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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임금 헌종이 사랑하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따로 지은 한옥 낙선재(樂善齋)다.
1847년에 지어진 창덕궁의 낙선재는 본래 이름은 낙선당이었으며 창경궁에 속해 있었다.
낙선재는 '착한 일을 즐겨 한다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는 모두 경빈 김씨가 곧 왕실 대통을 이을 왕세자를 낳을 기대감이
현실적으로 반영된 건축물이다."최종덕(전 창덕궁관리소장)
낙선재의 정문 솟을대문 장락문(長樂門)이다.
명필로 알려져 있던 대원군의 웅후한 필체로 쓰여진 장락문 현판이다.
장락(長樂)이란 오래오래 즐겁게 살기를 기원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신선들이 사는 궁이 장락궁이다.'장락'은 신선이 누리는 즐거움'이다.
장락은 그냥 오랫동안 사는 즐거움이 아니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베개하고 살면서도 그 속에서 내가 누군지를 깨달았을 때
느낄 수 있는 희열을 맛보는 장락이라고 했다.
이 장락문을 통해 들어서면 바로 신선들이 사는 선경(仙景) 낙선재이다.
낙선재가 처음 지어진 것은 헌종이 왕위에 오른 지 13년째 되던 1847년 전후의 일로 당시 헌종이 할머니인 대왕대비
순원왕후와 자신, 그리고 자신이 총애하던 후궁 경빈 김씨의 처소를 한 곳에 마련하였다.
그 이름을 각각 수강재 (순원왕후) 낙선재 (헌종), 석복헌 (경빈 김씨) 라고 붙였다.
이때 헌종의 처소인 본 건물이 1847년에 처음 지어진 것을 시작으로 순원왕후 (순조 비) 와 경빈 김씨의 처소인
수강재와 석복헌이 그 이듬해인 1848년(헌종 14)에 각각 지어짐으로서 낙선재 일곽이 이루어졌다.
특히 헌종은 건물을 지으면서 자신과 경빈 김씨의 처소에는 단청을 일절 하지 못하도록 했다.
단청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영조를 존경하여 평상시에 검소한 생활을 했던 영조를 본받아
자신도 검소한 생활을 하고자 했던 헌종의 의중이 깊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낙선재를 지으면서도
헌종은 사치스러움을 배격하고 검소함을 강조하고자 무척 노력했던 것 같다.
"... 곱고 붉은 흙을 바르지 않았으니 이 집은 너무 사치스럽지 않은 것이고,
색칠한 서까래를 걸치지 않았으니 질박함을 우선으로 한 뜻을 보인 것이다..
동쪽 벽에는 온갖 진귀한 서적들이 빛나고... 잘 꾸며진 서적은 유양의 장서보다도 많고..."
헌종의 사후 기록된 행장에 낙선재를 지으면서 했던 말에서도 그 의중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낙선재에서 헌종은 정무를 보살피는 와중에 틈틈이 편안하게 글을 읽고 서화를 감상하며 한가롭게
머무는 곳으로 활용하였다.
낙선재 주위의 주련이나 편액의 글자체가 범상치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낙선재란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에 해당하는 낙선재를 포함하여,
동쪽으로 연이어 붙어있는 헌종이 후궁인 경빈 김씨를 위해 지어준 석복헌(錫福軒)과
할머니 순원왕후를 위해 지어준 수강재(壽康齋)를 포함한 세 건물이 있는 곳을 말한다.
청나라의 엽지선이 쓴 '낙선재'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창덕궁(昌德宮) 낙선재(樂善齋)는
비록 창덕궁 내에 있지만 궁궐 건물이라기보다는 잘 지어진 사대부 사랑채와 같은 단아한 느낌을 준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고종황제의 막내딸 조선 최후의 황족 덕수궁의 꽃이라 불렸던 덕혜옹주가 비뚤삐뚤한 그자체로 남긴 글씨다.
고종의 환갑때 태여난 덕혜옹주는 태어난 순간부터 철저히 정치적 희생자로 살아가게 된다.
어린 나이에 고종황제의 죽음을 목격했고 13살에 “내선일체”라는 명목 하에 일본으로 끌려가 냉대와
감시로 점철된 10대 시절을 보냈다. 이후 일본 남자와의 강제결혼, 10년 이상의 정신병원 감금생활
딸의 자살 등을 겪으면서 점점 무너진다.그녀는 철저히 방치되었다가 38년 만에 쓸쓸히 조국에 돌아온다.
한때 한국인 모두가 외면했고,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여인. 그러나 그녀는 조국에 돌아온 후에도
조국을 너무도 그리워 헀다. 죽음을 앞두고 총기가 돌 때마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그녀는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한다.
낙선재는 6칸으로 일반적인 사랑채로는 큰 편이다. 하지만 대청이 2칸에 불과해 그리 커보이지는 않는다.
