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11월25일주일설교.hwp
2007.11.25 온고을교회 주일설교(황의찬전도사)
������아브라함의 변증������
창20:1~18
수험생들의 문제풀이를 분석해 보면 한번 틀린 문제가 거듭 틀리는 경향이 있듯이, 사람들은 한번 저지른 범죄를 끊지 못하고 반복하여 범한다.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 역시 똑같은 유형의 실수를 되풀이 한다.
25년 전에도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의 기근을 피해 찾아간 애굽에서 자기 아내를 동생이라고 했다. 그러자 애굽의 왕 바로가 사라를 후궁으로 맞아들이려다가 나중에 부부인 줄 알고 돌이켰다. 그랬음에도 아브라함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이번에는 이집트 근방 가나안의 최남단 그랄 지방으로 전 가족을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서도 자기 아내 사라를 동생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랄 왕 아비멜렉이 그녀를 후궁으로 데려갔으나 애굽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사라는 무사히 되돌아오게 되었다.
본문은 유형이 비슷한 아브라함의 거듭된 실수에 대한 기록이라고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두 번째 사건에 대한 서술에서 우리는 보다 많은 메시지를 찾아볼 수 있다.
두 나라 왕들이 사라를 취하면서 아브라함에게 건네준 선물을 보면, 애굽 왕 바로는 혼수 예물의 성격으로 노비와 가축들을 주지만, 그랄 왕 아비멜렉은 계획했던 혼인관계가 성사되지 못한 사건에 대한 보상의 성격으로 예물을 주었다. 그리고 사라의 실추된 명예 회복을 위한 위자료로 은 천 개를 아브라함에게 준다.
또한 하나님의 의중을 알게 된 이후에 애굽 왕 바로는 자신을 속인 아브라함에게 분노하여 당장에 내쫓아 버렸지만, 그랄 왕 아비멜렉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아브라함에게 오히려 살아갈 땅을 제공하는 후덕함을 보일 뿐 아니라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였다는 사실에 대해 그를 불러 책망하는 한편, 왜 그렇게 했는지 변명을 들어주는 성품의 사람이었다. 그 바람에 두 번째 사건의 서술에서는 첫 번째와 달리 아브라함의 변명이 나온다. 그 변명을 살펴보자!
아브라함은 낯선 땅 그랄 지방에 당도하여 현지 주민들의 종교적 성향을 분석했는데, 그 지방은‘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지역’으로 결론을 내렸다.(11절)
요즘 한국에서는 대통령 선거 때문에 여론조사 결과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그러나 이 조사 결과를 과연 신뢰할 수 있을지 의문이듯이 아브라함의 그랄 지역의 종교적 성향 분석 결과는 엉터리였음이 8절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랄 왕이 꿈에 하나님이 현몽하여 자기를 꾸짖었다는 사실을 다음 날 아침에 발표했을 때 그 지역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했다고 8절은 기록한다. 아브라함의 분석이 빗나갔음에 대한 반증이다.
12절은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자기 동생이라고 말한 것에 대한 변론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동생임에는 틀림없다. 그 사실을 내세우며 자기가 아내를 동생이라고 말한 것이 나쁘지 않다고 억지를 쓰고 있다.
물론 그의 변명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들이 결혼하는 순간 사회적으로 내세워야 할 보다 확실한 신분은 부부관계지, 이복남매라는 혈연관계가 아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자기 편의에 따라 때로는 부부로, 때로는 남매로 행세하는 이중적인 성품을 드러낸다.
우리도 다툼이 있을 때,“내가 틀린 말 했습니까?”라며 들이대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황에 적절한 처세와 말이다. 자기 옳은 것만 내세우다 보면 주변 사람들이 피곤해진다. 그로 인해 이웃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예수님도 이 점을 경계 하셨다.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여 천국 길을 가로 막느니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고 말씀하신다.(마18)
계속되는 아브라함의 변명 13절은 대의명분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지만, 그에 따른 행동 세칙에 중대한 하자가 있음을 보여준다.
고향에서 부모와 이웃과 친지와 더불어 살고 있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나안을 향하여 떠난 일은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다 할 수 없는 믿음의 본이 되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낯선 여행지에 가게 되면 부부관계를 감추고, 남매관계를 내세우기로 결정한 것은 온당치 못하다.
우리도 때때로 명분이 좋다 해서 사소한 것들을‘기타 등등’하면서 대충대충 해치우는 우를 범한다. 이 역시 예수님은 그냥 넘기시지 않았다.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한 자는 큰일에도 충성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다.(마25)
하나님이 명령하셨을 때에는 그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망각했다. 그로인해 하마터면 간음의 죄를 저지를 뻔했던 아비멜렉에게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경계하셨는데, 그 말씀 중에서 간음죄는‘하나님께 범하는 죄’(6절 끝부분)라는 언급은 심상치 않다.
대부분의 범죄에는 피해자가 있다. 그래서 죄인은 피해자에게 먼저 죄 값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간음죄는 하나님을 향한 범죄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도 밧세바와 간음하고 선지자 나단으로부터 책망을 받고 쓴 통회의 글인 시편 51편에서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라고 자복한다.
아브라함의 자기중심적 편의주의가 자칫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하나님께 범하는 중죄’의 수렁으로 빠지게 할 뻔했다.
본문의 아브라함의 변명은 다름 아닌 우리의 변명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처세의 원칙을 정하고 규범을 세우지만, 하나님을 도외시한 채 결정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고통에 허덕인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쌓아 올려도 만족이 없고, 행복과 평안이 없다. 그러므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개입하시기 전에는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다. 지금 내 앞에 고통이 있다면 틀림없이 우리는 아브라함의 변명의 범주 안에서 그 원인을 찾아낼 수 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을 통해서 이 사건을 원만히 해결하시고, 사라의 추락한 명예를 회복한다. 그리고 제 정신으로 돌아온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를 들으시고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시고 다시 태를 열어 출산을 허락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