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비밀이다
滿 月 心 이연수
“호랑이다, 호랑이가 나타났다!”
사슴이 소리치는 소리를 듣고 폭포처럼 쏟아진 등나무 아래서 하얀토끼가 튀어나왔어요. 하얀토끼는 벌써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어요.
“호랑이라니?”
“크, 큰일 났어. 호랑이가 우리 숲속으로 오고 있어!”
사슴은 겁에 질려 횡설수설 떠들었어요. 근처 층층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던 다람쥐는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사슴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숲속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구름처럼 퍼졌어요. 숲속 친구들은 소리 소문 없이 먹을 것을 감춰놓느라 분주했어요.
어느 날 밤예요. 하얀토끼가 산등성이를 달려서 도착한 곳은 맥문동이 덥수룩하게 자라 있는 아주 외딴 곳이었죠. 하얀토끼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부지런히 땅굴을 팠어요.
“호랑이가 떠날 때까지 꽁꽁 숨어 있어야지.”
그 모습을, 멧돼지가 바위 뒤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어요. 조금 전 멧돼지는 밭에서 옥수수를 줍다 황급히 뛰어가는 하얀토끼를 보았죠.
‘밤에 어디를 가는 걸까?’
이상한 생각에 뒤를 밟았다가 깜짝 놀라고 만 거예요.
‘혼자 굴을 파서 숨으려하다니…….’
멧돼지는 무척이나 분해하며 돌아섰어요.
해님이 떠올랐어요.
사슴은 며칠 만에 밖으로 나왔어요. 호랑이가 무서워 무작정 숨어버렸다가 오늘은 너무나 배가 고파서 밖으로 나온 거예요. 두 눈이 휑해서 발견한 것은 땅에 떨어진 남천열매였어요. 흩뿌려진 것을 보니 누군가 급히 뛰어가다 흘린 것이 분명했어요.
사슴은 허겁지겁 남천열매를 주워 먹고는 옹달샘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어요. 염소는 힘겹게 걸어오는 사슴을 보고 있었어요.
“사슴아, 어디 아프니?”
“아니, 배가 고파서 그래. 걷기도 힘들 지경이야.”
“저런! 나도 오늘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했어.”
골똘하게 뭔가를 생각하던 염소는, 숲속 친구들을 불렀어요. 하지만 아무리 소리쳐도 쉽게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어요.
“무슨 일이야, 빨리 말해!”
멧돼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급하게 소리쳤어요.
“이 숲속에 옥수수도 열매도 씨앗도 모두 동이 났어. 먹을 거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인지 누가 알고 있니?”
숲속 친구들은 전혀 모른 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살폈어요. 멧돼지는 얼굴을 붉히며 혼잣말을 했어요.
“먹을 게 다 어디로 사라졌지!”
“나, 나도 몰라……!”
여우는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어요. 순간 하얀토끼와 멧돼지의 두 눈이 딱 마주쳤어요. 멧돼지는 기분이 확 나빠져 하얀토끼에게 대뜸 소리쳤어요.
“뭘 봐?”
“내가 뭘?”
“옥수수를 몽땅 가져간 게 나란 얼굴인데?”
“누가 그렇대?”
하얀토끼가 팔짝 뛰었죠.
“그런데 왜 나를 뚫어지게 봤어?”
멧돼지가 두 눈을 부라리자 하얀토끼도 샐쭉해져서 종알거렸어요.
“그럼 누가 옥수수를 가져갔을까!”
“그 말은 분명히 날 보고 하는 소리겠다?”
얼른 염소가 둘 사이를 막아서며 나무랐어요.
“너희 둘은 숲속에서 가장 친한 단짝 친구잖아. 그런데 왜들 그러는 거야?”
멧돼지와 하얀토끼는 멋쩍어서 입을 다물었어요.
“지금 우리 숲속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 도대체 먹을 것이라고는 한 개도 남아 있지 않아. 사슴을 좀 봐, 며칠째 아무 것도 먹지 못했대.”
정말 사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어요.
“얘들아, 사슴에게 먹을 걸 나눠 줘.”
염소는 안타까웠어요.
“멧돼지는 항상 먹을 게 많은데……”
여우가 슬쩍 흘리듯 말하자 하얀토끼도 끼어들었어요.
“멧돼지야, 네가 제일 많이 먹잖아.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멧돼지는 울컥해서 쏴붙였어요.
“너야말로 친구들을 다 버렸잖아. 그랬으면서 이래라 저래라 끼어들지 마.”
“친구들을 버렸다니, 그게 무슨 소리니?”
하얀토끼가 두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어요. 멧돼지는 질세라 얼굴이 벌개져서 목소리를 높였어요.
“넌 혼자 살겠다고 깊은 산속에다 땅굴을 팠잖아. 누가 모를 줄 알아?”
