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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는 아직까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난 것도 벌써 3일째. 사람은 적응하며 살아간다고 하는 생물이니만큼, ‘나’ 역시도 이런 일에 적응을 해 버렸다.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 그 구분에 묘하게 서 있던 삶은 끝났다. ‘나’에게는 유령이 들러붙어 있고, ‘나’는 그 유령을 보고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역을 뛰어넘은 존재를 인식과 인지할 수 없다.
이런 몰상식한 일이 어째서 일어났는지 알 수는 없다. 그 대상이 어째서 ‘나’인지조차 모른다. 그렇지만 그저 일어난 일에 객체와 주체가 모두 어리둥절한 상태, 그 상태에서 누구 한 사람을 독촉한다고 해서 대답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밌잖아.
1
그저 나른한 독백 같은 오후. 아무런 기척도 존재감도 느낄 수 없는 곳에서 행해지는 ‘나’만의 이야기들. 도시의 오후는 정해진 관념이 무색할 정도로 고요하다. 특히 지금 서 있는 호수 같은 곳은 더욱 더.
창원 용호동에 위치한 ‘용지호수’는, 거대하고 번잡하게 들어난 최신식 상가들 뒷켠에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만들어 진 때는 약 70여 년 전이라고 하는 이 호수는, 1만 6000여 평의 넓이에, 주변에 몇 개의 너른 공터가 있으며, 다수의 분수대와 호수 한편의 팔각정, 호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지압보도와 풀밭, 그리고 나무들… 가까운 인근에 위치한 용지공원이라던가, 창원시립도서관이라던가 부산보다 비싼 땅값을 자랑한다는 1등 지형지. 한겨울인데도 분수대는 물을 뿜고 있었고 맑은 날씨 때문인지 분수대가 뿜어내는 물길을 우산삼아서 무지개가 쉬고 있었다.
「재미있잖아. 저 무지개.」
혼잣말에 혼자서 대답한다. 아니- 그것은 지금의 오후 같은 독백. ‘나’에게만 들리는 실체 있는 환청. 음성에 존재하는 실체는 진동이라고 해야 하나? 어렵다. 복잡한 것은 알지 못한다. 그저 ‘나’가 확신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재미있지.”
대답을 한다. 대답을 듣는 것은 ‘나’의 옆에 정확한 형체로 존재하는 소녀. 이제 13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는, 140cm정도 키에 긴 생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검은색 생머리에 검은 눈동자, 그리고 얼굴의 대략적인 생김새는 전형적인 한국인이고, 이 아이를 처음 봤을 때 그 아이가 ‘나’에게만 보인다는 것을 알고 느낀 첫 감상은 지금까지도 똑같다.
“처녀귀신”
「이 나이에 죽었는데, 처녀귀신이 아닌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뜬금없이 터져 나온 ‘나’의 독백에 대답하는 아이. 아니, 남에게는 ‘나’의 말이 독백으로 보이겠지만 이 아이는 다르다. ‘나’의 독백을 독백이 아닌 물음으로- 대화로 ‘볼’ 수 있는 아이이기에 자신이 본 독백을 따라 ‘나’에게 걸어온다. 발을 쓰지 않는 걸음걸이는 발자국 또한 남기지 않기에- ‘나’는 걸음의 자취와 여운을 느낄 수 없다.
“그렇겠지. 고개를 끄덕이면 이상한 사람이 되겠지.”
「마음에 들진 않는데- 네 말 대로라면 너는 고개를 끄덕여야 하겠네? 그리고 나는 이상한 애가 되는 거고.」
“나는 이상한 사람이니까?”
「글 쓰는 사람들은 모두 이상해.」
“편견이야.”
