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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경 세
나의 출생과 어린시절
나는 경기도 안성군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어머니와 잦은 싸움과 또
폭력적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릴 때 초봄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앞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내가 낭떠러지에 떨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나에 대한 애정이 많아 그 당시 옆 동네 있었던 미군부대에서
통조림을 자주 사다 주셨고 새 운동화나 옷도 사다 입혀 주었던 기억도 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폭력은 계속 어머니에 가해지고 하루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행을 피하다가 맨발로 깨어진 병을 밟아 쓰러져 다음날 버스를 타고
수원에 있는 병원에 가서 치료하고는 어머니는 그 후 나를 데리고 가출을
하였습니다.
첫 가출은 제천에 있는 이모 집에 며칠 있다가 나와서 이 곳 저 곳 나를 데리고
다녔던 기억이 나고 그러던 중 5~6 살 때 인가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외할아버지 댁으로 갔습니다.
외가댁에서 옆집 방을 하나 얻어 주어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외가댁은 너무 가난하였고 후에 아버지가 찾아 온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외조부모님으로 부터 아버지가 혼이 나고선 되돌아갔습니다.
얼마 후 어머니는 외가에서 가출하였고 나는 두 살 아래 이모와 한 살 또
네 살 많은 이모 모두 여섯 식구가 살게 되었습니다.
외할머니는 떡국과 국밥 막걸리 장사로 우리들 생계 학비를 전적으로 책임을
지셨습니다. 허나 나는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나날을 보내며 살았습니다.
외할아버지 눈치와 막내 이모의 눈치는 힘들었으나 외할머니의 사랑과 눈물로 저를
감싸 안아 주었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 흘리곤 하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8 살 때 초등학교를 들어가야 했는데 호적 미비로 1년 뒤 9살에 학교에 입학,
내 기억으로 1학년 까지는 잘 다녔으나 2학년 때부터는 어머니가 육성회를 보내주지를 않아
어렵게 견디며 3학년 올라갔으나 육성회비 미납으로 주 1~2회는
교무실로 불려가 하는 건 거짓 핑계 그러다 보니 학교에 가기 싫어 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석이 많아지고 그런 가운데 꾸역꾸역 3학년 마치고 4학년
올라갔으나 3학년과 다를 바 없는 학교가 힘들었고 1학기에 친구들이
‘쟤 또 교무실 끌려간다.’고 놀리곤 하여 2학기부터는 학교 가기를 그만 두었습니다.
그러나 외조부모님은 학교에 관해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도 외갓집은 더욱 힘들어 지고
둘째 이모는 빚을 내어 중학교에 들어갔으니 외할머니가 내게 옆집에 가서 일 도와주고 밥이라도
얻어먹어라하여 옆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옆집은 할머니와 아들 두 분이 사셨는데 닭과 돼지도 키웠고 이러한 가축 기르기를
나는 도우며 아울러 누에 키우는 일도 배우며 거들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한 아들 아저씨는 청주 시내로 나아가게 되었고 나는 둘째 아들 네
집이 전파사를 열어서 고장 난 가전제품을 수리하고 잔심부름 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 일도 2년 후 그만두고 집에서 놀다가 한 친구와 함께 기와공장에서
처음으로 일당 300원 받고 일을 하게 되었으나 아침 7시부터 저년 9시까지
하였는데 너무 힘들어 석 달 정도하고 그만 두었습니다.
청소년 시절을 돌아보며
그 후 75년 4월 내 나이 15살 무렵 어느 날 집에 있는데 지서에서 순경
두 명이 나를 데리고 지서로 갔는데 친구 두 명이 지서에서 구타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들어서자마자 두 세 명 경찰이 나를 두들겨 패기 시작 하였습니다.
경찰은 ‘무얼 훔쳤는지 바른대로 대라’ 하기에 어이가 없어 울면서 ‘저는 모르는 일
입니다. 아무것도 안 훔쳤습니다.’ 하였더니 한 경찰이 ‘이 새끼 더 맞아야 불 것이
다.’ 하면서 무릎 사이로 몽둥이를 끼우고 상체를 뒤로 재끼고 하는 고문을 받고
심지어 볼펜을 손가락 사이 끼우고 손가락을 사정없이 누르는 고문 나중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리기도 하는 고문을 지서 골방에서 2~3일간 당하였습니다.
그런 후 현장검증을 하였지만 주인들은 그런 물건은 없어지지 않았다 해도
경찰은 본인들이 했다고 하니 여기 진술서에 서명하라고 하며 서명을 받아 갔습니
다. 그 당시 친구들은 너무나 가난한 집안이었고 그 후 들리는 얘기로 박정희가
전국 경찰서에 범죄 일제 소탕기간이니 수훈 경찰들에게 1계급 특진 시킨다하여 나
와 친구들이 너무 억울하게 희생되었고 우리를 취조한 양모 담당 경찰은 1계급
특진 되었다고 했습니다. 지서에 들어와 있을 때 둘 째 아들 아저씨가 용서해 주라
고 해도 소용없었고, 그러던 중 어머니가 오셔서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너 한테
힘이 되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하시며 ‘돈 많이 벌어 올테니 그 때 까지 몸
상하지 말고 질 지내라.’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가셨습니다.
