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문화 산책(3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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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자인형주자 靑磁人形注子 ♣ -국보 제167호-
종목: 국보 제167호
지정일: 1974. 07. 09
명칭: 청자인형주자 靑磁人形注子
분류유물: 생활공예, 토도자공예, 청자
소유,관리: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5가,임향한의원)
시대: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만들어진 상형청자로
높이 28.0㎝, 밑지름 11.6㎝의 주전자이다.
상형청자는 사물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만든
것으로 이 주전자는 머리에 모자를 쓰고 도포
를 입은 사람이 복숭아를 얹은 쟁반을 들고 있
는 모습이다. 모자 앞 부분에 구멍을 뚫어 물을
넣을 수 있게 하였고, 받쳐든 복숭아 앞 부분에
또다른 구멍을 내어 물을 따를 수 있도록 만들
었다. 사람의 등 뒤에 손잡이를 붙였으며, 그꼭
대기에 작은 고리를 만들어 붙였다. 모자에 새
모양을 만들어 장식했고 모자, 옷깃, 옷고름,
복숭아에 흰색 점을 찍어 장식효과를 냈다.
맑고 광택이 나는 담록의 청자 유약을 전
면에 두껍게 발랐다. 이 주전자는 1971년
대구시 교외의 한 과수원에서 발견되어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출토지가 분
명한 13세기 전반의 상형 청자
가운데 하나이다.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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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 (허동현 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장 )
◈ 세기를 건너뛰어 '朝鮮策略'이 오늘에 던지는 교훈 ◈
김홍집의 주 임무는 일본과 세칙협상을 마무리 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진 속‘수신사인 (修信使印)’이란 글씨가 새겨진 상자에 든 인장은 쓸모가 없었다. 국왕의 전권(全權) 위임이 없다는 이유로 일본이 협의조차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1880년 여름 도쿄에 파견된 수신사
(修信使) 김홍집의 임무 중 하나는 일본의 조선
침략 여부를 정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외
교관들조차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를 막을 방책을
세우는 것이 급선무라 입을 모았다. 압권은 황쭌셴
(黃遵憲)이 건네준 '조선책략'이었다. "오대주(五大
洲) 사람들이 다 조선이 위태롭다 하는데 조선인만
절박한 재앙을 알지 못하니, 불난 줄도 모르고 재재
거리는 처마 밑 제비나 참새 꼴과 뭐가 다르겠소."
이 책은 '연작처당(燕雀處堂)'의 경구를 빌려 러시
아의 침략을 막으려면 "중국과 친하고(親中國), 일
본과 결속을 다지고(結日本), 미국과 연대하여(聯
美國) 자강(自强)에 힘쓰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이는 조선의 살길을 비추는 헌책(獻策)이 아니
었다. "중국과 친하라"는 주문 뒤에는 조선 스
스로가 중국의 속국임을 만천하에 알리게
하려는 속셈이 숨겨져 있었다.
조선 정부는 제안을 받아들여 1881년 중국과
일본에 근대문물 수용을 위한 영선사(領選使)
와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보냈고 이듬해 미
국과 수교했다. 그러나 술책에 놀아난 것은 아니
었다. 임오군란(1882)과 청일전쟁(1894)이후 중·일
이 조선 독립의 옹호자라는 가면을 벗자 우리 위
정자들은 그들의 공로증(恐露症·Russophobia)
을 역이용했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중·일을 견제
한 인아(引俄)·거청(拒淸)·거일(拒日) 정책이 이
를 명증한다. 하지만 자강이 결여된 세력 균형
(均勢·균세)만으로 나라를 지킬 수는 없었다.
열강의 이해가 교차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매한가지인 오늘, 중국은 청사공정(淸
史工程)을 펼쳐 주변국에 대한 기미(羈縻)를 조
이려 하고 일본은 집단자위권 행사로 역사 시계
를 되돌리려 한다. '조선책략'이 오늘에 주는 교
훈은 "토지와 인민을 탐한 적이 없다"던 중국이나
"중국 이외에 가장 가까운 나라"라던 일본이 더 큰
침략자였으며, "늘 약소국을 돕는다"던 미국도 우
리가 내민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는 역설이다. 힘
의 정치(power politics)가 작동하는 국제 정치
판의 동력은 국익(國益)이며, 영원한 적과 우
방은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깨어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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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 포스텍 서양미술사 교수
◈ '아비뇽 아가씨들' 닮은 피란지의 아줌마들 ◈
박래현, 노점, 1956년, 267×210㎝, 화선지에 먹과 채색,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우향(雨鄕) 박래현(朴崍賢·1920~1976)을
설명할 때는 남편인 운보 김기창 화백의 이름이
버릇처럼 따라붙는다. 그러나 일본에서 유학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받기도 했던 박래현
은 결혼 전에 이미 두각을 나타낸 미술가였다. 광복
이후에는 일본색에서 탈피하여 현대적 한국화를 창
조하기 위해 수묵채색이라는 전통적 매체를 서양의
추상미술과 결합하는 등의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었다.
지금 덕수궁 미술관의 전시 '명화를 만나다'에서 볼
수 있는 '노점'은 바로 그 실험의 결과물이다. 큰 면
으로 과감하게 분할된 추상적 형태와 차분하게 가라
앉은 색채 등은 박래현이 특히 입체주의에 매료되었
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커다란 화면의 전면을 차지
하고 굳건하게 서있는 갈색 피부의 이국적인 여인
들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과 닮았다.