순식간에 하얀토끼는 얼굴이 새빨개졌어요. 두 눈에 가득 눈물이 고였어요.
“멧돼지야, 내가 밉지?”
“나는 진짜 섭섭했어.”
하얀토끼는 푹 고개를 떨어뜨렸어요. 고라니 둘이서 하얀토끼를 힐긋거리며 귓속말을 주고받았어요.
“너희들 흉보지 마. 하얀토끼는 무서워서 그런 거야. 원래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도 놀란단 말이야.”
멧돼지는 섭섭한 마음도 잊고 하얀토끼의 눈물을 닦아주었어요.
“호랑이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갑자기 여우가 소리를 질렀어요. 마치 벌어진 모든 일이 호랑이 탓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그때서야, 염소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숲속으로 호랑이가 온다고 누가 처음 말했지?”
“사슴이야.”
하얀토끼가 사슴을 가리켰어요. 모두 고개를 돌려 사슴을 봤어요. 염소는 확인하려는 듯 다시 분명하게 물어봤어요.
“사슴아, 너는 호랑이를 진짜 봤어?”
“아니!”
사슴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어요.
“그럼 도대체 호랑이 얘기는 누구한테 들은 거니?”
“층층나무 아래를 지나가다가 얘기하는 소리를 들었거든.”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사슴은 기억을 더듬는 듯 했어요. 그러다 두 눈을 크게 끔벅이며 말했어요.
“어, 맞다! ‘호랑이가 나타나면 큰일이야’ 이렇게 말했어.”
“그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이잖아?”
순간 사슴의 얼굴에 ‘아차’ 하는 빛이 역력해졌어요. 하얀토끼가 멍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어요.
“‘나타나면 큰일이야’ 라고? 그렇다면 나타난 게 아니잖아!”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어요. 사슴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어요. 거기다 두 눈이 빙빙 도는 것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어요.
“사슴아, 먹어.”
어느 틈에 가져왔는지 맷돼지가 옥수수 한 개를 건넸어요.
“고, 고마워!”
허겁지겁 옥수수를 먹는 모습은 정말이지 너무나 딱했어요.
그 때였어요.
“얘들아?”
다람쥐가 나뭇가지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었어요. 처음부터 다람쥐는 상수리나무 꼭대기에 앉아서 숲속에 벌어지는 일들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게 아니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할 수 없었어요. 소문은 손쓸 사이도 없이 빠르게 퍼져나갔으니까요.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사슴은 까마귀랑 나랑 하는 소리를 잘못 들은 거야.”
다람쥐는 또박또박 분명하게 말을 이었어요.
“까마귀가 북쪽으로 난 산줄기를 넘어오다가 무시무시한 호랑이를 봤대. 그래서 내가 ‘우리 숲에 호랑이가 나타나면 큰일이야’ 분명히 이렇게 말했어. 그런데 사슴이…….”
다람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고라니 둘이서 사슴을 째려보았어요. 사슴을 탓하는 소리와 여기저기서 한숨이 마구 터져 나왔어요. 여우도 투덜거렸어요.
“아이, 이게 뭐야. 괜히 힘들게 먹을 것만 잔뜩 감춰 놨잖아.”
숲속은 부서질 것처럼 시끄러웠어요. 그 때 멧돼지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어요.
“부끄러운 짓을 한 건 다 똑같다고!”
순식간에 주위가 조용해졌어요. 그런데 하얀토끼가 한쪽 귀를 접으며 작게 종알거렸어요.
“다시는 굴을 파지 않을 거야. 나는 진짜 힘들었어.”
“뭐?”
그만 모두들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어요. 서로 어이가 없었죠. 염소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요.
“나도 미안해. 먹을 것 때문에 화가 나서 친구들을 미워했으니까, 앞으로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해. 호랑이가 진짜 나타난다 해도 말이야.”
“모든 게 다 내 책임이야. 진짜 미안해!”
사슴이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했어요.
“얘들아, 이럴게 아니라 우리가 한 짓 몽땅 비밀로 하자!”
다람쥐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어요. 멧돼지가 하얀토끼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어요.
“좋은 생각인걸!”
하얀토끼도 웃었죠.
“그래, 진짜 비밀이다!”
숲속 친구들은 서로서로를 보며 벌써 약속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어요.
“쉿……!”
“쉿……!”
입은 꼭 다물었지만 서로를 보는 눈빛들은 참으로 다정했어요. 산들산들 가을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이연수 프로필
동국대교육대학원 유아교육학전공 석사졸업. (사)한국문인협회 회원. (사)색동회 회원. 국립서울맹학교․국립서울농학교 동화구연강사(전). (사)한국문인협회 영등포지부 아동문학분과장. 저학년 장편동화집『 난 비겁하지 않아 』출간. 2015년 세종도서문학나눔 선정(세종도서상 수상). 제38회 한국아동문학작가상 수상(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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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