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신애는 극적인 삶의 변화로 믿음의 신데렐라이며 영웅이 되었고 종찬이는 여전히 속물로서 교회 가는 목적이 불분명한, 생각 없이 교회를 다니거나 아니면 다른 목적 때문에 교회를 형식적으로 다니는 사람인 것처럼 비춰진다. 정말 그럴까?
위선적 신앙이 될 위험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남편의 고향으로 살러 왔던,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비극을 이기고 남편에 대한 사랑을 지켜가는 대단한 사람으로 비쳐졌던 신애, 졸지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마저 유괴당해 결국에는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를 들어야 했던 신애는 그야말로 순간 순간이 극적이고 긴장감이 넘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신애가 교회에 나가고 기독교신앙에 입문하면서 전혀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 기독교신앙을 통해 비극적인 아픔을 극복하고 날마다 행복하다고 말하며 사는 신애의 삶은 그 자체가 극적이어서 화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모두 신애의 입을 바라보고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아름다운 신앙고백에 탄성과 경이감을 나타낸다. 그것은 사실이다. 놀라운 일이 분명하다. 사람이 이렇게 지옥에서 천당으로 옮겨지는 것처럼 달라질 수 있다니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 부분에서 의심을 하고 있다. 과연 신애는 변화된 삶을 시작했는가? 그리고 그러한 극적인 변화를 믿음의 분량으로 환산해도 되는가 하는 물음을 주고 있다. 사실 신애는 여전히 과거의 삶과 똑같은 패턴으로 살고 있음을 영화는 보여 주고 있다. 지난 글에서 신애의 놀라운 변화가 신앙의 영웅이 아니라 초보자이며 과거의 삶과 단절을 위한 자기 전쟁의 시작임을 말한 바 있다. 과연 신애는 자기와의 전쟁을 하고 있는가? 영화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애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 상냥하고 사랑가득한 미소 뒤에 복수심이 자리하고 있다. 잃어버린 아들에게 대한 그리움으로 슬퍼하고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변화가 있었지만 자기와 많은 싸움을 해야 하는, 여전히 연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다. 신앙의 영웅도 천사도 아니라 인생의 짐이 무거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연약한 존재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신애는 종찬이에게 믿음이 정말 있느냐고 다그친다. 자신의 믿음은 확실한 것이고 종찬이의 믿음은 의심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신애는 이미 자신이 믿음으로 성공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이미 검증을 다 받은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종찬이의 믿음을 검증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많은 이들이 놀라워 하면서 신애의 극적인 신앙고백에 귀를 기울이는 관심을 신앙의 검증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애는 과거 자신을 과시하는 위선적 패턴을 교회 생활 속에서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단면이다. 자신의 위선 때문에 아들까지 잃게 되었다는 것을 납치범에게는 고백했지만 신애는 본질적으로 달라진것이 없다. 여전히 실제 이상 부풀린 모습으로 살아가고있다. 사실 삶의 본질에서는 변화가 없다.
은혜와 믿음은 다르다
우리는 신애와 같은 극적인 내용의 신앙을 큰 신앙으로 오해한다. 극적인 변화가 있었다면 그것은 은혜다. 은혜와 믿음은 다르다. 은혜를 입고 믿음은 없을 수도 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많은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회개하지 않자 예수님은 탄식하며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기적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심판 날에는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더 견디기 쉬울 것이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치솟을 셈이냐? 지옥에까지 떨어질 것이다.
(누가복음 10:13-15/표준새번역) 벳새다와 가버나움은 가장 많은 기적과 은혜를 끼친 예수님의 주활동 지역이다.
이 영화에서 신애는 자기와의 싸움을 보여주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삶을 지배했던 ‘위선’에 대해서 회개한 적이 없다. 오히려 신앙생활도 여전히 화려한 신앙의 겉 옷을 입으려 한다. 인생의 극적 반전이 마치 믿음의 보증인 것처럼 오해하는 것이다.
믿음은 배우고 훈련받아야
기독교는 믿음의 시작을 회개로부터 가르치고 있다. 지금까지 자기 삶을 지배하고 있던 패턴을 부정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마 16:24)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신애는 새겨들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10:17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또 디모데에게 이렇게 증언한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대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줄 수 있습니 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 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딤후 3:15-16/표준새번역) 신애는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돌아보고 회개하며 자기와의 싸움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며 믿음의 기초를 세워가야 한다. 지금 신애는 영웅이 아니라 초보자이다.
신앙은 죄의 극복
우리는 신애가 신앙의 출발에서부터 너무 영웅적 존재가 된 것에 염려를 해야한다. 오늘 많은 신앙인들이 이 유혹에 걸려 넘어진다. 신애도 그런 위험에 지금 노출되어 있다. 신앙은 매 순간 극적일 수도 있지만 종찬이처럼 지극히 평범한 일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극적인 사건에 몰입하려고 하기 때문에 위선적 신앙의 위험에 노출된다.
대도 조세형이라는 분을 잘 아실 것이다. 신애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는 아지만 그의 신앙이야기는 위선으로 변질된 신앙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는 17살부터 도둑질을 시작해서 1980년대 초 고관대작 집들만 전문으로 털어 물방울 다이어 라는 말을 세상에 드러낸 간 큰 도둑이라 하여 대도라는 이름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가 청송감호소에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15년 형을 다 살고 보호감호 전에 출감하였다. 그의 신앙이 열정적 이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 후 그는 간증전도자로 이름을 날리며 일약 신앙의 영웅이 되었다. 그의 극적인 신앙과 삶의 이야기를 들으러 사람들 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러던 그가 일본에 선교차 갔다가 주택가에서 도둑질을 하다 체포되었다 석방되었다는 뉴스를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었다. 한국에 온 뒤에도 그는 그 도벽을 이기지 못하고 2005년 마포에서 60이 훨씬 넘은 나이에 도둑질을 하다 경찰의 총을 맞고 체포되었다. 그 이후 그의 소식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이 이야기가 가슴 아프다. 평생을 도둑질하며 살고 감옥에서 보내온 그가 인생의 나락에서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여 새 삶을 시작했는데 하루 아침에 신앙의 영웅으로 박수를 받는 바람에 정작 자신의 인생을 벼랑끝으로 내 몰았던 죄의 문제, 뼈 속까지 뿌리 내린 도둑질의 본성과 싸우지 못하고 결국은 그 죄의 올무에 벗어나지 못하여 넘어지고 말았다. 가슴아픈 것은 그가 신앙의 영웅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 내면에 뿌리깊은 죄와 목숨을 건 투쟁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극단적인 면에 몰입하는 한국교회의 현상이 그를 그렇게 내 몬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이 아프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놀라운 은혜를 입고도 믿음에는 실패한 대표적 사례로 말하고 싶다. 그는 영웅의 자리에 서지 말고 차근 차근 성서에 몰입하면서 자기와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어야 했다. 교회도 간증대에 세우지 말고 그렇게 지도하고 가르쳐야 했다.
이야기의 성격은 다르지만 신애도 지금 신앙의 영웅 혹은 신데렐라가 되어 자기 내면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적 신앙에로 넘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아들을 죽인 범인에 대한 용서의 문제에서 이 위선이 여지없이 노출된다. 다음 글에서 함께 지켜보도록 하자.
(심용섭/엘파소한인신문 2008년 9월호)
첫댓글 많은 사람들이 들춰내고 싶지않은 나의 이야기인것 같습니다.위선적이고 용서하지 못하는...우리 아니 나의 내면의 문제에 좀더 정직하게 접근하기를 원합니다.
모세님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