당시 어린 나이에 너무나 마음에 상처를 받고 또 누구하나 나에게 힘 되어 주는 사람이 없고
이후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나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 후로 어머니는 다시금 오시질 않으셨습니다.
나와 친구들은 청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한 경찰이
‘너희들 이와 같이 진술한 게 거짓이 아닌가?’ 하고 말했을 때 ‘저희들 진술이
사실입니다.’라고 말하였더니 그 경찰이 고개를 갸우뚱하였습니다. 우리는
지서에서 두들겨 패고 고문하던 경찰들이 ‘본서에 가서 그런 일 없었다고
하면 또 다시 몽둥이로 맞고 고문도 할 거다.' 하여 공포에 눌려 본서
경찰에 ‘사실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청주경찰서에서 10일 후 청주교도소로
이송되어 3 개월 후 여름에 출소를 하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열도 안 되어 지서 경찰이 와서 지서로 데려가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느냐? 물으며 집에 계속 있으라 하였습니다. 그런 연 후 외할아버지가 나를
오라고 하여 갔더니 데리고서는 음성에 있는 어머니 집으로 갔습니다.
어머니는 그 무렵 재혼을 하신지 얼마 안 되어 나를 돌 볼 수가 없다고 하였고
그러던 와중 외갓집에서 다시금 연락이 오길 청주 함께하였던 아저씨가
인천에서 다방을 하니까 올라가서 아저씨 밑에 있으라고 하여 바로 인천으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올라올 때 외가에서는 이젠 집으로 오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습니다. 인천에 75년 12월부터 신포동에 있는 다방에서 먹고 자며 일을 하였
습니다. 하는 일은 주방장과 아저씨 아주머니가 시키는 일을 도왔으며 급여는
없었고 용돈식으로 중간 중간 받았으며 아침 일곱 시 문 열고 밤 11시 마치기를 반복해가며
쉬는 날은 한 달 두 번 정도 되었으니 늘 피곤하고 힘들었습니다.
다방 일도 한 1년 정도 하다가 아저씨가 업소를 정리하고 나는 다방 재료상회를
통하여 동인천에 있는 다방에 다시 취직을 했습니다. 그 다방은 클래식 음악다방
이어서 손님은 대다수 학생들 급여는 월 6만원, 그렇게 생활하던 중 고향 선배 통해 오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내가 사회에 나와 처음 사귄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만나면 만날수록 더욱 가까워졌으며 이 친구는 인하대 야간부를 다니며
새벽에 리어카로 야채시장에서 야채를 받아서 팔고 오후에는 동인천에서 계란빵
장사를 하였습니다. 오후 4시 장사 마치며는 나는 이 친구 리어카를 다방 옆에
보관하여 주었습니다.
청년시절과 80년대 사회, 정치, 노동운동
우리가 이렇게 지내는 사이 5.18 광주항쟁이 일어났고 내가 일하던 다방 앞 대로
에도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동인천 역에서 답동 성당 앞까지 시위하면 최류 가스
에 눈이 따가와 눈물 흘리는 거 보이면 우리 업소 화장실로 데려와 씻을 수 있게
도와주곤 하였습니다. 당시에 나는 병역문제가 걸려 있었습니다. 내 호적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고향 안성에 가서 몇 번이고 갔으나 찾지를 못하고 올라오게 되고
그 후 제천에 계시는 이모부를 찾아가 이야기 하였더니 내 호적을 이모부 집으로
올려 놓으라하여 올려놓고 인천으로 올라왔습니다. 그 후 징병검사가 나와 안성에
가서 당고모와 당고모부 만나 이 얘기 저 얘기 하던 중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출한 어머니를 찾으러 왔다 외조부모님으로부터
혼이 나고 내려 간 후 얼마 있지를 않아 돌아가신 거 같습니다. 나는 고종 사촌과
함께 안성 징병검사장에서 신검을 받고 4급 보충역 판정을 받고는 다시금 인천으
로 올라 왔습니다.
그 후 81년 도 봄 정착해 보려는 마음으로 부산으로가 여기 저기 일자리 찾아 보
았지만 연고도 없고 다시 대구로 올라 왔습니다. 대구에서 어렵게 커피 숍에 직장
을 구하여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하지만 일이 아침 8시부터 밤 11시 까지 이고 휴무 는 2주에 하루...
