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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삼랑진, 아버지의 아버지산소에 앉아 계시는 모습. 아버지 의 죽음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오늘이 벌써 삼오다. 삼일장을 지내고 이틀 후가 되는 날이다. 3일째 영락공원, 생전에 말씀이 있었던 대로 화장을 하고 영락원 **호실 *****번 함에 아버지를 모시고 운구차 기사의 말이 90%이상이 번거로움을 피하여 그 자리에서 탈상을 한다고 하기에 우리도 간단한 상차림으로 준비되어 있는 제단에서 탈상의 절차를 마친다. 삼오는 삼일장(葬)에다 이틀 후 탈상을 의미한다. 이제는 장례를 치른 그 자리에서 곧바로 탈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백일, 일년, 삼년상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예기다. 모두가 바쁜 것이다. 탈상을 했지만 5일째 되는 날이라 열시가 가까워서 영락공원을 향한다. 일을 하는 날이었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아 오늘도 일은 쉬어야 할 것 같다. 내일은 목요일, 급식소에 나가야 할 것이고 금요일은 초재일(初齋日)이라 대구 파동에 있는 법왕사에 올라가야 한다.
대구의 法王寺. 아버지의 영정을 모셔놓고 49齋를 올리기로 한 곳이다. 여동생의 집가까이 있는 절(寺) 이기도 하지만 전국에 흩으져 있는 형제들이 모이기에도 적당한 위치일 것 같아 결정된 곳이다. 토요일은 휴무일이라 일은 다음주에나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일이 몸에서 멀어지면 이 또한 큰일이다. 죽음 앞에서도 일은 일이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이었지만 영락공원의 주차장은 만원이다. 죽음은 기후와도 상관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계신 곳, 가까이 닥아 서서 명패를 만지면서 마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일깨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새로운 상주들이 좁은 공간으로 밀려들어와 본의 아니게 밀려나와 바깥 소파에 잠시 앉았다가 밖으로 나온다. 안개비가 시야에 가득하다.
아버지의 죽음, 예고되어 있던 일이었지만 사실감은 그다지 크지 않은 것 같다. 하얀 시트를 들치니 그냥 주무시고 계시는 아버지의 얼굴이 그기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구에 있는 **병원 중환자실, 2005년 9월 10일(음력8월7일) 토요일 0시53분. 이시간이 아버지의 90평생을 마감하신 날이다. 이날은 증조모(曾祖母)의 제삿날이기도 하다.
집에서 며칠 아버지의 신음소리가 있었지만 가끔씩 있는 일이기도 했지만 일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실감 할 수도 없었다. 얼마 전부터 해 넣은 이가 좋지 않아 죽과 곰국과 미숫가루와 쥬-스로 식사를 대용하셨다. 속은 좋으셨기 때문에 소화에는 별무리가 없어서 잘만 드시면 다시 힘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다리에 힘이 없었기 때문에 가끔 팬츠에 큰 것을 실례하여 그것을 감추시려고 밤에 몰래 좁은 변기 옆에서 빨래도 하셨다. 그러나 그 흔적은 산만하게 남아있기가 일쑤였다. 8월이 되어서는 내가 감당하기에는 어려울 때 까지 왔었다. 이제는 옆에 붙어서 수발을 해야 할 단계까지 온 것이다. 앉지를 못하시니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는 것이다. 며칠 전부터 노인병원과 전문시설을 알아보았지만 나에게는 너무 많은 금액이라 엄두가 나지 않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매일 매일은 나를 너무 힘들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맡겨둘만한 적당한 시설을 찾던 중 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노인들을 보살펴주는 집을 소개받을 수 있어서 원장과의 통화가 이루어지고 월 백만원 미만에 아버지를 그쪽으로 모시는 것으로 계약 아닌 약속이 이루어 졌다. 나에게는 힘든 액수이지만 다른 곳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금액인 것이다. 2005년 8월 5일. 입주할 시간을 내일로 잡았다.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더니 어쩔수 없다는 표정이시다. 내키지는 않지만 스스로 형편을 아시니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아시는 것이다. 8월6일이 되어 1시에 모시기로 한 약속시간이라 오전부터 갈아입을 속옷과 겉옷 한 벌을 보따리에 싸고 아버지 옷 갈아입어 시는 것을 도와드린다. 물수건으로 손발과 얼굴을 닦아드리면서 집이 가까우니 제가 자주 뵐 수 있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 집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말씀드린다. 아버지는 그래도 떠나시는 것이 달갑지 않으신가보다. “아버지 그쪽은 친구 분들도 많이 계시니 심심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 그래도 안가면 안 되겠나.” “어제 아버지가 허락하셔서 약속 해놓았습니다.” “그라면 내 지금가면 집에 다시 올수 있겠나. 인자 올수 없겠제.“ 속으로 뭔가 올라 올 것 같이 울컥하였지만 아무 소리 없이 물수건으로 머리와 수염을 닦아드리면서 “지금 수염 좀 깎고 가실 람니꺼.” 좀은 길어 보이는 수염을 어루만지면서 말씀드린다. “그냥 가지 뭐.” “거기 할머니들도 계시던데요.” 내가농담조로 말씀드리니 아버지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 마신다. 1시가 넘어 2시가 넘어서니 그 집에서 연락이 온다. “아버지 오시라는데요.” 아버지는 힘없이 “그래 가자.” 내키지 않는 말씀이다. 옷 보따리와 지팡이를 먼저 차에 싫어놓고 아버지를 들쳐 업는다. 175Cm 키에 통뼈이시라 바싹 말라 살은 없지만 제법 힘을 써야 했다. 간신히 차에 눕혀드리고 쓰시던 매트2장과 만원 짜리지폐 몇 장이든 손지갑에 자식들 전화번호를 크게 적어 넣어드리고 일이 있으시면 곧바로 전화 하시라고 말씀드리니 차 뒷좌석에 좁게 누워서 알겠다고만 하신다.
