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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강의 : 모세를 부르시는 하느님
모세에 대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뿐이다. 나아가 성경은 모세의 전기를 기록하려는 의도에서 씌어진 것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 하느님이 자신의 뜻을 펼치시는 사실을 기록하려는 의도에서 씌어진 것이기 때문에 모세의 역사적 인물상을 그려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이집트 땅에서 고통을 당하는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했고,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계약을 기초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종교를 확립하였다. 구약 안에서 모세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것은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다. 성경을 통해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모세가 어떤 인물인가 하는 사실보다 모세가 무슨 역할을 수행했느냐 하는 것이다.
➀ 모세는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는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 대리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➁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유일신교 확립에 기여하였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의 신은 야훼 하느님 한 분이심을 선포하였다.
➂ 이를 통해 모든 부족을 하나로 결속시켜 민족공동체 형성에 기여하였다.
이처럼 모세의 역할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실천한 사람이며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의 중개자적 역할을 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기여한 사람이다. 이러한 모세의 역할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있어 모세는 가장 존경받는 예언자이자, 그들의 신앙체험의 중심에 놓여있는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모세의 업적을 중심으로 그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앙인의 한사람으로서 그가 겪은 고통과 좌절, 뜻하지 않은 부르심, 부르심에 응답해 가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은 그의 삶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통해 어쩌면 축복받지 못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마감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오경 전반에는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사랑, 자비가 표현되고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하느님의 도구로서의 삶을 살았던 모세의 삶을 우리가 돌아보면서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지침을 마음에 새기는 것도 좋을 듯하다. 모세가 걸었던 그 길이 바로 우리가 걸어야 할 신앙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모세를 본받아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마지막 강의 때 이야기할 것이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가 마음에 가지고 있어야 할 하나의 주제가 있다.
오경 안에서도 나타나는 주제이지만 ‘선택’이라는 주제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업적을 위해 언제나 ‘선택’을 하신다.
노아를 선택하시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이사악과 야곱, 요셉을 통해서 또 다른 선택의 모습도 보여주신다. 이러한 선택은 하느님의 편애인가?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죄로 물들어 있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창조 때의 좋은 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우선적인 선택’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 개인으로서 모세를 선택하신 것은 그를 엘리트로 만들어 특별대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신앙과 행복의 길로 인도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이미 아브라함에게 하신 축복의 말씀에서 들었다.
“땅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해 복을 받으리라”(창세 12,3)
하느님께 선택받은 사람은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와 은총 속에 있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을 위한 특별한 과제도 안고 있다. 또 이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겪기도 한다. 모세 역시 하느님에게 선택된 사람이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특별한 보호를 약속하시고 또 특별한 능력도 주셨다. 그런데 이는 모두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과 행복을 위한 것이었다. 모세를 선택하신 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의 땅 이집트를 벗어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장소적 의미만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삶을 포함한다) 으로 들어가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온갖 역경과 어려움을 헤쳐 가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따라서 하느님의 충직한 일꾼 모세의 삶을 살펴보면, 오늘날 하느님에게 선택되어 그분의 일꾼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이 과연 어떤 마음과 자세를 지녀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다.
1. 모세는 고통의 상황 안에서 태어났다.
모세가 태어난 시기는 태평성대가 아니라 히브리 민족들에게는 종살이 하는 고통의 상황이었고, 특히 히브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두려워한 파라오에 의해 히브리 여인이 출산하여 사내아이를 낳으면 즉시 죽이라는 명이 내려진다. 그러나 산파들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1,17) 사내아이들을 살려주었다. (그들의 지혜로운 답변 1,19)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에도 파라오의 정치적 욕심 때문에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살벌한 상황에서 모세가 태어나게 된다.
