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에 발표된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 소설 <이방인>은 주인공 뫼르소가 무미건조하게 내뱉는 다음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그게 어제였나.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나도 따라 해봤다.
“오늘, 친구가 죽었다. 아니, 그게 어제였나. 잘 모르겠다.”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의미 없는 죽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던 카뮈는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그가 말한 부조리였다.
□ 메멘토 모리
친구가 또 죽었다. 벌써 몇 명째인가, 무정한 자연의 선택에 낚인 녀석들이. 학창시절 그는 넉살 좋고 호방했으며 힘도 셌다. 축구시합에서 다부진 몸매의 그가 찬 공이 골대를 부러뜨린 적도 있었다. 홀로 키운 아들이 일본 대학에 합격했다고 자랑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는데, 그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남의 일이었던 죽음, ‘그들만의 특별한 사건’이었던 죽음이 나의 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어릴 때 목격했던 마을 어른들의 초상, 가까운 혈육의 죽음, 지금껏 장례식장에서 문상했던 수많은 죽음에 이어 동년배들의 죽음에 이르렀으니, 죽음은 이제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현실로 성큼 다가오고 있다. 그럴 나이가 된 것이다.
죽음은 인간이 직면하는 단 하나의 진정한 리얼리티라고 했다. 흉내 낼 수 없고 추체험할 수 없는 일회적 사건이다. 인간의 삶은 출생에서 죽음으로 향하니, 태어남은 죽음의 시작이며 우리는 죽음과 동행하며 살아간다. 그런데도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볼 때마다 내 일이 아닌 것으로, 나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치부하며 죽음을 대상화하고 죽여버린다. 그럴 때 나는 나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고유한 가능성을 잃게 된다.
삶의 끝이 죽음이 아니라 삶 속에 죽음이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이다. 죽음과 삶은 한 몸이다. 죽음과의 동침,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이다. ‘살아가는 동안 항상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라틴어 문장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이다.
□ 죽어야 산다
죽음이라는 껄끄러운 문제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철학자가 마르틴 하이데거였다. 인간의 존재 방식과 죽음의 관계를 밝힌 그의 역작이 <존재와 시간>(독일어: Sein und Zeit, 1927년)이다. 너무 난해하고 헷갈려서 끝까지 읽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이 책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에 대한 자각을 통해 참다운 존재 방식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 방식을 문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며, 그러한 인간을 현존재(現存在, Dasein)라고 불렀다. 현존재로서의 인간이 지닌 가능성 중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죽는다는 사실이다. 죽음은 삶에 불안으로 스며든다. 인간은 자신이 필연적으로 죽게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끝없는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다. 자신이 무화(無化)된다는 불안은 인간이 떠안은 가장 근본적 불안이다. 존재의 심연에서 솟아나는 죽음에 대한 불안은 약을 먹고 치료해야 할 불안이 아니라 기꺼이 감내하고 떠안아야 할 불안이다. 인간은 불안을 겪으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불안을 통해 근원적 시간과 생의 유한성을 자각하면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게 된다. 죽음에서 삶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유한하므로 삶은 가치를 얻을 수 있다. 인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삶은 얼마나 지겹고 하찮은 것이 될까? 불로불사의 존재들에게 삶은 견디기 힘든 형벌로 다가올 것이다. 죽음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 내일 죽는다고 생각한다면 오늘 하루가 얼마나 절실하고 가치 있는 시간일까? 인간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려 든다. 죽음을 앞두면 정말 중요한 것이 보이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죽음은 존재의 가장 본질적이고 고유한 가능성으로 등장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으로 향한 존재’로 규정했다. 인간은 죽음 속에서 존재의 출발점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가 도달할 종착역이 아니라 실존으로서의 자기를 자각하는 적극적 계기가 된다.
□ 죽음의 미리 보기
하이데거는 미래에 있을 죽음을 향해 달려나가라고 했다. 죽음을 미리 앞당겨 생각하는 ‘미리 죽는’ 삶의 방식이 나의 존재 방식을 바꾼다고 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죽음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삶의 근원적 실체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을 찾아가는 것을 하이데거는 ‘죽음에로의 선구(先驅)’라고 했다.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 보는 ‘죽음의 미리 보기’인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의 태어남은 우연이며, 인간은 낯선 세계에 던져진 존재(Being thrown)에 불과하다. 나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며 우연히 이 자리에 던져져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존재의 던져짐과 생명의 유한성을 자각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을 통해서 불안을 느끼게 된다. ‘나’라는 존재는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의 골치 아픈 물음과 함께 죽음에 의하여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자각이 불안을 몰고 온다.
