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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붓다의 뗏목 원문보기 글쓴이: 뗏목
[1] LOOKING AT BUDD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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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다사-
If we open any recent book on the origins of religion, we find that there is one point on which all authors are in agreement. They all agree in saying that religion arose in the world out of fear. Primitive forest-dwelling man feared thunder and lightning, darkness and storms, and various things about him that he was unable to understand or control. His method of avoiding the danger he saw in these phenomena was to demonstrate either humility and submission or homage and reverence, depending on which he felt was most appropriate. Later, as man's knowledge and understanding developed, this fear of the forces of nature changed into a fear of phenomena more difficult to apprehend. Religions based on deference to objects of fear such as natural phenomena, spirits and celestial beings, came to be looked down upon as unreasonable and ridiculous. And then man's fear became still more refined into a fear of suffering, suffering of the sort that cannot be alleviated by any material means. He came to fear the suffering inherent in birth, ageing, pain and death, the disappointment and hopelessness which arise out of desire, anger and stupidity, which no amount of power or wealth can relieve.
종교의 기원에 관한 최근의 책들을 펼쳐보면 모든 저자가 동의하는 한 가지 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저자는 두려움 때문에 세상에 종교가 생겨났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원시 숲속 거주인은 천둥과 번개, 어둠과 폭풍 등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조절할 수 없는 주위의 여러가지 것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원시인이 이런 현상을 보고 위험을 피하는 방법은 자신이 느끼기에 가장 적절한 것에 따라 겸손과 복종을 나타내거나 경의와 존경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사람의 지식과 이해가 높아짐에 따라 자연의 힘에 대한 이런 두려움은 이해하기 더욱 어려운 현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자연현상, 정령 및 천신과 같은 두려움의 대상에 대한 복종(또는 경의)에 기초한 종교는 비이성적이고 우스꽝스런 것으로 내려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두려움은 이제 괴로움, 즉 어떠한 물질적 수단에 의해서도 경감될 수 없는 종류의 괴로움에 대한 두려움으로 더욱 미세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탄생, 늙음, 병듬 및 죽음에 내재하는 고유한 괴로움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갈망(탐욕), 미워함(성냄), 미혹(무지)에서 생기는 실망과 절망이며
어떠한 권력이나 부로서도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Long ago in India, a country well provided with thinkers and investigators, intelligent people dispensed with all paying of homage to supernatural beings and started seeking instead the means of conquering birth, ageing, pain and death, the means of eliminating greed, hatred and delusion. Out of this search arose Buddhism, a higher religion based on insight, a means of conquering birth, ageing, pain and death, a method for destroying the mental defilements. Buddhism has its origins in fear of this last kind, just as do all religions based on intelligence The Buddha discovered how to conquer absolutely what man fears: he discovered a practical method, now called Buddhism for eliminating suffering.
옛날 인도에서는 초자연적 존재를 숭배하는 대신에, 탄생, 늙음, 병듬 및 죽음을 정복하는 수단 , 즉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을 제거하는 수단을 찾는 사상가, 탐구자, 지성인들이 융성하였습니다.
이런 탐구 상황에서 불교가 생겼습니다.
불교는 탄생, 늙음, 병듬 및 죽음을 정복하는 수단이고,
정신적 오염원[유아견, 탐진치, 불선법, 5취온, 집성제]을 없애는 방법인 통찰에 기초하고 있는 고등 종교입니다.
불교는 모든 종교가 지성에 기초하고 있는 것과 같이 마지막 종류의 두려움(생노병사의 괴로움에 대한 두려움)에 그 기원이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을 완전히 극복하는 방법을 발견하셨습니다.
붓다께서는 불교라고 하는 실제적인(실천적인) 방법,
즉 괴로움을 제거하는 방법[8정도, 도성제, 5취온(집성제) 소멸]을 발견하셨습니다.
"Buddhism" means "the Teaching of the Enlightened One." A Buddha is an enlightened individual, one who knows the truth about all things, one who knows just what is what, and so is capable of behaving appropriately with respect to all things. Buddhism is a religion based on intelligence, science and knowledge, whose purpose is the destruction of suffering and the source of suffering. All paying of homage to sacred objects by means of performing rites and rituals, making offerings or praying is not Buddhism. The Buddha rejected all this as foolish, ridiculous and unsound. He also rejected the celestial beings, then considered by certain groups to be the creator of things, and the deities supposed to dwell, one in each star in the sky. Thus we find that the Buddha made such statements as these:
'불교'는 '깨달은 자(붓다)의 가르침' 을 의미합니다.
붓다는 모든 사물에 대한 진리를 알고 본질이 무엇인지 (사물의 존재방식을) 바로 알아,
모든 사물에 대해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깨달은 자'입니다.
불교는 지성과 과학과 지식에 바탕을 둔 종교이며,
그 목적은 괴로움(둑카)[5취온고, 고성제]과
괴로움(둑카)의 원인[5취온, 집성제]을 제거하는 것
[5취온고(고성제) 소멸(멸성제)과 5취온(집성제) 소멸(도성제)]입니다.
의례의식으로 신성한 대상에 대해 경배하고 헌납하고 기원하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붓다께서는 이 모든 것을 어리석고 우스꽝스럽고 불합리한 것으로 간주하고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붓다께서는 어떤 공동체들에 의해 사물의 창조주로 간주되는 천상의 존재나,
하늘에 떠 있는 각 별마다 한 분씩 거주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신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대해 붓다께서 다음과 같은 여러 말씀을 하셨습니다.
"Knowledge, skill and ability are conducive to success and benefit and are auspicious omens, good in their own right regardless of the movements of the heavenly bodies. With the benefits gained from these qualities, one will completely outstrip those foolish people who just sit making their astrological calculations."
And: "If the water in rivers (such as the Ganges) could really wash away sins and suffering, then the turtles, crabs, fish and shellfish living in those sacred rivers ought by now to be freed of their sins and sufferings too."
And: "If a man could eliminate suffering by making offerings, paying homage and praying, there would be no one subject to suffering left in the world, because anyone at all can pay homage and pray. But since people are still subject to suffering while in the very act of making obeisances, paying homage and performing rites, this is clearly not the way to gain liberation."
"지식, 기술과 능력은 성공과 이득에 도움이 되고,
천상체의 움직임과는 무관하게 길조(상서로운 조짐)이며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이런 자질을 통해
이득을 얻는 자는 점을 치며 운명을 가늠하면서 앉아 있는 바보같은 자보다 훨씬 낫다."
그리고, "(갠지스강 같은 신성한) 강의 물이 정말로 죄와 고(괴로움)를 씻어 없앨 수 있다면,
그 신성한 강 속에 사는 자라(거북류), 가재(게류), 물고기와 조개도
지금쯤 이미 죄와 고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또한, "헌납하고 경배하고 기원함에 의해 고(괴로움)를 제거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는 괴로움을 받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경배하고 기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열심히 경배하고 숭배하고 기원하는 의례의식을 행하면서도 여전히 고에 빠져 있으니,
이런 행위는 분명히 해탈하는 방법이 아니다."
To attain liberation, we first have to examine things closely in order to come to know and understand their true nature. Then we have to behave in a way appropriate to that true nature. This is the Buddhist teaching; this we must know and bear in mind. Buddhism has nothing to do with prostrating oneself and deferring to awesome things. It sets no store by rites and ceremonies such as making libations of holy water, or any externals whatsoever, spirits and celestial being included. On the contrary, it depends on reason and insight. Buddhism does not demand conjecture or supposition; it demands that we act in accordance with what our own insight reveals and not take anyone else's word for anything. If someone comes and tells us something, we must not believe him without question. We must listen to his statement and examine it. Then if we find it reasonable, we may accept it provisionally and set about trying to verify it for ourselves. This is a key feature of Buddhism, which distinguishes it sharply from other world religions.
해탈하려면 우선 사물(모든 존재)을 세밀히 관찰하여
'사물의 진정한 성품(사물의 존재방식)'을 알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물의 진정한 성품(사물의 존재방식)에 적절하게 처신해야 합니다.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을 알고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불교는 경외심을 일으키는 사물에 대해
엎드려 절하고 복종하는(맹종하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불교는 성수(신성한 물)를 붓는 의식이나,
영혼이나 천상존재를 포함한 외적존재에 대한 의례의식을 중시하지도 않습니다.
이와 반대로, 불교는 이성과 통찰에 의존합니다.
불교는 억측이나 추측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취하지 말고
자신이 통찰하여 본 것에 따라 행동하기를 요구합니다.
누군가 와서 어떤 것에 대해 말한다고 의심없이 믿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의 말을 잘 듣고 잘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알면 잠정적으로 받아들여
스스로 증명하는 노력을 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주요 특성이고 다른 종교와 뚜렷이 구별되는 점입니다.
Now a religion is a many-sided thing. Seen from one angle it has a certain appearance; seen from another angle, it has another. Many people look at religion from the wrong angle, and Buddhism is no exception. Different individuals looking at Buddhism with different mental attitudes are bound to get different views of it. Because each of us naturally has confidence in his own opinions, the truth for each of us coincides with our own particular understanding and point of view. Consequently, "the Truth" is not quite the same thing for different people. They all penetrate questions to varying depth by varying methods, and with varying degrees of intelligence. A person does not recognize as true, according to his own ideas of the Truth, anything that lies beyond his own intelligence, knowledge and understanding. And even though he may outwardly go along with other people's ideas as to what is the truth, he knows in himself that it is not the truth as he himself sees it. Each person's conception of the truth may change and develop with the day by day increase in his degree of intelligence, knowledge and understanding, until such time as he arrives at the ultimate truth; and each of us has different ways of examining and testing before believing. So if Buddhism is viewed with differing degrees of intelligence, differing pictures of it will be seen, simply because it can be viewed from an aspect.
요즈음 종교는 많은 측면이 있습니다.
어떤 한 각도에서 보면 어떤 모양이고,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다른 모양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를 그릇된 각도에서 바라봅니다.
불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각기 다른 정신적 태도로 불교를 바라보기 때문에 각기 다른 견해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각 개인은 자연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확신하므로
각 개인의 진리는 자신의 특별한 이해와 관점에 따릅니다.
따라서 개개인이 생각하는 '진리'는 결코 동일하지 않습니다.
제각기 다양한 깊이, 다양한 방법, 다양한 지적 수준으로 문제들을 판단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진리에 대한 견해에 따를 뿐,
자신의 지성과 지식과 이해를 초월하는 영역의 것에 대해서는 진리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는 다른 사람의 견해를 진리라고 인정하는 척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보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개개인의 개념은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할 때까지 지성과 지식과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변화하고 발전하게 됩니다.
개개인은 믿기 전에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검토하고 시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서로 다른 지성으로 보게 되면 다양하게 보일 것입니다.
단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다르게 보입니다.
