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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 천지 창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1508~1512년 미켈란젤로作 프레스코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에 대해 저명한 미술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 교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회화작품이라고 하였다. 미켈란젤로가 교황청의 한 예배당 안의 받침대 위에서 4년간의 고독한 작업 끝에 이룩해놓은 것을 보면 평범한 우리들로서는 어떻게 한 개인이 그만한 것을 성취할 수 있었는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예배당 천장에 이 거대한 프레스코를 그리기 위해 이 장면들의 세부를 준비하고 스케치한 뒤에 그것을 벽면에 전사하는 데 요구되는 육체적인 노력만도 상상을 초월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천장이므로 미켈란젤로는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 위를 쳐다보고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육체적인 힘든 작업도 그의 지적인, 그리고 예술적인 업적과 비교해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가 후대에게 제시해준 항상 새롭고 풍요로운 착상들, 그리고 모든 세부를 묘사하는 정확한 솜씨와 그 비전의 장대함은 인류에게 천재의 능력에 대한 전혀 새로운 개념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사진을 통해서 이처럼 많은 인물상을 보면 천장 전체가 혼란스럽고 균형이 잡히지 않았으리라고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스티나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서 그 천장화를 단순히 하나의 훌륭한 장식으로만 생각하고 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단순하고 조화로운지 그리고 전체의 짜임새가 얼마나 명료한지 발견하고는 대단히 놀랄 것이다.
<아담의 창조> 시스티나 천장화 일부
여기에서 우리는 조물주의 모습을 본다. 미술가들 뿐만아니라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도 수십 세대를 통해서 각인되어 떠오르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은 미켈란젤로가 그의 천지창조에서 그려보인 그 위대한 비전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되고 만들어 졌다고 하여도 절대로 그것은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손을 뻗치자 아담의 손가락에 채 닿기도 전에 이 최초의 사람은 마치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난 듯 그의 창조주인 아버지 하느님의 자애로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미켈란젤로가 하느님의 손길을 이 그림의 중심에 두어 초점으로 만들고 의연하고 힘찬 창조의 모습을 통해서 신의 전지 전능함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든 방법은 미술의 가장 위대한 기적 중의 하나이다.
모세> 1513~1515년경 미켈란젤로作 대리석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구약성서는 시나이산에서 십계명 석판을 들고 내려오는 모세를 묘사하고 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다가서자 얼굴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광선(ray)에 해당되는 히브리어가 ‘keren’인데,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될 때 이 단어가 ‘horn(뿔)’으로 잘못 번역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라틴어판 성서를 읽은 사람들은 모세가 뿔이 났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도 그런 오류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죽어가는 노예 or 잠자는 노예 > 1513~1516년경 미켈란젤로作 대리석 루브르 박물관
그들이 나에게 말했다. “만일 잠자는 노예를 발견하면 그를 깨우지 마시오. 그는 자유를 꿈꾸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만일 잠자는 노예를 발견하면 그를 깨우고 자유에 대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칼릴 지브란-
<최후의 심판> 1533~1541년 미켈란젤로作
1533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명으로 시스티나 경당에 그려진 벽화로 1534년 교황의 선종으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이어 교황이 된 바오로3세가 다시 이 작업을 의뢰함으로써 결국 1541년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림을 보고 추기경을 비롯한 성직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그림에서 대부분의 인물이 나체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수의 모습이 기존의 성화와는 다르게 아폴론에 가깝게 묘사되고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등 과격한 묘사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수많은 성직자들과 추기경들은 “이런 나체화는 성당에 어울릴지 않는다”고 탄원했다. 그래도 이 그림을 인정한 바오로 3세 생전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지만, 바오로 3세가 선종한 이후 소집된 1564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비속한 부분은 모두 가려져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져 결국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다니엘레 다 볼테라가 그림의 인물에 옷을 그려 가리는 것으로 일단락이 된다. 하지만 이 때문에 볼테라에게는 현대까지도 ‘기저귀 그리는 화가’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이 따라다닌다.
최후의 심판 오른쪽 하단에는 미켈란젤로에게 사사건건 간섭을 한 체세나 추기경을 ‘지옥의 수문장 미누스’로 그려넣었다. 미누스의 귀는 당나귀귀로 표현되었는데 당나귀의 귀는 무지의 상징이고 또 성기마저 뱀이 물고 있게 그려, 인간의 성적 방종에 대한 하느님의 가혹한 심판을 보여준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미켈란젤로 본인의 얼굴도 있다. 그림의 중간에 사도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살가죽의 얼굴이 미켈란젤로의 얼굴이다.
