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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당집 제4권 上
조상의 행적-최종익(家狀)
공의 휘(諱)는 충성(忠成)이요, 자(字)는 필경(弼卿)이고 성은 최씨(崔氏)이며 그 선계(先係)는 전주에서 나시었다. 시조 휘(諱) 아(阿)께서는 고려문하시중(高麗門下侍中)이셨으며 시호(諡號)는 문성공(文成公)이시다.
고려사를 보면 증조 휘(諱) 담(霮)께서는 조선조 초에 벼슬하여 통정대부 검교 호조참의 집현전 제학(通政大夫檢校戶曹參議集賢殿提學)에 이르렀으며, 호는 월당(月塘)이시다. 조부 휘 덕지(德之)는 생원으로서 문과에 등제하여 승문원에 속하였고 한림원 옥당 대각(翰林院玉堂臺閣)을 역임하였으며, 일찍이 남원부사로 지내시다가 영암 영보촌에 퇴거하여 존양루(存養樓)를 짓고 오직 성현들의 강학에 힘쓰면서 실천궁행(實踐躬行)에 독실이 하였다.
다시 문종원년에 왕명을 받아 중직대부(中直大夫)에 이어 예문관 직제학(禮文官職提學)을 제수 받았으나, 얼마 안 되어 나이를 핑계로 고향에 돌아갔다. 때에 같은 조정대신들 취금 박팽년(醉琴 朴彭年), 매죽 성삼문(梅竹 成三問)등 제현들이 공을 위하여 시.서를 지어 도로써 출처를 고상하게 하여 마침내 멀리 가서 돌아오지 아니했다 하였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연촌선생이다. 그의 형 광지(匡之)와 직지(直之)가 함께 문과에 등제하였으니, 모두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이 되었으므로 세상에서 말하기를 제학(提學)벼슬 최씨(崔氏) 집안이다. 라고 말하였다.
선고(先考)의 휘(諱)는 창(氵敞,본문에는潎)으로 진무부위사용(進武副尉 司勇)이 되었고 사용공은 밀양박씨를 아내로 맞아 네 아들을 낳았으니, 공은 그중 막내였다. 공은 천순(天順) 戊寅(명.영종2년,조선.세조4년, 1458년)월 일에 나주에서 태어나셨다. 적신이 강보에 싸였을 때 갑자기 양부모가 세상을 떠남에, 여러 형들에 의해 양육되었으나 어려서부터 큰 뜻을 지니고 다방면에 두루 하였다. 나이 겨우 8세에 형을 따라 장안에 올라와 점점 자라면서 천성이 고결하여 걱정 끼치는 일이 없었고, 성현의 글을 읽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전들을 해독하며, 거업(擧業)에도 함께 힘썼다. 나이가 아직 벼슬하기 전에 한훤당선생 김문경공(寒暄堂先生 金文敬公)이 영남에서 절학(絶學)의 시창자임을 듣고 찾아가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선생이 그를 공경스럽게 소중히 여기셨고 공은 선생학문의 종지를 듣고 소학을 근본으로 하여 학문하고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글의 공부에 더욱 힘썼으며, 성정이기(性情理氣)의 오묘함을 탐색하여 의심난 곳에 있어서는 밤이 다하도록 자지도 아니하고, 종일토록 먹는 일도 잊은 채 강론하여 항상 조심하고 삼가 하였으며, 오직 하루해가 부족하도록 궁구하여 심원한 이치에 이르러서야 그쳤다.
집은 호남의 광주에 있었고 명산과 절에서 글 읽기를 좋아하여 산당(山堂)이라 자호(自號)하였으며 ‘산당서객전(山堂書客傳)’을 저술하였는데, 대개 한훤당(寒暄堂)선생의 소학으로써 몸을 다스리고 일두(一蠹)선생과 함께 뜻을 같이하는 도우로 삼아 정학을 분명히 주창하며, 후진을 가르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문하의 학동들을 교수함에 소학의 글을 일찍이 쉬운 글로 여기지 않았다. 공이 그간에 친히 학습하되 이름난 정현(正賢)들의 후손인 이적(李勣)과 박한삼(朴漢參)과 윤신(尹信)과 민구손(閔龜孫)과 김안국(金安國)과 나라를 지켜나가는 모든 현사들로 더불어 날마다 강마하였으며, 서로 이택(麗澤)의 도움을 주고받았다. 또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과 훌륭한 친구사이로 지냈는데, 추강(秋江)이 그의 학예의 높은 경지에 감복하였다.