파라오의 명을 어기고 석 달 동안 아기를 집안에서 키웠지만 울음소리 때문에 숨길 수 없게 되자, 아기를 왕골상자에 뉘어 강가 갈대 숲속에 놓아두는데,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절묘하게 목욕하러 나온 파라오의 딸이 그 아기를 발견한다. 그리고 가엾이 여겨 자신의 아들로 삼고 궁중에서 성장하게 된다. 모세는 궁중에서 왕족이 받는 고등 교육을 받으며 갖가지 지식과 기능을 익혔을 것이다. (왕골상자 = 방주=새로운 창조를 위한 하느님의 배려)
이스라엘 백성은 억압과 절망 속에서 고통을 당하였지만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해방의 싹이 움트도록 보살피셨다. 하느님은 장차 당신의 해방 계획을 실현할 모세가 태어나고 잘 성장하도록 숨어서 이끄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요셉의 일화를 통해서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보았다. 요셉 또한 지독한 고통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고통의 과정 또한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믿어야 한다.
2. 실패를 통한 깨달음
모세가 파라오의 궁에서 성장했지만 히브리 인으로서의 정체성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인지 자기 동족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거기서 동족을 괴롭히는 이집트인을 쳐 죽이는 살인을 저지른다. 동족에 대한 연민과 억압받는 약자를 향한 정의감에 불타 주먹을 휘두르고 폭력을 사용했다. 타인을 위해 정의로운 행동을 했다고 하는 생각도 잠깐 자기 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는 비참한 신세가 된다. 모세는 억압받는 동족들 편을 들고자 용맹한 행동을 감행했지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집트인을 때려죽임으로써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불의에 대항하고자 했던 의도는 높이 살 만 하지만 격정에 휘말려 그릇된 방식을 택한 것은 분명 잘못한 일이다.
자기 힘만 믿고 자기 기준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 폭력으로 사람을 죽여 버린 것은 파라오의 사내아이를 죽이는 행동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끈질긴 인내가 필요하고 살인과 폭력이 아닌 생명과 비폭력을 우선시해야 함을 배워야 한다.
하느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모세가 저지를 것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고 살지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그마한 하느님 체험을 하고서 열정을 앞세워 내 방식만을 남에게 강요하지는 않는지? 하느님의 뜻을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뜻과 고집을 내세우지는 않는지? 하느님의 일을 한다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체면과 영광을 위하지는 않는지? 실상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신데 주제를 모르고 자신의 능력으로 일이 이루어지는 양 너무 오만하지는 않는지?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부와 배척을 당하며, 마음의 상처를 입고 낙담하여 하던 일을 다 집어치우는 잘못을 범하지는 않는지?
하느님의 계획 속에는 고통과 실패도 포함됨을 기억해야 한다. 실패를 통해서 성장할 수 있음을 우리는 일련의 이집트 탈출 사건을 통해 이미 알고 있다.
3. 모세를 부르시는 하느님
미디안 땅에 온 후 목자가 되어 세상에서 잊혀진 채로 살던 모세는 어느 날 양 떼를 몰고 광야 끝으로 가다가 하느님의 산 호렙에 다다른다. 바로 그 때 하느님은 떨기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탈출 3,4)하고 그를 부르신다.
1) ‘호렙’은 히브리어로 ‘황량한 곳’, ‘불모지’, ‘내버려진 땅’을 의미하는데 이는 모세의 초라한 처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다고 할 수 있다.
✎ ‘호렙산’에 대한 또 다른 이해가 필요하다. 하느님의 산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모세가 십계명을 받게 되는 ‘시나이산’ 또한 하느님의 산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두 산이 다른 곳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호렙산과 시나이산을 동일한 곳으로 여기고 있다. 단지 엘로힘계 전승과 신명기계 전승에서는 호렙산으로 표현하고, 야훼계와 사제계 전승에서는 ‘시나이’로 표현하고 있다.