평범한 일반 이층 슬라브 주택, 차로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다. 나는 가까운 곳에 이런 곳이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아버지를 업고 집안으로 들어서니 거실과 방 곳곳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앉아계신다. 모두가 불편한 행동에 90세 이쪽저쪽의 노인 분들이 아무런 표정도 없이 새로 입주하는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원장님과 일하는 도우미 아주머니들과 함께 마련된 자리에 갖고 온 매트를 깔고 아버지를 눕혀드린다. 몹시 피곤해 하신다. 계약서에 싸인 하고 돈을 지불하니 입주절차는 끝이 났다. 피곤하여 눈을 감고 계시는 아버지 머리맡에 잠시 앉아 있다가 살며시 나온다. 돌아온 집안도 난장판이다. 무엇부터 정리해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다. 대충정리에 들어가려는데 곧바로 전화가 온다. 아버지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부랴부랴 달려가니 저녁으로 죽을 드시고 계신다. 맨 죽에 김치 와 나물 반찬 이다. 배가 고프신지 먹여 드리는 대로 받아 드시는데 잘 넘기지는 못하신다. 원장말씀이 아무래도 병원으로 가셔야 할 것 같단다. 나는 가까운 병원을 얘기했더니 통도사 쪽 신축한 노인병동을 추천한다. 자기가 그기에 실장의 직책을 맡고 있기 때문에 좋은 조건으로 입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좀더 기다려 상태를 보고 결정하자고 한다. 노인들은 이제 잠을 잘 시간인지 도우미 아주머니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각자 방으로 부축하여 옮겨드린다. 아버지 머리맡에 앉아계시는 할아버지는 96세의 연세 이신데도 걷지는 못해도 아직은 건강해 보인다. 큰방 하나에 각자의 자리를 정해놓고 여러분이 함께 주무시게 하는 그런 곳이라 아버지가 염려스럽다. 몸이 편치 않으시니 몸부림을 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아직 힘은 왕성? 하신데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몸이 몹시 안타까우셨으리라. 다시 집으로 돌아와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멍청히 앉아있는데 전화가 온다. 가슴이 덜컥한다. 아버지가 계시는 홈 이다. 호흡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가보니 아버지는 몹시 괴로워하고 계신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곳 원장이 실장으로 있는 통도사부근의 노인 병원으로 결정하고 그 병원에 엠블런스를 요청한다. 저녁 시간대라 밀리는 차와 기다리는 마음이 합작하여 초조한 시간을 마냥 늘리고 있었다. 아버지를 다시 업어 엠블런스에 태워 싸이렌을 울리며 달려갔지만 왜 그리 길이 멀어 보이는지 사실은 30분정도의 시간이 걸렸지만 길고도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뒤늦게 생각해보면 그렇게 급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내 마음이 그렇게 초조 하였던 모양이었다.
병원은 깨끗하고 넓은 주차장에 전원의 확 트인 시야가 맘에 들었다. 벌써 어둠이 깔려 있었지만 맑은 공기와 깨끗한 병실분위기는 아버지가 보다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을 받은 기분이었다. 병원장님과 간호사들, 관계자들의 친절한 협조로 병실침대에 뉘어드리고 산소 호흡기와 혈관주사 링겔을 달아준다. 아버지는 약간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뭔가 못마땅한 몸부림으로 주위를 긴장시킨다. 몹시 아파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병원이라는 곳이었기에 보다 안심이 되었다. 아버지는 아직 정신이 없어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도 못하고 같이 올라간 홈 원장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온다. 내려오면서 기름값을 감사한 마음으로 대신 지불해드린다. 집으로 돌아오니 어지러운 집 분위기 속에서도 채2년도 안된 아버지와의 생활이 떠오르면서 최근 아버지의 상태가 나빠져 가면서 아버지에 대한 갈등이 나 자신의 스트레스로 아버지를 힘들게 하였을 것 같아 몹시 울적해지며 후회스러운 마음은 지금 다시 아버지한테로 달려가 끌어안고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이 된다. 그리고 무엇을 못해드렸을까 반성도 해본다. 드시는 것은 무척신경을 쓰면서 나름대로 잘해드리려고 노력은 했다. 그러나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섰을 때 쌓여있는 일들은 인내의 한계점까지 도달할 때도 있었고 쌓이는 스트레스를 주체할 수 없어 큰소리를 마구질러보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한 감정이 아버지한테 전달되지 않았다고 보장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나중에 결코 후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늘 다짐을 하고 또 다짐하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추스렸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녹녹치가 않음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막상 입원 시키고 나니 모든 것이 내 탓만 같아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날이 새면 바로 아버지한테 가봐야 할 것 같지만 일은 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입원비가 만만치 않을 것이고 물론 강원도 큰동생 에게 연락하였으니 도움은 있겠지만 동생도 그리 여유롭지는 못할 것이니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일단 기보돈은 여유를 달라고 전화를 해 두었으나 역시 돈 걱정이 앞선다. 요즈음 수입도 별로여서 어찌 보면 앞이 깜깜 하기까지 하다. 이런저런 걱정과 아버지에 대한 송구스러움과 함께 밤 세워 집안정리를 한다. 어차피 누워도 잠은 오지 않을 테니. 아버지는 담배를 무척 많이 피우신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로서는 담배냄새도 괴로움의 한부분이였다. 아버지가 나가신 지금 방안 가득 고여 있는 냄새도 냄새지만 가구마다 묻어있는 새카만 니코친은 걸레로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다. 어느새 날이 샌다. 성격상 꼼꼼하게 챙겨나가자니 일이 그리 만만하지가 않다. 사실 6일과7일은 모임에서 성지순례를 가는 날이었기에 아버지를 혼자 두고 갈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하고 궁리를 하면서 혹시 갈 때를 대비하여 켄에 든 죽과 쥬스 류 등 쉽게 드실 수 있는 음식물을 준비 해놓고 아버지에게도 먹는 방법 등을 설명 해드려 두기도 했었다. 홈 에 갈 때는 사두었던 식혜 한 박스를 들고 가서 인심도 썼다. 날이 샜으니 7일이다. 성지순례로 마음을 비워둔 이틀간 인지라 몸과 마음도 피곤하였지만 일도 하고 싶지가 않아서 그냥 청소로 밀고나가기로 한다. 