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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잊혀진 사람들-목사 장로의 갈등의 문제(37P)
♥ 일생의 무거운 짐, ‘容恕(용서)’의 문제 25-16 ♥
♥ <성령의군대> 선교 후원 ♥
배종부 농협 3560393-047263
배종부 <성령의군대> 지도목사
서울 새성교회(장로교 통합)
서울 노원구 노원로 26가길 25, 코롱상가 3층
010-2940-1717
배종부 목사의 글, 설교, 유튜브 동영상을 보시고 감동이 되시는 분은
너무나 어려운 주의 종들과 고통 당하는 선교사님들이 많음으로,
어려운 개척교회와 열악한 선교사님들을 섬기는 <성령의군대>를 정성껏 후원해 주십시오.
1.容恕(용서)의 문제,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 - 2P
2.용서해야 하는가? - 15P
3.어디까지 용서해야 하는가? - 32P
4.용서할 수 없는 인간들 – 47P
5.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지 않으실까? - 60P
6.용서하지 않으면, 내게는 무슨 일이 있을까? - 74P
7.시간이 가면 용서가 되는가, 그냥 잊혀지는가? - 83P
8.인생은 끝없는 용서의 과정이다. - 105P
9.한 인간 裵鐘富(배종부) 목사의 容恕(용서) - 117P
10.그래도 생각하면 또 화가 나고, 용서가 되지 않는다. - 140P
11.성경이 말씀하는 용서 - 159P
12.나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 174P
13.그들도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201P
14.잘못을 빌면, 착한 나는 宜當(의당)히 용서하지! - 215P
15.배종부 목사를 배신한 자들에 대한 성령 하나님의 회개 촉구 편지 지시 – 229P
16.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잊혀진 사람들-목사 장로의 갈등의 문제 - 247P
17.“暴力(폭력)을 행하고, 激憤(격분)을 풀고 나면, 감정은 풀리지만, 평생 후회가 된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하고” - (284P)
18.진정으로 사랑한 만큼, 용서하지 못하게 된다 - 296P
19.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인간들-그래서 살인,이혼,폭력,응징,이별...을 하게 된다 – 316 P
20.역대 잘못한 대통령 들을 전부 용서합니다!? - 331 P
21.잊혀진 것은 容恕(용서)가 아니다. - 365 P
22.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자도, 용서해야 하는가? - 375 P
23.잘못한 家族(가족)을 어디까지 용서할 것인가(비공개 원본,33P)...399 P
23.잘못한 家族(가족)을 어디까지 용서할 것인가(수정 전송본,14P)...432 P
24.그냥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라 - 446 P
25.容恕(용서)! 그 고난의 대행군에 다시 도전하다 – 458P
1>.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잊혀진 사람들
내게는 아주 오래된 원수 박00 장로가 있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 地獄(지옥)에 가고 없다. 나는 이제 아무 憾情(감정)이 없다. 그러나 그를 용서하고 싶지 않다. 목사인 내 기준의 판단에, 박00 장로는 地獄(지옥)에 가 버렸는데, 내가 그를 새삼스레 용서하고 자시고 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냥 그대로 잊혀진 머나 먼 과거의 사람일 뿐이다.
박00 장로는 일평생 내가 그렇게 그렇게 욕을 해 온, 타락한 장로들의 基準(기준)점에 서 있는 장로의 표상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내의 대부분의 노회, 총회의 실세 장로들은 다 이 길을 걷고 있다.
나의 ‘부정적인 장로상’ 은 결국 나의 목회를 가로 막았고, 목회에 성공하지 못하게 했다. 나는 이 사실을 후회할 수도 없고, 후회하고 싶지도 않다.
지금도 내 안에는 ‘부정적인 장로상’ 이 여전히 꽉 차 있다. 나는 한국교회의 장로상을 절대로 절대로 좋게 볼 수가 없다. 주의 종을 걷기 시작한 이후, 내 나이 23세 부산 명륜제일교회 교육전도사 시절부터 63세인 오늘까지 40년 목회 세월에 내가 보고 들은 것은 전부 부정적인 장로상이기 때문이다.
좋은 장로 얘기는 별로 들어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목사들 중에 장로로 인하여 고통 당하지 않은 목사는 단 한 명도 없다.
나는 장로교 통합 측 목사인데, 교단적으로 딱 하나 제안할 정치적 事案(사안)이 하나 있다. ‘노회에 장로를 들이지 말라’ 는 것이다. 노회에 장로가 들어 옴으로, 목사와 同格(동격)이 되고, 법적으로 목사와 동격이기에 목사를 짓밟고 이겨 먹고, 목사를 내쫓는 것이다.
아니, 교회 내 당회의 법적 구조를 한번 보아라. 목사는 한 명이고, 장로는 여러 명인데, 어찌 목사가 쫓겨 나지를 않나?
정말 목회를 잘 한 나의 선배들, 친구들, 후배 목사들이 장로들에게 당한 고통은 말로 형언치 못한다.
당연히 좋은 장로가 있지!
그러나 그 좋은 장로도 ‘노회’ 라는 정치적 틀 속에 들어 가면 희한하게 마귀가 되어 버린다. 무릇 교회 안에서 모든 ‘會議(회의)’는 마귀를 만드는 온상이다. 전부 기도회로 바꾸어라.
나의 목회 첫 출발지에서, 이미 지옥에 가 버린 악한 박00 장로의 갑질에 희생 당한 나는 항상 교인을 내 통제 하에 두려 했고, 힘 있는 실세 교인들을 경계했고, 절대로 절대로 내가 목회하는 교회 내에서는 어느 교인에게도 실권을 주지 않았었다.
장로, 권사는 아예 서약서를 제출하고, 담임목사인 나를 섬겨야 했었다. 목회권, 인사권, 재정권은 절대로 내 권한 하에 있어야 했다.
그 목회 결과는 비참하다. 한 마디로 평생 개척교회 목회였었다. 나는 돌이킬 수도 없지만, 절대로 후회하지는 않지!
지금 내가 부흥사로서, 성령 사역자로서 ‘부흥 사역’ 과 ‘성령 사역’ 을 선포하는 자로서, 목사 장로 권사를 가르치는데, 이 당당한 帝王(제왕)의 행복을 누가 알리?
내가 늘 ‘황제의 기름부음’ 을 말하는데, 바로 내가 그 ‘영적 황제’ 이다. 그 까짓 사람과 돈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난 하루 하루 살고, 목회하고 사역할 뿐이다. 지금도 곳곳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러 오라고 부르는데, 내가 지금 사역을 접고 있음으로 움직이지 않을 뿐이다.
나의 교인을 다스리는 원리는 아주 간단하다.
1>.사람은 예수를 믿으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
2>.성령 받은 사람은 자기가 否認(부인)된, 오직 順從(순종)의 사람이다.
3>.장로, 권사, 집사, 교인이 자기 담임목사에게, 온전히 자기 부인과 순종을 배울 때에만, 진정으로 하나님 섬김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런데 지난 40년 간 나는 그런 ‘자기 부인과 순종’ 의 교인을 하나도 본 적이 없다.
나의 박요한 장로, 강한나 부목사, 이수옥 권사는 그 합격권에 드는 사람이다. 내 사모, 내 자식들, 내가 평생을 목회한 세월에 어느 한 교인도 자기를 부인하려는 인간을 본 적이 없다.
끝까지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고 순종치 아니한 권00 장로는 22년 간 나를 섬기고 떠나 갔다. 형식은 내가 쫓아 냈지만, 자기 발로 불순종 하고 튀어 나간 것이다. 권00 장로는 내 목회 역사상 제일의 逆賊(역적)이다. 그 다음이 20년 간 나를 섬긴 이00 권사이다. 나머지 인간들은 背信者(배신자)의 기준에도 들지 못한다. 그들은 교회나 목사를 제대로 섬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새성교회 박요한 장로는 6살이 많은 나의 형님이며,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며, 정말 내가 자랑하고 싶은, 옳고 바른 장로의 기준이다. 장로는 의당히 그러해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의 99% 장로들은 전부 영적 뚜쟁이 들이다.
나는 長老(장로)에 대한 글을 정말 많이 써 왔다. 대부분 욕하는 글들이다.
내가 담임 전도사로, 목사로 처음으로 시무했던 부산 00교회에서 박00 장로는 초대 구00 목사 외에 총 6명의 목사를 다 쫓아 냈다. 그 중에 6번째로 마지막 쫓겨 나온 목사가 바로 나 배종부 목사이다.
