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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론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열리는 세상-
1. 서론
안도현은 1961년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에서 아버지 안오성과 어머니 임홍교 사이의 4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2살 때 가족을 따라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으로 이주하여 안동 풍산초등학교를 다니다가 대구 아양초등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하였고,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와 대건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낙동강’이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1984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어 문단에 다시 한 번 더 자신의 이름을 알린 바 있다. 그리고 1985년 민음사에서 첫 시집‘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출간하였다.
안도현은 시력이 40년이 넘는 시인이다. 그는 경상도 사람으로 전라도에서 대학(문예 장학생으로 입학-원광대학교)을 졸업하였고, 전라북도 이리 이리중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하여 1985년부터 1989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전교조 활동으로 인하여 학교로부터 해직된 바 있다. 1994년 전라북도 장수 산서고등학교로 복직하여 1997년까지 재직하였다. 그 후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2004년 전주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19년 직장을 옮겨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20년에는 제2의 고향인 전라북도 전주를 떠나 고향인 경상북도 예천으로 귀향하였다.
안도현 시인의 시 10여 편은 2012년부터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바 있다. 안도현은 정당에 가입하였으며 야당을 지지했다는 이유(시인 자신의 입장이다.)로 검찰의 소환을 받았는데 이런 환경에서는 시를 쓸 수 없다고 생각되어 2013년 정부에 대한 반대로 절필을 선언한 바 있다. 그리고 2017년 4월에 다시 시를 발표하였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시인의 정치에 대한 입장도 바뀌었다. 시인이 정치세력에게 시(김지하의 시집-오적 등)로 저항하는 시대에서 이제는 시인이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박정희 정권과 군부 독재 시절에는 문인들이 정치세력에 대항했다는 것으로 직장으로부터 해직되었고, 사법기관에 구금되고 정치권력에 예속된 판결로 인해 억울한 교도소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시인도 정치적인 입장을 자유롭게 말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구조사회의 지배 권력이 문인들에게 겨누는 창과 칼을 거두어들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문화정책이나 국가의 문화 예산을 집행하고, 정치적인 문화 논객들을 부추겨 언론으로 하여금 자신의 입지를 넓히는데 주력하고 있다. 시인들도 청치적인 성향에서는 좌파와 우파, 중도로 갈라졌다. 표면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시인들도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게 힘을 실어주려고 구체적으로 행동하곤 한다.
오래전부터 실행되고 있는 일이지만 국가가 문예진흥원 등에 문화 예산을 집행하는데 있어 문인들이 경쟁하곤 한다. 이제는 문인들도 국회의원들처럼(국가 예산 등의 안건을 발의하고 상정할 때는 죽이니 살리니 하면서 싸우다가도 국회를 벗어나기도 전에 서로 악수를 하고 웃는 국회의원들이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정치에 있어서는 서로 경쟁해야만 하고, 문학에 있어서는 문학 언어로만 이야기해야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래전부터 시인들도 좌파와 우파, 중도로 갈라져 있었고, 개인적인 정치적 성향을 고수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이 잘못된 것만은 아니지만 시인들은 필요하면 쓰고 버리는 정치세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가 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정치세력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권창출을 통한 정권의 연장이다. 그 목적을 위해서는 시인들의 시까지 정치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정치세력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건을 만들고, 그 책임은 국민이나 문인들이 져야하는 문제가 생겨날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정치성향이 강한 독자들은 자신의 정치노선에 따라 문학인과 문학작품을 구분하곤 할 것이다. 이 빤한 이치 앞에서 문인들은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좌파와 우파, 중도가 아니라 시의 길이다. 황지우 시인이 1980년대 내내 형태파괴라는 시적 방법론으로 정치, 문화, 경제 권력에 치열하게 대항하다가 시적 방향의 전환을 검토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것은 깊이에 있어서나 넓이에 있어서나 올바르고 공정한 논점인 것이었다. 이것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시인들이 숙고해야하는 문제인 것이다.
