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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빛내림
고려의 '무신(武神)'이라는 김준(金俊)은 역적인가
<고려사(高麗史)>
김준(金俊)의 초명(初名)은 김인준(金仁俊)이니 부(父) 김윤성(金允成)은 본래 천예(賤隸)로서 그 주인을 배반하고 최충헌(崔忠獻)에게 투탁(投託)하여 노(奴)가 되어서 김준(金俊) 및 김승준(金承俊)을 낳았다. 김준(金俊)은 용모가 늠름하고 성품(性品)이 관후하여 아랫 사람에게도 겸손 공경하였으며 또 활쏘기를 잘하고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었으나 날로 유협자제(遊俠子弟)와 더불어 떼를 지어 마시매 집에서 저축한 바가 없었다.
요즘 MBC에서 방영하는 '무신(武神)'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고려(高麗) 최씨 무신정권(武臣政權) 시절에 활약했던 김준(金俊)의 인생이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무신(武神)'에서 다루는 김준(金俊)의 행보는 문헌기록과 사뭇 다르다. 물론 '무신(武神)'이라는 드라마는 픽션(fiction)이다. 그러나 역사에 기록된 인물을 묘사 할 때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이해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신(武神)'이라는 드라마는 기존 역사책에서 다루지 않았던 무신정권(武臣政權) 최후의 주자인 김준(金俊)을 다루고 있다는데, 그 의의가 크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김준(金俊)의 초명(初名)은 김인준(金仁俊)이며, 부(父) 김윤성(金允成)은 본래 천예(賤隸)라고 하였다. 고려(高麗)시대 천예(賤隸)라고 하면, 즉 천인(賤人)들을 말한다. 따라서 김준(金俊)의 아버지는 출신이 미천한 천인(賤人)이었다. 김준(金俊)의 아버지 김윤성(金允成)은 천인(賤人)으로서 그 주인을 배반하고 최충헌(崔忠獻)에게 투탁(投託)하여 노(奴)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윤성(金允成)은 어디에 있다가 최충헌(崔忠獻)의 가노(家奴)가 되었을까?
고려사(高麗史)에 “고종46년(1259년)에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승격시켰는 바”라고 적혀있다. 영주(榮州)는 1018년(현종 9년)에 안동(安東)의 속현으로 병합되었으나, 1143년(인종 21년)에 순안현(順安縣)으로 승격되어 독립했으며, 1259년(고종 46년)에 영주(榮州)로 승격했다. 1259년(고종 46년)이라면 김준(金俊)이 최우(崔瑀)의 서자(庶子)인 최항(崔沆)의 아들 최의(崔竩)를 죽이고 권력을 장악하였던 시기이다. 이해에 김준(金俊)이 순안현(順安縣)을 영주(榮州)로 승격시킨 것이다. 순안현(順安縣)이 보잘 것 없는 지역이라면 김준(金俊)은 굳이 순안현(順安縣)을 영주(榮州)로 승격시킬 이유가 없다. 이는 김준(金俊)의 아버지 김윤성(金允成)의 출신지역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고려사(高麗史) 절요>에 “김준(金俊)의 아버지 김윤성(金允成)은 천예(賤隸)로서 그 주인을 배반하고 최충헌(崔忠獻)에게 투탁(投託)하여 친시(親侍)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친시(親侍)라 하면, 최충헌(崔忠獻) 가문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집사(執事)를 말하는 것이다. 김윤성(金允成)이 최충헌(崔忠獻)에게 투탁(投託)한 시기는 기록에 없기에 자세히 알수는 없지만, 1202년 경주(慶州)의 별초군(別抄軍)과영주(榮州)와의 싸움에서 김윤성(金允成)이 최충헌(崔忠獻)에게 경주(慶州)의 정황을 소상히 알려준 공로로 친시(親侍)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최충헌(崔忠獻) 가문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집사(執事)가 되었던 김윤성(金允成)은 김준(金俊) 및 김승준(金承俊)을 낳았다. 김준(金俊)은 출신이 미천 하지만 아버지 김윤성(金允成)의 후광과 뛰어난 무예 실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유협자제(遊俠子弟)와 더불어 꿈을 키웠다. 성장한 김준(金俊)은 박송비(朴松庇), 송길유(宋吉儒) 등이 최우(崔瑀)에게 천거하여 전전승지(殿前承旨)가 되었다. 전전승지(殿前承旨)라함은 고려(高麗) 시대 왕명의 전달과 궁중의 열쇠 등을 맡아보던 관청인 액정국(掖庭局) 소속이다.