<대공大公의 성모> 1505년 라파엘로作 목판에 유채
입체감있게 묘사되어 어둠속으로 물러나는 성모의 얼굴, 자연스럽게 늘어트려진 옷자락 속에 싸인 육체의 볼륨,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확고하고 애정어린 자세 등 모든 것이 완벽한 균형의 효과에 기여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들을 약간만 변경해도 그것이 전체의 균형을 깨트리게 되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구도에는 긴장감이라든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다. 이 그림은 마치 이것 이외의 다른 모습으로 보일 수 없으며 태초부터 그렇게 존재했었던 것같이 보인다. 미켈란젤로가 묘사한 조물주가 신의 진정한 모습으로 만인에게 각인되었듯이 라파엘로(1483~1520)가 그린 성모상도 후대들에게 성모의 진정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페르디난테 3세 대공이 이 작품을 좋아해서 여행을 갈 때도 지니고 다녔다고 함.
<검은 방울새의 성모> 1506년경 라파엘로作 목판에 유채
가시나무 숲에 산다는 검은 방울새는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를 때 그의 이마에 박힌 가시를 부리로 떼어냈다고 한다. 그때 피가 한방울 튀었고, 검은 방울새의 날개에 작은 붉은 반점이 생겼다. 검은 방울새는 이후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게 된다. 그림의 성모는 좌우에 세례요한과 예수가 있는 그림이다. 검은 방울새도 여기 함께 그려져 있다.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를 가지고 있다. 라파엘로는 1506년경에 결혼하는 친구를 위해 이 그림을 그렸으며, 나지가의 저택에 있던 그림은 지진으로 17조각으로 깨지는 수난을 당하게 된다. 이후 500년이 지난 후 최근들어 복원을 시도하게 되었으며 이에 투여된 전문 인력만 50명이고, 복원기간이 10년이나 걸렸다.
<아테네 학당> 1509~1510년 라파엘로作
교황의 개인 서재인 ‘서명의 방’에 그린 프레스코화이다. 벽면에는 모두 54명의 철학자가 한 자리에 모인 상상화이다. 실제로 이 사람들이 활동한 시기나 지역이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한자리에서 있는게 불가능하다. 가령 소크라테스가 사망할 당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조로아스터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림의 핵심인물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중 플라톤에게는 다 빈치의 얼굴을 그려넣었고, 계단 아래에서 턱을 괴고 혼자 앉아있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얼굴에는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넣음으로써 그들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또 그림의 오른쪽 구석에는 라파엘로 자신의 얼굴을 남기기도 하였다.
<요정 갈라테아> 1512~1514년 프레스코 라파엘로作
못생긴 거인 폴리페모스가 아름다운 바다의 요정 갈라테아에게 사랑의 노래를 바치지만 그녀는 그의 거친 노래 솜씨를 조롱하며 두 마리 돌고래가 끄는 수레를 타고 파도위를 달려가고, 바다의 다른 신들과 요정들은 즐거운 무리를 이루어 그녀 주위로 모여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라파엘로는 이전 세대의 화가들이 이룩하려고 그처럼 노력했던 것, 즉 자유롭게 움직이는 인물들을 완벽하고 조화롭게 구성해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변용> 기원후 1516~1520년 라파엘로作 패널에 유채
타보르산(변화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를 소재로 한 이 그림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림의 윗부분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모세, 엘리야가 그려져 있는데, 환상적인 조용함과 정숙함으로 성서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되었다. 가운데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들이 놀라는 모습과 경탄하는 모습을 그렸으며 그 아래 부분에는 세상 사람들의 갈등과 혼돈을 표현하고 있다. 밝고 평화로운 천상의 신비스러운 광휘와 지상의 어지러운 소란을 대비시켜 자유분방한 구도로 동적인 표현을 시도한 이 그림은 라파엘로가 1516년부터 그리기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37세로 요절하였으며, 그후 제자 로마노가 완성하였다.