우파의 정치세력의 입장에서는 좌파의 정치세력이 자신의 입지 강화를 위해 작가 선언, 작가 서명을 발표하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좌파의 정치세력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말이 심히 불쾌하고 어불성설처럼 들리지는 모르겠으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은 것이다. 문인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국민으로써 취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이고 의무이다. 그리고 문인들의 정치적인 입장과 작품 활동은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인들이 정치적인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게 되면 문학이 정치에 예속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문인들이 정치세력에게 놀아나지 않는 세월은 정치라는 것이 사라지지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여 진다. 문인들이 공정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정치세력은 자신의 입지 강화를 위해 앞으로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정치라는 것이 시에 개입되면 시는 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문학권력이란 정치세력이 문학에 개입하거나 문학인이 정치세력과 손을 잡으면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부와 명예를 얻고 문학 판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는 문학권력이 있는가 하면 자본주의 사회구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나 표면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문학권력도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위기가 오면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나서는 것처럼 시의 위기가 찾아오면 문인들도 힘을 모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자본주의 구조사회는 공정성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우리의 삶을 촘촘하게 관리하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관리의 틀은 더욱 더 촘촘해지면서 확장될 것이다.
2. 본론
안도현은 두 번째 시집‘모닥불’을 발간한 후 `그대에게 가고 싶다`(1991), `외롭고 높고 쓸쓸한`(1994), `그리운 여우`(1997), `바닷가 우체국`(1999),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2001), `간절하게 참 철없이`(2008), `북항`(2012),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2020) 등의 시집을 발간한 바 있다.
안도현의 시는 초기에 백낙청 등의 민중주의적 문학관의 연장선상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첫 시집인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 실린 시들은 지배계급의 억압과 폭력 등으로 인해 소외된 민중들에 대한 입장을 드러낸 바 있다. 그것은 그의 두 번째 시집인‘모닥불’까지 연장되고 있다. 그 후부터 시인은 인간과 자연의 밀접한 관계를 서정적인 시적 언어로 감싸는 시를 발표해왔다. 그리고 그 시들에 대한 성과는 소월시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노작문학상, 백석문학상 등의 결과로 나타난 바 있다. 그리고 안도현의 시들은 15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각지로 전파되었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는 영광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인의 시적 여정은 문단의 관심과 대중적인 인기로 증폭되었고, 문예지나 시 연구가들로부터 연구 대상이 되어 왔다. 이처럼 그의 시는 질적인 면에서나 양적인 면에서도 높은 가치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안도현의 시가 다루는 시적 대상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과 자연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들이다. 그의 시는 현대인의 일상의 고단함, 식물이나 동물로 인한 깨달음, 자본주의 구조사회가 만들어낸 현대인의 소외감, 자연의 세계를 이루는 생명성 등을 품어 안고 있다. 필자의 좁은 생각이지만 안도현은 자본주의 구조사회의 일상을 자연으로 이끌고 가거나 자연을 우리의 일상과 겹쳐놓으면서 생성되는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시인이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사유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틀리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안도현 시인의 시적 여정을 따라가면서 만나게 되는 우리의 일상과 자연의 관계를 의미하려고 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 전문
지금은 나무나 연탄을 땔감으로 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1980년대는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연탄으로 난방의 문제를 해결하였고, 음식을 해 먹었었다. 집집마다 대문 앞에는 다 타버린 연탄재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사람들은 길을 가다 연탄재 부스러기들을 보면 발로 차곤 했었다. 필자에게도 그런 경험은 여러 번 있다. 곰곰 생각해보면 삶이나 세상에 대한 불만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한다.