편견이지만 지독하게도 들어맞는 이야기. 그것은 작가들이 짊어진 이야기. 아니- 아직은 작가인척 할 뿐인 ‘나’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인가? 글을 쓴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고, 그렇게 바꿔질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나’는 글을 쓸 수 있었다. 그것은 아이러니. 지독하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없을 정도의 일반적이고도 일상적이며 당연하게 여겨지는 아이러니.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그 생각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내온 거잖아?」
작가는 지식인으로 분류된다. 그 지식인은 사람들보다 지식수준이 뛰어나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 아니다. 명백한 사실-. 그것은 일반인이라는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하다고 평가절하 하는 모욕과 같다. 지식인이라고 붙은 그들의 일상은 일반 사람들보다 더욱 많은 책임을 받았기 때문에 받은 명칭. 자신에게만 전념하기 보다는 세상의 일과 지식적인 일을 바라는 타인의 거울이기에 받은 명칭.
그런 지식인들의 단어들은 자신을 비추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풀어낸 것. 언어는 신비스럽고 신비스럽고 또한 신비스러워서, 늘 사용하면서 일상적인 단어들의 조합이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낸다. 그것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조합인가? 그들은 언어를 조율하고 있는 음악사- 시의 적절하게 나오는 하나하나의 단어들. 그 단어들의 등장시기들은 한 문장이라는 짧고도 짧은 영화 한편을 감독하는 감독에 의해서 정해진다. 프롤로그도- 엔딩도- 존재하지만 존재를 느낄 수 없는 영화-. 그들의 프롤로그와 엔딩은 단어의 들여쓰기와 마침표일까.
그런 단어들을 비춰주는 사람들- 그 단어들을 비춰주지 않는 사람들- 비춰주지 않는 단어들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것은 단지 생각일까. 사람은 늘 생각을 한다. 생각하기에 존재한다고 평가한 철학가가 있듯 존재하기 위해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그들 중 작가라는 족속은 그것을 표현할 연주기법까지 가지고 있는 부류를 그냥 통칭한 단어일 뿐이다.
「흔히 주인공은 작가의 생각과 사상과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기 위해서 작가 자신을 반영한다고들 하잖아.」
“머리에 피가 마르기도 전에 죽어서 영원히 마를 일 없는 꼬맹이가 이상한 것들은 잘 아는군.”
조금은 심하게 생각될 말들. 처음에는 조심조심하게 나오던 말들도 이제는 거침없이 나온다. 그 말을 듣는 아이의 반응이 별 굴곡이 없었기에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거겠지. 아이는 어느새 ‘나’의 곁으로 와서 호수의 난간에 올라가 다리를 흔들고 앉아있다. 위험하다고 말하면 아이를 모욕하는 것이 될까?
「그 피를 흘린 시점이 한창 호기심이랑 학구열 많을 나이라서.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을 배웠어. 죽어봐. 외부로 드러낼 모든 감각들이 차단되면 결국 내부로 침식하게 돼.」
“그리고 어려운 단어들만 배워놨다가 사용할 곳을 생각하며 헤벌쭉 웃기도 하나보군. 내가 그 나이 때에는 호기심은 많았지만 학구열 따위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럼 애정이 부족했다고 하자. 하필이면 애정표현을 하는 상대들이 모두 학생이라서 공부하는 내용들을 따라 배웠지.」
“조숙한 학생들만 따라다녔나? 그 나이대의 애정은 부모님들을 많이 향하는데. 부모들의 불장난이 빨랐나보군. 이상한데. 그럼 그 나이에 처녀귀신이 안 되었다고 해도 별 이상한 부분을 찾을 수 없어.”
「관둬. 역시 너도 작가였어. 아까 고개 안 끄덕거리고 뭐했어?」
유쾌한 감정은 있지만 큰 소리로 웃진 않는다. 단지 한 쪽 입가를 살짝 끌어당겨서 비웃음에 가까운 실소를 짓는다. 그것만으로도 내 감정이 표현될까- 아이는 ‘나’를 홀린 귀신. ‘나’는 귀신들린 사람인거다. 정상적인 웃음을 욕보일 필요는 없겠지. 그것이 단순한 자기만족이라던가― ‘나’에게 시니컬한 농담들의 대상인 편견 같은 것이라 할지언정 나는 연극을 하겠다. 뭐- 즐거운 것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겠지.