이불빨래와 옷가지들, 바닥과 각종전기제품들, 하나하나 챙겨 나가다보니 어느새 하루가 훌쩍 넘어간다. 월요일, 8월 8일은 또 쉬는 날이 되어 스스로의 마음약속에 따라 통도사의 노인병원을 간다. 빨리 가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오전을 넘긴 후에나 출발할 수 있었다. 병실이 일반병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져 있었다. 팔에 여러 개의 링겔주사를 꽂고 코에는 산소호스를 달고 계신다. 주사바늘을 자꾸 털어 내는 바람에 손을 침대에 고정시켜 놓았다. 초췌한 모습에 눈물이 나온다.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차라리 집에 그대로 계셨더라면....... 그러면 “어떤 다른 방법이라도?” 하면서 변명을 찾는다. 묶인 팔이 안쓰러워 만지고 있자니 아직 힘이 있으셔서 정신이 살짝 없을 때는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간병인의 말에 수긍을 한다. 병원에서 나오는 식사는 고작 죽 정도이기에 아버지에게는 불만인 것 같다. 우유가 먹고 싶다기에 먹어도 괜찮은지 간호실에 물어보니 있던 우유 한 팩을 준다. 빨대를 꽂아 먹여드리니 잘 드신다. 간병인이 다른 침대에서 환자에게 많이 먹인다고 불평을 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배설문제가 큰문제인 모양이다. 아버지가 먹는 것이 형편없다고 말씀하시지만 어떤 묘안이 없다. 아버지 본래의 식사량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 질이 문제인 것 같다. 두유를 열심히 잡수시라는 이야기만 해 드릴뿐이다. 좁은 침대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어야하는 아버지, 그 모습이 짠하게 가슴으로 밀려온다. 마음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생각 하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이미 포기가 자리하는 것 같다. 간병인이 요구하는 대로 휴지와 물휴지, 그리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두유를 사서 침대 옆 보관함에 넣어둔다. 간병인 에게 필요한 물품을 사 쓰시라고 얼마의 돈을 보관시킨다. 넓은 병실에는 침대가 두 줄로 벽을 머리에 두고 열대여섯 대가 놓여 있고 치매와 의식이 분명하지 않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한두 명의 간병인으로부터 보살핌을 받고 있다. 본인이 혼자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한두 명에 불과 한 것 같다. 고려장(高麗葬). 불쑥 머리에 떠오르는 단어다. 그렇다 이런 곳이 현대판 고려장에 다름 아닌 것이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단계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노인병동들. 버려진? 노인들을 깔끔하게 치장한 콘크리트 벽안에 가두어두고 가까스로 생명연장에만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면서 미약한 정신상태라 움직임이 심한 노인에게는 간병에 힘이 든다는 이유로 침대에 꼼짝없이 묶어 자유를 박탈하고 있는 곳, 노인들에게 번드레하게 현대의학을 빌미로 노쇠하여 잘 드러나지 않는 혈관을 굵은 바늘로 이리저리 찾아 찔러대어도 노인은 말 한마디 못하고 그냥그대로 내맡겨진 채 결국 여러 개의 바늘을 혈관에 꽂고 기약 없는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곳, 이곳이 어디란 말인가. 노환은 어쩔 수 없는 자연현상이다. 고칠 수 있는 병도 아니다. 옆에 있음으로 해서 불편하고 시간을 뺏긴다는 이유로 정을 거두어들이고 버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들은 병원에 비싼 값을 지불하고 입원시켜 놓았다는 것만으로 할일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질 것이고 간병인이 있다는 핑계로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는 것이다. 그런 곳에 나도 아버지를 버려두고 이삼일에 한번 찾아뵙는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으니 역시 남과 다르지 않음이다. 물론 모두가 바빠 시간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옛날 농경사회보다는 훨씬 많은 여가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밤도 밝디밝은 조명으로 낮처럼 환하게 만들고 휘황찬란한 향락문화 와 T.V. 컴퓨터, 게임, 등등 그 많은 시간들을 오감을 만족시키는데 소모하고 있으면서도 막상 필요한 시간은 없는 법이다. 자신을 위한핑계는 끝이 없는 것이다. 누구나 모든 것에 유리한 입장에 자신을 두려고 하며 유리한 입장을 고수 하기위해서 수많은 핑계와 술수를 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순간을 회피하기위한 수단일 뿐 그 순간이 지나면 또 다른 핑계를 위한 피곤만이 따를 뿐이다. 나 자신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를 위해 보다 편한 곳으로 아버지를 모신다는 어림없는 핑계로 아버지를 버린 것이다. 혼자이기 때문에, 일을 하여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바빠서 돌볼 시간이 없어서 이러한 이유를 대면서 자기를 정당화 시키고 그러나 편하기 위해서, 자신의 시간을 좀더 가지기 위해서, 받는 스트레스가 심하여, 등등의 자기의 이기적발상은 전혀 그 이유에서 제외시키고 있는 것이다.
8월12일 금요일, 쉬는 날이 되어 아버지에게 간다. 오후시간대다. 병원이 고속도 변이기 때문에 3~40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다. 아버지의 상태는 변함이 없다. 집에 가고 싶다고 흐릿한 의식 속에서도 간신히 말씀하신다. 아무래도 호흡이 불편하신 것 같았는데 그 당시는 산소 호흡기를 달고 계셨기에 몸이 안 좋아서 그런 줄 알았다. 여전히 좁은 침대에서 며칠을 그대로 보내셨구나 생각하니 답답한 심정이 된다. 그러나 지금 내가 자유스러우니 그 생각은 잠시 뿐이고 어쩔 수 없다는 자기변명에만 충실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정신은 여전히 오락가락 하고 있는 상태다. 집에서는 움직이는 것이 어려웠지만 정신상태는 괜찮았었는데, 그러나 떠도는 생각으로 병이 점점 깊어 가는 것인가 하는 단순한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아니 아무런 생각 없이 당연시 받아드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주무시는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가 며칠 후 또 뵙겠다는 인사를 마음속으로 아버지에게 한다. 간병하는 아주머니에게 인사하고 미안함을 속으로 감추고 자리를 뜬다. 고작 한 시간 좀 넘는 시간이다. 집으로 오는 시간 내내 마음이 무겁다. 8월14일 일요일. 차가 말썽이다. 일요일이라 카센타도 모두 문을 닫고 있으니 고칠 방법이 없다. 단골 카센타 에 가 봤어나 연락이 되지 않는다. 오후에 다시나가 차에 시동을 걸어 봐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손을 모두 봤는데 어쩐 일인가 싶다. 볕이 몹시 따갑다. 이웃 타이어 집에서 나와 이리저리 만져보았으나 차비만 손해 봤다. 