시인은 연탄재를 의미하면서 어떤 것이라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한다. 이것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는 의미가 내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너는 타자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라고 묻는다. 우선 시인은 이러한 질문을 자신에 던져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독자(타자.)에게로 돌려 의미를 확대하였다. 독자는 이 의미를 자신에게 물어볼 것이 자명하다. 그러므로 독자인 나는 누구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한 적이 있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구조사회의 억압은 연탄재에 함축되어 있는 시인의 뜨거운 마음이 타자에게로 향하는 길을 차단해 놓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만 치우친 삶을 살아나가지 않을 수 없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우리의 이기심을 흔들어보는 것이다. 하나의 물질인 연탄도 온몸으로 뜨거운 나눔을 실천하는데 사람인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를 타자에게 묻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는 반성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과 현실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시인은 연탄을 통해 나와 너를 반성하게 하여 우리의 이기심을 질타하고, 인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자본주의 구조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물질인 연탄이 시인을 거쳐 하나의 상징이 되어 독자들에게 오고, 그것은 현실로 스민다. 그 스밈은 자본주의 사회구조의 억압을 비판하고 갈 길을 제시한다. 너에게 묻는다, 라는 시는 3행의 짧은 시이지만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연탄재가 의미하는 것은 상실된 사랑과 타락한 인간성의 회복이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들선들 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연탄 한 장 전문
시인은 -삶이란 나 아닌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이라고 말한다. 연탄 한 장 속에는 인간성의 회복이 자리하고 있다. 그 회복은 타자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연탄으로부터 온다. 이러한 과정은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시인에게로 전이되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두려움으로 타자에 대한 사랑을 얻는다. 그 사랑은 깨달음을 거친 타자를 향한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다. 연탄 한 장은 사실상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연탄 한 장은 타인에 대한 시인의 입장이 따뜻함이라는 구체성을 띠며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으로 확장되는 의미를 품어 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연탄불처럼 자신을 소모하며 타자에게 진심으로 다가서는 시인의 마음이다. 이러한 시인의 마음은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고도 남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것이 된다. 이러한 시인의 세상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쓸모없거나 아주 작고 하찮은 것들에 있다.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올 때가 있네
도꼬마리의 까실까실한 씨앗이라든가
내 겨드랑이에 슬쩍 닿는 민석이의 손가락이라든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와서 나를 갈아엎는
치통이라든가
귀틀집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라든가
수업 끝난 오후의 자장면 냄새 같은 거
내 몸에 들어와서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마구 양푼 같은 내 가슴을 긁어댈 때가 있네
사내도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네
고대광실 구름 같은 집이 아니라
구름 위에 실컷 웅크리고 있다가
때가 오면 천하를 때릴 천둥 번개 소리가 아니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오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서러워져
소주 한 잔 마시러 가네
소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이 저의 감옥인 줄도 모르고
내 몸에 들어와서
나를 뜨겁게 껴안을 때가 있네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전문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찾아와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을 흔드는 것들이 있다. 이것은 어떤 계기로 인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과 외부에서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다. 치통은 시인의 내부에서 온 것이며 나머지는 외부에서 온 것이다. 도꼬마리 씨앗과 낙숫물 소리는 자연에서 오고, 민석이는 시인과 밀접한 관계에서 오고, 자장면 냄새는 이웃에서 오는 것이다. 이것들은 시인으로 하여금 가슴을 긁게 하고 서러움을 생성시켜 소주를 마시게 한다. 그러고 나서 이 외부의 상관물들은 자신들의 감옥인줄도 모르고 시인의 몸에 들어와서 시인을 뜨겁게 껴안는다. 