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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히브리어로 '예배하다' '샤카(shachah); 엎드려 절하다 또는 경배하다라는 뜻이다(신 26:10 참조)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숭배, 순종, 봉사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2008년 10월 20일 월요일 오후 문래동 신진에스엠에서 부천으로 오는 길 차안에서 ------------------------------------------------------------------ 개혁교회와 예배의 회복 이정석 (풀러신학교 조직신학교수) 급변하는 현대문화속에서 교회의 예배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각성이 대두되고 있다. 그리하여 예배갱신, 예배개혁, 혹은 예배회복을 추구하는 운동들이 일어나고, 그에 따른 예배의 변화가 한국교회에도 선풍처럼 번지고 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교회는 전통적인 예배에 만족하였고 문제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급속한 성장으로 치열한 산업경쟁사회로 진입하던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통적인 예배에 불만이 표출되었다. 사경회의 전통이 오순절적 부흥회와 기도원운동, 은사집회등으로 전환되면서, 그러한 성령집회에 익숙해진 신도들은 전통적인 예배로 만족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많은 기성교회의 교인들이 오순절계의 교회로 이동하거나 자기교회의 예배를 그러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성령운동은 기성교회의 내부적 필요와 연결되면서 교파를 초월하여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영향이 자연히 예배의 변화를 초래하였는데, 특히 통성기도나 철야기도, 심야기도와 같은 기도에서, 그리고 예배가 뜨거워야 된다는 인식의 확산을 가져왔다. 한편, 복음송가를 처음으로 사용한 오순절교회의 영향이 기성교회의 청소년들의 음악적 필요와 연결되면서 찬송에도 영향을 미쳤다.
80년대에 찬영과 경배를 통해 예배를 변화시키고 활성화시키려는 노력이 진행되었고, 가스펠송이 크게 확산되었다. 기성교회는 처음에 이를 금지하거나 제한하였으나, 점차 복음송세대의 성장과 함께 수용하게 되고 드럼과 대형스피커가 강단으로 진입하기에 이르렀다. 70년대부터 시작된 매스미디어와 대중문화의 보편화는 80년대에 거부할 수 없는 대세로 정착하였으며, 80년대의 교회성장운동은 목회자 세미나의 홍수시대를 열었고 각기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였다.
90년대는 세기말적 위기감과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기대로 사회의 대세인 정보화와 테크놀로지의 수용문제가 대두되었다. 대교회들은 테크놀로지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비용을 들여가면서 교회전산화를 추진하였고, 위성중계 시스템을 설치하여 위성교회들을 만들고 있다. 멀티미디어 예배와 사이버 교회가 선을 보이고, 대중문화의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문화사역이 확산되고 예배에 대중적인 음악 이외에도 연극이나 무용 등의 예술적 장르를 도입하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이와 같은 시도들은 모두 예배의 위기를 느끼기 때문이다. 교인들은 더 이상 전통적 예배에서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예배의 참석이 하나의 종교적 의무로 인식되고, 지루하고 무의미한 시간을 참아낼 뿐이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도 못하며, 특별한 체험이나 은혜도 받지 못한다.
급성장하던 한국교회는 정체를 보이고, 청소년들은 교회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고 대중문화가 그들에게 충분하고 다양한 즐거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교회에는 의미도 재미도 없다. 대다수의 교인들에게 교회생활이란 예배의 참석을 의미하는데, 예배가 적용성(relevance)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시대에서 프리모던적 예배는 인간의 감정을 전달하는데 실패하는데, 이는 문화형식의 이질성 때문이다.