이를보면 최우(崔瑀)가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왕실의 돌아가는 정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었고, 그 임무를 김준(金俊)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준(金俊)이 최우(崔瑀)의 폐첩(嬖妾)인 안심(安心)과 간통한 죄로 고성(固城)에 유배(流配) 되었다. '무신(武神)' 드라마는 김준(金俊)이 최우(崔瑀)의 딸인 최송이와 부적절한 관계로 설정하였고, 이를 눈치챈 최우(崔瑀)가 먼 변방으로 내쫓은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최우(崔瑀)의 딸인 최송이, 그리고 사위인 김약선(金若先)에 대해 간단히 알아본다.
김약선(金若先)은 본관이 경주(慶州)이고 문하시랑 평장사 김태서(金台瑞)의 아들이다. 김약선(金若先)과 최우(崔瑀)의 딸인 최송이가 언제 결혼을 했는지는 알수가 없다. 다만 1225년(고종 12)에 궁궐을 수리할 때 고종이 김약선(金若先)의 집을 임시 거처로 사용한 것을 보면, 1225년 이전에 혼인이 성사된 것으로 보여진다. 김약선(金若先)과 최우(崔瑀)의 딸인 최송이의 혼인은 최우(崔瑀)의 입장에서 문벌귀족인 김약선(金若先)의 힘이 필요 하였던 것이고, 이에 최송이의 뜻과는 상관없이 원치않은 혼인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혼인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자 하였던 최우(崔瑀)에게 뜻밖의 사건이 터진다.
김약선(金若先)이 최우(崔瑀)의 부중(府中) 여자들을 망월루(望月樓) 모란방(牡丹房)에 모아 놓고 음란한 짓을 자행하다가, 최송이의 밀고(密告)로 최우(崔瑀)에게 살해 되었다. 최송이가 김약선(金若先)을 무고(誣告)하게된 이유는, 그 자신이 노비(奴婢)와 간통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송이와 간통한 노비(奴婢)가 '무신(武神)' 드라마 속의 김준(金俊)과 연결 지웠지만, 간통한 노비(奴婢)는 참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최송이와 김준(金俊)의 사랑은 너무도 왜곡된 것이다.
최우(崔瑀)는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한 김약선(金若先)을 죽이는 실수를 범한후, 1248년 자신의 애첩인 기생 서련방(瑞蓮房)의 소생 만종(萬宗)과 만전(萬全)을 환속 시킨다. 앞서 최우(崔瑀)는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한 김약선(金若先)을 위해 만종(萬宗)과 만전(萬全)을 송광사(松廣寺)로 보내 승려가 되어었다. 이때에 이르러 최우(崔瑀)의 부름을 받고 환속하여, 만전(萬全) 즉 최항(崔沆)을 후계자로 삼았다.
최항(崔沆)이 후계자로 낙점 받은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김준(金俊)이었다. 1249년 최항(崔沆)이 최우(崔瑀)로부터 후계자로 낙점을 받자, 김약선(金若先)의 아들인 김미(金敉)는 최항(崔沆)을 먼저 도모하기 위해 백부(伯父) 추밀원 부사 김경손(金慶孫)에게 편지를 띄운다. 그러나 김경손(金慶孫)은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 최우(崔瑀)에게 그 사실을 고변한다. 이에 최우(崔瑀)는 김미(金敉)를 고란도(高瀾島)로 귀양 보내게 되었고, 모든 권력은 최항(崔沆)에게 집중 되었다.
그 해 겨울 최우(崔瑀)가 죽자 최항(崔沆)은 정권을 이어받고,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었다. 최항(崔沆)이 정권(政權)을 이어 받음에 미쳐 김준(金俊)을 별장(別將)으로 보(補)하여 더욱 믿어었다. 최항(崔沆)과 김준(金俊) 일파는 정권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하여, 1250년에 전추밀원부사(前樞密院副使) 주숙(周肅) 등을 죽였으며, 1251년 계모 대씨(大氏)를 독살하고, 그 일당인 추밀원지사(樞密院知事) 민희(閔曦)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事) 김경손(金慶孫)을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죽였다.
이어 좌승선(左承宣) 최환(崔緝), 장군 김안(金安), 지유(指諭) 정홍유(鄭洪裕) 등을 유배시키고, 참지정사(參知政事) 정안(鄭晏)을 죽이는 등 반대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한다. 최항(崔沆)의 집권과정에서 공이 큰 인물은 유경(柳璥)을 제외하면 대부분 이공주(李公柱), 최양백(崔良伯), 김준(金俊) 등의 최씨가(崔氏家)의 가노(家奴)와 세력 기반이 미약한 박송비(朴松庇), 송길유(宋吉儒) 등 이었다. 이들 최항(崔沆)의 심복들은 미천한 출신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정치를 좌우하게 된다.