As we have said, Buddhism is a practical method for liberating oneself from suffering by means of coming to realize as did the Buddha himself, the true nature of things. Now any religious text is bound to contain material which later people have found occasion to add to, and our Tipitaka is no exception. People in later ages have added sections based on then current ideas, either in order to boost people's confidence or out of excessive religious zeal. Regrettably even the rites and rituals which have developed and become mixed in with the religion are now accepted and recognized as Buddhism proper. Ceremonies, such as setting up trays of sweets and fruit as offerings to the "soul" of the Buddha in the same way as alms food is offered to a monk just do not fit in with Buddhist principles. Yet some groups consider this to be genuine Buddhist practice, teaching it as such and keeping to it very strictly.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붓다께서 하셨던 것처럼 불교는
'사물의 진정한 성품(사물의 존재방식)'을 깨달음으로써
고통(괴로움)에서 해방되는 실천적 수단입니다.
현재 종교 경전은 후세 사람들이 이해하여 덧붙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을 수 밖에 없으며,
불교의 삼장도 예외는 아닙니다.
후세 사람들은 사람들의 믿음을 격려하기 위해서
혹은 지나친 종교적 열정에서 당시의 사상을 바탕으로 어떤 부분을 덧붙여 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종교전통과 함께 발전되고 혼합되어온 의례의식들은
지금도 올바른 불교로 인식하고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승려에게 보시음식을 공양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과자와 과일접시를 차려 붓다의 영혼에 대접하는 것과 같은 의례의식들은
불교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공동체에서는
이것들을 불자들의 참된 실천방법이라고 간주하여 가르치고 아주 엄격하게 고수하고 있습니다.
Rites and ceremonies of this kind have become so numerous that they now completely obscure the real Buddhism and its original purpose. Take for example the procedure of becoming ordained a monk. There has come into existence the ceremony of making gifts to the newly ordained bhikkhu Guests are invited to bring food and to watch proceedings, and as a result, there is much drunkenness and noise. Ceremonies are performed both at the temple and in the home. The new bhikkhu later leaves the Order again only a few days after having been ordained, and may become an even stronger temple-hater than he was before. It must be borne in mind that there was none of this at the time of the Buddha. It is a later development. Ordination at the time of the Buddha meant simply, that some individual, who had obtained his parent's consent, renounced home and family. He was a person who was able to close accounts at home and go off to join the Buddha and the Order of bhikkhus. On some convenient occasion he would go and be ordained, and perhaps not see his parents or family again for the rest of his life. Though some bhikkhus might go back to visit their parents again on suitable occasions, this was rare. There does exist a rule permitting a bhikkhu to go home when there is a good reason for doing so, but at the time of the Buddha this was not the done thing. Bhikkhus did not receive ordination with their parents in attendance nor did they celebrate the event as a great occasion, only to leave the Sangha again after just a few days, no better off than at first, as commonly happens in the present day.
이런 종류의 의례의식들은 너무나 많아서 이것들은
현재 참된 불교와 그 원래 목적을 완전히 가리어 감추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계하여 승려가 되는 과정을 살펴봅시다.
수계한 새로운 승려(빅쿠)에게 선물공양하는 예식이 있어서,
재가자들은 음식을 가져와서 참석하도록 초대를 받습니다.
이 때문에 예식은 술주정과 소음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예식은 사원과 집 양쪽에서 행해집니다.
수계자는 수계 후, 단 며칠만에 다시 승가를 떠나서
전보다 불교에 대해 더욱 회의적이 될 지도 모릅니다.
붓다 시대에는 이런 예식이 없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후대에 생긴 것입니다.
붓다 시대의 수계는 부모의 승낙을 얻은 사람이 단지 집과 가정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수계할 사람은 자기 가정과 관계를 끊고 붓다와 빅쿠 공동체(승가)에 합류하기 위해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수계할 사람은 편리한 때에 가서 계를 받고, 나머지 생 동안 다시 부모와 가족을 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빅쿠(수행승)는 적당한 때에 다시 부모를 방문하러 되돌아가기도 하였으나 이런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합당한 이유가 있을 때 빅쿠(수행승)가 집에 가는 것을 허락하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붓다 시대에 이 규칙은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빅쿠(수행승)는 부모들이 참석한 가운데 수계를 받지도 않았으며, 오늘날 흔히 일어나는 것처럼 처음보다 (종교적 성숙이) 나아진 것도 없이 단 며칠 후에 다시 승가를 떠나서, 단지 큰 (사회적) 기회를 얻는 행사로 축하하지도 않았습니다
.(역주 : 불교국가인 태국에서 수계식은 한 개인의 종교적 성숙과 사회적 위치의 향상이라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님)
All this presenting of gifts to newly ordained bhikkhus, this performing of ceremonies, including all sorts of celebration - this we are foolish enough to call Buddhism! Furthermore we choose to make much of it, thinking nothing of spending all our own money, or other people's on account of it. This "Neo-Buddhism" is so widespread as to be almost universal. The Dhamma, the genuine teaching that once was paramount has become so overlaid by ceremonial that the whole objective of Buddhism has been obscured, falsified and changed. Ordination, for instance, has become a face-saving gambit for young men whom people have been pointing at for never having been ordained, or a prerequisite to finding a wife (as having been a monk is considered a sign of maturity), or is done with some other kind of ulterior motive. In some places an ordination is regarded as an opportunity for collecting money for which job there are always people on hand to help. It is one way of getting rich. Even this they call Buddhism! And anyone who goes and criticizes this is considered to be ignorant of Buddhism or opposed to it.
수계한 새로운 빅쿠에게 선물공양하고 모든 종류의 축하의식을 포함하여 예식을 거행하는 것,
이것들을 사람들은 바보스럽게도 불교라고 합니다!
더구나 이 수계식을 잘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아무 생각없이 자기 돈이나 다른 사람의 돈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신 불교' 는 널리 퍼져서 거의 보편적이 되었습니다.
한 때 최고였던 지고의 가르침인 담마가 의례적인 것에 압도되어서
불교의 전체 목적이 감추어지고 왜곡되었으며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수계식은, 한 번도 수계를 받지 않아서 사람들의 지목을 받아 온 젊은이가 체면을 세우는 의례의식이나, 배우자를 얻기 위한 필요조건(승려였다는 것은 성숙의 표시로 여겨짐)이나, 또는 다른 종류의 숨은 동기로 행해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사람들이 항상 때 맞춰 도와주어야 하는 일이 있으므로 돈을 버는 기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자가 되는 한 방법입니다.
이것들을 사람들은 불교라고 합니다!
이것을 비판하는 사람은 불교를 모르거나 반대하는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Another example is the presentation of kathina cloth. The Buddha's original intention was to have cloth for robes given to all the bhikkhus simultaneously so that they could sew it together themselves with a minimum loss of time. If there was only one robe, it was allocated to some bhikkhu not necessarily the most senior one, whom the group considered worthy of using that robe or in need of it, and was presented to him in the name of the entire order. The Buddha's intention was to avoid any bhikkhu's having a high opinion of himself. On that day everyone, regardless of rank, had to humble himself and be one of the crowd. Everyone had to lend a hand cutting and sewing the cloth, boiling tree pith to make the dye, and whatever else was involved in getting the robes ready and finished the same day. Making the cloth into robes was a co-operative effort. That is how the Buddha intended it to be, an event not necessarily involving lay people at all. But nowadays it has become an affair involving ceremony, fun and games, loud laughter and money seeking. It is just a picnic and is devoid of all the desirable results originally intended.
다른 예로 까티나 옷감 증정이 있습니다.
붓다의 원래 의도는 모든 빅쿠(수행승)들에게 동시에 주어지는 가사 장삼을 만들기 위한 옷감을 가져서 최소한의 시간으로 함께 가사 장삼을 만들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가사 장삼이 한 벌 밖에 없다면, 반드시 연장자가 아니더라도 공동체 내에서 그 가사 장삼을 사용할 가치가 있거나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빅쿠에게 할당되었고 공동체 전체의 이름으로 증정되었습니다.
붓다의 의도는 빅쿠가 자기 스스로 높은 지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은 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이 겸손하게 공동체의 한 일원이 되어야 했습니다.
옷감을 자르고 바느질하며, 염색하기 위해 나무심을 끓이는 등 그 날 하루 내에 가사 장심을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는 데 모든 이들이 일손을 빌려주어야 했습니다.
옷감으로 가사 장삼을 만드는 일은 협동적인 노력이 필요하였습니다.
붓다께서 의도하신 바는 이것이었으며, 재가자를 반드시 포함시켜야 하는 행사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예식을 포함하는 일이 되었고, 재미있고 게임을 하고 큰소리로 웃고 돈을 모으는 일이 되었습니다.
단지 행락이 되었으며 원래 의도했던 바람직한 결과가 아무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This sort of thing is a tumour which has developed in Buddhism and thrived. The tumour takes hundreds of different forms too numerous to name. It is a dangerous, malignant growth which by degrees has completely overlaid and obscured the good material, the real pith of Buddhism, and quite disfigured it. One result of this has been the arising of many sects, some large, some insignificant, as off-shoots from the original religion. Some sects have even become involved in sensuality.
이런 일들은 불교에서 성장하고 번창한 종양입니다.
종양은 수백 가지 형태가 있어서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종양은 위험하고 해롭게 성장하여,
점차 불교의 유익한 바탕인 참된 본질을 완전히 덮어 감추었으며 손상시켰습니다.
이 결과의 하나로서 많은 종파가 생겨났습니다.
원래 종교에서 뻗어나간 곁가지로서 큰 종파에서부터 별로 중요하지 않는 종파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파가 생겨났습니다.
어떤 종파들은 감각적 쾌락을 수반하고 있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It is essential that we always discriminate in order to recognize what is the real, original Buddhism. We must not foolishly grasp at the outer shell, or become so attached to the various rituals and ceremonies that the real objective becomes quite lost to view. The real practice of Buddhism is based on purification of conduct by way of body and speech, followed by purification of the mind, which in its turn leads to insight and right understanding. Don't go thinking that such and such is Buddhism just because everyone says it is. The tumour has been spreading constantly since the day the Buddha died, expanding in all directions right up to the present day, so that it is now quite sizeable. The tumour in Buddhism must not be misidentified as Buddhism itself. It is also wrong for of other religions to come and point at these shameful disgraceful growths as being Buddhism. It is unjust, because these things are not Buddhism at all; they are excrescence. Those of us interested in furthering Buddhism, whether as a foothold for all people, or for our own private well-being, must know how to get hold of the true essence of Buddhism and not just grab at some worthless outgrowth.
참된 원래 불교가 무엇인지 인식하기 위해 항상 식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리석게 껍데기를 붙잡고 (불교의) 진정한 목적을 전혀 보지 못하여
여러 의례의식에 집착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불교의 참된 실천은, 몸과 말로 하는 행위를 청정히 하고, 이어서 마음을 청정히 하며,
다음에는 통찰과 바른 이해로 이끄는 것(수행)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단지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것이 불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붓다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종양은 계속 퍼져왔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방향으로 팽창되어 지금은 대단히 큰 종양이 되었습니다.
불교 내의 종양을 불교 자체로 그릇되게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종교들도 역시 불교처럼 그릇되어 잡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성장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전혀 불교가 아니며, 군더더기입니다.