한편, 또다른 예배의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 그것은 신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예배의 양면성에서 인간의 종교적 만족이라는 한 면으로 너무 치우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성도의 교제라는 두 축으로 구성된다(요일 1.3). 예배의 궁극적 목적이 신의 흠향과 영광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예배 참석자들이 열정적 축제감을 느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열납이 일차적으로 고려되지 않는다면 결국 예배의 실패를 결과한다. 개혁교회는 이런 문제를 성찰하고 해결함에 있어서 칼빈의 예배론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칼빈의 예배개혁
교회역사상 가장 큰 예배의 위기는 중세에 발생하였으며, 종교개혁은 이러한 예배를 회복한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은 교회개혁이며 예배개혁이였다. 마르틴 루터가 보다 이신칭의교리에 근거한 교리중심의 개혁자였다면, 칼빈의 일차적 관심은 오염된 예배의 개혁과 회복에 있었다. 그가 1544년 로마제국회의에 제출한 "교회 개혁의 필요성" 제하의 변증서에서 그가 왜 교회개혁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설명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너무나도 많은 잘못된 의견들에 의해 손상되었고 너무나 많은 불경하고 부정한 미신들로 왜곡됨에 따라,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이 흉악한 오만무례로 모욕당하고 그의 거룩한 이름이 더럽혀졌으며 그의 영광이 발아래 짓밟히고 있다.
오호라, 모든 기독교 세계는 공개적으로 우상숭배에 의해 오염되었고, 사람들은 그대신 자기들의 허구를 숭배하고 있다. 수천의 미신들이 지배하고 있다!"({칼빈선집} 1.232) 물론, 그는 이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전통적인 예배가 오랜동안 익숙하여 살과 피속에, 그리고 골수에 박혀 있기 때문에, 그들을 설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며, 설령 이론적으로 동의한다 할지라고 실제적인 난관이 있다(128-9). 그러나, 칼빈은 이 작업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고 여러 모양으로 난자당하고 있는데, 만일 우리가 미소나 짓고 침묵한다면 배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개도 자기 주인에게 함부로 하면 즉시 짖어대는데, 우리가 침묵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그토록 모독적으로 경멸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189)
칼빈은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인데, 예배가 타락하고 오염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다는 단순하고도 명백한 원리에 따라 예배의 회복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 회복에 그의 생명을 걸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참된 예배와 그릇된 예배를 구별한다. 로마교회의 우상숭배가 그릇된 예배의 전형이라고 생각하고 제1권 11-12장에서 집중적으로 우상예배를 비판한다.
참된 예배는 롬 12.1-3이 가르치는 영적 예배로서,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예배가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에게 영으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하였다(II.viii.17).
칼빈은 4권 10장에서 그릇된 예배의 세가지 유형을 소개하였다.
첫째는 사람의 생각을 가르치는 예배이다(24). 사람의 계명을 가르치는 예배(마 15.9, 사 29.13-14),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가르치는 예배(골 2.4-8)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실질적으로 그 시대의 정신과 민족적 전통, 또는 교파적 전통(장로의 유전) 등 인간의 생각을 가르치는 예배의 왜곡이다. 특별히, 그는 골 2.23의 "자의적 숭배"(will worship, ethelothreskeia)를 가장 전형적인 그릇된 예배로 규정하였다. 그들은 혹독한 금욕주의를 실천하는 종교적 철저성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전혀 주님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종교성이다. 자기의 종교성과 영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추구하는 종교적 노력과 예배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철저하고 인간적으로 존경스럽다 할지라도 하나님에게는 그릇된 예배인 것이다. 그것은 그 시대인들의 종교적, 정서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그 민족의 종교적 전통을 반영하며, 그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할지라도, 올바른 예배가 아니며 인간중심적인 자기예배일 뿐이다.
둘째는 바리새인의 예배이다(26). 칼빈은 "바리세인의 누룩"(마 23.3, 16.6)을 조심하라고 경계한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율법의 해석자로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권위를 주장하며 무리한 실천을 강요하고, 스스로 본을 보이지 않으면서 지식만 팔고있는 삯군이 인도하는 예배가 바로 그릇된 예배라고 규정한다. 예배를 좌우하는 것은 예배 인도자라는 점에서, 이 지적은 중요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경배하지 않는 형식적이고 지식적인 차가운 죽은 정통의 예배가 여기에 속한다.
