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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4년 9월 15일(제37주) 오전 11:00
장소 : 인천은혜교회당
본문 : 야고보서 4:4-10
제목 : 하나님과 원수 되지 않게 하라
이번 주일은 추석명절연휴와 연결이 됩니다. 성경은 명절에 대해서 뭐라고 교훈하고 있을까요? 구약성경 레위기 23장에서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켜야 할 절기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절기의 규례를 말씀하실 때 ‘이스라엘의 절기’ 혹은 ‘유대인들의 절기’로 말씀하시지 않고 “나의 절기들”(2절) 혹은 “여호와의 절기(안식일)”(3절)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인 이스라엘이 지키고 즐거워해야 할 절기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택하여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 직접 설정하신 절기라는 사실입니다. 레위기 23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절기들은 크게 5가지로, 안식일, 유월절, 무교절, 오순절, 나팔절, 초막절입니다. 이들 중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지 않으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같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기념하여 만드신 절기들입니다. 그래서 절기들, 즉 명절들은 하나같이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복을 감사하며 즐기는 명절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행하신 놀라운 역사들을 기념하며 감사하는 축제일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신약성경으로 넘어와서 강조하며 지키고 있는 절기들은 안식 후 첫날,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이었습니다. 물론 초대교회에서 지킨 절기들 중에는 구약의 유월절이었음을 고린도전서 5:7-8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신 것에 대한 기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월절을 지켜야만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경학자 핸드릭슨은 그의 주석에서 ‘성도들의 전 생애가 거룩한 명절처럼, 즉 하나님께 드려진 것처럼 되게 하라’는 의미로 해석하였습니다(핸드릭슨의 고린도 서 주석, 아가페 출판사, 139쪽). 아마도 이것은 유월절 양의 죽임 당함과 관계있었듯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의미하는 성찬식과 연관되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록 유월절이 성찬식은 아니라할지라도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전 5:8)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받은 성도로서 하나님의 율법과 속성에 순응하는 올곧은 실천적 삶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절기를 지키는 방식이었다고 한다면,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믿는 성도로서 우리도 오직 주님을 위해서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순종하는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의 고유 명절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고유명절에는 설과 추석만이 아니라 단오를 비롯한 동지섣달 대보름과 같은 날들을 전통적으로 지키며 즐겼습니다. 그 중에 국가 공휴일로 지정된 설과 추석은 특별한 절기입니다. 이 명절을 맞이할 때마다 성도로서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성묘에 가서 죽은 자 앞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절을 하는 것 등으로 고민하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섬기기 위해 오셔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삶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면 명절은 더없는 좋은 선교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침은 어디까지나 성도로서 상식적으로 행동해야 할 지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인 견해를 강요하거나 논쟁을 벌이는 것은 결코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고유한 명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성경의 교훈과 배치되지 않는 방식을 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고유한 전통의식이라고 해서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성도로서 온당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고안해 낸 것들을 더 앞세우는 것은 죄가 됩니다.
참 성도라면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굳게 신뢰하는 것만이 험한 세상에서 뒤집혀지거나 넘어지는 일이 없이 주님과 함께 동행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하늘의 법을 가지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영적 권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이번 추석 연휴에서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며 가족 간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는 일, 이웃 간의 정을 나누는 일,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일, 윗사람들을 공경하는 일, 은인들에게 감사하는 일, 무엇보다 영생의 복음을 나눌 기회를 삼는 것으로 추석명절을 보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0:31에서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주일과 이번 추석명절이 하나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나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플랭클린 홀이라는 사람이 쓴 ‘원자력적인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사람이 살아가는데 절대로 필요한 ‘네 가지 조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공기와 음식과 수면과 물’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어찌 공기 없이, 물 없이, 먹지 않고, 자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한 가지가 더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은 이미 이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좋으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되 넘치도록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은혜 받지 못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마치 태평양 바다에 사는 물고기가 물이 없어서 죽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은혜 받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분명 자신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깨닫지 못해서 문제가 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해야 받게 되는지 몰라서 그런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않고 베푸시는 놀라운 은혜를 누리는 성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은 봉독한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과 원수 되지 않게 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야고보 사도는 본문에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않는 방법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않으려면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죄 문제를 해결하라
여러분은 인간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그것이 경제일까요? 정치와 이념일까요? 아니면 인간관계 문제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일부분일 뿐입니다. 인간을 힘들게 하고 행복을 빼앗아가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심각한 문제는 바로 죄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이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절대로 하나님과 나갈 수가 없습니다.
