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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서 본 상윳따, 꼬살라(Kosala) 11
제 2 장 두 번째 품
얽어맨 머리를 한 수행자 경(Jaṭilo sutta)
이 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교도(異敎徒)들은 모두 고행을 하는 수행자들이다. 그중에 머리를 얽어맨 수행자를 자띠로(Jaṭilo)라고 한다. 자띠로(Jaṭilo)는 땋은 머리, 변발(辮髮), 결발(結髮), 엉킨 가지들, 탐욕에 얽힘 등의 뜻이 있다. 이때 얽어맨 머리는 땋은 머리카락을 꼬아서 모자처럼 머리 위로 얹는다. 다음에 자이나교도는 니간타(nigaṇṭha)라고 한다. 자이나교도 중에 옷을 걸치지 않고 나체로 수행을 하는 고행자를 아쩨라까(acelakā)라고 한다. 자이나교도는 옷을 입은 수행자도 있고 나체 수행자도 있다. 다음에 오직 단 한 벌의 옷만을 소유하는 고행자를 에까사따까(ekasāṭakā)라고 한다. 그리고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면서 탁발하는 수행자를 유행승(遊行僧)이라고 하는데 빠립바자까(paribbājakā)라고 한다. 세존께서 또는 제자들이 전법을 펴기 위해 다닐 때도 유행승(遊行僧)이라고 한다. 또 빠립바자까(paribbājakā)를 재가의 속박을 버리고 출가한 자라고도 한다. 이들 고행자들의 특징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곳으로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이때 세존께서는 40대 중반의 시기였다. 세존께서 머무신 곳은 동쪽에 있는 원림이라는 뜻으로 동원림(東園林)으로 부르는데 뿝바라마(pubbārāma)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강당을 미가라마따(migāramātā)라고 한다. 미가라마따(migāramātā)는 사슴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녹자모(鹿子母)라고 한다. 이때의 사슴은 순하고 착하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사람이 이름을 동물의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붓다의 성인 고따마도 소라는 뜻이다. 이 외에 사자, 호랑이, 꼬끼리 등을 붙이기도 했다. 이 사원은 세존의 여자 재가신도인 위사카(visākhā)가 보시를 했다. 세존께서는 아나타삔디까 사원에 계시면서 공양을 하신 후에 이곳에 오셔서 시간을 보내셨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출현하신 붓다는 모두 25분이시다. 그중에 초기에 일곱 번째 붓다가 빠두뭇따라 붓다이시다. 이 붓다의 시기에 위사카(visākhā)는 나는 나중에 붓다가 되신 분에게 후원을 하는 최초의 여자 신도가 되겠다고 발원을 했다. 위사카는 어마어마한 세월동안 이런 서원을 세웠다가 붓다가 출현한 시대에 인도의 바띠야 도시에 나란자라라는 부자 아버지와 소마나라는 어머니의 딸로 태어났다. 이때 세존께서 바띠야라는 도시로 오셨는데 위사카는 오백 명의 처녀들과 함께 세존을 친견하였다.
세존과 꼬살라 왕은 세존께서 법을 펴신 45년간 자주 만나면서 지내셨다. 이처럼 많이 만나면서 지내셨기에 상윳따 니까야에 꼬살라 경이 수록될 수 있었다. 사실 마가다 경도 나와야 하지만 마가다국의 아자타삿뚜 왕은 세존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만날 기회가 적었다. 빔비사라 왕의 아들인 아자타삿뚜 왕은 승가를 분열키고 세존에게 위해를 가한 데와닷따와 친하게 지냈다. 일찍 세상을 떠난 빔비사라 왕은 세존께 후원을 했지만 아자타삿뚜 왕은 부왕과 달랐다. 그러나 세존께서 강대국의 꼬살라 왕과 친했기 때문에 아자타삿뚜는 세존을 함부로 무시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아자타삿뚜 왕은 세존께 후원을 하고 싶지 않아도 꼬살라 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후원하기도 했다.