박00 장로의 죄를 찾아 보기 위하여, 지난 날의 일기들을 한번 읽어 보았다. 아래는 1992년-1993년 내가 시무했던 부산 00교회 시절의 일기 요약본이다.
그런데 정작 돌아 보니, 내 삶이 너무 형편 없었고, 그래서 나는 당연히 쫓겨 나야 할 목사였었다. 다시 오랜 옛 세월의 일기를 읽어 보니, 박00 장로의 얘기는 없고, 온통 엉망진창인 내 삶의 얘기 뿐이네...
1992.7.부산 00교회 문제 진단 및 처방 대책
1.<문제>:
왜 00교회는 원로목사 은퇴 이후, 지난 15년 이상 계속 분열을 거듭하고, 교역자들이 거듭 쫓겨 가는 악순환을 되풀이 하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암적인 요인은 과연 무엇인가?
1.원로목사 중심의 가족교회이기 때문이다.
권력이 가족 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현재의 권한은 박00 장로와 류말희 권사에게 집중되어 있다. 원로목사는 하나님의 교회를 가족교회로 만들어 버린 책임을 져야 한다.
2.담임교역자가 리더쉽을 전혀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 발전을 위한 제반 조처들이 가족 들에게는 권력 상실로 인식된다. 사소한 것 하나도 교역자에게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가족 대 교역자의 파워 게임이 된다. 교역자는 제 자리를 찾지 못한다. 교회는 跛行(파행)을 거듭한다. 수 백명이 되었어야 할 교세가 그래서 100여 명 대에 늘 머물러 있다.
3.가족들의 세력은 연대를 형성하고,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린다고 여겨지면 교역자들 사이, 교역자와 성도들 사이에 비열한 음해와 분열, 이간질을 서슴치 않는다.
4.교회의 모든 주요 부분을 가족들이 쥐고, 권력을 분산하지 않는다. 여전도회는 류말희 권사가, 당회와 제직회는 박00 장로가 장악하고 있다.
5.가족들은 신앙으로 교회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인간적인 권모술수로 교회를 좌지 우지한다. 교역자의 위상을 침체시키고, 자신들이 그 영역을 잠식하고 있다.
6.젊은 교역자를 자기들의 머슴이나 하수인으로 여긴다. 말을 듣지 않으면 언제라도 교체할 수 있다.
7.장로들의 功名(공명)주의가 너무 눈에 뜨인다.
8.한 가족인 권사들의 전 교인 강제 관리를 느낀다. 권사들이 교역자에게 순종하여 교인들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교역자를 배제하고 자기들 가족의 세력 규합에 혈안이 되어 있다.
9.교인들은 교역자와 가족들 간의 마찰을 가만히 지켜 보고만 있다. 적어도 신앙 양심으로 교회를 지키고 있는 교인은 1/3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이들 가족들의 지원자라고 할 수 있다.
10.이러한 내부문제를 안고서는, 획기적 성장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교역자는 기가 꺽이고, 마음이 낙심된다.
2.<현안 마찰문제>:
본 담임 교역자가 부임한 후, 아래와 같은 문제의 露呈(노정)으로 00교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드러 나기 시작했다.
1.<새신자 양육 프로그램> 신설을 담임전도사의 교인 포섭 전략 1단계로 보고, 가족들이 공동 방어 전선을 형성하고, 교역자와의 사이에 거리를 둔다.(92.7월)
2.<중고등부 지도자> 영입 문제는 역시 저들 가족들이, 성기숙 전도사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한 대안으로 보인다. 노동구 집사를 내세웠으나, 담임 교역자의 필사의 기도로 인한 응답으로, 황해연 교육전도사로 결정되었다.(92.7월)
3.담임교역자 부임 4개월 만에, 드디어 장로들의 견제가 시작되었다. 8월 새벽기도회 폐지, 8월 <묵상의 달> 사업 폐지, 원로목사 월 1회 설교 강요, 담임 교역자 휴가비 격하 등은 그 구체적 사안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 문제 들은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92.7월)
4.성기숙 전도사와 담임교역자 사이를 이간질 시키는 것을 느낀다.(92.7월)
5.설교에서 치지 말라고 충고한다.(92.7월)
6.교회 정책이나 사업은 이미 가족들 내부에서 결정되어 있다. 한윤칠 장로나 이승찬 장로는 꼭둑깍시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박00 장로의 생각대로 진행된다.
7.가족들은 자신들의 문제와 잘못을 자신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다.
3.<처방 대책 >:
1.교역자가 소신껏 일할 수 있어야 한다.
2.기탄 없이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
3.가족들이 교역자를 음해하지 말아야 한다.
4.교역자의 인지 없는 교회 모임, 심방 등은 자제해야 한다.
5.예배 인도권을 이양해야 한다.
6.교회 인장을 양도해야 한다.
7.가족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해체 시켜야 한다.
구00 원로목사와 그의 부인 류말희 권사가 없어져야 한다.
8.당회 구성원의 세대 교체가 있어야 한다.
당회에서부터 가족들의 專橫(전횡)이 사라져야 한다.
4.개인 처신 대책
1.교인 중 어느 누구에게도 이러한 마음의 비밀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두려워 한다.
2.장기전에 승부를 맡겨야 한다. 설교에서 절대 치지 말고, 3년 동안 만 참으라. 은혜로운 설교 만을 하라. 교육설교를 하라.
3.가족 들을 정상적인 교인들로 인정하지 말고, 그들로 인하여 상처 받지 말라. 원래 그런 사람들이다. 제쳐 두고 버려 두라.
4.자질구레한 모든 것은 양보하라. 그리고 상처 입지 말라. 그러나 목회의 핵심 영역인 인사문제, 예배문제, 강단권 등은 전력으로 수호하라.
5.가족들의 꼭둑깍시나 나그네로 비치는 언행을 일체 삼가라. 태산 같은 의연한 모습을 교인들에게 보이라.
6.개인 경건에 더욱 정진하고, 공부에 매진하라. 기도와 말씀 상고를 체질화 하라. 부족한 자신을 하나님이 연단하신다고 생각하라.
7.인내하고, 숙고하고, 지혜를 간구하며, 목회하라.
8.낙심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이 장애물을 성장과 극기의 도전으로 삼으라.
1992년 8월 31일
어제 주일예배 후에, 드디어 류말희 권사와 싸움이 붙었다.
새신자 선물로 비누를 총동원 전도주일에 준비를 했었는데, 류말희 권사와 박00 장로가 선물을 숨기고, 예전에 쓰고 남은 작은 비누도 식당 방에 숨겨 둔 상태에서 일일이 하나씩 자기 허락 하에 가져 가게 해, 3개 여월 전부터 관리집사를 몇 번이나 시키고, 권사에게도 전화를 해 그렇게 하라고 지시를 했다.
그러나 어제도 또 똑같은 일이 반복되어, 직접 권사에게 3 번이나 새신자방에 비누를 갖다 두게 하라고 당부를 했으나, 사람의 말을 싹 무시하고 밖으로 휭- 하니 나가 버렸다. 신경질이 나서 내가 직접 비누박스를 들고 나갔다.
“교역자가 이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써야 하느냐?”고 언성을 높였다.
아내가 가로 막길래 혈압이 올라 있는데, 권사가 교회 입구에서 나오길래 손목을 잡고 새신자 방으로 가서 이야기를 좀 하자고 끌었다. 끌고 가다가 손을 뿌리치고 도망을 치길래, 따라 가서 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교역자가 이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써야 하느냐?”
“권사님! 교역자에게 그렇게 하는 것 아니다.”
언쟁이 되었다. 나 스스로 성을 낸 것이 덕을 세우지 못하여, 당회 후에 장로들 앞에서 권사에게 사과를 했다. 권사는 이런 말을 했다.
“전도사님은 여차 하면 장로님들 뺨이라도 칠 사람이다.”
“그 성질 죽이고 고치지 않으면, 절대 목회 성공 못한다.”
“전도사님도 성질 고쳐야 한다.”
결국 가족과의 전면전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제라도 내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들과 협력하여 목회를 해 나가면 되겠지만, 이제는 정말 일하고 싶은 마음이 다 사라져 버렸다.
이 상식 이하의 인간들과는 상종하기가 싫어졌다. 심방도 같이 다니기 싫다. 외면하고 싶다. 나는 아직도 마음으로 이들 가족들을 용서하고 있지를 못하다.
내가 분을 삭이고, 내 마음의 스트레스를 쌓지 않으면 되겠지만, 그러려니 목회를 할 수가 없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생기니, 영적인 상태와 목회의 의욕이 말이 아니다.
기도하고, 마음을 평정하고, 더 멀리 바라 보고, 대범한 자세를 갖고 장기목회를 해야 한다.