별수 없이 집으로 들어오면서 내일 광복절 휴무일 카센타 만은 문을 열었으면 하는 바램을 할 뿐이다. 갑자기 텅 빈 공간이 생긴 것이다. 차가 없으니 아버지한테 가볼 수도 없는 것이다. 있어도 갈 형편은 안 되었겠지만. 오후 내내 집에 있는데 홈 강 원장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위독하신데 병원 원장말씀은 오늘 넘기기가 어려울 것이란다.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인가. 정신이 하나도 없다. 빨리 가야 된다는데 차도 고장이다. 강 원장이 자기차로 가잔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누구인가에게 연락은 해야 되겠는데 막상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일단은 가봐야 할 것 같다. 강 원장이 집 부근까지 와서 나를 태우고 통도사를 향한다. 사실 그때는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지금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마 강원도에 먼저 전화를 했을 것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라고 했을 것이다. 숨을 가빠하시는 아버지를 뵙고 인보 기보에게도 연락을 했을 것 같다. 당황했었기에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부산을 출발 할 때는 해가지기 전의 어스름 이었던 것 같고 병원에서는 어둠이었던 것 같다. 곧바로 대구에서 막내동생 부부가 도착하여 병원일층 X-Ray실로 가서 아버지 사진을 찍었다. 폐기공이란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폐에 구멍이 생겨 기능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대로 두면 시간이 촉박하지만 수술을 하면 당장은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원장님이 결정내리란다. 수술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잠시 주춤했던 것 같다. 아마도 내 속셈이 앞을 막았을 것이다. 수술 쪽을 택한다. 지금생각해도 이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원장님이 부산에 있는 종합병원 여러 곳을 연락해본다. 일요일이라 응급실 당직도 흉부외과를 볼 수 있는 곳은 부산대학병원 밖에 없단다. 선택의 여지는 없고 엠블런스로 토성동 대학병원을 향해 달린다. 간호사가 아버지 옆에 타고 나는 동생의 차를 타고 병원으로 달린 것 같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대학병원, 이름만큼이나 대단한 곳이다. 응급실은 시장바닥 그 자체였다. 급한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란 것이다. 바닥과 화장실 곳곳에는 핏자국이 넓게 산만하게 떨어져 굳어있고 응급실 침대는 더 이상 놓을 곳 없이 빼곡히 차있고 그것도 모자라 피 흘리는 환자들이 의자에 앉아 링겔을 꽂고 있다. 의자도 모자라는 현상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의사와 간호사들, 그사이로 술 취한 취객들의 산만한 행동들이 뒤섞이고 보호자들의 이기심이 또한 발동하고 있었다. 일단은 응급실 등록 수속을 마치고 담당의사의 문진에 답하고 이동X-Ray를 찍고 전쟁터도 아닌데 야전침대 같은 곳에서 국소 마취를 하고 아버지 가슴에 칼을 댄다. 수술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허파에 구멍을 뚫어 호스를 끼우고 공기와 고인핏물을 빼내는 것이었다. 어느새 두개의 호스가, 하나는 허파에 또 하나는 소변 처리를 위해 달리고 있다. 그리고 4개나 되는 링겔은 성한 곳이 없는 팔에 반창고로 감아놓은 주사를 위한 장치들을 통해 한 방울씩 흘러들고 있었다. 팔꿈치엔 집에 있을 때 다친 것인지 부종이 생겨 벌겋게 부어있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안타까운 모습이다. 진통제 때문인지 우선은 그렇게 끙끙대던 신음이 멈추고 주무시는 모습이 조용하다. 그러나 외부로 보여 진 상황은 비참 그 자체다. 울컥해 지는 아픔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새벽녘 강원도 태백에서 심야버스로 다시 포항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 갈아탄 버스로 강원도 동생이 왔다. 오는 시간이 만만찮았을 것이다. 해가 뜰 무렵 서울에서 인보와 기보가 왔다. 모두가 연락을 받고 밤새 달려온 것이다. 일찍은 시간에 막내동생이 구해온 기저귀와 물 티슈로 막내동생 댁이 사실 누구나 꺼리고 어렵다는 아버지의 뒤처리를 잘해 주고 있다. 큰동생과 같이 중환자실 입원신청을 하는데 응급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서류가 까다롭다. 보증인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도 공무원이나 재산이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신 새벽에 어디서 그런 조건을 쉽게 채울 수가 있을지 그나마 오늘은 휴일인 것이다. 동생이 공무원 이었지만 서류를 준비할 수없어 강원도로 전화하여 납세증명서를 팩스로 받아 처리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김밥 집에서 허기진 배를 간단히 채우고 모두 병원출입구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간단한 일상의 대화만을 주고받는다. 90 이 넘은 아버지의 많은 연세에 어떤 묘안은 없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 따라 한 인생의 종착역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오늘은 광복절, 휴일이라 시간의 여유가 있다지만 내일부터는 모두가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 또한 무게를 더하고 있을 것이다. 중환자실 대기(待期)환자는 많다. 그러나 병실이 모자라니 병실침대가 빌 때까지 시장터 같은 응급실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병은 수술은 흉부외과에서 했지만 경중을 따져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손쓸 수 없게 만드는 심근경색(心筋?塞)도 있어 내과 소견이란다. 예쁘고 젊은 내과여의사의 친절한 설명이다. 그 와중에도 우리며느리였으면 하는 생각이 스친다. 약을 쓰는 것도 부적절한 병의 상관관계 때문에 치료가 쉽지 않다는 말도 덧붙인다. 시간이 흐르니 모두 떠나야할 사람만 있다. 간병인을 쓰자는데 비용이 문제다. 일단은 며칠은 쓰자는데 합의 하고 24시간에 오만오천원의 요금으로 간병인을 불렀다. 병원에는 간병인 과 환자를 위한 죽 집의 스티커가 끊임없이 날아들고 있었다. 인보 기보도 내일 근무를 위해 떠나고 간병인이 온 다음 부탁을 하고 막내동생 부부는 자기들 차로 떠나고 큰동생과 나는 전철로 노포동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전철로도 거의 한 시간 거리다. 큰동생을 강원도 태백행 버스로 배웅하고 카센타에 들러 수리된 차를 찾는다. 아침에 급히 와 맡겨두었던 것이다. 수리비가 거의 30만원이나 된다. 약 보름 전에도 40만원정도의 수리비를 지불했는데 돈쓰일 데가 한꺼번에 밀어닥친 것이다. 집에 오니 피곤한 몸이 허탈 그 자체다. 잠을 청해보지만 커피 탓인지 정신은 더욱 살아나는 것 같다.