최항(崔沆)은 집권 초에는 각 지방의 별공(別貢)과 어량(魚梁)을 면제하고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던 교정도감(敎定都監)의 수획원(收獲員)을 소환하고, 안찰사(按察使)에게 그 임무를 맡기는 등 인심을 얻으려고 힘썼으나 점차 사치와 향락에 젖어들었다. 또한 최항(崔沆)의 심복들 사이에도 알력이 생기어, 최양백(崔良伯)과 김준(金俊) 세력으로 갈리어 졌다. 1257년 최항(崔沆)이 병으로 갑자기 죽었다. 이에 최양백(崔良伯)은 상(喪)을 숨기고 야별초ㆍ신의군(神義軍)ㆍ서방(書房)3번ㆍ도방(都房) 36번을 옹위한 뒤 상(喪)을 발표함으로써 최항(崔沆)의 아들 최의(崔竩)로 하여금 정권을 이어받게 하였다. 최의(崔竩)는 최항(崔沆)이 승려로 있을 때 송서(宋)의 여종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로서, 적자가 없어 후사가 되었다. 앞서 최항(崔沆)이 선인렬(宣仁烈)·유능(柳能)에게 최의(崔竩)를 위촉한 바가 있었으므로 최항(崔沆)이 죽자 최양백(崔良伯) 등이 야별초 신의군(夜別抄神義軍)·서방3번(書房三番)·도방36번(都房三十六番)을 모아 옹위함으로써 최의(崔竩)의 집권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최의(崔竩)는 김준(金俊) 세력을 멀리하고, 최양백(崔良伯) 세력들을 등용 하였다. 더욱이 김준(金俊) 세력의 핵심인 송길유(宋吉儒)를 추자도(楸子島)로 유배하자, 김준(金俊) 세력은 최의(崔竩)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1258년에 신의군도령낭장(神義軍都領郎將) 박희실(朴希實), 대사성(大司成) 유경(柳璥), 장군 박송비(朴松庇), 도령낭장 임연(林衍) 등이 모의하여 최의(崔竩)를 제거한다. 또한 최양백(崔良伯)도 김준(金俊)에게 살해 당하였다. 이로써 최충헌(崔忠獻), 최우(崔瑀), 최항(崔沆), 최의(崔竩) 4대 60여년간 부자 관계로 세습된 최씨(崔氏) 무신정권(武臣政權)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최씨(崔氏) 무신정권(武臣政權)을 무너뜨린 김준(金俊)은 장군(將軍)을 제수(除授) 받고, 위사 공신호(衛社功臣號)를 하사 받았으며, 우부승선(右副承宣)에 제배(除拜) 되었다. 이렇듯 노비(奴婢) 출신이라는 헨디켑에도 불구하고 김준(金俊)의 파격적인 승차(陞差) 뒤에는 환자(宦者) 김인선(金仁宣)이 있었다. 환관 김인선(金仁宣)은 왕이 매우 총애 하였고, 김준(金俊)의 처(妻)가 또한 김인선(金仁宣)의 질녀(姪女)라 두사람의 관계는 무척 두터웠다. 1259년 고종(高宗)이 병사하자, 김준(金俊)은 둘째 아들인 안경공(安慶公)을 내세워 정권을 차지하고자 했으나 신하들의 극렬 반대로 첫째 아들인 원종(元宗)을 왕위에 올린다.
이를 계기로 김준(金俊)은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어사대부(御史大夫) 주국(柱國), 태자 빈객(太子賓客) 익양군 개국백(翼陽郡開國伯)을 제배(除拜) 받았고, 5년후에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어 명실공히 최고 권력자에 오른다. 이후 김준(金俊)은 모든 권력을 손에쥐고 정사(政事)를 오로지 하였다. 그러나 김준(金俊)의 권력도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1268년 몽고(蒙古) 황제가 사신을 보내 김준(金俊)의 부자(父子)와 그 아우 김충(金沖)을 모두 경사(京師)에 오도록 칙(勅)하였는데, 김준(金俊)은 사신을 죽이고 깊이 해중(海中)에 들어가고자 하여 왕께 아뢰었으나 원종(元宗)은 듣지 않았다. 그러나 김준(金俊)은 더욱 몽고(蒙古)의 명(命)을 거절하니 원종(元宗)이 매우 원망하게 되었다.