늙은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는 없을까? 상대가 되지 않는 까마득한 下手(하수)로 볼 수는 없을까? 지금 내 마음은 주먹을 들어 한 대 쳤으면... 싶은 마음 뿐이다.
더 기도하고, 더 영성을 쌓자. 하나님은 내가 인내하는 가운데 깨달음과 연단을 주실 것이다.
1992년 9월 5일
ㅇ박00 장로가 저녁을 대접한다고 해서, 갔다. 원로목사를 찾아 가, 류말희 권사의 문제를 두고 사과하라고 했다. 그리고 임시목사 청빙문제를 심각히 의논한 결과, 목사 안수는 시키되 당회장 권은 당분간 보류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유는 류말희 권사에 대한 잘못 때문이라는 것이다.
담임목사가 당회장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가? 이런 법도 있는가?
나는 권모술수가 무엇이며, 사람의 野卑(야비)함이 무엇인지 직접 겪어 보지 않았으나, 00교회에서 친히 체험으로 배우고 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이제 나는 어찌할 것인가?
이 해를 보내고, 한 해도 채우지 못한 채, 떠나 갈 것인가?
결국 희망 없고 전망 없기 때문에, 일찍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더 인내해야 하는가?
과연 인내할 이유나 명분이 있는 교회인가?
나는 정말 목자인가?
이 교인들이 정말 양떼란 말인가?
이 악한 자들과 내가 더 상종해야 한단 말인가?
결론은 분명하다. 나는 인내해야 한다. 여기서 3년은 인내해야 한다. 이제 가족들은 포기하고, 다른 교인들을 불쌍히 여겨, 여기서 버텨야 한다. 내가 훌쩍 떠나면 나는 속이 편할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또 상처 받는다. 나는 저들의 영혼 만큼은 진실로 돌 볼 책임이 있다.
마음에 원한을 쌓지 말라. 저들 장로들은 나의 전임자 박신영 목사와 그렇게 싸우고도 전혀 회개치 못하고, 깨닫지 못하니, 이제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 만이 남았다.
나는 나의 죄와 부족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 만의 고난 받으며, 처벌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구00, 박00, 한윤칠, 류말희, 류선희 권사를 징계하실 것이다. 구00 목사는 세상을 떠날 것이다. 박00 장로는 파산할 것이다. 00교회에서 이제 이 악한 가족들은 다 흩어지고, 사라질 것이다.
나는 이제 설교에서 치지 말아야 한다. 00교회의 장로, 권사들은 이제 나의 교인이 아니다. 나는 그들을 제쳐 두기로 했다.
이제 다른 성도들 만을 바라 보며 설교하겠다. 그들은 불쌍한 양떼 들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의 복음’ 이다.
이제 나는 ‘교회행정’ 에서 손을 떼겠다. 교회는 그들이 마음대로 주무르게 두라. 죽고, 파산할 때까지...
나는 기도하고,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고, 심방하는 일 만을 부지런히 계속하겠다. ‘교회행정’ 에는 관여하지 않겠다.
날마다 성결의 길을 훈련하겠다. 이 길 뿐임을 나는 안다. 나는 인내와 눈물의 골짜기를 걸어 가야 할 때가 온 것을 안다. 이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배종부여! 인내하라. 그리고 마음을 열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심으로 징계하시고 연단하시는 것을...
주님! 나의 죄악 들을 용서하시고, 나의 극단적인 성격을 순화 시키시고, 부디 저들의 죄악도 회개시켜 주시옵소서. 회개하지 아니하면 주님의 심판이 나와 저들에게 다같이 임할 것입니다.
부디 우리를 인도하소서. 주님! 도와 주소서.
1992년 9월 15일
ㅇ나는 류말희 권사, 박00 장로, 구00 목사, 류선희 권사 등을 악하게 비난하고 있다. 물론 나 자신과 아내에게 한정된 것이다.
내가 내 양심으로 이들을 포용할 수는 없을까?
담임목사, 당회장!?
이런 것들이 그렇게 중요한가?
나는 부교역자와 같은 마음으로, 장로들 밑에 있는 전도사가 벌벌 기는 마음으로 교회를 사역하면 안되는가?
그들이 내 위에 있는 어른들이라 생각하고, 무조건 따르고 순종하면 안되는가?
내 마음은 이 교회의 지도자는 나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내 밑으로 들어 오기를 바란다. 내 위에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 사고방식이 문제가 아닐까?
나는 정말 반성할 점이 없을까?
그들만 잘못한 것일까?
나는 나와 그들 사이에 악한 사탄이 개입하고 있음을 안다. 류말희 권사 외에는 악한 사람이 없다. 류말희도 자기 습성과 천품이 그러해서 그렇지, 의도적으로 악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당뇨와 심장 판막 증세가 있단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노인이다. 내가 잘못 혈압을 올리면 죽어 버릴지 모른다.
이제 와서 내가 할 일은 기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도만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다. 적어도 하루에 3시간은 기도해야 한다. 아침 1시간 반, 저녁 1시간 반!
나는 입을 조심해야 한다. 기도 내용도 비밀로 해야 한다. 교인들 어느 누구도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아는 모든 사실은 모두 미궁 속으로 숨어 들어 가야 한다.
나는 아직도 교인들을 잘 모른다. 심방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발이 닳도록 찾아 가야 하는데, 나는 전혀 찾아 가지 않는다. 결석자는 무조건 찾아 가야 하는데 가지 않는다. 차가 없어서 불편한 것이 첫째 이유이고, 심방 대원이 없는 것이 둘째 이유이다. 아내 마저도 피아노 레슨 때문에 심방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왜 하나님은 저들을 통해, 심방을 막으시는 것일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 뿐이다. 교회에서 사는 일 뿐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나는 다른 아무 일도 해서는 안되는 상황 속으로 지금 뛰어 들었다.
나는 지금 저들 가족 들을 흩어 달라고 기도한다. 내가 총애하는 박00 장로의 딸 박영애, 며느리 이막순 마저도 사라지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새로운 일군 들을 보내 달라고 기도한다. 직분자 들을 청소해 달라고 기도한다.
나는 확실히 00교회의 대변환기에, 가장 중요한 담임사역을 하고 있음이 틀림 없다. 하나님은 이제 드디어 당신의 조치들을 취하시기 시작했다.
박경수 장로가 사표를 쓰고, 동광상호신용금고를 나와 버렸다.
나는 이것이 교회 갱신의 첫번 징조라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박장로는 계속 파산으로 치달아 갈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그는 더 이상 교회에서 영예와 힘을 쓸 수 없는 불쌍한 장로가 되어 갈 것이다.
1992년 결산(2020.10.4.주일)
1.부산 용호제일교회에서 그렇게나 나를 붙드는 담임목사와 장로와 성도들을 두고, 억지로 부산 00교회로 왔다.
지금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어려움을 각오하고 온 길이다.
부산 00교회에서의 경험은 좋은 목회 교훈이 되었다. 장로를 알고, 원로목사를 알고, 패거리와 파당을 알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교회의 실상을 알고.....
2.목회는 여전히 乾性(건성)일 수 밖에...
그러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
3.여전히 목회 견습자로서, 목회를 배워 가는 과정에 있다.
아직도 주의 종이 되려면 너무나 그 경험과 경륜이 일천하다. 사람은 경험하여 배우는 것이다. 직접 겪고, 보고,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웠는가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다.
지금 와서 돌아 보며 후회하는 것은 00교회가 어차피 ‘가족교회’ 라 고질적인 문제가 있는 교회인데, 그 사실을 알고 갔으면 그 문제는 덮어 두고, 그들과 잘 화합하여, 그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여 사역하다가 떠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런데 사람은 어리석어, 언제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그 어려운 환경과 여건 만을 탓한다.
나는 지난 6년 동안 새성교회의 어려운 환경 만을 탓해 온 자가 아닌가?
성령님이 나를 붙들지 않았으면, 나는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목회 성공을 꿈꾸지 말라. 주님의 교회이지, 너의 교회가 아니다. 네가 부흥 시키지 않아도 된다. 단지 너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그 자리를 잘 지키고 있으라. 그 다음의 결과는 성령님께 맡기라.
지난 날 00교회에서 비난과 불평, 불만의 마귀에게 속아, 영적 지혜를 발휘하지 못한 죄를 주님 앞에 회개한다.
정말 어려서 몰랐다. 아무 깨달음도, 분별력도 없었으니까!
내가 주님 앞에 잘 했으면, 박00 장로는 죽지 않았을 것인데... 그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내가 열쇠를 쥐고 있었는데......