셋째는 연극적 예배다(29). 분위기와 의식은 우아하고 화려하며 음악과 설교는 장엄하지만, 인도자는 연극 배우와 같이 연기를 하고 신의식과 외경심이 결여된 멋있는 예배다. 교인들은 예배를 즐기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은 없다.
정열적이고 감성적인 예배이지만, 연극을 관람하거나 음악회에 참석하거나 감동적인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명강의를 들은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순간적인 엑스타시가 있지만,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그 경험 자체를 소중히 생각하고 흠모할 뿐이며, 그 체험은 마음의 열기를 고조시키는 종교심리적 조작에 의한 유사경험일 뿐이다. 칼빈은 이러한 거짓 예배를 교회에서 정화하기 위하여 성상철거, 미신타파, 단순한 성경적 예배로의 복귀, 말씀에 대한 강조, 예배자가 이해할 수 있는 서민적 언어사용을 통하여 경건하고 순수한 영적 예배를 드림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오늘날의 개신교회 예배는 칼빈의 예배개혁을 통하여 정착된 형태이다.
성경적 예배개념
교회의 예배회복에 있어서 그 규범이 되는 성경의 예배개념은 무엇인가? 신약에서 예배를 의미하는 용어로는 '프로스쿤네오'와 '라트레우오'가 사용되었다. 전자는 '예배하다'는 동사형이 60회, '예배하는 자'(proskunetes)라는 형태가 1회 나타난다. 이 단어는 호머의 {오디세이}에 처음 나타나는 헬라어로서, 오랜 항해 끝에 드디어 육지에 도착한 사람들이 땅의 신에게 경의를 표현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엎드려 땅에 입맞추는 행위를 묘사한다. 여기서 '고개를 숙인다', '절한다', 나아가 '입맞춘다'는 의미가 유래한다.
70인경에서는 구약에 사용된 히브리어 '샤카'를 이 단어로 번역하였는데, 머리숙여 절한다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며, 3/4이 하나님에게 예배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왕상 19.18에서는 '나샤크', 즉 입맞춤과도 연결된다. 물론 절하는 행위는 천사나 하나님의 종에게도 행해졌고, 보편화되어 왕이나 윗사람에게도 적용되었다. 한편, 우상에게 절하는 행위는 엄금되었다. 따라서, 절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은 도전과 반항으로 간주되어 큰 화를 당하기도 하였다. 신약에서 사용된 60회의 용례를 분석해 보면, 극소수의 부정적 사례를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절, 경배, 예배한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신의 위엄을 실감할 때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경우, 제자들이 그의 신성을 체감하는 순간 엎드려 절한다. 한편, 육체적 행위로서의 절은 그 대상이 보이는 경우로 한정된다.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승천까지 계속되지만, 그후에는 결코 예수님을 예배하면서 육체적 행위로서의 절을 하지 않는다. 계시록에서 다시 그를 만난 성도들이 그와 하나님께 절을 계속한다. 그동안, 이 행위는 영적으로 표현된다. 요 4.20-24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절하는 영적인 의미로 제시된다. 즉, 진정한 예배는 이제 마음의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자기를 낮추고 복종을 서약하는 겸비한 예배자세와 헌신행위를 의미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예배'라는 말도 '배례(拜禮)', 즉 절하는 예식이다. 따라서, 예배의 '프로스쿤네오'적 성격은 경외와 숭배, 그리고 자기부정과 절대복종의 서약이다. '라트레우오'라는 단어는 종(servant)을 의미하는 '라트리스'에서 왔으며, 따라서 종의 섬김과 봉사행위를 가리킨다. 이 말이 성경에서는 특히 신에 대한 섬김으로 제한된다. 영어에서 예배를 'service'라고 하는 것도 여기에 근거한다. 구약의 '아바드'가 상응하는데, 대부분 제사로 신을 섬기는데 사용되었다(수 22.27용례 참조). 신은 자기의 종들에게 구체적인 예배행위를 요구한다. 출 3.12는 출애급의 목적이 하나님의 예배에 있다고 말한다. 