‘나’의 시선은 무지개로 옮겨진다.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무지개. 인공적인 것들에 의해서 사라져 버린 실체. 인간에 의해서 사라졌기에 인간에 의해서 재탄생되었고, 인간에 의해서만 보이게 된 슬픈 단어. 사전 속의 단어는 하나 둘 사라져가지만 단어의 존재만은 남아- 고어와 사어가 되어 시인과 소설가들에 의해 사용되며 신비감을 나타내겠지. 지식인들이 좋아할 법 한 그런 단어들이 늘어 가면 늘어갈수록, 또 다른 지식인들은 유감을 표하겠지.
「대답이 없어졌네.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거?」
아이는 고개를 ‘나’에게 가까이 내민다. ‘나’에게 있는 상식선 상에서 유령은 희미한 형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남들과 확연한 구분을 짓는 대상이 된다. ‘나’의 상식선을 구축하는 것은 대중들의 상식선 또한 함께 구축하는 미디어가 대부분이었으니 어쩔 수 없겠지. 아이는 ‘나’에게만 보인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사람과 동일하다. 유령의 장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고픈 사람들의 지적 욕구를 만족시켜줄 수 없을 정도의 형체를 가진 아이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몸 너머- 반대편의 투과 따위는 할 수 없었고 필요도 없었다. 만일 그 반대편을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저 바라만 보면 되고 예외라고 할 수 있는 ‘나’는 그저 일어섰을 때 그 너머를 볼 수 있다. 아이의 키는 작으니까.
“작가는… 그래. 자신을 주인공으로 투영하지.”
작가는 주인공으로 투영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허다하다. 시대와 상황과 환경과 현실과 배경을 고려하고 주인공을 조합한다. 주제를 생각하고 그 주제라는 천을 바느질할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 주인공이라면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상상한다. 어느 쪽이든
「결국 주인공은 작가를 반영한다는 게 맞는 거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 아마추어- ‘나’에 의해 쓰였던 수많은 글에서는 그랬을까? ‘나’에 의해 읽혔던 글들에서는 그랬을까? 사람들은 다수의 글들을 남기며 ‘나’라는 사람이 평생 동안 하루의 10권씩 책을 읽어도 다 읽지 못할 양들의 책이 역사라는 서고에 꽂혀 있다.
“슬픈 이야기야… 그런 건.”
혼잣말일까. ‘나’의 글을 쓸 때 버릇과도 같은 이야기들이 하나둘 흘러나온다. 아무런 의미조차 가지지 못하고, 순서조차 찾지 못한 글들이 그저 그럴듯하기 때문에 등장하고 사라진다. 그런 ‘나’를 모르는 아이는 시선을 다시 호수로 돌리면서 묻는다.
「왜? 그것은 슬픈 이야기가 되는 거지?」
어른들의 지혜를 빌릴까? ‘나’는 축적된 시간을 무시하고 그저 외향만으로 아이를 판단하며 이야기하면 된다. ‘어린 애들은 몰라도 돼.’ 라고. 그러나 그 이야기는 그 뒤에 이어지는 후편 때문에 너무나도 슬픈 이야기가 된다. ‘어른이 되면 알게 돼.’
어른이 될 수 있는 자유를 잡지 못한, 아니 잡을 기회를 받지 못한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무지한 채로 살아가야 하나? 그 삶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욱 더 많기 때문에 그런 걱정을 배제한 이야기가 선인들의 지혜로 쓰이고 있겠지.
“지식인이라는 사람들, 아니- 너한테는 나에게 한정된 상상력을 강요할 수 없겠지… 작가들은 주인공과 연동되어 있어. 나 같이 실력 없는 사람들은 그저 자신을 주인공으로 집어놓고, 나 같이 현실을 도피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자신을 주인공과 동일시 시켜 반영하고 작품 속에서 살아가지.”