나는 입을 다물고 기도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여건 하에서 최선을 다했어야 했다.
그 점에서 나는 죄인이다.
4.나의 처신의 지혜 없음과, 그 다음을 생각하지 않는 血氣(혈기)는 정말 끝이 없다.
새성교회에 와서도 그랬다. 상대가 강하건 말건, 血氣(혈기)로 이기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는 손해를 보고...
정말 배종부 목사의 血氣(혈기)는 어느 누구도 감당을 못한다.
혈기와 조급의 더러운 영아!
이제는 성령님의 청지기목사가 된 裵殉命(배순명) 목사에게서 영원히 소멸 될지어다.
5.장로, 권사와의 갈등과 불만의 팽배, 자기 발전이나 교회 발전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하지 않음... 나는 사실 나의 허물과 죄로 말하면, 이 때 죽었어야 했다. 하나님이 나를 징계하셔야 했다.
하나님이 나를 인내하신 단 하나의 이유는 훗날 내가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성령님의侍從’ 이 되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아니된다. (아멘 아멘 아멘.)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인간이 있다면, 바로 나 배종부 목사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인내를 알고, 긍휼을 알고, 용서하심을 알고, 하나님의 먼 미래를 보심을 안다.
나는 하나님의 너무나 이해할 수 없는 무한한 ‘사죄의 은총’ 을 입은 자이다.
왜 하나님은 나는 용서하시고, 박00 장로는 그렇게 무섭게 심판하셨을까? 지금 돌아 보니, 죽일 놈은 정작 나였는데... 한 마디로 어리고 철이 없어서 봐 주신 것이다.
6.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약속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킨다. 이번의 금식도 마찬가지이다. 20일을 채우고, 교회를 재창립 하리라.
7.앞으로 나에게서 경제적 낭비, 가난, 무절제, 말 실수, 血氣(혈기), 사람을 공격함, 無爲徒食(무위도식), 목회를 게을리 함, 공부 않음, 열정이 식음... 은 절대 없을 것이다. 이 모든 더러운 영들은 내게서 떠나 갈지어다. 소멸 될지어다.
나는 나의 담임목사님이신 성령님께 붙들려, 정말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가게 될 것이다.
8.이 때까지만 해도 무엇을 모르고, 철이 없었다고 보아도 좋다.
사람 마다 철이 드는 나이가 다 다르다. 나이 35세에 아직도 철이 없다고?!
그렇다. 하나님은 그렇게 여기셔서 나를 용서하시고, 인내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나이가 47세이다.
(2020.10.4.주일 아침, 이제 내 나이는 63세이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을 모르고, 유혹과 시험을 모르고, 철이 없고, 무엇을 몰라서 그랬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더우기 나는 성령님을 알고, 성령신앙을 알고, 성령목회 하고 있다. 성령님을 담임목사님으로 모시고, 새성교회에서 청지기목사로 목회한다.
이제는 안된다. 이제는 마지막 가는 길이다. 나에게 다시는 기회가 없다.
“사랑하는 주님! 제게 마지막 한 번의 기회 만을 더 허락해 주세요.”
(나는 47세에 성령을 받고서야 비로소 은혜의 사람이 되고, 철이 든 사람이 되었으나, 성령 충만함이 식었다.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에게 내 인생을 맡겨 두지 마시고, 오직 당신의 강권적인 은혜로 인도하소서. 2010.4.16)
9.결심으로도 안되고, 의지로도 안되고, 오직 성령님으로 됩니다.
저로 하여금 성령님께 복종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행하게 하옵소서.
1993년 결산(2020.10.4.주일)
1.나의 불충과 완악함의 끝은 어디인가?
빚이 1,000여 만원인데, 끝없이 낭비하는구나!
목회가 되겠는가?
목회는 커녕, 한 가정의 삶이 되겠는가?
아아! 배종부여.
목회가 도대체 왜 안된단 말인가?
2.경망스럽고, 말 실수가 많은, 전혀 지도자의 체통과 권위, 자질이 없는 인간!
나는 얼마나 긴 세월을 거쳐 가며,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지금 나는 고쳐졌는가?
3.삶의 무절제로 인하여 몸이 다 망가지고, 허약해지며...
빚은 감당치 못할 정도로 자꾸만 늘어 가고...
죄악에 빠져 있는 자의 늘 하는 소리!
‘자기 합리화’ 는 언제나 그대로이고...
4.목회 자원이 아무 것도 없어, 심히 고통한다.
목회철학, 목회방법, 교회론이 없다.
설교는 늘 베껴서, 써 먹는다.
가장 중요한 것! 목회자의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불쌍한 목사여!
목사 아닌 목사여!
5.한 마디로 나는 목회자로서 부적격자이다.
실력 보다도 그 마음의 자세가 글러 먹었다.
글러 먹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런 나를 쓰시려고 오늘까지 인내하시고 계시단 말인가?
큰 목회 운운이 아니라, 그저 목사로 살게 해 주심 만도 감사,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러면, 지금은 달라진 것이 있는가?
지금의 인간관계, 경제는 다른 것이 있는가?
똑 같다.
그래서 더욱 더 절망스럽다.
나도 회개하고 돌이킬 수가 있을까?
내게도 새로운 목회에의 길이 있을까?
나는 불가능 하나, 나의 성령님 안에서라면 가능하다.
6.저 못된 베테랑 장로들이 철부지 나를 바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저 놈 미친 놈이 아닌가?” 하지 않았을까?
진짜 배짱 좋게 아예 미친 놈으로 나가 버리든지......
나는 그럴 머리도, 계산도, 배짱도 없지!
목회적 판단이 너무 미숙하다. 너무나도...
7.경제적 위기가 초읽기에 들어 가고 있다.
대책이 없다.
왜 이렇게 살아 왔을까?
마귀에게 멱살을 잡혀 살아 온 세월들, 세월들......
8.문숙이가 귀신 들렸다.
나는 귀신을 두려워 한다. 도저히 역부족이다.
9.오른팔 오덕근 집사의 가정이 이혼했다.
가슴이 아프다.
10.끝 없이 반복되는 의미 없는 삶, 자책감, 無爲徒食(무위도식)의 생활의 기록을 보고 있자니, 짜증이 난다.
사람의 성숙도와 그릇됨이란 정말 한계가 있나 보다.
정말 왜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을까?
사람이 이렇게 밖에는 살 수 없었을까?
왜 하나님은 나를 죽이지 않으셨을까?
내가 볼 때에도 나는 죽어야 했다.
11.아버지가 위암, 뇌암으로 판정이 나서 녹즙기를 사 드리고, 어머니로 하여금 녹즙을 갈아 드시게 하고 있다.
12.장로, 권사들은 완전히 등을 돌려 버렸다.
각자 간다.
13.사람은 자기가 행한 대로 갚음을 받는다.
14.5일 간 경제문제가 급박하여, 금식기도한 기록이 있다.
나는 금식할 때는 항상 나의 죄악의 수습이 불가능할 때였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점점 더, 금식은 방향이 바뀌어 은혜와 목회 자세를 두고 하는 것이 되었다.
15.나는 사모에게 정말 죽일 죄인이다.
나는 사모에게 너무나 큰 고통 들을 주어 왔다. 이제는 더 이상 그에게 고통을 주어서는 아니된다.
정말 우리 부부가 어느 정도 떨어져 살아야 하는 간격이 필요하다면, 지금처럼 사는 것이 가능하다. 지금처럼 무관심하게 살되, 생활비 만큼은 철저히 챙겨 주어, 더 이상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라.
근본적인 경제는 내가 바로 살고, 목회를 바로 하게 될 때에,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풀어 주실 것이다.
16.허리 마비가 와서 며칠을 드러 누워 있다.
수요예배도 못 가고...
17.장로, 권사 욕을 하는 일로 목회의 전부를 바치고 있다.
18.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기가 바로 지옥의 나날이었다.
경제는 완전히 부도가 나 해결 불능이 되어 버렸고, 건강은 너무나 망가지고, 아내는 피아노학원을 하면서 돈을 벌어 1,000만원을 고스란히 나의 빚 청산에 집어 넣고...
그리고 00교회를 사임하고, 서울로 부목사로 올라 간다.
하나님은 왜 나를 건지셨을까?
그런데 나는 왜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까?
아직도 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 그렇게 살 것인가?
아닙니다. 앞으로 나는 그런 일은 이제 없습니다. 성령님 안에서 저는 새출발 합니다.
정말 나는 이제 뭔가 새로운 결단과 열린 눈이 필요한 시점이다.
19.박경엽 청년회장을 기억한다.