본문 4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여기에 보면 얼굴 뜨겁게 만드는 ‘간음한 여인들아’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간음한 여인들’이 누구일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호세아 2:19-20절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이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내가 네게 장가들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신부가 됩니다. 즉 이 말씀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영적 관계가 부부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부부는 서로에 대한 지켜야 할 정절이 있습니다. 남편은 다른 여자를 사랑하면 안 됩니다. 아내도 다른 남자를 사랑하면 안 됩니다.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누구라도 이 정절을 깨뜨리면 부부관계가 깨어집니다.
그래서 본문 4절에서 말하는 ‘간음한 여인들’이란 하나님을 섬기던 성도들이 우상을 섬기고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성도들에 대한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남편이 되시는 일을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을 아내로 삼으셨다고 표현합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남편이시고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아내라고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시면, 우리와 결혼하시겠다고, 우리를 아내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가슴이 벅차고 터져버릴 일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의 가슴이 터져버리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이상하고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배신하며 이 어마어마한 영광의 사랑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세상을 더 사상하는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본문 4절에서는 ‘간음한 여인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다시 볼까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영적인 측면에서 ‘간음한 여인들’이 아닌가요? 성도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 간음한 여인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 간음한 여인입니다. 하나님보다 권력을 더 사랑하면 간음한 여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도 좋고 세상도 좋을 수 없는 것은 이처럼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풍조대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세상의 것에 취해 살아가지 않으시나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지 않으시나요?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세상과 벗이 되고 세상 흐름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면 나와 원수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너는 간음한 여인이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와 결혼하겠다고 말씀하시고, 우리를 아내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세상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내라는 이 영광스럽고 고귀한 자리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이 헛된 세상과 벗이 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우리를 아내로 삼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남편 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이 사랑을 깨닫고 느끼고 안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 것에 취해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살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호세아 4:6은 이 사실에 대하여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 호세아 6:3은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영적으로 간음하는 것, 세상과 벗이 되는 것,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 무지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게으름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무지와 어둠에서 벗어나 진리는 아는 빛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아내가 되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생명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그러시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과 원수 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4절 말씀을 보면 “세상과 벗된 것” 입니다. 로마서 8:7에서는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빌립보서 3:18에서는 세상 영광과 욕망대로 살고 땅의 일만 생각하는 것을 원수라고 했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러기에 죄란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을 가깝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 속에 빠지는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세상과 벗이 되면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가 세상의 쾌락, 육체적 정욕을 추구하면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주신 은혜마저도 빼앗으십니다.
그래서 본문 8-9절에서 “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죄를 깨달았으면 깨끗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두마음을 품었다면 이제라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애통하며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온전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망하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의 과거를 보고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았다면 절대로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동생을 돌로 쳐 죽인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죄는 성도들에게 스며들어오려고 합니다. 즉 사람의 속에는 죄의 소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것을 다스리고 살아야 합니다. 죄의 소원이 무엇일까요? 죄의 소원, 즉 우리 속에서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있는데 죄의 소원은 내 욕망입니다. 그 죄의 소원을 우리를 멸망시키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그 죄의 소원을 다스려야 합니다.
어느 집에 쥐가 너무 많아 먹을 것만 놓아두면 순식간에 없어지곤 하였습니다. 주인은 화가 잔뜩 나서 쥐새끼들을 다 잡아 칠 기회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창고에 들어갔더니 목이 작은 쌀 항아리에 쥐가 들어가서 항아리 속에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화가 나 있던 중이라 그 항아리 뚜껑을 얼른 덮었습니다. 그리고 마당으로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는 쥐를 죽일 목적으로 항아리를 높이 들어있는 힘을 다하여 땅바닥에 던졌습니다. 항아리가 박살났습니다. 그런데 쥐는 상처하나 생기기 않고 사뿐히 나와서 주인을 놀리면서 도망쳐 버렸습니다. 항라리만 깨지고 남아 있던 쌀은 마당에 흩어져 버렸습니다.