남효온의 유산기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 가운데 말하기를, 최필경(崔弼卿)과 김자허(金子虛)등이 내가 지급암(知及菴)에 거처하고 있다는 기별을 듣고 한훤선생께서 사람을 시켜 안부를 물어왔다. 또 말하기를 저녁에 필경(弼卿)과 자허(子虛)가 나를 찾아와 야반에 등을 밝히고 필경 등과 소학과 근사록을 강론하였다. 또 말하기를 필경과 자허가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내게 봉천(奉天)에 머물기를 요청하기에, 내가 필경의 무리들과 밤새도록 근사록을 궁구하곤 하였다.
아! 공의 독학(篤學) 궁리의 자취가 이 또한 볼만 하리로다. 공이 이미 산당을 전전한지 오래되어 옛 현인들의 지취가 원대하고 무량함을 알아, 비록 흙 한줌 작은 돌 맹이라도 그 사유를 용납하여 깊이 관찰하지 아니함이 없이하니, 개연히 그를 본받고자 하였다.
癸卯(1483)년 공의 나이 26세였다. 이해에는 월출산에 갔었고 이듬해에는 용암산 그 이듬해는 한성의 삼각산, 백암산, 천마산, 성거산 등 여러 명산과 병오(丙午;1486)년에는 서석산, 정미년에는 두류산, 등에 스승을 찾아가고 벗을 따라 책 보따리를 등에 지고 이리저리 다녔다.
戊申(1488)년 공의 나이 31세에 봄에는 또 방장산(智異山)에 있으면서, 한훤당(寒暄堂)선생 부모의 부음을 듣고 망극함이 지극하여 도보로 영남까지 가서 곡하였다. 그해 초여름에는 완산에 가 있었고 여름이 끝날 쯤에는 옥천에 초가을에는 설산(雪山)에 중추(中秋)에는 창평(昌平)에 가서 감시(監試)하였고, 늦가을에는 김제 과거장에 나아갔으며, 겨울에는 친구 김자허(金子虛)와 유익지(兪翼之)와 함께 월출산 정려(精廬)에서 강학하며, 모든 친구들이 함께 모이니, 그들의 지기가 철연(鐵硯)을 뚫을 만 했다. 공은 스스로 차고 싸늘한 곳에 거처하여 지기가 상쾌해지면, 정신이 저절로 또렷하여 졸음을 피할 수 있으리라 여겨 항상 스스로 찬 자리를 점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내며, 각고를 견디며 공부하였으니, 진실로 의지가 확실한 것이 이 같은 자가 또 있을 것인가.
과거장에 수차 응시하였으나 다시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의 명리에 뜻을 두지 아니하였으며, 성리학에 전심하여 서객전(書客傳)을 저술하고 벼슬자리를 구하여 허덕이는 자들을 불러들이는 것을 즐겨하였다.
기유(1489)년 겨울에 감기로 인하여 봉성(鳳城)에 병상에 누어 문밖출입이 어려웠으며, 머리를 싸매고 조용히 지내면서 분각기(焚刻器)를 제작하여 매번 잡된 생각을 깨우쳤다.
경술년(1490)모월 모일에는 호남 방백(方伯:竹山 朴安性)에게 약을 구하여 글을 올리되, 우직(禹稷)의 베품과 이윤(伊尹)의 사람 구제하는 도로써 하였으나, 신해(1491)년에 이르러 질환이 더욱 심하여 3월 24일에 졸하니 공의 나이 34세였다.
아! 공의 성품이 명리를 쫒지 아니하고 마음은 실속 없이 화려한 것을 막으니, 사람들이 그를 뛰어나게 특이하다고 말들을 하였다. 그것이 위학(爲學)의 입지였던 것이다. 그가 뜻을 세워 학문을 함에 성경(聖經)을 궁리탐구(窮理探究)하고 현전(賢傳)을 모두 열람하여, 아침부터 저녁이 다하도록 안자(顔子)의 학문한 것이 어떤 학문인가를 생각하였다. 나이가 다하도록 열심히 하여 맹자께서 언필칭 요순(言必稱堯舜)하시는 것이 어떤 도인가를 생각하였다. 궁리와 근사로써 쌓고 체용(體用)이 상호 필요로 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내외가 서로 기르며, 일에 따라 함께하며 미미한 다른 일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기약하기를 실상 대견스럽지 않고 예사로운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도를 논하여 말하되 용(用)은 시작하기 전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고, 체(體)는 형체가 이루어진 뒤에야 세워진 것이다.