그러나 박래현의 여인들은 '아가씨'가 아니라
'아줌마'다. 전쟁통의 피란지에서도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노점에 좌판을 벌인 아줌마, 한 손으로
아이를 업고 다른 손으로는 생선 광주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 자기 몸집만큼 큰 옥수수 바구니를 거뜬
히 들고 있는 건장한 여인들은 어쩌면 화가 자신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전란 중에도 붓을
놓지 않은 화가였지만, 동시에 네 자녀의 어머니
이자, 일찍이 청력을 잃은 남편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친 지극한 내조형 아내였던 것이다.
미술사에는 '거장'인 남편이 독차지한 스포트라이트
바로 옆, 유난히 더 어둡게 느껴지는 무대의 한구석
에서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미술가'로 자신을 드
러내기 위해 분투했던 여성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박래현은 자기 무대가 밝든 어둡든 개의치 않고
성실했던 화가이자 아줌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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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 이미지의 배반, 보이는 것은 과연 진실인가 ◈
르네 마그리트, 인간의 조건, 1933, 캔버스에 유채, 100×81㎝, 워싱턴 D.C. 내셔널 갤러리 소장..
금요일 오후엔 무료 개방한다는 미술관
정책 덕에, 관객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이들은 곧장 6층 특별전시실로 향했다. ‘마
그리트: 일상의 신비, 1925∼1938’전을 보기
위해서다. 덕분에 마그리트(1898∼1967)의 명
화보다 그 앞을 겹겹이 둘러싼 관객들의 뒤통수
보기 바빴다. 한국어·중국어·프랑스어 등 각종
언어가 들리는 ‘국제화’ 현장, 뉴욕 현대미술
관(MoMA)의 관광객 특수다. 공짜여서든
관광용이든, 미술관이 이렇게 북새통인
장면은 늘 부럽다.
벽지 디자인, 패션 광고 분야에서 일하던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오늘날의 거장이 됐다. 그가 회화의 혁신을
이룬 초창기 13년간을 조명한 이 전시에는 파
이프를 그려놓고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고
적은 ‘이미지의 배반’(1929), 알을 보며 새를 그
리는 화가를 그린 ‘통찰력’(1936) 등 대표작 80
점이 나왔다. ‘인간의 조건’도 그중 하나다.
바깥 풍경과 구름 모양까지 일치하는
그림이 놓인 창가, 마그리트는 1933년 이
수수께끼 같은 그림을 그리고는 뒷면에 ‘인
간의 조건(La condition humaine)’이라 적었다.
우리는 창가에 놓인 풍경화를 보는 걸까, 창밖의
풍경을 보는 걸까. 아니, 캔버스 속 풍경은 과연
온전한 바깥 풍경일까. 혹시 뭔가 다른 장면을
은폐하기 위해 비슷하게 그려진 캔버스를
갖다 놓은 건 아닐까.
‘인간의 조건’은 그림의 본질을 묻는 야심
찬 작품이다. 그림은 본디 평면 위에 현실의
‘환영’을 담는 과정, 화가들은 평면 위에 입체
세계를 그려 넣기 위해 착시 효과를 연마해왔다.
착시의 역사가 곧 회화사다. 마그리트는 바로 이
착시를 비틀어 우리가 보는 세계의 진실이 무엇인
가 되묻는다. “내 그림이 사고의 자유가 드러내는
구체적 특징을 표현하도록, 나는 사고를 구체화했다.
나는 이런 언어적 시도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되도록 의미를 오염하지 않는 것,
바로 그 불가능한 일을 목표로 삼는다.”
MoMA는 이미 1965년, 마그리트 생전에 회고전을
열었다. 이번 전시는 수십 년 만에 뉴욕에서 열리는
마그리트의 주요 전시다. 오랫동안 그의 전시를 열
지 않았던 데 대해 MoMA의 담당 큐레이터는 “마
그리트의 작품이 너무 유명해서”라고 답했다. 일
상의 사물을 기묘하게 비틀어 충격을 주는 게 그
의 작품이 가진 힘일진대, 이미 너무 유명해져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다. 익숙한 이미지를
재확인하는 자리가 되곤 하는
명화전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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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옥의 가슴속 글과 그림 ♣ 한국사립미술관협회장
◈ 병 속의 남자를 꺼냈는가? ◈
찰스 레이, 퍼즐 병, 1995년, 유리, 채색나무, 코르크, 34×9.5×9.5, 휘트니미술관 뉴욕.
코르크 마개가 닫힌 투명한 유리병
속에 한 남자가 들어있다. 남자는 잔뜩 긴장된 표정과
자세로 그가 얼마나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고 있
는지 말하고 있다. 병 속의 남자는 이 작품을 창작한 미
국의 예술가 찰스 레이다. 찰스 레이는 자신의 몸을 직
접 본뜬 작은 마네킹을 제작해 유리병 속에 갇혀 있도
록 연출했다. 그는 왜 실물과 똑같은 자신의 모습을
축소시킨 마네킹을 밀봉된 유리병 속에 넣은 것일까?
병 입구를 코르크 마개로 막은 것은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되어가는 현대인들의 절망적인 심리상
태를, 투명한 유리병은 다른 사람의 고통마저도 쇼
윈도의 마네킹을 바라보듯 구경거리로 삼는 비정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서다. 병 속의 남자가 일상이라는 감옥을 탈출해 자
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니코스 카잔
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문장
에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도 있겠다.
‘두목,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긴 줄 끝에 묶여
있으니까요.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인간의 머릿속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계속
계산하죠. 얼마를 썼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두니까 줄을 자를 수 없지
요…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욕망이라는 이름의 줄을 자르고 가진 것을 다 걸면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리라. 그
런데도 병 속의 남자에게 왜 이렇게 묻고 싶어지
는 걸까? 너는 진심으로 또 간절하게
자유를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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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회에 부치는 마음 ♣ - 늦가을 뜨락 장성우 영상시 -
- 자료 : 시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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