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연혁
석실서원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도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으로, 이후 김상용(金尙容), 김수
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이단상(李端相),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원행(金元行), 김
이안(金履安), 김조순(金祖淳)이 배향되었다.
이경석(李暻奭)을 위시한 당대 조정의 명사들과 사림(士林)의 발의로 1656년(효종 7) 창건된 석실서원은 사림의 강학(講學)과 장수(藏修)라는 서원 본래의 기능만이 아니라 사림정치 이래 붕당정국이 변전하는 속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처음에는 서인계 서원으로, 이어 노소론 분당 후에는 노론계, 그리고 노론 내에서 인물성(人物性) 논쟁으로 호론(湖論) 낙론(洛論)이 갈릴 때는 낙론의 진원지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후기 사대부문화의 큰 특색인 진경문화(眞景文化)의 산실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겸재 정선의 석실서원
또한 영정조 연간의 탕평정국에서는 한때 조제(調劑) 탕평에 반대하는 의리론(義理論)의 본거지였으며, 국구(國舅) 김한구
(金漢耈)와 결탁한 호론계(湖論係)의 정치세력에 대항하는 척신 홍봉한의 정치적 지지세력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상헌의 직계 후손이 주축이 된 안동김씨 세도정권하에서는 집권명분을 정당화하는 정치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즉, 석실서원은 조선 후기 많
은 서원 가운데서도 정치적사상적학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던 서원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실서원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된 후 유적 유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정확한 위치나 건물규모 및 배치
등에 관한 기본적인 것마져 없어지고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진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이 방치된 석실서원을 고증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자료중의 하나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
帖) 중의 「석실서원도」이다. 「석실서원도」는 강 위에서 바라본 경치를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린 것으로 석실서원 주변의
풍광이 묘사되어 있다. 겸재는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대가로 사실적 기법을 사용하였으므로 이 그림을 정확히 분석하면 석실
서원의 위치, 건물양식, 규모를 밝히는 데 크게 참고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경교명승첩은 정선이 64세 때인 1740년 겨울부터
1741년 초여름까지 그린 그림들을 하나의 화첩에 묶은 것이다. 상하 두 책으로 전해왔으며 현재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
다.
정선이 한강을 따라 그 주변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경기 지역을 대상으로 그린 것은 「녹운탄(綠雲灘)」, 「독백탄(獨栢灘)」,
「우천(牛川)」, 「석실서원(石室書院)」, 「삼주삼산각(三洲三山閣)」이 있다.
정선이 석실서원과 삼주삼산각을 그리게 된 것은 안동 김씨 일문과의 깊은 교분에서 연유한다. 그는 김창집의 도움으로 관로(官
路)에 진출하였으며, 김수항의 여섯 아들인 ‘육창(六昌)’ 그 중에서도 특히 김창흡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창흡은 그 형인 김창협과 함께 진경문화의 배양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진경시문학의 이병연(李秉淵), 진경산수화의 정선(鄭敾), 인물풍속화의 조영석(趙榮빋) 같은 대가들이 모두 김창흡 형제들에게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들의 기예(技藝)를 성숙시켜 나갔던 것이다. 석실서원은 이들의 근거지의 하나이자 진경문화의 산실이었던 셈이다.
「석실서원도」는 석실서원을 추정 복원할 경우 가장 구체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그림 왼쪽의 미호(渼湖)는 화제
이다. 미호는 석실서원 및 삼주삼산각과 미사리 사이의 호수처럼 보이는 한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동호(東湖)와 서호(西湖)와
함께 도성 부근의 경승으로 유명하다.
석실서원에 추배된 김원행의 아호인 ‘미호’도 추측컨대 여기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한다. 「석실서원도」에 나타난 좌측의
건물들이 석실서원이다. 이를 분석해 볼 때 석실서원은 전형적인 서원 형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쪽에는 사우
(祠宇)가 보이고 서재(西齋) 건물과 누정(樓亭)의 모습이 확연하다.
「석실서원도」를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중앙의 동산은 모장끝산으로 생각되며, 우측면에는 북두천이 흐르
고 있다. 이 북두천은 원래 바위가 7개가 있어 칠성바위라고 호칭된 데서 붙여진 이름인데 현재는 홍유천이라고 불린다.
모장끝산의 능선 상단에 누정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 주변은 숲으로 둘러쌓여 있고 한강을 주망하기 좋은 장소이다. 전망이
대단히 아름다웠을 것으로 집작된다.
건물 규모는 정면이 2칸이고 측면은 불확실하지만 1칸 또는 1칸 반으로 추정된다. 건물 형태는 팔작지붕에 방 1칸과 누마루
가 달린 복합누정이다. 서원의 별채로서 휴식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원의 중심건물들은 좌측면 토미재 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3채의 건물이 보이는데 숲으로 가려져서 정확한 건물 수는 알 수 없다. 가장 위쪽의 건물은 사우(祠
宇)이다. 규모는 짐작하기 어려우나 지붕의 형태는 맞배 양식을 취하였음이 확인된다. 이 건물의 장축은 동서선상으로 되어
있다. 사우로 추정되는 건물과 직각에 놓여 있는 건물은 장축이 남북선상으로 되어 있으며 재실로 생각된다. 그림상으로는 서
재(西齎)만이 확인 가능하나 숲에 가려진 부분에 동재(東齋)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실은 팔작지붕 양식을 취하고 있다.
맨 아래 선물은 3칸으로 되어 있으며 벽이 없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어 누정으로 추측된다. 누정은 출입처로 사용되기도 하고
강당으로도 활용되나 이 경우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다. 서원의 아래로는 10여호의 초가들이 그러져 있다. 이 건물
들은 독립된 가호(家戶)라기 보다는 서원에 부속된 민가(民家)로 파악된다. 그것은 모든 가옥이 서원을 중심으로 설치된 장리
(長籬) 속에 위치하고 있는 것에서도 추정이 가능하다. 서원 소속의 노비 또는 전호들의 거주지일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
다.
「석실서원도」와 함께 서원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김원행의 문인 황윤석(黃胤錫)이 남긴 일기 『이재난고(쒨齋亂
藁)』와 주민의 증언이다. 각종의 문헌 사료에서 사우(祠宇), 재실(齋室), 강당(講堂), 누정(樓亭) 건물과 연못, 영당(影堂)이
확인된다.
위 자료 및 주민 제보와 석실서원도의 분석을 종합하여 보면 석실서원 경내와 주변에는 다수의 건물과 시설이 영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원은 사우(祠宇)와 재실(齋室), 강당(講堂). 누정(樓亭), 고직사(庫直舍)를 온전히 갖춘 전형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었으며, 전정(前庭)에는 연당(淵塘)이 배치되고 있다. 서원 부근에는 영당이 있어 문충공(文忠公)김상용(金尙容)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 문강공(文康公) 김창흡(金昌翕)의 영정(影幀)을 모셨으며, 모장끝산에는 별도의 누정이 있어 별채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양주읍지』석실서원조의 기가를 보면 서원 소속의 원생(院生)이 20인이고 재직(齋直) 10인, 모군(募軍) 40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원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주는 사료로 평가된다. 『양주읍지』의 간행시기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린 1868년(고종5년) 이후인 1871년 이어서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였는지 의문이 있지만 인원에 비례하여 다수의 건물군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상정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자료분석에 의거한 석실서원의 배치구조, 건물양식, 건물구조의 추정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서원유지가 완전히 교란된 현 상활에서는 간접적인 자료들이 서원의 형태와 규모를 근사하게나마 추정할 수 있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한다고 사료된다.
석실서원은 현재 터만 남아 방치된 상태이다. 당시 사용되었던 주춧돌은 사방에 흩어져 있거나 정원석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은 경관이 좋아 카페가 들어서는 등 석실서원의 원형을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이 있다.
원래 수석동 석실서원 터에 있었으나, 해방과 더불어 이곳 와부읍 석실마을로 옮겼다.
원래는 안동김씨 김상용(우의정), 김상헌(좌의정) 형제를 배향하였으나,
김수항(영의정), 민정중(좌의정), 이단상(집의), 김창집(영의정), 김창협(이조판서),
김창흡(집의), 김행원(찬선), 이안(좨주), 조순(영돈녕부사) 등을 추향하였다.
▣ 배향인물
배향인물
1) 김상헌(金尙憲)
1570(선조 3)~ 1652(효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의 영수이며, 병자호란 때는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했다.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극효(克孝)이고, 형이 우의정 상용(尙容)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좌랑·부교리를 지내고, 1608년(광해군 즉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교리·응교·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 1615년에 지은 〈공성왕후책봉고명사은전문 恭聖王后冊封誥命謝恩箋文〉이 왕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 1624년(인조 2) 다시 등용되어 대사헌·대사성·대제학을 거쳐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다 인조가 항복하자 파직되었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났다. 귀국 뒤 좌의정·영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북벌군의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불렸다.
글씨에도 능했으며, 특히 동기창체(董其昌體)를 잘 썼다. 저서에 〈청음집〉·〈야인담록 野人談錄〉·〈풍악문답 豊岳問答〉 등이 있다.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61년 효종 묘에 배향되고,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의주 기충사(紀忠祠), 광주 현절사(顯節祠)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2) 김수항(金壽恒)
1629(인조 7)~ 1689(숙종 15). 조선 현종 때의 문신.
서인으로서 2차례의 예송(禮訟) 때 남인과 대립했으며, 뒤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자 노론의 영수가 되었다.