비단 주인공만은 아니다. 실력은 없으나 뛰어난 작품을 바라본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모든 작품의 등장인물에 ‘나’라는 사람을 집어넣었다. 현실성 없는 현실을 찾기 위해. 모두가 동일한 뿌리를 가진 평범한 가지… 결국 그 가지는 아직 큰 뿌리를 가진 중심부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반영된 모든 인물들은 결국 ‘나’ 자신이며 내가 알고 있는 선- ‘나’의 능력으로 조율할 수 있는 현의 길이와 현이 낼 수 있는 음계- 그리고 그 음파가 내는 진동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기에 결국 ‘나’ 자신과 같은 모습이 된다.
“사람들이 행동하는 이면의 세계는 결국 자기만족으로 점칠 된 건가?”
「묻지 마. 어려우니까. 나 죽기 전 생일잔치에서 꽂혀있던 초 개수는 이후 늘어난 적 없으니까.」
“제사 때 케이크를 사지 않는 한 그대로겠지. 유언이라도 남기지 그랬어? 제사 때 케이크를 사서 그 위에 초를 매년 한 개씩 더 많이 꽂아 주세요라고. 죽기 전 입고 있던 옷을 같이 묻어달라고 하는 애교도 들어준다는데.”
「소설의 한 장면인건가? 천성이네, 그 작품에 대한 작가의 근성은? 그건 그렇고 질문한 사람은 나라고. 이야기를 계속 해줘.」
생각을 정리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갈 준비를 한다. ‘나’라는 사람이 읽어왔던 작품들- 그 작품들 중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글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반영한 주인공과 그 주인공에 투영된 작가들.
“사람들은 자기만족의 성향이 강한 걸까. 아니, 묻는 게 아냐. 사람들이 쓰는 글은 상업적인 걸까, 아니면 자기만족의 글 인걸까. 결국은 그런 거잖아. 남들이 쓴 글을 보면서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던 사람들이 글을 쓰게 되고, 자기가 주인공이라면… 근원적 욕망과 호기심과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상상력에 의해서 글들이 구성되어져.”
‘나’ 역시도 그 시작은 같았다. 누구에게나 와 닿을 수 있는 조그마한 시작. 가녀리고 연약하기까지 한 계기는 누군가에 의해서 꺾어지기조차 쉬운 것. 나는 그 계기들을 북돋고 있는가, 키우고 있는가?
비평이라는 굴레는 그 계기를 북돋고 있는 것일까? 시련을 이겨내야 큰다? 그 시련을 주는 사람이 나라고 허락되었나? 나는 그럴 자격이 있는가? 어째서? 내가 그럴 실력이 있는가? 실력을 규정하는 잣대는 무언가? 결과물이 없는 요령과 경험이 가지는 한계는 어느 정도인가? 그리고 그 외부적 잣대는 결국 가녀린 계기를 무너뜨리고 뭉개버리는데 충분한 건가….
내면의 여러 가지 질문들의 대답은 찾지 못한 채 이야기는 계속해서 흘러간다. 강제로 끌어올려져 공중으로 비산하는 분수대의 물들처럼.
“사람이 안다는 것은 어디까지인걸까. 내가 아는 것을 나 혼자서만 알고 있다 여기는 것은 오만이겠지. 그것은 자만이 너무 강한 것-.”
‘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고 여겨 스스로를 낮추고 또 낮춘다. 그것은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무지의 변명. 최후의 도피처로 언제라도 뛰어갈 수 있도록 준비되어진 길.
“내가 아는 것을 남들이 안다면 내 생각 역시 인정받을 수 있는 것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생각들은 결국 자기가 하고자 했던 말들. 작가는-! 아니 나는!”