신 10.12이하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진정한 섬김이 삶에서 진실하게 수행되어야함을 가르치는데, 이로서 예배가 의식과 생활의 두 면을 포함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21회가 동사형으로, 그리고 5회가 명사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의식과 생활에서의 예배라는 양면을 표현한다. 제사나 기도와 같은 의식으로 섬기는데 사용되는가 하면, 성결과 의로(눅 1.75), 경건함과 두려움으로(히 12.28), 청결한 양심으로(딤후 1.3), 성령으로(빌 3.3) 섬기는 생활의 예배와 봉사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즉, '...로 섬긴다'는 형식을 가지는 경우가 정형이다. '라트레이아'의 용례를 살펴보면, 3회는 구약의 제사와 연관된 예배이며, 요 16.2는 유대인이 기독교인을 핍박하여 출교하고 처형하는 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예'로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롬 12.1의 영적 예배에 사용되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는 영적 예배(logike latreia)는 구약적 예배를 완성하고 승화하는 예배의 결정적 형태이다. 그래서 H. Strathmann은 이렇게 말한다: "종교의식적 용어인 '라트레이아'의 성경적 역사가 이 내면화에서 그 정점(climax)에 도달하며, 그것은 또한 가장 종합적인 실현으로서 신 10.12이하에 나타난 최초의 예언적 언급을 재확인한다. 롬 12.1이하에 기록된 바울의 가르침은 이 모든 발전과정 전체의 왕관이다."(TDNT IV:65) 따라서, 예배의 '라트레우오'적 성격은 의식과 생활로 표현되는 섬김의 구체적 행위이다. 이러한 예배의 성경적 용례를 종합하자면, 예배란 (1) 그 대상이 배타적으로 삼위 하나님에 한정된다. (2) 그 계기는 신의 위엄과 영광, 거룩과 능력에 접하여 자기와 비교할 수 없는 절대성을 느끼는 두려움, 그리고 신의 넘치는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격과 감사이다. (3) 그 자세는 육체적으로 그리고/혹은 정신적으로 그에게 엎드려 절하는 것으로, 사랑과 경외심에서 자발적으로 나타나는 절대복종의 표현이다. (4) 그 방법은 제사, 봉헌, 찬양, 기도, 말씀, 성례의 의식과 실생활에서 하나님의 계명과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다. (5) 그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를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 예배의 본질에 대한 현대적 이해 현대교회는 강력한 세속화의 위협아래 있다. 판넨베르그의 말대로, "오로지 예배에서 신자들의 교제가 실현되며", "예배가 이 세상에서 교회의 진정한 실체이다"({조직신학} III: 370-1). 그러므로, 예배의 위기는 교회의 위기이며, 교회의 약화는 예배의 약화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예배를 신학적으로 재조명하고, 예배와 신학의 분리가 그 중요한 원인이라는 인식하에 예배의 본질에 대해 활발한 신학적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예배가 성직자의 전유물로 전락하여 예배자가 소외된데 문제가 있다는 주장과 함께 예배의 공동체성과 공동적 참여의 열린 예배론, 성령의 인도하에 구성원의 은사를 중심으로 자유롭게 진행되는 자발적이며 의식반대론적인 성령론적 예배론, 신비주의적이며 주관적인 영성 예배론, 예배의 목적이 전도와 선교, 혹은 치유에 있다는 선교 예배론, 치유 예배론 등 다양한 실용적 예배론들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현대적 예배론의 주류는 하나님의 나라와 역사적 참여를 강조하는 기독론-종말론적 예배론으로서, 여기에 몰트만과 웨인라이트가 속한다. (1) Jürgen Moltmann: '메시야적 잔치' 예배는 그리스도에 대한 회상을 갱신하고 현재의 진행을 반성하며 그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일깨우는 메시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축하하는 '메시아적 잔치(messianische Fest)'이다. 물론, 현재의 불완전성과 격차,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들이 있기 때문에 낯선땅에서 부르는 여호와의 노래(시 137)이다. 이 축제는 일정한 종교의식을 가지는데, 이 의식과 교회력은 연속성, 지시적 성격, 사회적 관련성, 질서의 기능을 부여하여 안정된 삶을 유지시켜 준다. 