흐르니 진흙이 되지 않고 맑아 지네.
欺世無非傳市虎 세상을 속이니 잘못 아닌 것이 전하여 모두가 믿게 되니
得朋惟有照心犀 사사로운 정을 알아 마음에 비춰 보네.
野櫻紅熟街兒集 들판 앵두 붉게 익어 거리 아이들 모으고
驛柳靑深征馬嘶 역참 버들 더욱 푸르러 먼길 떠나는 말 울부짖는다.
從今修善知何在 이제부터 선을 보아 친목을 닦고 어디에 있음을 알아
愼是樞機復白圭 이 지도리를 신중히 하고 말을 삼가해야 함을 고하네.
鳳鳴齋詩會(二首) 봉명재 시 모임, 2수 -金玉燮-
海濱群峰都揷天 바닷가 여러 봉우리 모두 하늘에 꽂고
書樓已建百年前 글 공부하는 다락집 이미 백년전에 세웠네.
層層松桂千秋雨 여러 층 소나무 계수나무에 오랜 세월 비 내리니
往往桑麻萬戶烟 때때로 누에치고 길쌈하며 많은 집에 연기 나네.
奔競歲華曾幾日 몹시 다툼질 하던 세월 일찌기 몇 날이었나!
尋常詩酒易流年 예사롭게 시와 술로 쉬이 세월 보냈네.
淸絶此遊難再得 이곳에서 즐기는 정갈한 절조 다시 얻기 어려우니
須令今夜又留連 모름지기 오늘 밤을 오랜 동안 이어 가게 하세 !
又
群生物物各成區 여러 백성 물물마다 각각 경계 지었으니
色色分排活盡圖 색색으로 나누어 늘어선 멋있는 그림이네.
樓角風微賓驚賀 다락 모퉁이 실바람 손님을 반갑게 맞아 들이고
庭園日暖友鶯呼 뜰의 해는 따뜻해 벗과 꾀꼬리를 부르네.
隱居未愜村墟近 숨어 사는 집은 상쾌하지 않지만 마을터에 가깝고
治圃無妨婦子携 가꾸는 채마밭은 지장없이 아내가 일궈 간다네.
岐路多門人易惑 기산마을 길거리에 있는 많은 문인들 쉽게 미혹되니
却嫌平日少工夫 평소에 조금 공부하는 것 혐오하여 물리치노라.
吟漁村(二首) 고기 잡이 하는 마을을 읊다, 2수.
-金公喜-
桃花流水白鷗波 복사꽃 흐르는 물, 흰 갈매기 파도는
山口長天吐大羅 산 입구 끝없는 하늘에 큰 비단을 토해내니,
千傾鏡中分太白 천이랑 거울 속에 거의 하얗게 부서 지고
一帆風外散東坡 한결같이 부는 돛바람 밖 동쪽 제방에 흩어지네.
鰲呈細島初粧黛 자라는 가는 섬을 드러내니 처음 검은 눈썹을 그린 것 같고
魚代新鶯欲擲梭 물고기는 초봄 꾀꼬리를 대신해 베틀의 북처럼 이리저리 오가네.
回棹夕陽迷泊處 해 질녘 노 저어 돌아오니 배 댈곳 알 수 없어
數叢踈竹是漁家 몇 무더기 성긴 대나무 자라는 이곳이 고기잡이 하는 이의 집이라오.
又
浦口蒸霞打作波 포구의 짙은 노을 파도를 만들고
落花驢背拍紅羅 떨어 지는 꽃은 나귀등의 붉은 비단을 때리네.
潮痕猶在無心店 밀물 흔적 아직도 있는데 내 마음에는 없고
汐水全呑未斷坡 썰물 완전히 삼켰는데 제방 끊기지 않았네.
來影白衣應佩酒 온다는 선비 응당 술병은 찻겠지
近吟鮫婦定停梭 가까운 곳에서 교부가 읊으니 베틀의 북도 멈출 곳을 정했다네.
沿洄已醉東風興 물 들고 날때 이미 취해 동쪽 바람 일어 나니
不必前村問酒家 앞 마을 술집은 들를 일 없겠지.
註)擲地作金石聲이라 - 땅에 던지니 금석 소리가 나네.