일이 매일 반복이 되다보니 힘들고 지치고 피곤하해 하며 근 3년을 하다가 인천으로 다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올라온 후 85년 11월 경 알고 지내던 형이 주안에서 커피 숍을 개업한다고 하며 나 보고 주방을
보아 달라고 해서 그 가게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몇 달 후 어느 날 인천시민회관 앞과 옆에 평상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 난 이상하다 생각하며 그 주변을 살피며 다녔는데 시민회관 정문에서
뿌연 최루가스가 날리면서 사람들이 눈물 재채기를 하며 나오는 게 보였고 갑작스레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며 달려오고 있었고 여러 사람과 나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겨우 가게로 가서 씻고 나니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와 보니 제일시장 방향,
주안 거리 쪽 앞에는 학생들이 연좌농성을 하고 있었고 그 앞에는 전경과 지프차가
있는데 갑자기 차 뒤편에 달린 리어카만한 것에서 불이 나오며 탕, 탕, 탕 하며
물체가 날아 왔는데 나중 알게 되지만 일명 지랄탄 이었습니다. 현장에 있으니 얼굴이 후끈 숨도
쉴 수가 없었고 눈은 아까 보다 더 뜰 수가 없었고 그 고통을 말로 표현하기가...??
다시 가게로 들어 가 씨고 나와서 시민회관 앞으로 갔습니다. 회관 4거리 에는 롤리탱크차 한 대가
왔다 갔다를 반복, 학생과 시민들은 돌과 파이프 몽둥이를 들고 차량에 달려들었고 그 때 차량이
후진하면서 학생과 시민이 치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대치상황에서 시민회관 사거리에
전경들이 석바위 방향으로 계속해서 최루탄을 쏘고 이에 학생과 시민들은 전경들에게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싸우는 것을 몇 시간 동안 보았습니다. 그 후로 동네 주위는 며칠 동안 최루가스 냄새로
고생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 후 텔레비전을 통해 그날 있었던 시위가 5.3사태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사회현상에 궁금하였고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일간신문을 보면서
사회와 정치에 대한 기사와 사설을 보면서 무엇인가 잘못 되어도 잘못 되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동인천 다방에 있을 때 만나던 친구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어느 날 87년 2,3월 중 저녁 6시 넘어 신포동에서 집으로 가던 중 답동에 있는 성당 정문 앞에서
사람들이 모여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나서 가보니, 얼마 전 ‘책상을 탁하고 쳤더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군 추모식 날이었습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서 구호도 외치고 하던 중 갑자기 최루탄을
터뜨리며 ‘잡아라.’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사람들 옆집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어느 사람은
잡혀 지릴 끌려가고 하였습니다. 그날 시위를 보고서 더욱 사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 해 6월 어느 날, 거리에 유인물 뿌려져 있는 것을 주워보니
‘부평으로 모이자.’ 해서 가 보았더니...그것이 바로 6월 항쟁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당시 부평역에서 대우자동차 방향으로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진격하였다가 백골단이 진압해 오면
우리는 옆 골목길로 들어가 대열을 정비해 다시 돌멩이와 각목을 휘두르며 화염병 투척이 반복해
일어났으며 대로로 나아가길 반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싸움이 몇날 며칠 계속되다 한 번은 백골단이 덮쳐서 남의 집으로 들어가자 그 집까지 들어왔
으나 우릴 잡지 못하자 최루탄을 집 곳곳에 터뜨리고 가면 우린 다시 나와서 대열을 정비 다시
싸웠습니다. 하루는 백마장쪽에서 대우차 방향으로 진출 과정에 돌을 얼마나 많이 던졌는지 당시
전경들 한쪽에 6~7명 씩 날아오는 돌을 막기 위해 그물망을 쳤었는데 그게 넘어져 가는 걸 보기도
하였다. 당시의 시위는 밤 10시 11시 까지는 보통이었고, 다음날 오전 10시부터 다시들 만나서 대열을
갖추고 전경들과 맞붙었다. 이러한 치열한 투쟁 가운데 최루탄에 의해 이한열군이 사망하였다는
뉴스에 더 많은 시민,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독재타도’ ‘호헌철폐’ 구호를 외치며 -당시 국민운동본부
인천지부 집행부의 지침에 따라- 송림동 로타리로 가던 중 한 가게 주인이 시위대 향해 총을 쏜
사건도 있었습니다.
당시 나는 직장도 그만두고 시위에 합류하면서 그 해 6월은 그렇게 보냈습니다.
그 후로도 몇 번 유인물을 보고 내가 나타나면 사람들이 수근 대며 흐터지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오는 집회가 없다며 사라지곤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나를 연고도 없고 집회만
있으면 나타나니 내가 푸락치인 것으로 오해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탑동 성당 앞에서 시위가
있다하여 참석하여 시위를 하던 중 경찰 진압에 밀려 성당 안으로 들어가서 점거 농성을 하였으며
노동자, 학생, 시민으로 나누어 규찰, 교육, 회의를 진행하며 농성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80년도에 만나던 친구 동진이를 농성장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친구인 동진은 깜짝 놀라
하며 한편으론 너무 반갑고 하여 둘이 한참 이야기 하였고, 친구는 나를 주위서 푸락치라고 하여 나를
친구라고 제대로 말을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나는 시민 측에 가담하여 규찰대에 속하여 우리의 요구를 결정 내무장관 교체를 요구하였으며
더하여 경찰의 사과 및 연행자 석방도 요구 조건이었습니다.
