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 지사와 지경리마을
1.남자현 지사 생가
0.건축 이야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南慈賢, 1872~1933)의
생가지이다.
남자현 지사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들어가 재만조선여자교육회
(在滿朝鮮女子敎育會)를 설립하여 여성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33년에는
만주국 전권대사를 암살하려는 중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출옥
하였다. 그 뒤 6개월간의 고문 후유증으로 8월에 하얼빈 조선여관에서
순국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정부에서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1999년에 생가터에 정침과 부속사를 복원하였다.
0. 건축 특징
남자현 생가는 지사가 태어난 곳으로 1999년에 복원하였다.
복원의 취지는 일제 시대에 국·내외에서 독립운동활동을 하였고,
군자금모집,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지에서 독립군의 뒷바라지로
"독립군의 어머니"라 지칭되는 여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본채와 부속채를 복원하면서 전통 건축양식과 현대식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0.건축 구성
남자현 생가는 1991년에 본채와 대문채, 부속채를 복원한 건물이다.
입구에 <남자현 지사 항일 순국비>라고 새겨진 비석 1기가 서있고,
앞뒤로 본채와 부속채, 추모각이 각각 한 동씩 배치되어 있다.
순국비는 1999년 국문과 한문이 혼용하여 박영석(朴永錫)이 짓고,
유한상(柳漢尙)이 썼다.
본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이다. 가구는 오량이고
홑처마이다. 사방에 토석담장을 두른 독립적인 건물로, 입구에 5칸
솟을대문을 세워 출입하게 하였다.
솟을대문은 좌측에 문칸방을 들여 놓았고, 우측에는 헛간과 비슷한
2칸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본채는 축대 위에 설계되어 있는데
입구에 장독대가 있고, 장독대 뒤에 아궁이를 넣은 부엌을 두었다.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우측에 온돌방 1칸이 있고, 고방으로
짐작되는 쪽방이 있다. 마루에는 뒷문을 달아 여름철 통풍에 효율성
을 높혔다.
부속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를 가진 맞배기와집으로,
공동화장실 옆에 마련하였다. 또한 영정을 모신 추모각(追慕閣)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집으로 복원하였다.
0.문중 이야기
- 의령 남씨
남씨는 신라 경덕왕 14년에 시조인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이
왕으로부터 남씨로 성씨를 하사 받은 것이 시초이다. 남민은 당나라
현종 14년(726년)에 안렴사로서 일본에 가서 소관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항해 중에 폭풍을 만나 신라의 축산도[영덕군]에 표류
하였다. 그 뒤에 신라에서 성씨를 받고, 영양을 식읍으로 받았다.
1200년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남씨는 영양, 의령, 고성 등 세 가지
성씨로 본관이 나누어졌다.
의령 남씨의 관조(貫祖)는 고려 시대의 인물인 남군보(南君甫)로
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고려 말에 자헌대부 참지문하부사(資憲大夫叅知門下府事)를 지낸
곡은 남을진(南乙珍)은 나라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감악산 암굴에 들어가 단식한 뒤 순절하였다.
그리하여 절개 있는 신하로 후세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조선조에는 충경공(忠景公) 남재(南在)와 강무공(剛武公) 남은
(南誾) 형제가 조선 개국에 1등 공신의 공을 세워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 남재는 의정부 영의정이 되었고, 남은은 좌의정을
증직 받게 되었다.
이후 대대로 숱한 현신과 학자들이 배출되어 씨족의 위세를
높였다.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는『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에서 의령 남씨를 조선조 20대 명문 벌족의 하나로 꼽고 있다.
정승 6명, 대제학 6명, 판서 22명, 문과급제자 140여명이 나왔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는 남덕우(南悳祐) 국무총리를 비롯
하여 많은 인재가 정계나 재계, 법조계나 학계 등 여러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다.
의령남씨는 지금 20여만명이 전국 각지로 흩어져 살고 있으며,
의령남씨의 본산인 의령군 의령읍 서동리 400번지에는 관조
의령군(宜寧君)의 묘소와 재실, 비각, 관리사가 있으며, 매년
춘추로 전국의 자손들이 모여서 시제(時祭)를 드리고 있다.
0.관련인물
- 남자현(南慈賢, 1872~1933)
남자현은 영남의 석학인 남정한의 3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1
9세에 영양군 석보면에 사는 의성 김씨 김영주와 혼인을 하여
단란한 생활을 꾸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만행이 점차
극성을 부리자 남편 김씨는 결사보국을 결심하고 영양 의병장
벽산 김도현 의진에서 왜군과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
남자현은 나이 46세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에 대항하여
나라를 구하는 길만이 남편의 원수를 갚는 길임을 깨닫고
같은 해 3월 9일,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녕성
통화현에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비밀무장단체인 서로군정서에 가입, 군사들의 뒷
바라지를 하였다.