태극은 음양가운데서 유행하고 음양은 태극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음양의 기가 교감하고 이 또한 부여된 것으로 이에 만물이 생한 것이다. 사단칠정을 논하는 심성이기설(心性理氣說)에 말하기를, 하늘이 음양오행으로 만물을 화육하여 생하고 사람은 이 기운을 받아 생하면, 인의예지의 성을 받게 되어 본체의 성이라 이르고 활용되는 것을 정이라 이르며, 중심에서 그 성(性)과 정(情)을 통섭(統攝)하는 것을 마음(心)이라 이르니, 아직 발현되지 아니한 것이 중(中)이요, 이미 발현된 것을 화(和)라 이른다.
사람이 살아감에 고요하고, 담연(澹然)하여 욕심이 없다면 이것이 성인의 정을 주장한 것이다. 형은 이미 생성하여 외물에서 형체를 감촉하여 그 중심을 움직인 것이니, 그 중심이 움직여 칠정이 발현(發現)되나 정(情)이 이미 움직여서 그 성(性)을 떠나면 물욕에 이끌리어 혼미하고 흩어져 망연하여 지각할 수 없고 막연하여 생각할 수 없으니 통분한 일이로다. 이것이 공이 학문에 진력하는 까닭이다.
대저 공의 타고난 자질이 보통을 넘어 가정에서 얻지 못했을지라도 일찍이 현사의 문하에 유학하여 학문하는 요체를 들었으니, 소학의 글에서 힘써서 배워 그 깊이를 더하고 책 만드는 일을 도왔다. 소학에 여러 편의 글을 읽고 이르되 만일에 이 책을 진력하여 배운 자는 이로 인해 대학을 공부하여 마침내 지행의 공부를 이루면, 이 책이 어찌 사서오경(四書五經)이나 칠서육경(七書六經)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더욱이 인륜을 밝혀 이단을 물리치는 일을 뜻을 삼아서 ‘정명론(正明論)’과 ‘의저수량소(擬豬遂良疏)’를 지어서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도를 밝히고 ‘천당지옥의 변(天堂地獄辨)’을 지어 의혹된 것들을 해명하여 마음을 바루고 김점필재(金佔畢齋) 선생이 일찍이 호남을 순안 할 때 공은 극언으로 불교와 무속의 폐해의 글을 올려 급히 근절할 것을 청함에 김점필(金佔畢) 선생께서는 공에게 깊은 예로써 대우하였다.
슬프다!
스승과의 사이가 종용(從容)하여 얻어들은 모두가 의리의 깊은 뜻이었으니, 곧 학문은 더욱 나아가고 도는 더욱 밝아져 그 학예의 나아간 것이 진실로 측량하기 어려웠으나 하늘이 더 이상 수명을 연장해주지 아니하여 중도에 요절하니, 겨우 안자(顔子)선생보다 두 살을 지날 뿐이니 어찌 애석한일이 아니겠는가.
공의 배필은 전의(全義) 이씨 병조참의(兵曹參議) 약수(若水)의 딸이며 아들은 연문(演文)이요 딸은 충순위 설준(忠順衛 薛俊)에게 시집갔다. 연문(演文)의 아들 언린(彦潾)은 진사요, 딸은 생원 윤항(尹衖)에게 시집갔다. 언린 아들 복남(福男)은 참봉이 되었는데, 나아가지 아니했고, 남다른 학문과 덕행이 있었다. 복남(福男)은 봉사(奉事)요 길남(吉男)은 주부(主簿)였으니, 내외로 증.현손의 현달(顯達)한자가 수명이었다.
공은 신해년 1491년 모월 모일에 나주군 세지면 가지동 선영(先塋) 묘좌(卯座) 언덕에 장사지냈다. 김한훤당(金寒暄堂) 선생이 조문하는 기(旗)의 글에 ‘처사산당서객(處士山堂書客)’이라 하여 그 주제 또한 그러하였으니, 특히 애도를 전하는 뜻은 없었다. 또 남추강(南秋江)의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 나타나는데, 사우에 공의 이름아래 말하되 뛰어난 재주와 돈독한 행실이 스승 될 만하여 사림들이 공을 존양사(存養祠)에 배향하였는데, 존양사(存養祠)는 공의 조부 존양선생(存養先生)을 제사모시는 사우로 숙종39년(1713)에 ‘녹동서원(鹿洞書院)’이라 사액하였다.
공의 유문(遺文)에 이르되,
“훈덕(薰德)이 사문(斯文)에 넘치고,
지도(志道)가 해가 갈수록 현묘(玄妙)하도다.
높은 학식(學識)과 돈독(敦篤)한 행실(行實)이
가문(家門)에 이어져 전(傳)하도다.”