당시 시민 쪽 조장은 현재 한나라당 간 사람이었고 내가 하는 역할은 저녁 6시 성당 앞 시민들과 집회를
할 때 각목을 들고 집회를 보호하고 밤에는 밤을 새며 규찰을 하였습니다. 어느 하루는 비가 밤새도록
왔는데 그 비를 다 맞고 규찰을 서면 다음 날 유가협 어머니들이 옷과 양말을 가져다주면 갈아입기도
하였습니다.
그로 5일 정도 후에 농성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로 어느 날 부평 4공단에 속한 태연
물산 공장에서 노동조합 결성 후 구사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이 진행되고 있다하여 그곳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태연물산은 와구공장으로 여성근로자가 대부분 이었습니다.
그 중에 박인숙 위원장은 반바지를 입고 나왔는데 피멍이 든 곳이 여기 저기 보였고 여러 조합원들이
구타당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든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 아래 회사 정문 앞에서 100여명이 2박 3일간
농성에 돌입하였으며, 후에 안 일이지만 상철이라는 근로자는 구사대에 목에 칼이 찔려 병원에서 치료
까지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지원나간 사람들은 똘똘 뭉쳐 밤새 농성을 하였고 조합원들은 틈틈이 농성을 진행하였고
이틀째 되는 날 저녁 친구인 동진이가 왔습니다. 모회사 노동조합 결성을 내일 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요구사항을 알고 돌아갔습니다.
다음 날 노동조합과 태연물산 사장과의 합의하에 노조인정, 임금인상, 수당 및 상근자에 관한 여러 가지
합의를 이루어 내어 우리들은 해산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87년 8,9월 중 숭의동에 있는 택시회사서 김장수 기사가 분신을 하였다고
하여 우리는 달려가 회사에 다다르니 정문에 경찰과과 회사관리자들이 막고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조합원들과 함께 시위하였고 며칠 몇날을 싸워 합의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그런 연 후 기사분
장례 치루고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하였습니다.
이 후로 나는 친구가 얻어놓은 월세방으로 거처를 옮기고 그 방에 친구 포함 5명
독사 질다 철군 친구 나였으며, 나와 3명은 5공단 주방제품 만드는 공장에 다녔으며 질다는 봉제공장에
서 일했습니다. 십정도 닭장 집으로 불린 그곳서 5명은 우정을 쌓아 나갔으며 와중에 송림동
사랑방교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교회에는
실무자가 송영길씨와 부인, 전도사 그 외 몇 명이 더 있었습니다. 그 중 질다도 반상근 하는 거 같았고
박종률 목사도 함께하며 이런 저런 얘기 말이 들었습니다. 이곳에서 광주항쟁 방송을 보고 노동운동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전도사가 주선한 일용 노가다도 하고 집회도 참가하며 살았습니다.
그 후 화수동 일꾼교회 3층에 있는 인천지역 해고자협의회를 한 번 방문하였는데
나에게는 생소한 생각이 들었던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었고 당시 많은 해고자와 오선배, 사무장 지선
누나, 철이 형 대우중공업 해고자 이종률 형과 다람쥐, 혼수상태 여러 사람과 실무자들이 생활
하였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해고자들이 아침에 출근해 회사가 부당한 유인물을 같이 뿌리거나 다른
사업장 급한 상황이면 지원 나가고 또 집회에 참석하는 것 이었으며...
나는 당시 해고자협회는 재정상태가 형편이 없어 하루 밥 한끼 그 외는 주로 라면으로 끼니 때우는데도
협회에 상담하러 오는 해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들이 이것 저것 많이 배워
갔습니다. 그러는 도중에도 나는 주방 일을 도맡아 밥 한 끼라도 잘 먹을 수 있게끔 최대한 하였습니다.
그 후 학철이 형이 나에게 주어진 이름 주방장으로 계속 불려 지게 되었으며 당시는 본명 대신 가명을
썼습니다. 날씨는 추워지고 방바닥은 차가와 지선 누나에게 연탄보일러 설치하자 했더니 누나가 돈을
마련하여 설치는 내가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다 보니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당시
나름대로 어느 정도껏 상담도 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가투집회를 하다가 불발 최루탄을
주워 와 가지고 해협 주위 모래에 묻어 두고 다음 꼭 필요하면 쓰려고 하였습니다.