8월 16일, 오전에 병원으로 향한다. 아버지 침대가 안쪽응급실로 옮겨져 있다. 간병인은 피곤한 모습이다. 쉬었다 오라하고 아버지 옆에 앉는다. 두유를 사서 드렸더니 힘없이 빨대를 조금씩 빤다. 나를 알아보는 것 같다. 기저귀도 갈아드리고 소변 팩도 비워낸다. 이웃환자의 보호자가 불러서 가보니 간병인을 바꾸어 주란다. 간병인으로서는 도저히 자격이 안 되는 여자라면서 당장 갈아 치우란다. 밤새아버지의 간병인을 보면서 남의 일이었지만 속이 많이 상하셨던 모양이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 했던가. 같은 어려운 환자를 둔 보호자로서의 안타까운 마음이었으리라.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아버지 곁에 돌아오니 바로 옆 환자의 딸인 보호자도 어렵게 입을 뗀다. 밤새같이 얘기도 나누었을 법도 한데 바꾸는 게 나을 것 같다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옆에서 본 사람들의 눈이 한결같다면 간병인도 마음 놓고 맡길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타고난 심성이 아니고서는 자식 형제도 어렵다는 일을 몇 푼의 돈을 위해 일 하는 사람에게 내일같이 해주리라 믿는 것은 지나친 바램 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간호실에 병실의 상황을 알아봤으나 우리보다 먼저오신 옆 침대 할머니도 못 들어가고 있으니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단다. 각 침대에는 수시로 환자가 바뀌고 있다. 또 다른 옆 침대에 4~50대의 중년 아주머니가 새로 입주? 한다. 4개의 링겔과 두개의 호스 산소마스크를 달고 계시는 아버지를 보더니 연세를 묻고는 왜 그렇게 고통스러운 분을 붙들고 있느냐고 오히려 힐난이다. 지금이라도 주사와 호스를 다 떼고 조용히 보내드리는 것이 옳다는 충고? 도 아끼지 않는다. 미소로서 넘기고 만다. 제삼자의 눈이 정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사자가 되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판단할 수 없는 소중하면서도 고귀하고 진하게 연결된 핏줄의 흐름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어떤 가치기준으로 본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합당치 않음일 것이다. 옆 침대할머니의 딸이 자기네는 병실로 곧 올라갈 것 같다면서 여기서 이렇게 기다리는 것 보다는 다른 병원을 찾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준다. 하긴 중환자 병동이 비싸다는 얘기도 있는데 어차피 연세 때문에 심장수술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좋은 조건으로 다른 곳을 알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당의사와 상의를 해본다. 담당의사도 좋은 생각이라면서 수술도 할 수 없는 환자를 중환자실에 무작정 입원시켜놓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라면서 담당교수님께 다른 병원으로 이송가능 하도록 말씀드려 보겠단다. 자기도 다른 곳을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좋은 조건의 시설은 자리가 그리 쉽지 않는 것 같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통도사 노인병원에 전화를 했더니 쾌히 승낙 한다. 오후 여섯시까지 엠블런스를 보내겠다고 했다. 간병인이 돌아왔기에 수고비를 지불한다. 이틀 치 수고비와 그기에 얼마를 더 보태야 했다. 다른 이에게 들은 우리 간병인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로 속상할 필요 없이 해결된다. 오히려 돈이 적어 그만둘 생각이었다고 하여 속으로 그러면 얼마를 줘야 된단 말인가. 라는 언짢은 생각을 하면서도 웃으면서 고마웠다는 인사만 할뿐이다. 앞으로 다른 환자들에게는 잘해주기를 바란다는 속마음은 차마 입을 열어 얘기하지 못한다. 병원비 정산을 끝내고 옮길 병원에 가져갈 의사 소견서도 받고 그래도 두 시간 가량 시간의 여유가 있다. 아버지는 몽롱한 의식만이 왔다 갔다 할뿐이다. 두유의 빨대도 힘이 없으신지 조금씩 밖에는 빨지 못한다. 주위의 침대들도 하나 둘 비어 나간다. 여섯시가 조금 넘어 엠블런스가 도착했다. 이젠 낯이 익은 엠블런스 기사가 반갑게 인사한다. 같이 온 간호사와 아버지를 옮겨 싣는다. 노인병원, 간병하던 아주머니도 반긴다. 그래도 있던 곳이 편한 것 같다. 오는 도중 엠블런스 안에서 아버지가 주사바늘을 빼는 통에 차를 갓길에 세우고 한바탕 소동을 벌리기도 했다. 아버지는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 힘없이 누워 있다가도 뭔가 못마땅함을 수시로 행동으로 나타낸다. 의식이 살아날 때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답답한 심정에서 오는 것이리라. 다시 재 입원 수속을 마치고 우리일 때문에 와있던 강 실장의 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한다. 늘 미안한 마음이다. 노인병원에 모셔놓고나니 마음이 놓이는 것 은 무슨 일일까.
8월20일 쉬는 날 아버지를 찾아간다. 더욱 초췌해진 모습에 내가 부르는 소리에 약간의 반응을 보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데 알아들을 수는 없다. 식구아무도 없이 아픈 사람을 혼자 버려두었으니 마음 외로웠음이 분명할 것이다. 어제 옥수한테 전화하여 시간이 그리 많이 남은 것 같지 않으니 자주 찾아뵈라고 얘기를 해두었다. 일요일 시간을 내어 온다고 했다. 아버지가 가장 마음 아파하는 막내딸이다. 아버지에게도 그런 얘기를 해드린다. 물론 알아듣고 있는 것 같았지만 표정이 없으신 걸보니 좀은 섭섭했으리라. 다시 한번 아버지 “내일은 좋아하는 옥수가 옵니다.” 시큰둥한 반응이었지만 반가운 내색이 슬쩍 비친다. 아버지 곁에 매일매일 식구 중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으련만, 쉽지 않은 생각을 해본다. 막내동생 식구와 큰여동생도 내일 올 모양이다. 이왕이면 한꺼번에 문안오기보다는 하루씩 띄워서 오면 아버지한테 더 도움이 될 텐데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일요일 외에는 시간내기가 쉽지 않은 사회적 여건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아버지 곁에 오래 앉아있어야 하겠지만 가벼운 엉덩이는 일어설 핑계를 만든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왜 오래 아버지 곁을 지키지 못하였을까 하고 후회스런 생각을 해보지만 쓸데없는 감상일 뿐이다. 많은 환자를 돌보는 두 사람의 간병인은 바쁘기도 하다. 낮과 밤 2교대를 한다고 했다. 멍하니 간병인의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의식의 경계선이 어지쯤인지 모르는 아버지에게 간다는 인사를 드린다. 아마 알고 계실 것이다. 그냥 있으라고 말하고 싶지만 가야하는 것을 아시기에 아무 말씀도 안하고 눈만 감고 계시는 것이리라. 그러한 마음을 알지만 그래도 일어서야 했다. 내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파렴치한 행동인 것이다. 그러나 마땅한 핑계를 갖다 부쳐 스스로를 옹호하고 어려운 것을 회피하려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사고의 틀을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당연스런 행동으로 병원을 나선다. 밖으로는 주위사람에게 미안함을 보이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울고 싶은 마음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8월23일 화요일. 밤 열시. 일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노인병원, 전화기의 문자판에 선명하게 찍혀있는 발신지. 급하게 전화를 받는다. 이제는 어떤 상황인지 안다. 