2) 하느님의 산 호렙에서 모세는 가시나무 떨기에 불꽃이 이는데도 타서 없어지지 않는 광경을 보고는 신기하게 여겨 다가간다. 가시나무 또한 아무 쓸모가 없는 메마른 잡초로 여겨지기에 모세에게 한편으로 어울리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왕궁에서 도망쳐 나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아보면 이집트 왕족에서 초라한 양치기 신분이 되었으니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실패한 사람, 추방당한 사람,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 불에 타지 않는 떨기나무
여기에 대한 학계에서 내 놓은 몇가지 해설이 있다.
➀ 유대 미드라쉬 전승에서는 떨기가 불꽃 속에서도 타지 않는 것은 거센 억압 속에서도 이스라엘이 사라지지 않고 보존됨을 뜻하는 것이다.
➁ 불로 상징되는 하느님은 하찮은 떨기 덤불 속에서도 계시닌 그분이 아니 계신 곳은 없다라고 랍비들이 해석을 하기도 한다.
➂ 불꽃이 일지만 타들어가지 않는 가시덤불은 인간에 의해 파악될 수 없는 하느님의 본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불꽃이 가시덤불을 재로 만들지 않음은 인간의 지성에 의해서 파악되지 않는 하느님의 본성을 뜻하고, 동시에 인간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어도 타들어 가거나 재로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3) 그런데 하느님은 가시나무처럼 자신을 쓸모없는 이로 여기게 된 모세를 부르신다. 그의 이름을 반복하여 부르시면서 다가오신다. 두 번씩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부르심의 중요성과 긴급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실 때도 두 번씩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모세의 이름을 두 번 반복하여 부르시는 것은 ‘너는 결코 잊혀진 존재,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동족으로부터는 잊혀지고 초라한 존재가 되었지만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그 자신보다 더 생각하고 염려해 주시는 분이다. 하느님께서 이런 분임을 깨닫는다면, 설사 모든 이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해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우리를 머리부터 발 끝까지 사랑하시며 부르시는 것이다.
4) 하느님과 모세의 만남
하느님께서는 먼저 스스로를 소개하신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모세와의 특별한 관계를 드러내시는 것이다. 낯선 분이 아니라 이미 조상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던 분으로, 이스라엘의 하느님임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모세를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가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백성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하느님과 모세의 만남을 통해 쓸모없고, 쫓기는 존재였고, 파라오 앞에서 너무나 나약한 인간인 모세가 두렵고 떨리지만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위해 새로운 삶으로 불리움을 받는 은혜로운 사건이 시작되는 것이다.
5) 하느님의 구원계획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이유가 분명히 드러난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3,7)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보았고, 들었다. 알고 있다. 라는 말씀을 통해 당신 백성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고 안으셨음을 우리에게 드러내시는 말씀이다.
이어서 3,8에서는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구하시기 위해 손수 내려오셨다는 표현은 통해 모세를 부르신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6) 하느님의 약속과 보증
모세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주저주저하자 하느님께서는 제일 먼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는 약속을 해 주신다. 이는 야곱에게 해 주셨던 약속과 같은 말씀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해 주신다. 이는 사명을 맡은 이와 함께 하시며 다가오는 모든 위험과 고통, 장애, 불확실성을 없애주시겠다는 말씀이다.
더불어 모세의 요청에 따라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알려주신다.
‘나는 있는 나다’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이름을 들려주신다.
‘야훼’라는 이름의 뜻을 조금 의역해서 옮겨보면 ‘나는 너희와 함께 그렇게 있을 자로다’라고 할 수 있다. 즉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라는 약속에 충실하신 분의 이름이며, 조금 다르게 의역해 보면 ‘나는 너희를 위해 있는 자이다’라는 뜻도 될 수 있다.
이전 조상들에게는 단순히 전능하신 하느님으로 표현되었으나, 이제는 실제로 함께 하시는,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심을 드러내고 있다.