87년 대선에 대비 홍보유인물을 가지고 유세장에 나누어 주려다 잡혀갈 뻔 한 적도 있었으나 멈추지
않고 유세장 마다 다니면서 반노태우를 알려 나가는 일에 힘을 다했으며 그러던 중 명동성당에서
후보 단일화 집회가 있다고 하여 올라가서 집회에 합류 중 백골단, 경찰과 마주쳐 그들이 최루탄 쏘며
진압해 오자 우리는 돌, 화염병으로 싸우면서 명동성당 점거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수녀들이 성당서 나가 달라고 하였고 한 신부도 강하게 퇴실을 요구하자 한 친구가 화염병에 불을
붙여서 달려드니 수녀 신부는 도망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성당 우측 교육관을 농성장으로 잡고
돌멩이 모으고 화염병 만들며 싸움을 지속하였는데 엄청 많은 백골단이 쳐들어와 우리가 성당
본당까지 밀리는 상황까지 갔습니다. 그러던 중 수녀와 신부들이 강하게 항의하자 그제서야
그들이 물러갔습니다. 그렇게 하여 상황을 정리하며 조를 구성하고 규찰도 강화하고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잠은 건물 계단 아래서 어디서 가져왔는지 스티로폴을 깔고 잠들을 청하였습니다. 그러고선 오전 집회
저녁 집회를 반복하였는데 하루 저녁 집회 중간에 농성자 한 명이 ‘저 놈 잡아라.’하고 큰 소리를
쳤는데 순간적으로 주먹 발길질이 지목 당한 자에게 마구 가하여졌습니다. 잡고 보니 사복경찰이었고
이 경찰은 얼굴에 피 범벅아 되어 있었고 집행부에서 끌고 성당 내 신부에게 데려갔습니다.
소리 질렀던 시위자는 시위 중 잡혔을 때 그 경찰에 많은 폭행을 당해 얼굴을 얼고 있었다고 했으며
그 경찰은 집행부와 신부 앞에서 조사를 받고 그 경찰과 우리 측 연행 당한 자들과 맞교환을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후보 단일화 지켜내지 못하고 힘이 작았는지 농성 마지막 밤을 그렇게 보내던 중 새벽 3시
경 조장이 불러 갔더니 사과탄 2개를 주면서 ‘새벽 4시 까지 서울역 앞으로 오라’하여 마음 다잡고
개별적으로 한 명씩 빠져 서울역으로 갔더니 10여 명이 기다리고 있었고 함께 성남행 좌석버스를
타고 성남에 내려 오늘은 따뜻한 밥과 국으로 먹자며 식당으로 들어가 오늘의 수칙을 받았습니다.
오전 10시 성남 유세장에 들어 갈 때 모자에 어깨띠 피켓 들고 유세장 단상 7미터에서 일열로 서고/
누가 소리 내어 구호 외치면 주머니 최루탄을 단상으로 던진다 라고 행동수칙을 받고서 유세장으로
가서 수칙대로 하였고 연설이 단상에서 시작되니 많은 인파가 몰려 왔으며 그러던 중 11시 경
노태우가 올라 와서 연설 중 수신호와 함께 주머니 최루탄 꺼내어 단상위로 일제히 투척 여기저기
펑 펑 하며 터졌고 단상 위에서는 ‘저 놈 잡아라.’ 하며 고함 소리...대부분 나이든 사람들이어서
가스에 이라 몰리고 저리 몰리고 난리여서 유세가 중단 되고 뒤에서는 ‘김대중’ ‘김대중’ 구호가 들려
왔습니다. 경찰과 노태우 지지자들에 잡혀 엄청난 구타를 당하고 있을 때 우리 100여명이 들고 있던
피켓을 떼고 각목과 돌을 들고 경찰과 노지지자들 몰아내고 친구들을 데리고 유세장을 빠져
나왔으며 그리고 나는 인천으로 왔습니다. 그리고선 대통령 선거가 치루워 지고 허무하게 패하였고
운동 후 후유증은 심각했고 노태우는 공안정국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 후 나는 88년 초부터 노동운동을 해야 되겠다하여 5공단에 있는 50명 근로자 규모의 인조 꽃을
제조 수출하는 유일실업에 입사하였습니다. 생산직에 남자는 나 외에 5명 정도 그 중 2, 3명은 사장과
친척관계였고...입사 후 1 달 지나같은 부서에 일하는 동료 둘에게 잔업 없는 날 술 한잔 하자고 하여
한 날 셋이서 호프 집으로 가서 진탕 마시고 그런 후부터 우리는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 친구 강은 서산이 고향 군대는 공수부대 출신이고 방통대에 다니면서 사회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또 한 친구 배는 성격이 좀 소극적이고 어딘가 불만이 많았는데 자주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다 자연스레
임금인상 얘기가 나오니 불만들이 많았습니다. 해서 우리는 임금인상 투쟁의 날을 잡아서 하나 둘
준비해 나갔습니다. 당시 임금은 일당 4천원, 잔업 포함 한 달 고작 14만 원 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접촉하면서 파업이 3월 20일 경 있으니 동참해 달라고 하면서 몰래 몰래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 당시 노태우정권 들어선지 한 달 밖에 안 되었고 그 해 엄청난 노사분규로 노태우는 공안정국으로
몰고 가면서 쟁의에 대해 엄중 대처한다고 매일 뉴스에 나왔습니다. 사회 분위기는 싸늘하였지만
우리는 계속 준비해 나갔고 파업 전날 해고자협회에 가서 파업 예고 하니 학철 형이 공안정국이니
파업 후 탄압이 심할 거라 연기하라 하였지만 예정대로 노동가 적고 우리 요구안과 유인물 만들고
타 단체에게도 얘기해 이불과 녹음기 테이프 등을 빌려와 밤을 새워 준비하였습니다.