詩文이 잘 되어 辭句가 아름답고 운치도 훌륭하며 對丈이 좋다.
挽金上舍龜命(1517生-1564卒,향년48)
김상사 귀명을 애도하다.
-竹谷 林 誨(1508-1573)-
天胡生是賢 어찌하여 하늘은 이 현인을 낳았는가
而不假之年 자네는 수를 다할 수 없는가
正氣分光岳 바른 기운이 큰 산 빛을 나누니
高才繼祖先 재주 있는 인재가 선조를 잇네.
風流元跌宕 풍류와 질탕을 근본으로
質朴自純全 질박과 순수를 따랐네.
勿哭靑山塜 청산의 먼지에 곡하지 말게
歸爲紫府仙 자선부로 돌아갈 것이기에.....
挽金子久恒(1542生-1589卒,향년48)
자구 김 항을 애도하다.
-東溪 白光城(1527-1595)-
祖子孫連逝 아버지 아들 손자가 연거푸 서거해
長嗟宇宙昏 크게 탄식하니 우주가 어둡구나.
那堪情漠漠 어떻게 막막한 인정을 견딜 것인가
無復對溫溫 온화한 모습 다시 대할 수 없으니.
痛哭今三世 통곡하노라 ! 오늘 이 삼대를
儀形隔九原 몸가짐 저승과 떨어졌는데,
平生滿樽酒 평소 풍족한 술 마셨으나
此日但空村 다만 오늘은 마을이 텅 비었네.
裕後看榮慶 넉넉한 뒤에는 영화와 경사 볼 수 있으니
賢男有弟昆 어진 사내 형제 있네.
龍輀返舊隴 천자의 상여 선산으로 돌아가니
曉月渡江濆 새벽달 강 물가를 건너네.
我女門連住 내 딸자식 연달아 貴門에 머무니
君家意益敦 그대의 집안과는 뜻 더욱 돈독해 지네.
去來有節序 오가는 절기 차례 있으니
言語混卑尊 언어 높낮이 섞여 지네.
可奈蒿里餞 어찌 상엿소리 전송 하겠는가
風飄涕泗飜 우는 눈물 콧물이 바람에 날리네.
他年高地 ? 다른 해 높은 곳 ?
鵬化北溟鵾 붕새가 북쪽 큰 바다 곤계로 화했는지.
挽明岡白公奉欽
명강 백공 봉흠을 애도하다.
-溪窩 金漢璹(1862-1937)-
효자비 주인공
婉彼明岡下 아름다운 저 밝은 산등성이 아래
東溪後一人 동계 이후 한 사람
湘東有三管 호남 동쪽에 세 붓 자루(詞伯) 있으니 註)
誰爲借金銀 누가 금은을 빌리게 될 것인가?
註) 당시 이 고을에는 눈밝은 巨儒,大手(대문장가)가 있었습니다. 다만 후인들이 모를 뿐입니다.
慶 宴 臺 (文 章 臺)
水原 白氏 參判公 諱 繪 의 아들 四 兄弟가 함께 進士 에 登科함 에 이를 慶祝 하기위해
土築 하고 慶宴 을 베풀었던 곳으로
그후 한 마을안 三 家 에서 八 文 章, 輩 出 로 역시 이곳에서 慶 宴 을 베풀었으니 文章대 라고도 함, 마을 民俗 놀이터로 이어오다 지금은 私有化 되고 其 遺 址 에 白氏門中 에서 세운
慶 宴 臺 碑 가 옛 흔적을 전하고 있다,...