또한, 그것은 무미건조하며 일상적인 삶속에서 심지어 놀이와 시위의 성격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예배는 안식의 개념과 연관됨으로서 특히 피곤한 현대생활 속에서 휴일과 여가를 즐기게 하며, 진정한 평화(살롬)를 기대하며 미리 맛보게 한다. 예배는 그 제도와 의식이 명령된 역사적 배경을 상기시킴으로서 세계역사와 연결되어 우리에게 역사의식과 미래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도 한다. 그리스도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희망을 가지며, 삶 전체가 예배로 승화된다. 예배는 창조, 십자가, 부활의 축제로서, 메시야적 친교안에서 칭의에 근거한 자기 실존을 수용하고 미래적 창조를 지향하는 새로운 삶의 엑스타시를 부여하는 축복스러운 성도들의 축제이다({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 283-98). (2) Geoffrey Wainwright: '신의 대면' 지오프리 웨인라이트는 Doxology: The Praise of God in Worship, Doctrine, and Life라는 독특한 조직신학을 저술하였는데, 그는 '기도의 방식이 신앙의 방식이다(lex orandi, lex credendi)'라는 원리하에 '예배의 신학'을 시도하였다. 그에게, 예배는 '신의 대면(visio Dei)'이다. 아직 그분을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희미하게 만나는 현세에서, 비전과 현실의 역동성이 예배를 형성한다. 그런데, 신과 인간의 만남은 대등한 존재가 아니라 창조자와 피조물의 만남이기 때문에, 예배의 형식을 요구한다. '신의 형상'인 인간만이 예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신과의 공통성에 근거한 교제의 가능성을 전제하지만, 무조건적인 자유의 만남이 아니라 조건과 규정과 의무가 있는 만남이다. 첫째로, 신은 인간과의 인격적 교제를 원한다. 그 교제는 공통적인 로고스(언어)의 형식을 취한다. 공통적인 관심사인 공통적 역사가 주제가 되며, 나아가 거기에 근거한 인격적 대화의 증대와 심화를 원한다. 물론, 신체언어나 상징, 행위등도 사용되지만 언어적 해석이 수반되어야 한다. 둘째로, 신은 인간과의 공동사역을 원한다. 즉, 지상에 있는 신의 대리자로서 그의 계획과 그의 나라를 성취하는데 참여하는 창조적 존재가 되기 원한다. 셋째로, 신은 인간의 사랑을 원한다. 인간이 자기에 대한 신의 사랑에 응답하여 신을 사랑하며, 동료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기 원한다. 교회는 세례를 통하여 한 가족이 되므로, 형제사랑이 요구된다. 따라서, 예배는 교제, 사역, 사랑을 나누는 신과의 대면이다. 그러나, 지상의 예배에는 신의 임재와 부재라는 상반된 현상이 나타나며, 이미와 아직, 비전과 현실의 긴장과 고통이 존재한다. 장로교회의 예배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장은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에 대하여" 고백하는데, 여기 나타난 예배론은 다음과 같다. (1) 예배는 자연계시가 보여주는 신의 주권과 선하심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 반응이다: "The light of nature showeth that there is a God, who hath lordship and sovereignty over all; is good, and doeth good unto all; and is therefore to be feared, loved, praised, called upon, trusted in, and served with all the heart, and with all the soul, and with all the might." (2) 예배의 방식은 성경에 규정되어 있다: "But the acceptable way of worshipping the true God is instituted by himself, and so limited by his own revealed will, that he may not be worshipped according to the imaginations and devices of men, or the suggestions of Satan, under any visible representation or any other way not prescribed in the Holy Scripture." (3) 예배의 대상은 오로지 삼위 하나님으로 제한되며, 그리스도의 중보를 필요로 한다: "Religious worship is to be given to God, the Father, Son, and Holy Ghost, and to him alone: not to angels, saints, or any other creature: and since the Fall, not without a Mediator; nor in the mediation of any other but of Christ alone." 