다음은 ‘얽어맨 머리를 한 수행자(Jaṭilo) 경의 본문이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동쪽 원림에 있는 미가라마따(migāramātā) 강당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홀로 명상을 하다 일어나 문밖의 현관에 앉아계셨다. 때마침 빠세나디 꼬살라 왕이 세존께 찾아왔다. 가까이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그때 일곱 명의 얽어맨 머리를 한 고행자들과 일곱 명의 자이나교도들과 일곱 명의 나체 수행자들과 일곱 명의 한 벌의 옷만 입는 수행자들과 일곱 명의 유행승들이 겨드랑이의 털과 손톱과 몸의 털을 깎지 않고 길게 기를 채 여러 가지 필수품을 지니고 세존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빠세나디 꼬살라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윗옷을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게 입고 바닥에 오른쪽 무릎을 꿇고 일곱 명의 얽어맨 머리를 한 고행자들과 일곱 명의 자이나교도들과 일곱 명의 나체 수행자들과 일곱 명의 한 벌의 옷만 입는 수행자들과 일곱 명의 유행승들에게 합장을 하고 세 번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존자들이시여, 저는 빠세나디 꼬살라 왕입니다. 저는 빠세나디 꼬살라 왕입니다. 저는 빠세나디 꼬살라 왕입니다.”라고
그런 뒤에 빠세나디 꼬살라 왕은 이들 일곱 명의 얽어맨 머리를 한 고행자들과 일곱 명의 자이나교도들과 일곱 명의 나체 수행자들과 일곱 명의 한 벌의 옷만 입는 수행자들과 일곱 명의 유행승들 떠난 뒤에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다가갔다. 다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한쪽으로 물어나 앉은 빠세나디 꼬살라 왕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들은 세상에서 아라한들이나 아라한의 길을 성취한 자들 가운데 어느 쪽입니까?”
“대왕이시여, 대왕께서는 세속을 사는 사람이라서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 자식들이 북적거리는 집에서 함께 살고 있으며 까시에서 나는 전단향을 사용하고 화환과 향수와 연고를 사용하며 금과 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왕께서는 아라한인가 아니면 아라한을 성취한 자들인가 알기가 어렵습니다.
대왕이시여, 그들이 계율을 지키고 있는가 하는 것은 함께 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랜 세월동안 함께 살아보아야 알지 짧은 기간 동안에 살아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알 수 있지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혜를 갖춘 사람에 의해 알 수 있지 어리석은 사람에 의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그들이 청정한지 아는 것은 함께 대화를 해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랜 세월 동안 대화를 해보아야 알지 짧은 기간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알 수 있지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혜를 갖춘 사람에 의해 알 수 있지 어리석은 사람에 의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그들이 확고한지 아는 것은 역경을 만났을 때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랜 세월 동안 역경에 처해있을 때 알지 짧은 기간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알 수 있지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혜를 갖춘 사람에 의해 알 수 있지 어리석은 사람에 의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그들이 지혜가 있는지 아는 것은 서로가 논의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랜 세월 동안 서로 논의를 함으로써 알지 짧은 기간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알 수 있지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혜를 갖춘 사람에 의해 알 수 있지 어리석은 사람에 의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말씀이십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대왕이시여, 대왕께서는 세속을 사는 사람이라서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 자식들이 북적거리는 집에서 함께 살고 있으며 까시에서 나는 전단향을 사용하고 화환과 향수와 연고를 사용하며 금과 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왕께서는 아라한인가 아니면 아라한을 성취한 자들인가 알기가 어렵습니다.
