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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9 남양주 묘적사
●연혁 및 설화
신라 문무왕 때 원효가 무술도량으로 창건했다. 고려때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 세종 때는 학열스님이 180여 칸을 지었고, 남북 군영을 세워 무과시험을 보기도 하였다. 성종 17년(1486) 편찬된 “신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이 전한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훈련시킨 곳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이 절은 세종 직속의 비밀요원들이 군사훈련을 하던 곳이었단다. 국왕이 필요한 사람을 뽑아 승려로 출가하게 한 뒤 이곳에 머물게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뒤에는 승려들이 무과 시험을 준비하는 훈련장으로 쓰였다고 한다. 절 앞 동쪽 공터에서 화살촉이 자주 발굴되어 이곳이 당시 활터였음을 추정하게 한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는 경내에 민간인의 무덤이 들어설 정도로 폐사지로 남았다. 1895년(고종32)에 규오 스님이 산신각을 중건하고, 산왕신상을 모셨다. 1969년 화재로 전각이 불에 탔고, 1971년 자신 스님이 요사채를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묘적사계곡
무영루
종무소
대웅전
관음전
▶마하선실
다듬지 않고 나무 원래 모습을 그대로 살려 만든 기둥은 자연친화적이다.
▶보리수로 알려진 묘적사 찰피나무(각연사 보리자나무와 사촌)
수령 325년으로 추정되는 묘적사 찰피나무는 대웅전 서쪽 산령각으로 오르는 길 입구에 서 있다. 흔히 우리나라 사찰에서 ‘보리수’라고 알려진 나무들은 거의 피나무 종류다.
옛날 어떤 사람이 이 나무 열매로 염주를 만들어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그는 가슴속에 한 가지 소원을 품고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기도했다. 그러자 부처님의 도움이 있었던지 얼마 후 그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그때부터 많은 신도들이 이 나무 열매로 염주를 만들어 소원성취를 빌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나무 아래에는 수행을 위한 좌대가 놓여 있다.
원래 ‘보리수’라는 이름은 불교에서 생겨난 말이다. 이 나무 밑에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여 ‘깨달음의 나무’라는 뜻의 ‘보디 브리쿠샤(Bodhi-vtksa)’라고 불렀는데, 이 말을 음이 비슷한 한자어로 옮기면서 ‘보리수(菩提樹)’가 된 것이다. 불교에서는 ‘깨달음’만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의 나무’도 따로 정해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을 지니고 있듯이, 어떤 나무라도 그늘을 드리워 ‘깨달음의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기에 보리수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묘적사에서 찰피나무를 보게 된다면 자신의 가슴속에도 보리수 한 그루를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산령각 굴법당
팔각칠층석탑이 있던 자리
대웅전 앞에 있던 팔각칠층석탑이 어디로 갔는가? 온 절을 다 둘러보아도 없다. 종무소 보살님께 물으니 해체복원 작업중이라고 한다. 묘적사 연혁이 기록된 게시판 뒤 검은 가림막을 씌워놓은 가건물 안에 해체한 석탑이 있었다. 조그만 창으로 들여다 보니 빛이 창에 반사되어 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
▶팔각칠층석탑
월정사팔각구층석탑과 수종사 오층석탑과 양식이 비슷하기 때문에 조선 초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3층과 4층 사이의 체감률이 부자연스럽고 절에서 동쪽에 탑재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본래 11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2015년도 사진(인터넷에서 퍼옴)
템플스테이관 앞 연못에서 보는 고즈넉한 풍경
묘적사중창비
차체험관
[김수온의 문집 ‘식우집’ 묘적사중창기]
※김수온(1410태종10∼1481성종12) 조선 전기의 문신.
과거에 2번이나 장원을 하였다. 그는 집현전 학사이기도 했다. 그의 형 김수성은 신미대사이다. 그래서 그런지 김수온은 불경에도 상당히 박식했다
신빈김씨 밀성군이 죽은 모친을 위해 남양주 묘적사를 중창하다
세종 후궁 신빈 청주김씨는 경오년 즉 1450년 세종32년 2월 17일에 세종이 승하하고 국장이 마무리가 되자 6월에 머리를 자르고 비구니가 되어 수강궁에 들어갔고 14년간 거처하던 방에서 59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1464년 세조 10년 9월 4일이었다.