한편 북만주 일대에 농촌을 누비며 12개의 교회를 건립하였고,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하여 여권신장과 자질향상에 주력
하였다. 망명생활 6년을 맞은 1925년에 일본 재등실(齋藤實)
총독을 주살하기 위하여 국내에 잠입하여 거사를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1927년 봄에 안창호가 길림 조양문 밖에서 정의부 중앙간부와
각 운동단체간부·지방유지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나석주
의사 추도회 겸 민족장래에 대한 강연회를 성황리에 개최하자,
일제는 안창호·김동삼 등 3백명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에 남자현은 투옥중인 많은 애국지사들이 석방될 때까지
정성껏 옥바라지를 하였다.
1932년 9월에는 국제연맹조사단이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흰 천에다 '조선독립원
(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 마디와 함께 조사단
에 전달했다.
1933년 초에 만주국 건국일인 3월 1일에 행사에 참석할 예정인 일본
전권 대사 무등신의(武等信義)를 제거하기로 하였으나 일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영사관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15일 동안
의 단식투쟁을 벌였으나 6개월간의 혹독한 고문과 옥중 생활로 사
경에 이르게 되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일본 경찰은 보석으로 석방하였는데, 적십자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다시 하얼빈에 있는 어느 여관으로 옮겼다.
남자현은 아들 김영달(金英達)에게 중국화폐 248원을 내놓은 뒤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이 돈을 희사하라고 하며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향년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하얼빈의 사회유지, 부인회, 중국인 지사들은 남자현을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존경하고 하얼빈 남강외인(南崗外人)
묘역에 안장하여 생전의 공로를 되새겼다.
2.석보면 지경리 마을
- 지경리(地境里)는 석보면과 입암면의 사이가 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위치에 따라서 상지경과 하지경으로 부른다. 본래 영양군
석보면의 지역으로 예부터 진보군과 경계가 되는 마을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 월동 일부를 합하여 지경리라 불렀다.
의병대장 이하현(李夏玄) 장군이 태어난 고장이고, 5개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지경,단계(丹溪)는 고려 시대에 이곳이 영해부에 속해 있을 때
영해부의 가장 끝이라 하여 단계로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조선시대에 구역 개편으로 옛 영해부와 진보현의 경계가
되는 땅이라 하여 지경리로 부르게 되었다. 마을 복판의 도랑을
두고 동편은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서쪽은 영양군 입암면 지경
리로 나눠져 있다가 1986년 이후 석보면으로 편입하였다.
옛장터,구장터,구장기(舊場基)는 지경리에서 석보로 향하는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석보장이 이곳에 섰으나 인구가 증가하고 장터가
비좁아지면서 원리의 장터로 옮겨가고 장터만 남아있다.
진골,조양동(朝陽洞)은 비싯골 동남쪽에 있는 긴 골짜기
위에 형성된 마을이다. 8,15 광복 이후에 개간하여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길게 이어진 골짜기 위에 이루어져 있어
햇볕이 잘 들고 따스한 곳이라는 뜻에서 조양동이라고 부른다.
비싯골에서 비시는 빛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진골이라는
말은 긴 골짜기라는 뜻의 소리가 바뀌어서 굳어진 이름이다.
구싯골,구수골(九水谷)은 지경리에서 몇 개의 골짜기를 넘어
야 하는 계곡에 형성된 마을이다.
산골짜기 사이에 자리한 관계로 주위의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아홉 계곡의 물줄기가 마을 앞에서
합쳐져 냇물을 이룬다는 뜻에서 구수곡이라고 부른다.
또한 마을이 들어 앉은 골짜기가 마치 말이나 소의 구유
처럼 생겼다고 해서 구십골, 구싯골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지경리의 상징물은 독굴과 당나무, 남자현 지사 생가를 들
수 있다. 독굴은 도둑의 굴이라는 말이다.
노달(老達) 마을에 큰 굴이 있는데 약 5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였다. 이곳이 도둑의 소굴이었다고 전해진다. 구석
쪽에 독같이 우묵하게 들어갔다는 데서 독굴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당나무는 지경 마을앞에 있는 소나무인데, 해마다 정월 보름에
마을제를 지낸다. 남자현 생가는 1999년에 복원한 여성독립운동가의
산실이다.
3.사진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