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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5. 울산두레교회 주일예배
길에서 예수를 따르니라(마 20:29-34)
1)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다면?
헬렌 켈러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삼중고를 겪었으면서도 이 모든 장애를 이기고 대학을 졸업한 미국 최초의 청각 시각장애인입니다. 그 외에도 헬렌 켈러는 글을 쓰는 작가로, 교육자로도 업적이 많습니다. 헬렌 켈러가 쓴 글 가운데 “단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하고 남긴 글이 있는데, 첫째 날은, 내 삶을 구원해주신 설리반 선생님, 그 분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면서 굳건한 인내심과 공감력과 온화함이 얼굴에 어떻게 피어나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 둘째 날은 어두운 밤을 깨우고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과 더불어 하루 종일 박물관과 미술관을 다니면서 인간의 역사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살펴보겠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날은 뉴욕에 가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에 올라가보고 저녁시간에는 극장에 가서 유쾌한 연극을 보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헬렌 켈러는 단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이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먹고 자는 것, 눈을 떠서 세상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 이것은 평생에 단 사흘만이라도 경험해보았으면 할 만큼 너무나 간절한 소원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인데, 눈을 떠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습니까? 헬렌 켈러가 설리반 선생님의 얼굴을 가장 먼저 보고 싶다고 말한 것처럼 내 눈을 뜨게 해 주신 그 분이 누구인지를 맨 처음 보고 싶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맹인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막 10:46절을 보면, 바디매오라는 맹인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마가복음 10:46) 마태복음에서는 두 사람의 맹인이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마가복음에는 바디매오라는 한 사람의 맹인이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상세한 내용을 보면 마태복음보다 마가복음이 훨씬 더 정확하게 묘사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여리고 성의 출입구에 앉아서 구걸을 하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되었는데, 눈을 뜨자마자 즉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앞에서 만약 우리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인데 눈을 뜨게 된다면 맨 먼저 무엇을 하겠는지를 질문했었는데,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앞을 못 보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된 것도 엄청난 변화지만, 바디매오의 변화가 보여주는 극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십자가와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바디매오가 경험한 이 극적인 변화가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앞을 못 보던 바디매오,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그는 거지로서 영적으로도 궁핍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지만 앞을 보게 된 바디매오,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된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영적으로는 풍성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면 영적으로 궁핍하게 살 수 밖에 없지만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보는 것의 차원에 따라서 풍성해져 왔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 모두는 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풍성한 삶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 나의 안테나가 향하는 방향은?
특히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제 예수님이 체포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될 바로 그 도시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맞이한 제자가 바디매오입니다. 그것은 바디매오 이야기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하려고 하셨던 일에도 대단히 중요했다는 뜻입니다.
여리고 성 길목에 앉아 구걸하던 바디매오의 처지를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기에 다른 사람처럼 공부할 수도 없고,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양을 칠 수도 없습니다. 남이 도와주지 않으면 한 끼의 식사도 해결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복음서가 그를 ‘맹인 거지’라고 묘사한 걸 보면 그의 집도 그렇게 넉넉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집이 넉넉하다면 이 사람에게 길에 나가서 구걸을 하도록 시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오늘도 늘 정해져 있는 자기 자리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디매오에게는 그것이 일상이었습니다. 혹시나 인심 좋은 부자가 지나가다가 큰돈을 주기만을 기대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무료하게 하루를 지내고 있는 그의 귀에 특별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사렛 예수다!”라는 소리였습니다.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30절) 그때 바디매오는 먼저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귀가 열린 다음에 눈이 뜨였습니다. 눈이 뜨인 다음에 발걸음이 움직였습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여리고 성은 큰 도시입니다. 더구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장안의 화제거리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이적사건들이 여러 사람들의 입와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길목에 앉아 있던 바디매오 역시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주고 받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에는 나사렛 예수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었습니다. 나병환자와 중풍병자를 낫게 하셨고,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으며, 그리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게 하셨고, 벳새다에서 맹인을 낫게 하신 놀라운 소식들을 바디매오도 들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보이지 않는 안테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테나는 모든 방향의 소리를 잡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펼쳐놓고 있는 방향의 소리를 잡아냅니다. 