모든 사람의 복지를 위한 발판으로,
또는 개인의 복지를 위해 불교를 증진시키는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쓸데없는 외적 성장에 집착하지 말고,
불교의 참 본질을 이해하고 고수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Now even the genuine Buddhism is many-sided, a fact which may lead to a false grasp of true meaning. For instance, if looked at from the point of view of a moral philosopher, Buddhism is seen to be a religion of morality. There is talk of merit and demerit, good and evil, honesty, gratitude, harmony, open-heartedness and much more besides. The Tipitaka is full of moral teachings. Many newcomers to Buddhism approach it from this angle and are attracted to it on this account.
현재, 원래 불교조차도 여러가지 면이 있으며,
이 사실은 불교의 진짜 의미를 잘못 파악하게 합니다.
예를 들면, 윤리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불교는 도덕종교로 보일 수 있습니다.
공덕과 비공덕, 선과 악, 정직, 감사, 조화, 관대함 등 이외에도 많은 말씀이 있습니다.
삼장에는 도덕적인 가르침이 가득합니다.
불교를 처음 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면에서 접근하고 이 때문에 도덕적인 면에 집착합니다.
A more profound aspect is Buddhism as Truth, as the deep hidden truth lying below the surface and invisible to the ordinary man. To see this truth is to know intellectual emptiness of all things; the transience, unsatisfactoriness and non-selfhood of all things; to know intellectually the nature of suffering, of the complete elimination of suffering and of the way to attain the complete elimination of suffering; to perceive these in terms of absolute truth, the kind that changes and which everyone ought to know. This is Buddhism as Truth.
(도덕적인 면보다) 더 심오한 면은 '진리로서의 불교'입니다.
이것은 표면 아래 깊이 감추어져 있어 일반인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진리를 보는 것은, 모든 사물의 빔(공)을 아는 것,
즉 모든 사물의 무상(영원하지 않음), 고(불만족), 및 무아(자아 아님)을 아는 것,
'고의 본질', '고의 완전한 제거', 및 '고의 완전한 제거에 이르는 길'을 아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하는 변화하는 이것들을 절대적 진리의 면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로서의 불교'입니다.
Buddhism as Religion is Buddhism as a system of practice based on morality, concentration and insight, and culminating in liberating insight; a system which when practised to completion enables one to break free from suffering. This is Buddhism as Religion.
'종교로서의 불교'는 도덕(계율), 집중(선정), 통찰(지혜)을 바탕으로 한 실천(수행)체계이며,
해탈로 이끄는 지혜를 닦는 실천(수행)체계입니다.
이것은 완전하게 실천했을 때 고통에서 자유롭게 하는 체계입니다.
이것이 '종교로서의 불교'입니다.
Then there is Buddhism as Psychology, as it is presented to us in the third section of the Tipitaka, where the nature of the mind is described in remarkable detail. Buddhist psychology is a source of interest and astonishment to students of the mind even in the present day. It is far more detailed and profound than present day psychological knowledge.
그리고, '심리학으로서의 불교'가 있습니다.
이것은 삼장의 세 번째 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장에는 마음에 대해 현저하게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불교 심리학은 오늘날 마음을 연구하는 학생들에게 흥미와 놀라움을 주는 자료입니다.
불교 심리학은 오늘날의 심리학 지식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심오합니다.
Another aspect is Buddhism as Philosophy. Philosophical knowledge can be clearly seen by means of reasoned logical proofs but cannot be demonstrated experimentally. It contrasts with science, which is knowledge resulting from seeing something clearly, with our eyes, or through physical experimentation and proof, or even with the "inner eye" of intuition. Profound knowledge such as that of emptiness is just philosophy for a person who has not yet penetrated to the truth, and science for another who has done so, such as a fully enlightened individual, or arahant, who has seen it clearly, intuitively. Many aspects of Buddhism, in particular the Four Noble Truths, are scientific in so far as they can be verified by clear experimental proof using introspection. For anyone equipped with awareness and interested in studying and carrying out research, the cause - effect relationships are there just as in science. Buddhism is not just something obscure and vague, not just philosophy, as are man-made subjects.
또 다른 면은 '철학으로서의 불교'입니다.
철학적 지식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증명에 의해 분명히 이해되지만
실험적으로 증명될 수는 없습니다.
철학지식은 과학지식과 반대되는 지식입니다.
과학지식은 눈으로, 또는 물리적 실헝이나 증명으로,
또는 내적인 눈에 의한 직관으로 어떤 것을 분명히 봄으로써 얻어지는 지식입니다.
빔(공)과 같은 심오한 지식은 아직 진리를 꿰뚫어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단지 철학이지만,
완전히 깨달은 사람, 즉 아라한 같이 명확히 직관적으로 진리를 꿰뚫어 본 사람에게는 과학입니다.
불교의 많은 면들, 특히 사성제(네가지 성스런 진리)는
내적인 관찰을 통해 경험적으로 명확히 검증될 수 있는 점에서 과학적입니다.
알아차림이 있고 공부와 연구(관찰)에 흥미있는 사람은
누구나 과학에서와 같이 (불교에도) 인과관계(원인과 결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불교는 사람이 만든 대상처럼 모호하고 애매하기만 한 어떤 것이 아니고
단지 철학도 아닙니다.
Some look on Buddhism as Culture. Anyone with a high regard for culture finds many aspects of Buddhist practice which are common to all cultures and also many that are characteristically Buddhist and far better and higher than anything in other cultures.
어떤 사람들은 불교를 문화로 바라봅니다.
문화에 대한 높은 안목을 지닌 사람은 모든 문화에 흔하면서도 특히 불교적이고 다른 문화에 있는 것보다 훨씬 수준 높은 불교 수행(실천)의 많은 면을 발견합니다.
Of all these various aspects, the one a real Buddhist ought to take most interest in is Buddhism as Religion. We ought to look on Buddhism as a direct practical method for gaining knowledge of the true nature of things, knowledge which makes it possible to give up every form of grasping and clinging, of stupidity and infatuation, and become completely independent of things. To do this is to penetrate to the essence of Buddhism. Buddhism considered in this aspect is far more useful than Buddhism considered as mere morality, or as truth which is simply profound knowledge and not really practical; and more useful than Buddhism considered as philosophy, as something to be enjoyed as an object of speculation and argument of no value in the giving up of the mental defilements; and certainly more useful than Buddhism considered simply as culture, as attractive behaviour, noteworthy from the sociological viewpoint.
이 모든 면들 중에서 진정한 불교인이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종교로서의 불교'입니다.
우리는 사물의 참된 성품(사물의 존재 방식)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방법으로서 불교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지식은 모든 형태의 움켜쥠과 집착, 어리석음과 얼빠짐[5취온, 탐진치, 집성제]을 버려서
사물에서 완전히 독립하게(독립하여 해방되게)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불교의 핵심을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이런 면으로 여기는 불교는, 단순히 도덕으로 여기거나,
실제로 실천적이지 않고 단지 심오한 지식으로 여기는 불교보다 훨씬 더 유용합니다.
또한 정신적 번뇌를 없애는 것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지적 사색과 논쟁을 즐기는 철학으로 여기는 불교보다 더욱 유용합니다.
또한 사회적 관점으로 주목할 만하고 매력적인 행위도,
즉 단순히 문화로 여기는 불교보다 확실히 더욱 유용합니다.
At the very least, everyone ought to consider Buddhism as Art, as the Art of Living - in other words, as skill and competence in being a human being, living in a way that is exemplary and praiseworthy, which so impresses others that they automatically wish to emulate it. What we have to do is to cultivate the "Three Lustres," firstly developing moral purity, training the mind to be tranquil and steady and fit to its job, and finally developing such an abundance of wisdom and clear insight into the nature of all things that those things are no longer able to give rise to suffering.
When anyone's life has these Three Lustres, he can be considered to have mastered the art of living. Westerners are extremely interested in Buddhism as the Art of Living, and discuss this aspect more than any other. Penetrating so far into the real essence of Buddhism that we are able to take it as our guide to living induces spiritual good cheer and joy, dispersing depression and disillusionment. It also dispels fears, such as the fear that the complete giving up of spiritual defilements would make life dry and dreary and utterly devoid of flavour, or the fear that complete freedom from craving would make all thought and action impossible, whereas in reality a person who organizes his life in accordance with the Buddhist Art of Living is victor over all the things about him. Regardless of whether these things be animals, people, possessions, or anything else, and regardless of whether they enter that person's consciousness by way of the eye, ear, nose, tongue, body, or mind, they will enter as losers, unable to becloud, defile, or perturb him. The winning of victory over all things is genuine bliss.
모든 개개인은 최소한 불교를 기술, 즉 삶의 기술로 여겨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이 되는 기술과 역량으로 모범적이고 칭찬할 만한 방식으로 살고
다른 사람에게 인상적으로 보여, 타인이 자연히 그 방식을 모방하고 싶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 가지 빛나는 것'을 육성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우선 도덕적으로 청정한 것이고,
다음에는 마음을 고요히 하고 안정되게 하여 그 일(수행)에 적절하게 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지혜를 풍부히 하고
모든 사물의 성품(사물의 존재 방식)을 명확히 통찰하는 계발을 통해
더 이상 고(괴로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 이 세 가지가 있다면 삶의 기술을 완성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서양인들은 삶의 기술에 대단한 관심이 있어
불교의 어느 다른 면보다 이 면(삶의 기술면)을 (많이) 논의합니다.
우리가 삶의 지침으로 여길 수 있는 불교의 참된 핵심까지 통찰한다면,
이 통찰은 정신적 유쾌함과 기쁨을 불러 일으키고, 의기소침함을 없애고 각성시킵니다.
이 통찰은 또한, 정신적 오염원이 완전히 없어지면 [5취온(집성제) 소멸, 8정도, 도성제]
삶이 무미건조하고 쓸쓸하고 따분하게 될거라는 두려움이나,
갈애에서 완전히 해방되면 [5취온(집성제) 소멸, 8정도, 도성제]
모든 생각과 행동이 불가능하게 될거라는 두려움을 없앱니다.
반면에 정말로 '삶의 기술로서의 불교'에 따라 삶을 꾸려가는 사람은
그를 둘러싼 모든 사물들을 극복한 승리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동물, 사람, 재산 등 어떠한 사물이나,
또는 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통해 의식에 들어오는 어떠한 사물로부터도
혼란되거나 오염되거나 당황하지 않는(미혹되지 않는) 승리자입니다.
모든 사물을 극복하여 승리를 얻음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Buddha-Dhamma will enrapture a mind that has developed a taste for it. It can be considered an indispensable form of nourishment too. True, a person still controlled by the defilements continues to desire nourishment by way of the eye, ear, nose, tongue and body and goes in search of it as suits his nature. But there is another part of him, something deeper, that does not demand that sort of nourishment. It is the free or pure element in his mind. It wishes the joy and delight of spiritual nourishment, starting with the delight that results from moral purity. It is the source of contentment for fully enlightened individuals, who possess such tranquillity of mind that defilements cannot disturb them, who possess clear insight into the true nature of all things and have no ambitions with regard to any of them. They are, so to speak, able to sit down without being obliged to run hither and yon like those people to whom the Buddha applied the simile "smoke by night, fire by day."
붓다 담마(불법)는 그 맛을 보아 개발된 마음을 황홀케 합니다.