본관은 안동.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할아버지는 우의정 상헌(尙憲)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광찬(光燦)이다. 영의정 수흥(壽興)의 아우이다. 1651년(효종 8)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656년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했다. 정언·교리 등을 거쳐 이조정랑·대사간에 오르고 1659년(현종 즉위) 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을 상복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송시열과 함께 기년설(朞年說:1년)을 주장해 남인의 3년설을 누르고, 3년설을 주장한 윤선도(尹善道)를 탄핵하여 유배시켰다(제1차 예송). 그뒤 이조참판 등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다. 1674년 효종비가 죽은 뒤 일어난 제2차 예송 때는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되었다. 1675년(숙종 1) 남인인 윤휴(尹鑴)·허적(許積)·허목(許穆) 등의 공격으로 관직을 빼앗기고 원주와 영암 등으로 쫓겨났다. 1680년 서인이 재집권하자 영의정이 되었고, 1681년 〈현종실록〉 편찬총재관을 지냈다. 서인이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로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으로 갈릴 때 노론의 영수로서 강력한 처벌을 주도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진도에 유배된 뒤 사약을 받았다. 저서로 〈문곡집〉과 〈송강행장 松江行狀〉이 있다.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영평 옥병서원(玉屛書院),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진도 봉암사(鳳巖祠), 영암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 민정중(閔鼎重)
1628(인조 6)~ 1692(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 아버지는 관찰사 광훈(光勳)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49년(효종 즉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성균관·사간원·홍문관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뒤 동래부사·전라어사·충청어사 등을 지내고, 1659년 현종 즉위 뒤에는 대사헌·이조판서·한성부윤·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했다. 1675년(숙종 1) 숙종이 허적(許積)·윤휴(尹鑴) 등 남인을 중용하자 이조판서로 있던 중 이들의 배척을 받아 장흥(長興)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귀양에서 풀려난 뒤 우의정·좌의정 등을 지냈다. 1689년 희빈장씨 소생문제로 일어난 기사환국에서 남인이 다시 득세하자 되자 벽동(碧潼)에 유배된 뒤 그곳에서 죽었다. 1694년 갑술환국 때 관작이 회복되었다.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벽동 구봉서원(九峯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노봉집〉·〈노봉연중설화 老峯筵中說話〉·〈임진유문 壬辰遺聞〉 등이 있고, 글씨에도 뛰어나 〈우상이완비 右相李浣碑〉·〈개심사대웅전편액 開心寺大雄殿扁額〉 등을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4) 이단상(李端相)
1628(인조 6)~ 1669(현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연안. 자는 유능(幼能), 호는 정관재(靜觀齋)·서호(西湖). 할아버지는 좌의정 정구(廷龜)이며, 아버지는 대제학 명한(明漢)이다. 1649년(인조 27)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부수찬·교리·지제교 등을 지냈다. 1655년(효종 6)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청풍부사·응교를 거쳐 인천부사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양주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664년(현종 5) 집의가 되었다가 입지권학(立志勸學)에 관한 상소를 올리고 사직했다. 1669년 부제학으로 서연관(書筵官)을 겸했으나 곧 사퇴했다. 응교로 있을 때 언론의 개방을 주장하고, 정여립(鄭汝立)에게 아부했던 정개청(鄭介淸)의 서원 향사(享祀)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또한 자신의 6대조 이석형(李石亨)이 지은 〈대학연의집략 大學衍義輯略〉을 임금에게 권했다. 당시 교유가 있었던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을 등용할 것을 건의했으며, 호남 지방의 대동법 시행 문제에 대해서도 거론했다. 그의 문하에서 아들인 이희조(李喜朝)를 비롯하여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임영(林泳)·윤지선(尹趾善)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저서에 〈정관재집〉·〈대학집람 大學集覽〉·〈사례비요 四禮備要〉·〈성현통기 聖賢通紀〉 등이 있다.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인천 학산서원(鶴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뒤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5) 김창집(金昌集)
1648(인조 26)~ 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본관은 안동.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영의정 수항(壽恒)이고 어머니는 안정나씨(安定羅氏)이다. 창협(昌協)과 창흡(昌翕)의 형이다. 1672년(현종 13) 진사시에 합격하여 공조좌랑을 거친 뒤, 1684년(숙종 10)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정언·병조참의 등을 지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서인이었던 아버지가 남인의 명사를 마구 죽였다는 탄핵을 받아 진도로 유배되고, 이어 사사(賜死)되자 영평(永平)에 은둔했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축출된 뒤 복관되고 병조참의를 제수받았으나 사임했다. 그뒤 철원부사로 있을 때 큰 기근이 들고 도둑이 들끓어 민정이 소란하자 관군을 이끌고 이를 진압했다. 이어 호조·이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지돈녕부사·한성부판윤·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1712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1717년 영의정이 되었다.
숙종 말년의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소론이 세자인 윤(昀:경종)을 지지하자, 그는 노론으로서 연잉군(延礽君:영조)을 지지했다. 결국 경종이 즉위했으나 경종이 자식이 없고 병이 많자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등과 함께 노론 4대신으로서 연잉군을 왕세제로 세울 것을 주장했다. 경종의 비 어씨(魚氏)와 아버지 어유구(魚有龜)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21년(경종 1) 8월에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10월에는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했다. 경종은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했다가 환수하기를 반복했고, 그에 따라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날카로워져 갔다. 해에 사직(司直)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에게 '왕권교체를 기도한 역모'를 꾸몄다고 탄핵을 받았다. 신임사화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노론의 권력기반은 무너지고, 그는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 성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관작이 복구되었다. 형제가 모두 성리학의 대가로 유명했고, 형제들의 학문적 경향이나 가학의 계통으로 보아 이이에서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에 가까웠다. 관직에 있으면서 복제(服制)·과거·포폄(褒貶) 등에 관한 정책을 많이 건의하여 시행했다.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과천 사충서원(四忠書院),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거제 반곡서원(盤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 〈몽와집〉·〈오륜전비언해 五倫全備諺解〉·〈국조자경편 國朝自警編〉 등이 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6) 김창협(金昌協)
1651(효종 2)~ 1708(숙종 34).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고고하고 기상이 있는 문장을 썼고, 글씨도 잘 쓴 당대 문장가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당대 명문 출신으로 상헌(尙憲)의 증손자이며, 아버지 수항(壽恒)과 형 창집(昌集)이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육창(六昌)으로 불리는 여섯 형제 중에서 특히 창협의 문(文)과 동생 창흡(昌翕)의 시는 당대에 이미 명망이 높았다.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전시장원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사헌부지평·동부승지·대사성·대사간 등을 지냈다. 아버지 수항과 중부(仲父) 수흥(壽興)은 노론의 핵심인물이었는데, 그가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賜死)되자 벼슬을 버리고 영평(永平)에 숨어 살았다. 1694년 갑술옥사 후 아버지의 누명이 벗겨져 호조참의·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24세 때 송시열을 찾아가 소학(小學)에 대해 토론했고 이이의 학통을 이었으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호론(湖論)의 입장을 취했다. 전아하고 순정한 문체를 추구한 고문가(古文家)로 전대의 누습한 문기(文氣)를 씻었다고 김택영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농암집〉·〈주자대전차의문목 朱子大全箚疑問目〉·〈오자수언 五子粹言〉·〈이가시선 二家詩選〉 등이 있고, 〈강도충렬록 江都忠烈錄〉·〈문곡연보 文谷年譜〉 등을 엮어 펴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7) 김창흡(金昌翕)
1653(효종 4)~ 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자이며, 영의정 수항(壽恒)의 셋째 아들이다. 김창집과 김창협의 동생이기도 하다. 형 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부모의 명령으로 응시했고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한 뒤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김석주(金錫胄)의 추천으로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나가지 않았고,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사약을 받고 죽자 은거했다. 〈장자〉와 사마천의 〈사기〉를 좋아하고 도(道)를 행하는 데 힘썼다. 1696년 서연관(書筵官), 1721년 집의(執義)가 되었다. 이듬해 영조가 세제(世弟)로 책봉되자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신임사화로 외딴 섬에 유배된 형 창집이 사약을 받고 죽자, 그도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삼연집〉·〈심양일기 瀋陽日記〉 등이 있다.
8) 김원행(金元行)
1702(숙종 28)~ 1772(영조 48). 조선 영조 때의 주자학자.