<성모와 성인들과 페사로 일가> 1519~1526년 티치아노作 캔버스에 유채
티치아노(1485~1576)는 다 빈치와 같은 박식한 학자도 아니고 미켈란젤로와 같은 뛰어난 인물도 아니었으며, 라파엘로와 같은 다재다능의 매력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한 사람의 화가였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가 물감을 다루는 솜씨는 미켈란젤로의 거침없는 소묘 솜씨에 필적하는 그런 화가였다. 위 그림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그림의 중앙에 두고 시중드는 두 성인을 대칭되게 배치한 것이 아니라 성모를 그림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두 성인을 이 장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였는데 이것은 거의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티치아노 시대의 사람들은 구도의 오래된 규칙을 과감히 뒤엎은 그 대담성에 놀랐을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러한 그림이 한쪽으로 치우쳐 균형을 잃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이 예기치 않은 구도는 전체적인 조화를 깨트림 없이 오히려 그림을 생기있고 활기차게 만들어 주었다. 그것은 티치아노가 빛과 색채로써 이 장면을 통일시켰기에 가능하였다. 단순한 깃발 하나를 가지고 성모의 모습과 대칭을 이루게 한다는 생각은 아마도 그전 세대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풍요롭고 따뜻한 색채를 가지고 있는 이 깃발은 그 같은 모험을 완전한 성공으로 이끈 놀랄만한 부분이다. 이것은 바로크적 특성을 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영국인> 1540~1545년경 티치아노作 캔버스에 유채 피렌체 피티궁
티치아노가 당대에 그처럼 큰 명성을 얻은 것은 초상화 때문이었다. 그의 초상화의 매력을 이해하자면 ‘젊은 영국인’이라고 불리우는 초상화의 머리 부분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 매력이 어디에 있는지 분석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그 이전의 초상화들과 비교해보면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힘들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그림에는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에서 보는 바와 같은 세밀한 입체감의 묘사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무명의 젊은 영국인은 모나리자처럼 신비하게 살아 있는 것같이 보인다. 이 꿈에 잠긴 듯한 눈동자는 거친 캠버스 위에 물감을 한 점 발라놓은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영혼이 담긴 강렬한 표정으로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 같다.
<거룩한 밤> 1530년경 코레조作 목판에 유채 독일 드레스덴 고미술 갤러리
16세기 베네치아 화가들의 최대 관심사는 빛과 색채였다. 이 그림은 허물어진 마구간의 어둠 속에서 기적을 본다. 갓 태어난 아기 예수가 사방에 빛을 발하고 있으며 행복한 어머니의 아름다운 얼굴을 밝게 비추고 있다. 첫눈에는 이와 같은 배치가 기교가 없으며 우연한 것같이 보일 것이다. 왼쪽의 복잡한 장면에 대응하는 군상들이 오른쪽에는 없으므로 균형이 잡혀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성모와 아기 예수에게 빛을 던져 강조함으로써 전체 그림은 균형을 이루게 된다. 코레조는 색과 빛을 사용하여 형태에 균형을 주고, 보는 사람의 시선을 일정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발견을 티치아노보다 더욱 잘 활용하였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장면으로 목동과 함께 달려가 요한 복음서가 전하는 어둠속을 비추는 ‘빛’의 기적을 보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성모의 승천> 1526~1530년경 코레조作
파르마 성당의 천장에는 코레조 이후 세대의 수많은 화가들이 수세기 동안 그처럼 반복해서 모방한 그림 ‘성모 승천’이 있다. 그것은 아래 본당에 있는 신도들에게 천장이 열려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하늘의 영광을 곧장 바라보고 있다는 환상을 주려고 한 것이다. 빛의 효과를 자유자재로 조정하는 그의 능숙한 기술로 인해 그는 햇빛을 가득 받은 구름으로 천장을 채우고 그 구름들 사이로 천사들의 무리가 다리를 아래로 늘어트린 채 빙빙 떠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림을 그렸다.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 1500년 알브레히트 뒤러作
목판에 유채 뮌헨 알테 피나코텍
뒤러(1471~1528)는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에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유럽 등 서구에서는 미켈란젤로나 다빈치와 동등한 대접을 받는다. 화가로서의 자신감과 자부심이 절정으로 드러난, 유럽회화 가운데 걸작에 속하는 이 작품은 크기가 실물과 거의 흡사하고 치밀하게 세부를 묘사하는 북유럽 화풍과 인체를 부드럽고 풍만하게 표현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화풍을 접목시켰다. 작품 속 뒤러는 멋진 모피코트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자세히 보면 눈동자에 창문이 반사된 모습까지 세밀하게 그려져 있으며, 뒤러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의 깊은 응시에 눈을 피하게 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풀밭> 1503년 뒤러作 수채화 습작 종이에 펜과 잉크 및 연필과 담채, 빈 알베르티나 박물관
<기사, 죽음, 악마> 1513년 뒤러作 동판화
무쇠처럼 굳센 눈빛과 철갑옷으로 무장한 이 기사는 자신의 끔찍한 동행자들(악마와 죽음)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희망도 품지 않으면서 자신의 말을 타고, 자신을 따르는 개와 함께 험난한 길을 혼자서 고독하게 걸을 줄 안다. -니체-
판화라고 믿기어려울 정도의 세밀함은 뒤러작품의 최대 강점이다.