*** ‘야훼’ 이름과 연관된 에피소드
히브리어는 모음없이 자음만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이름 야훼도 ( )라고 표현이 되었는데, 후에 여기에 모음이 붙어서 읽기에 도움을 주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 후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십계명을 엄격히 지키게 됨에 따라 하느님의 이름 ‘야훼’도 일년에 한번, 속죄의 날에 대사제가 지성소에서 작은 소리로 부르는 것 외에는 금지되었다. 입으로 말할 수 없게 되자 ‘야훼’라는 말 대신에 ‘아도나이(주님)’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야훼라는 단어아래에 ‘아도나이’라고 적어놓은 것을 보고 13세기 그리스도인이 여호와라고 발음에게 되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학계에서는 ‘야훼’가 올바른 발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개신교에서도 이를 인정하기 때문에 공동번역에서 ‘야훼’를 함께 사용한 것이다.
4. 부르심을 피하려는 모세
성조들의 하느님, 전능하신 하느님을 넘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어 해방하시는 분,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이들의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하신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라고 명하신다. 다.
그러나 모세는 두려워 그 부르심에 회피의 의사를 나타내자,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세 가지 증거를 보여 주신다.
첫째는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는 현상, 둘째는 문둥병에 걸렸다 낫는 것, 셋째는 나일 강 물이 피로 변하는 모습이다.
세 가지 증거에도 불구하고 소명을 거부할 뜻을 밝히며, 자신은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딘’(4,10) 사람이기에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자 하느님은 당신이 사라에게 입을 주어 말을 하게 만든 분임을 밝히시며 ‘네가 말할 때 내가 너를 도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리라’(4,12)고 약속하신다. 하지만 또 다시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을 보내라며 사양한다.
이처럼 무려 다섯 번이나 소명을 거부하는데 이는 자신의 부족함과 하느님이 맡기시는 소명의 어려움을 알았기 때문이다. 단순한 거절이 아니다.
모세는 더 이상 혈기 넘치는 젊은이가 아니었다. 양치기로 40년을 보냈고, 현실을 직시하며 자신은 그런 엄청난 일을 할 만한 자격도, 능력도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못하겠노라고 거절한다. 동족을 괴롭히는 이집트인을 스스로 나서서 죽여버렸던 그가 이제는 뒤로 물러서고 있다. 하느님의 소명이 얼마나 막중한 것인지 알기에 철없이 함부로 나서지 않는 겸손한 자로 바뀐 것이다. 무릇 하느님의 일을 한다면서 혈기와 의욕만 앞세우고, 너무 자기 능력을 믿고 나대는 사람은 오히려 하느님의 일을 망치는 수가 있다.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느님 일의 주도자는 하느님이시며, 인간은 단지 심부름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겸손이 있어야 한다. 모든 일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모세가 이집트에서의 실패와 좌절 체험, 광야에서의 40년간의 양치기 생활을 통해 겸손된 자세를 배우고, 당신의 소명을 받을 큰 그릇이 되도록 준비시켰던 것이다. 광야 생활을 다루고 있는 민수기에서 보면, 미르얌과 아론의 배반에도 하느님의 뜻을 기다리며 온유한 모습을 보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겸손된 모습을 보이는데, 바로 이러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고 본다. 이렇게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는 부정적인 체험마저도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5. 파라오 앞에 선 모세
야훼 하느님과의 실랑이 끝에 그분께 승복한 모세가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따르기 위해 미디안을 떠나서 이집트로 돌아간다.