대왕이시여, 그들이 계율을 지키고 있는가 하는 것은 함께 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랜 세월동안 함께 살아보아야 알지 짧은 기간 동안에 살아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알 수 있지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혜를 갖춘 사람에 의해 알 수 있지 어리석은 사람에 의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그들이 청정한지 아는 것은 함께 대화를 해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랜 세월 동안 대화를 해보아야 알지 짧은 기간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알 수 있지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혜를 갖춘 사람에 의해 알 수 있지 어리석은 사람에 의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그들이 확고한지 아는 것은 역경을 만났을 때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랜 세월 동안 역경에 처해있을 때 알지 짧은 기간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알 수 있지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혜를 갖춘 사람에 의해 알 수 있지 어리석은 사람에 의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그들이 지혜가 있는지 아는 것은 서로가 논의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랜 세월 동안 서로 논의를 함으로써 알지 짧은 기간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알 수 있지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혜를 갖춘 사람에 의해 알 수 있지 어리석은 사람에 의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나의 신하와 몰래 정탐을 하는 밀사가 나라를 살피고 돌아옵니다. 그들이 먼저 정탐한 것에 대해 제가 나중에 결론을 내립니다.
세존이시여, 이제 그들이 먼지와 때를 없애고 몸을 잘 씻고 향유를 바르고 머리와 수염을 가지런히 하고 흰 옷을 입으면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을 충족하고 즐길 것입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그 뜻을 아시고 곧 이와 같이 게송을 말씀하셨다.
“사람은 색깔과 형상으로 알 수 없고 잠시 보는 것으로는 믿을 수가 없다네. 몸을 잘 제어한 것 같은 모습을 하고도 제어되지 않은 자들이 이 세상에 다니도다.
마치 흙으로 빚은 가짜 귀걸이처럼 금빛을 입힌 반달 모양의 동전처럼 어떤 자들은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돌아다니니 안으로는 더럽지만 밖으로는 아름답다네.”
이상으로 얽어맨 머리를 한 수행자(Jaṭilo) 경이 끝났습니다.
다음은 경의 본문으로 돌아가서 ‘그때 빠세나디 꼬살라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윗옷을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게 입고 바닥에 오른쪽 무릎을 꿇고 일곱 명의 얽어맨 머리를 한 고행자들과’라고 했다. 이때 왕이 ‘윗옷을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게 입고’라고 했을 때 오른 쪽 어깨를 드러내고 절을 올리는 것은 상대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는 인도의 전통이다. 현재 비구들이 가사를 입을 때 오른 쪽 어깨를 드러내는 것도 이 시대에 있었던 전통을 그대로 살린 것이다.
다음에 ‘일곱 명의 유행승들이 겨드랑이의 털과 손톱과 몸의 털을 깎지 않고 길게 기를 채’라고 했다. 당시 인도사람들은 몸의 털이나 머리까락 기르는 것을 집착하는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붓다께서는 이러한 감각적 욕망을 없애기 위해서 머리카락도 다 잘라버려 몸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셨다. 당시에 죄인들도 머리카락을 잘랐지만 비구들은 가사를 입었기 때문에 죄수들과 구별이 되었다.
다음에 꼬살라 왕이 고행자들에게 ‘존자들이시여, 저는 빠세나디 꼬살라 왕입니다.’라고 세 번이나 자신의 신분을 말한 것은 고행자들이 꼬살라 왕을 모르기 때문에 밝힌 것도 있지만 상대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을 드러낸 태도였다. 하지만 고행자들의 수준을 알 수가 없어 그들의 정신적 상태를 세존께 질문을 한 것이다.
다음으로 꼬살라 왕은 ‘세존이시여, 저들은 세상에서 아라한들이나 아라한의 길을 성취한 자들 가운데 어느 쪽입니까?’이라고 물었다. 당시 인도에는 수많은 유형의 구도자들이 많았다. 그중 힌두교와 이슬람교 말고 이교도들만 해도 여섯 무리가 있었다. 이들은 저마다 깨달은 자라고 말하며 붓다라고도 했다. 그래서 무엇이 진정한 아라한이고 누가 아라한인지도 알기 어려운 시대였다. 저마다 가르침이 달라서 깨달음에 대한 정의도 달랐다. 그래서 누가 진정한 구도자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차원에서 보면 이 시대가 다양한 정신세계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대이기도 하다.
