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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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1 05: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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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향토문화를 생각한다 090920 제1기 玄空 嚴 基 宗
평창의 역사는 어디에도 빠지지 않고 오히려 앞서간 흔적들이 많다. 于烏, 郁烏, 白烏로 태양의 상징인 삼족오를 지명에 400년 이상 사용한 당시의 당당한 위용과, 선사시대에 해신에 의지하던 강원도에 유일무이한 입석(당시에는 바위를 전부 눕히는 거석문화였으나 바위를 세우는 일이란 감히 생각할 수 없던 시대임)이며 두 번의 대화강무행사며 너무도 오래된 목책성들의 자취가 신비스럽다.
예산을 들여 조사해서 남긴 기록엔 고인돌이 평창과 대화에 26기, 진부에 1기로 총 27개의 고인돌이 있다고 한다. 그 고인돌을 찾아보려고 노력을 해도 찾기가 힘들다. 역사책의 기록에는 평창지역의 고인돌 기록은 아예 보이질 않는다. 대화면 안미뜰은 조선실록에 거화전(巨禾田)이라 곡물이 많이 난다는 지명이었다. 옛날에는 큰 뜰을 배경으로 성읍국가가 산속에 성을 쌓고 시작을 하였다.
부족의 위세를 상징하는 고인돌은 당시엔 100~200여명의 인력이 없었으면 만들기 불가한 거석문화였다. 고인돌이 남아 있는 지역엔 최소한 500여명의 인구가 마을마다 살고 있었었음을 증명하는 역사유적으로서 너무도 중요한 것이다. 요즘은 중장비가 발달되어 그 거석들이 어디론가 옮겨지거나 파묻히거나 팔려나가기 위하여 체인에 묶여 있는지, 고인돌의 위치와 보호를 위하여 안내판의 설치의 필요성을 여러 번 글로 올려도 기척이 없다.
고길리나 원당리 등 일부지역만 제외하고 4년 전 평창읍의 전농경지역이 매장문화재구역으로 지정되어 건물을 지으려면 매장문화재 관련법에 따라 발굴비며, 관련법행정처리 기간이 위원들 의견 징취니 부지하세월이다. 지난 수해복구사업도 매장문화재보호구역이라해서 신속히 복구를 못했던 실정이다. 매장문화재구역으로 꽁꽁 묶인 곳으로 찾아들 기업이며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가 사는 지역의 앞날을 생각하면 어쩌다 이 지경인지 한 번 묶이면 풀기 어려운 무서운 매장문화재보호지정이 한심하기 그지없다.
평창의 예로는 북부의 고속도로와 대기업의 용평리조트와 봉평휘닉스파크가 지역개발에 이바지하는 바를 여실히 보이고 있음에도 개발하지 않는 것이 개발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군이 매장문화재로 고시가 되어 지역개발이 묶여 있을 때, 횡성군은 4년간을 싸워 주민의 의사가 존중되는 고시가 축소되어 금년에야 발표되었다.
매장문화재 주요지역을 제외한 이미 농경지정리로 지반이 변경되었고, 거주지로 건물이 들어선 구역이나 역사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구역을 매장문화재보호구역에서 제외시키는 일이 매우 시급하나 지역개발과 대단히 밀접한 개선이 해를 거듭해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평창지역은 이 일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을 것이다.
평창에는 천변리나 살구실 약수리 대관령면 유천리 진부면 송정리 미탄면 창동 등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자랑스런 비슬나무가 여러 나무가 있다. 우리군의 군목이 전나무이나 오히려 비슬나무를 군목으로 정하여도 군색이 없다. 뿌리부근에 도로포장이나 세멘트경계석이나 비료푸대를 기대어 쌓거나 소피를 집중적으로 보지 않으면 천년을 사는 거목이다.