20.만신창이의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정말 희망이 있는 인간일까?
2004년 부도난 지금,
가장 처절하게 망가지고, 무너진 내 삶을 회복할 수 있을까?
참다운 목사가 될까?
경제를 일으킬까?
사모에게는 어찌해야 하는가?
21.본인인 내가, 내 일기 글을 읽으면서도, 너무나 나의 삶이 엄청나게 망가져서, 입이 벌어져 다물 줄을 모른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살 수가 있었을까?
하나님은 왜 이런 나를 살려 두셨을까?
가장 중요한 질문!
풀 수 없는 질문!
하나님은 왜 저 착한 사모를 저렇게 고통 속에 22년의 세월을 살게 하셨을까?
이 악한 나는 왜 인내하시고, 용서하시고,
저 바르고 착한 사모는 저렇게 고통 속에 방치하셨을까?
어떻게 보상해 주시려는 것일까?
나는 사모를 금쪽 같이 여기며, 그 삶을 보상해 주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인격적으로, 사랑으로, 신뢰로, 목회로...
22.부도 나 버린 2004년, 이 부분에 와서는 내 삶에 절망감이 든다.
정말 나는 구제불능의 인간이 아닌가?
결국 내 인생은 끝장 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영원히 가난뱅이로 살다가, 끝나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이제라도 목회를 제대로 하고, 성령님께 복종하며 나아 가면 내 삶은 달라진다.
이제 내 남은 열정을 온통 목회에 쏟아야 한다.
더 이상 방황치 않으리라.
할 필요도 없고...
23.이제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가, 나의 영원한 방패막이이다.
아빠를 지켜라.
경제적 낭비와 가난에서 지켜라.
無爲徒食(무위도식)에서 지켜라.
너희들을 진정으로 잘 키우고, 사랑으로 돌보게 하라.
오직 목회에만 전념하다가 죽는 목사님 아빠가 되게 하라.
24.나이 47세!
내 나이이면 이미 다들 큰 목회 들을 하고, 성공해 있을 나이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철이 없다.
어리다 말 못한다.
무책임 하게 살지 말라.
이제 남은 세월은 달려 가며, 살라.
금식이 끝나면 너는 전쟁하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제 더 이상 무위도식은 없다.
앞으로, 앞으로 간다.
달려 간다.
(그 후에, 내가 시무 2년 만에 부산 00교회를 떠난 후, 00교회당이 불이 나서 홀랑 다 타버렸다.
박00 장로는 내가 00교회를 떠난 후, 몇 달 만에 교회 담벼락에 깔려 죽었다. 그의 그 많은 수천억원의 돈은 죽으면서 한 방에 다 날아 가 버렸다.
그 아내 류00 권사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었는데, 남편 보다 먼저, 내가 00교회를 떠난지 3개월인가 후에, 암으로 죽었다. 내가 있을 때에는 암의 징조도 하나 없었다.
그 후에 원로목사의 부인 류말희 권사는 계속 교회를 專橫(전횡)하다가, 조카 박00 담임목사에게 된통 당하여, 고통을 당했다. 구00 원로목사는 오래 살았다...)
2>.나의 ‘역할 갈등론’ 글에서 인용한 목사 장로의 갈등
(목사, 장로의 갈등을 중심으로... 2017.11.12.)
사람은 사람을 만나, 사람 관계 속에서 살아 간다. 사람 관계는 정말 갖가지이다. 교회 안에서 가장 갈등하기 쉬운 역할 관계는 어떤 것일까?
대충 다음 6가지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 주관이기에 정답은 아니겠지만, 참고로 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
1.목사와 장로 사이
나는 부목사 시절 무궁교회 장달윤 담임목사님으로부터 목사와 장로 사이의 갈등을 이해하고, 장로를 아름답게 다스리는 목사의 처신을 기교롭게 잘 배운 적이 있다.
현실적으로 정말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의 말미에 장달윤 목사님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여, 이해에 참고로 할 것이다.
한국 장로교 내의 목사, 장로 갈등의 수위는 이제 위험선을 넘어 폭발 직전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목사” 부터 말해 보자.
원색적으로 말하면 목사의 제일 원수(?)는 장로이다. 목사들이 장로 때문에 도저히 목회를 할 수가 없다.
가로 막는 장로만 없다면 목사들이 얼마나 속 시원히 목회를 잘 할 수 있을까?
못된 장로들 때문에 고통 당하는 목사들의 사례는 정말 기가 찰 일이라, 일일이 입에 담지도 못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목사는 정말 아직도 목사의 자격이 없으며,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목회를 ‘장로’ 라는 고리로 묶어 놓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사는 하나님이 손을 보시고, 새롭게 빚어야 할 일들이 까마득히 남았다는 것이다. 진정한 ‘섬김’ 을 몰라 제대로 목회할 그릇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들이 받고, 거역하는 장로’ 라는 채찍으로 연단하시는 것이다.
현장에서 실제로 장로에게 고통 당하며 목회하는 분들은 이런 제 말을 들으면 정말 화를 낼 것이다. “네 놈이 무엇을 아느냐고? 네 놈이 목사라면서, 진정 장로에게 당하는 고통을 아느냐고?”
그런 분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도 겪었기 때문에, 아니 처절하게 겪었기 때문에, 알아도 너무나 잘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유 없는 고통과 매를 절대 대시지 않는 분이시다. 만일에 어떤 목사에게 희한하고 못된 장로가 들러 붙어 괴롭힌다면, 그는 장로를 탓하기 전에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를 물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일정 기간을(보통 10년 미만에 다 끝난다) 삶의 고통을 통하여 그 답을 찾아야 한다. 사람은 이론과 판단이 아니라, 삶의 고통의 댓가가 따라야 답을 찾고, 마침내 변한다.
“장로” 는 어떤가?
장로들에게 목사는 더 이상 예전의 하나님의 종의 권위가 없다. 한 마디로 목사들이 목사 같지 않고, 저질스러우며, 씹어도, 대들어도, 심지어 짓밟아도 좋은 만만한 ‘장로의 밥’ 이라는 것이다.
이제 장로들에게 목사는 더 이상 권위의 대상이 아니다. 교인들에게, 교인의 대표인 장로들에게 이러한 판단을 받고 만 우리 목사들은 진정 회개해야 한다.
아아! 목사에게서 풍기는 저질스럽고, 상스럽고, 세속적이며, 인간적인 냄새여!
똑똑한 장로가 어찌 그것을 모르리!
문제는 목사를 목사로 대하지 않는 이러한 악하고 못된 장로가 내가 볼 때에는 전체 장로 중에 5% 정도는 되고, 이 사람들이 목사와 갈등하며, 온통 한국교회의 문제들을 다 흐려 놓는다는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 문제 장로들이 노회와 총회 등에서 한국교회의 목사를 괴롭히는 실세라는 것이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노회, 또는 지역 단위로 합동하여 움직이며, 후배 장로들을 가르치고, 敎唆(교사)하고, 선동(煽動)하고, 목사를 대적(對敵)하는 법을 조직적으로 세뇌시키며, 사탄의 악을 조장하고 다닌다.
이들은 주로 정치색을 좋아하며, 노회나 총회의 중진들로, 교단의 핵심 인물들로 행사한다. 법으로 따지기 좋아하며, 특히 정치로 목사 죽이는 일을 너무 너무 재미 있어 하며, 중심에 하나님은 없고, 권모술수만 잔뜩 부리고, 명예, 권력, 돈, 지위, 존경, 인기, 세몰이... 등을 좋아 한다. 사탄이 이런 것들을 제일 좋아하는 줄도 모르고...
주로 노회나 총회 총대로 나서는 사람들이 그 대부분의 주역 들이다.
나의 이 말에 이를 갈면서 욕하는 장로들은 자기가 그런 사람이 이미 되어 있다는 사실을 警鐘(경종)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아프지 않은 곳은 찔러도 아무 반응이 없다. 그러나 아픈 곳을 찌르면 당장 반응이 온다. 나의 이러한 신랄한 지적에 그러한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장로 당신은 회개해야 한다.
당신은 정말 지옥 갈지 모른다. 어쩌면 당신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임하였는지 모른다.
이들 타락한 몇몇 못된 장로들 외에 95% 이상의 장로들은 정말 착하게, 순종 잘 하며, 목사 같지도 않은 목사도 하나님의 종으로 받들며, 목사가 정말 인간적인 냄새가 풍겨도 묵묵히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정 심판해야 한다면 하나님이 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리고 견디지 못하면 정든 교회를 버리고, 그만 떠난다.
그래서 못된 목사들도 지옥 가야 맞다.