호흡곤란이 심하다고 한다. 11시 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 급히 집을 향한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 속으로 아버지를 되 뇌이며 쏜살같이 달려 나간다. 11시5분 병원 도착이다. 사실 점점 더 초췌해지는 아버지를 보면서 대학병원에서 중환자실로 옮겨 드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것이 늘 걸림으로 남아있어 다시 대학병원으로 옮겨 드릴 수는 없을까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는 있었다. 아버지는 X-Ray 실에 계셨다. 화농(化膿)의 우려 때문에 허파 쪽 호스를 빼고 봉했는데 다시 그 쪽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 허파 전체에 대한 대수술은 불가 했기에 임시변통은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다시 의사소견서를 받아 망설임 없이 대학병원을 향한다. 그 와중에 간병하는 아주머니는 “고맙다”는 말을 자주했다는 아버지에게 연민의 정을 나타내면서 일요일 오전과 오후에 각각 동생 가족과 딸들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또 좋아지면 모시고 오라고 한다. 새벽 시간은 기억에 없다. 부산대학병원 응급실. 수속을 마치고 엠블런스 기사와 간호사를 머리 숙여 배웅하고 먼저와는 달리 좀은 썰렁해진 응급실이었지만 링겔만 새로 달고 소변호스를 끼워두는 것 밖에는 다른 조치는 없다. 고통이 심한 것 같아 얘기하니 진통제를 놓아준다. 그들은 이미 진단을 내리고 있는 것 같다. 의사가 묻는다. 심장박동기와 인공호흡기를 달겠느냐고. 그 기 까지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고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리고는 아무조치도 없다. 진통제로 고통이 멎었는지 주무시는 것 같다. 기저귀를 갈아 드린다. 손을 잡고 있었지만 주사바늘을 자꾸 빼려고 하기에 의사에게 말했더니 붕대로 역시 침대에 손을 묶는다. 답답하신지 묶인 손으로 기저귀를 빼기도 하니 짜증도 난다. 풀어지는 붕대사슬은 내손으로 고쳐 매고 또 고쳐 매곤 한다. 출근 시간이 되니 병원직원들이 속속 들어와 근무에 임한다. 수간호사가 다가와 할아버지 너무 일찍 또 오셨네 하면서 인사한다. 그러면서 지난번 중환자실을 기다린 것을 알기 때문인지 묻지도 않은 얘기를 해준다. 중환자실이 부족하기 때문에 살려야하는 사람에게 우선권을 준다는 것이다. 이해가 되는 말이고 현 상황을 판단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아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하긴 아버지는 수술도 할 수 없는 고령이고 보면 냉정한 입장에서의 판단이 옳을 것이다. 아침이 조금 지나 동생 부부가 들어온다. 그들도 고생이다. 그래도 먹어야 하는 것인지 먹고 왔다는 동생과 김밥 집으로 간다. 전철(電鐵) 안에서 옆자리의 아주머니 어깨에 머리를 얹고 잠을 자는 실례를 범하기도 하면서 대구의 막내동생부부가 왔으니 안심하고 씻기도 할 겸 집으로 왔다.
8월24일이다. 좀 쉬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아 씻고 집안정리 대충하고 병원을 향한다. 병원에 가보니 동생부부는 뭔가 합의가 이루어 진듯하다. 대구 집 근방에 새로 생긴 종합병원이 있는데 아는 실무자가 있으니 잘해줄 것이라며 그쪽으로 옮기는 것이 집이 가까워서 간병도 잘 할 수 있고 아버지도 편하실 것 같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나는 경비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동생도 어려울 것 같아 크게 바랄 바 못 되었기 때문이다. 치료비가 문제되면 보다 싼 시립병원도 있으니 대구로 모시는 것으로 결정하잔다. 내가 반대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여자의 손이 더 따뜻할 테니 말이다. 12시가 넘으면 또 하루가 계산되니 빨리 수속을 밟자고 한다. 담당의사는 편한대로 하라고 한다. 대구까지 엠블런스 호송 비는 20만원이라고 했다. 밖엔 비가 처적 처적 내리고 있었다. 톼원 수속을 끝내고 돈 얼마를 찾아 경비조로 막내동생 댁에 들려주고 엠블런스에 누워계시는 아버지 발을 한번 만져 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동생 차로 노인병원을 향한다. 두고 온 차를 찾아오기 위함이다. 동생 댁은 엠블런스로 아버지와 같이 대구로 바로 직행했다. 홀가분하면서도 뭔가 허전한 느낌이다. 내리는 비로 미끄러운 길을 달려 집에 오니 피곤이 덮친다.
25일은 목요일이다. 7시에 일어나 **동 으로 나간다. 오랫 동안 변함없이 나가는 곳이다. 하나의 습관화된 동작은 시간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그 시간에 따라 일상화가 이루어지듯이, 때가되면 밥을 먹듯이 그렇게 “하듯이” 나가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익어가는 마음의 기도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보물창고에 채워나가면서 언젠가는 모든 사람과 공유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 도 갖고 있는 것이다. 아침, 아버지를 위한 간절한 기도를 한 다음 하루의 일과를 열어나간다. 아버지가 대구라는 멀리 떨어진 곳에 계시지만 그래도 동생부부가 아버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간 든든하고 마음편한 것이 아니다. 오늘부터 또 내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28일은 모처럼 쉬는 일요일 집 뒤 금정산을 잠시 올랐고 30일은 증조부 기일이라 제사를 지냈다. 바쁜 일상은 늘 아버지 생각만 하고 있게 하지는 않는다. 9월3일 토요일아침 동생 댁으로부터 아무래도 아버지가 심상치 않다는 연락이 왔다. 서둘러 구포역 으로 향한다. 오늘따라 버스도 오래 기다리고 기차도 우등열차가 막 떠난 뒤라 다음 차는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고속열차 KTX 가 생기고 일반열차는 영 찬밥신세인 것 같다. 오래기차를 타보지 않아 오늘에야 알게 된 현실이다. 동대구 역에 내려 복현동 대구**병원까지 택시를 탄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다. 몇십년 만에 와보는 곳이라 너무나 생소하다. 병원은 복잡한 시장 한 복판이었지만 신축한 병원이라 깨끗하다. 마침 오늘이 개원식을 하는 날 인가보다. 화환과 현수막이 요란하다. 중환자실이라 가운과 슬리퍼로 갈아 신어야 들어 갈수 있는 곳이다. 아버지를 보는 순간 눈에 눈물이 고여 든다. 답답한 심정이다. 인사를 드리니 아시는 것 같다. 여전히 결박당한 상태다. 당시를 회상하며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갑갑한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그러니 본인이야 오죽 하셨을까. 이곳도 환자는 많다. 건강한 몸을 받은 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해야 할 것이다. 나도 아버지와 같이, 아무의식도 없는 환자와 같은 기분이 든다. 생각의 날개가 꺾여 버린 것 같은 그런 멍한 상태. 아무런 대책이 없음에 일시적 허망함을 느꼈음일 것이다. 기저귀를 한번 갈아드린다. 뼈만 앙상한 다리. “아버지” 소리 없이 불러본다. 병원 옆 시장에서 혹시나 하고 두유와 물휴지를 사다 놓는다. 먹을 수 있을까 싶어서다. 좋아하시던 우유와 두유였으니. 동생 댁이 제일 수고롭다. 병원 옆 식당으로 저녁식사 하러 같이 간다. 이제 덩치로는 어른만한 정원 이와 지원 이를 불러 같이 식사를 시킨다. 아이들이 잘 컸으므로 속으로 감사한다. 동생도 회사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듯 하다. 자고가라는 것을 사양하고 내일모래 월요일 삼랑진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벌초를 약속하고 늦은 시간 자리를 뜬다. 동대구역 새마을호를 끊어 부산 구포에 도착하니 열두시가 넘어있다. 택시를 타고 집에 오니 거의 한시가 가깝다.