‘나’도 모르게 격정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자동차소리- 새소리- 분수대의 비산하는 물줄기들이 떨어지는 소리- 고요하게 움직이고 있는 도시들의 소리-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호수 근처에 수많은 소리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기에 잊혀져가고… 결국 모든 것이 존재하기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서 적막한 호수를 ‘나’의 고함소리가 울려 퍼진다.
“적어나간다. 하고 싶은 글들이 자연스러운 작품을 설정해서… 그것은 어떻게 보면 자학이야. 하고 싶은 말을 해서 행복하지만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학을 해야 한다? 그것은 마조히스트잖아….”
「작가들은 변태라는 거야? 꽤나 성적인 평가네.」
아이의 간단한 감상에 실소한다. 아까와 동일한 웃음이지만 조금 더 본연에 가까운 표정이 성공적으로 나온 것에 기뻐한다.
“기회를 보지. 늘 생각하기에 살아가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여기는 인간들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그래- 너의 평가를 빌릴까? 그놈의 성적인 것에 몰두하는 작가들은 자신을 더욱 더 학대해서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도록 작품에 대한 것에 골똘해하지.”
「나같이 어린 아이 데리고 하는 말 치고는 단어 표현이 과격한데? 아동성폭행은 요즘 인터넷에 명단이 공개돼.」
웃음은 더욱 더 강해져서 결국 ‘큭큭’하고 숨죽인 웃음소리가 새어나갔다. 강제로 웃음소리를 막고 있던 것은 아니었기에 한번 터져 나온 웃음을 참지 않고 그대로 방치한다. 아이는 자신의 농담이 성공적이라는 것에 기뻐하는 듯 했다. 굴곡 없는 반응들처럼 처음부터 지금까지 별 변화 없이 평범함을 유지했던 표정에서 웃음기를 읽어낼 수 있다 여긴 것은 착각일까.
“처녀귀신 아니었나. 그렇다면 차라리 성이라는 것에 목말라 있다는 것이 사실 같은데. 필요할 때만 어린아이를 찾는군.”
「아직 늙어 보이고 싶은 적은 한 번도 없어. 나는 너희들이 성인이 아니라 할 수 없다고 아쉬워하는 일들을 원한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까.」
“이상한 아이군…. 처녀귀신이라-. 성불하고 싶으면 말해라. 일반적인 통념의 처녀라는 단어 뜻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에 그런 거라면, 처녀라는 것을 깨부수는 일반적인 통념적 행동으로 성불시켜 줄 테니.”
「‘영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겠지만 남들이 보면 이해 못할 자위’를 하고 싶으면 도와주겠지만, 추하다고 생각 안 해?」
“그런 거 보이겠냐.”
「작가는 호기심이 많다고 하잖아. 그런 거 보였을 때 사람들 반응 같은 거 체크해 보고 싶지 않아? 어차피 이상한 사람들.」
유쾌한 웃음은 멈춰지지 않는다. 분명 아이에게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이것은 슬픈 이야기라고 했는데 이렇게 웃음지어서는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미소 지을 수 있는 슬픈 이야기들도 아름다운 걸까. ‘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잘 못쓰는데- 이야기 하는 것은 상관없는 걸까.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아이는 ‘나’라면 이야기를 이어나갈 것이라고 확신했는지 갑자기 전환된 주제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결국은 간단한 거야.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서 할 말을 하지.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고, 자신이라면 이런 것을 진행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야기들을 늘어놓지. 완전한 객체가 되어서 장면과 장면을 연결하던 하나의 바느질도 결국 끝으로 가면 주인공이라는 ‘인물’을 위해서, 일의 당위성을 위해서 자신의 조각을 심어두게 돼.”
사람은 사람을 단기간 내에 평범한 방법으로 창조할 수 없다. 잉태와 출산으로 창조된 사람은 오랜 기간이 지나야지 완벽한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것은 오랜 기간이 걸리는 일. 작가가 작품 속의 인물을 위해서 들여 넣는 시간으로는 너무나도 길다.
