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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론 33강
출애굽기 15:22-27
마라와 엘림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을 히브리서 기록자는 믿음으로 육지같이 건넜다고 하였고(히 11:29), 바울 사도는 모세 안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밝혔다(고전 10:1-2). 언약적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에 대한 계시이다. 그리고 바다의 노래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이 노래는 죽음에서 살아난 자들의 노래이다.
오늘날 교회는 찬양을 할 수 있는 기능성이 고유의 특권을 가진 것으로 성가대가 자리매김하고 있다. 음악성으로 음악적 법칙에 완벽하게 맞추어진 것만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찬양으로 취급된다. 음정과 박자, 화음을 잘 맞추고 웅장한 파이프오르간이나 오케스트라의 악기로 하는 찬송이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는 진짜 찬양이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적어도 교회에 나오는 자들에게만큼은 하나님께서 고운 목소리를 주고 찬송만 하게 하셔야 한다. 음치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찬양은 죽은 자가 살아나 십자가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다.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22-23절). 우리 성경에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22절)라고 번역하였는데 직역하면 ‘모세는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떠나게 했다’라는 말이다. 아마도 이스라엘은 수장된 애굽인들의 전리품을 챙기려고 하였던 것 같고 또한 홍해의 승리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였는데 모세는 그들을 강제로 이동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사흘 길”(22절)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언약의 말씀 안에 이끌어 구속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구속으로 인도하신 길이 광야이고 물을 얻지 못하는 곳이었다. 여기서 물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속의 길로 인도하시지만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길을 갔다는 뜻이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 목적이다. 그러기에 진리의 말씀을 도무지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수르 광야”(22절)라고 하였는데 “수르”는 ‘벽’이라는 뜻으로 아마도 가나안 쪽에서의 침공을 대비하여 애굽의 방어벽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에담 광야”로도 불린다(민 33:8).
“마라”(23절)는 ‘쓴, 쓴맛이 나는’이라는 뜻이다. ‘미리암’은 ‘메리’(반역, 반란)에서 유래하였고 ‘메리’는 ‘마라’에서 온 말이다. 이런 점에서 미리암은 선지자로서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한다. “이르렀더니”의 히브리어 ‘보’는 ‘들어가서 하나 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총회, 교회가 자기를 위한 길을 감으로 쓴맛이 나는 자리에 하나 되어 있는 상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였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악 가운데서 쓴맛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마라로 인도하셔서 그들의 현실을 폭로하신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24절). “원망”의 히브리어 ‘룬’은 ‘투숙하다, 묵다, 밤을 지내다, 불평하다’라는 뜻인데 시편 30:5의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는 말씀과 관련된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된다. 즉 밤을 지내며 불평하고 원망하지만 아침을 맞이하면 기쁨이 되는 것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물 없는 수르 광야의 삼 일 길도 짜증났는데 천신만고 끝에 얻은 물이 쓴 물이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화는 극도에 달하고 밤을 새워가며 원망했다.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잠시 잠깐을 견디지 못하고 원망하는 것이 죄인의 특성이다. 언약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죽은 자가 살아나 여호와를 노래하였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애굽적 심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철저히 폭로하신다. 단순히 바다에 던져진 애굽만 원수가 아니라 이스라엘은 애굽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을 밝히 보여주고자 하신다. 그래서 구원이 자기들의 잘남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처절하게 알아야 한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광야란, 하나님의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의 인도하심에 따르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여호와를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는지 낱낱이 보게 되는 삶의 현장이 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25절).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라는 말씀은 와우계속법 미완료로 썼다. 즉 모세의 부르짖음이 계속되었다는 뜻이니, 곧 이스라엘의 원망과 불평이 계속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의 관심은 당장 이스라엘이 쉽게 갈증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아는 것에 있다. 그러기에 모세로 하여금 부르짖게 하시는 것이다. 마치 십자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 부르짖으신 예수님의 모습과 같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라고 하였는데 흔히들 나무만 나오면 무조건 십자가와 연결시키는 해석을 즐겨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물이 다시 먹을 수 있는 물로 바뀐 것이 나무 때문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목재를 뜻하는 것으로 보고 스펀지처럼 미세한 많은 구멍이 있는 나무를 샘물이 투과함으로 불순물이 걸러져 그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고 자연주의적인 해석을 한다(나훔 M. 사르나 – JPS 토라주석 출애굽기, p.309).
그러나 성경이 증거하는 것은 물이 던져진 나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나무에 대해 지시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무를 말씀하셨고 모세는 그 말씀대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라고 말씀한다. “시험”이란 우리의 수준과 실력의 위치를 드러내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시험을 봄으로 그 결과로 주어지는 점수는 나의 실력이고 수준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몰라서 시험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수준과 실력을 폭로하시기 위한 것이다. 홍해를 건너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였지만 그들의 수준은 단지 자기 구원에 집착하여 기뻐하는 수준이다. 즉 언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드러내셨다.
그러면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라는 표현은 무슨 뜻인가? 아직 시내 산에 도달하기 전이었고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유월절 규례이고 또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 법도와 율례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지시하셨고 그것을 모세가 쓴 물에 던져 넣어 물이 달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도요 율례가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나무가 쓴 물을 달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세가 행하여 순종하는 그것을 언약의 계시로 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의 물을 먹이시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친히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십자가 죽음으로 법도와 율례를 정하신 그 말씀을 온전히 성취하시겠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26절)라고 말씀하셨다. 즉 모세라는 중보자를 통해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들어”와 “순종하고”의 히브리어는 ‘샤마’로 ‘듣다, 경청하다, 순종하다’라는 뜻이고, “지키면”의 ‘샤마르’는 ‘지키다, 준수하다, 보존하다, 간수하다’라는 뜻이다. 즉 순종한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듣고 마음에 새기고 간직하는 것이 순종이다. 그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온전히 성취하셨다. 이런 점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오셔서 그 말씀대로 이루신 순종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18-21)
그러므로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스라엘에게 열 이적이 재앙으로 내려지지 않은 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 안에 유보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에게도 애굽에 내려진 재앙이 똑같이 내려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재앙이 내려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이 흘리는 피의 언약 안에 두셨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될 것을 계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질병”을 뜬금없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또 이어서 표현되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라는 말씀을 곡해하여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을 능히 고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암이든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그 어떤 질병에 대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면 우리의 병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이상한 믿음을 가진다. 문맥상 전혀 그런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질병”이란 애굽에 내려진 것과 연관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적으로 그들에게 재앙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죄악의 질병을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라는 말씀은 고칠 수 없는 죄악의 질병에서 회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죄악 가운데서 회복시키는 것을 치료하시는 것으로 표현한다(참고 말 4:2, 호 7:1, 사 58:8, 렘 30:17 등).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27절). “엘림”은 ‘아일’(힘, 힘센 것, 우두머리, 숫양, 상수리 나무)의 복수형이다. 마라 사건 이후 엘림에 도달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이끌고 계시는가를 보여주시는 여정이다. 이런 점에서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라는 표현은 열둘의 물 샘은 열두 지파에게 주어지는 진리이고 이것이 곧 일흔 그루로 표현되는 안식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온전하게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엘림을 주시려고 마라를 주신 것이었다. 마라가 없으면 엘림도 없다. 십자가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다. 열두 지파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의 물을 마실 때 아들들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언약으로 이루시는 안식이다. 진리의 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매일 마시지 않으면 하늘 안식은 없다(2026010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