또한 불법은 (삶을) 자양시키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사실 아직 오염원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눈, 귀, 코, 혀, 및 몸을 통한 자양분을 계속 바라며 자신의 성품에 따라 이것들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더 깊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이런 종류의 자양분(오감을 통한 자양분)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자유롭고 청정한 요소이며,
도덕적 청정의 결과로 생기는 즐거움에서 시작되며 정신적 자양분의 기쁨과 즐거움을 원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깨달은 사람에게 만족감의 원천입니다.
완전히 깨달은 사람은 오염원[漏, 번뇌, 불선심, 불선법, 5취온, 집성제]에 의해
교란될 수 없는 고요한 마음이 있고,
모든 사물의 진정한 성품[5온(명색)의 무상, 무아와 5취온(집성제)의 무상, 고, 무아]을 명확히 통찰하며,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야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붓다께서 '한밤의 연기, 대낮의 불'에 비유한 사람들처럼
이리저리 뛰어 다니게 되지 않고 고요히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Smoke by night" refers to sleeplessness, restlessness. A sufferer from this complaint lies all night with hand on brow, planning on going after this and that, working out how to get money, how to get rich quickly and get the various things he desires. His mind is full of "smoke." All he can do is lie there until morning, when he can get up and go running off in obedience to the wishes of the "smoke" he has been holding back all night. This fervent activity is what the Buddha referred to as "fire by day." These are the symptoms of a mind that has not achieved tranquillity, a mind that has been deprived of spiritual nourishment. It is a pathological hunger and thirst induced by the defilement called craving. All night long the victim represses the smoke and heat, which in the morning becomes fire, and then blazes hot inside him all day. If a person is obliged, throughout his entire life, to suppress the "smoke by night," which then becomes "fire by day," how can he ever find peace and coolness? Just visualize his condition. He endures suffering and torment all his life, from birth up until he enters the coffin, simply for lack of the insight that could completely extinguish that fire and smoke. To treat such a complaint one has to make use of the knowledge provided by the Buddha. The smoke and fire diminish in proportion to one's degree of understanding of the true nature of things.
'한밤의 연기'는 잠자지 못함과 불안함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불편함으로 고통 당하는 자는 밤새도록 이마에 손을 얹고 이것 저것을 쫓아 계획하고 어떻게 돈을 벌지, 어떻게 빨리 부자가 되고 원하는 여러가지 것을 가질 수 있을지 궁리하며 누워 있습니다.
이런 자의 마음은 연기로 가득합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침이 될 때까지 그와 같이 누워 있다가 일어날 수 있을 때 벌떡 일어나 밤새 억누르고 있었던 연기의 갈망에 따라 뛰어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이와 같이 들뜬 열렬한 활동을 '대낮의 불'이라고 지칭하셨습니다.
이런 행위들은 고요하지 않고 정신적 자양분이 박탈된 마음의 증상들입니다.
이것은 갈망이라는 오염원에 의해 유발된 병적인 허기짐과 목마름입니다.
이런 희생자는 밤새도록 연기와 열에 억눌려 있다가 아침이면 불이 되어, 낮 동안 내내 내적으로 뜨겁게 불타오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전 일생을 통해
밤에는 연기에 억눌려 있고 낮에는 불이 된다면
어떻게 평화와 평정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의 상태를 마음 속에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연기와 불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는 통찰이 전혀 없기 때문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전 생애 동안 괴로움과 고통을 겪습니다.
이러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은 붓다께서 제공하신 지식을 사용해야 합니다.
연기와 불은 사물의 진정한 성품(사물의 존재방식)을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감소합니다.
As we have said, Buddhism has a number of different aspects or sides. Just as the same mountain when viewed from a different direction presents a different appearance, so different benefits are derived from Buddhism according to how one looks at it. Even Buddhism has its origins in fear--not the foolish fear of an ignorant person who kneels and makes obeisance to idols or strange phenomena, but a higher kind of fear, the fear of perhaps never attaining liberation from the oppression of birth, ageing, pain and death, from the various forms of suffering we experience. The real Buddhism is not books, not manuals, not word for word repetition from the Tipitaka, nor is it rites and rituals. These are not the real Buddhism. The real Buddhism is the practice, by way of body, speech and mind that will destroy the defilements, in part or completely. One need not have anything to do with books or manuals. One ought not to rely on rites and rituals, or anything else external, including spirits and celestial beings. Rather one must be directly concerned with bodily action, speech and thought. That is, one must persevere in one's efforts to control and eliminate the defilements so that clear insight can arise. One will then be automatically capable of acting appropriately, and will be free of suffering from that moment right up to the end.
말한 바와 같이, 불교는 여러 다른 면이 있습니다.
같은 산이라도 다른 방향에서 볼 때 다른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불교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많은 다른 이익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불교도 두려움에 그 기원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우상이나 기이한 현상 앞에 무릎을 꿇고 복종하는 무지한 사람의 어리석은 두려움이 아니라,
생노병사의 압박이나 여러가지 형태의 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두려움 같은 차원 높은 종류의 두려움입니다.
참된 불교는 책이나 지침서나 경장을 암송하는 말이나 의례의식에 있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참된 불교가 아닙니다.
참된 불교는
오염원을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제거하는 행동, 말 및 마음에 의한 실천(수행)에 있습니다.
책이나 지침서로서 하는 것들은 불필요합니다.
의례의식이나 정령 및 천신을 포함한 외적인 것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육체적 행동[신행], 말[구행] 및 마음[의행]에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즉, 오염원을 조절하고 제거[5취온(집성제) 감소, 소멸, 8정도, 도성제]하는 노력을 하여
분명한 통찰이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적절하게 행동[의행, 구행, 신행]할 수 있게 되고
그 순간부터 끝까지
괴로움에서 자유[해탈, 열반(평온), 5취온고(고성제) 소멸, 멸성제]로워질 것입니다.
This is the real Buddhism. This is what we have to understand. Let us not go foolishly grasping at the tumour that is obscuring Buddhism, taking it for the real thing.
이것이 참된 불교입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불교를 가리어 감추는 종양[사후윤회, 사후업보, 사후세계, 신, 영혼, 아트만(자아, 진아, 불성, 아뢰야식, 재생연결식 등)]을
어리석게도 움켜쥐고 그것을 참된 것으로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출처 : http://cafe.daum.net/bd-dm/G1Z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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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가르침(法)>
"나의 가르침은 희론이 아니며,
맹목적으로 와서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요하는 것이 아니며,
지금 여기서 볼 수 있는 법이며,
누구라도 와서 보라는 가르침이고,
그 결실은 지금 여기 현실에서
곧바로 사실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며,
향상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지자(智者)들이나 현자(賢者)들이 알아야 하는 것이며,
누구에게도 비난 받지 않는 법이다."
열반경(A3:56)
1. 한때 자눗소니 바라문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함께 환담을 나누었다.
유쾌하고 기억할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자눗소니 바라문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열반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얼마만큼 열반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입니까?”
2. “바라문이여,
욕망[탐(貪)]에 물들고 욕망에 사로잡히고 그것에 얼이 빠진 자는
자기를 해치는 생각을 하고,
타인을 해치는 생각을 하고,
둘 모두를 해치는 생각을 한다.
그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경험한다.
욕망을 버렸을 때 그는
자기를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고,
타인을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고,
둘 모두를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경험하지 않는다.
바라문이여, 이렇게
열반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
3.‘바라문이여,
성내고 성냄[진(瞋)]에 사로잡히고 성냄에 압도된 자는
자기를 해치는 생각을 하고,
타인을 해치는 생각을 하고,
둘 모두를 해치는 생각을 한다.
그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경험한다.
성냄을 버렸을 때 그는
자기를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고,
타인을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고,
둘 모두를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경험하지 않는다.
바라문이여, 이렇게
열반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
4.“바라문이여,
어리석고 어리석음[치(癡)]에 사로잡히고 어리석음에 압도된 자는
자기를 해치는 생각을 하고,
타인을 해치는 생각을 하고,
둘 모두를 해치는 생각을 한다.
그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경험한다.
어리석음을 버렸을 때 그는
자기를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고,
타인을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고,
둘 모두를 해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경험하지 않는다.
바라문이여, 이렇게
열반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
5. ‘바라문이여, 그는
욕망이 남김없이 다한 것을 경험하고,
성냄이 다한 것을 경험하고,
어리석음이 남김없이 다한 것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열반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
6.“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듯,
덮여있는 것을 걷어내 보이시듯,
[방향을] 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시듯,
눈 있는 자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취주시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 주셨습니다.
행복경 (숫따니빠따 259-268)
1. 어리석은 이를 친하지 말고,
지혜 있는 이를 친하며,
존경할 만한 이를 받들라.
1. 좋은 환경을 얻으려거든
현세에서 선행을 닦아
올바른 도[8정도(도성제)]를 밟아가라.
1. 학문과 기술을 배우며
항상 정직한 생활을 하라.
1. 부모님께 효도하고,
처자를 부양하며,
다른 이들에게 방해되지 않는 직업에 종사하라.
1. 이타적(利他的) 정신과 고결한 생활로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여
자기의 임무를 완수하라.
1. 악행을 하지 말고,
술을 많이 먹지 말며,
고결한 품행을 가지라.
1. 경건하고 겸양하며,
만족과 감사한 정신으로
때때로 법문을 들어라.
1. 인욕과 겸손한 태도와 청정한 정신으로
선지식을 친근하며,
때를 정하여 법을 배우고 닦아라.
1. 절제 있고 가식 없는 생활로,
이루지 못할 집착[없는 사후윤회, 사후업보, 사후세계에 대한 망념, 5취온(유아견, 탐진치, 집성제)]은 슬기롭게 버리어
사성제(四聖諦)와 열반[5취온고(고성제) 소멸(멸성제), 해탈(자유), 열반(평온)]을 증득하라.
1. 여러 가지 세상사에 구애되지 말며,
즐겁고 슬픈 환경에 동하지 말고,
항상 냉철히 판단하는 지혜로써
마음에 불안이 없게 하라.
그러면 최상의 행복이 되리라.
“바라문이여, 이처럼 다섯 가지 감각기관(안이비설신 : 눈.귀.코.혀.몸)은
각각 다른 대상[5경계(색성향미촉)]과
각각 다른 영역[5외입처(색처, 성처, 향처, 미처, 촉처)]을 가져서
서로 다른 대상과 영역을 경험하지 않는다.
이들 다섯 가지 감각기관[안이비설신]은 마음[意, mano, 意根, 意處]을 의지한다.
마음[意, 意根, 뇌의 기능(작용)]이 그들[안이비설신]의 대상과 영역을 경험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음[意]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음[意]은 마음챙김[정념(正念)]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음챙김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음챙김은 해탈을 의지한다.”
* 해탈(자유) : 5취온<유아견(상견, 단견), 탐진치 등 오염원(漏), 10결, 집성제> 염오, 이욕, 소멸[5취온(집성제) 소멸, 8정도, 도성제]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해탈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해탈은 열반을 의지한다.”