예배의 역사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제사는 모세에 이르러 율법이 규정한 회막제사로 확립되며, 그후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예배가 계속된다. 그러나, 시편이 보여주는 대로 성전을 중심으로 한 찬양의 예배가 크게 발전한다. 그러나 성전의 파괴와 재건의 과정을 겪으며 구약예배는 중단과 회복의 운명에 처한다. 바벨론 포로기에 시작된 회당제도는 성전중심의 제사제도를 대치하게 된다. 찬양, 기도, 말씀의 3부분으로 구성되며 매일 진행되었다. 먼저 제1부 찬양을 드린 후에 예배에의 초청(느 9.5이하의 방식)이 있고 제2부 기도가 시작된다. 기도는 (1) 요체르와 아하바(창조와 사랑 감사), (2) 쉐마(신앙고백과 축복, 신 6.4-9, 11.13-21, 민 15.37-41), (3) 18기원(대표기도). 제3부는 율법과 선지서 봉독, 그리고 강해로 구성되며, 축도로 마친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회당예배에 참여하였으며, 이는 기독교예배의 기초를 형성한다. 성도들의 모임으로서 교회의 회집이 장려되었지만, 종합적 예배보다 기도회, 말씀의 봉독과 가르침, 구제헌금, 찬송, 은사모임등이 개체적으로 혹은 결합되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다 중심적인 명령은 성찬이었으며, 세례는 필요시 집행되었다. 초대교회는 세례, 말씀, 성찬의 3부로 구성되었다. 말씀부분은 입례, 자비기원, 영광송, 대표기도, 성경봉독(율법과 예언서), 찬양, 설교, 신경의 순서로 진행되었으며, 성찬은 평화의 입맞춤으로 시작하였고 성찬후에 헌금하였다. 그러나 4세기에 기독교가 공인되고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화려해지고 예배의식이 연장되지만, 점차 성찬중심의 미사로 집중되며 화체설에 근거하여 극화되고 희생제사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종교개혁은 예배의 회복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개신교회에도 견해차이가 존재하였다. 영국교회나 루터교회와 같은 보수파는 전통적 예배를 최대한 보존한 반면에, 재침례파나 퀘이커와 같은 급진파는 전통적인 예배를 전면 부정하고 고전 12-4장과 같은 자유예배를 추구하였다. 개혁파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였는데, 즈빙글리가 주도하였다. 그는 말씀과 성찬의 2부로 예배를 구성하였으며, 성찬을 1년 4회로 제한함으로서 사실상 말씀중심의 예배로 전환하였다. 그 순서는 성경봉독, 기도, 설교, 죄의 고백, 시편송, 축도로 단순화하였다. 그후 칼빈은 이를 준용하여 1542년 "제네바 예식서"를 발표하였는데, 예배에의 부름(시편), 죄의 고백(초청과 기도), 시편송, 조명을 위한 기도, 성경봉독, 설교, 대표기도(주기도로 마침), 축도(민 6.24-25)로 구성되었다. 장로교회 예배모범이 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이 1644년에 발표되었는데, 예배에의 초청, (하나님의 임재와 수용, 임재를 위한) 기도, 구약봉독, 신약봉독, 시편송, (사죄와 중보, 조명을 위한) 대표기도, 설교, (감사와 중보)기도, 주기도, (성찬식), 시편송, 축도의 순서로 구성된다. 상대적으로 찬송과 성찬이 약화되고, 말씀이 강화되었다. 현대의 예배갱신운동 기독교의 전통적 예배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변화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현대사회의 근본적 변화와 기독교의 세속화는 교회에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과연 기독교가 미래에 존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와 우려를 초래하였다. 기독교의 존속과 발전을 추구하는 다양한 운동들이 다양한 예배갱신운동을 발생시켰다. 1. 자유예배운동 1901년의 오순절운동, 60-70년대의 성령운동에 이어, "제3의 물결"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난 은사운동이 80년대에 발생하였는데, 빈야드교회 존 윔버의 {능력전도}와 {능력치유}로 대표되며, 90년대에는 '토론토 블레싱'이 나타났다. 