성도를 못 살게 구는 죄는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죄를 없애려고 애를 써보지만 죄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옛날이야기 입니다. 어느 가정에 남편이 놀음에 빠졌습니다. 바람피우는 남편하고는 살아도 놀음하는 남편하고는 못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놀음 습관이 사라지도록 금식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남편도 놀음을 안 하려고 결심하여도 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장한 결단을 하고 왼 손가락 5개를 다 잘라 버렸습니다. 다시는 놀음을 하지 않겠다는 다부진 결단이었습니다. 이제는 놀음과 완전히 이별한 줄로 알았습니다. 본인도 그렇게 알았고 아내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없어졌습니다. 아내는 밤이 늦어도 돌아오지 않자 여기 저기 찾아보았습니다. 혹시나 하여 놀음하던 자리로 가보았습니다. 남편이 그 자리에 둘러 앉아 놀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왼 손에 붕대를 감은 채 화투를 끼고 “장땡이다” 하고 있었습니다.
항아리는 깨지고 쥐새끼는 살아 비웃는 것처럼, 손가락을 잘라도 죄는 살아 비웃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죄의 소원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죄의 소원, 죄짓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그것에 끌려 다니지 말고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어떻게요? 우리의 의지나 결단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속에서 충만하여 내 전인격을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죄를 깨닫게 하고 죄를 이기게 하는 힘을 주십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방법은 세상과 벗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영적인 아내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이런 결단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라
성부 성자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히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것을 사랑하고 하면 시기하면서 까지 우리를 사모합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 ‘시기한다’는 말의 원문의 뜻은 ‘뜨겁다’는 뜻의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 붓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성령을 품고 하나님을 사모하되 불붙는 마음을 갖고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남녀가 연애를 하게 되어 사랑의 불이 붙으면 뵈는 것이 없게 됩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게 되고 판단능력도 사라집니다. 그러기에 결혼을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그래서 결혼하지 않으셨나요? 안 그런 척 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받을 자가 받게 됩니다. 하나님과 그 은혜 귀한 줄 모르면 돼지나 개에게 진주를 던져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면 주시지 않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은혜가 주어져도 그 은혜의 가치를 모르기에 짓밟아버리고 말게 됩니다.
시편 107:9에 보면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고 했습니다. 역대하 16:9은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 찾든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기를 축원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 은혜가 임합니다. 기적을 사모하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열 두해를 혈루 증으로 고통당하던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소문을 듣는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는 불이 붙었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만나면 내 병도 고침 받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12년 동안 수많은 의원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별짓 다해보았습니다. 결과는 혈루증이 더 악화되었고 재산은 다 날아갔습니다. 이정도 되면 이제 자포자기 상태일 텐데 그녀에게 빛이 임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었습니다. 남들은 무심코 흘려버리는 소문이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복음으로 들렸습니다. 죽더라도 예수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사모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찾아 왔습니다. 와 보니까 예수님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부끄러워 공개적으로 치료를 요청하지도 못하나 주님이 지나가실 뒤쪽을 비집고 들어가서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댔습니다. 예수님 옷에 손만 대도 낳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대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혈루근원이 그 순간 깨끗이 치유되어버렸습니다.
무엇이 혈루증 여인을 치료하였을까요? 당연히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혈루증 여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치료의 비법은 예수님을 사모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혈루증 여인에게 뭐라고 하셨을까요?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 9:22). 믿음이 은혜를 주었습니다.
성도의 믿음생활에서 가장 큰 위험과 유혹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다 안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성도가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다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놀라운 경험으로 받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익숙해서 진부한 단어가 되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현재의 삶이 은혜의 삶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필립 얀시는 ‘은혜라는 단어는 오염되지 않은 마지막 단어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오염되었습니까? 드라마나 대중가요에서 부르는 사랑은 너무나 많이 오염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은혜는 아직 오염되지 않은 단어입니다.