당시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의 대립 속에서 낙론을 지지한 대표적 학자였다. 본관은 안동.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운루(雲樓). 아버지는 제겸(濟謙)이며, 당숙인 숭겸(崇謙)에게 입양되어 창협(昌協)의 손자가 되었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1719년(숙종 45)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본가의 할아버지 창집(昌集), 생부 제겸, 친형인 성행(省行)·탄행(坦行)이 죽임을 당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1725년(영조 1) 창집 등 집안 사람들이 신원(伸寃)된 뒤에도 벼슬에 뜻을 버리고 시골에서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1740년 이후 수차례 벼슬에 임명되고 1759년에는 왕세손을 교육할 적임자로 영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후 산림(山林)으로 있으면서 박윤원(朴胤源)·오윤상(吳允常)·홍대용(洪大容) 등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당시 주자학계는 2대 조류인 낙론과 호론이 대립하고 있어서 이간(李柬)이 이재와 함께 낙론의 중심이 되고, 한원진(韓元震)이 호론의 중심이었다. 그는 낙론을 지지한 학자로서 김창협의 학설을 이어받아, 심(心)을 이(理)라고도 하지 않고 기(氣)라고도 하지 않으며, 이와 기의 중간에 처하여 이기(理氣)를 겸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겨,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다. 저서에 〈미호집〉 20권 10책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9) 김이안(金履安)
1722(경종 2)~ 1791(정조 15).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원례(元禮), 호는 삼산재(三山齋). 아버지는 원행(元行)이다. 1762년(영조 38)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경연관(經筵官)에 기용되었다. 충주목사·지평·보덕·찬선·좨주(祭酒)를 지냈다. 홍대용(洪大容)·박제가(朴薺家) 등과 사귀어 실학에 어느 정도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박윤원(朴胤源)·이직보(李直輔) 등과 교유한 주자학자로 더 알려져 있다. 저서에 〈의례경전기의 儀禮經傳記疑〉·〈계몽기의 啓蒙記疑〉·〈삼산재집〉 12권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양주 석실서원에 제향되었다.
10) 김조순(金祖淳)
1765(영조 41)~ 1832(순조 32). 조선 후기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기초를 다진 인물.
본관은 안동. 초명은 낙순(洛淳).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 영의정 창집(昌集)의 4대손으로, 부사 이중(履中)의 아들이고, 순조의 장인이다.
1785년(정조 9)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규장각대교를 지냈다. 1789년 동지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에 다녀와서, 이조참의·이조판서·선혜청제조 등을 거쳤다. 1802년(순조 2) 딸이 순조의 비(純元王后)가 되자 영돈녕부사가 되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훈련대장·호위대장·금위대장 등을 거치면서 군권을 장악하고, 1826년 양관대제학이 되었다. 이때부터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문장이 뛰어나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고, 죽화(竹畵)도 잘 그렸다. 저서에 〈풍고집〉이 있다.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여주 현암서원(玄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 중요물건
▲ 석실서원묘정비 :왼쪽 첫번째가 석실서원묘정비이다. 1930년 대 이전까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45 번지 미음 1 통 고산로 126번지 길을 따라 올라가면 양주 조씨의 사당인 永慕齋 입구 서쪽 끝 담장 아래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1930 년 이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 5 번지 석실마을 안동김씨의 세장지지(世葬之地)로 옮겨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석실서원묘정비는 1672년 현종13 년에 건립하였다. 지금 현재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산 5 번지 김 번(金璠, 1479년 ~ 1544년) 묘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송백당유허비(松栢堂遺墟碑), 취석비(醉石碑), 도산석실려(陶山石室閭)·고송오류문(孤松五柳門)등의 비석과 함께 碑群을 이루고 서 있다.
石室書院廟庭之碑
聖人作春秋垂空文而孟子當之於一治之數夫萬物之散聚皆在春秋而若論其大經大法則莫過於尊周而攘夷矣天下未嘗不亂而亂之旣極則天必生己亂之人而其人也無有土地之基本人民之勢力則亦只因聖人之空文以明夫大經大法而於是乎人類異於禽獸中國免於夷狄則是亦一治而己矣盖當我崇禎皇帝丙丁之間天下之亂可謂極矣我石室先生身任禮義之大宗以樹綱常於旣壤至於衆人不憚爲 鬼之議則又有以明言其不然於是其言愈屈而其氣愈伸其身愈困而其道愈亨以故其亂愈甚而其治愈定退之曰向無孟氏則皆服左 而言侏離其信然矣夫盖先生旣沒而中外章甫建祠於先生舊居之傍大江之濱而以 先生伯氏 仙源先生臨亂立 用扶世敎竝奉神牌而右享之盖經始於甲午五月妥侑於丙申十二月十四日噫若 石室先生所謂千百年乃一人者而又得 仙源先生於一家之天倫噫其盛矣嗚呼治亂者陰陽之理也聖人旣贊大易以見陽不可終無亂可以復治而又作春秋以垂治亂之具是道苟明則斯可謂治矣豈可以積陰蔽於九野而不謂陽德之昭明於下也故春秋雖曰因亂而作而天下之治未嘗無也雖然春秋旣曰文成數萬其指數千則聖人之薇辭奧義雖不可得以知而惟尊尙京師之義則炳如日星雖 者亦見之矣今與後之人凡入斯院升堂而鼓 者欲知 先生之道則只將聖人筆削之義毋强通其所難通而只於天理王法民 物則之不可易者講而明之則雖使聖人家奴復出於地中亦可也然後乃知先生之功之大而天之所以生先生者眞不偶然矣嗚呼是豈易與俗人言哉後十七年橫艾困敦三月日後學恩津宋時列記孫男壽增書幷篆
성인이 <춘추(春秋)> 지어 당시에 실행할 수 없었던 법규와 가르침을 후세에 드리웠고,
맹자(孟子)가 일치(一治:一治一亂說)의 운수를 만났으니,
무릇 만물의 흩어지고 모임이 모두 <춘추>에 있음이라.
만일 공명정대한 원리와 법칙을 논한다면 주왕실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다.
천하란 일찍이 어지럽지 않을 수 없으나 어지러움이 극에 달하면
하늘이 반드시 난을 그치게 할 사람을 낳았으며
그 사람은 토지를 기본으로 가지지 않고 백성의 세력에 근본을 두며,
또한 다만 성인의 가르침으로써 무릇 공명정대한 원리와 법칙을 밝힘이라.
이에 인류가 금수와 다르며 중국이 오랑캐로 화하는 것을 면하였나니, 또한 일치일 따름이다.
대개 우리 숭정황제(崇禎皇帝) 병자(丙子) 정묘년(丁卯年)간에
천하의 어지러움이 극에 달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우리 석실 선생이 몸소 예의의 대종(大宗)을 맡아 이미 무너진 곳에 강상을 세우시고,
모든 사람들이 귀신을 슬퍼하는 논의를 꺼리지 아니하였으나 그렇지 아니함을 또한 명확히 밝히셨다.
이에 그 말이 점점 왜곡되었으나 그 기개는 더욱 펴지고,
그 자신이 점점 곤경에 빠졌으나 그 도는 더욱 공고하였으며,
그 어지러움이 더욱 심해졌으나 그 다스림은 더욱 안정을 찾아갔다.
한퇴지(韓退之)가 말하기를,
"옛날에 맹자가 없었다면 모두 오랑캐 옷을 입고, 오랑캐 말을 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러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무릇 대개 선생께서 돌아가시자
도성과 지방의 선비들이 선생의 옛 집 가까운 곳 큰 강가에 사당을 짓고,
선생의 맏형인 선원 선생이 병란을 당하여 슬퍼하고 근심하며 절개를 지켜 목숨을 버리고,
세상의 교화를 바로 세웠다고 하여 함께 신패를 받들어 배향하였다.
살피건대 사당의 건립하는 일은
갑오년(甲午年) 5월에 시작하여 병신년(丙申年) 12월 14일에 마쳤다.
아! 석실 선생과 같은 이는 이른바 천백 년에 한 분이 나올 수 있는데,
또한 선원 선생을 한 집안에서 천륜으로 맺어 얻었으니, 참으로 창성하도다.
오호라! 다스리고 어지러움이란 음양(陰陽)의 이치로다.
성인께서 이미 주역을 협찬하시어, 양만이 끝까지 갈 수 없으며,
어지러움이 없어지고 나면 다스림을 회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다.
또한 <춘추>를 지어 어지러움과 다스림의 도구로서 내려주셨는데,
이 도가 진실로 밝아지면 다스려졌다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음을 쌓아 깊은 들에 가리워 놓고 양덕(陽德)이 아래에까지 비추어 밝아진다고 이르지 않는가.
그러므로 <춘추>가 비록 어지러움으로 인하여 만들어졌다고 말하지만,
천하를 다스리는 도가 일찍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춘추>에서 이르기를,
"조문이 비록 수만이고 그 조목이 수천이어서 성인의 미묘한 말과 깊은 뜻을
비록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오직 중국을 높이 받드는 뜻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비록 눈먼 장님이라 하더라도 또한 이를 볼 것이다."라고 일렀으니,
후대의 사람과 무릇 이 원(院)에 들어와 당(堂)에 올라와 예를 올리는 자들이
선생의 도를 알고자 한다면, 다만 성인이 <춘추>를 지으면서 사실을 직필(直筆)하여 쓰고
산삭(刪削)한 뜻을 가지고 이해하기 어려운 뜻을 억지로 알려고 하지 말라.
다만 하늘의 이치와 왕법(王法), 백성의 떳떳한 도리 및 사물의 법칙이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강구하여 밝히면,
성인의 가노(家奴)가 세상에 다시 나타난다 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그런 후에 선생의 공이 크며, 천지가 선생을 내신 것이 진실로 우연이 아님을 알 것이다.
오호라. 이 어찌 쉽게 속인과 더불어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 뒤 17년 횡예인돈(橫艾因敦:임자년 舊甲子) 3월 일에
후학 은진 송시열(宋時烈)은 글을 짓고, 손자 수증(壽增)은 글과 전액을 쓰다.
石室書院 (석실 서원)--------김 창흡(金昌翕) 1653년(효종 4) - 1722년(경종 2) 자 子益 호 洛誦子, 三淵 시호 文康
雲雪渾江漲。孤淸石室峰。눈보라에 뒤섞여 강물 넘치고 석실의 산봉우리 홀로 맑구나.