빈야드운동이 주장한 은사개발을 통한 교회성장론은 성령운동과 교회성장이라는 양대열기에 휩싸인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는데, 그 방법론으로 예배갱신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고전 12-14장의 자유예배를 주장하였으며, 현대적 찬양을 강조하고 무용, 연극등을 도입하였다. 전통적 예배순서를 부정하고, 성령이 인도하는 평신도중심의 자유예배를 추구한다. 그리고 신유와 방언을 비롯한 신비적 은사들과 성령의 안식을 강조한다. 2. 구도자예배운동 세속화와 수적 감소로 위기에 직면한 서구교회에서 교회성장학파가 발생하였다. 선교와 전도가 강조되었으며, 그러한 맥락에서 예배의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전근대적인 예배당 구조가 보다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건축방식으로 변모되고, 새 신자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고 잘 적응할 수 있는 열린 예배 분위기와 예배형식이 추구되었다. 빌 하이블스의 윌로우 크릭교회가 대표적으로, 92년에 시작된 이 형태는 4년후 700교회로 확산되었으며, 한국교회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배의 기본적 패턴은 밴드의 전주, 환영인사, 보컬 듀땈, 드라마, 보컬그룹의 연주, 드라마, 성경봉독, 밴드가 곁들여진 노래, 헌금(구도자 제외), 메시지, 토론 및 교제의 순이다. 이런 예배순서나 분위기 조성은 과학적인 조사와 통계분석을 통해 이루어진다. 3. 예배복고운동 금세기초 근본주의의 발생은 많은 교파의 분열을 결과하였으나, 또 한편 교회의 위기의식과 세계화는 다양한 연합운동을 발생시켰다. 연합운동이 직면한 문제의 하나는 예배전통의 교파적 불일치로서, 예배의식의 일치를 위하여 예배의 역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고 그에 따른 일치가 제시됨에 따라 보다 초대교회적이고 원형적인 복고적 예배가 회복되고 있다. 특히, WCC의 BEM(세례, 성찬, 그리고 목회)문서는 1982년 리마에서 채택되어 리마예식서라고도 불리는데, 개신교회가 초대교회의 예배에 비추어볼 때 너무 성례전을 소홀히 하고 말씀에만 치우친 점을 반성하고 성례전의 회복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교회의 전통적 예배문과 교회력을 복원하여 예식서의 출판과 보완들이 이루어졌다. 4. 예배언어개혁운동 해방신학을 비록한 행동신학은 예배와 생활이 분리되어 있으며 예배언어가 기득권중심의 전통적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예배언어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권위적이고 고답적인 언어를 서민적이고 일상적인 언어로, 남성중심적 언어를 포괄적 언어로, 약자나 장애자를 비하하는 언어를 존중과 사랑의 언어로 바꾸고, 예배언어를 환경친화적이고 사회변혁적인 언어로 변형시켜 예배가 단순히 형식과 의식에 치우치지 않고 공동체적 각성과 헌신의 계기가 되도록 만든다. 그외에도, 멀티미디어예배(텔레비전 유선방송, 전자교회, 위성교회, 사이버교회), 토착화예배, 실험예배 등 다양한 예배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21세기의 효과적 예배 1. 효과적 예배의 원리 예배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그 목적을 위한 방편이다. 따라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예배 순서는 무의미하고 형식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면 예배의 직접적 효과는 무엇인가? 예배가 하나님에게 드리는 의식과 헌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예배를 기쁘게 받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열납을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평화와 결실로서, 예배자가 체험할 수 있다. 즉, 신과 인간의 쌍방적 교제가 이루어질 때 예배가 완성된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열납할 수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요4장과 롬12장은 진정한 예배를 가르쳐 주는 중심성구이다. 