<멜랑꼬리아-우울> 1514년 뒤러作 동판화
<멜랑꼬리아>는 혼돈이 본질적인 특성을 이룬다. 혼돈과 무질서는 순수하고 완벽한 조화와 대립되는 불순한 조화를 상징하며, 다른 애매모호한 세부 요소들과 함께 그림의 불확실성을 조장한다. 가령 사다리의 정확한 위치라든가, 건축물의 성격, 혹은 멜랑꼬리아가 위치한 공간 등의 문제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다. 그 외에 불안정하거나 한시적인 성격의 모티프들도 관찰된다. 이를테면 다면체가 웅크리고 있는 개를 곧 덮칠 것 같다던가, 모래시계의 모래가 지금 이 순간도 계속 흘러내리고 있고, 푸토(아기 천사)가 앉아 있는 둥근 맷돌은 조금만 진동이 가해져도 구르면서 위에 있는 저울의 평형을 깨뜨릴 것만 같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들은 실제로 발생할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통해 정적靜的인 것과 동적動的인 것 간의 긴장관계를 표현하고 있는 듯 보인다.
<서재의 聖 히에로니무스> 1514년 뒤러作 동판화
무질서한 느낌을 주는 <멜렝콜리아>와는 달리 <서재의 聖 히에로니무스>는 질서와 안정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는데, 그 원인은 무엇보다 사물의 배치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물체가 정면으로 재현되거나 또는 원근법의 소실점消失點으로 향하는 선들 위에 위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자와 탁상, 강아지와 사자는 화면과 평행하게 재현되어 있고, 천장의 들보, 창틀, 벽의 벤치와 그 위에 놓인 책이나 쿠션, 모두 화면과 직각으로, 다시 말해 소실점으로 수렴하는 선 위에서 움직인다. 벗어 놓은 슬리퍼조차 각기 정면과 직각으로 놓여 있어 마치 방 전체를 관통하는 전자장에 의해 모든 물체가 지배되고 있는 듯하다. 그 결과 명료한 질서와 조화로움이 화면을 주도하는데, 이는 聖 히에로니무스의 정신적 순수함과 완벽함을 상징한다.
<풍경> 1526~1528년경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作 양피지에 유채, 뮌헨 알테 피나코텍
레겐스부르크(現독일)의 화가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는 숲과 산 속을 누비고 다니며 풍우에 시달린 나무와 바위의 형태를 연구했다. 그가 남긴 많은 수채화와 동판화, 그리고 유화 몇 점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담겨 있지 않으며 인물이 하나도 없다. 이것은 대단히 중대한 변화이다. 자연을 그렇게 사랑했던 그리스 인들조차 목가적인 장면을 위한 배경으로서만 풍경을 그렸다. 중세에는 종교적인 테마이든 세속적인 테마이든 분명한 이야기 거리를 다루지 않은 그림은 거의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는 유럽 미술에서 인물이 없는 풍경화를 처음으로 제작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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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년경 이탈리아 도시들의 모든 미술 애호가들은 회화가 완성의 극에 달했다는 사실에 의견의 일치를 본 것 같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등은 그전 세대가 이룩하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을 실제로 해냈다. 그들에게는 소묘에 있어서 어려운 문제는 하나도 없었으며, 또 주제상의 어떠한 문제도 그들이 감당하기 벅찰 만큼 복잡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아름다움과 조화를 올바르게 결합하는 방법을 보여주었고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작품들이 심지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가장 유명한 조각 작품까지도 능가한다고 생각했다. 장차 위대한 미술가가 되고자 하는 소년에게 그 당시의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는 결코 듣기에 기분좋은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미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룩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사실인지에 대해 당연히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긴 목의 마돈나> 1534~1540년 파르미자니노作 목판에 유채, 피렌체 우피치
이 작품에는 라파엘로가 이 테마를 다루었을 때 보여준 단순함과 자연스러움이 전혀 없다. 이 작품이 ‘긴 목의 마돈나’로 불리는데 그 까닭은 이 화가가 성모를 자기 나름대로 우아하고 고상하게 표현하려고 애쓴 나머지 성모의 목을 마치 백조처럼 길쭉하게 그렸기 때문이다. 그는 인체의 비례를 기묘한 방식으로 길게 늘여놓았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을 가진 성모의 손, 전경에 있는 천사의 긴 다리, 초췌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펼쳐보고 있는 비쩍 마른 예언자 등은 마치 일그러진 거울에 비친 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미술가가 무지하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은 아니다.