庭留碑突兀。席有講從容。뜨락에 남은 비각 우뚝 솟았고, 말없이 강의 듣던 자리만 있네.
夜氣存山木。風襟會澗松。밤기운 산목에 깃들어 있고,마음은 간송에 모이어 있네.
言歸五柳宅。更欲護先蹤。오류선생 댁으로 꼭 돌아가서선대의 남긴 자취 다시 지키리.
석실서원 학규(石室書院學規)-김원행
1. 재(齋)에 들어가는 규정은, 장유(長幼)와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독서에 뜻을 두어 학문을 하는 자는 모두 들어갈 수 있다. 들어간 뒤에 만일 위의(威儀)를 닦지 않거나 언동(言動)을 삼가지 않고 심지어 혹 처신을 잘못하고 행실을 그르쳐 선비의 풍모에 누를 끼치고 욕을 보이는 자가 있으면, 재임(齋任)이나 제생(諸生)이 회의를 하여 그 경중에 따라 좌석에서 내쫓거나 서원에서 내쫓는다. 만일 과거에 패려한 행동을 한 사람이 들어오기를 원한다면 그로 하여금 먼저 과오를 고치고 행실을 신칙하도록 해서 그의 행위를 익히 살펴보아 그가 과실을 고쳤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한 뒤에 들어오도록 허락한다.
1. 당대에 지위와 덕망이 있어 선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자를 추대하여 원장(院長)으로 삼고, 제생 가운데 식견이 있는 사람 한 명을 골라 장의(掌議)로 삼는다. 또 한 사람을 유사(有司)로 삼고, 또 한 사람을 색장(色掌)으로 삼아 - 경재임(京齋任)도 마찬가지이다. - 모두 2년이 되면 교체한다. 유사의 경우 서원에 일이 있으면 이 규정에 꼭 구애될 필요는 없다. 무릇 서원에서의 논의는 장의가 주관하되 중요한 사안은 반드시 원장에게 여쭈어 재결한다. 무릇 서원의 물품을 출납하거나 재직(齋直)이나 사환(使喚), 집기(什器)의 유무에 관한 것은 유사가 관장한다. 모든 물품은 다 장부에 기록하고, 교체할 때는 장부를 살펴 후임자에게 교부한다.
1.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재임은 제생을 거느리고 두건과 의복을 갖추고서 사당에 나아가 중문(中門)을 열고 분향(焚香)하고 - 재임이 부재중이면 재중(齋中)의 연장자가 한다. - 재배(再拜)한다. - 차례로 서는 것은 나이순으로 한다. - 비록 초하루나 보름이 아니더라도 제생 중에 만약 외부에서 새로 오거나 서원에서 하직하고 돌아가는 자가 있는 경우에는 반드시 묘정(廟庭)에서 재배한다.
1. 매일 새벽에 일어나 침구를 정리하여 포개두고, 연소자는 비를 가지고 방안을 소제하며, 재직으로 하여금 뜰을 쓸도록 하고, 모두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정제한다.
1. 이른 아침에 모두 두건과 의복을 갖추고 묘정에 나아가 중문은 열지 않은 채 재배만 하고, 외정(外庭)으로 나가 동서(東西)로 나뉘어 서서 서로 마주보고 읍례(揖禮)를 행하고는 각자 물러나 재실(齋室)로 나아간다.
1. 무릇 독서할 때는 반드시 용모를 가다듬고 똑바로 앉아 집중하여 뜻을 기울여 의미를 힘써 궁구해야지 서로 돌아보며 얘기해선 안 된다.
1. 무릇 식사할 때는 장유의 나이순으로 앉아 음식에 대해 편식하지 말고 항상 먹을 때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지닌다.
1. 무릇 거처할 때는 반드시 편하고 좋은 자리는 연장자에게 양보해야지 먼저 차지해선 안 된다. 10살 이상의 연장자가 출입할 때면 연소자는 반드시 일어난다.
1. 무릇 궤안(几案), 서책, 붓, 벼루 등의 물건은 항상 일정한 곳에 두어야지 혹시라도 정돈하지 않고 어질러서는 안 된다. 담배, 타액, 콧물이나 낙서로 창이나 벽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 또한 신을 신고 당에 올라서도 안 된다. -
1. 평상시 항상 관디(冠帶)를 정제해야지 평상복으로 편하게 지내서는 안 된다. - 또한 화려하고 사치스런 복식을 착용해서도 안 된다. - 마치 엄한 스승을 대한 것처럼 반드시 구용(九容)으로 몸가짐을 바로해서 시종일관 해이해지지 않도록 한다.
구용 ○발은 진중하게, 손은 공손하게, 입은 경솔하지 않게, 소리는 조용하게, 고개는 반듯하게, 기운은 엄숙하게, 서 있을 때는 덕스러운 기상이 드러나게, 안색은 장엄하게 하는 것이다.
1. 무릇 언어는 반드시 신중하게 하여 문자(文字)와 예법(禮法)이 아니면 말하지 말고, 부자(夫子)께서 괴이함ㆍ무력ㆍ패란ㆍ귀신에 대해 말씀하지 않았던 것을 본보기로 삼는다. 우선 범씨(范氏)의 7계(戒)를 명심하여 주목하도록 하라.
7계 ○첫째, 조정의 이해(利害), 변방의 소식, 관원의 임명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둘째, 주현(州縣) 관원의 장단점과 잘잘못을 말하지 않는다. 셋째, 여러 사람이 저지른 과실과 악행을 말하지 않는다. 넷째, 벼슬하여 관직에 나아간다든가 시세에 붙좇고 권세에 아부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다섯째, 재화의 많고 적음과 가난을 싫어하고 부를 추구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여섯째, 음탕하고 친압하고 희롱하고 불경함과 여색에 대한 평을 하지 않는다. 일곱째, 남에게 물건을 요구하거나 술과 음식을 찾는 말을 하지 않는다.
1. 성현(聖賢)의 글이나 성리설(性理說)이 아니면 서원에서 펼치고 읽지 말라. - 사서(史書)를 읽는 것은 허락한다. - 과거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다른 데서 익히도록 한다.
1. 무릇 작문(作文)은 반드시 모두 의리에 바탕을 두어야지 이단(異端)의 해괴한 설을 집어넣어선 안 된다. 글씨를 쓸 때에도 반드시 단정하게 또박또박 써야지 마음 내키는 대로 흘려 써서는 안 된다.
1. 붕우는 서로 간에 화목하고 공경하도록 노력하되 서로 잘못을 바로잡아 주고 서로 선(善)을 책려해야지, 귀하고 잘나고 부유하고 문견이 많다는 것을 믿고 동료에게 교만하게 굴어선 안 된다. 또 비난하거나 모욕을 주며 희롱해서도 안 된다.
1. 각자 자기 방에서 지내야지 분잡하게 찾아다녀선 안 된다. 혹 식후나 저녁에 찾아가는 일이 있더라도 조용히 강마(講磨)해야지 절대로 오래 앉아 한담을 나누어 실제 공부에 방해를 해서는 안 된다.
1. 매양 식사를 마치고 나서 혹 정원을 산책하더라도 모름지기 연장자 뒤로 천천히 걸어 정연하게 차서를 지켜야 한다.
1. 어두워지면 등불을 밝히고 글을 읽다가 밤이 깊으면 그제야 잠자리에 든다.
1. 새벽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하루 종일 반드시 일삼는 바를 두어 마음이 잠시도 해이해지지 않아야 한다. 독서를 하거나 정좌(靜坐)하여 마음을 보존하거나 의리를 강론하는 것이 학업이 아님이 없으니, 이런 것을 하지 않는다면 학자가 아니다.
1. 책은 서원 문 밖으로 가지고 나가선 안 되고, - 재(齋)에서 지낼 때 만일 책을 읽고 싶으면 표기(標記)에 성(姓)까지 갖추어 서명한 것을 담당자인 서재생(西齋生)에게 주고서 꺼내 가고, 다 보고 나면 즉시 담당자에게 주어 서주(書廚)에 도로 비치해 두면 비로소 떠난다. 그 표기에 기재한 책을 만약 잃어버렸다면 준 자와 받은 자에 대해 모두 처벌을 논의하고 환수한다. - 여색(女色)을 문에 들여선 안 되며, - 박혁(博奕) 등의 기구도 들일 수 없다. - 술을 빚어서는 안 되고, 형벌을 써서도 안 된다. - 제생이 사사로운 일로 태(笞)나 장(杖) 같은 유를 쓰는 것을 말한다. 만약 소속된 사람이 죄를 지어 서원에서 이들에 대한 처벌을 시행하는 경우는 이 조례에 해당되지 않는다. 단 수복(守僕)이나 고직(庫直) 같은 경우는 재임(齋任)이 아니면 마찬가지로 마음대로 처벌할 수 없다. -
1. 귀가(歸家)할 때면 삼가 서원에서 익힌 것을 잊지 말아서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검속하며 사물을 응접함에 있어 모름지기 하나하나 도리를 극진히 하도록 힘써야 한다. 만일 혹 재에 들어가선 닦고 신칙하다가 재에서 나가선 방일하고 엉망으로 한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는 것이니 서원에서 지내도록 용납할 수 없다.
1. 초하루와 보름마다 제생은 강당에 모여 한 사람에게 학규(學規)를 한 차례 소리 내서 읽도록 시킨다. 처음 재에 들어간 자도 먼저 한 번 읽게 한다. 만일 방자하여 학규대로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논책(論責)한다.