아! 성조(聖朝)에서 존숭함에 보답하는 의전이 또한 성대하다고 이를만하리라. 공은 이미 가전(家傳)의 학문으로 이어졌고 또 김한훤당(金寒暄堂) 선생에게 수업을 받아 그 재주와 기량이 높았으며, 정학(正學)의 학문이 사문(斯文)에서 지극히 뛰어난 제자로 불림 받았으니, 비록 불행히도 단명하였으나 도통의 연원(淵源)과 학예(學藝)가 뛰어나 누구라도 업신여긴 자가 없었다.
세상에 문자로 간행한 저술이 있으나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수편이 있을 뿐이었는데, 현석 박문순공(玄石 朴文純公)이 그 산일(散逸)된 편들을 정리하여 책 말미에 발을 썼고, 성담 송문경공(性潭 宋文敬公)이 책머리에 서문을 썼다. 찬선(贊善) 송공이 묘표를 썼으나 자못 결락(缺落)되고 소략(疏略) 된 곳들이 있으니, 아마도 위간재(魏艮齋)를 위한 묘 비문 뜻 같음이 아니겠는가. 다만 행장이 아직 빠져 있어서 후대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갖추어져 있지 못하므로 이에 감이 유문과 기록으로 전해지는 가첩을 위와 같이 수습하나 후대에 군자들이 채택한 보다 더 모범된 책을 다시 기다리노라.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무자(1828)년 5월 초순
11대손 종익(鍾翼)이 삼가 적다.
* 1).寂寥 : 적적하고 고요함, 쓸쓸하고 적적함 2).贊善 : 조선 시대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속하여 왕세자의 교육 을 맡아보던 정3품 벼슬. 덕망과 학행이 뛰어난 사람을 뽑았으며, 현 직 관리가 아니더라도 천거되어 직책을 맡을 수 있었다.` 3).魏艮齋 : 간재는 송나라 위섬지(魏掞之)의 호. 이는 주희가 그의 묘문 을 지을 당시에는 증적(曾覿)의 권세가 한창 성대하였으므로, 증적과 관련되는 사실을 그대로 썼다가는 그 화가 그의 무덤에까지 미칠 것 을 염려하여 그저 평범하게 다루었다가, 그 뒤에 묘표 발(墓表跋)를지 어 그 사실을 자세히 드러낸 것을 말한다. |
山堂集 卷之 四 上
家狀[崔鍾翼]
公諱忠成。字弼卿。姓崔氏。其先系出全州。上祖諱阿。高麗門下侍中。諡文成公。見麗史。曾祖諱霮。我朝官至通政大夫。檢校,戶曹參議,集賢殿提學。號月塘。祖諱德之。以生員登文科。分隷槐院。歷翰院,玉堂,臺閣。嘗以南原府使。退居靈巖永保村。築書樓扁存養。杜門講學。踐履篤實。文宗元年。召拜中直大夫。藝文館直提學。未幾。告老還鄕。同朝諸賢如朴醉琴彭年,成梅竹三問諸賢。爲詩若序。以道其出處之高。遂長往不返。世所稱烟煙村先生者是也。其兄匡之,直之。俱登文科。皆爲集賢提學。以故。世稱提學崔氏之官云。考諱潎。進武副尉司勇。司勇公娶密陽朴氏某官某女。生四男。公其季也。公以天順戊寅某月日。生于羅州。身在襁褓。司勇公與母夫人朴氏。奄忽違世。育於諸兄。自桑弧之初。志於四方。年甫八歲。從兄而北遊長安。稍長。天性高潔無累。讀聖賢之書。解諸子百家之傳。幷治公車業。年未勝冠。聞寒暄堂先生金文敬公始倡絶學於嶺南。就而師事之。先生敬重之。公受其旨訣。學以小學爲本。尤用功於心經,近思等書。探索性情理氣之奧。講論到意會處。終夜不寐。終日不食。兢兢業業。惟日不足則其所造已深遠矣。家于湖南之光州。喜讀書山堂。而自號曰山堂。著山堂書客傳。蓋寒暄先生以小學律身。而與一蠹鄭先生。爲志同道合之友。倡明正學。訓後進不倦。授門弟小子。未嘗以易,小學書也。公親煮其間。而與鳴陽正賢孫,李勣,朴漢參,尹信,閔龜孫,金安國,定國諸賢。日與講磨。相有麗澤之益焉。又與南秋江孝溫友善。秋江服其超詣。其智異山日課中有曰。聞崔忠成弼卿,金鍵子虛等在知及菴。使人寒暄。又曰。夕。弼卿,子虛訪余焉。夜半明燈。弼卿等講論小學,近思錄。又曰。弼卿,子虛備酒饌。要余留奉天。余與弼卿輩夜觀近思錄。噫。公篤學窮理之跡。此亦可見矣。公旣久遊山堂。知古人志大量遠。雖拳土塊石。無不欲觀以畜其有。慨然效之。