이 화가는 전통적 수법을 피하고 싶어했다. 그는 완벽한 조화에 관한 고전적인 해결 방식만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려 했다. 자연스러운 단순함은 아름다움을 이룩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만 안목 높은 미술 애호가들의 흥미를 끄는 데는 여러 가지 간접적인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선배 거장들이 이룩해 놓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무엇인가 새롭고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창조하고자 모색했던 파르미자니노를 비롯한 그 당시의 모든 미술가들은 아마도 최초의 ‘현대적’ 미술가들이었을 것이다. 소위 ‘현대’ 미술이라고 하는 오늘날의 미술도 이들처럼 분명한 것은 피하고 인습적인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는 다른 어떤 효과를 이룩하고자 하는 욕망에 그 근본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매너리즘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나타났다. 그당시 젊은 미술가들이 거장들의 작품의 유행에 휩싸여 단순히 그의 수법만을 모방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보는 후대 비평가들은 이 시기를 매너리즘 시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부 미술가들은 작품을 비틀기 시작하였다. 늘어진 형태, 과장되고 균형에서 벗어난 포즈, 조작된 비합리적 공간, 부자연스러운 조명 등등의 특징이 있으며, 인공미를 중시하는 스타일이다. 미술사에서 이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은 후기 르네상스 시대에 나온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같은 거장들에 비해 이후에 등장한 미술가 세대의 작품들이 보잘것 없거나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평가들은 주로 르네상스와 안정적인 고전주의적 미술을 높게 평가하던 시대의 흐름 속에서 나타났다.
20세기 초에 접어들어서야 막스 드보르작을 위시한 학자들에 의해 이런 부정적 시대 개념이 지양되고 매너리즘은 독자적인 하나의 미술 양식으로 재평가되었다. 드보르작은 오히려 정형을 벗어난 표현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현대미술에 와서, '완성도'보다 '메시지' 혹은 '정제된 표현' 내지는 '혁신' 등의 반 기교 주의가 형성되면서 매너리즘이라는 단어에 긍정적 의미가 추가되었다. 조금 이상해보이더라도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정해진 것을 똑같이 반복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머큐리 상> 1580년 잠볼로냐作, 청동, 187cm, 피렌체 바르젤로 국립박물관
<머큐리 상>은 발 끝으로만 땅을 디디고 있다. 아니 사실은 땅이라기보다 남풍南風을 상징하는 가면의 입에서 분출되는 바람을 디디고 있다. 이 조각상은 아주 교묘하게 균형이 잡혀 있기 때문에 실제로 공중에 떠서 빠르고 유연하게 날아가는 것같이 보인다. 고전기의 조각가라면 그러한 효과는 무거운 재료의 조각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잠볼로냐(1529~1608 플랑드르)는 기존의 규칙에 도전해서 아주 놀라운 효과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보여주려고 했다.
<최후의 만찬>1592~94년 틴토레토作 캔버스에 유채, 베네치아 산 조르지오 마죠레 성당
틴토레토(1518~1594)는 식탁을 대각선으로 놓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보여주는 평행구도에 비해 불안정해 보이지만 그림속 공간이 깊고 넓어보이는 효과를 낸다. 주인공인 예수와 제자들보다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이 더 크고 번잡스럽다. 그럼에도 우리의 시선은 예수를 찾게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예수의 두광에 강한 빛을 구사하였기 때문이다.