우리는 듣고 싶은 것을 잘 듣게 되고, 보고 싶은 것을 잘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안테나는 예수님을 향해서 뻗어 있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수많은 이야기를 듣는 중에 예수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수많은 사람들 중에 예수님께 모든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안테나도 예수님을 향해서 뻗어 나가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관심을 집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생명과 구원을 향해서 진력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거기서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잡아 낼 수 없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다!”는 소리가 바디매오의 영혼을 크게 울렸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말씀, 예수님과의 만남이 우리 영혼에 가장 큰 울림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 존재의식의 변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는 순간 바디매오의 존재의식이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순간 바디매오는 자기가 맹인이요, 거지라는 사실조차도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이 신분의 한계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다소곳이 앉아서 사람들의 동정을 얻어야 한다는 삶의 일관성도 모두 던져버렸습니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집중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심지어 거지의 전재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겉옷까지 벗어던졌습니다. 거기서 그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30절)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메시아, 구세주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거지는 불쌍한 사람이니 ‘불쌍히 여겨 달라.’는 외침이 당연하겠지, 하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바디매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돈이 없어서, 건강이 나빠서, 혼자 살아서 불쌍하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그 이유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우리 모두는 각자 삶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살면서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 존재의 한계를 벗어 던지고 예수님을 부를 때 거기에서 구원의 길이 새롭게 열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디매오의 외침을 배워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목전에 둔 예수님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외친 바디매오는 지금 예수님을 따라오는 제자들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서 예수님을 이해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있었지만 바디매오의 영적 경험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바디매오를 꾸짖으면서 “잠잠 하라.”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예수다.”하는 소리밖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둘러 서 있는 사람들이 좀 조용히 하라고 말리는 것까지도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자 바디매오를 향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의 대답입니다.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33절) 거기 모였던 사람들은 의외로 생각했을 겁니다. 단순히 동냥을 많이 얻고 싶어 할 줄 알았겠지요.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런 차원에 머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눈이떠지는 것, 궁극적인 구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지금 필요한 것은 먹을거리와 집과 가족이 아니라 ‘보는 것’이었습니다. 보는 것만이 그의 삶을 전체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10:52) 바디매오는 곧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길에서 따랐다고 합니다. ‘길 가에’ 앉았다가 이제 ‘길에서’ 예수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무얼 말하는 것일까요? 눈을 떴기 때문에 이제 바디매오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일까요? 그런 방식으로 우리 삶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면 인생은 너무나 쉽습니다. 눈을 떠도, 좋은 직장을 얻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도 우리 삶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성경은 전혀 다른 것을 말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본문이 결론 부분에서 말하는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디매오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었는데, 그 구원은 곧 보는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믿음은 예수님을 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그는 정확하게 인식하고 믿었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세상을 본다는 사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세상을 보고 있으신가요? 무엇을 보고 있나요? 보고 있는 것이 확실한가요?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을 대단히 확실한 것으로 여깁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1)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을 못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2)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거꾸로 예수 믿기 전에는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했다는 말도 됩니다. 예수를 믿기 전의 세상과 믿은 후의 세상이 전혀 달라진 게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이 세상은 여전히 악하고, 싸우고, 무죄한 자의 고난이 계속됩니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에게 세상이 달라졌는가 하고 물어보십시오. 당연히 달라졌다고 대답할 겁니다. 남에게 구걸하며 살다가 예수님을 따라나서게 된 바디매오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의 실체를 새롭게 보게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을 사람들이 입으로 실어 나르는 소문으로 듣는 게 아니라 실질로, 즉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눈으로, 분명한 시각으로 보게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세상은 활짝 피게 될 순간을 기다리는 꽃봉오리와도 같습니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눈을 떠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예전에 라디오방송을 들으려면 신호가 오는 방향으로 안테나를 이리 저리 돌려서 려야 했습니다. 이와같이 신앙생활은 지금 이 시간에 실시간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테나를 예수님의 향하여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는 누구입니까? 주님이 가시는 길가에서 지켜보다가 주님이 가시는 십자가와 섬김의 길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그 살아가는 인생길의 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참 제자입니다. 오늘 그들이 누가 되었든지 인생의 길을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레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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