사람은 자신이 아는 만큼 글을 쓰고, 자신이 경험한 만큼 글을 쓴다. 작가가 인물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이 길다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 자체가 다 들어간 인물을 만들기 때문이겠지. 결국은 인물이 반영됐다는 것을 표현하는 역설일 뿐.
“그렇기에 나는 무섭다.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기에. 내가 사람들을 알고 있기에. 글을 써도 추한 자기만족으로 끝나면 나 자신의 평가가 절하될 것을 알기에. 글을 써도 단어들의 선별이나 굳어버린 문체가 결국 나 자신의 평가로 직결될 것을 알기에.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무섭고 무섭기에 글을 쓸 때 나를 반영하지 않으면서도 반영한다.”
말장난. 모순? 아니, 결국 아이러니의 반복. 결국 뫼비우스의 띠. ‘나’는 앵무새? 했던 말을 반복하기 때문에-.
「어려우면서도 애매한 이야기네. 3일 동안 확실한 설명 내려준 적 없어. 혼자서만 열심히 이야기 하지만 그런 것은 재미가 없는데.」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다. 입은 미소 지은 채. 삶에서 조언자는 어떤 역할을 부여받았을까. 조언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축복받은 것이겠지. 이런 질문들이나 자학들에 대해서 확고한 평가를 내려준다는 조언자가 이 아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소설 같은 삶이겠지.
호수를 바라본다. 실풍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조그마한 바람들. 그 바람들이 보인다면 정말 ‘나’만의 표현처럼 ‘실’과 같이 얇고 기다란 바람일까. 그 바람들이 흔드는 호수의 잔물결들은 고요하기만하다.
호수를 바라보는 것을 멈추고 일반보도에서 지압보도 쪽으로 낮은 계단을 통해 걸어 내려가 돌멩이를 찾는다.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 일은 특별한 돌멩이를 찾아야한다. 얇으면서도 평평하고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 ‘나’는 어렵지 않게 그런 돌멩이 3개 정도를 찾을 수 있었다.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나’의 행로를 알고 있는 것인지 아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호수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옆에서 심호흡을 하고 돌멩이를 만지작거렸다.
“너, 어떤 유령이야? 처녀귀신이다 뭐다 그런 거.”
「처녀귀신이라고 하면 성폭행으로 성불시켜주게?」
“긍정적으로 고려해줄까? 처녀귀신은 빼고 이야기하든지. 무엇을 말하던 결국 네 정체성에 포함되는 고정답변이니까.”
아이는 고개를 잠깐 갸웃거릴 뿐,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그냥 유령」
“정체성이 조금 특이하구나. 아니면 너의 이름을 나에게 알려주어서 내 마음속에 꽃이 되고자 하는 것인가?”
「너, 지금이라도 고개를 끄덕여. 나는 이상하다고. 어차피 남들은 내 말은 안 들리니까 너 혼자 말하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이상하다 여겨줄 거야.」
“세상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알려진 진리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법이야. 관객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대본을 연습하며 ‘사실’을 이야기하는 배우는 많지만 그 ‘사실’조차 관객이 필요하다면 나는 무(無)로 있을래.”
아이는 이제 호수 쪽으로 걸터앉았던 몸을 반대로 돌려서 턱을 괴고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의 몸을 적당히 받쳐 잡아서 아이의 시야에 호수가 잡히도록 해 주었다.
“잘 봐.”
‘나’를 오랜만에 이곳으로 발걸음하게 만든 것은 이것에 있었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옛 기억. 아버지의 고향집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커다란 못. 그곳에 펼쳐졌던 동화 같은- 삽화 같은 이야기
“하!”