* 열반(평온) : 5취온(탐진치) 소멸
[5취온(집성제) 소멸, 8정도, 도성제] => 5취온고(고성제) 소멸, 멸성제(열반적정)]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열반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그대는 질문의 범위를 넘어서버렸다.
그대는 질문의 한계를 잡지 못하였구나.
바라문이여, 청정범행[8정도]을 닦는 것은
열반으로 귀결되고, 열반으로 완성되고, 열반으로 완결되기 때문이다.”
(『상윳따 니까야』「운나바 바라문 경」(S48:42) §§4∼8)
<전도선언>
그대들[5온(명색)]도 역시 신들과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이제 많은 사람들[5온(명색)]의 이익과 안락,
그리고 세상에서 구하는 미래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법을 전하러 가자.
다른 마을로 갈 때,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말고 혼자서 가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니
이치에 맞게 조리와 표현을 갖추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법을 전하라.
원만 무결하게 청정한 범행[8정도, 4성제]을 설하라.
중생들 가운데는 번뇌가 적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법을 듣지 못하면 악에 떨어질 것이나
법을 들음으로 성숙해질 것이다.
나도 법을 전하기 위하여 우루웰라의 세나니 마을로 가서 설법하리라.
거듭 들어서 얻어진 지식이라 해서,
전통이 그러하다고 해서,
소문에 그렇다고 해서,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추측이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 원칙에 의한 것이라 해서,
그럴싸한 추리에 의한 것이라 해서,
곰곰이 궁리해낸 견해이기에
그것에 대해 갖게 되는 편견 때문에,
다른 사람의 그럴듯한 능력 때문에,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스스로 `이들은 좋은 것이고,
이들은 비난받지 않을 것이고,
이들은 지혜로운 이에 의해 칭찬받을 일이고,
이들이 행해져 그대로 가면
이롭고 행복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대로 받아들여 살도록 하라.
- 붓다, 칼라마경에서 -
자기의 힘으로 생길 수 없고
자기의 힘으로 머물 수도 없다.
다른 법들의 영향 아래
존재하고 생기고 형성될 뿐
자기는 무력하다.
다른 법들의 조건으로부터 생기고
다른 법들의 대상으로부터 일어난다.
이들은 다른 법들의 대상과 조건으로부터 생긴다.
배를 의지하여 사람들이 바다를 여행하듯이
물질을 의지하여 정신의 몸이 일어난다.
사람을 의지하여 배가 바다를 가듯이
정신을 의지하여 물질의 몸이 일어난다.
사람과 배가 서로 의지하여 바다를 가듯이
정신[수상행식]과 물질[색]은 둘이 서로서로 의지한다.
- <청정도론> 중에서 -
눈 등[안이비설신의]에
여러 가지 마음과 마음부수들
[5온 이론에선 4무색온 : 식온 + 수온 상온 행온, 6입처 이론에선 의근(意根)]이 머문다.
그 마음과 마음부수들은 그 눈 등을 의지(토대, 문)하여 머물기 때문에
눈 등은 그들[여러 가지 마음과 마음부수들]이 머무는 장소(處)이다.
그들[여러 가지 마음과 마음부수들]은 눈 등에서 일어난다.
눈 등을 의지하여 형상 등[색성향미촉법]을 대상(境)으로 하기 때문에
눈 등은 그들[여러 가지 마음과 마음부수들]의 광산이다.
눈 등은 그들[여러 가지 마음과 마음부수들]이 만나는 장소이다.
그곳[안(입)처, 이(입)처, 비(입)처, 설(입)처, 신(입)처, 의(입)처]에서
토대로서, 문으로서, 대상[색경, 성경, 향경, 미경, 촉경, 법경]으로서 만나기 때문이다.
눈 등은 그들[여러 가지 마음과 마음부수들]의 출산지이다.
그들[안이비설신의]을 의지처로, 대상으로, 바로 그곳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눈 등[안이비설신의]은 그들[여러 가지 마음과 마음부수들]의 원인이다.
그들[안이비설신의]이 없을 때 그 마음과 마음부수도 없기 때문이다.
- <아비담마 길라잡이> 하권 중에서 -
"그가 이와 같이
마음[식]이 삼매에 들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5취온(집성제) 소멸, 8정도, 도성제]
부드럽고,
활발발(活潑潑)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5취온(집성제)고(고성제) 소멸, 멸성제]에 이르렀을 때
지(知)와 견(見)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압니다.
[*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바르게 분명하게 알고 봅니다.(여실지견)]
'나[5온(명색)]의 이 몸[육체(색)]은
물질로 된 것이고,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 : 지수화풍)로 이루어진 것이며,
부모에게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집적되었으며,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알음알이[식]는
여기[물질, 육체(색)]에 의지하고 여기[물질, 육체(색)]에 묶여있다.' 라고.
- 사문과경(沙門果經, S?ma??aphala Sutta, D2) -
몸의 마지막 느낌을 느끼면, ‘몸의 마지막 느낌을 느낀다’라고 분명하게 압니다.
생명의 마지막 느낌을 느끼면 그는 ‘생명의 마지막 느낌을 느낀다’라고 분명하게 압니다.
‘몸이 부서져서 생명이 다한 뒤에 바로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이 더 이상 즐겁게 느껴지지 않고 식어버릴 것이다’ 라고 분명하게 압니다.
수행자여! 이를테면
기름을 조건으로, 심지[육체(색) 혹은 5취온(불선법, 탐진치, 집성제)]를 조건으로
등불[정신(수상행식) 혹은 5취온고(고성제)]이 타오르고
기름이나 심지가 닳아 없어지면 더 이상의 공급이 없어지므로
영양분[육체(색)]이 없어 꺼지는 것과 같습니다.
- M140. 세계에 대한 분석의 경 (Dhatuvibhanga sutta) -
육체(身, 色) 부분에서 받아들이는 느낌과 감각을 여실히 알고,
정신(命, 名:수상행식) 부분에서 받아들이는 느낌과 감각을 여실히 안다.
만약 저 육체[색]가 파괴되고 정신[수상행식]이 종말을 고하면
곧 이때 일체의 느낌[수(受)]은 영구히 멸하고, 남음이 없으므로 영구히 멸한다.
- 잡아함 969. 장조경(長爪經) -
몸이 무너지고 목숨[命]이 끝나고 수(壽)가 다해 마치면
곧 현재 세계에서 일체의 감각이 다 그쳐 쉬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싸늘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身壞命終 壽已畢訖。
即於現世一切所覺 便盡 止息。
當知至竟16冷。)
- 중아함 12) 화파경(破經) -
그림자[정신(命, 名)]는 나무[육체(身, 色)]를 원인(因)으로 존재(有)하는 것인데,
저 그림자는 이것(나무)으로부터 이미 끊어져버렸으니
그 원인이 소멸(滅)함으로써 (그림자가 다시) 생기지 않는 것이다!
(影因樹有。
彼影從是已絶。
其因滅不生耶。)
- 중아함 12) 화파경(破經) -
"왓차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일 그대 앞에
불[5온의 연기법에서는 정신(수상행식), 5취온의 연기법에서는 5취온고(고성제)]이 붙고 있다면,
그대는 '내 앞에서 이 불이 붙고 있다'라고 알겠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만일 제 앞에 불이 붙고 있다면
저는 '내 앞에서 이 불이 붙고 있다'라고 알 것입니다."
20.[세존] “밧차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대 앞에 불[정신]이 타오르면,
그대는 ‘내 앞에 불이 타오른다’라고 아십니까?”
[밧차곳따] “존자 고따마여, 내 앞에 불이 타오르면,
나는 ‘내 앞에 불이 타오른다’라고 압니다.”
21.[세존] “밧차여, 그대 앞에 불이 타오르는데,
‘그 불[정신]은 무엇을 조건으로 타오르는가?’라고 묻는다면,
밧차여, 그 물음에 대하여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밧차곳따] “존자 고따마여,
내 앞에 불[정신(수상행식) 혹은 5취온고(고성제)]이 타오르는데,
‘그 불은 무엇을 조건으로 타오르는가?’라고 물으신다면,
존자 고따마여,
나는 ‘내 앞에 불이 타오르는데,
그 불[5온의 연기법에서는 정신(수상행식), 5취온의 연기법에서는 5취온고(고성제)]은
풀과 섶이라는 땔감[5온의 연기법에서는 육체(색), 5취온의 연기법에서는 5취온(불선법, 유아견, 탐진치, 10결, 집성제)]을
조건으로 하여 타오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왓차여, 만일 그대 앞에 있는 불이 꺼진다면,
그대는 '내 앞에 있던 불이 꺼졌다'라고 알겠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만일 제 앞에 있는 불이 꺼진다면,
저는 '내 앞에 있던 불[정신]이 꺼졌다' 라고 알 것입니다."
22.[세존] “밧차여, 그대 앞에 불이 꺼진다면,
밧차여, 그대는 ‘내 앞에서 불이 꺼진다’라고 압니까?”
[밧차곳따] “존자 고따마여, 내 앞에 불이 꺼진다면,
존자 고따마여 나는 ‘내 앞에 불[정신]이 꺼진다’ 라고 압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그대에게
'이 불이 꺼졌는데 동쪽으로 갔습니까,
남쪽·서쪽·북쪽과 나아가 아래쪽 등의
여러 곳 중에서 어느 곳으로 갔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반드시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구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저에게 묻는다면
마땅히 진실하게 대답하겠습니다.
즉, '만약 풀과 나무와 마소의 똥[육체]이 있으면
이 불[정신]은 섶과 서로 어울리면서 문득 타고 꺼지지 않을 것이요,
만약 풀과 나무와 소똥[육체]이 모두 없어지면 이 불[정신]은 곧 꺼지는데
어느 곳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겠습니다.”
23.[세존] “밧차여, 그대 앞에 불이 꺼질 때,
‘그 불은 이 곳에서 동쪽이나 서쪽이나 남쪽이나 북쪽의
어느 방향으로 간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밧차여, 그 물음에 대하여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밧차곳따] “존자 고따마여, 그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 불[정신]은 풀과 섶의 땔감[육체]을 조건으로 하여 타오르고,
그 땔감[육체]이 사라지고 다른 땔감[육체]이 공급되지 않으면,
자양분[육체]이 없으므로 꺼져버린다고 여겨집니다.”
- M072.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Aggivacchagotta sutta) -
존자여, 그러면 몇 가지 법이 있어
만일 사람[5온(명색)]이 그 몸[색]을 버릴 때
그 몸은 송장이 되어 땅에 눕고 다시 그것을 무덤에다 버리면
마음[식] 없어 마치 나무나 돌과 같다네 라고 합니까?
장자여, 목숨[命根]과 더운 기운[火大] 또 의식[識, 意根]은
몸[色蘊]을 버릴 때 함께 버려지기에
그 몸[색]을 저 무덤에다 버리면 마음[識] 없어 마치 나무나 돌과 같다네 라고 합니다.
- 잡아함 568. 가마경(伽摩經) -
“사띠여, 그러면 어떤 것이 알음알이(識)인가?”
“세존이시여, 그것은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좋고 삿된 업들의 과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쓸모없는 인간이여, 도대체 내가 누구에게 그런 법을 설했다고 그대는 이해하고 있는가?