<요한 묵시록의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 1608~1614년경 엘 그레코作 캔버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서 출생하고 한동안 베네치아에 머물렀던 엘 그레코(1541~1614)는 그후 유럽의 외진 곳인 스페인의 톨레도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자연스럽고 정확한 묘사를 요구하는 비평가들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에는 아직도 미술에 관한 중세의 이념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적인 형태와 색채를 대담하게 무시하고, 감동적이고 극적인 환상을 강조하는데 있어서 엘 그레코가 뛰어난 능력을 갖게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흥분된 몸짓을 하고 있는 나체의 인물들은 하늘에서 내린 선물인 흰 두루마기를 받기 위해서 무덤에서 일어난 순교자들이다. 제아무리 정확하고 빈틈없는 소묘력을 가진 화가라 할지라도 성인들이 이 세상의 파괴를 요구하는 최후의 심판날의 그 무서운 광경을 이처럼 무시무시하고 실감나게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믿기 힘들 만큼 매우 ‘현대적’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반감같은 것을 받지 않았던 것같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난 후 사람들은 그의 자연스럽지 않은 형태와 색채를 비판하고 그의 그림을 기분 나쁜 농담 같은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엘 그레코의 미술이 재발견되고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현대 미술가들이 모든 미술 작품에 ‘정확성’이라는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지 말라고 가르쳐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했다.
<대사들> 1533년 한스 홀바인作 패널에 유채 런던 내셔널 갤러리
별자리 지도에 쓰여진 글자, 각도기에 새겨진 눈금, 별자리 그림 하나하나까지 정교하게 묘사
옆에서 비스듬하게 보면 일그러진 해골인 것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허영을 경계하고 겸손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헨리 8세> 1540년 한스 홀바인作 패널에 유채 로마 국립고전회화관
독일어 사용권 나라에서 정상을 향한 길을 다지던 한스 홀바인(1497~1543)은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에 부딪쳐 에라스무스의 추천서를 받아서 영국으로 갔다.(1526년) 그는 영국에 정착하기로 했고 헨리 8세로부터 궁정 화가라는 공식 직함을 받게된다. 그는 더 이상 성모상을 그릴 수는 없었으나 궁정화가의 일은 다양했다. 그는 보석과 가구, 연극의상, 그리고 실내 장식뿐만아니라 무기나 술잔까지 디자인 했다. 그러나 그의 주된 임무는 왕실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헨리 8세 시대의 남자와 여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홀방인의 끝없는 통찰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홀바인이 떠나자 독일어권의 회화는 놀라울 정도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가 죽자 영국의 미술도 그와 비슷한 꼴이 되었다. 사실상 영국의 회화 중에서 종교 개혁의 회오리를 견디어낸 유일한 분야는 홀바인이 그처럼 확고하게 다져놓은 초상화뿐이었다.
16세기 후반 북쪽의 독일, 영국, 네델란드 같은 나라들은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미술가들이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남유럽의 미술가들은 새롭고 놀라운 수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문제와 씨름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북유럽에서는 회화가 계속해서 존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심각한 문제와 부딪히고 있었다. 이 커다란 위기는 종교 개혁에 의해서 초래되었다. 많은 신교 교도들은 교회안에 성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을 두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을 구교의 우상 숭배로 간주했다. 그래서 신교 지역에사는 화가들은 그들의 가장 큰 수입원, 즉 제단화를 그리는 일을 잃게 되었다. 칼빈 교도 중 강경파들은 심지어 집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도 일종의 사치라고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화가들의 정상적인 수입원으로 남게 된 것은 책의 삽화나 초상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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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신교 국가 중 종교 개혁이 불러일으킨 위기를 무사히 넘긴 유일한 나라는 네델란드(플랑드르지방)였다. 그들은 초상화에만 매달리지 않고 신교 교회들이 반대하지 않을 주제(꽃, 나무, 마굿간, 양떼 등)를 찾아 그러한 유형을 전문화하였다. 일찍이 반 에이크의 시대로부터 네델란드의 미술가들은 자연을 모방하는 데 완벽한 대가들로 정평이 나 있었다.
<눈속의 사냥꾼> 1565년 브레헬作 패널에 유채, 빈 미술사 박물관
화면 왼쪽 사냥꾼 옆에 있는 집에서 사람들이 멧돼지 털을 그을리고 있다. 그 당시 돼지 도살은 보통 1월에 하는 연중행사였기 때문에 이 작품이 1월을 나타내고 있다. 붉은 색의 모닥불은 거세게 부는 겨울바람을 알 수 있다. 마을 중앙 스케이트장에서는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 썰매를 타는 사람, 컬링을 하는 사람 등 모두 45명의 사람들이 겨울을 즐기고 있다. 그들 옆에 짐마차를 끌고 가는 사람이 길을 가고 있다.