아아! 사탄의 주구(走狗)들인 목사와 장로들이여!
그대들 앞에 놓여진 심판의 무서움을 깨달을진저!
이상 말한 두 종류의 목사와 장로들은 간단히 말하면 지옥 갈 사람 들이다. 이들이 바로 한국교회를 어지럽히고, 목사 장로 갈등(葛藤)의 선봉에 서 있는 사람 들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들을 심판하신다.
그러면 정상적인 목사, 장로의 갈등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까?
해결의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나, 또한 持難(지난)하기 그지 없다. 원리 원칙으로 돌아 가면 답은 금방 나오지만 목사 입장, 장로 입장에서 각각 생각하면 답은 전혀 엉뚱해진다.
과거에 내가 속한 장로교 통합 측 서울북노회에서도 장로의 목사 안수 문제가 불거져 목사와 장로 사이의 갈등이 첨예화 되었는데 결국 아무 해결책도,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수면 아래 시한 폭탄으로 잠복하고 말았다. 이 문제는 언제 또 다시 터질지 모른다.
목사, 장로의 역할 갈등론에 있어서 내 견해는 일목요연(一目瞭然)하고 간단하다. 목사는 장(長)이요, 장로는 참모(參謀)이다. 목사는 장로에 대하여 당회장으로서 전권(全權)을 행사해야 한다.
처음부터 아예 목사에게 엉겨 붙을 장로는 세우지 말아야 한다. 장로는 부목사처럼 목사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 忠臣(충신)이 되어야 한다. 잘못하는 불량한 목사에 대한 견제 장치는 이미 법적으로, 현실적인 장로 제도의 모습 만으로도 충분하다.
이것이 가장 간단한 나의 목사 장로 갈등론을 해결하는 대원칙이다.
사실 목사 같잖은 인간 때문에, 장로 같잖은 인간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장로를 세울 때에는 교회 상황이나 목사의 개인 입지의 유익을 위하여 세우지 말고, 장로의 그릇됨을 보고 임직(任職)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못 세운 장로들이 결국 목사를 잡아 먹는 식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러면 물러 가는 전임목사가 개인 이권이나, 자기 노후 대책이나, 이런 저런 사욕으로 세운 엉터리 장로는 어찌할까?
요즈음은 이상하게 목사들이 장로 권사들을 수 십명씩 한꺼번에 세우는 운동을 앞다투어 벌이는 것 같다.
왜 그런 展示行政(전시행정)을 할까? 그렇게 한꺼번에 무더기 장로, 권사를 임직하면 목사의 주가가 올라 가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분명 문제가 있지 않은가?
이렇게 세워진 엉터리 장로 때문에 새로 온 후임 목사는 목회를 할 수가 없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나? 고스란히 희생 양이 되는 수 밖에는 없다.
궁색하나마 해답을 하나 제시하라면, 그럴 때에 새 목사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연단 기간을 어찌하든지 잘 거치면 된다. 그 기간이 1년일 수도 있고, 3년일 수도 있고, 10년일 수도 있다.
대부분 3년 안에 결판이 난다. 쫓겨 가든지, 타협하여 그저 그렇게 살든지...
다 자기 뿌린 대로 거두어 가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그런 못된 장로를 만나게 하여 목사를 연단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고, 버릇을 고치는 것이다.
나아 가 이런 갈등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목사, 장로 공히 온 교인의 심판을 주기적으로 받을 ‘임기제 도입’ 은 정말 총회가 결의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과거 100여 명이 모이는 부산 00교회에 전도사로서 담임교역자로 청빙 받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담임목사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나를 청빙해 간 장로가 2년 만에 나를 쫓아 냈다. 그는 나까지 꼭 6명의 목사를 차례 차례로 쫓아 냈다. 얼마나 교회가 부덕했던지 부산 시내에 온통 소문이 났다.
너무나 괘씸한 것은 내가 엄연히 목사 안수를 받고 담임목사임에도 불구하고, 당회장 권을 다른 교회 목사에게 주고 목사의 손발을 묶어 버리는 것이었다. 교회 재정도, 심방도, 그 어떤 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꼭두각시였다. 당시에 나는 저런 장로, 권사 때문에 교회 부흥이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날마다 욕을 퍼부으며 살았다.
이제 20여 년의 세월이 지나고 보니, 내가 인간 같잖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버르장머리를 고치시려고, 나를 참된 목사로 만드시려고 그런 교회에 보낸 것이었다. 당시에 나는 훌륭한 목사의 그릇인데, 못된 장로가 내 앞 길과 교회의 부흥을 가로 막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개척을 하면서 비로소 다듬어지지 않은 나를 직시하게 되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목사는 못된 장로라는 혹독한 매를 맞으며 목사다운 목사로 빚어져 가는 것이다.
혹시 장로 때문에 목회를 도무지 못하는 목사가 계시거든, 무조건 열만 받지 마시고 제 말을 한번 참고하시기 바란다. 분명 이 말에 열 받는 목사님들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목사에게 오직 복종하라는 제 말에 “무슨 이런 목사 놈이 다 있어?” 하는 장로도 있을 것이다. 그런 당신은 정말 회개해야 한다.
지금 내 친구 목사는 장로 때문에 정말 고통, 고통을 당한다. 한번은 찾아 와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그런데, 내가 과거에 했던 짓들을 장로들이 그대로 하고 있더라고... 하나님이 내 버르장머리 고치는 것이지! 내 성질 죽이시려고...” 하며 맥없이 웃는 것을 보았다.
목사, 장로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의 대원칙은 “목사가 과연 섬기는 정신이 되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목사가 진정 바른 목사이고 섬기는 정신이 올바로 되어 있다면 목사, 장로의 근본 갈등은 분명히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목사가 전시대적인 사고에 사로 잡혀 장로 위에 군림하려 들면, 양자의 갈등은 꼬리를 물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 배종부 목사는 분명히 아직도 ‘섬기는 영성’ 위에 자기 자신을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음이 틀림이 없다.
“목사, 장로 갈등론”의 좀 더 세부적인 이야기는 글 말미의 장00 목사님의 글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정말 목사와 장로의 갈등에 대하여 심도 깊게 잘 해부한 여러 편의 글들이 있기 때문이다...
16.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잊혀진 사람들-목사 장로의 갈등의 문제(1-2)(37P)
3>.돌아 가신 무궁교회 장달윤 원로목사의 “목사, 장로 갈등” 에 대한 글
3-1.목사의 눈물
본 교회에서는 제 4회 농어촌 목회자 세미나를 개최하여, 초교파적으로 49명의 목사님들이 모여 “섬기는 종이 되자” 는 주제를 표어로 걸고 강론하고 토론하고 고충을 털어 놓게 하고 같이 연구했다.
나는 그 분들에게 3박 4일 동안 목사가 군림하는 직이 아니고, 낮아져서 섬기는 종의 직이라고 강론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①목사와 장로의 갈등 요인이 무엇인가? ②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③나의 목회 35년의 희비를 고백하고, 나대로의 섬김의 목회 철학을 강론했다. 갈등의 문제 요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특히 권위주의로서 교회를 이끌어 가려는 데서 오는 문제와 섬기는 목회자로서의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1.권위주의 목회자로서의 문제 요인
①강요하고 명령만 하며,
②자기 생각대로 고집 부리고 집행하고 희생을 요구하며,
③성도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 위에 군림하고,
④편협하고 편파적 행정을 하며,
⑤장로를 목사보다 비전문가라 하여 멸시하고 무시하며,
⑥자기를 중심하여 자기 보호의 근위대를 만들어 자기 반대파를 소외 시키고 때려 잡고,
⑦양을 잡아 먹고, 양가죽을 깔고, 그 위에서 앉고 누워, 자기 기호대로 오락을 즐기는 데서 갈등의 배아가 시작됨을 지적하고, 지도자가 섬기는 종이 될 때에 이상의 문제에서 야기되는 모든 문제는 해소될 것이라고 했다.
2.섬기는 목회자로서의 자세와 해결책
①성도들을 감화 시켜 일할 의욕을 돋우어 주어 목표를 달성시키고,
②과정과 방법을 설명, 교육하여 감동 시키고,
③성도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성도 중에 같이 거하는 지도자이며,
④믿음과 사랑과 용서와 관용으로 대하고,
⑤나는 감추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뭉치게 하고,
⑥평화와 사랑으로 단합하게 하고,
⑦여리고성 강도 만난 자를 보호하는 주막집 주인같이 성도를 보호하고,
⑧일(예컨대 교회 건축)보다 인간관계를 더 중요시하는 것이라 하고, 예를 들어 하나 하나 이야기해 갔다.