아주 작고 하찮은 것들은 시인과 관계를 이루며 소중한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렇듯 작고 하찮은 것들이 시인의 몸으로 들어와 삶의 밑자리를 이루는 것이다. 당겨 말하자면 시인은 아주 작고 하찮아서 세상을 살아내는 것이 힘겹거나 서러운 것들을 가슴과 몸으로 품어 안는 따뜻함으로 세상을 열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에는 시인이 자장면으로 치환되어 있는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공평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도꼬마리 씨앗과 낙숫물은 자연스럽게 시인이 의미하는 것과 겹쳐지며 하나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시인이 도꼬마리 씨앗과 낙숫물이 상징하고 있는 의미를 시의 밑자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중심주의가 불러 온 자연 파괴로 인한 회복과도 연계성을 이루는 것이 된다. 시인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아주 작고 하찮은 것들을 사랑으로 품어 안고 우리를 사람이 살 만한 세상으로 열어놓는 것이다. 이어지는 다음 시적 대상도 어린 눈발이다.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겨울 강가에서 전문
시인은 눈 내리는 강을 바라보고 있다. 어린 눈발들은 강으로 뛰어내리며 짧은 생을 마감하고 있다. 강은 안타깝게 눈발을 품어 안곤 한다. 눈발의 생을 위해 몸을 뒤척이며 세찬 강물소리로 길을 찾곤 한다. 눈은 순수해서 강으로 내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눈의 생존 조건이 그러한 것이다. 강은 이러한 눈을 위해 제 몸으로 살얼음을 깔아 눈의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강은 흘러가는 존재이지 세찬 강물소리로 힘을 과시하는 존재는 아니다. 자연의 산물인 강과 눈발은 상생하는 존재들이다. 눈은 생존의 조건에서 강물보다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생존 조건이 눈보다 튼튼한 강으로 하여금 눈을 배려하게 한다. 눈은 살얼음에 쌓여 존재하는 조건을 얻는 것으로 강과 공존의 세계를 이룬다. 이러한 강의 배려로 눈과 강은 동일함을 얻는 것이지만 강은 눈과 함께하는 것으로 살얼음으로 변화해야 한다. 그 변화는 시인의 내부에서 생성되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함께 하는 세상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사랑 전문
모든 사랑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매미가 울어 여름이 뜨거워지는 것처럼 사랑은 온 몸으로 얻어 내는 것이다. 사랑은 붙어있음으로 함께 해야 하는 뜨거움이다. 사랑은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가 우는 것은 사랑의 지속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타자에게로 열려지는 것으로 더 큰 힘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사랑의 의미는 타자에게로 열려지는 세상을 향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시인의 타자에 대한 사랑은 저절로 생성된 것이 아니다. 그 사랑은 인간에 대한 오랜 관심과 배려로부터 생성되는 시인의 희망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칼을 간다
더 이상 미련은 없으리
예리하게 더욱 예리하게
이제 그만 놓아주마
이제 그만 놓아나련다
칼이 빛난다
우리 그림자조차 무심하자
차갑게 소름보다 차갑게
밤마다 절망해도
아침마다 되살아나는 희망
단호하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내. 려. 친. 다.
아뿔사
그리움이란 놈,
몸뚱이 잘라 번식함을 나는 몰랐다
-그리움 죽이기 전문
시인의 희망은 오래된 것이다. 그 희망은 아주 작고 하찮은 것으로 통합되는 약자들에 대한 다양함을 함축하고 있다. 이제 시인은 그 희망을 놓아주고 자신도 그것으로부터 놓여나려고 한다. 그래서 칼을 갈고, 그 빛나는 칼로 차갑게 희망을 끊어 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희망은 절망의 밤을 지나 아침마다 되살아난다. 그 희망은 끊어낼 수 없는 그리움이다.
사람도 변하고 세상도 변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은 변한다. 민중이 시민으로, 연탄난로가 온풍기로 변하는 것처럼 시대에 따라 현실의 조건도 바뀐다. 시인이 칼을 갈아 희망을 끊어 내려고 하는 것은 두 갈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희망이 용도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거나 다른 하나는 시인이 아직도 그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희망이 그리움으로 되살아나는 것은 시인이 인간과 자연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
시인의 시의 밑자리는 변한 것이 없다. 민중은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의해 생존 기반이 취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삶에 대한 생명력은 끈질기다. 이러한 민중이 시민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시인의 시적 대상이 인간과 자연의 깊이로 더 확장된 것이 아닌가 싶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민중의 삶의 조건은 표면적으로도 진전을 이루었으며 실직적인 삶의 개선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민중이라는 언어도 시대의 흐름을 거치며 시민으로 전환되었다. 그렇다고 시인에게 민중이나 시민이 다른 층위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민중주의적 사고관이 자본주의 사회구조로 편입되면서 이름만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의 사람과 세상에 대한 사랑은 변한 것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의 조건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니 떼가 강을 거슬러 오르고 있다