석실서원의 강생에게 알리다〔諭石室書院講生〕- 김원행
서원은 본래 학문을 익히기 위해 세운 것이니, 선비가 학문을 익히지 않으면 선비라 할 수 없다. 우리 고장에 이 서원이 있는 것은 실로 우리 고장 선비로선 큰 다행인데도 학문을 익히는 일이 잠잠하여 들리는 것이 없다면 선비의 수치이다. 이제 다행히 유림의 의론으로 인해 강학하는 일을 보게 되었으니 매우 성대한 일이다. 그러나 선비가 학문을 익히는 데 급급한 것은 과연 무엇을 하려고 해서인가? 장차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구하여 참으로 자신에게 유익하게 하려고 해서일 뿐이다. 만일 혹 그렇지 않고 장구(章句)에나 치중하고 외우고 말하는 데만 공을 들여 내면에 터득한 것도 없이 외면적으로 아름답게 보이기를 구한다면 이는 바로 학자의 적(賊)일 뿐이니, 학문을 익히는 데서 무엇을 취하겠는가.
저 도(道)라는 것은 나의 본성에 뿌리박고 나의 마음에 갖추어져 동정(動靜)ㆍ어묵(語默)ㆍ진퇴(進退)의 법칙에 나타나고 군신ㆍ부자ㆍ부부ㆍ장유ㆍ붕우의 윤리에 드러나 그 이치가 매우 분명하고 그 일이 매우 순조로우니, 성인(聖人)이 성인이 된 것도 이것을 극진히 해서일 뿐이다. 그러므로 맹자는 “성인은 나와 동류(同類)인 분이시다.” 라고 하고, 안연(顔淵)은 “순(舜)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가 한 훌륭한 일을 수행하면 그와 같이 되는 것이다.” 하였고, 성간(成覵)은 “저도 장부이고 나도 장부인데, 내 어찌 저를 두려워하겠는가.” 하였다. 저분들이 이런 말을 한 것이 어찌 일부러 대단하고 고상한 담론을 해서 사람을 유인하여 선을 행하게 하려는 것이겠는가. 실로 이 성(性)이 똑같아 조금의 차이도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 나의 몸에 이미 성인과 같은 것이 있다면 천하에 귀히 여길 만하고 소중히 여길 만한 것이 무엇이 이보다 큰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오히려 포기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며 회복하지 않는단 말인가. 요즘 사람들은 조그만 보물을 가지고 있다가 어느 순간 잃어버리면 목이 쉬도록 한탄하며 있는 힘껏 구하여 기필코 찾으려고 하지 않는 이가 없다. 이는 하찮은 외물(外物)일 뿐이어서 잃어도 그다지 아까울 것이 없으며 구한다고 반드시 얻는다고 보장할 수 없는데도 이러하다. 하물며 위대한 성(性)으로서 내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야 어찌 조그만 보물 정도일 뿐이겠는가. 그런데도 매몰시키고 던져두면서도 회복할 것을 생각지 않으니, 어찌 미혹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회복할 방법을 찾는다면 다른 것이 없다. 그 단서는 학문을 익히는 데 있는데, 학문을 익힘에 있어 귀한 것은 아마도 힘써 실행하여 그 실제 내용을 실천하는 데 있지 않겠는가.
무릇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여 그 식견을 틔우지 않는다면 실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을 인지하여 힘써 실행하는 근본으로 삼을 수 없다. 그러나 비록 인지한다 하더라도 실행하는 데 힘쓰지 않는다면 밝힌 것이 또 나의 것이 아니어서 이런 경우에도 그 성을 회복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사(子思)의 말씀에 “덕성을 고양시키고 학문을 말미암는다.〔尊德性而道問學〕”라고 한 것이다. 대개 힘써 실행한다는 것은 덕성을 고양시킴을 말하는 것이고, 이치를 궁구한다는 것은 학문을 말미암는 일이다. 성인이 되고자 하면서 덕성을 고양시키지 않는다면 실로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없으며, 덕성을 고양시키고자 하면서 학문을 말미암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그 공효를 이룰 수 없으니, 이것이 군자가 학문을 익히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이다.
이제 제군들은 이미 그 일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단순히 명색만 사모하지 말고 반드시 그 실상에 힘쓸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장구(章句)에 매몰되지 말고 외고 말하는 데 주력하지 말고 반드시 마음으로 체득하고 몸으로 실천하여야 한다. 예컨대 ‘성의(誠意)’를 말할 경우에는 “나의 뜻이 성실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며, ‘정심(正心)’을 말할 경우에는 “나의 마음이 바른가, 그렇지 않은가?” 하며, ‘수신(修身)’을 말할 경우에는 “나의 몸이 닦였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고, ‘군신(君臣)’을 말할 경우에는 반드시 나의 의(義)를 극진히 하고, ‘부자(父子)’를 말할 경우에는 반드시 나의 친(親)을 극진히 하고, ‘부부(夫婦)’를 말할 경우에는 반드시 나의 별(別)을 극진히 하고, ‘장유(長幼)’와 ‘붕우(朋友)’를 말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 서(序)와 신(信)을 극진히 해야 한다. 그리하여 마음에 항상 “나의 행동이 성인에 미치지 못한다면 이는 나의 일을 아직도 끝내지 못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날마다 아직 환히 알지 못하는 것을 익히고 날마다 아직 잘하지 못하는 것을 힘써서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즐거울 것이고, 즐거우면 손이 춤추고 발이 구르는 것도 알지 못할 것이니 어찌 유쾌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고 단지 고인이 말한 구절을 가지고 잠깐 읊조리면서 말만 늘어놓을 뿐 결국 내 몸에 터득한 것이 없다면 또한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삼가 보건대 근래 제군들은 강학할 때 줄지어 이르고 끊임없이 모여들어 혹시라도 뒤질까봐 염려하니, 그렇다면 선을 향하는 데 있어 지성스럽다 할 수 있다. 다만 그 마음이 그 명색을 사모하여 그런 것인가? 아니면 그 실상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좋아해서인가? 그 명색을 사모하여 하는 자는 이욕이 유인한 것이고 속론(俗論)이 빼앗은 것이니, 또 어찌 결국 나태해지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 실상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좋아한다면 그것을 하는 데 필시 다른 사람이 권면하고 독책할 필요도 없이 기꺼이 스스로 분발하기를 마치 목마른 사람이 샘으로 달려가고 탐욕스런 장사치가 재물에 달려가듯 할 것이니, 어찌 중단하여 하다 말다 하면서 결국에 혹시라도 나태해질 것을 염려하겠는가.
제군들은 이 두 가지 중에 과연 어디에 해당되는가?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너는 군자다운 학자가 되어야지 소인 학자가 되지 말라.”라고 하였다. 명색을 좇으면 소인이 되고 실질에 힘쓰면 군자가 된다. 제군들은 군자가 되고 싶은가, 소인이 되고 싶은가? 내 장차 그 결말을 보고 확인하리라.
석실서원 강규〔石室書院講規〕 - 김원행
1. 강(講)하는 일은 원장(院長) - 공ㆍ경ㆍ대부 가운데 현덕(賢德)이 있고 선비들의 신망(信望)을 받는 자가 한다. - 이외에 또 따로 강장(講長)을 세워 함께 주관한다. - 또한 경술(經術)과 행의(行義)가 있어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자가 하며, 거처의 원근(遠近)이나 지위의 고하(高下)에 구애하지 말라. 단 전적으로 강학(講學)만 주관하고 나머지는 관여하지 않는다. -
1. 강안(講案)은 회중(會中) 사람들이 상의하여 기록해 작성한다. 뒤늦게 참여하고 싶은 자가 있다면 추가로 기입하도록 허락하고, 먼 고장 사람이든 주변 고을 사람이든 모두 구애하지 말라.
1. 강(講)할 책은 반드시 《소학(小學)》을 먼저하고, 다음은 《대학(大學)》, - 《혹문(或問)》을 겸한다. - 다음은 《논어(論語)》, 다음은 《맹자(孟子)》, 다음은 《중용(中庸)》, 다음은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으로 하고, 그런 뒤에 제반 경전(經傳)에 미치며, 한 바퀴 돌고 나서 다시 시작한다.
1. 매달 강회(講會)는 16일로 정한다. 만일 연고가 있어 날짜를 연기할 경우는 원임(院任)이 강회일 이전에 통문을 돌려 응강(應講)할 사람들에게 통지한다.
1. 강(講)을 할 때마다 인원수로 장수(章數)를 분배하고 나서 순서대로 찌〔栍〕를 만들어서 - ‘첫 번째〔第一〕’, ‘두 번째〔第二〕’와 같은 식이다. - 뽑은 것에 따라 나이순으로 응강하도록 한다. - 혹 장수가 적어 사람이 남으면 사람마다 다 읽을 필요 없이 장이 끝나면 그만둔다. -
1. 30세 이상은 임강(臨講)을 하고, 30세 이하는 배강(背講)을 하며, 배강을 하는 자도 주(註)는 임강을 한다. 아이들은 또한 그 우열을 고과(考課)하여 논하고 - 통(通)ㆍ약(略)ㆍ조(粗)ㆍ불(不)과 같은 따위이다. - 연로하여 응강하지 않는 자들도 동석하여 청강(聽講)은 할 수 있다. - 청강도 그냥 듣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반드시 문답하고 토론하는 내실(內實)이 있어야 바야흐로 청강이란 칭호에 걸맞게 되니, 자리에서 침묵하고 있으면 안 된다. - 먼 고장 사람이 마침 강회에 와서 동석하여 청강하기를 원하는 경우엔 허락한다. - 노소(老少)에 구애하지 않는다. - 응강해야 하는 자라 하더라도 만약 막 도착하여 미처 암송하고 익히지 못했다면 그 경우에도 일단 동석하여 청강하는 것은 허락한다.