이 쓸모없는 인간이여, 참으로 나는 많은 방편으로
알음알이는 조건 지워져서 일어난다고 설하였고,
조건이 없어지면 알음알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쓸모없는 인간이여, 그러나 그대는 자신이 스스로 잘못 파악하여
우리를 비난하고 자신을 망치고 많은 부덕을 생기게 하는구나.
이 쓸모없는 인간이여, 그러니 그대는 긴 세월을 이익됨이 없고 괴롭게 될 것이다.”
- M 38 -
태어남에 미혹한 자는
모든 경우에서 (어리석은 인식[識]의) 무더기들[5취온(유아견, 탐진치)]의 나타남이 태어남(生)이라고 이해하지 않고,
‘중생[자아(아트만)]이 태어난다. 중생[자아(아트만)]의 새로운 몸이 나타난다.’ 라고 상상한다.
(현세에서) 무더기(5溫)와 요소(18界)와 장소(12處)의 연속이요, 끊임없이 진행됨을 윤회[* 편집자 주 : 지금 여기 현실에서 정신적 괴로움을 가져오는 어리석은 인식(識)의 찰나생 찰나멸 윤회]라고 한다.
윤회에 미혹한 자는
위와 같이 설한 윤회[바로 지금 여기 어리석은 인식[5취온]의 윤전]를 그렇게 이해하지 않고,
‘이 중생[자아(아트만)]이 이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간다. 다른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온다.’ 라고 상상한다.
상카라[행(行)]들의 특징에 미혹한 자는
상카라들의 개별적인 특징과 일반적인 특징[무상, 고, 무아]을 이해하지 않고,
상카라들을 자아, 자아에 속한 것, 항상한 것, 행복, 아름다운 것[상락아정]으로 상상한다.
연기된 법[5취온(탐진치)들에 대해 미혹한 자는
상카라들[행(行)]의 전개과정이 무명[5취온(유아견, 탐진치, 집성제)] 때문이라고 이해하지 않고,
자아(이트만)가 알기도 하고 혹은 모르기도 하며,
자아가 행하고 혹은 행하게 만들고, 재생연결에 나타난다고 한다.
[* 아트만(자아, 진아, 영혼)이란 어떤 속성의 개념인가 http://cafe.daum.net/bd-dm/Fl2h/49
네 가지 죽음과 죽음의 마음, 재생연결식 / 비판 http://cafe.daum.net/bd-dm/BGji/315
각묵스님[남방불교 입장]의 윤회에 대한 시각에 대한 비판 http://cafe.daum.net/bd-dm/Fzc9/1
김성철교수[북방불교 입장]의 윤회에 대한 시각에 대한 비판 http://cafe.daum.net/bd-dm/Fzc9/4
아비다르마(아비담마)의 왜곡 해석 http://cafe.daum.net/bd-dm/ALkM/56
]
원자나 신 등이 깔랄라[kalala, 대중부에 의하면 보디삿뜨바(보살 : 보리살타 bodhisattva, 보리는 깨달음, 살타는 유정(有情), 보리살타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유정')들은 모태(母胎)에서, 태아의 정상적인 발전 단계(최초의 1주일)] 등의 상태로
몸을 형성하게 하고, 감각기능(根)들을 갖게 한다고 한다.
그 감각기능들을 가진 자는
닿고, 느끼고, 갈애하고, 취착하고, 애를 쓴다고 한다.
[* 사띠(다제) 비구경 : 식(識)을 실체로 여겨 윤회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http://cafe.daum.net/bd-dm/GM7Y/18]
그리고 그는 다른 존재로 생존한다고 [상상하거나]
혹은 “모든 중생은 운명[전생론, 사후윤회론, 사후업보론]과
우연의 일치[우연발생론, 인과(연기)부정론]와
천성의 틀에 짜여 있다[신의 창조론](D.i.53)"라고 상상한다.
그는 무명[연기법(5온, 명색의 상호의존성, 12연기, 4성제)에 대한 무지]에 눈이 가려 이렇게 상상하면서
마치 맹인이 땅 위를 걸을 때
길이건 길이 아니건, 불쑥 솟아올랐건 움푹 패었건,
평평하건 평평하지 않건 닥치는 대로 그곳을 걷는 것처럼
공덕이 되는 행위도 짓고,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도 짓고,
흔들림 없는 행위 짓는다.“
<청정도론 제3권 17장 중에서>
<붓다의 최후 법문>
너희들은 저마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 말아라.
함께 내 교법(敎法)을 지키고
함께 배우며 함께 수행하고 부지런히 힘써
도(道)의 기쁨을 함께 누려라.
나는 몸소 진리를 깨닫고 너희들을 위해 진리를 말하였다.
너희는 이 진리를 지켜 무슨 일에나 진리대로 행동하여라.
내가 간 후에는
내가 말한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 참고 : 5취온[유아견(상견, 단견), 탐진치, 불선심, 불선근, 불선법, 10결, 집성제]
* 다섯 가지 덮개[5개(五蓋)]
1) 감각적 욕망 [탐(貪)] : 탐(貪)은 탐욕과 갈애.
2) 악의(惡意, 분노) [진(瞋)] : 진(瞋)은 성내는 마음.
3) 혼침과 졸음 : 혼침(昏沈)은 몽롱한 마음의 상태로 대상을 명확하게 지각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면(眠)은 수면, 억압된 마음으로 가위눌린 마음.
4) 들뜸(掉擧)과 회한(우울) : 도거(掉擧)는 마음이 들뜬 상태로 삼매에 들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
회(悔)는 후회하는 마음으로 그릇된 일을 한 것을 후회하는 마음.
한(恨)은 원한의 마음으로 상대에게 당한 해를 복수하려고 품고 있는 마음.
5) 회의적 의심(疑) : 의(疑)는 사제법(四諦法)의 도리, 5온무아임을 의심하는 것.
* 10가지 족쇄(결박)
1. 5하분결(五下分結)
1) 유신견(有身見, 有我見<상견, 단견>) : 5온[명색]을 자아(아트만)로 잘못 이해하는 견해.
2) 의(疑) : 5온무아, 연기법(5온, 5취온, 12연기, 4성제, 4법인)에 대한 의심(미혹).
3) 계금취(戒禁取) : 계금(戒禁, 계율이나 의식)에 대한 그릇된 집착이나 번뇌. => (완전히 끊은 단계) 수다원(須陀洹)
[* 악견(惡見) : 그릇된 견해, 즉 유신견(有身見), 변집견(邊執見), 사견(邪見), 견취견(見取見), 계금취견(戒禁取見)]
4) 욕탐(欲貪) [탐(貪)] : 5욕(색성향미촉)
5) 악의(惡意, 瞋恚) [진(瞋)] => (거의 끊은 단계) 사다함(斯陀含) => (완전히 끊은 단계) 아나함(阿那含)
2. 5상분결(五上分結)
6) 색탐(色貪) [탐(貪)] : 색계4선(초선, 제2선, 제3선, 제4선)
7) 무색탐(無色貪) [탐(貪)] : 4무색정(공, 식, 무소유, 비상비비상)
8) 만(慢) : 만(慢)은 자기는 타인보다 뛰어나다는 오만불손한 마음. 우월감, 열등감, 동등감.
만(慢), 과만(過慢), 만과만(慢過慢), 아만(我慢), 증상만(增上慢), 비하만(卑下慢), 사만(邪慢) 등.
9) 도거(掉擧) : 들뜸
10) 무명(無明) [치(痴)] => (완전히 끊은 단계) 아라한(阿羅漢)
* 일곱 가지 잠재성향
(1) 감각적 욕망의 잠재성향
(2) 존재에 대한 욕망의 잠재성향
(3) 적의의 잠재성향
(4) 자만의 잠재성향
(5) 사견의 잠재성향
(6) 의심[미혹]의 잠재성향
(7) 무명의 잠재성향
* 불선업(不善業)을 일으키는 마음의 작용(14가지)
1) 착하지 않은 것의 공통되는 것(4가지)
(1) 어리석음(痴 moha)
(2) 양심 없음(無慙 ahirika)
(3) 수치심 없음(無愧 anottappa)
(4) 들뜸(掉擧 uddhacca)
2) 때때로 있는 것(10가지)
* 탐욕에 관한 것(3가지)
(5) 탐욕(貪 lobha)
(6) 사견(邪見 diṭṭhi)
(7) 자만(慢 māna)
* 성냄에 관한 것(4가지)
(8) 성냄(嗔 dosa)
(9) 질투(嫉 issā)
(10) 인색(吝 macchariya)
(11) 후회(惡作 kukucca)
* 게으름에 관한 것(3가지)
(12) 해태(懈怠 thīna)
(13) 혼침(昏沈 middha)
(14) 의심(疑 vicikacchā)[미혹]
불교에 나타난 힌두교의 윤회설 http://cafe.daum.net/bd-dm/Ffus/97
* 위 사진은 불멸 후 불교의 힌두화로
불교의 교주인 고타마 붓다께서 가르친 원가르침[근본불교]을 벗겨내고 있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 아래 사진은 그 이후 양머리[불교, 무아견(중도, 여실지견, 정견, 연기법)]를 걸어놓고
개고기[힌두교, 유아견(상견 : 사후윤회, 사후업보, 사후세계)]를 팔기 시작한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 http://www.youtube.com/embed/9xxv_au015I
* 참고 : 불교란 무엇인가? http://cafe.daum.net/bd-dm/APsK/30
[붓다 가르침(불법)의 성격] 붓다의 법은 현실적으로 증험되는 것! http://cafe.daum.net/bd-dm/Rz0I/20
불교의 핵심교리[4성제, 12연기 유전문, 환멸문, 4법인] 간략하게 정리 http://cafe.daum.net/bd-dm/ALiV/80
불교의 핵심교리 논리적 체계 http://cafe.daum.net/bd-dm/ALiV/1
당신은 무슨 까닭으로 출가하여 사문 구담 밑에서 범행(梵行)을 닦습니까? http://cafe.daum.net/bd-dm/APsK/35
올바른 구도자의 길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http://cafe.daum.net/bd-dm/AIWV/23
중아함 144) 산수목건련경(算數目?連經) : 10선계, 4념처, 육근 단속, 정념 정지, 4선, 붓다는 길잡이일뿐 http://cafe.daum.net/bd-dm/APsK/36
불교수행이란 무엇인가? [고성제] [5취온고(苦)] [3특상 중 일체(5취온)개고(苦)] [3고(苦) 중 행고(行苦)] http://cafe.daum.net/bd-dm/ANKx/180
어떤 수행에 의해 어떤 번뇌가 끊어지는가? (M2, 모든 번뇌의 경) http://cafe.daum.net/bd-dm/ANKx/100
[4성제]를 중심으로 불교의 수행 [29연기관계] 체계적 종합 정리 http://cafe.daum.net/bd-dm/ALiV/39
열반경(涅槃經) - 29연기 http://cafe.daum.net/bd-dm/ALiV/16
제법본경 http://cafe.daum.net/bd-dm/APsK/18
중아함 86) 설처경(說處經) : 5취온, 6내처...6애신, 6계, 12연기, 37조도품, 4선, 4성제, 4상, 4무량, 4무색, 4성종, 4문과, 5숙해탈상, 5해탈처, 5출요계, ... http://cafe.daum.net/bd-dm/ANKx/142
초전법륜경(붓다의 첫번째 법문) http://cafe.daum.net/bd-dm/ALiV/19
무아상경(붓다의 두번째 법문) http://cafe.daum.net/bd-dm/AHxP/29
연소경(붓다의 세번째 법문) http://cafe.daum.net/bd-dm/AHxP/27
M019.두 갈래 사유의 경과 중아함102.염경(念經) http://cafe.daum.net/bd-dm/R2Wv/8
붓다는 [해탈(자유), 열반(평온, 행복, 자비, 평등, 평화)]을 위한 길잡이일뿐... [8정도] http://cafe.daum.net/bd-dm/APsK/15
중아함 211) 대구치라경(大拘絺羅經) : 선근, 지혜, 식, 정견, 5근, 의근, 죽음과 멸진정... http://cafe.daum.net/bd-dm/Gg8K/21
[아리타경(阿梨吒經) : 뗏목의 비유...] http://cafe.daum.net/bd-dm/APsK/12
[열반]의 개념을 분명하게 알아야... http://cafe.daum.net/bd-dm/GM7Y/41
