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강씨 본관(本貫)은 금천(衿川 : 옛 시흥)과 진주(晉州)로 대별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위의 두 지역이 관향(貫鄕)으로 칭하게 된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고려사에 강감찬을 금주인(衿州人), 강민첨을 진주 진강인(晉康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관향(貫鄕)은 본관(本貫)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공신(功臣) 칭호에 포함되어 있는 봉지(封地)의 지명을 보면 알 수 있다.
고려사에는 지방의 유력한 호족 세력이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일정한 역할을 함에 따라 공적에 대한 보상으로 살던 지역 명에서 연유한 군호(君號)와 식읍(食邑)을 내리고 성씨를 하사한 사례가 많았다.
귀주대첩에서 대승한 인헌공 강감찬 장군의 공신 작호는 검교(檢校)...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검교(檢校) 천수군개국후(天水郡開國侯)이다. 천수군(天水郡)은 봉지(封地)에 해당하고 개국(開國)은 공신의 종류이며, 후(侯)는 작위(爵位)이다. 봉지(封地)는 제후(諸侯)를 봉하여 준 땅이지만, 공신 호칭 앞에 검교(檢校)를 붙인 것으로 보아 명예직으로 실질적인 봉지가 없다는 것이다. 인헌공은 금천(衿川) 혹은 금주(衿州 : 옛 시흥, 지금은 서울 봉천동) 출신이기 때문에 금주군개국후(衿州郡開國侯)로 봉해져야 함에도 염재 신농씨가 살았다는 중국에 있는 섬서성(陝西省) 천수군(天水郡)을 봉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 당시만 해도 아직 성씨의 본관이 보편화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고려시대 봉작(封爵)의 등급 봉작에는 크게 왕(王)으로 봉해주는 왕작(王爵)과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의 5등작이 있었다. 고려의 경우 종친이나 일반 신하에게 실제 봉작해 준 것은 5등작이었다. 다만, 종친의 5등작은 공후백(公侯伯) 3단계까지만 수여되었고, 일반 신하는 공후백자남 5단계를 다 수여하였다. 그리고 일반신하의 5등작은 종친과는 달리 봉지(封地)에 해당하는 군현(郡縣)의 명칭과 개국(開國)이 덧붙여서 호칭되었다. 예를 든다면 ‘○○군개국남(○○郡開國男)’ ‘○○현개국남(○○縣開國男)’과 같이 되었다. 이것은 ‘○○군남(○○郡男)’ ‘○○현남(○○縣男)’ 혹은 ‘○○남(○○男)’으로도 호칭되었다. 그런데 드물게 그냥 ‘개국남(開國男)’으로도 호칭되었던 것 같다. 실례로는 보이지 않으나 ‘개국후(開國侯)’나 ‘개국백(開國伯)’이 한 차례씩 나오고 있고 ‘개국자(開國子)’가 봉작규정에 나오고 있어 그렇게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 |
첫댓글 시조 강이식 할아버지부터 중시조 할아버지까지 기간 300년이 공백이니... 이 점이 아쉬운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