세종 승하 후 법도대로 후궁들이 모두 수강궁에 들어 갔으나 단종의 유모였던 세종후궁 혜빈 양씨는 수강궁에 들어가지 않고 문종과 단종의 예우를 받으며 아들들을 만나 보면서 지내고 있었으므로 모두 형편이 넉넉했던 신빈의 아들들은 모친을 모시지 못함이 늘 마음에 걸려 문종에게 모친을 모시고 살게 해달라고 간청 하였고 허락되었으나 신빈이 거절하였고
단종이 보위에 오른 해 아들들이 계유정난공신으로 득세하였고 다시 단종에게 간청하니 허락되었으나 다시 신빈이 거절 하였고 세조가 보위에 오를 때 좌익공신으로 신빈의 아들들이 크게 득세 하였고 세조가 특별히 저택을 지어 하사하였으나 다시 거절하고 신빈은 오로지 죽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며 지냈다.
신빈은 모두 6남 2녀를 낳았는데 가장 맏이로 낳은 옹주와 다른 옹주는 아기 때 잃었고 막내 담양군은 12세 때 봄에 부왕 세종이 승하하자 슬퍼함이 지나쳐 병을 얻어 부왕승하후 이십여일 지난 뒤 세상을 떠났고 차남 의창군은 33세, 4남 익현군은 33세, 장남 계양군은 38세 때 추석날 신빈 보다 20일 앞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신빈이 죽었을 때 3남 밀성군과 4남 영해군 만 생존해 있었는데 영해군은 중풍으로 몸이 건강치 못하였으므로 밀성군이 일을 도맡아 처리 하였다.
생전에 신빈을 우대하였던 세조는 장례를 후하게 치르도록 지시하고 남양부의 좋은 묘터를 하사하여 신빈 묘역은 현지에서 아기능이라 불릴 만큼 크고 아름다웠다.
세종과 세조에게 총애 받았던 젊은 스님 신미대사가 있었고 그 동생이 문장으로 이름 날리던 괴애 김수온인데 역시 불심이 깊어 각종 불교간행물을 도맡아 세종과 세조의 사랑을 받았으며 밀성군과도 친교가 있었으므로 그에게 밀성군이 모친의 묘지명을 요청하여 이듬 해 비석을 세웠다.
세종왕자중 행실이 독실하여 칭송 받던 밀성군은 이렇듯 효도를 다 하고도 늘 모친에게 효도하지 못함을 후회하였다.
그러다 밀성군은 세조에게 남양주 묘적사를 중창하여 거기에 세종과 소헌왕후와 신빈의 위패를 모시고 극락왕생을 빌어주고 싶다고 간청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묘적사는 예전에 신빈이 세종 사후 세종과 소헌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돈과 곡식을 하사하여 건물 몇채를 지어준바 있었다.
그 이전에 절은 사냥으로 인해 난 불에 타 방치 되어 있었는데 평소 불심이 깊었던 신빈이 도움을 주었던 것이고 물려 받은 재산을 착실하게 불려 거부가 된 밀성군은 그 절에 시주를 후하게 하였고 그 때마다 항상 모친을 모시지 못함을 후회하므로 주지승이 권하여 묘적사를 다시 크게 짓게 된 것이다.
세조 조에서 도총관의 벼슬을 지내며 대궐의 불사를 도맡았던 밀성군이 자신의 재물을 크게 내주고 불심 깊은 성안의 부자들에게 요청하여 거금을 모아 절을 크게 짓기 시작하였는데 세조가 승하하여 잠시 중단되다 예종조에서 다시 시작하다 예종 승하로 잠시 중단하다 성종 3년 여름에 묘적사가 완성 되었다.
[세종의 친위부대는 존재했을까]
국왕들은 경호문제를 본능적으로 걱정했다. 특히 힘의 사회였던 조선 초기의 군주는 안전 문제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조선은 개국 후 왕자들의 권력투쟁이 이어졌다. 태종 때에 적자 상속 분위기가 고조되었지만 여전히 구두선에 불과했다. 세종도 셋째 아들이었다. 반역의 깃발은 절대 권력자 주변에서 치솟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조선 후기의 정조는 심복 홍국영의 사촌동생의 역모, 외척의 침전 침입, 자객 침투 사건 등이 이어지자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했다. 임금을 경호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개혁정치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힘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세종의 상황도 정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버지 태종이 외척과 양녕대군의 세력을 무력화시켰지만 안심만 할 처지는 아니었다. 또 사병 혁파 등으로 신권이 약화됐지만 결코 만만히 볼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임금은 정부조직과는 별도의 친위부대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의 묘적사에 내려오는 구전은 음미해 볼만 하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로 세종대왕 때 웅장한 불사를 이룩하였다. 국왕 직속의 비밀기구가 있던 곳이다. 왕실 산하 비밀요원을 훈련시키기 위해 사찰을 짓고 선발된 인원을 승려로 출가시켰다. 승려 교육과 아울러 고도의 군사 훈련을 받게 했다.”
