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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리새인과 세리
제가 오늘 설교 본문 제목을 / ‘바리새인보다 의로운 세리’라고 정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저와 같이 교독하시면서, 여러분 보시기에 누가 의로운 사람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9절부터 13절까지만 같이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보시기에 누가 의롭습니까? 바리새인과 세리의 모습을 각각 살펴보면서 누가 의로운지 보겠습니다.
먼저,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라는 말은 어원으로 보면 / ‘분리된 사람, 구분된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구약성경의 율법뿐만 아니라 구전되어 온 유대교 전통을 지킴으로써 거룩함과 의로움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11절에 의하면, 바리새인은 토색(탐욕스러운),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자신은 십계명을 잘 지키는 매우 윤리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바리새인은 1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 소득의 십일조도 잘 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은 교회 목사님들이 딱 좋아할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자입니다. 이렇게 바리새인은 윤리적 측면이나 종교적 측면에서 구별되어 보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자신 스스로 의롭다고 말하는데 일리가 있습니다.
반면에, 세리를 한 번 볼까요? 예수님 당시의 세리는 / 로마제국에 속해 있는 지방에서 세금걷는 일을 하던 사람을 말합니다. 유대인의 눈으로 볼 때 / 그들은 압제자인 로마의 이익을 위해 일하면서 / 동족들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자들이었고 / 안식일에도 일하거나 직업상 이방인들과 접촉하는 기회가 많아 / 종교적으로도 정결하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다가 부정직한 세리들은 / 로마 당국에 가져다주어야 할 금액보다 더 많이 거두어 부당한 방법으로 사리사욕을 채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백성들로부터 오는 무시와 멸시와 미움을 온몸으로 받으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기도하는 세리의 모습이 13절에 나와 있는데, 이 모습을 통해 세리의 일반적인 삶의 모습이 어떠한지 우리는 유추할 수 있습니다.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뭐그리 잘못했는지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만 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기도하러 올라온 바리새인과 세리의 모습을 정리하면, 바리새인은 여러 이유들을 들어 자신은 의롭다고 하나님께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한편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누가 의로운 자입니까?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세리가 아닌 바리새인이 훨씬 더 의롭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 또한 오늘 본문 13절까지만 보면, 바리새인이 의로운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두 관점 : 하나님의 기준과 인간의 기준은 다르다
이사야 55장 8-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표준새번역으로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8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 9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다를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합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의롭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13절까지의 말씀만 읽어보면, 바리새인이 세리보다 의로워 보입니다. 그런데 14절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너희의 생각과 다르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바리새인이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데 그는 의롭지 못하다. 세리가 의롭다.”
이사야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으로 볼 때, 분명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평가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로 사람을 어떤 측면을 보고 판단합니까? 겉으로 보이는 행동입니다. 한 마디로 외모를 보고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 불리는 사무엘조차도 사람을 볼 때 외모로 판단하다가 하나님께 책망을 받는 장면이 사무엘상 16장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고 /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 / 사무엘을 베들레헴 이새의 집으로 보내십니다.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왕으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첫 번째 아들 엘리압을 보자 /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라 생각하고 기름을 부으려 했습니다. 사무엘은 용모가 준수하고 키가 큰 엘리압이 왕의 재목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행동을 제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 말씀입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사람은 자꾸 외모를 보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예레미야 17장 10절에서도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심장을 감찰하는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은 겉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행위를 보고 / 세리와 비교해서 자신은 의롭다고 선언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중심을 보시고 / 세리가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3. 바리새인과 세리의 중심
이제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라는 관점에서 바리새인과 세리를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 관점에서 볼 때, 바리새인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 존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1-12절 말씀을 통해 우리 인간은 어떤 위치에 있는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우리 인간은 재판관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재판관이십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지금 자신을 재판관의 위치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피고가 판사가 되어 있는 격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하와를 어떻게 유혹합니까? 하나님께서 절대로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선악과를 먹으라고 유혹합니다. 그것은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첫 번째 죄악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 그래서 자신이 재판관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려는 것, 이것이 인간의 교만의 죄입니다. 바로 바리새인 마음에는,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교만이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서 그의 교만을 알 수 있습니다. 11절에서 바리새인은 이렇게 말하죠.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인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와 다르다. 나는 의인이고 너희는 죄인이다”는 논리가 바리새인의 말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마음의 중심이 / 교만으로 가득찼다는 방증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인간은 재판관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비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윤리적이고 종교생활 열심히 하니까 구원 받았고 / 너는 너의 악한 행동을 보니까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 우리가 해서는 안 될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비교해서 / 남들보다 잘 사는 것 같으면 구원 받은 것 같고, 못 살면 구원 받지 못할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스스로 구원 여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입니다. 지금 바리새인과 세리는 기도하러 왔습니다. 기도하러 왔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저는 의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사야 6장을 보면, 성전에서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정한 사람인지 깨닫게 됩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벧전5:8)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3장 10절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한 술 더 떠서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라고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말씀합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라는 러시아의 대문호가 있습니다. 이 분은 20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러시아 문예가로 197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스탈린과 공산당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강제수용소에서 생활하기도 하고 / 급기야 망명까지 했던 인물입니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솔제니친은 / 오랜 망명을 끝내고 러시아로 돌아옵니다. 솔제니친은 자신의 고향 러시아로 돌아가는 동안 / 러시아를 횡단하며 여행 중에 만난 모든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런데 그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시민을 억압하고, / 심지어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도 / 그 지위에 남아 있었던 지역 관료들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의 이런 행동을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솔제니친이 악한 체제의 일부였던 사람들과 사귀면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이 말을 들은 솔제니친은 자신을 비난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니다, 선과 악의 경계선은 ‘우리’와 ‘그들’ 사이에 있지 않다.” 선과 악의 경계를 나누는 선은 우리 각 사람을 관통한다는 의미의 말입니다(톰 라이트,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40-41쪽). 한 마디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물론 작고 낮은 등급의 악함은 구별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우리 모두는 선하고 저들은 모두 악하다’ ‘나는 선하고 너는 악하다’라고 판단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연약한 존재입니다. 비유로 말하면, 달의 영향을 받는 바닷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바다의 썰물과 밀물의 생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석 간만의 차가 생기는 이유는 달의 중력이 바다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달은 바다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 때문에 바닷물이 요동을 치는 것이지요. 우리 마음도 이런 바닷물과 같습니다. 영화에서 늑대인간은 보름달만 뜨면 늑대로 변하듯이, 달 같은 존재가 우리 주변에 오면, 우리 마음 또한 늑대인간처럼 변합니다. 누군가에게 때론 배우자가 달 같은 존재입니다. 마음이 괜찮다가도 남편이나 아내가 오면 마음이 뒤틀립니다. 제가 그런 것은 아니구요. 어떤 분에게는 자동차 핸들이 달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게 온유하신 분이 핸들만 잡으면 난폭해집니다. 여러분에게 달 같은 존재는 누구이며 무엇입니까? 이렇게 우리 인간은 다른 존재에 쉽게 영향을 받고 악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죄에 연약한 존재인지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시편 103편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공동번역입니다.