다음 날 출근하여 곧바로 식당으로 50명이 들어가 점거 농성을 하였고, 우리 몇 명은 각 자 역할분담을
하여 일사천리로 진행시켰습니다. 페인트 깡통 두드리며 노래하고 구호 외치며 사장에게 협상에
응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 당시 구호는 ‘우리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 ‘일당 700원 인상하라.’
‘작업조건 개선하라.’ 등으로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농성을 하며 하루가 지났습니다.
몇 명은 회의하고 몇은 번갈아 규찰서는 가운데 이튿날 회사서 협상에 응해 의견 나누었으나 결렬되고
우리는 더욱 힘차게 우리 요구를 외쳤는데 이러한 사안을 주위 고장 노동자들이 관심 있게 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5일째 되는 날 회사와 하게 되었고 일당 500원 인상, 작업환경 개선 등을 이루어
내고 일상 근로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후 근로자들 사이가 더욱 돈독해 졌고 서로의 신뢰가 쌓아져
갔습니다. 그 뒤에도 우리는 광주민중항쟁 기념식에 3인이 참석, 돌과 화염병도 던져 보았습니다.
나는 ‘큰 회사에 들어가야겠다.’ 생각하고 이 회사를 퇴사하고 이곳 저곳 집회에 참가 싸움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5공단에 있는 세창물산 노동조합 사무장이 사고로 사망. 세창은 장기파업으로 재정이 바닥,
재정을 모으려고 일일주막 현수막을 굴뚝에 걸려고 올라갔다 추락사 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창물산으로 갔더니 조합 측에서 시신을 경찰이 탈취 할 것 같으니 병원으로 가야 된다고
하여 우리는 병원으로 갔습니다. 오전 9시와 오후 7시 집회를 통해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일치단결,
자고 먹고 한 달 이상 농성을 하던 중 회사 사장과 협상타결 되고 농성을 풀고 장례식을 치루게
되었습니다. 장례식 날에 김대중 정당에서 방송 차량 제공으로 이 차를 선두로 영구차가 따르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 마석 모란공원묘지에 안장을 하고 돌아 왔습니다.
그 후 세창물산 노조에서 주점을 연다하여 방문해 술을 한 잔씩들 하고 있는데 경찰들이 들여 닥쳐서
이를 막으며 대치하던 중 갑자기 경찰이 방패를 휘둘러 방패에 나는 눈을 다쳐 5바늘을 또 이도 조금
부러져 오선생과 함께 서에 항의 방문하여 당시 20만원 합의금을 받았습니다.
그 후 다시 6공단에 있는 대신전기서 파업 중 위원장이 경찰에 연행되고 경찰과 대치 중에 있다고
하며 지원 요청이 와서 대신전기에 가서 파업에 동참했는데 그 때 지원 나온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우리는 화염병 제작하고 규찰을 조직하며 지원을 다하였습니다. 대신은 당시 수소를 재료로하는
자동차 전구공장이었는데 우리는 수소를 가지고 경찰이 접근 못하도록 하였으여, 한 날 저녁 9시 경
회사 정문 옆 도로에 앞에서 4명이 서성 이길래 ‘누구냐?’ 하고 소리치자 조합원 몇 명이 달려와
합류하고 그들을 확인하니 동부경찰서장과 정보과 대공과 형사들 이었습니다. 우리는 화염병에 불을
붙인 채 들고 있었는데 서장이 ‘도로에 수소통 배치는 불법이고, 화염병에 맞아 죽은 사람은 없어도
최루탄에 맞아 죽은 사람 있다.’며 비아냥 거리기에 누가 화염병을 투척해 버려 그들은 바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서 우린 강한 마음을 가지고 규찰도 강화하고 계속 농성하여 사측 대표와 협상을 하였으나
계속해 결렬되었고, 당시 위원장은 구속 상태라 사측에서는 제3자들은 사업장에서 나가라 하였으나
우린 아랑곳 하지 않고 농성에만 집중하였습니다. 파업이 한 달을 넘어가고 있는데 어느 날 오전 지원
나온 사람들 끼리 회의를 해서 파업이 장기로 가니 일단 우리는 철수를 하기로 결정, 그 날 옆 회사
노조위원장이 라면 1상자를 가지고 지지방문을 하여 점심 겸 라면이라도 끼니를 때우고 떠나려 했는데
갑자기 백골단이 정문을 향해 달려 들어오며 사과탄을 던지는 걸 보고서는, ‘백골단’이다 소리치며
화염병 투척하였으나 뒤로 밀리게 되어 옆 회사 쇠그물 담벼락이 무너지고 옆 회사 정문으로 달려가니
전경들이 그 회사 정문까지 둘러싸고 있었으나 우리는 가까스로 빠져나와 주안역 뒤 골목장에 있는
‘내일을 위한 집’에 가보니 대신실업 파업에 제삼자로 삼지실업 노조위원장이 잡혀갔다고 하며 그 뒤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 조심들 하라고 했으며, 며칠 후에 대신전기는 협상이 타결되고 정상조업으로
간다고 하여 우리는 다시금 흩어졌습니다.