9월5일 월요일, 배낭에 벌초에 필요한 도구를 넣고 동생과 약속한 삼랑진에서 10시와11시 사이를 맞추기 위해서 8시에 집을 나선다. 구포에서 9시30분 이전에 출발하는 차를 타기위해서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다. 지난번 대구를 가면서 잘 맞지 않는 시간에 허비된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열시가 조금 지나 삼랑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곧바로 동생 이 들어온다. 가게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들고 산을 오른다. 내가 아버지 손잡고 올라오던 곳이다. 그 세월이 얼마나 되었는지 짐작도 없다. 산에 벌초는 많이 되어 있는 편이다. 둘이서 벌초를 하고 예(禮)를 올린 후 밥을 먹고 내려온다. 동생은 대구로 나는 부산 행 차표를 끊는다.
9월8일 새벽 12시가 넘은 시간 대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위급하단다. 또 몇 시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심야에 올라가는 차가없는데 방법이 없다. 기차역에도 버스터미널에도 연락을 해보았지만 어느 곳이던 아침6시가 넘어야 된단다. 몇 번의 위급상황을 경험 하고난 후 조금은 여유를 부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급한 상황이 되면 다시연락 하라고 하고 대기상태로 뜬눈으로 날을 밝힌다. 오늘은 목요일이기도 하여 책임지고 있는 일도 걱정된다. 대구에 전화해 보니 아직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면 아직 여유가 있는 것이다. **동 으로 가서 오늘하루 원만하게 돌아 갈수 있게 일처리를 해놓고 대구로 가기로 한다. 갑작스레 새벽부터 다른 사람을 대치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11시가 넘어서야 대충 일을 마무리해 놓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다른 바쁜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빠져나와 곧바로 대구로 향한다. 여전한 아버지의 모습 눈물이 앞선다. “아버지” 부르니까 아시는 것 같다. 눈꺼풀을 들치니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시고 있다. 아버지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린다. 나도 모르게 내 뺨으로 눈물이 흐르고 있음을 느끼며 확실히 아버지는 나를 알아보고 계시는 것이다. 여동생도 와있다. 여동생도 몸이 정상이 아닌 모양이다. 몹시 쇠약해 보인다. 대책 없이 병원에 앉아있다. 아직도 아버지의 상태는 위급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병원에서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무력함이 전신을 감싼다. 여전한 아버지의 모습은 오늘도 그냥 넘어갈 것 같다.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여동생이 이제 끝이라고 확인 될 때 나한테 연락하라고 동생 한테 얘기한다. 일이 있는 사람이 자꾸 올라오는 것도 보기가 그런 모양이다. 동생이 차로 나를 동대구역에 내려주고 누나 집까지 데려다 준다며 간다. 생각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온다. 일도 하기 싫고 의욕도 없어 집에서 시간을 죽인다. 9일은 종일 집에서 뭘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저녁에 친목 모임이라 망설임 끝에 식사나 하고 올까하고 참석한다. 2차는 늘 그렇듯이 노래방이다. 놓아주지를 않아 따라만 갔다가 바로 집으로 들어온다. 내일증조모 제삿날이기도해 준비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기분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어젯밤 꿈에 나타났던 여자저승사자가 궁금했다. 무슨 줄거리가 있었는것 같았는데 여자저승사자의 모습만 떠오를 뿐이다.
밤 한시가 채 못 되어 동생 전화가 왔다. 아버지의 임종소식이다. 0시 53분이란다. 각오하고 있었지만 심장이 뛴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분간이 안 된다. 동생이 장례의식장(葬禮儀式場)은 대구에 예약해 놓았다고 했지만 왠지 노인병원의 장례식장이 여러 가지 면 에서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노인병원으로 결정하고 노인병원에 연락하여 구급차를 대기시킨다. 다 싸놓은 아버지 옷 보따리를 풀어서 속옷 몇 가지를 골라낸다. 동생이 아버지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라는 말 때문인 것 같다. 다시 전화한 동생으로부터 생전의 속옷이 아니라 수의라는 소리를 듣고 고르든 옷을 그대로 팽개치고 통도사 노인병원으로 달린다. 노인병원의 낯익은 엠블런스, 벌써 몇 번째 이차를 타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인연이 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내리고 있다. 엠블런스 차는 병원전속 기사가 아닌 장례식장 사람이 운전을 한다. 자기가 장례식장 책임자며 실무자라고 자신을 소개 하면서 장례 쪽 일에 오랫동안 많은 경험을 쌓은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 같다. 비가오고 대구 쪽은 길이 밝지 않아 서행이다. 대구**병원, 지리도 어둡고 비 오는 어두운 밤길이라 이정표를 살피면서 찾아나간다. 멀리서 병원의 높은 형광간판이 반가웠다. 중환자실 입구를 들어서니 막내동생 댁이 내 팔을 잡으며 마음을 단단히 먹어 라고 한다. 나도 각오 하고 있었기에 별문제는 없을 것이라 하고 병실을 들어선다.