따라서, (1) 신령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2) 진실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3) 헌신된 예배를 드려야 한다. 다른 한편, 예배를 드리는 주체가 인간이며, 인간의 표현방식은 문화와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공동체의 문화적 양식이 고려되어야 한다. 틸리히가 지적한 대로,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며,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Theology of Culture, 42) 한국인은 한국인의 언어와 정서로 예배드릴 때 가장 효과적으로 예배드릴 수 있으며, 현대인은 현대적 방식으로 예배드릴 때 그의 마음을 가장 잘 표출할 수 있다. 그리고, 한 교회 공동체안에서 서로 다른 문화방식이 공존한다면, 예배에도 그러한 현실이 반영되어야 한다. 예배공동체 구성원들의 문화가 무시되면 점차 예배는 적용성을 상실하고 활력과 역동성을 상실하게 된다. 특정한 민족문화나 시대문화를 이상적 예배형식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그러나, 예배의 내용과 올바른 자세는 원리적으로 성경에 계시되고 지시되어 있으므로, 불변적 요소와 가변적 요소, 즉 본질적 요소와 문화적 요소를 구별하여 효과적인 예배를 드리는데 가장 적합한 효과적 배합이 필요하다. 2. 성경적 예배의 회복 성경은 공동예배를 권장하고 있으며, 성찬, 말씀, 기도, 찬송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초대교회는 그에 따라 성경적 예배를 유지하였으나, 중세교회와 개신교회는 편중된 강조를 통하여 예배의 균형을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적 가르침과 초대교회의 전통을 중시한다면, 예배의 균형있는 회복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1) 성찬의 회복: 종교개혁까지 교회는 매일, 혹은 최소한 매주 성찬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중세 카톨릭의 과도한 성찬집중에 대한 반감으로 일부 개신교회가 성찬을 1년 1-2회로 축소시키고 그것도 형식화되었다. 칼빈은 그러한 축소를 "마귀의 간계"라고 비판하고 최소한 매주 1회 거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기독교강요 IV.xvii.46). (2) 말씀의 회복: 설교는 개혁교회에서 강화되었으나, 말씀을 읽는 것은 약화되었다. Sola Scriptura는 강조하지만, Tota Scriptura는 중시되지 않고 기호에 맞는 성경을 교파주의적 방식으로 설교한다. 설교에 설교자의 주관적 주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치하고, 설교자의 경건이 부족하여 성령의 조명과 인도가 약하다. (3) 기도의 회복: 기도회가 예배로 흡수됨에 따라 진정한 공동체적 기도가 약화되고, 성도들의 공동기도가 성직자의 전유물로 집중되었다. 또한, 기도자의 준비부족과 대상착오적인 연설식 기도가 등장하여 기도를 오염시키고 저질화하였다. 초대교회적 연도와 기도문의 회복이 요청되며, 모든 예배자가 공감하고 공동기도할 수 있는 공기도의 인식이 필요하다. (4) 찬송의 회복: 시편과 바울서신 등에서 보는대로 찬송은 예배의 본질적 요소였으나, 종교개혁이후 개혁교회에서 약화되었다. 그에 따라, 예배가 경화되고 찬양의 활력이 상실되었다. 보다 열정적이고 즐거운 영적 찬양의 회복이 요청된다. 3. 효과적 예배 회복을 위한 실용적 제안 예배의 구체적인 형식은 성경이 확정하지 않았지만, 그 원리는 명시되어 있다. 성경으로부터 기원하는 예배의 전통이 역사적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전통은 중시되어야 한다. 예배의 혼란을 초래한 고린도교회에게 준 결론처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 전통의 근본적 변화는 역사의 흐름안에 있는 공동체가 수용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점진적인 회복이 필요하다. 21세기 한국의 보수적 장로교회가 수용할 수 있는 예배의 회복방안을 제시하자면, (1) 성찬의 확대, (2) 기도문을 포함한 예배문의 도입, (3) 찬양사역의 확대, (4) 예배자의 참여 확대: 연도, 찬송형태의 예배문, 헌신서약 등, (5) 예배형식의 현대화 및 대중화. (6) 예배언어와 설교의 실천적 변혁, (7) 예배인도자의 신전 의식(coram Deo) 강화와 성령 충만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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