‘나’는 가벼운 기합과 함께 돌을 던졌다. 돌은 맹렬히 회전하며 날아가서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호수로 빠져들었다. 바람이 만든 잔물결들을 헤쳐 나가는 인위적 물결. 잔물결의 물결은 저항 없이 흘러가며, 그 잔물결들에 방해받지 않고 만들어진 또 하나의 파동은 융합되듯, 융합되지 않듯 그저 흘러간다.
「무생물인 돌멩이도 호수 속에서는 헤엄친다고 주장할거야? 그럼 나는 그 주장의 진위를 판명하러 내려갔다 올까?」
“실수야.”
‘나’는 얼굴을 긁적였다. 이거야 부끄럽군.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돌멩이를 제대로 쥔다. 그래- 이런 식으로 던지는 거였던가? 추억 속의 삽화에서 아련한 음성이 들려온다.
[내가 예전에 던졌을 때에는 저 반대편까지 건너갔었어.]
“하!”
‘나’는 다시 한 번 기합과 함께 돌을 던졌다. 돌은 또 한 번 빠르게 회전하며 날아가서 수면에 스치듯 부딪혀 튕겨 올라왔다.
“됐다!”
「물수제비…」
느긋한 궤적을 그리던 돌멩이는 또한 느릿한 속도로 튕겨 올랐고, 새가 바다를 활공하듯 느릿느릿 다시 한 번 수면에 튕겨져 올랐다. 그 행위를 두어 번 더 반복하던 돌멩이는 앞서 희생해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설파했던 돌멩이의 뒤를 따랐다.
“갑자기 생각이 났어.”
「오랜만이네…」
인공적으로 만든 호수. 어렸을 적 추억이 아름다운 자연과 어울리지 못한 ‘나’이기에- 이런 물수제비의 ‘추억’을 만드는 것도 이런 곳에서 밖에 안 된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지금의 현실에 맞는 추억들은 언제든지 써 나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에 튕겨져 올라서 다음으로 이동하는 돌멩이. 물수제비를 그리는 돌멩이는 아무런 변화를 거치지 않는다. 그저 ‘수면’을 튕기고 올라서 다음 수면으로 지나간다. 수면을 지나는 돌멩이. 수면에는 기다란 원들을 수없이 그리고 일그러뜨린다. 변화를 유도하는 본인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물수제비. 그런 돌멩이를 튕겨 올리는 것은 그 ‘변화’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돌멩이를 집어 들어서 호수로 던졌다. 돌멩이는 호수로 작지만 적막을 깨기에는 충분한 큰 소리를 남기며 잠겨들었다.
「추억은…」
아이는 멍한 눈빛으로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런 아이의 양 옆구리에 손을 끼워 넣고는 아이를 들어올렸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아야 해. 한 번 더 추억을 상기시킬 필요는 없겠지. 그건 추억을 상기하는 것이 아닌, 결국 추억을 각인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거지. 그리고 추억을 다시 쓰는 거고. 아직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아름다움에 취한 시체들을 불러들이는 호수. 용지호수에는 매년 사람이 빠져 죽는다. 글쎄… 매년일까 아닐까. 취한 취객들일지, 아니면 잃어버린 균형감각에 개탄하는 사람들일지. 정확한 것은 없으면서도 무성한 것은 소문뿐이겠지.
그 수면을 추억의 매개체로 삼는 것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
“들어가자. 여기는 밤에 한 번 더 오는 걸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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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수제비의 궤적은 이 한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계속해서 이어지는 '단편'입니다. 이 글은 분명히 단편이며, 장편으로는 진행될 계획이 없습니다. 단지, 이 제목을 그대로 딴 장편 하나의 스토리는 구상중입니다. 물론 다른 작품들을 먼저 완결시키고 해야겠지만요.
이것은 슬픈 자기소개서입니다. 다이나믹 듀오의 고백(Go Back)이라는 노래의 가사와 흡사한 분위기를 풍기는 후기군요. 예.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저 이기도 하면서 저가 아닙니다. 그렇게만 여겨주시면 될 거라고 여겨집니다.