3.목사의 항변
강의 후 어느 목사님은 이렇게 반문했다.
“우리가 창녀입니까? 장로들의 비위나 맞추고, 그들 앞에 굴욕적 섬김을 해야 합니까? 사도행전의 말씀 같이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지, 장로 말이나 들어야 합니까?” 라고 반문했다.
그리고 어느 분은 어느 목사가 강의하는데, 교회를 강압하고 무서운 권위를 휘두르라고 했는데 목사님의 방법과는 정반대입니다 라고 했고, 어떤 분은 그렇게 섬기면 오히려 장로들이 섬김을 받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어, 오만 방자한 무례를 범치 않겠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나는 그 분들에게 고전10:31-33절로 대답했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고, 하나님의 교회에 걸리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며”,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라” 했는데, 왜 성경을 한 쪽만 보느냐? 고 하고, 성경 구절을 찾아 주고, 어느 것이 성경적인가 알아서 하라고 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①눅22:27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②요13:14 너희로 행하게 하려고 본을 보였노라, ③마23:11 너희 중에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④요13:8 섬김이 없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하셨다.
4.내 할 일만 하면, 다른 사람 탓할 바가 아니다.
목사나 장로나 평신도나 할 것 없이 낮아져서 섬김이 없는 자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고, 상대방이 어떻게 하든 그것은 내가 탓할 바가 아님을 알라고 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 목사의 속에 들어 가셔서, 목사를 감동 시켜 울게 하셨다.
3일째 저녁 수요예배시 각 도 대표가 나와서 인사 겸 소감을 말하는데, 목사님 중에 어떤 분들은 “나는 지금까지 교회 모든 문제 원인이 교인들에게 있는 줄 알았는데, 내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을 깨닫고 나는 혼자 새벽에 교회에 와서 많이 울었습니다. 양들을 돌보며 위로하지 않고, 때리고 냉대하고 내 주장대로 하는 데서 많은 상처를 받고 나를 떠난 것을 알았습니다.” 라고 고백하는가 하면, 체구가 장대한 어느 목사님은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 주일 학생까지 작은 하나님으로 섬기겠다고 하고, 이런 식으로 섬기겠다며 맨 땅에 엎드려 절을 하는가 하면, 어느 목사님은 목회를 좀 해 보는데 너무 힘들고 어려워 두들겨 패고 짓밟으려 생각했는데, 여기 와서 마음을 고쳐 먹고 섬기는 종이 될 작정을 했노라고 고백하였다.
인간 장로의 소리는 목사의 마음을 아프고 상하게 하고 균열케 하고 분개케 하나, 성령의 소리는 목사를 울게 함을 보았다. 분명 이 눈물은 누구의 배척을 받아 고통스러워서, 또는 보따리 싸 놓고 쫓겨 나는 목사의 눈물이 아니었다. 분명히 성령께서 자기를 보게 하여, 울게 하시는 눈물이었다.
올 가을 제 5회 세미나 때는 더 많은 목회자들이 울기를 원한다. 낮아져서 섬기는 종이 되어 문제의 요인을 사전에 제거하고, 행복한 목회를 하는 농어촌 목회자님들이 되기를 기원한다.
오! 성령님이시여. 목회자들이 자신의 과오를 발견하고, 더 많이 울게 하소서.
3-2.어느 목회자의 환희
무슨 일이든 알고 보면 쉽고, 모르고 보면 어렵고 답답하다. 나는 23세부터 농촌교회 전도사로 시작하여, 58세에 이르도록 35년 간 목회를 한 셈인데, 서울에서 전도사와 부목사 5년 현재 시무하는 교회에서 18년 제하면, 12년을 농촌교회에서 단독 목회를 한 셈이다.
그 기나 긴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나에게는 좋은 은사를 주셔서, 단 한번 목회가 힘들다는 것을 경험했을 뿐, 지금까지 나 자신은 목회가 어렵다고 뼈저리게 느껴 본 적이 없다. 항상 즐겁고 감사하며 신바람이 나서 목회했다. 어떤 목회자가 말하기를 목회는 바보스러우면 오래 붙어 있고, 똑똑하면 목회를 잘못한다는 말을 했는데, 나는 그 전자에 속한다. 나는 현재 시무하는 교회에서 1,000여 명의 성도와 더불어 18년을 하루 같이 지냈다.
나는 내 주변에, 또는 동료들이 너무 힘들게 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안해도 될 일을 왜 저렇게 할까 안타까울 때가 많다. 나는 가까운 친구에게 그 사정을 듣고 힘들지 않게 하는 법을 말해 줘도 먹혀 들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 원인을 분석해 보니 겸손과 섬김이 결여되어 있고, 고집과 권위주의와 이기심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되어졌다. 지혜 있는 자는 고집과 교만을 버리고, 섬김으로 권위를 얻는다는 진리를 모른다. 사람은 지식으로 배워도 타고 난 자기 본성대로 목회하기 때문에 고쳐지기가 힘들다.
특히 농어촌 목회자들이 더 어렵게 목회를 하는 것은, 농어촌교회 장로는 한 교회 1-2명씩 시무하는데, 주인과 사장과 같은 입장에서 교회를 섬긴다. 대단히 좋은 봉사자의 자세이다. 주인 의식 없이 내 교회로 사랑하고 섬길 수 없다. 사장 의식 없이 경영할 수 없다. 고로 주인의식과 사장의식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독재자의 심리로 고체화 될 때 목회자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고, 교회 발전에 심대한 저해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장로는 목회자를 머슴으로, 또는 사장 밑에 한 과장 급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조금만 마음에 안 들거나 비위가 상하면 잘못된 교역자, 또는 삯꾼 교역자라 하여 머슴을 내어 쫓고, 과장을 해직시키는 식으로 처리하는 교회가 많다. 이런 실례가 너무 빈번하기 때문에 지난 총회에서는 임시목사 시무 기간을 1년에서 3년으로 결정하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오늘의 농어촌교회 구조요 현실인데, 농어촌교회 목회자는 어떠한가? 머슴 노릇, 과장 노릇 잘하도록 훈련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당회장으로서의 권위, 목자장으로서의 권위를 행사하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목회자의 권위는 섬김으로서 얻어지는 권위요, 종으로서 얻어지는 권위인데, 지배자로서 권위 만을 생각하는 데서 문제가 된다.
도시 교회 목회자들은 어떠한가?
부목사란 인턴 과정을 20-30년 목회한 유능한 목회자 밑에서 짧은 기간 그 숙련된 기술을 받아 들여 단독 목회의 길을 나가는데도 실패를 거듭하는데, 농어촌교회 목회자들은 대부분 그런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바로 투입되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데서 목회자는 목회자 대로, 교회는 교회 대로 많은 시련을 겪게 되는 것이다.
나는 농어촌 목회자 들에게 인턴 과정의 필요성을 느껴, 35년 간의 실패와 성공의 경험을 전달함으로 도움을 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2회째 농어촌교회 목회자를 15명씩 초청하여 3박 4일 간 순수 “인간관계” 세미나를 시행한 결과, 아래와 같은 환희의 소감서가 계속 답지하기에 그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 95년 10월 30일 세미나를 통해서 저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장로님들과의 갈등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일이었습니다. 저는 늘 장로님들의 허물과 부족한 점을 들추어 내어 그것을 못마땅하게만 생각하고, 나 자신이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채, 상한 마음과 감정으로 대해 왔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은연 중에 마음에 품은 좋지 못한 감정들이 스며 나오게 되므로, 만나면 만날수록 갈등만 커지는 비정상적인 인간 관계를 맺어 왔던 것입니다. 말없이 비난하는 나의 눈빛 속에서 장로님들은 반항하는 눈빛으로 응전해 왔고, 용서하지 않는 나의 눈빛을 나의 메세지를 거부하며 비판하는 눈빛으로 대항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웃으면서 악수하며 인사하는 나의 눈빛 속에는 장로님들을 무시하는 교만함도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입으로는 용서를 외쳤지만 용서하지 않고, 용납하지 않는 강팍하고 완고함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할 때에도 은연 중에 내리치는 설교가 배어 나오게 되었고, 장로님들은 더욱 상처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지난 세미나를 통하여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환하게 저의 모습을 깨닫게 되었고, 앞 길이 환하게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입니다. 결국 모든 문제는 저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장목사님의 진솔한 간증과 목회상의 고백을 들었을 때, 장목사님의 진정한 사랑과 섬김이 목회의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장로님들과 성도님들의 모든 죄와 허물과 부족함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관용과 사랑이 목회의 본질이요, 목회상의 모든 문제의 해결의 열쇠인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하게 깨달은 것은 끝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목회를 하는데, 앞 길이 환히 열리는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어떤 결과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저의 마음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작정을 하고 대면을 하니, 어떤 말을 들어도 초연할 수가 있고, 마음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교회의 분위기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러한 여유와 사랑의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장목사님을 위시해서 부목사님들, 그 곳의 장로님들과 권사님들, 모든 성도님들을 통한 주님의 뜨거운 사랑에 감동 되었기 때문입니다. 금번 세미나는 저에게 주님의 참된 사랑을 체험하고 사랑의 능력을 공급 받은 놀라운 세미나였습니다.