원종(元宗)과 김준(金俊)의 사이가 더욱더 벌어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김준(金俊)의 아들 승선(承宣) 김애(金)의 가노(家奴)가 용산별감(龍山別監) 이석(李碩)과 함께 감정이 있었는데, 석(碩)이 내선(內膳) 두 배를 싣고 강(江)에 정박함을 듣고 김준(金俊)이 야별초(夜別抄)를 보내 이를 빼앗아 그 집에 들어가 야별초(夜別抄)에게 나누어주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원종(元宗)이 더욱더 김준(金俊)을 미워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추밀부사(樞密副使) 임연(林衍)이 김준(金俊)의 아들과 더불어 전토(田土)를 가지고 다투었는데 김준(金俊)이 아들의 편에서서 호응하자, 임연(林衍)은 두려움을 느낀다. 이때 낭장(郞將) 강윤소(康允紹)가 원종(元宗)의 사랑을 얻게 되고 또 임연(林衍)과 함께 친하게 지냈는데, 원종(元宗)이 김준(金俊)을 꺼리는 것을 알았으며, 또 임연(林衍)과 김준(金俊)의 사이에 틈이 있음을 알고 원종(元宗)에게 김준(金俊)을 제거 할 뜻을 내비친다. 이에 원종(元宗) 또한 눈에 가시였던 김준(金俊)을 제거 할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임연(林衍)에게국세(國勢)가 위태로우니 장차 어찌 하리요라고 하여 임연(林衍)에게 뜻을 전달한다.
임연(林衍)이 마침내 대정(大)을 만들어 궤속에 넣어서 선물인 것 같이 하여 미리 궁중(宮中)에 두고 날을 기약하여 거사(擧事)하기로 하였는데, 마침 원종(元宗)이 몽고(蒙古)의 사신을 전송하러 나갔으나 김준(金俊)의 무리는 모두 호종치 않았으므로 실행(實行)하지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김준(金俊)이 관아(官衙)에 나오지 않았으므로 김경(金鏡) 등이 왕명(王命)으로써 이를 부르매 김준(金俊)이 급히 조정에 나왔는데, 김충(金沖)도 김준(金俊)이 관아(官衙)로 갔다는 말을 듣고 또한 조당(朝堂)에 나아갔다.
은이 왕지(王旨)를 전하고 김준(金俊)을 인도(引導)하여 편전(便殿) 앞에 이르더니 원종(元宗)이 불예(不豫)하다 칭하고 정당(政堂)에 끌어드이매, 김상(金尙)으로 하여금 대정(大)으로 이를 치게 하고 김준(金俊)을 베었다. 또 김충(金沖)을 안으로 끌어들였는데 김충(金沖)이 핏자국을 보고 달려 나가고자 하는지라 환자(宦者) 김자정(金子廷)이 그의 아우 김자후(金子厚)로 하여금 이를 죽이게 하였다. 임연(林衍)이 야별초(夜別抄)를 분견(分遣)하여 김준(金俊)의 제자(諸子)와 그 당(黨)을 잡아 모두 베었다. 또 김준(金俊)의 처(妻)와 장군(將軍) 최공의(崔公義), 상장군(上將軍) 김홍취(金洪就)를 해도(海島)에 유배(流配)하고 장군(將軍) 이제(李悌) 손원경(孫元慶)은 자문(自刎)하여 죽었다. 군신(群臣)이 표문(表文)으로서 김준(金俊)을 벤 것을 축하하였다.
김준(金俊)은 미천한 천인(賤人)으로 최우(崔瑀)의 충실한 가노(家奴)가 되어 사랑을 받다가 최항(崔沆)의 집권과정에서 큰 공(功)을 세워 정치 일선에 등장 하였다. 이후 최의(崔竩)와 최양백(崔良伯) 세력들을 제거하고, 최씨(崔氏) 무신정권(武臣政權)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김준(金俊) 자신도 최씨(崔氏) 무신정권(武臣政權)과 똑같은 길을 가다가 참혹한 결말을 맞게 되었다. 이처럼 천인(賤人) 출신자가 권력을 쟁취 할 수 있었던 것은, 김준(金俊) 개인의 과욕심에서 탄생된 것이 아니라 고려(高麗) 왕조의 무능이 아니었나 싶다. 이를두고 후세 사가(史家)들이 김준(金俊)을 반역열전(反逆列傳)에 기술한 것은 무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