1. 혹 연고가 있어 참석하지 못할 경우에는 다음 강할 때 반드시 전에 읽은 것을 이어 읽어 권(卷)을 마친 뒤에 비로소 다음 권을 읽어야지 건너뛰어 순서를 어지럽혀선 안 된다.
1. 추가로 강안에 등록된 자는 강하는 책을 또한 각기 원래 순서에 따라야 한다. 단 송독(誦讀)할 때 전편을 다 할 필요는 없고 편중에서 몇 장을 뽑아 시험한다.
1. 정한 편(篇)과 장(章)은 반드시 많지도 적지도 않게 적절히 해야 하되, 단 해가 짧으면 조금 적게 한다. 강이 다 끝나면 곧바로 서로 반복하여 토론해서 힘써 의미를 궁구한 뒤에 그친다.
1. 강한 뒤에는 또 직월(直月)로 하여금 〈백록동규(白鹿洞規)〉와 〈학교모범(學校模範)〉 등의 편을 읽도록 하되, 〈학교모범〉은 세 단락으로 나누어 - 편수(篇首)부터 ‘존심(存心)’까지가 한 단락이고, ‘사친(事親)’부터 ‘응거(應擧)’까지가 한 단락이고, ‘수의(守義)’부터 편말(篇末)까지가 한 단락이다. - 강회 때마다 순서대로 읽는다. - 서원에 제향이 있는 달에는 또 반드시 묘정비문(廟庭碑文)을 읽어서 존모(尊慕)하고 분발하는 뜻을 일으킨다. - 또 남는 시간이 있으면 비록 그날 강한 부분이 아니더라도 의심나는 대로 질의하도록 허락하되, 단 이단(異端) 잡서(雜書)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말라.
1. 제생(諸生) 가운데 문장에 능하고 기술(記述)을 잘 하는 자 한 사람을 직월로 삼되 달마다 교체한다. 매번의 강회에서 원장과 강장(講長)이 모두 참석하지 않아 제생들끼리 서로 문답하되 중대한 의리에 관련되는 문제가 있으면 직월로 하여금 기록하여 한 통을 작성해서 원장과 강장에게 보내 질의하도록 하고, 답해준 내용은 아울러 서원에 보관해둔다.
1. 연고가 있어 강회에 참석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달에 강독한 편(篇) 가운데 의심나는 뜻을 기록하여 원장과 강장에게 올린다. - 또한 답을 해주면 그 사람에게 보이고 난 뒤 서원에 보관한다. - 비록 강회에 참석한 자라 하더라도 먼저 의심나는 문목을 마련했다가 강회가 끝나거든 회중에게 질의하도록 허락한다.
1. 강안에 등록된 자가 혹 강회에 참석하지 못할 경우에는 단자(單子)를 올린다. - 만약 2, 30리 밖에 있어 형편상 사람을 보내 단자를 올리기 어려운 경우에는 하지 않는다. - 모두가 부득이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 경우가 아닌데도 핑계 대며 참석하지 않으면 회중이 면대하여 경고하고, 재차 참석하지 않으면 좌석에서 내친다. - 고치겠다고 한 뒤에 여럿이 꾸짖고 돌아오게 한다. - 만약 강학(講學)에 뜻이 없어 전혀 강회에 나오지 않는 자라면 강안에서 빼버린다.
1. 강회 때마다 강회에 참석한 사람의 성명을 죽 기록하여 하나는 서원에 비치하고 하나는 원장과 강장에게 보낸다. - 원장과 강장이 만약 강회에 참석할 경우엔 그냥 둔다. -
강의를 첨부함〔講儀附〕
강회(講會)하는 날에는 미리 한 사람을 집례(執禮)로 정하면 - 당(堂)에 올라가면 자리는 직월(直月)의 아래이다. - 강의(講儀)를 가지고 돕는다. 이른 아침에 재임(齋任) - 장의(掌議)ㆍ유사(有司)ㆍ색장(色掌)ㆍ직월이 모두 해당된다. - 이 재복(齋僕)을 시켜 먼저 강당에 자리를 펴고 북쪽 벽 아래에 서안(書案) 하나를 설치하고, 그 위에는 강독해야 할 책을, 서안 왼편에는 찌통〔栍筒〕을 두도록 한다. 원장(院長) 이하 제생(諸生) - 제생은 곧 재임과 응강할 자와 청강할 자의 통칭이다. - 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원에 당도하면, 원장과 강장은 우선 먼저 강당 동쪽 협실(夾室)로 들어가고 제생은 동재(東齋)와 서재(書齋)로 들어갔다가, 다 모이면 재복이 동쪽 협실 및 동재와 서재에 두루 알린다.
원장과 강장이 제생을 거느리고 사당에 배알하되, 원장이 앞줄이고 강장이 그 다음이며, - 강장이 원장과 동등한 달존(達尊)일 경우에는 그 위치는 원장의 오른쪽이며, 강당에서도 그 서쪽편에 동향(同向)으로 자리하며, 오르내리거나 절하고 읍하는 것도 똑같이 원장에 준한다. - 제생은 그 다음 줄에 나이순으로 서서 재배(再拜)한 뒤에 물러난다. - 제생 중에 혹 이미 서원에 머무르면서 앞서 새벽에 참알을 했던 자는 하지 않는다. -
원장과 강장이 나가 강당에 이르면 차례로 동쪽 계단으로 먼저 올라가고 제생은 서쪽 계단으로 올라간다. - 만약 서원의 유생이 아니지만 청강을 위해 이른 자가 있으면, 원장은 그와 대등하게 예를 행하되 양쪽 계단에서 읍하고 사양한다. 원장이 연고가 있어 강장이 혼자 주관하면 서원의 유생이라 할지라도 실로 응강할 대열에 있지 않은 자는 그와 대등한 예로 읍하고 올라가며, 여러 재임 역시 강장을 따라 동쪽 계단을 이용한다. -
원장은 북쪽 벽 아래로 나아가 중앙에서 남향하여 서고 - 곧 서안(書案)의 북쪽이다. - 강장은 서쪽 벽 아래로 나아가 동향하여 서고 - 원장이 없으면 강장이 북벽의 자리를 차지한다. - 제생은 모두 남쪽으로 가서 북향하여 서되 서쪽을 상위(上位)로 한다. 강장이 먼저 원장과 서로 읍(揖)을 하고 나서 제생이 원장에게 재배(再拜)를 하면 원장이 답례로 읍을 한다. 그 중 응강할 자가 또 서향하여 강장에게 재배를 하면 강장이 답례로 일배(一拜)를 한다. - 만일 원장과 대등한 예를 행해야 할 자가 있으면 북향하여 서로 읍을 하고, 강장과 대등한 예를 행해야 할 자라면 마찬가지로 서향하여 서로 읍을 하며, 재임 가운데 응강하지 않을 자도 강장에 대해서는 그 예가 마찬가지이다. 이는 의당 제생과 응강할 자들이 예를 행하기 전에 해야 한다. ○강장이 만약 북쪽 벽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면 재임 가운데 응강하지 않을 자는 동쪽 벽 아래로 나아가 서향하여 서고, 기타 청강자는 서쪽 벽 아래 나아가 동향하여 서되, 모두 북쪽을 상위로 하고서 강장과 위의 의식대로 예를 행한다. - 제생이 또 동서로 나누어서 - 연장자가 서쪽에 있고 연소자는 동쪽에 있되 모두 북쪽을 상위로 한다. - 자기들끼리 서로 읍을 하고 나면, 원장과 강장이 모두 자리에 앉고, 여러 재임은 동쪽 벽 아래 앉아 서향하되 북쪽을 상위로 한다. - 강장과 정면으로 마주앉지 말고 약간 남쪽으로 가까이 앉는다. - 청강하는 자는 서쪽 벽 아래에 앉아 동향하되 북쪽을 상위로 하고 - 여러 재임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 응강하는 자는 남쪽에서 한 줄로 앉되 서쪽을 상위로 하며, 장소가 좁으면 두 줄로 앉고, 더 좁으면 연장자는 청강하는 자의 아래쪽에 앉되 북쪽을 상위로 하고 청강자와 붙어서 연속으로 앉지 않으며, 연소자는 여러 재임의 아래쪽에 앉되 북쪽을 상위로 하고, 마찬가지로 재임과 붙어서 연속으로 앉지 않는다. 그 다음은 남쪽에 앉되 줄은 모두 두 줄로 앉는다. - 만약 원장과 강장이 모두 강에 임할 수 없는 경우에는 여러 재임은 동쪽 계단으로 올라오고 그 나머지 제생은 서쪽 계단을 통해 서로 읍하면서 올라와 그 북쪽 벽은 비워두고 그 아래 서안을 놓고서 우선 연장자 한 사람이 강하는 내용을 살펴본다. -
재복으로 하여금 종이와 붓을 가지고 제생 앞에 나아가 도기(到記)를 받아 - 이것도 나이순으로 한다. - 직월 앞에 펼쳐 놓도록 한다.