C. S. 루이스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오직 은혜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수록 성도는 더욱 진리를 행하게 됩니다. 진리를 깨달을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더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아내가 됩니다. 이런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의 기쁨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은혜 없이 살아가는 삶은 생수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된, 터진 웅덩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하나님의 부으시는 사랑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넉넉함을 흠모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넉넉함이 있기에 감사함으로 하늘 창을 열고 값없이 부으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기대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고 결코 잊지 않고 은혜에 보답하는 성도가 되기를 은혜의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사모하면 주님의 복을 누립니다. 그러나 반대로 은혜를 저버리고 무시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됨을 잊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3. 순복하라
하나님과 원수 되는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교만입니다. 6-7절을 보세요.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6절 하반 절의 ‘물리치시고’ 라는 말은 적을 대적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교만한 자를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으시고 적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만할 때는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경고의 사인을 주십니다. 깨닫고 회개하라고 주시는 사인입니다. 그 경고 사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사고나, 질병 또는 재난과 사건을 통해서도 주십니다. 자식을 통해서도, 남편과 아내를 통해서도 주십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서도 주십니다.
제가 오늘 이 설교를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경고를 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돌이키면 은혜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왜요?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교만 죄를 지어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러기에 마귀는 우리 속에도 계속해서 교만의 병을 심어놓습니다. 그래야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교만을 물리치고 겸손하여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교만한 자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가 자기에게 속고 있는 것이고 그러기에 자기 실체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의 거울을 통해 자기 얼굴의 티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교만한 모습을 모르고 겸손한 줄 알고 착각하다가 버림받게 되는 것입니다.
똑똑한 사람이 똑똑한 사람 싫어합니다. 외식하는 사람이 외식하는 사람 싫어합니다. 교만한 사림일수록 교만한자를 아주 미워합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교만의 이유는 자기가 최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교만하면 탐심이 가득하여 자기 이익에 눈이 어두워집니다. 가난한자가 보이지 않고 긍휼이 사라지게 됩니다. 자신의 성공이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착각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물과 하나님의 은혜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듯 하나님의 은혜도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임합니다. “내가 무엇입니까?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면서 나를 낮추고 나를 버리는 사람은 하나님이 가까이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겸손할 때 왕권을 주셨지만 교만하자 왕권을 빼앗으셨습니다. 다윗에게는 교만한 아들이 있었고, 겸손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압살롬은 교만했고 솔로몬은 겸손했습니다. 압살롬은 교만하여 자기 아버지 왕좌를 빼앗으려고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왕이 될 때에 ‘나는 부족하고, 어린아이와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압살롬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솔로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해 보세요. 우리가 겸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영권을 주시지만 우리가 교만하면 주신 영권도 빼앗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하셨습니다. 늘 겸손히 자기를 꺾고 순복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10절을 보세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겸손과 순종의 사람이 되려면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7절 하반 절에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고 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마귀만 쫓아내도 우리의 삶은 천국으로 변합니다. 우리를 교묘하게 미혹하는 원수 마귀를 대적할 때 우리는 큰 은혜를 받습니다.
어떻게 대적해야 할까요? 에베소서 6:10-11에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방패, 의의 흉배, 진리의 허리띠, 그리고 진리의 말씀 곧 성령의 검을 갖고 살면 마귀는 물러가고 하나님의 큰 은혜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원수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8절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 중에 실상은 하나님과 거리가 먼 사람이 있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을 보세요. 엘리가 하나님에게 무관심할 때 그 가정과 나라에 어려움이 왔습니다. 아무리 성전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영적 감각이 무뎌지면 그게 하나님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경고 사인을 보냅니다. 두 아들이 범죄를 합니다. 그래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결국 두 아들은 전쟁터에서 죽습니다. 그리고 비보를 들은 엘리는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그의 며느리는 해산하다가 그 소식을 들고 ‘이가봇’이라고 외치며 죽어갑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는 뜻입니다. 다른 것이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 멀리하는 것이 불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한 사무엘을 보세요. 그는 엘리 제사장 밑에서 성장했으면서도 늘 하나님과 가까이 살았던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최고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 입의 말 한마디로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시편 73:28절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만사형통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1) 말씀을 가까이 하면 됩니다. 2) 기도를 많이 하면 됩니다. 그리고 3)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가까이 하시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을 보세요.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왜 교회를 나오는 것이 그렇게 부담이 됩니까? 왜 기도를 하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듭니까? 왜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요? 우리가 세상을 향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가 아닌 하나님의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도 엄청난 은혜가 임하게 되고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죄를 해결해야 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겸손과 순종이 함께 하는 사람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어디서나 늘 하나님과 가까이 살기를 힘쓰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