불교의 목적[열반(탐진치 소멸=>평온)]은 자이나교와 같은 사후윤회로부터 해탈하려는 것이 아니다! http://cafe.daum.net/bd-dm/RttG/3
잡아함 259. 무간등경(無間等經) 543. 아라한비구경(阿羅漢比丘經) : 현세(現世)에서 즐겁게 지내기 위해서 수행! http://cafe.daum.net/bd-dm/GM7Y/23
통증과 고통 그리고 두번째 화살 http://cafe.daum.net/bd-dm/G6zc/11
몸은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어서는 안 된다 http://cafe.daum.net/bd-dm/G6zc/121
화살 경(574~592) : 독화살을 뽑아버리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http://cafe.daum.net/bd-dm/AIWV/18
멸경(滅經) http://cafe.daum.net/bd-dm/ALiV/67
해탈의 이정표 http://cafe.daum.net/bd-dm/G1Z4/86
[해탈지견]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의 실질적 의미 http://cafe.daum.net/bd-dm/Ffus/75
집을 짓는 자 Dhp153-154 [불교적 의미의 윤회 개념] http://cafe.daum.net/bd-dm/AIQM/20
중아함 123. 사문이십억경(沙門二十億經) : 거문고 줄 고르기 비유, 구경의 지혜 http://cafe.daum.net/bd-dm/AHmy/38
잡아함 112. 단지경(斷知經) : 색이 끊어진 줄을 알고, 수·상·행·식이 끊어진 줄을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http://cafe.daum.net/bd-dm/RiV1/4
자아[아트만], 5온[명색, 인간존재], 5취온[불선심, 불선법, 유아견, 탐진치, 집성제] 개념의 분별 http://cafe.daum.net/bd-dm/Qo7Z/6
자아(아트만, 신, 영혼), 5온(명색, 사람), 5취온(집성제, 불선심, 유아견, 탐진치 등 오염원) 개념 분별 [잡아함 306. 인경(人經), 잡아함 1202. 시라경 등] http://cafe.daum.net/bd-dm/RiX4/8
아트만(자아, 진아, 영혼, 신 등)이란 어떤 속성의 개념인가? [힌두교와 불교의 다른 점!] http://cafe.daum.net/bd-dm/Fl2h/49
아라한따경 : <나(5온, 명색)>,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 http://cafe.daum.net/bd-dm/RjVM/2
잡아함 75. 관경(觀經) : 여래, 아라한의 공통점은 5취온(집성제) 염오, 이욕, 소멸로 해탈, 열반 [5온(명색), 5취온(집성제), 자아(아트만) 구별!] http://cafe.daum.net/bd-dm/Rd72/28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5온[인간 존재(명색)]이면서 무아(無我)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http://cafe.daum.net/bd-dm/AHkC/328
잡아함 306. 인경(人經) : 오온[오음]이 [사람(人)]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람들을 위하여... http://cafe.daum.net/bd-dm/GM7Y/21
잡아함 1202. 시라경(尸羅經) : 중생[5온] http://cafe.daum.net/bd-dm/AHnF/144
초기불교(初期佛敎)의 5온설(五蘊說)에 관한 고찰(考察) http://cafe.daum.net/bd-dm/GHGJ/9
존재의 세 가지 특성(三特相, 三法印) http://cafe.daum.net/bd-dm/RiX5/1
오온-무아(五蘊-無我) http://cafe.daum.net/bd-dm/ALiV/107
마음이니 정신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은 뇌의 기능이다 http://cafe.daum.net/bd-dm/BGji/357
유식론과 신경과학 http://cafe.daum.net/bd-dm/GeL8/21
마음 과연 무엇인가 ― 초기불교에서 본 마음 http://cafe.daum.net/bd-dm/GeL8/42
늙음, 병, 죽음[노병사(老病死)]에 대한 숙고 http://cafe.daum.net/bd-dm/JPlw/36
고타마 붓다(석가모니)의 죽음에 대한 시각 http://cafe.daum.net/bd-dm/RzdJ/18
나고 죽는 문제[생사문제]를 가지고 크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 http://cafe.daum.net/bd-dm/RzdJ/8
죽음에 대하여 http://cafe.daum.net/bd-dm/RzdJ/2
육체[색]와 정신[수상행식]의 상호의존 연기성을 설한 경전, 논서, 주석서들 http://cafe.daum.net/bd-dm/RjVM/8
오온과 오취온 http://cafe.daum.net/bd-dm/ALiV/83
5취온 : 잡아함 59. 생멸경(生滅經), 60. 불락경(不樂經), 61~63. 분별경(分別經) http://cafe.daum.net/bd-dm/RiX4/12
잡아함 58. 음근경(陰根經), 55. 음경(陰經) : 5온과 5취온, 실체적 존재와 연기적 존재, 4대=>색, 촉=>수상행, 명색=>식, 味患離, 아만, 번뇌, 업 http://cafe.daum.net/bd-dm/GM7Y/60
잡아함 187. 탐욕경(貪欲經) : 5온, 5취온의 무상 http://cafe.daum.net/bd-dm/RiV1/5
5온[명색]과 5취온[집성제]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알아야 하는 이유 http://cafe.daum.net/bd-dm/JPlw/53
<5온>과 <5취온>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바르게 알고 관찰해야 바르게 불교수행을 하는 것이다! http://cafe.daum.net/bd-dm/ANKx/178
[5온]과 [5취온]을 분명하게 구별하여 알지 못하면 [연기법]을 알지 못해 [무아]도 알지 못하고 [불법]을 이해할 수 없다! http://cafe.daum.net/bd-dm/JPlw/38
바라경 / 화살 / 열반경 / 우현(愚賢) 경 : 5온, 5취온, 연기법을 바르게 알아야... http://cafe.daum.net/bd-dm/GM7Y/82
우다나경(優陀那經) : 유신견, 5하분결, 4식주(색수상행, 식의 증장)... http://cafe.daum.net/bd-dm/GM7Y/22
잡아함 39. 종자경(種子經) : 4식주(어리석은 인식의 증장), 5취온 http://cafe.daum.net/bd-dm/AHnF/166
유탐경.1.2.3.4.5. : 4식, 오온, 오취온, 10지 연기, 4성제 http://cafe.daum.net/bd-dm/GM7Y/37
잡아함 371. 식경(食經) : 6입->촉->수->애->4식[4食 : 식의 증장 질료] http://cafe.daum.net/bd-dm/AHnF/127
식(識)의 증장(virūlha)을 설하는 경문들 http://cafe.daum.net/bd-dm/AHxP/42
잡아함 372. 파구나경(頗求那經) : 4식(四食), 8지연기 http://cafe.daum.net/bd-dm/AHnF/123
잡아함 373. 자육경(子肉經) : 4식(四食) http://cafe.daum.net/bd-dm/GM7Y/46
탐욕 있음 경(S12:64) - 네 가지 음식(자양분)에서 식(어리석은 인식. 5취온)이 발생함 http://cafe.daum.net/bd-dm/AHxP/45
의도 경1(S12:38) :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재생연결식 비판!] http://cafe.daum.net/bd-dm/AHxP/41
불교의 교주인 고타마 붓다의 연기법에 대한 바른 이해 http://cafe.daum.net/bd-dm/G1Xy/40
12연기 유전문 역관과 순관을 쉽게 풀어드릴까요? http://cafe.daum.net/bd-dm/G1Xy/39
불멸 후 불교[무아견]의 힌두화[유아견(상견)] 이후 사라져버린 근본불교의 5온[명색]의 연기법[육체(색)와 정신(수상행식)의 상호의존 연기법] http://cafe.daum.net/bd-dm/G1Xy/51
불교의 변질, 왜곡은 연기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http://cafe.daum.net/bd-dm/AHkC/319
잡아함 59. 생멸경(生滅經) : 5취온 발생과 소멸 http://cafe.daum.net/bd-dm/RiX4/9
연기의 원리 http://cafe.daum.net/bd-dm/G1Xy/4
연기법에 쓰인 용어의 의미 http://cafe.daum.net/bd-dm/ALiV/93
12연기의 12가지 구성 요소 http://cafe.daum.net/bd-dm/ALiV/98
12연기 역관과 순관 [몸이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모든 느낌들도 바로 여기서 싸늘하게 식고 말 것] http://cafe.daum.net/bd-dm/G1Xy/44
잡아함 347. 수심경(須深經) : 선정(4선) 수행 없이 연기에 대한 통찰만으로도 해탈 가능! http://cafe.daum.net/bd-dm/GM7Y/75
대인경(大因經) : 연기법, 무아의 개념, 상단견 등 견해에 대한 분명한 앎을 위하여 http://cafe.daum.net/bd-dm/Gg8K/22
「대인연경」(大因緣經, Mah ānid āna Sutta, D15) : 연기에 대한 큰 가르침 http://cafe.daum.net/bd-dm/BGji/320
12연기 유전문에서의 식(識)과 명색, 명색과 육입의 관계 http://cafe.daum.net/bd-dm/BGji/356
두려움경(A8:56) : 모태에 듦이라는 의미는... http://cafe.daum.net/bd-dm/AHxb/34
[안이비설신의]와 6근[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은 구별해서 이해해야... http://cafe.daum.net/bd-dm/BGji/355
Re:6내외입처는 6근경인가? http://cafe.daum.net/bd-dm/BGji/440
4성제와 8정도 http://cafe.daum.net/bd-dm/Rd72/23
4성제를 설명하는 경전의 다양한 표현 방식 http://cafe.daum.net/bd-dm/Gg8K/56
잡아함 71. 유신경(有身經) : 4성제... [불교가 뭔지부터 바르게 알아야...] http://cafe.daum.net/bd-dm/GM7Y/83
중아함 31) 분별 성제경(分別 聖諦經) [4성제] http://cafe.daum.net/bd-dm/Gg8K/17
불설사제경(佛說四諦經) http://cafe.daum.net/bd-dm/Gg8K/50
중아함 30) 상적유경 : 4성제, 5취온, 4대, 18계, [염오...해탈지견], 연기를 보면 곧 법을 보고, 법을 보면 곧 연기를 본다 http://cafe.daum.net/bd-dm/APsK/24
책상은 괴로워하지 않는다. [고성제] [5취온苦] [일체(5취온)개고] http://cafe.daum.net/bd-dm/Gg8K/24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 http://cafe.daum.net/bd-dm/AHxr/19
