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1~l895. 본관은 부령(扶寧). 자는 내홍(乃弘), 호는 우채(優齋). 전북 부안군 상서면 내동 출생으로 부안에서 농민군대장으로 활동하다 1895년 2월 1일 붙잡혀 65세의 나이에 총살됨.
▶ 증언인물 : 김영태(金永太) 김형호(金炯皓) 1926~ . 김기병의 증손으로 족보명은 형택(炯澤). 고려대 문과대 졸. 주한미대사관 행정보좌관 및 특별조사관, 주한벨기에대사관 상무관을 역임했고, 현재 벨기에 안트워프항만청 한국대표부 상임고문과 서보실업 회장,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이사를 맡고 있음. 1931~ . 김기병의 증손. 고려대 정경대 및 동대학원 졸. 박영사 편집상무를 거쳐 현재 세영사 공동대표와 동학농민혁명유족회 감사를 맡고 있음. ▶ 가계도
▶ 정리자 : 김양식 ▶ 출전 : 다시피는 녹두꽃
내용
김기병은 동학농민전쟁 진원지의 하나인 부안에서 활동한 농민군으로, 현재 그의 증손인 김영태와 김형호가 살아있어, 그의 행적과 후손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두 증손이 공술(供述)한 증언록에 의하면, 김기병의 출생과 인품은 다음과 같다.
그는 1831년(순조 31년 신묘) 정월 21일에 전북 부안군 상서면 내동에서 출생하였고, 중년에 내동에서 남쪽 1㎞떨어진 장밭들(장전리)로 이주하면서 장전 거주 부령 김씨의 근원을 이루었다. 장남 한봉(漢鋒)과 차남 한장(漢章)이 장성하면서 가업을 보필함에 따라, 가세는 점차 번창하여 유복하고 평화스런 가정을 이루어나갔다.
김기병의 인품은 용모가 준수하고 기골이 장대하고 의지는 강직하며 효성이 지극하고 불의에는 참지 못하며 64세라는 노인으로 거사에 가담할 만큼 우국충정이 비범하여 문중에서는 물론 항간에서도 그 명망이 높았다고 한다.
여러 기록과 들리는 말을 종합해보니, 한말 개화 무렵 사직의 기강이 문란하여 탐관오리가 발호하고 민생(民生)이 도탄에 빠지고 봉건전제의 부패상이 극에 이르러, 조부님은 비분강개하던 차에 1894년 2월에 민초의 선구자 전봉준이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의연히 동참하기로 결심했다고 봅니다. 기포(起包) 두목이 되자, 의기화합한 농민들을 취합하며 부안 변산 해창(지금의 변산면 해창리)에 있는 군기고에서 무기를 접수하여 혁명군으로 무장하고 상서면 우덕동 앞에서 지난 가을에 거두어 묶어놓았던 콩단을 큰 것은 은폐물로 삼고 작은 것은 목표물로 삼아 화승총의 사용법을 익혀 사격연습을 시키니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그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그때 이미 백발이 휘날리는 노인이었으나, 노익장의 기세로 여러 민병을 거느리고 부안 기포 두목으로서 부안 관아를 접수했답니다.
이렇게 부안에서 기포한 김기병은 그 뒤 4월 초사흘 날 전봉준과 손화중 휘하의 농민군과 합류, 부안현의 무혈함락에 크게 공헌하고 농민군의 백산 총집결 및 출진에도 합세하였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부안향토문화사』 등에 수록되어 있다. 그 후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 주력군은 승승장구하여 호남을 석권하고 북상하던 중 일본군의 개입으로 동년 11월 공주 우금치 대접전에서 처절하게 패퇴한 후 해산의 비운에 빠진다. 이 기간 중 김기병의 행적은 유감스럽게도 완전한 장막에 쌓인 듯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금구 원평에서 전투를 벌인 뒤 농민군이 해산할 적에 김기병의 활동은 이렇게 전해진다.
집안 어른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증조부님은 부안에 잠입해서 지하운동으로 동지를 규합하며 무기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굴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하였답니다. 그러다가 부안 하서 장신포 거주 유모의 밀고로 인하여, 왜군의 불의의 습격을 받았대요. 그 결과 1895년 2월 1일 부안읍 동문[현 동중리] 밖의 형장에서 부하 여덟 명과 함께 왜군에 의해서 비통하게 총살되었답니다.
이 비보를 접한 증조부님의 장·차남이 시신을 모셔오는데, 주로 관아의 아전배들이 “저기 역적놈의 자식들이 간다” 지적하면서 손가락질하고 소리쳤답니다. 얼마나 떨리고 비통했겠습니까. 그때의 비통함과 수모를 견딜 수 없어 두 아들은 한없이 피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증언하는 증손자들도 처연한 얼굴을 한다.