ㄱ자형에서 한편으로 누마루를 내고 한편으로 방을 낸 것은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사랑채이다.
초석을 돌을 깎아서 낸 점이나 장대석을 쌓아서 만든 기단부가 여염집과 다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기둥이 사각 기둥인 점은 국왕 스스로 사치를 배격하고 근검절약 정신을 실천해 보인 것이다.
실제로 일반 양반 가옥에서도 둥근 기둥이 숱하게 보이는 점을 생각할 때 낙선재의 사각 기둥은
조선 왕조의 실천적 유학 정신을 엿보는 것 같다.
한옥은 밖에서 안을 보는 게 아니다. 방문객의 입장에서 공간배치를 한 것이 아니다.
건물 안에 사는 주인이 바로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아름다움을 설계한 것이다.
중국의 자금성은 웅장한 성곽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밖에서 보게 만들었다.
거대한 구조물을 보는 사람에게는 아주 위압적이다. 보는 사람을 제압한다.
광화문 등 한옥은 결코 높지 않다. 보는 이를 압도하지 않는다.
보는 사람이 구조물과 동등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1대1로 상호작용(interface)을 원할케 한다.
안에서 밖을 보는 아름다움이 아주 탁월하다.안에서 보면 여러 개의 경치들이 다양하게 중첩된다.
마치 작은 공간에서 여러 개의 스크린을 펼쳐 놓은 것같은 느낌을 준다.
대상과 주체와의 상호작용을 원할케 하는 공간이 한옥이다.
살아서 궁궐에 들었지만 죽어서 궁밖으로 나갈수 있는 궁궐내의 여인들이다.
왕의 총애를 독점해온 경빈 김씨이나 그도 수많은 궁궐 여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 세 건물은 옆으로 길게 붙어 있고 그 뒤편에 건물이 들어가고 나온 데 따라서 자연스럽게 후원을 조성되었다.
그 후원은 밖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왕의 여인 경빈 김씨를 위로하기 위한 다양한 치장이 눈에 든다.
소영주라는 상상의 삼신산이 석분을 이루면서 화계 일대가 선경(仙景)임을 밝혀주고 있다.
화계 윗쪽에는 취운정(翠雲亭)·한정당(閒靜堂)·상량정(上凉亭)이 들어서 후원을 멋지게 학고 있다.
궁궐 건물이라기보다는 잘 지어진 사대부 사랑채와 같은 단아한 느낌을 준다
고종도 이곳에서 한때 지냈으며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 순종 황제도 내전 대신 낙선재에 머물렀다.
하지만 낙선재의 최후의 주인은 이방자 여사이다.
어찌보면 낙선재는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이방자 여사가 기거하던 집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방자 여사는 일본 메이지 천왕의 손녀로 히로히토 천왕비가 될 뻔했으나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아이를 낳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왕비 간택에서 제외되고
당시 고종의 서자인 영친왕과 (순종의 이복 동생) 강제로 결혼하게 된다.
이는 일본의 조선 왕실 대를 끊기 위한 모략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다행이도 두 사람 사이의 결혼은 원만하였으며 특히 예상 외로 두 아이를 두었다.
첫 아이는 의문의 괴질로 사망하고(1922) 둘째가 고 이구씨이다.
이구씨는 미국인 여인과 결혼하였으나
이혼하였으며 슬하에 후손이 없어 조선 왕실의 적통은 여기서 끝나게 된다.
해방이후 영친왕 부처는 귀국을 희망하였으나 왕권복위운동을 두려워한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여 1962년이 되어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당시 이미 영친왕은 뇌병변으로 거동이 불편하였으며
처음에는 지금 민간 회사가 소유하고 있는 중명전에
(본래 중명전은 덕수궁 부속건물이었으나 덕수궁이 여러 갈래로 찢어져 지금은 정동에 있음) 거주하다
낙선재로 옮겨 1989 별세할 때까지 살았다.
영친왕이 서거한 이후에도 이방자 여사는 장애인을 위한 봉사활동을 계속하였으머
그 공로로 여러 번 훈장 및 표창을 받았다.
영친왕 부처 외에도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낸 두 여인이 있었다.
한 사람은 순종의 계후인 윤황후로 1966년 별세하실 때까지 낙선재에서 살았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후의 거처인 셈이다. (영친왕은 강제 합방으로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또 한명의 여인은 이방자 여사보다 더 비극적인 운명을 겪어야 했던 덕혜옹주이다.
덕혜옹주는 고종과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 난 딸로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그러나 11세 되던 해 일제는 유학이라는 명목하에 어린 딸을 일본으로 보낸다.
고종은 영친왕처럼 자식을 일본인과 결혼시키지 않기 위해 1919년 김장한과 약혼하였으나
일본 당국은 이를 무시하고 1931년 대마도주와 강제로 결혼시킨다.