이 절의 안내판에는 위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짐이 기록돼 있다.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와 그 아들인 밀성군에 의해 중창된 묘적사는 임진왜란 때는 유정이 승군을 훈련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이후 승려들이 무과시험을 준비하는 훈련장으로 활용했다. 절 주위에서는 화살촉이 발굴되어 이곳이 당시 군사 훈련장이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이 절은 세종과 깊은 관계가 있다. 사냥을 통한 군사 훈련인 강무를 할 때 이곳은 길목이 된다. 도성을 떠난 왕은 첫 사냥을 양주 일대에서 시작해 강원도 횡성, 황해도 구월산 등으로 이동한다.
도성에서 대화재가 발생했던 8년(1426년) 2월 15일에도 임금은 묘적사 북쪽 산에서 사냥을 한 뒤 횡성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왕실소속 비밀요원들의 군사 훈련은 세종과 세조 두 임금과 관련 가능성이 높다. 두 왕은 불교에 우호적이었다. 궁궐에서 반나절 거리인 이곳에 특수요원을 양성할 개연성은 상당하다. 실제로 강무에 특히 신경을 쓴 세종은 묘적사를 수십 차례 거쳐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과 세조의 신임을 받은 문장가 김수온이 쓴 묘적사 중창기는 이곳이 왕실과 특수한 관계임을 암시하고 있다.(김수온의 문집 식우집 묘적사중창기)
정통 무진년 봄(1448년 세종 30년), 병조좌랑인 나는 강무에 참여했다. 임금을 모시고 묘적사의 북쪽 산꼭대기에서 사냥을 했다. … 신빈 김씨(세종의 후궁)가 세종대왕을 위하여 절을 넓게 증축하였다. 신빈 김씨는 돈과 곡식을 기부해 법당과 승당을 확장하고 공사가 마무리되어갈 무렵에 세상을 떠났다. 신빈 김씨의 아들인 밀성군은 어머니를 모시지 못한 안타까움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밀성군은 절의 양식을 대주는 화주가 되었다. … 묘적산을 무술 훈련장으로 씀으로써 부득이 도끼로 베어내고 개간하여 점점 절을 넓혀갔음이라. 다행히 세조 조에서 옛터의 복구가 허가되어 도량이 큰 밀성군이 중창의 책임을 맡았다. 밀성군은 크고 넓은 집을 세우느라 수없이 근심했고, 사업은 지체되었다. … 화주(세조)가 역사를 다 끝내지 못하고 가버렸으므로 기다렸다 나중에 완성하였다. 담을 두루 둘러침은 호랑이나 표범을 막으려는 생각이다.
김수온은 병조좌랑으로 묘적산에서 강무를 한 세종을 모셨다. 그는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의 비문을 썼다. 김수온은 세종, 신빈 김씨, 밀성군 그리고 세조의 가족에 대해 깊이 알고 있는 측근이다. 중창기를 쓴 그는 묘적사가 세종과 신빈 김씨, 밀성군, 세조가 관여한 왕실사찰임을 알고 있었다.
군사 훈련용 사냥터인 강무장에 속한 묘적사는 불이 나 방치돼 있었다. 불심이 깊은 신빈 김씨는 대왕의 흔적이 있는 절의 보수를 위해 돈과 곡식을 내려 건물을 짓게 했다. 신빈 김씨는 세종 붕어 후 머리를 깎고 자수궁에 들어갔다. 비구니가 된 그녀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위패를 이곳에 모시고 극락왕생을 빌었다. 아들 밀성군은 어머니를 모시지 못해 안타까워했다. 신빈 김씨는 문종과 단종의 환속령에도 속세로 나오지 않았다. 세조가 큰 집을 지어주고 아들과 살라고 했으나 그녀는 역시 거절했다.
밀성군은 어머니 사후에 세조에게 묘적사를 크게 중창해 세종과 소헌왕후, 신빈 김씨의 위패를 모시고 싶다고 청했다. 세조 때에 대궐의 불사를 도맡았던 밀성군은 거액을 희사하여 묘적사를 중창하기 시작했다. 공사는 세조의 승하, 예종의 붕어로 중단되었다가 성종 3년(1472년) 여름에 완공되었다.
세종과 후궁인 신빈 김씨, 왕자인 밀성군이 자주 간 묘적사는 무술훈련장이기도 했다. 또 세조는 이곳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최근 김수온이 쓴 중창기를 발굴하고 해석한 이강석 선생은 다 끝내지 못하고 가버린 화주를 세조로 보았다. 세조가 붕어해 공사가 중단됐다는 것이다. 밀성군 뒤에 있는 실질적인 후원자는 세조라는 의미다. 왕실의 관여와 군사시설, 그리고 도성에서 반나절 거리인 묘적사! 역사에 묻힌 세종의 비밀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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