이상을 종합해볼 때 김기병은 2월에 부안에서 봉기해 4월 3일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부대와 합류하였다. 이같은 증언은 고부 봉기의 패색이 짙어지는 2월 20일경에 전봉준이 각지에 통문을 돌려 일제히 봉기할 것을 촉구하고 이에 따라 각지에서 호응한 것이라든가, 4월 1일 부안 하서면에 모인 500여 명의 농민군이 부안성을 공격하고 그 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 부대가 속속 부안에 도착해 4월 4일 부안성을 완전 점령한 사실로 보아, 당시의 객관적인 상황과 부합되고 있다.
그 뒤 김기병은 최후 단계에서 이웃 주민의 밀고로 체포되어 부하 8명과 함께 총살되었다. 일본군에게 체포 처형되었다는 증언은 당시 일본군이 부안지역에서 철수한 상태였으므로 잘못인 것 같으며, 오히려 관군이나 민보군에 의해 처단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렇게 처형된 그의 아들들은 역적의 누명을 쓰고 힘겨운 삶을 영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증언한다.
두 아들은 이때부터 역적의 누명을 피하면서 살 길을 찾아야 했답니다. 그러다보니 가세는 점점 기울기만 했고 후손들에게는 참담한 시대가 다가오게 되었지요. 백주에 얼굴을 들고 떳떳하게 처신할 수도 없고 행세할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비운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고, 행적이 기록으로 남을 수 없도록 철저하게 은폐하였답니다. 살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아버님이 이렇게 알려주십디다. 차남 한장은 할 수 없이 가솔들과 남부여대하고 향리를 떠나 유랑길을 헤매다가 충남 공주군 사곡면에 정착하여 약 십년간 은거하는 동안에 큰 자부를 병으로 잃었대요. 타향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한장은 그 후 다시 가족들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지요. 그러는 동안 가세는 말이 아니었답니다.
김기병의 두 자제는 고초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그의 손자되는 김병술은 새로운 변신을 하였다. 서울로 올라가 감리교회에서 심부름을 하기도 하다가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고 이어 대한제국 정부에서 판임관(判任官) 등을 지냈다. 판임관이라면 중견의 벼슬아치가 아닌가? 이런 출세라면 출세를 하였으니 세상 눈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 후부터 동네나 집안에서 함부로 ‘역적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이 없어졌대요. 자기네들보다 출세를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렇지만 후손들의 고난은 일본에 의해서 또 다시 일어났다. 이는 역적의 굴레를 일단 벗겨준 김병술이 일제 강점기에 겪은 일련의 삶이 잘 말해주고 있다. 이는 곧 우리 민족의 수난사이기도 했다.
이때 국운은 다하며 경술국치를 맞이하게 되었지요. 병술은 부안으로 낙향하여 주산면 입석리에 사숙을 열고 인재 양성에 진력했습니다. 이 길이 국권 회복의 지름길로 믿었기 때문이지요. 이때 젊은 인촌 김성수의 예방을 받고 그에게 영국 유학을 권유하기도 했답니다.
일제는 이것도 좌시하지 않았지요. 총독부 산하 고위직을 제의해 왔습니다. 그러나 병술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고향을 떠나 황해도 재령으로 옮겨 살았습니다. 동지를 규합해서 더 큰 규모의 신창중학교를 설립해서 육영사업에 힘썼습니다.
이때 상해망명임시정부로부터 밀령이 왔습니다. 합류해서 독립외교에 헌신하자고요. 즉시 쾌락하고 인천에서 상해까지의 밀항선 계약을 끝내고 출항일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늘도 야속했는지 서울 유학시절에 앓았던 폐렴이 재발하여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밀항선은 타보지도 못하고, 조국 독립의 비원을 안은 채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병술의 그때 나이 38세로 1918년 12월 22일이었다. 그런데 이 증언에는 어긋나는 점이 있다.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3·1운동 이후에 태동했으니 상해임시정부의 밀령은 맞지 않는다. 다만 그때 상해에는 박은식, 신규식 등 망명인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한장 할아버지의 비탄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답니다. 뿐만 아니라 이후 일제의 박해는 날로 심해갔지요. 한장 소유의 전답 수천 평[곧 감교리 회시동과 봉은동 일대에 있던 토지]이 일본인 경영의 하전[賀田]농장에 강제 몰수되었습니다. 정읍 재판소와 광주 고등법원에까지 항소했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이렇게 비운과 고통이 집안을 연타했습니다.
이처럼 어렵게 일으켜 세운 집안은 일제에 의해 짓밟혔으니, 그것은 농민전쟁의 실패로부터 잉태된 불행의 역사이기도 했다. 이로써 역적의 자손이라는 누명과 그로 인한 역사적 상흔은 그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농민군으로 활동하다 의로운 생을 마친 고인의 충절과 유덕을 추모하고 명예회복을 바라는 후손들의 바람은 1993년 3월 그의 묘비를 세우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그의 묘비는 부안군 상서면 개암동 월정 입구의 대마등에 세워져 있다. 이들 후손은 지금 번창하여 각기 사회활동에 열중하고 있다.
아래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jcjkks/70182874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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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학혁명120주년 원문보기 글쓴이: 동학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