이때 불교의 아라한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해서 열반에 이른 성자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팔정도인 사념처 수행으로 도과를 성취하면 수다원이 이른다. 그러면 일곱 생 이내에 아라한이 된다. 다음에 사다함의 도과를 성취하면 한 번 더 인간으로 태어나서 아라한이 되어 윤회가 끝난다. 다음에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하면 색계천상의 정거천에 태어나서 아라한이 되어 윤회가 끝난다. 마지막으로 아라한이 되면 이번 생을 끝으로 윤회가 끝난다. 붓다께서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서 붓다가 되셨지만 윤회가 끝나는 것은 아라한과 똑같다. 그래서 세존도 아라한에 속한다. 아라한은 보시공덕의 과보가 큰 분이시라고 공양 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으로 응공(應供)이라고 한다.
꼬살라 왕이 질문한 아라한을 구별하는 것에 대해 세존께서 말씀하신 답변은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자는 높은 정신세계를 사는 아라한을 구별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이러한 고행자를 평범한 사람들은 알 수 없으며 오랫동안 이들을 지켜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겉모습만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되며 이들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을 네 가지로 설명하셨다.
첫째, 그들이 계율을 지키는 행위를 하는지 알려면 오랫동안 함께 지내보아야 안다. 이때 계율을 지키는 행위를 계행이라고 한다. 이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켜야할 도덕적인 덕목을 말한다. 계율을 승가의 규칙이지만 계행은 일반적인 도덕적 규범을 말한다.
둘째, 그들이 청정한지 알려면 오랫동안 대화를 해보아야 안다. 청정함이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는 깨끗한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상대가 청정한지 알려면 대화를 해보면 알 수 있는데 말하면서 앞뒤가 맞지 않으면 청정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리고 말과 행동이 달라도 청정하지 못한 사람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청정은 깨끗함인데 이런 깨끗함을 얻으려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접촉할 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아 몸과 마음이 청정해진다. 그러므로 청정은 오직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셋째, 그들이 확고한지 알려면 역경을 만났을 때 안다. 이때의 확고함이란 지혜로 인해서 생긴 견고함을 말한다. 확고함을 타모(thāmo)라고 하는데 견고함, 감함, 힘, 세력, 저항력 등의 뜻이 있다. 이런 확고한 힘이 있어야 구도의 길을 갈 수 있다. 이때 이런 확고함이 있는지 알려면 역경에 처했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다. 어떤 재난이나 고단이나 고통에 처했을 때 이것을 이겨내는 힘이 없으면 결코 도과를 성취할 수 없다. 이러한 고통을 견디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인내가 열반에 이르게 한다고 말한다. 수행 중에 오는 온갖 통증이나 괴로움이나 장애도 이러한 역경에 속한다.
넷째, 그들이 지혜가 있는지 알려면 논의를 해보아야 안다. 이때의 논의는 토론이나 담론이다. 청정함을 알려면 말을 해보아서 알 수 있지만 지혜는 더 깊은 정신세계라서 말보다는 법에 대한 담론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래서 문 없는 집은 지혜가 없는 사람과 같다고 한다. 지혜는 집에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문지기의 역할을 한다. 이런 지혜는 오직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생긴 집중의 힘이 있어야 생긴다.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말로 살아간다. 말로 살아가는 사람은 사업을 하는 사람이지 수행자가 아니다. 말이 앞서면 수행을 할 수 없다. 말하지 않을 수 없지만 수행을 하는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공허한 말에 그치고 만다. 이처럼 무슨 일이나 알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겉과 속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안팎이 같은지 같지 않은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래서 겉과 속을 자세하게 알려면 이렇게 네 가지를 주의 깊게 구별해야 한다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의 차이는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다.