이 불안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나의 인생이 달려있다. 불안을 잊기 위하여 약물·술·담배에 의존하거나 오락·돈·지위·권력·학벌·인간관계·소유·소비·먹방 같은 세속적 가치에 매몰되어 살 수도 있다. 오늘날 대부분이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즉물적인 삶은 불안으로부터의 일시적 도피에 불과하며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최선의 방안은 죽음을 직시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미리 죽음의 상황으로 가보는 것이며, 오늘 내가 죽는다고 가정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동안의 삶을 후회하며 회한에 젖기도 하고, 만약 다시 살게 된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성찰하게 된다. 삶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죽음이 삶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 비본래적 삶에서 본래적 삶으로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 양식을 비본래적 삶과 본래적 삶으로 구분했다. 비본래적 삶(unauthentic life)이란 사회의 기대와 규범에 따르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타인의 기대에 따라 사는 수동적이고 피상적인 삶이다. 죽음을 망각하고 진정한 자신을 잃어버린 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퇴락하고 가식적인 삶이다. 세속에 젖어 재물을 모으고, 사회적 지위를 얻고, 탐미적 쾌락에 빠져 아등바등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반면에 본래적 삶(authentic life)이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인식하고, 죽음을 통해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며,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며 살아가는 자율적이고 진정성 있는 삶이다.
인간은 죽음의 미리 보기를 통하여 비본래적 존재에서 본래적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죽음 자체를 수용하면서 지금까지의 존재 방식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 하이데거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게 됨을 자각하고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본래적인 실존을 찾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죽음의 인식을 통해 지금, 이 순간의 내 삶을 성찰하게 되고 스스로 결단하여 새로운 삶을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게 된다.
□ 존재의 다이어트
인간은 죽음과 불안을 통해 자신의 본래성을 자각할 수 있다. 죽음의 불안이야말로 자신의 자유와 고유의 가능성을 증진하여 비본래적인 존재에서 본래적인 존재로 전환해 주는 핵심 키가 된다. 죽음의 불안은 떨쳐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삶을 자각시키는 필수 옵션이므로 회피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을 향해 시간을 달려가고, 죽음으로 달려가는 연습을 하고,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한다. 그리고 불필요한 욕망을 비워 자신의 존재를 가볍고 날씬하게 다이어트해야 한다.
죽음의 불안을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들이 회피를 위한 구실을 만든다. 내세와 영생을 미끼로 존재의 불안을 우회하려고 하거나, 약물에 의존하고, 오락과 스포츠에 빠지며, 돈·지식·학벌·지위·권력·인간관계 등의 세속적 가치에 몰방하고, 바쁜 일상 속으로 도피하여 자신의 본래성을 망각한 채 무의미한 삶을 이어간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든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화려한 성전을 지어놓고 그 속으로 도피하기도 한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이 세상에 왔다 간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내 삶 속의 비본래적인 것들을 버리고 비워서 생의 너머로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존재를 다이어트할 시간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을 소재로 한 톨스토이의 소설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톨스토이의 이반일리치의 죽음을 철학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삶에 대한 물음에 대해 톨스토이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로 답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 오며, 언젠가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자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결코 나쁠 게 없다는 것이다
소설속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 같이 곧 내 인생에 끝이 온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
남은 인생을 진정한 나로 살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판사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어느날 가벼운 상처를 입는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상처가 그를 돌이킬 수 없는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
치유 불가능한 병을 앓으며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동안 이반 일리치는
단순하고 평범했던 자신의 자신의 삶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된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비본래적인 삶을 벗고 본래성을 자각하는 뒤늦은 깨달음 을 얻는다
이반일리치의 죽음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그래 이거야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러게 기쁠 수가
이반 일리치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 누군가 그의 머리위에서 말했다
임종하셨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도중에 멈추더니 온몸을 쭉 뻗었다
그는 그렇게 죽음을 받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