<시골의 결혼잔치> 1568년경 피터 브뢰헬作 목판에 유채, 빈 미술사 박물관
16세기 플랑드르 최대의 풍속화가는 피터 브뢰헬(1525~1569)이었다. 브뢰헬이 주로 그렸던 그림의 종류는 농민들의 생활 장면이었다. 위 그림은 시골의 결혼을 다룬 브뢰헬의 대표작으로 대부분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이 그림도 사진으로는 그 진가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즉 모든 세부가 더 더욱 작게 축소되기 때문에 이중으로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넘치는 기지와 뛰어난 관찰력으로 묘사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들 보다 더 감탄스러운 것은 브뢰헬이 비좁다거나 번잡스러운 인상이 전혀 들지 않게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점이다. 식탁은 원근법에 의해서 뒤로 후퇴하고 있고, 인물들의 움직임은 배경에 있는 헛간 입구의 군중들로부터 시작해서 전경의 음식을 나르는 두 사람을 거쳐 음식을 받아 상 위에 올려놓는 사람을 통해서 다시 배경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이 음식을 옮겨놓는 사람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곧장 조그맣게 그려졌지만 화면의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흐믓한 표정의 신부에게로 향하게 된다. 이 유쾌한, 그러나 결코 단순하다고 할 수 없는 그림들에서 브뢰헬은 풍속화라는 미술의 새로운 왕국을 발견했다. 그 이후의 네델란드 화가들은 이 왕국을 더 완벽하게 개척해 나갔다.
☆ 바로크(Baroque)
르네상스를 뒤이은 17세기 초의 양식을 보통 바로크라고 부른다. 그 이전의 양식들은 각각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식별하기 용이하였으나 바로크의 경우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바로크라는 말은 사실은 터무니 없다든가 기괴하다는 의미로, 르네상스 문화의 고전적인 균형과 조화에 반대되는 당시의 불규칙하고 과장된 양식을 가리켜 “바로크”라고 불렀는데, 강한 명암 대비가 야기하는 드라마틱한 연출, 입체감, 역동성, 극적인 감정 표출 등도 바로크 미술의 특징이다.17세기초 이탈리아의 카라바조(1571~1610)가 바로크 회화의 창시자이며, 그의 영향력은 스페인과 북유럽에까지 퍼져 많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특히 루벤스(1577~1640)와 렘브란트(1606~1669)를 배출한 플랑드르와 네덜란드는 바로크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밖에도 스페인에서는 벨라스케스(1599~1660)가, 프랑스에서는 푸생(1594~1665)이 활동하였다.
<의심하는 도마> 1602~1603년경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作 캔버스에 유채, 포츠담 신궁전
카라바조(1571~1610)는 고전적인 규범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신통치 않게 생각했다. 그는 인습을 타파하고 미술에 대해 아주 새롭게 생각하고 싶어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진실, 즉 그가 본 그대로의 진실이었다. 그는 그의 예술관이 비평가들에 의해 하나의 문구로 집약되었던 첫 번째 화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그를 '자연주의자(naturalist)'라고 비난했다.
그림에는 세 사람의 사도들이 예수를 쳐다보고 있고 그 중의 한 사람이 손가락으로 예수의 옆구리 상처를 찔러보고 있는데. 대단히 파격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림이 당시의 신앙심 깊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아름답게 주름이 잡힌 옷을 걸치고 위엄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 사도들의 모습에 익숙해 있었는데 여기서는 사도들이 풍상을 겪은 얼굴과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인 보통 노동자들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카라바조는 이렇게 대꾸했을 것이다. 사도들은 실제 늙은 노동자들이었으며 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고 또 부활한 예수를 의심하는 성 토마의 꼴사나운 동작에 대해서는 성경에 아주 분명하게 적혀있다고. -예수가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라고 말씀하셨다.-
<성 마태오> 1602년경 카라바조作 거부된 작품 캔버스에 유채 현재 소실됨
상상력이 대단히 풍부하고 타협을 모르는 젊은 화가인 카라바조는 늙고 가난한 노동자이며 단순한 세리稅吏였던 마태오가 갑자기 앉아서 책을 쓰게 되었을 때의 광경을 생각해내느라 고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머리에 먼지 묻은 맨발로 커다란 책을 어색하게 거머쥐고, 익숙하지 않은 글을 쓴다는 긴장감 때문에 걱정스럽게 이마를 찌푸리고 있는 <성 마태오>를 그렸다. 그의 옆에는 방금 천사에서 내려와 마치 선생님이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노동자의 손을 공손하게 잡아 이끌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천사를 그렸다. 이 그림을 성당에 납품하자 사람들은 이 작품이 성인에 대한 존경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분개했다. 그 그림이 수락되지 않아 카라바조는 그림을 다시 그려야만 했다.