그 꽁무니에 물결이 여럿 올올이
고니 떼를 따라가고 있다
가만, 물결이 따라가고 있는 게 아니다
강 위쪽에서 아래쪽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수면의 검은 화선지 위에
고니 떼가 붓으로 뭔가를 쓰고 있는 것,
붓을 들어 뭔가를 쓰고 있지만
웬일인지 썼다가 고요히 지워버리고
또 몇 문장 썼다가는 지우고 있는 것이다
저 문장은 구차한 형식도 뭣도 없으니
대저 漫筆이라 해야 할 듯,
애써 무릎 꿇고 먹을 갈지 않고
손가락 끝에 먹물 한 점 묻히지 않는
평생을 쓰고 또 써도 죽을 때까지
얇은 서책 한 권 내지 않는 저 고니 떼,
이 먼 남쪽 만경강 하구까지 날아와서
물 위에 뜻 모를 글자를 적는 심사를
나는 사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쓰고 또 쓰는 힘으로
고니 떼가 과아니, 과아니, 하며
한꺼번에 붓대를 들고 날아오르고 있다
허공에도 울음을 적는 저 넘치는 필력을
나는 어찌 좀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고니의 詩作 전문
고니의 詩作이라는 시에는 시인의 어떤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고니가 물 위에 쓰는 문장은 고니의 삶 자체이다. 고니의 문장은 어떤 형식을 갖추지도 않는, 자유롭게 쓴 만필이다. 고니는 사람이 아니므로 서책과도 관계가 없다. 고니는 하루하루를 문장으로 그리며 강과 허공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삶 자체가 시가 되는 일상이다. 시인은 허공에도 울음을 적는 고니의 필력을 배워야하지 않나, 라고 자신에게 묻고 있다. 이것은 시인이 강과 고니와 허공으로 이어지는 자연에서 삶의 의미를 찾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시인은 오래전부터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시를 써 왔다. 등단작인‘낙동강’이 그렇고 첫 시집의 표제작인‘서울로 가는 전봉준’에서도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라는 시어도 그렇다. 시인은 민중의 선한 본성을 시로 노래하며 우리가 처한 역사적 사실을 자연의 산물인 풀잎으로 의미한 것이었다. 지금은 고니 등을 통한 자연으로서의 의미를 찾아나서는 것인데 다른 점이 있다면 고니로부터 허공에도 울음을 적는 필력을 배워야하지 않나, 라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이 사유의 몫이 될 것이다. 시인은 자신을 위해 고니처럼 무한한 자유를 찾아 나서겠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인은 고니로 상징되는 무한한 자유를 독자와 함께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무한성은 꽃게로 상징되는 유한성에 갇히기도 한다.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스며드는 것 전문
시인은 마음이 먹먹해지는 꽃게, 라는 시를 통해 모성애를 보여주고 있다. 꽃게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식들을 위한 일념으로 울컥울컥 쏟아지는 간장을 등으로 받는다. 살 속으로 스며드는 죽음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꽃게는 생을 마감하고 있다. 그러나 꽃게는 죽음의 상황 속에서도 알들이 죽음으로 편안한 안식처에 이르도록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광경은 부보의 자식에 대한 희생이겠지만 이 유한성을 세상으로 열어 놓으면 사랑이 된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시인이 사랑으로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극복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시인의 생명에 대한 사랑이 타자에게로 열려져 확장되곤 한다.
장꾼들이
점심때 좌판 옆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니
그 주변이 둥그렇고
따뜻합니다
-장날 전문
시‘장날’은 시인의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가장 절적하게 표현한 시이다. 사람의 관계란 밥을 먹으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근자에는 사람들이 밥보다도 차를 많이 선호하는 편이지만 한국의 경우는 오랜 세월동안 밥을 먹으면서 인간관계를 이루곤 했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밥으로 인한 관계의 확장성에 있다. 이 확장성은 주변을 둥그렇고 따뜻하게 만든다. 이것은 시인의 사람에 대한 관심이며 사랑이다. 시인은 둥그렇고 따뜻한 확장성을 통해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을 열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구조사회의 각박한 현실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의 인간관계에 대한 불합리성을 지적함과 동시에 따뜻한 불빛이 둥그렇게 퍼져나가는 공간을 드러내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장꾼들로 상징되어 있는 우리의 고단한 삶은 쉽사리 개선되지 않는다. 시대의 정의란 약자 편에서 자리 잡아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이루어진 역사는 아주 드물다. 공정성을 시대의 정의로 내세우는 자본주의 구조사회도 좌파와 우파, 중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좌파와 우파, 중도의 고래 싸움에 약자들은 상처 받는다. 이러한 상처가 시인에게는 절필로 이어지기도 하고, 약자들은 아예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묵언으로 저항하는 것이지만 함께 어우러지는 공정한 세상은 쉽사리 열리지 않는다. 이러한 세상일수록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갈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그릇이라는 시를 통해 지나간 삶의 과정으로 오늘을 고민하는 것은 의미할만한 것이 된다.