그렇게 하여 일상생활로 돌아갔고 거듭 각종 집회도 참가하였습니다. 목재단지에 있는 한 자동차부품
공장에서 파업 중이라며 지원요청이 들어와 나는 가보니 50여 명이 파업을 중이어서 위원장을 만나니
나에게 규찰을 담당해 달라고 하여 1층은 식당 2층은 사무실이어서 옥상에다 천막을 치고 화염병을
만들고 돌을 모으고 혹시 해서 경유도 세 말을 준비하였습니다. 이튿날 나는 시골에 볼일이 있어
시골로 갔다 2일 후 인천에 오니 부품공장 회사 측서 협상하자고하여 협상 중 구사대가 처 들어와
조합원들은 흩어지기도 잡혀 가기도 하였습니다. 회사는 옥상에 13명만 남고 나머지는 보이질 않았습
니다. 2층에 지원 나온 형 둘과 그 외 지원자들이 있었는데 회사 측 한 관리지가 와이어 가닥을 들고
우리를 내리칠 듯 하며 가라고 협박을 해 옆으로 비켜서서 이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며 만일 집행부가
법정에 서면 이를 증언하려고 하였는데, 그 때 옥상에서 13명이 무언가를 읽고 있었는데 유서를
작성해서 읽는 소리였습니다.
2층 옥상과 공장 옥상이 높이가 같았는데 공장 옥상의 구사대가 유서 읽기가 끝나자 갑자기 화염병과
돌을 2층 옥상 농성자들에게 던졌습니다. 2층 농성자들도 돌, 화염병으로 강하게 저항하다 13명 중
한 사람이 무얼 던졌는데 터지는 소리가 엄청 났습니다. 서로 잠시 멈추고 무엇이 터졌는가 보니
부탄 가스 처럼 생긴 깡통이었는데 여하튼 몇 개가 더 터지고 화염병이 날고 하던 중 옆 공장 불량
플라스틱 쌓아 놓은 곳으로 화염병이 날라가 불이 났고 경찰들은 골목 골목 차단하고 양측 싸움은
더욱 격렬해져 가는데 한 조합원이 기름 한 말을 1층에다 붓는걸 보고 깜짝 놀았습니다.
1층 식당에서 쓰는 가스 50킬로 통이 세 개나 있는 곳이었습니다. 조합원은 위험하게도 기름을
가스통에 붓고 화염병을 던졌습니다.
순간 사람들과 구사대, 경찰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옆 공장에는 불이 점점 더욱 크게
번지고 가스통에 기름을 더 많이 부어 활활 타고 있을 때 옆 공장 야간작업을 하고 있던 자들이 작업
중단하고 다들 도망하고 심지어 경찰들도 도망을 모두 가 버렸습니다. 우리들은 모여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으려고 의논 중인데 소방차가 와서 가스통 불을 끄고자 계속 물을 뿌렸고 옆 공장 플라스틱에
불도 껐습니다. 후에 안 일이지만 5분만 더 불이 붙어 있었으면 가스 통 터졌고 지하에는 1톤 가량
가스가 매장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날 후도 우리는 모여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회사 관리자(군출신) 찾아와 하는 말이 우리
외부자들이 있어 협상이 잘 안되니 돌아 가 달라 하여 간단한 회의 후 철수를 했습니다.
이틀 후 들으니 합의 하기를 민형사상 책임을 지지 않고, 조합원들은 회사를 정리 정돈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도 나는 여기 저기 집회를 다니며 가끔 조합원들을 만나 이야기도
하면서도 만날 때 마다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88년도를 이렇게 보내면서 취직에 몰두하였습니다. 그 후 89년 2월 말 경
6공단에 잇는 동명통상에 이력서를 제출 며칠 뒤 출근을 하라고 해 출근해 보니 나 외에 한 명이 더
있었습니다. 그 친구를 보니 안면이 있었고 가투나 집회 시에 자주 보았던 사이였습니다.
우리는 입사 동기가 되었고 둘은 퇴근 해 주안역 뒤 시장안 곱창 집에서 술도 마셨으며 친구는
프레스 반 나는 압출 반에 속하였고 하루 일당은 4000원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주야간 맞교대를
하였고 하루는 동기가 와서는 끝나고 술 한잔하자 하여 저녁에 한 잔하면서 1년만 있다가 노조를
결성하자고 하자는 이야기를 하였고 출근 한지 보름 정도 지나서 회사 한 동료가 내게 찾아와 형을
알고 있다고 하며 오늘 저녁 만나자하여 퇴근 후 약속 장소로 갔습니다.
그 장소 5, 6명이 더 있었고 서로 인사 나누고 얘기를 들으니 지금 노조결성을 준비하고 있다며
동참하자고 g여 조금 당황하였습니다. 1년 뒤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20일도 안되어...