<성 마태오> 1602년경 카라바조作 다시 그린 작품 캔버스에 유채, 로마 콘타렐리 예배당
인습적인 관념을 엄격하게 준수하여 생생하고 흥미있게 보이도록 대단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지금도 아주 훌륭한 그림에 속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그림이 첫 번째 그림보다는 덜 정직하고 보다 불성실해 보인다.
<게르마니쿠스의 죽음> 1628년경 니콜라 푸생作 캠버스에 유채, 미국 미니애폴리스 미술관
군인으로서 승승장구하던 게르마니쿠스 장군이 그를 질투한 양아버지 리베리우스 황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타키투스의 ‘연대기’중 한 장면이다. 명확한 자세의 인물들은, 과장없는 명암과 선명하고 단순한 구성속에서 장중한 힘과 강렬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아르카디아의 목자> 1638~1639년 니콜라 푸생作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1594~1665)은 로마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거기서 살며 작품을 제작하였다. 푸생은 당시의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정열적으로 고전 시대의 조각상들을 연구했는데,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통해 순수하고 장엄했던 고대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전달하고자 했다. (신고전주의적, 아카데믹한 방침-어떤 정해진 방법 같은 것에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은 고전미술과는 달리 비속하고 추하며 작가의 고상한 이상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든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현실보다 더 완벽하고 이상적으로 표현하는 방침)
이 그림은 이러한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서 생겨난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한 명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무덤에 새겨진 명문을 해독하려고 하고 있으며, 다른 한 명은 명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름다운 양치기 여자를 보고 있다. 그 여자는 맞은편에 있는 남자 목동과 같이 우수에 찬 표정으로 조용히 서 있다. 전체 구도는 아주 단순해 보이지만 그 단순함은 심오한 미술적인 지식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한 지식만이 죽음의 공포가 말끔히 가신 조용한 휴식의 이러한 회고적인 정경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페터 파울 루벤스作 1611~1614년 목판에 유채, 벨기에 성모 대성당
루벤스(1577~1640)는 독일태생으로 17세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벨기에 화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의 주검을 중심으로 왼쪽 붉은 모자를 쓴 이가 요셉, 왼쪽 아래 푸른 옷을 입은 이가 성모 마리아, 예수의 발을 부여앉은 이가 마리아 막달레나, 오른쪽 붉은 옷을 입은 젊은이가 제자 요한, 그 옆 사다리를 내려오는 이가 니코데모이다. 먹구름 어두운 배경과 달리 인물들의 표정에는 환한 빛이 가득하다. 이처럼 17세기 북유럽 바로크 그림은 어두운 배경속에서 강렬한 빛을 살려 표현을 극대화한다. 비극적이면서도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압도하는 이 드라마틱한 그림은 웅장한 색채의 장송곡을 들려주고 있다.
동화 ‘프란더스(플랑드르)의 개’에서 네로가 그토록 보고싶어했던 그림
<평화의 축복에 대한 알레고리> 1629~1630년 페터 파울 루벤스作 캔버스에 유채, 런던 내셔널 갤러리
이 그림은 전쟁의 공포와 평화의 축복을 대조 시키고 있는데 풍부한 세부 묘사, 생생한 대조, 빛나는 색채로 그만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드러낸 작품 중 하나이다. 가운데 앉아 있는 지혜와 예술의 여신 미네르바는 아이에게 젖을 주려고 하고 있다. 그녀 뒤쪽으로 군신 마르스와 전쟁의 신 퓨리가 쫒겨나고 있다. 그 앞에 반인반수 목신은 먹음직한 과실을 더없이 행복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 아래 누워있는 표범은 마치 자신이 고양이인양 안 어울리는 귀여운 장난을 한다. 술의 신 바쿠스를 섬기는 왼쪽의 여사제들은 금과 보석을 가지고 춤을 추고 있다. 오른편 아래의 세 아이들은 전쟁의 공포에서 평화와 풍요의 안식처로 도망온 탓에 겁에 질려있고 젊은 수호신은 왕관을 씌워 주고 있다. 미네르바의 보호아래 결실과 풍요의 상징으로서 평화의 기쁨이 우리의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