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불행은 스스로의 생각에
임성욱
(시인/사회복지학박사)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행복이라 한다. 행복은 마음가짐뿐만 아니라 인간의 활동이 수반될 때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행복의 조건은 행복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객관화와 계량화가 어렵기는 하지만 의지만 있으면 반복할 수 있는 일생에 걸친 활동이라 한다. 그러면서 “마음은 우리 안에 있는 최고의 것”이라 했다. 그렇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서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창문 너머의 사물들을 바라보면 자기가 바라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행복과 불행은 스스로의 생각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최후의 인상파 화가라 칭해지는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프랑스, 1867~1947). 특히 햇살이 스며드는 가정의 실내와 정물을 그린 그림들이 친근감을 준다. “식당(The Dining Room 1913)”, “과일 그릇(Bowl of Fruit, 1933경)” 등이 대표적 예다. 식탁은 특히 보나르가 좋아하는 소재 중 하나다. 창 역시 애정이 담긴 소재다. 보나르의 ‘작은 창’은 누군가에게 스며드는 그리움의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보나르는 26세 때 24세의 창백한 새같은 미스터리(mystery)의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져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살면서도 그녀가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녀의 이름이 ‘마리아 부르쟁’이라는 것도 동거한 지 32년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고 한다. 혼인 신고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을 뿐. 보나르 역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램프 빛에 빛나는 황홀한 실내, 호화로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누드 및 몽마르트르의 풍경을 그려서 프랑스 회화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그렇다. 그 누군가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해서 가깝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랑한다고도 할 수 없다. 별로 아는 것이 없다고 해도 자신이 바라보고 생각하는 견지에서 사랑하고 좋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필자도 누군가를 만날 때 구태여 알려고 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알려 준 만큼만 알 뿐이다. 그것도 금방 잊어버린다. 마음의 눈으로 볼 때 괜찮으면 괜찮고 불편하면 불편한 것이다. 얼마 전 지인에게서 매우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저압성 두통을 앓고 있다는. 듣도 보도 못한 소리였다. 뇌는 뇌척수액이라는 물 위에 둥둥 떠 있는데 그 뇌척수액은 뇌(머리)부터 척추뼈까지 이어진 척수관을 따라 하루에 500ml씩 새로 생성되고 없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그 척추관 어딘가에 구멍이 나서 척수액이 새어 나오면서 뇌를 받치고 있던 뇌척수액이 유실된다는 것이다. 이때 대뇌, 소뇌가 내려앉게 되면서 뇌압이 떨어져 두통이 생기는 병이라 한다. 하지만 이 병은 대부분 낫는다고 한다. 그런데 지인은 불행하게도 나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 인한 통증이 어느 정도냐 하면 산통보다도 훨씬 강하다는 것이다. 이 희귀병자는 지구상에 아일랜드인 1명과 지인 등 2명밖에 없다고 한다. 너무 통증이 심할 때는 통증 완화를 위해 마약을 쓴다고 한다. 이를 느낄 때마다 치아가 무너진다고 했다. 이러함에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평온하고 오히려 행복해 보일 정도의 모습만을 보이면서.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매일을 소중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생을 유지하고 있다면서 웃었다. 따라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미어지는 고통을 맛보면서 통곡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