이미 결혼 이전부터 힘든 외지 생활로 정신과 치료를 받던 덕혜옹주는 결혼이후 심하게 악화되어
조발성 치매로 진단 받게 된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1953년 이혼을 하였으며 외동딸이 자살하는 등 고통을 겪다가
1962년 영구 귀국하여 1989년 사망할 때까지 낙선재에서 거주하였다.
물론 낙선재에 살던 당시에도 여러가지 병으로 고생하였다 한다.
왕조의 끝은 언제나 많은 여인들의 비극과 고통으로 끝나게 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장락문. 대문 너머로 멀리 보이는 정자는 상량정(上凉亭)으로 원래는 평원루(平遠樓)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상량정으로 이름이 바뀐 것 같다고 한다.
낙선재가 위치한 곳은 궁의 동쪽 건양문(建陽門) 밖으로 태조가 임종한 광연정(廣延亭)이 있던 자리다.
뒤에 왕세자인 동궁의 처소인 저승전(儲承殿)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낙선재를 지은 헌종에 대해 좀더 알아보도록한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 익종(효명세자)을 빼어 닮았다는 평을 들으면서 자란다.
그의 아버지 익종이 22세의 한창 나이에 아깝게 숨을 거두었다.
헌종의 나이 겨우 4세때의 일이었다. 할아버지였던 순조의 슬픔도 슬픔이려니와
한창 자라나야 할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게 된 헌종의 슬픔 또한 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 익종의 뒤를 이어 어린 헌종은 할아버지 순조에 의해 왕세손으로 책봉된다.
곧, 다음 보위를 이을 후계에 지명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운 생각이 채 가시기도 전인 1834년 할아버지인 순조마저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어린 헌종으로서는 그야말로 엎친데 덮친 격이 되고 말았다.순조가 세상을 뜬 지 6일 후 8세의 어린 헌종은 왕위에
올랐다. 조선왕조 27 임금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이다.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른 헌종이었기에 할머니였던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에 나섰고,
헌종은 경연에 나아가 제왕학 수업을 착실히 쌓아 나갔다.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1834) 헌종은 여덟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헌종임금은 임금이 되고서야 장가를 들었다.
재위 3년에 효헌왕후(孝憲王后)를 왕비로 맞았으나
재위 9년에 왕후는 후사 없이 열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이듬해 헌종은 계비를 맞아들이기 위한 삼간택에 자신도 전례를 깨고 참여한
헌종이 마음에 둔 사람(후에 경빈 김씨) 대신 명헌왕후(明憲王后) 홍씨가 간택된다.
어쩔 수 없었던 것은 간택의 결정권이 왕실의 어른인 대왕대비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정면6칸, 측면 2칸으로 안사랑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3급 장대석 기단에 계단이 두개이다. '복을 내리는 집'이란 뜻으로 왕세자를 얻는 일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석복헌과 수강재 사이에는 다산을 의미하는 포도덩굴 문양이 있다.
왕비가 후사를 생산할 가능성이 없다는 핑계로 대왕대비의 허락을 받아 삼간택에서 낙선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인 처음부터 마음에 두었던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인다.
낙선재와 그의 일곽인 석복헌과 수강재는 이때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지어진다.
말하자면 경빈 김씨가 곧 왕실의 대통을 이을 왕세자를 낳기 위한 둥지가 된 샘이다.
헌종의 처소인 낙선재는 경빈 김씨를 맞아들인 헌종 13년(1847)에 지어졌고,
경빈 김씨와 대왕대비의 처소인 석복헌과 수강재는 그 이듬해에 지어졌다.
헌종은 이곳 낙선재에서 경빈 김씨를 옆에 두고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고 서화도 감상하면서 즐겁게 머물렀을 것이다.
16세가 되던 해 헌종은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 직접 친정에 나섰다. 하지만 헌종의 치세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연달아 계속되고 있던 서양의 통상 압력이 날로 거세어 졌는데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특정 세력에 의한 집권으로 민중들의 조정에 대한 불만은 겉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뿐만 아니라 순조 연간 이래로 계속되고 있었던 천주교에 대한 박해도 날이 갈수록 심해져 급기야
헌종의 치세에는 우리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처형되기도 했었다.
그런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헌종은 왕위에 머물러 있었지만 15년 재위에
23세라는 젊은 나이로 중희당에서 생을 마감했다.
무언가 일을 본격적으로 해 보려던 순간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약관 23세의 나이로 본격적인 일을 채 해 보기도 전에,
그것도 증조 할아버지 정조에 버금가는 문예 군주를 꿈꾸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헌종의 짧은 일생에 참으로 아쉬움이 든다.
헌종은 이곳에서 서화를 사랑하고 고금 명가의 유필을 벗 삼아 지내기를 좋아했다.
그가 얼마나 서화를 좋아했는지 당시 헌종에게 여러 차례 낙선재에 불려 들어간
소치(小癡) 허련(許鍊)이 기록한 《소치실록(小癡實錄)》에도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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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