1
사기그릇 같은데 백 년은 족히 넘었을 거라는 그릇을 하나 얻었다
국을 말아 밥상에 올릴 수도 없어서
둘레에 가만 입술을 대 보았다
나는 둘레를 얻었고
그릇은 나를 얻었다
2
그릇에는 자잘한 빗금들이 서로 내통하듯 뻗어 있었다
빗금 사이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빗금의 때가 그릇의 내부를 껴안고 있었다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나라는 그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
-그릇 전문
그릇은 도공으로부터 태어난다. 도공은 하나의 그릇을 만들기 위해 많은 실패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도공은 그릇을 완성하였고, 그릇은 도공을 떠나 백 년도 넘는 굴곡의 세월을 거쳐 시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릇은 국을 말아 밥상에 올릴 수 없는 것으로 시인에게 다가온다. 그릇에는 도공의 삶과 혼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그릇과 시인이 만나 시인은 둘레를 얻었고 그릇은 시인을 얻었다. 시인이 얻은 둘레에는 빗금이라는 상처가 내제되어 있다. 빗금들은 서로 겹쳐지거나 어긋나기도 하는 세월을 견디면서 지금에 다다른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그릇을 자신의 삶의 과정으로 치환시켜 놓는다. 그릇은 물질이지만 도공의 입장에서 그릇은 육체임과 동시에 자신의 삶의 과정과 혼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릇은 자잘한 빗금으로 자신의 내부를 껴안으며 백 년 동안의 세월을 살아온 것이다. 시인은 이 그릇을 자기화하여 자신이 거쳐 온 과정을 돌아본다. 시인은 상처와 때가 하나를 이루고 있는 빗금을 품은 그릇을 나라고 인식한다. 그 인식은 버릴 수 없는 허물이 나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이 세상에 허물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망각하고 살아간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시인은 자신이 멀쩡한 것처럼 행세해 온 것을 반성하는 것이다. 시인은 삶의 과정으로 그릇을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대입시켜 반성의 자리를 마련한다. 시인은 그릇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그 반성으로 세상의 둘레를 의미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의 이러한 사유는 세상의 둘레를 살며 보다 깊어지고 넓어질 것이다.
3. 결론
안도현의 시적 여정은 민중의 삶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민중이 시민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쳐 인간이라는 존재를 자연과 합치시킴으로써 생성되는 의미를 끊임없이 천착하였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길이었다. 안도현의 시들이 다양한 시적 대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시인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의 깊이와 폭의 확장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가치를 생성시키는 것이지도 하지만, 이러한 시인의 가치 생성은 깊고 넓은 의미에서 인간과 자연의 대한 사랑이었다.
안도현의 시들이 인간의 평범한 일상이나 자연을 다양하게 형상화시키는 것은 아주 작고 하찮은 존재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세상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아주 작고 하찮은 존재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그들과 함께 인간과 자연이 상생할 수 있는 세상을 펼치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의 밑자리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주 작은 존재들이다. 그 존재들의 뿌리가 깊어지지 않는 한 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시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러한 기본적인 세상의 밑자리를 깊이 있게 천착한 바 있다.
안도현의 시들은 대체적으로 의미하기가 용이하다. 시의 이미지들이 심하게 단절되어 있거나 난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자가 안도현의 시들을 의미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것이 된다. 그의 시들은 시적 진술이 명확하고 단정하다. 그렇다고 그의 시들이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시들은 난해하고 복잡한 시들보다 더 깊이 있고 폭넓게 필자의 가슴을 울린다. 누구나 그의 시를 읽고 인간과 자연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서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해준다.
안도현의 시들은 자본주의 구조사회의 억압으로 생겨난 인간관계의 차갑고 냉랭한 삶의 흐름을 따뜻함으로 감싸 안고 있다. 시인은 그 감싸기를 통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뒤틀린 관계를 화해시키려고 한다. 이 화해는 모든 관계에 대한 불균형을 해소시키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화해의 장이 없이 회복되는 관계는 없다. 시인이 펼치고 싶은 것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뒤틀린 관계를 회복하는 열린 세상이다. 그 세상은 아주 작고 하찮은 존재들도 서로 교감하며 균형을 이루는, 사람과 자연이 서로의 존재와 생명을 존중하는 지향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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