이 소설의 무대들은 실존합니다. 저는 서울지역에 살지 않으니, 수도권 지방을 묘사하기가 까다롭더군요. 가상의 무대를 설정하기 보다는, 제 생에 최초로 '무대를 확실하게 지어보자'해서 생각한 무대가 이 창원의 데이트 코스 1위인 용지호수입니다.
이 용지호수는 뒤로는 아파트 단지와 넓은 공원이, 동쪽으로는 넓고 편안한 용지호수가(KBS 창원홀이나, 성산아트홀이나, 경남 도립 미술관이나, 경찰서, 소방서, 도청가는 길, 시청, 경상남도교육청, 병무청 등이 밀집되어 있고, 서쪽에는 조그마한 야산과 야산너머에 창원시립도서관이, 그리고 앞으로는 여러가지 전국적인 체인점을 가진 가게들(ex:캔모아, 스파게티아, 레드망고, 배스킨라빈스, 던킨도너츠, Melon노래방 등)과 최신식 가게들이 밀집한 먹거리 및 주류관련 상업지구가 위치해 있습니다.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 정경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는 것이 아쉽군요. 네이버 같은 검색프로그램에서 이 '용지호수'를 검색하시면 쉽게 아름다운 정경들이 나와있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정말로 아름다운 것은 그 주위를 천천히 걸으며 사색에 잠기는 것이죠.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작품 속의 주인공은 '나'입니다. 그런 '나'의 표기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모두 '' 를 붙였습니다. 이것은 주인공의 '나'는 나 이면서도 '나'가 아니라는- 그런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표현력이 짧은 작가를 위해서 독자분들이 수고를 해 주셔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글들의 분위기가 다크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시니컬합니다. 그것은 이번 작품도 마찬가진 것 같군요. 슬픈 노래를 들어서일까요. 쓰는 동안 저도 모르게 눈물 한방울이 고였습니다. 흐르진 않는 눈물이지만- 슬프군요.
작품에서 불필요하다고 해도 될 정도의 농담들에서 '수위'를 넘는 표현들이 나왔습니다. 사실, 저 정도 표현들만 하더라도 성적인 표현을 기피하는 제 작품들 중 가장 높은 수위를 보이는 표현입니다. 문학과 성이 많은 연관을 가지고 있고, 또한 읽어온 글들 중 성적인 문학이나 표현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는 제가 이 정도의 표현을 가지고 벌벌 떨 수 없겠죠.
하지만 아직 적응이 안되는 것도 있고, 제가 글을 올리는 곳의 사람들 연령층도 있어서일까요. 올리는 마음이 썪 좋지만은 않습니다.
최근 쓴 단편과 장편들을 통틀어서 가장 만족스러운 글이 나온 것 같습니다. 끝부분은 약간이지만요-. 앞으로 이어나갈 이야기의 상상에 즐거운 한때가 될 듯 합니다.
첫댓글 와와...;ㅁ; 너무 똑똑한 글솜씨입니다...[털푸덕, 마음에 드는 군요+ㅁ+! 아직 공감은 아니지만.. 훗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앞으로는 공감까지 가도록 노력하면 되는겁니까? 헤에-.
어려워서 중도 포기-ㅅ-;;;;;;;;;(쿨럭) 조분조분한 문체는 언제나 참 좋은것 같아요.+_+
주... 중도포기!;; 감사드려요-.
아마 글을 사람이 감성적이 된다는 밤에 써서 그럴 거예요. 저도 지금 읽으면 글들을 모조리 이해할 수 있을련지.(덜덜)
히힛- 조장군님과의 공감은 위험합니..[응?
소.. 솔직한 평가이지만 슬프군요(털썩)
뭐... 슬플것 까지야...=ㅅ= 저도 그런말을 먹고 살더래죠... 난 지극히 평범의 길을 걷고 있을 뿐인데...[궁시렁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