다음에 꼬살라 왕은 ‘세존이시여, 나의 신하와 몰래 정탐을 하는 밀사가 나라를 살피고 돌아옵니다. 그들이 먼저 정탐한 것에 대해 제가 나중에 결론을 내립니다.’라고 했다. 이때 꼬살라 왕인 나라의 살림을 살펴보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신하를 보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이런 사람을 짜라(carā)라고 한다. 짜라(carā)는 걷는, 보행자, 밀사라는 뜻이 있다. 때로는 도둑들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다음에 ‘세존이시여, 이제 그들이 먼지와 때를 없애고 몸을 잘 씻고 향유를 바르고 머리와 수염을 가지런히 하고 흰 옷을 입으면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을 충족하고 즐길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때 꼬살라 왕의 명령을 받고 여러 가지 차림을 하고 다니던 밀사들이 꼬살라 왕께 돌아 와서는 몸을 씻고 향유를 바르고 흰 옷을 입으니 전에 없는 감각적 욕망의 충족할 것이라는 말이다.
다음에 세존께서 말씀하신 게송에 ‘사람은 색깔과 형상으로 알 수 없고 잠시 보는 것으로는 믿을 수가 없다네’라고 할 때 색깔과 형상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외관으로는 쉽게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이때 말하는 색깔과 형상을 빤짜까마구나(pañca kāmaguṇā)라고 한다. 이 말은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을 말한다. 눈으로 형상을 볼 때 보는 것에 대한 욕망이 일어난다.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소리에 대한 감각적 욕망이 일어난다. 코로 냄새를 맡을 때 냄새에 대한 욕망이 일어난다. 혀로 맛을 볼 때 음식에 대한 욕망이 일어난다. 몸으로 대상과 접촉할 때 감촉에 대한 욕망이 일어난다. 이렇게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해서 일어나는 것을 감각적 욕망이라고 한다. 이것을 줄여서 오욕락(五欲樂)이라고 한다. 이러한 오욕락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누가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겉으로는 알 수 없다. 또 그간에 알고 있는 오욕락과 다름도 분명하게 알아야 하겠다. 세존이 가르침인 사념처는 자기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라는 것에 기인하고 오욕락의 뜻이 더 명쾌해진다. 인간의 감각기관은 여섯 가지인데 다섯 가지만 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마음의 감각기관인 의근(意根)은 잘 말씀하시지 않는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라도 말씀하실 때는 마음에 관한 것이라서 비구들에게 법문을 하실 때 적용하신다.
다음으로 ‘몸을 잘 제어한 것 같은 모습을 하고도 제어되지 않은 자들이 이 세상에 다니도다.’라고 했을 때 이렇게 마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제어가 되는지 되지 않는지 알 수 없으니 성급하게 판단해서 함부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상을 다닌다’고 할 때는 이 세상을 유랑한다, 방랑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뛰어난 통찰력을 지니신 붓다는 겁을 뛰어넘어 세상이 혼란한 시대에 태어나신다. 그러므로 선과 악이 극명하게 갈라져서 선악을 구별하기 어려운 시대에 위대하신 성자가 태어나신다. 사실 혼란한 시대에 영웅이 난다는 속담과도 같다. 이런 선악의 구별이 극심하지 않고 평온한 시대에는 벽지불이 출현하신다. 그러나 벽지불은 가르침을 펴지 않기 때문에 어느 시대에 얼마나 출현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특히 인도에서는 계급사회인 카스트 제도가 분명하여 선악이 극명하게 나뉘어 있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이런 사회에서 붓다가 출현하시어 양극단을 가운데로 모이게 하는 중도를 표방하셨다. 다구나 붓다는 무사계급인 왕족의 왕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분의 이점이 더 많았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왕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었다. 어느 시대나 사회적 신분은 활동하는데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상대에 대한 신뢰가 전제된 관계에서 더 원만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붓다의 출현은 살아있는 생명 중에서 가장 최고의 공덕을 쌓은 과보로 태어나신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조건이 성숙되어야 한다. 인간의 수명이나 정법을 이해할 수 있는 정신적 요건이 성숙한 시대도 필요하다.