흰 시트를 걷고 아버지를 뵙는다. 그러나 임종이라는 사실이 실감나지가 않았다. 늘 병원침대에서 주무시던 그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아직 온기도 남아있었다. 단지 요란한 부착물들이 치워진 상태일 뿐이었다. 그러나 죽음은 죽음이었다. 가슴을 만져보아도 얼굴을 만져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이다. 들것에 옮기면서 답답한 가슴이라고나 할까, 슬픔이라고 하는 것 같은 것인가 무엇인가 모를 어떤 착찹함 같기도 한 감정으로 아버지를 차에 모신다. 소리쳐 울어버리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 마음 그런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임종은 동생 내외와 막내여동생이 함께 했다고 한다. 나도 어제 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했다. 아버지를 뒤쪽에 모시고 나는 기사의 옆 좌석에 앉아 통도사를 향한다. 그 제서야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기도 소리가 나온다. 아무래도 뒷자리의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 중간에서 차를 세워 아버지 옆으로 자리를 옮긴다. 시트로 감싼 아버지를 어루만지면서 계속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면서 아버지와의 마지막 길의 동반자가 된다. 노인병원 장례식장, 조금도 변함이 없는 아버지의 얼굴, 동굴 같은 차디찬 냉장실로 아직은 온기가 남아있는 아버지가 빨려들 듯 들어가고 두꺼운 쇠문이 닫힌다. 아직은 일찍은 시간 영시를 바로 넘기고 가셨기 때문에 넉넉한 하루를 쓰게 해주신 것이 아버지의 배려라 생각해 본다. 장례식장 사용계약서를 작성하고 영정을 가지러 부산으로 내려온다. 아마 십수 년 전부터 아버지 가 어디로 이사를 하던지 늘 가지고 다니시는 사진이다. 처음부터 영정(影幀)용으로 제작된 것인데 사진을 보고 그림으로 그려서 액자를 하여 누군가가 아버지에게 보시해 주신 것이리라. 아마 경로당 같은데서 그런 호의를 받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그기에 대한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연유를 아는 사람은 없다. 집으로 와서 주민등록증을 사본하는데 마음이 따르지 않으니 몇 번의 복사실패 끝에 겨우 몇 장을 만들어 영정사진과 함께 다시 올라간다. 방안은 바쁘게 올라가면서 늘어놓은 아버지의 옷가지들로 너저분했다. 동이 트는 것을 보고 생각이 떠오르고 연락할 수 있는 지인들에게 휴대폰의 숫자 판을 두드린다. 아마 연락을 못한 곳도 많았을 것이다. 옛날 부고장(訃告狀) 을 돌리던 시절은 어떻게 했을까 괜스런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장례식장의 특실은 신축건물이라 깨끗하면서도 자리가 넓다. 제단을 만들고 아버지 영정 사진을 안치한다. 그리고 첫 아침식사를 올리고 절을 하니 이제 상주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검은 리본을 단 아버지의 사진에서 더욱 실감 하는 것이다. 식장의 배려로 아침식사를 마친다. 손님 맞을 준비는 식장에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해 주니 상주들의 할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강 실장이 소식을 듣고 제일먼저 달려왔다. 본래 입관(入棺) 전에는 문상객을 들이지 않는 것이 통례인줄은 알지만 그 옛날과 달리 고인이 좁은 방안에 그대로 모셔져 있는 것도 아니고 별도의 장소에 온전히 유지될 수 있게끔 장치된 곳에 모셔져 있기도 하겠지만 문상객들의 시간도 배려해야 했기에 그런 형식적인 예(禮)에는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나 자신은 곡(哭) 대신에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아이고” 하고 공식화된 슬픔을 표시하기보다는 염송(念誦)으로 기도함으로 해서 아버지의 영가가 좀더 편안해 지리라는 믿음 때문인 것이다. 초보 상주라 어색한 모습이겠지만 깔려있는 슬픔은 여느 상가와 다르지 않으리라. 장례관계자가 입관(入棺) 시간을 잡자는데 강원도와 서울에서 와야 할 사람들이 있어 쉽게 결정할 수가 없다. 해가지면 입관을 하지 않는 관례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과 손자들이 마지막으로 아버지,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인사하는 것이 후회 없으리라 생각되어 늦더라도 기다리자고 한다. 너무 형식에 얽매이는 것도 현실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되니 나와 동생의 지인들이 하나 둘씩 문상을 다녀갔고 객(客)이 없을 때는 제단 옆에서 고인의 생전을 추억할 뿐이다. 어찌 보면 가게 문을 열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뭔가 잘못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상(喪)을 이런 식으로 치러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의식(儀式)에 입관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상복을 바르게 입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상(喪)일 때는 두루마기의 오른팔을, 어머니 경우는 왼쪽 팔을 끼지 않고 문상객을 맞이해야 한다고 한다. 당연히 오른팔을 두루마기 밖으로 드러낸 채 서있어야 했지만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있기에 그냥제단 옆에 앉아있기로 한다. 오후가 되니 강원도 태백에서 큰동생이 오고 서울과 대구에서 여동생들이, 해가 진 다음에야 서울에서 인보 기보가 왔다. 아직 큰동생 댁과 홍규가 춘천에서 오지 않았지만 도착시간이 불투명 하였기에 입관 절차를 밟는다.
간단한 상을 차려놓고 초혼(招魂)의 의식(儀式)을 행한 후 목욕시킬 때 잠시 자리를 피해주고 염할 준비가 된 상태에서 다시 아버지를 뵙는다.
냉장이 되어 싸늘해진 아버지의 얼굴은 조금 파랗게 변해 있었다. 싸늘한 아버지의 몸, 그렇게 괴로워하시고 고통스럽던 그 육신은 이제는 그 찬 냉장실에서도 아무런 감각도 느끼시지 못하고 이렇게 누워계시는 것이다. 90평생의 온갖 풍파를 겪으시면서 자식들도 알지 못하고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많고도 많았을 자신만의 괴롭고 고통스러웠던 날들은 과연 얼마나 되었을 것이며 또한 즐겁고 기쁘셨던 날은 또 얼마나 되었을 것인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사연들로부터 인간속성의 근본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원망과 질시(嫉視) 속에서 주어진 능력의 한계와 받아 내린 삶의 형틀을 나름대로 말없이 끌어안고 걸어오셨을 터인데 그러나 그 누구도 이해 해 주는 이 없는 감당하기 어려운 외로움 또한 혼자의 몫으로 받아 드려야 했을 아버지. 아! 이렇게 가셔야 할 것을, 그 많은 아픔들과 깊은 슬픔을 가슴에 새긴 채 살아 내시면서, 짊어졌던 무거운 벅찬 삶에 변명 한마디 않으시고 이렇게 훌쩍 떠나버리시니 저희들이 어찌 그 속을 미루어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아버지! 오고 감의 진리가 여기에 있다고 조용히 누워 이렇게 나타내 보이시는 것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모든 것을 받아드려 주시겠다는 말씀으로 감히 생각하고, 부디 좋은 곳으로 가셔서 평안(平安) 하시고 다시는 힘든 악역은 맡지 않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리겠습니다. 이제 영원의 한쪽자락을 붙들고 마지막으로 마음속깊이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아버지 부디 영원 하시기를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 碩이가.
2005년 9월 아버지를 보내드리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