모세와 아론은 야훼께서 명하신 대로 파라오에게 가서 야훼의 말씀을 전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해방은커녕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고, 모세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5,1-23)
모세의 요구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내 백성을 내보내어 그들이 광야에서 나에게 축제를 지내게 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는 말을 파라오에게 하자 파라오는 거절하고 더 심한 탄압을 가한다. 이에 히브리 민족은 모세를 비난하며 ‘너희가 뭔데 나서서 파라오의 기분을 언짢게 해 가지고는 결국 우리만 더 고달프게 만들었느냐?’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따르기 위해서는 때때로 큰 어려움과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은 쉽게 하지만 그에 필요한 희생이 요구되면 뒷걸음친다. (서울 신축성당 이야기)
모세는 어려움을 만났으나 도망치지 않고 하느님께로 돌아가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말씀드린다. “주님, 어찌하여 이 백성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보내셨습니까? 제가 파라오에게 가서 당신 이름으로 말한 뒤로, 그가 이 백성을 괴롭혀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께서는 당신 백성을 도무지 구해 주시지 않습니다”(5,22-23)
사람과 사람이 진정 돈독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정직이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앞에 나와 힘들면 힘들다고, 혼란스러우면 혼란스럽다고, 억울하면 억울하다고 말하기를 바라신다. 하느님은 당신에게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고 정직하게 말씀 드리는 우리의 기도를 기꺼이 들어주시고 도와주심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께 부르심 받은 이의 태도이다.
6. 믿음의 인간 모세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여러분은 이미 탈출기를 읽으면서 재앙이 있을 때 마다 파라오는 태도를 바꿔가며 재앙을 거둬 달라고 모세에게 부탁하는데 모세는 끊임없이 인내로운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파라오 앞에 당당하게 서 있음을 보았다. 젊은 시절 자신의 주먹과 힘을 믿고 이집트인을 죽여 버렸지만, 이제는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하면서 대화와 지칠 줄 모르는 인내로 일을 처리해 간다. 도무지 승복을 하지 않으려는 파라오를 상대로 끈질기게 협상을 시도한다. 하느님의 능력은 이렇게 한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리하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지하고, 폭력이 아니라 대화로, 서두르지 않고 인내로 일을 하도록 이끄신다. 바로 이런 점들이 참다운 하느님의 일꾼을 식별할 수 있는 기준이라 할 수 있다.
모세가 이처럼 변화될 수 있었던 원동력을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그분의 해방과 구원에 대한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에서 건져주셨다. 하지만 억압의 땅에서 건져주신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을 새로운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신다. 이집트 탈출은 종살이에서 탈출이 목표가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 공동체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하느님은 모세를 앞장세워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
그런데 가나안 땅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을 인도하시지 않고 멀리 돌아가게 하신다. 13,17 이하에 따르면 닥쳐올 전쟁을 내다보고 후회하여 이집트로 돌아가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렇게 하셨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이면에 숨은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야훼를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백성이 되게 하시고자 하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보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기에 시간이 필요로 하다.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보여줘도 그 순간만 하느님께 의존할 뿐 또 다른 위기가 닥치면 흔들리고 의심하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닥치는 여러 위기를 극복하도록 도와주시면서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시고, 이를 통해 당신께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다지려고 하신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기 위해서 10달의 시간이 필요하듯이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서 태어나기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했다.
이스라엘에게 닥친 위기는 수없이 많았다. 파라오의 추격에 대해 갈대바다의 기적을 보이시고, 먹거리가 떨어져 모세에게 대들자 먹을 고기와 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더 가지기 위한 욕심이 아니라 생존의 몸부림이기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도와주신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만나를 주시면서 ‘하루 먹을 즉 일용할 양식’만 거두어들이라고 명하신다. 이는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새로운 경제 윤리이다. 이집트에서는 계급과 신분에 따라 소유의 격차가 컸지만, 자유의 생명을 주시는 해방 공동체인 이스라엘 안에서는 필요한 만큼의 소유에 만족해야 했다. 필요이상 가지는 사람으로 인해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이들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또한 하느님께서 또 주신다는 믿음을 키우기 위함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겪은 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미를 밝혀준다.
“너는, 마치 사람이 자기 아들을 단련시키듯, 주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단련시키신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알아 두어야 한다”(신명 8,5).
어려움 중에도 언제나 하느님의 도우심이 있음을 믿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