늦은 봄에 떨어지는 씨가 강변을 따라 흘러가 영월군 주천면 섶다리 강변의 멋진 경관을 이루는 경관수이나, 평창은 하천정비로 매년 깨끗이 잘라 없앤다. 평창은 강으로 먹고 살아야하는데 강변숲이 없다. 강에 숲만 있어도 스스로 손님들이 몰려든다. 물결따라 씨가 흘러가고 스스로 삶의 터에서 싹을 틔워 강변 구석에서 사는 나무는 살려두어야지 고렇커럼 잘라 죽여 자연의 순환을 파괴하는 역행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일제가 뚝방을 무너뜨린다는 이유로 남긴 하천관리의 악법에 순종하는 데에서 오는 폐습이다. 세계 어디에나 강변에 나무가 없는 나라가 몇 곳이나 될까.
수달도, 이름 모를 새들도 쫓아내고, 어름치 쉼터도 아이들의 미역 감던 향수를 몽땅 없애버려 즐겁던 강변문화가 사라진 원흉이다. 흥정천에서 대하리까지 살아 꿈틀대듯 그 멀고 멀리 달려온 강변에 나무들이 줄을 이어 산다면 저탄소 녹색성장은 저절로 되고 그 숲으로 수많은 생명들과 함께 평창을 찾아드는 휴양객으로 먹고 살 수가 있다.
비슬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고, 옛날 사천강변에 욱어졌던 비슬나무숲으로 되돌려 주어야 한다. 매년 비슬나무씨를 쓸어담던 읍사무소 마당의 비슬나무는 나무의 머리를 동강내어 요즘은 해를 거르는 씨를 받으러 대화면 농협 창고를 찾는다.
운교리 밤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을 하면서 원주환경청에서 천연기념물로 손색이 없다던 비술나무는 홀대를 받는다. 어느 지역을 가나 그 지역의 보물이며 문화재며 천연기념물이 무엇인가가 그 지역의 자랑스런 트랜드가 되는 것이다. 보물을 하나라도 더 지정하려는 노력이 궁색한 이해관계에 묻혀서는 되겠는가. 지정에 따르는 이해관계 해소는 행정부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풀어야할 몫이다.
경찰서로 옮겨진 석탑의 당초 위치며 몇 층이었는지 어디에 남은 기단이 더 보관되어 있는지 시간이 더 가 당시의 옮긴 분들이 사망하기 전에 밝혀두어야 하지 않을까, 노산 동쪽기슭에서 차려지다 군청 앞으로 옮겨져 500년 간 왕권의 직접지시로 제사지내던 국구사우의 터며, 당시 군청 정문이 남산 송학정으로 옮겨 갔듯이 왕명으로 군청 앞으로 옮겨가 있었던 것을 일제가 허물었던 국구사우 건물이 어디로 옮겨 갔는지, 구군청 앞 법원자리에서 옮겨간 건물이 구소방서 건물인지, 모르겠다면 그 훨씬 후에 건립된 삼척시의 이성계 조상 준경묘 사우를 찾아가 비교해 보면 알게 되겠지.
대상리 강변으로 흘러들었다는 석탑의 잔영과, 임진란 응암굴에서 순절한 시체로 왜장의 지시로 장례의 례를 받았던 강소사의 묘지가 어디로 갔는지, 호구록의 기록과 왜놈의 진군일지가 서로 일치하는지, 호구록의 기록을 일본 관광청에 들어내 춘천의 겨울연가 촬영지로 찾아드는 일본 관광객을 올림픽 개최지며 조선의 여인과 왜장의 스토리와 관련의 유적과 주변의 빼어난 경관을 개발하여 평창을 거쳐 강릉 오죽헌으로 거쳐 가는 관광투어지로 개발할 의지는 있는지, 당시 음암굴의 앞 강 건너에서 응암굴로 향하여 화총을 쏘던 왜놈들이 쌓았던 왜담은 어디였고 어디로 살아졌는지,
태종과 세종은 왜 대화에 두 번이나 만여 명의 몰이꾼을 끌어드려 강무행사를 했는지 또 어디에서 했는지, 육이오 전까지 호랑이 울음을 들었다는 도사리의 사라진 호총이 해피700의 종의 다원화를 증명하는 상징으로 삼으면 어떨까, 그 사실을 채록하여 증거로 남겨야하지 않는가, 누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호랑이에 물려갔다가 주민들이 몰려가 찾아온 이야기의 진위를 밝혀, 그렇다면 종의 꼭대기 호랑이의 주거지가 해피700을 증명하는데 증표로 될 것이다.