"碑 의 後 面 에 參 判 公, 諱 繪 의 慶 宴 詩 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八 十 光 年 隨 處 身 ( 팔십년을 아루렇게나 지내온 몸이 )
幾 登 此 地 講 親 親 ( 몇번이나 이곳에 올라와서 親 親 을 講 할고)
四 兒 次 第 節 吾 喜 ( 四 兒 가 차례로 나에게 기쁨을 꾸며주니 )
只 願 他 時 摠 及 人 ( 다만 他時에 남들에게도 미처 가기를 원 하노라 )
2008년 4월 해석 월송, 白 南 植 님
鳳鳴齋 遺墟碑 (봉명재 유허비) 栢堂 魏 大煥 撰 (백당 위 대환 찬)
里 曰 岐 山 (리왈기산, 마을 이름은 기산이고)
齋 曰 鳳 鳴 (재왈봉명, 재호는 봉명 이니)
周 岐 偶 同 (주기우동, 주나라 기산과 우연히 한가지니)
亦 得 嘉 名 (역득가명, 또한 아름다운 이름을 얻었도다)
八 賢 以 后 (팔현이후. 팔현 배출이후로 八文章)
繼 出 群 英 (계출군영, 이어서 군영들이 났도다)
域 中 황 舍 (역중황사, 우리지역중에서 학사가, 학자는 "학교황" 자인데 컴엔없슴")
莫 與 爲 京 (막여위경, 더불어 이보다 클수가 없다)
凡 物 有 數 (범물유수, 옷갓 물체 수가 있으니)
歲 久 而 傾 (세구이경, 해가 오랠수록 기울이다)
只 保 其 墟 (지보기허, 다못 그 빈터를 보존함에)
時 勢 便 然 (시세편연, 시세가 그러 함이라)
名 不 忍 沒 (명불인몰, 이름이라도 차마 인몰하지 못하게)
刻 石 永 傳 (각석영전, 돌에 각하여 길이 전할것이라)
千 秋 過 者 (천추과자, 천추에라도 지내는자 있거든)
瞻 此 徵 知 (첨차징지 , 이를보아 증거하여 알것이다)
興 學 諸 彦 (흥학제언, 배움을 일으킨 모든 선비들이)
是 謨 得 이 (마땅이,이자가없슴)(시모득이, 이 마땅함을 꾀 하리라 )
昔 陪 先 師 (석배선사, 옛적 선생님을 모시고 )
遊 陪 於 斯 (유배어사, 이곳에서 유학 하였도다)
今 感 西 林 (금감서림, 이제 서림을느껴, 서림은 중국 사찰, 절의이름,)
繼 以 銘 辭 (계이명사, 이어 써 사를 명 하였도다)
*朱夫子의 先生인 李 延平이 西林寺에 遊居 하였는데 朱子가 그 선생님을 모시고
다녔음을 비유한말, 栢堂께서 愼軒 선생님을 항상모시고 鳳鳴齋에서 유학 하셨다고함,...
상기의 봉명재 유허비는 월암. 백당 위 대환님이 지으셨고 다행이 그분의 문집에
기록이 상세히 있어서 백당의 장자이신 위 성모 님께서 해석해 주셨습니다,..
2008년 4월 기산이장 白 光哲 (올림)
" 선현 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기산 팔경"
星 田 樵 歌 (빌밭등에서 들려오는 나뭇꾼의 노래소리)
桃 林 牧 笛 (도리뫼 에서 들려오는 목동들의 피리소리)
寒 泉 飛 瀑 (참새미 나르는듯한 폭포~)
木 浦 歸 帆 (목단포에 돌아오는 돗단배의 모습)
鷄 山 初 月 (닭뫼산에 걸친 초승달의 모습)
玉 峰 暮 烟 (저물녘 옥녀봉에 드리워 걸쳐진 저녘연기)
億 夫 山 烽 燧 (억부산 봉화대 봉수연기 피어나는모습)
甑 山 淸 風 ( 가매등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 오늘날 시대의 변천으로 인하여 사라져버린 옛모습들이 아쉽습니다, 목단포는 간척으로 농지로
변했고,참샘도 경지정리후 사라졌으며, 봉수대도 흔적은 있지만 옛모습을 볼수없으며 나뭇꾼, 목동,
옥녀봉 모연도 이제는 볼수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그려,.....
* 자료출처 : 안양면지
첫댓글 장흥은 천관산 억새와 토요시장으로 유명하다 알고 있었는데.... 팔문장 문화마을에대해 자세하게 알려 주셔서 잘 봤습니다 내년 여름엔 천관산 자연 휴양림에 갈 예정인데 꼭 문화마을에도 들려 아름다운 글과 공원을 만나야 겠습니다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기봉 백광홍 선생의 관서별곡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의 모델입니다. 기산 동계마을에 고딩 친구가 살았구, 그 여동생이 너무나 이쁘고 영리하였다는...
와우 아름다운곳입니다. 언제 꼭 한번 가보고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