직월이 서안 앞에 나아가 읍하고 찌통의 왼편에 앉아 찌를 하나 뽑아 강독해야 할 자에게 보여준다.
강독해야 할 자는 서안 앞에 나아가 읍하고 앉아 강독하는 책을 읽는다. - 배강과 임강은 의당 나이를 보아 강규(講規)에 의거하여 한다. - 읽기를 마치고는 일어나 읍하고 자리로 돌아간다. - 매 순번마다 다 그렇게 한다. -
찌를 다 쓰면 직월이 본래 자리에 찌통을 두고 다시 서안 앞에 나아가 읍하고는 자리로 돌아간다.
마침내 의심스런 뜻을 서로 문답하되 각자 소견을 다 발표하고 그친다.
직월이 다시 서안 앞에 나아가 읍하고 앉아 〈백록동규〉나 〈학교모범〉 등의 편을 소리 높여 읽는다. - 서원의 제향이 있는 달에는 또 반드시 묘정비문을 읽는다. - 끝낸 뒤 일어나 읍하고 자리로 돌아가면 비로소 파한다.
강장과 원장이 서로 읍을 하고, 제생이 원장에게 재배하면 원장이 답으로 읍을 한다. 응강한 자들이 또 서향을 하여 강장에게 재배하면, 강장은 답으로 일배(一拜)를 한다. - 원장ㆍ강장과 대등한 예를 행하는 자는 처음처럼 서로 읍을 한다. 이 또한 재생과 응강한 자들이 예를 행하기 전에 해야 한다. ○강장이 홀로 주관할 경우엔 제생과 절하고 읍하는 위치와 차례 역시 모두 처음과 같다. -
원장과 강장이 차례로 동쪽 계단으로 내려가면 제생도 서쪽 계단으로 내려가 - 강장이 홀로 주관한 경우에는 여러 재임도 처음 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동쪽 계단을 이용한다. - 각각 물러난다.
재복이 이에 자리와 서안을 철거한다.
원장과 강장이 만일 강에 임할 수 없는 경우에는 직월이 회안(會案)을 작성하여 재복을 시켜 갖다드리게 한다. - 또 제생의 문목(問目)이 있으면, 이것도 첨부하여 갖다드린다. -
石室書院 배향자 명단 | |||||
1656 년 효종 7 년 건립- 1663 년 현종 4 년 石室祠로 편액 사액 서원-1672년 현종 13 년 묘정비 건립. 송시열 지음. 김수증 글씨 1868 년 고종 5 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1930년대 묘정비 이전 | |||||
이름 |
생몰 연대 |
아호 |
본관 |
배향 시일 |
비고 |
金尙憲 김상헌 |
1570-1652 |
청음(淸陰), 시호는 문정(文正). |
안동 |
1656년 |
西磵老人.·석실산인(石室山人). 청서파. 주전론. |
金尙容 김상용 |
1561-1637 |
호는 仙源. 楓溪 |
안동 |
1656년 |
순절(殉節)斥和派 金尙憲의 형이다 |
金壽恒 김수항 |
1629-1689 |
문곡(文谷) |
안동 |
1697년 |
1886년(고종23)에는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진도의 봉암사, 영암의 녹동서원, 영평의 옥병서원 등에 제향, 전주의 호산사에 추가 제향 |
閔鼎重 민정중 |
1628-1692 |
노봉(老峯) |
여흥 |
1697년 |
김창협의 사돈. 송시열 문인 |
李端相 이단상 |
1628-1669 |
정관재(靜觀齋)·서호(西湖) |
연안 |
1697년 |
김창협 장인 |
金昌協 김창협 |
1651-1708 |
洞陰居士, 三洲, 農巖 |
안동 |
1710년 1713 년 설. |
李端相, 趙聖期의 門人. 老論 洛論의 종장 |
金昌翕 김창흡 |
1653-1722 |
洛誦子, 三淵 |
안동 |
1857년 5 월 10일 |
李端相의 문인 |
金元行 김원행 |
1702-1772 |
渼湖, 雲樓 |
안동 |
1857년 5 월 10일 |
老論 洛論을 대표하는 山林學者. 석실서원의 강학활동 |
金履安 김이안 |
1722-1791 |
三山齋 |
안동 |
1857년 5 월 10일 |
正祖代의 老論 山林學者 . 미호의 아들 |
金昌集 김창집 |
1648-1722 |
夢窩 |
안동 |
1857 5월 23일 |
壬寅獄事로 죽은 老論 四大臣의 한 사람 |
金祖淳 김조순 |
1765-1832 |
풍고(楓皐) |
안동 |
1857년11 월 |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아버지. 김려(金鑢), 이만수(李晩秀), 심상규(沈象奎) 등과 교유 |
|
|
석실서원터 가는 길
석실마을과 서원(이글은 비목이라는 까페의 기행문을 퍼온것입니다.)
2012년 4월 17일은 날씨가 아주 좋았다. 이날 우리 춘초몽회원 여럿이 모여 역사문화유적탐방 길을 나섰다. 와부읍에 있는 석실마을과 서원, 김상헌, 김상용, 조말생 묘 탐방이다.
먼저 석실마을 입구에 내려 김상용선생 묘에 참배를 하고 마을 안쪽 송시열 선생의 글씨 <醉石>비를 둘러보고 김상헌선생 묘에 참배했다.
석실마을은 16세기 중엽 이후 안동 김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되었다. 원래 안동에 세거하던 김씨는 김번(金璠)이 과거에 합격하는 것을 계기로 서울의 북악산 아래로 이주하였다. 김번이 죽자 석실산에 묘소를 마련함으로써 이곳이 안동 김씨의 묘산(墓山)이 되었고 이후 후손들이 이곳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이곳은 또한 왕릉 후보지가 되었으나 안동김씨의 세도가 워낙 강해서 능을 쓰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들이 이곳에 살게 되는 계기는 혼인관계에서 엿볼 수 있다. 김번은 세조․성종 연간에 연이어 공신을 배출한 훈구계열의 남양홍씨와 결혼하였다. 즉 홍걸(洪傑)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는데 남양홍씨들은 일찍부터 와부면 일대에 묘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석실마을을 삶의 터전으로 삼으면서 김번의 후손들은 서인․노론세력의 가장 강력한 중심세력으로 정계에서 활동하였고 이후 석실서원의 창건과 강학을 주도하면서 경화(京華)학계의 학풍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김번의 묏자리는 명당이었다고 한다. 이 명당을 둘러싸고 친정아버지의 묏자리까지 빼앗은 풍수에 얽힌 또 하나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안동 김씨가 와부 석실에 입향하기 전에는 이 일대의 산은 모두 남양홍씨의 선산이었다. 그 때 남양홍씨 가문에서 딸을 안동김씨 가문으로 출가시켜 두 집안이 사돈지간이 되었다. 안동김씨 가문으로 출가한 홍씨는 아들 하나를 낳고 남편 김번과 사별을 하였다. 이때 친정아버지가 사망하자 석실마을로 갔다. 홍씨 부인의 친정에서는 지관을 시켜 묏자리를 보고 광중(壙中)을 파두었는데, 그 자리가 옥호저수형, 즉 옥항아리에 물을 담은 형국으로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이 말을 들은 홍씨 부인이 밤새도록 광중에 물을 퍼다 부었고 결국 친정아버지의 시신을 안장시키지 못하게 하였다. 3년 후 홍씨 부인은 사별한 남편 김번을 옥호저수형의 땅에 이장시켰는데 그 후로 안동 김씨일가는 고관대작과 문장, 충신이 수없이 나왔다. 이 자리는 금관자, 옥관자가 3말씩 나오는 자리라고 한다.
또 하나의 풍수에 관한 전설도 있다. 석실마을에는 우리나라에서 팔대 명당의 하나라는‘옥호저수형’의 명당자리가 있었다. 즉 옥병에 물을 담은 형국으로 덕소 쪽으로 병입구 모양을, 정상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율석리 쪽에서 봉우리를 맺으면서 병마개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병마개 중심에 안동김씨 김번(金璠)의 묘소가 있다.
인조 때의 명신인 김상용·김상헌의 5대조 할아버지가 가난하게 살다가 돌아가셨단다. 그의 아우는 당시 양산 통도사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던 백운거사였는데 형님의 부음을 전해 듣고 천릿길을 단숨에 달려왔다. 그러나 백운거사가 덕소의 형님 집에 왔을 때는 이미 상을 모두 치른 뒤였고, 형수는 어린 아들 하나만을 데리고 그 방앗간 집에서 삯방아를 찧고 있었다. 풍수지리에 밝은 백운거사는 무심코 이 방앗간 자리가 천하의 명당 정혈임을 알고, 형수에게 말했다. "형수님, 이곳은 비록 방앗간이지만 천하의 음택 명당으로 옥호리병에 물이 담긴 형상의 옥호저수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버님의 묘를 이장하시어 후손의 발복을 기원·도모하십시다." 백운거사는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여 그 발복이 자신에게까지 미칠 것을 고려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방앗간을 당장 그만두어야 하니 형수로서도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이제 백운거사의 형수는 자신의 지아비, 즉 백운거사의 형님 묏자리로 쓴다면 그렇게 할 수 있겠노라고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는 형님의 시신을 이곳에 옮겨 묻고는 어린 조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영원히 중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너는 지금 비록 매우 가난하지만 자손이 영달하여 출세할 것이다. 앞으로 너의 자손 중에서 금관자(金冠子)·옥관자(玉冠子)가 쏟아져 나올 것이니 모두가 네 아버지 묫터의 발복임을 꿈엔들 잊지 말아라." 신기하게도 백운거사의 예언은 그대로 맞아 떨어져, 인조 이후 안동김씨는 금관자·옥관자가 쏟아졌다. 산 구릉이 멈춘 방앗간 양택에 묘를 쓰고 발복을 하니 흔하지 않는 사례의 하나이다. 모두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지금 이곳에는 취석이란 비석이 있다.