권두문 군수가 응암굴로 가기 전에 피난민을 끌고 먼저 숨어들었다 돌아온 미탄면(당시 동면)의 굴은 어디였는지, 백운산성은 무슨 성이며, 삼방산의 산성은 적국의 성이였는지, 태기산성은 북쪽을 지키던 우리의 성인지 우리를 막던 적국의 성인지, 우리의 성이었다면 우리가 우리의 성을 횡성의 얼굴로 방치하지 않는지, 과거시험을 위하여 월정가로 모이라는 방이 전국 곳곳에 나붙여지던 시절의 왕이 직접 왕림하여 붙였던 시험책제는 무엇이며, 과거시험장은 어디였으며, 그 터를 재연하여 그 책제를 돌에 새겨 세우면 오대산 관광의 매력이 업그래이 되지 않겠는가, 월정거리로부터 이어지는 세계에 유일무이한 전나무 가로수를 전세계의 가로수로 보존하기 위하여 전나무 비음피해 방지를 위하여 아랫가지의 무절제한 전지를 조정할 의사는 없는지, 파리의 마로니에 가로수의 활기가 새삼스럽다.
황태의 고향 대관령이 인제군 용대리로 가도 속수무책, 대관령 눈바람 먹고 사는 고유의 황태맛을 눈꽃축제 선반에 올려 엄연히 남아 있는 황태원조의 역사를 들어 바람마을 음식문화를 돈으로 바꾸는 일이 벌어져야 한다. 상원사의 우리나라 최고의 범종의 소리는 들어 보았는가 소리가 상표가 되는 시절을 대비하면 에밀레종보다 형님종의 가치를 공표할 때가 다가올 것이다. 역사의 모든 기록에도 그토록 유명한 남한강의 발원지 우통수가 새로 만든 군지에서 완전히 기록을 삭제한 이유는 무엇인지, 물기근시대의 숨겨진 상표 약수리의 샘터는 어디였는지 과연 약수 성분은 있는지, 가산 이효석은 봉평에서 태어났지만 서울로 갔다가 4살 때 번안작가였던 아버지의 진부면장 직무지로 따라왔다가 6살부터 12살까지 평창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모교를 떠나고는 고향을 찾지 않았던 사실로는 작가로의 틀은 평창초등학교 어린 시절의 감성이 컸으리라, 그 모교에 가산의 동상이나 비석 하나는 세우고 효석문학축제의 모태로 평창에서 시작하였던 백일장은 다시 개최되어야 하지 않는가.
올림픽을 치르겠다는 지방자치에 박물관은 필요한지, 세워진다면 오대산 사고지에서 실록이 사라지듯 박물관이 역사의 터에서 세워질지 다른 곳에 세워질지, 평창의 돌기와 주거문화가 이젠 몇 가옥이나 남아 있는지, 그나마 동막골에 영화 세트장으로 지어진 너와집이며 굴피집을 보존할 계획은 있는지, 강원도에는 없는 국악원을 강원도의 중심 평창으로 유치할 의지나 방도는 있는지, 산림군으로의 공표에 걸맞게 목상 돈은 개도 먹는다는 번창했던 평창군 거목상들의 산림경영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면 어떨지,
실록에 명시된 강원도 7대명산 중에 오대산과 거슬갑산이 평창군의 산인지 왜 명산이라 명명하였는지, 그렇다면 그 명산을 거점으로 하는 개발 관심과 계획은 있는지 궁금하다. 별 관심이 없는 일이거나 손발이 모자란다면 평창의 향토문화는 사라질 것인가... 오늘은 일요일이라 커피 한잔을 마시며 그간의 향토문화에 젖었던 날들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