“우리의 됨됨이를 알고 계시며 우리가 한낱 티끌임을 아시기 때문이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짓는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프시고 때론 화도 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장 힘들어 하시는 것은 / 죄를 짓고 나서 우리가 그것을 감추려 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잡아떼는 것이지요. 즉,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도 자식에게 가장 화가 날 때가 언제입니까? 거짓말 할 때입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하게 하는 근원은 어떤 존재입니까?
요한복음 8장 44절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사단 마귀는 자신을 광명한 천사로 위장합니다. 사단은 절대로 회개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거짓 그 자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진리라고 믿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이 바로 사단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분명, 그 중심은 온갖 더러운 것들로 부글부글 끌고 있는데, 자신들은 의롭다고 스스로 선언합니다. 자신들은 세리와 죄인과는 다른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향해 비판하고 / 심지어 귀신들렸다고 조롱합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에서 사자후를 토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27절).
외식한다는 말은 겉과 속이 다르다. 즉, 위선적이라는 말입니다. 바리새인은 회칠한 무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은 굉장히 더럽습니다. 거짓의 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 5장 20절을 이해하기 쉽게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에게 의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의로움은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의가 더 나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세리를 통해 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바리새인처럼 겉과 속이 다른 회칠한 무덤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연약하고 죄인인지 정직하게 인정하고 /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는 것이 / 바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의’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가 밧세바와 간음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 기도를 드립니다. 회개기도 가운데 그는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상한 자와 가까이 하시고 / 진정으로 통회 자복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시34:18). 우리의 ‘의로움’은 바로 자신은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서 섰다는 정직함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세리가 그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온 것이지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3절).
이사야가 성전에서 만군의 여호와를 보았을 때, 베드로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을 때와 동일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참 좋습니다. 이런 죄인을 받아주시니까요. 하나님 앞에 정직히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달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자신 안에 얼마나 거짓으로 가득차 있는 지 몰랐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사용하여 더 유명해진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의 금언 중 /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을 몰랐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의롭다고 말씀하십니다.
#4. 의로운 자의 삶
세리처럼 자신은 누군가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재판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깨닫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까요?
요한복음 8장 첫 번째 단락은 / 간음하다 붙잡히 여인을 예수님께서 구해주시고 용서해주는 이야기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사람들이 잡아다가 돌로 치려할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돌을 내려놓고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나지요. 자신이 죄인인 줄 아는 사람은 /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돌을 들어 치는 듯한 비판을 하지 못합니다. 자신은 그와 다르다고 이야기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신 것처럼 / 자신 또한 죄 지은 자를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의 모토는 ‘구별, 분리’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세리와 죄인과 구별된 존재고 그들보다 거룩한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즉, 자신들은 의롭다고 판단했습니다.
반면, 우리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그의 제자들이구요.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죄 지은 자들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재판관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아니면, 피고석에 서 있습니까? 옆을 보십시오. 같이 피고석에 서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이웃들을 나보다 못하다고 우리가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인정하고 /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십자가를 믿으며 / 주님이 우리를 바라보듯 /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롭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죄 짓는 안는 것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 우리는 여러 형태로 죄를 지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담과 하와처럼 선악과를 따먹고 숨은 것처럼 그렇게 지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아프더라도 세리처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죄를 고백하십시오. 그래서 매주일 드리는 회개의 기도가 정말 중요합니다. 일상 가운데 죄를 짓더라도 / 오늘 본문의 세리처럼 예배 드리러, 기도하러 성전에 나와야 합니다. 죄 가운데 있던 세리가 의롭다는 말씀을 들은 곳은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에서 회개할 때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직시하며 아파하고 애통해해야 합니다. 그럴 때 십자가 위에서 이런 말씀이 울려 퍼질 것입니다. “의로운 나의 자녀여,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은 우리 또한 주님처럼 / 우리 이웃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 그들이 우리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 의보다 나은 바로 세리의 ‘의’,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입니다.
-상도중앙교회 서기태목사님 설교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