‘취석(醉石)’은 우암 송시열이 도산정사를 건립할 당시 김수증에게 준 글로, 김수증이 이것을 4년 뒤인 1672년 지금의 비석 앞면에 각자한 것이다.
‘취석(醉石)’은 원래 출전이 도연명의 고사에서 온 것으로 중국의 ≪여산기≫에 “도연명이 거처하던 율리에 큰 돌이 있는데, 연명은 술에 취하면 항상 그 돌에 올라 잠을 잤다. 이로 인해 취석이라 이름 붙였다.”는 고사가 있다.
우암 송시열이 이 글씨를 써준 데는 이유가 있다. 청음 김상헌이 청에 볼모로 붙잡혀 있을 때 맹영광이 김상헌의 의로운 행동을 흠모하여 도연명의 채국도를 보냈으며 이를 도연명의 진영과 함께 도산정사에 안치해 두었다. 그런데 도산정사가 위치한 곳의 지명이‘石室’이다. 바위로 둘러싸인 형상임을 말해준다.
이와 같은 곳에 도연명의 고사가 담긴‘취석(醉石)’두글자를 새겨두는 것도 격에 맞는 것 같다. 이에 김수증은 우암 송시열의 뜻을 헤아려 비석 앞면에 醉石을 각자하고, 뒷면에 그 유래를 써서 각자하였다.
우리는 다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수석동으로 건너와 조말생선생의 묘를 참배했다.
구리 토평 인터체인지에서 한강을 따라 춘천 가는 길에 옛 평구역 못 미처 미음나루가 있는 수석동에는 석실서원(石室書院)이 있었다. 지금은 빈터에 최근에 세운 조그만‘석실서원지’란 표석하나 있을 뿐, 이곳이 충청도 화양서원과 더불어 노론의 튼실한 근거지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표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길가의 숱한 음식점과 조말생묘 안내 표지판밖에, 석실서원을 알려주는 표지판은 없다. 단지 석실마을이란 버스정류장 안내가 끝이다. 겸재 정선의 그림이나 당대 석학들의 일기와 시에서 자주 등장하던 미호(渼湖)와 그 석실이 바로 이곳이고, 석실을 빼고 조선후기 사상사를 이야기 할 수 없음에도 빈터에 230여년의 나이를 먹은 큰 느티나무 몇 그루가 전부이다.
석실서원은 효종 때 수석동에 건립되어 경기지역을 대표하는 기호학파(畿湖學派) 사림들의 학풍을 빛낸 사립 교육기관이었다. 17세기 중엽 서인학파의 한 흐름을 대표하는 이단상이 후진을 양성하던 곳으로서, 이이를 비롯하는 기호사림의 학맥을 크게 발전시켰다.
처음에는 사우(祠宇)를 창건하고 김상용·김상헌의 위패를 모셨다. 현종 때 서원으로 승격했다가 숙종 때 김수항·민정중·이단상, 김창협을 추가 배향했다가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렸고 석실 마을에 옮겨다 놓은‘석실서원 묘정비’가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를 주장했던 청음 김상헌과 강화 남문에서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결한 선원 김상용 형제를 모신 석실서원은 이후 김창협·김창흡·김원행으로 이어지는 안동 김문의 정치 사상적 근거지였다. 김원행이 석실서원 아래쪽 지금은 음식점이 있는 어간에‘삼주삼산각’이라는 서재에서 담헌 홍대용, 이재 황윤석 등을 제접할 때 석실서원은 가장 빛이 나는 때였다고 본다. 석실의 영화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끝이 났는데 석실서원의 훼철은 대원군의 목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욱이 일제 강점기 금곡에 있던 조말생 묘역이 홍유릉이 조성됨에 따라 이곳으로 이장되면서 석실서원 터는 더욱 궁색한 것이 되어 결국 잊혀 버렸다. 이때 조말생신도비를 굴려굴려 이곳까지 옮기는데 3,4개월 걸렸다 한다. 숙종·영조·정조시대를 조선후기 르네상스라 일컬으며 소위‘진경(眞景)시대’라 운위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동양 3국은 각각 전쟁복구기를 거쳐 200여 년간의 평화 시기를 열어 자문화에 대한 재발견을 하고 있었다. 연경을 다녀온 노론의 젊은 층은 북벌론의 허구성을 인식하고 청나라에서 배워야 한다는 북학론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북벌과 북학사상이 개화사상으로 연결되고 19세기 조선정국을 주도한 남공철과 김정희에 이르러 북학론이 실천적인 학술체계로 정립되지 못하고 북학을 실천으로 옮긴 시기를 살았던 추사 김정희가 청나라의 완원을 따라 배우고자 한다는 의미에서 호를 완당(玩堂)으로 바꿀 때, 혹은 하와이를 지나며 아름다운 섬에 반해 호를 도산(島山)으로 했던 안창호의 시각에서 사상적 유사성과 위약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지금의 세계화를 노래 부르며 영어를 공용화해야 한다는 자들의 생각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석실서원은 존명사대(尊明事大)와 반청(反淸)의 기치를 표방함으로써 뒷날 북벌론(北伐論)의 이념적 표상으로 길이 추앙의 대상이 되었던 김상헌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었다. 이곳은 그가 만년에 우거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숙종 21년에 양주 도봉서원(道峰書院)에 우암 송시열을 제향하고 숙종 23년에 석실서원에 김수항․이단상․민정중 3인을 제향하였다. 이에 도봉서원과 석실서원은 노론의 지역적 기반으로 강학(講學)이 시작되었다. 이때 경화학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18세기 이후 만개한 진경문화(眞景文化)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석실에서 교유한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 등이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다. 후에 석실서원의 강회는 북학(北學)의 형태로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안동김씨 일문에 의한 세도정치, 즉 김조순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해가던 시기에 석실서원에 안동김씨의 인물 5명이 추배됨으로써 강학으로 경화학계를 주도하던 앞 시기의 선진성은 사라지고 일문의 가묘로 변질되었다. 석실서원의 위치는 겸재의 그림에서 추정해 볼 때, 현재 조말생의 신도비가 있는 근처로 그 옛날 석실서원의 터였음을 알리는 화강암 비석만이 덩그러니 서 있을 따름 흔적조차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조선후기 그토록 명성과 영화를 누리던 석실에서 한 참 정도의 거리에 마재가 있다. 마재에는 다산 정약용 생가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실학의 집대성자로 일컬어지는 다산이 지척에 있는 석실을 운위한 적이 없고, 역시 석실을 드나들던 그들도 다산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후기 조선의 고통스런 단면이었다. 독점된 권력의 우악스러움과 소용되지 못한 채 찻잔 속의 폭풍으로 끝나 버린 개혁의 꿈.
국가에서는 처음부터 서원의 내부 문제에 대하여는 스스로가 처리하도록 자율권을 부여하였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한 까닭은 서원이 차차 당쟁의 근거지가 되었고 국가의 재정을 축내는 데서였다. 서원이 소유한 토지를 부치는 소작 민들에게 소작료를 과하게 부담시키고 농사일이 바쁠 때에도 과중한 노역을 부과하였다. 국가에서 노역을 금하여도 무시하기 일쑤였고 원생, 토지, 노비, 그리고 수입을 처리하는 기능으로 백성들의 원망을 많이 샀기 때문이다. 또 서원의 특권이 관료들은 자신과 같은 서원을 나온 관료들끼리 뭉치는 경향이 있었다. 이렇게 뭉치고 뭉치다 보니, 관직에 누군가를 추천하게 되더라도 동문을 추천하게 되고, 다른 쪽을 밀어내야 자신들이 관직에 오를 수 있으니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 특권으로는 서원에 다니는 평민은 군대를 갈 의무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과 서원 소유의 토지에는 세금을 매기지 않는 것이었다. 법적으로는 양반들도 평민이므로 군대에 갈 의무가 있으나 서원에 이들의 이름이 오르면 군대에 갈 의무가 없어졌다. 이를 노리고 서원에 적을 올리려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으며, 이러한 수요에 따라 서원의 숫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당시 전국에 난립되어 있는 600여개소의 서원을 철폐하고 기존에 있던 주요 서원 47개소만 남겼다. 이는 서원에 딸린 전지와 노비를 줄여 양반층의 경제력과 그 세력기반을 약화시켜 국가의 재정적 기초를 확보하고 중앙집권의 정치형태를 재확립하며 백성에게도 이익을 주기 위한 획기적인 조치였다. 그리고 실추된 왕실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그분들이 살았던 삶과 시대의 고민을 같이 느껴본 시간들이었다. 世道정치가 勢道정치가 되는 것을 막으려 했던 대원군도 나중엔 그 역시 勢道 정치나 하다가 남양주의 같은 하늘에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