동기와 함께 생각을 하다 결국 동참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월급을 수령하여 쟁의기금 마련해야하고
해서 노조 결성 보고대회를 3월 11일로 하여, 그 전날 10일 저녁 8시 ‘골목집’에서 만나 동명통상
노조 결성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준비위원장 부터 각부 부장들과 쟁의부장 나까지 총 7명이 선두에
서게 되었으며 그 자리에 나온 13명 월급에서 1/5을 쟁의기금으로 내고 결성식을 가지니 회사는
노조가 선다는 소식에 관리자들이 주안역 뒤편 이곳저곳에 배치되어 감시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튿날 오전 7시 30분 회사정문 앞으로 몰려가 구호를 외치며 노조결성을 하였다고 동료들에게
알려 나갔습니다. 그런 후 8시 30분 노조결성보고대회를 연좌농성 형태로 가지게 되었고 회사는
출근하는 동료들을 불러 모아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하니 우리들 눈치 보며 관리자들을 따라 갔습니다.
우리는 연좌농성하며 회의 후 회사를 점거 농성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구사대와 관리자들은 우리 측에서
2인 1조가 되어 2층 사무실로 올라가 한명씩을 몸싸움으로 데려 오길 수차례 그네들은 회사 뒷담을
허물고 다시금 2층 사무실로 들어가는 걸 보고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몰래 회사를 나와 주변
대신전기, 삼화알미늄, 대동프라스틱 노조와 그 외 몇 노조에 지원을 요청하니 퇴근 시 주변 노조원들이
7~8백 명이 지원을 와주었고 우리는 2층 구사대, 관리자들 끌고 내려오기를 반복하던 중 관리이사가
(사장 동생)그네들이 다 나가줄테니 회사 집기들은 건드리지 않기로 합의 후 다 빠져들 나갔습니다.
당시 지원 나온 유재관 친구가 경비실에서 지원 나온 노조원들을 모아 조편성, 규찰 장소 정하는 회의를
하였고 우리는 지원노조원들과 취약한 곳 용접하고 바리케이트 쌓고 화염병을 만들어 곳곳에 배치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유재관 다가와서 우리에게 1명만 남고 다들 휴식과 잠을 청하라고 하였고
나머지 지원노조원들 100여명은 회사 곳곳에 조편성 하여 교대로 규찰을 서고 나와 유재관은 경비실에
서 규찰서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무며 방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 7시 30분 다 모여 약식 집회를
연 후 지원 나온 노조원들은 각자 회사로 출근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각자 역할에 충실히 하였고 오후 총무과장이 찾아와 협상을 하자고 하여
우리 측 몇 명 모여 협상 대표 구성하고 1차 협상을 경비실 앞에서 진행 하였습니다.
우리 측 요구는 1. 노동조합 인정 2. 주 44시간 근무 3. 임금 2000원 인상 4. 노조 상근자 2명 인정 5.
조합 간부 월 20시간 노조활동시간 인정 6. 모든 민형사상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라는 것을 전제로 1차 협상에 들어갔지만 한 시간 만에 결렬되고 내일 2차 협상 갖기로 하고 다시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저녁 6시 30분 유재관외 주변의 노조원들 150여명 정도가 지원을
나와서 각자 맡은 위치에 가서 밤새 규찰을 서고 아침에 다시 출근들 하는 반복된 모습이
진행되었습니다.
유재관 친구 열과 성을 다해 조직적으로 협조를 해 주어 참 친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고서 파업 5일째 되는 날 극적인 합의를 이끌어 내어 1. 임금 1700원 인상 2. 상여금 50% 지급
3. 노조인정 4. 노조 상근자 2명 인정 5. 유해수당 인정 6.노조간부 월 20시간 활동인정
7. 민형사상 책임 묻지 않는다. 하면서 합의서에 양측 도장을 찍고 우리들은 다음날 일상 근무로
돌아갔습니다. 그 이후 우리는 지역의 노동조합의 조합원들 참석 하에 노동조합 현판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90년대를 돌아봄과 앞으로의 생활
유재관은 90년대 운동단체를 조직결성을 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조직결성을 사전 정보입수하여
사무실로 침입해 들어와 피하려다 3출에서 실족을 해 추락 사망하게 이르는 가슴 아픈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후 인천 5공단에 위치한 경동산업에서 회사측과 맞서고 있던 해직노동자들이
복직을 놓고 농성을 하는 과정에서 회사의 교묘한 공작적 작태에 분개하여 3명이 분신을 감행
현장에서 3명이 사망하게 이르게된 큰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후로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몸 건강의 악화로 회사를 그만두고 블랙 리스트에 오르게 되니
마땅한 직장도 찾기 불가능해 지고...
해서 나름대로 새로운 일을 도모하면서 그간의 인천의 운동권 사람들과 교분을 가지면서
현재 '운동초심'에서 수년간 함께해 오며 2012년 총선, 대선에서 이 나라의 정치변화를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 보려고 움직이는 가운데, 농촌에서 태어난 나로써는 흙 냄새를 잊을 수가
없어 미록 작은 규모이지만 과수농원을 일구고 아울러 몇천 수의 닭을 키우며 스러져가는
이 땅의 농업기반에 자그마한 활력이라도 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