지금 여기에서 당장 현실적으로 적용가능한 4성제[12연기]로 재정립해야... http://cafe.daum.net/bd-dm/ALiV/79
두 가지 관찰(二種隨觀經) : 깨달음을 위한 진리들[4성제, 12연기...] http://cafe.daum.net/bd-dm/AIWV/14
이 한길 몸뚱이[5온] 안에(로히땃사 경, Rohitassa Sutta, S.i.62) http://cafe.daum.net/bd-dm/JPlw/47
잡아함경 1307. 적마경(赤馬經) : 세간(세상, 5취온), 4성제 http://cafe.daum.net/bd-dm/GM7Y/8
삼미리제경(三彌離提經) : 세간(세상, 세계, 6입처, 5취온) http://cafe.daum.net/bd-dm/GM7Y/36
8사도와 8정도, 사견과 정견, 순류도(順流道)와 역류도(逆流道), 무명경, 무간등경, 멸경 http://cafe.daum.net/bd-dm/Rd72/24
해탈(자유), 열반(평온)을 위한 불교수행[8정도, 도성제] 방법론 http://cafe.daum.net/bd-dm/Rd72/16
불교의 중도(中道) 개념을 바르게 분명하게 알아야 오리무중 횡설수설론에 속지 않는다! http://cafe.daum.net/bd-dm/RjVM/12
잡아함 987. 이법경(二法經) : 선법과 불선법 http://cafe.daum.net/bd-dm/Rd72/57
M139. 평화에 대한 분석의 경 (Aranavibhanga sutta) : 중아함경169) 구루수무쟁경(拘樓瘦無諍經) : 아홉 가지 ‘평화의 법’http://cafe.daum.net/bd-dm/Rd72/69
할 수 없음 경(A10.76)과 잡아함 3법경 : 생노사=>탐진치=>3결=>...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 방일 http://cafe.daum.net/bd-dm/Rd72/32
세상의 법 경2(A8.6) : 세속팔풍(世俗八風)에 흔들리지 말라 http://cafe.daum.net/bd-dm/Rd72/26
3고(三苦)에 대한 수행 방법 http://cafe.daum.net/bd-dm/Rd72/20
정견[여실지견, 무아견, 중도, 연기법<4성제, 12연기>]이란 어떤 것인가? http://cafe.daum.net/bd-dm/Qo7Z/15
붓다의 견해는 무아견이고, 정견(여실지견)이고, 중도고, 연기법이다. http://cafe.daum.net/bd-dm/Qo7Z/4
애매모호한 자들 http://cafe.daum.net/bd-dm/BGji/263
정견(正見)이 먼저 정립되어야...[사견(邪見)이 괴로움의 원인!] http://cafe.daum.net/bd-dm/BGji/257
무명경(無明經) : 5수음(受陰)[5취온], 12연기 http://cafe.daum.net/bd-dm/AHnF/109
무지경(無知經) http://cafe.daum.net/bd-dm/GM7Y/87
노경(蘆經), 갈대묶음경 : 식과 명색은 상호 의존 http://cafe.daum.net/bd-dm/GM7Y/16
변형불교(북방불교, 남방불교 : 사실상 힌두교)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http://cafe.daum.net/bd-dm/JPlw/35
붓다의 무아견(여실지견, 정견, 중도, 연기법) : 자기 스스로 온갖 족쇄를 채워놓고 낑낑대는 어리석은 자들... ^^ http://cafe.daum.net/bd-dm/JPlw/37
사후윤회는 없다고 하면 단멸론(단견)자로 몰아부치는 어리석은 유아론(상견)자 http://cafe.daum.net/bd-dm/JPlw/33
[중도연기법] 가전연경(迦旃延經) http://cafe.daum.net/bd-dm/BQ8r/34
잡아함경 제 12권《289. 무문경(無聞經)》http://cafe.daum.net/bd-dm/AHnF/106
잡아함 105. 선니경(仙尼經) : 단견(斷見), 상견(常見), 무아견(중도, 연기법) http://cafe.daum.net/bd-dm/GM7Y/17
붓다는 단멸론자?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일체의 느낌이 다 사라져서 남음이 없느니라. http://cafe.daum.net/bd-dm/BGji/446
중아함 12) 화파경(破經) : 붓다께서 말씀하신 5온[명색]의 <무상, 무아>가 뭔 말인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하여! http://cafe.daum.net/bd-dm/RiX5/2
제자의 죽음 앞에서 부처님께서 어떻게 하셨을까 : 기름과 등불 http://cafe.daum.net/bd-dm/BQ8r/44
M063.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 경(Cula-malunkya sutta)과 중아함 221) 전유경(箭喩經) : 10무기 http://cafe.daum.net/bd-dm/R2Wv/9
설명하지 않음[무기(無記)] 경(A7:51) : <5온무아>이기에 여래의 사후 존재에 대해 논할 가치조차도 없는 것이다! http://cafe.daum.net/bd-dm/QoB7/6
잡아함 961. 유아경(有我經) : 상견, 단견, 무아견, 연기법, 4성제 http://cafe.daum.net/bd-dm/GM7Y/58
잡아함 153. 불이경(不二經) : 힌두사상(불이론 : 범아일여)[유아견(상견)] http://cafe.daum.net/bd-dm/JPlw/40
모단경(毛短經) : 유아견(5취온), 무상 고 무아, 해탈(지견) http://cafe.daum.net/bd-dm/GM7Y/62
식은 연이 있으면 생기고 연이 없으면 멸한다 http://cafe.daum.net/bd-dm/BGji/219
M 38.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Mahātanhāsankhayasutta] [사띠 비구경] http://cafe.daum.net/bd-dm/Gg8K/39
중아함 201) 다제경( 帝經) [사띠 비구경] : 윤회, 상견, 12연기 http://cafe.daum.net/bd-dm/Gg8K/31
사후 단멸론자들 [DN 범망경] http://cafe.daum.net/bd-dm/GM7Y/74
인식은 자아인가[뽓타빠다경(D9)] [유아견(단견, 단멸론)] http://cafe.daum.net/bd-dm/GM7Y/81
잡아함 171. 아정단경(我正斷經) : [유아견(단견, 단멸론)] http://cafe.daum.net/bd-dm/JPlw/43
야마까경 : 무아견(중도, 정견, 연기법)을 유아견(단견, 단멸론)으로 이해한 경우 [불법을 바르게 알아야...] http://cafe.daum.net/bd-dm/GM7Y/84
잡아함 104. 염마경(焰摩經) : 붓다의 가르침은 무아견인데 단견(단멸론)으로 오해! [윤회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이런 경전을 이해할 수 있을까?] http://cafe.daum.net/bd-dm/GM7Y/59
대념처경(大念處經)[4념처(四念處)] http://cafe.daum.net/bd-dm/Gg8N/1
위빠사나 4념처 마음챙김 수행 [참고 : 사마타 수행] http://cafe.daum.net/bd-dm/Gg8N/10
입출식념경(入出息念經, 아나파나사티 숫타)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http://cafe.daum.net/bd-dm/Gg8d/5
중아함 52, 53) 식경(食經) : 4념처가 있은 뒤에 곧 7각지를 갖추게 되고, 7각지가 있은 뒤에 곧 명과 해탈을 갖추게 된다 http://cafe.daum.net/bd-dm/Gg8K/45
7각지 http://cafe.daum.net/bd-dm/HYMv/5
세 가지 느낌에 대한 바른 수행 http://cafe.daum.net/bd-dm/Rd72/19
잡아함 239. 결경(結經) : 결박되는 법[12처]과 결박하는 법[6식, 5취온(불선심, 불선법, 유아견, 탐진치, 집성제)] http://cafe.daum.net/bd-dm/RiV1/13
취착경(取著經), 결계경(結繫經), 계착경(繫著經), 사경(使經) http://cafe.daum.net/bd-dm/Rd72/45
수경(受經 : 觀察經) : 5취온 생멸 관찰, 5전(轉)[集滅味患出], 6지 연기 http://cafe.daum.net/bd-dm/AHnF/2
5전경 http://cafe.daum.net/bd-dm/ALiV/15
7처경 http://cafe.daum.net/bd-dm/ALiV/60
66경 http://cafe.daum.net/bd-dm/AHz7/6
정정(正定)과 집중력 [8정도의 정정은 4선인 증거!] http://cafe.daum.net/bd-dm/Gg8G/27
중아함 162) 분별 육계경(分別 六界經) : 6계취(界聚) 6촉처(觸處) 18의행(意行) 4주처(住處) http://cafe.daum.net/bd-dm/Gg8K/25
잡아함 305. 육입처경(六入處經) : 5취온, 여실지견, 정견, 4성제, 37보리분법... http://cafe.daum.net/bd-dm/GM7Y/7
잡아함 139. 우뇌생기경(憂惱生起經) : 오취온, 무상 고 무아, 6견처 http://cafe.daum.net/bd-dm/GM7Y/6
불교에 나타난 힌두교의 윤회설 http://cafe.daum.net/bd-dm/Ffus/97
윤회하기를 바라는가, 윤회하지 않기를 바라는가? http://cafe.daum.net/bd-dm/QoB7/7
외도의 주장 경(전생론, 창조론, 무인론) : 10선계, ... 4성제, 12연기, 5취온, 8정도 http://cafe.daum.net/bd-dm/AHxb/15
[무아]와 [윤회]의 모순 논쟁에 대한 [붓다의 뗏목] 카페의 입장 http://cafe.daum.net/bd-dm/Fzc9/3
각묵스님[남방불교 입장]의 윤회에 대한 시각에 대한 비판 http://cafe.daum.net/bd-dm/Fzc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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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마경(Kaalaama Sutta) :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http://cafe.daum.net/bd-dm/APsK/23
자신을 섬으로 경(S22.43, 自燈明經) 자등명법등명을 위해 5온, 5취온을 관찰하라 http://cafe.daum.net/bd-dm/AHxP/39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4념처, 5취온] http://cafe.daum.net/bd-dm/APsK/13
* 붓다의 최후 법문 * http://cafe.daum.net/bd-dm/AM39/6
전통을 부정하자! http://cafe.daum.net/bd-dm/JPlw/60
한국불교, 왜 종교 개혁이 필요한가 http://cafe.daum.net/bd-dm/Fa4t/41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한 까닭 http://cafe.daum.net/bd-dm/Fa4t/54
[양머리]를 걸어두고서 [개고기]를 팔지는 말아야 한다! http://cafe.daum.net/bd-dm/Fa4t/8
2,000년 넘게 잠들어 있던 진짜불교[근본불교]를 새해부터는 깨우려 합니다! http://cafe.daum.net/bd-dm/JPlw/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