붓다가 태어나려면 다섯 가지 조건이 성숙되어야 한다.
첫째, 붓다가 태어나는 시기다.
둘째, 붓다가 태어나는 나라다.
셋째, 붓다가 태어나는 도시다.
넷째, 붓다가 태어나는 민족이다.
다섯째, 붓다가 태어날 수 있는 부모다.
이런 과정이 필요한 것은 최고의 공덕의 과보로 태어나서 인류에서 최고의 가르침을 펴시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항이 고려된 것이다. 붓다가 될 수 있는 조건에 부모의 선택도 있다. 만약 강대국의 왕자였으면 출가하기가 어려웠다. 또 붓다가 되기에 좋은 적당한 신분도 필요했다.
특히 인도는 카스트 제도가 철저한 계급사회였기 때문에 전법을 위해 세존의 사회적 신분도 필요했다. 인도사회는 뿌리 깊은 계급사회여서 사실 붓다의 가르침이 가장 절실한 사회다. 인도의 하층민에게 카스트 제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느냐고 물으면 오히려 미쳤냐고 할 정도다. 이처럼 자신의 삶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새로운 삶이 복잡하고 싫다는 단순함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계급이 가장 극심한 사회에서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붓다의 새로운 사상이 출현한 것이다.
이슬람도 주거환경이 나빠도 어울려 살기를 원해서 삶의 질을 바꾸려 하지 않고 오직 신과 인간의 관계에 집중한다. 인도도 이와 마찬가지로 이런 민족성향이 있어서 양극화된 사회가 오랫동안 고착되었다. 하지만 붓다가 출현하신 석가족은 다른 나라에서 크게 싫어하는 나라가 없어 친화적인 국가였다. 이때 아자타삿투 왕은 다른 나라 민족이 상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붓다가 출현하신 시기는 인도사회가 선정수행의 상태가 매우 높게 형성된 시대였다. 그래서 사리뿟다 존자나 목갈라나 존자와 같이 높은 정신적 상태를 이룬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붓다에 의해서 밝혀진 새로운 법인 무상, 고, 무아의 통찰지혜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조건이 성숙된 시대가 아니었으면 붓다의 법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한낱 쓸모없는 소리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붓다는 물질이 발전한 시대보다 정신이 발전한 시대에 태어난다. 물질이 발전한 시대에는 깨달음을 얻은 성자가 나오기가 쉽지 않다. 요즈음 물질이 발달한 시대라서 그만큼 정신은 퇴보하기 마련이다. 아마도 세월이 흐를수록 도과를 성취하기가 더 어려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언젠가는 불법이 사라지는 시대가 온다. 그러면 다음 붓다가 출현하는 시기까지 암흑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붓다를 기다리지 말고 현재 붓다의 법이 살아있을 때 열심히 정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법에 대한 의문과 다른 견해는 어느 시대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인간은 무상한 특성이 있어서 바른 것도 끊임없이 바꾸고 변질시킨다. 하지만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정법은 바뀌지 않는다. 사물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붓다가 출현하셔도 지금과 똑같은 정법을 가지고 오신다. 그러므로 붓다의 가르침은 시대를 뛰어넘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정법을 만나는 것도 나의 선업의 과보가 있어야 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오직 연기법과 사성제다. 사성제를 완성하는 것이 도성제인 팔정도며 계정혜며 중도며 위빠사나 수행이다.
붓다께서 남기신 마지막 유언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열심히 노력해서 완성해라.”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위대한 탄생을 조용히 마무리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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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항상 도움되는 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경전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