癸卯公年二十六。是歲而遊月出。甲辰而湧巖。乙巳而漢都之三角,白嶽,天磨,聖居諸名山。丙午而瑞石。丁未而頭流。尋師從友。負笈橫行。戊申春。又在方丈。聞寒暄先生丁憂。忙劇之至。徒步往哭於嶺南。孟夏而遊完山。季夏而玉川。孟秋而雪山。仲秋而赴昌平監試。菊秋而赴金堤文場。冬與友人金子虛,兪翼之。講學於月出山精廬。諸友咸集。志穿鐵硯。公以爲於涼處處之。志氣爽塏則心自惺惺。而可以避睡鄕。常自占冷座。而早暮起居。其刻苦工夫。眞實心地。有如是者焉。應試數場。而不復赴擧。無意於世。而專心於性理之學。著書客傳,招宦遊子文以自娛焉。
己酉之冬。以霜露之疾。寢居于鳳城。足不外達。縮首守寂。而作焚刻以警慮焉。庚戌月日。奉書求藥於湖南方伯。而陳禹稷,伊尹濟人之道。至辛亥歲益劇。卒于三月二十四日。年三十有四。嗚呼。公性喜澹泊。心絶浮華。人以瑰瑋絶特稱之。其立志爲學也。窮探聖經。盡閱賢傳。早夜孜孜。而思顏子之所學者何學也。窮年兀兀。而思孟氏之必稱堯舜者何道也。積之以窮理謹思。至於體用相須。內外交養。隨事而存。微他其適。則其所自期者。實不尋常矣。故其論道也曰。用具於未始之前。體立於有形之後。太極流行於陰陽之中。陰陽不出乎太極之內。二氣交感。理亦賦焉。於是乎萬物生矣。其論四端七情心性理氣之說曰。天以陰陽五行。化生萬物。人受是氣而生。則爲仁義禮智之性焉。體之之謂性。用之之謂情。至於中而統其性情之謂心。未發之謂中。已發之謂和。人生而靜。澹然而無欲。此聖人之主靜也。形旣生矣。外物觸形而動其中矣。其中動而七情出焉。情旣蕩而其性鑿焉。物欲引之。昏昧蔽之。茫然不知。漠然無覺。其可痛哉。此公之所以致力於學問者也。蓋公天資超越。不惟得於家庭。而早遊賢師之門。聞爲學之要。則於小學書。用功最深。贊而成書。有讀小學諸條篇文而嘗曰。如有致力於此書者。由是而進于大學。終成智行之功。則是書豈特五四書七六經哉。尤以明人倫。闢異端爲意。著正名論。擬遂良疏。以明三綱五常之道。作天堂地獄辨。解其惑而正其心焉。佔畢齋金先生。嘗巡按湖南。公上書極言佛,巫之弊。請亟屛絶。佔畢先生待之甚禮。噫。以公淸明之美質。從容於函丈之間。而所聞皆義理之奧。則學益進。道益明。其所造詣。固不可量。而天不假年。中途而夭。纔過顏子之二歲。豈不惜哉。配全義李氏。兵曹參議若水女。一男演文。一女壻。忠順衛薛俊也。演文男彥潾。進士。一女壻。生員尹衖也。彥潾男福男。參奉不就。有文行。祉男。奉事。吉男。主簿。內外曾玄摠若干人。其年某月日。葬于羅州可芝洞先塋卯坐之原。寒暄先生書其旌曰。處士山堂書客。題其主而亦如。蓋悼道無傳之意也。秋江著師友名行錄。殿以公名而有曰。茂才篤行如其師。士林配公于存養祠。祠卽公王考存養先生俎豆之所也。肅宗大王癸巳。賜額曰鹿洞。其侑公文曰。薰德師門。志道妙年。識高行篤。遹紹家傳。嗚呼。聖朝崇報之典。亦可謂盛矣。公旣紹家庭之學。又從寒暄受業。其才器之高。學問之正。克稱入室之高弟。雖不幸短命。而淵源造詣。有不可誣者矣。有著述文字刊行于世。而只寂寥,數篇而已。玄石朴文純公世采釐其編而跋其尾。性潭宋文敬公煥箕序其弁。贊善宋公稚圭表其墓。而頗有脫略處。豈魏艮齋墓文意耶。第行狀尙闕。後之人無以備見。故茲敢掇拾遺文及家牒所傳錄者如右。以俟當世立言君子之採擇焉。
崇禎紀元後四戊子五月上澣。十一代孫鍾翼。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