- 문의교회 김창규 목사 -
나는 위와 같이 농어촌 목회자들에게 조그마한 환희가 계속되는 한, 이 일을 사명으로 알고 계속하려고 한다.
3-3.천사장로와 깡패장로
언젠가 서울 수산교회 원로목사님이셨던 백용종 목사님의 제직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다. 나란 존재가 이 땅에서 없어지는 그 날까지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인즉 평안도에 있는 백목사님 고향에 젊은 목사 한 분이 갓 목사가 되어 부임해 오시게 된 것이다. 새로 부임해 왔으니, 교인들의 기대도 크고 어떤 목사님이실꼬 하며 호기심도 많았을 것이다. 또 목사님 자신도 거룩한 목사로, 훌륭한 목사로 보여, 사랑 받고 존경 받고자 하여 나름대로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큰 사건이 터졌다. 청년들이 교회에서 놀다가 한 청년이 볼 일을 보기 위해 화장실을 찾아 가 노크도 없이 문을 활짝 열어 제쳤다. 옛날 화장실이니 걸어 잠그는 것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 때 마침 화장실 안에는 목사님이 볼 일을 보고 있던 참인데, 볼 일만 봤으면 다른 것이야 보여도 문제가 없었을 터이나, 담배를 피우며 볼 일을 봤던 것이다.
교회는 왈칵 뒤집혔고, 담배 피는 목사를 보내자고 들끓었다. 하루는 제직회를 열어 담배 피는 목사를 보내는 결의를 하게 되었는데, 그 누가 그를 변호하며 편을 들 사람이 있었겠는가? 여론은 전부가 보내야 된다는 것이다.
잠자코 계시던 수석 장로님이 일어 서시더니, “여러분! 여러분의 의견대로 목사님을 보냅시다. 하지만 담배 피우는 목사님을 보내면 어디로 가실 것이며, 어느 교회가 받아 주겠습니까? 가족도 있으신데! 그러니까 담배를 끊을 때까지 모시다가, 끊으신 다음에 보냅시다.” 하시니, 그 수석 장로님의 신앙과 인격의 권위에 모든 제직들이 조용해 졌습니다. 그리고 장로님의 뜻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사님에게 생겼습니다. 쫓겨 나는 것은 면하여 살아 가는 문제는 일시 해결됐지만, 다음 주일부터 강단에 올라 가 설교할 것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참 희한합니다. 같은 죄를 범하면서도 그 허물이 드러나기 전에는 죄로 성립이 안되다니 말입니다. 그것도 남이 아닌, 내 양심 상에 말입니다.
목사는 그 날 밤부터 교회 강단에 엎드려 울면서 회개하고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불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 주일 강단에서 눈물, 콧물 흘리면서 회개하면서 뜨겁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같이 울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얼마 후 장로님은, “이제 담배도 끊고, 저렇게 변한 목사님이 되었으니, 보내 드리자.” 고 했더니, 교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저런 훌륭한 목사님을 어디 가서 모셔 오느냐?” 고 하며 극구 반대하여, 평생을 그대로 모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그 시간, 그 장로님은 ‘성자요 천사’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장로님에게 성자와 천사의 칭호를 드린들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와는 반대로 경기도 북쪽 X교회 S장로가 있는 교회 L목사가 부임하여 목회를 하다가, 목사님과 장로님이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 장로님은 하루는 오더니, 천상천하 유아독존적인 장로의 권위로 목사님의 살림을 한겨울 눈 덮인 담 밖으로 끌어 내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 목사님과 사모님은 한없이 울었고, 올망 졸망한 어린 자녀들을 끌어 안고 사모님은 사모된 것을, 목사님은 목사된 것을 후회도 했습니다.
S장로님은 목사님을 모셔 오면 처음에는 혀를 빼어 줄 것처럼 하다가, 1년에서 3년 안에 모든 목사들을 울려 보내는 것이 사명이었습니다. 또 보내는 목사에게는 반드시 죄패를 붙여 보내는데, 죄패는 삯꾼 목사, 게으른 목사, 편애하는 목사, 고집 센 목사, 믿음 없는 목사, 은혜 없는 목사, 가짜 목사, 쓰레기 인간... 등등의 죄패를 붙여 보냈습니다.
어찌 그 교회에 오는 목사는 전부 그런 목사였을까요?
이 S장로의 칭호는 ‘깡패장로’ 가 어울리지 않습니까? 지금은 그 S장로가 세상에 아니 계실 텐데, 어디 가서 계실까?
3-4.히스테리(Hystery) 장로와 스트레스(Stress) 목사
1.스트레스란?
“스트레스” 라는 말은 본래 물리학에서 쓴 용어라고 한다. 미는 힘, 그 자극에 인체가 대항해서 받는 반응을 “스트레스” 라고 한다. 그렇다고 모든 자극이 스트레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몸을 단련하기 위해 수영을 한다든지, 에어로빅을 한다든지, 춤을 춘다든지, 노래방에서 노래를 한다든지 하는 일은 다 자극을 받지만, 흥겨워 하는 자극은 스트레스가 안된다는 것이다. 억지로 한다든지, 남은 하는데 못해서 열등감을 받는 감정, 상한 마음, 어떤 환경이나 여건에서도 받는 고통스러움, 기분 나쁜 데서 오는 여러 가지 감정과 인체 반응이 스트레스가 된다는 것이다. 똑 같은 문제라도 반응하는데 따라서 스트레스가 되기도 하고, 엔돌핀을 생산하기도 하는 것이다. 똑 같이 땀 흘리고 고생하며 씨름을 했는데, 이기는 자는 스트레스가 안되고, 지는 자에겐 스트레스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 어느 직업 치고 스트레스 받지 않는 직업이 없겠으나, 그 중에 목회자가 받는 스트레스가 가장 많은데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권력으로 통치하는 것도 아니고, 회사 사장처럼 월급을 줘 가면서 큰 소리 치면서 하는 일도 아니고, 자신이 어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을 당해도, 어떤 섭섭한 일과 상처 나는 말을 들어도, 심한 인신 공격과 억울한 일을 당해도, 속으로 삭이고 참아야 하는 직업인이기 때문이다. 또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는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고, 그 감정을 표현하면 그 직능에 욕을 더하기 때문이다.
황성주 박사는 목사님들의 신체검사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한 가지 이상 병을 가진 분이 67%, 두 가지 이상 병을 가진 분이 25%, 세 가지 이상 가진 분이 75%” 라고 했다. 더 놀라운 것은 “간이 나쁜 목사님들이 41%” 라고 하였다.
황박사는 목사님들이 이렇게 병이 많은 이유는 교회 성도가 병이 많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교인들이 목사에게 스트레스를 많이 준다는 말” 이다. 그렇다면 그로 말미암아 건강을 해치는 원인자는 누구인가? 황박사의 말대로 하면 목사의 질병은 교인들이 주는 스트레스가 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병의 원인이라는 스트레스를 목사들은 교회 중 어디서, 누구에게 제일 많이 받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목사가 받는 스트레스의 80%는 당회를 통해 받고, 10%는 가정이고, 10%는 기타...” 라고 추론된다. 목사가 목회 이외 다른 어떤 것을 통해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는 예외는 있을 수 있으나, 별로 없다. 그리고 일반 교인을 통해 받는 경우는 아주 적은 수치라고 생각한다.
보편적으로 목사의 스트레스는 당회원 중 극소수의 장로님들을 통해 받는다. 어느 목사에게 물어도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극소수의 장로님들이 왜, 무엇 때문에 목사 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가? 어찌하여 목사를 괴롭히는가? 돈 내고 예수 믿기 때문에, 돈 받고 예수 믿는 목사를 부하로 착각하고 유세하는 것은 아닌가?
2.스트레스를 주는 이유
그것은 목사가 목사 답지 못하기 때문에 목사를 고치려 하는 데서 주는 것이고, 그리고 목사의 기대치가 예수님과 비슷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주는 스트레스이다.
그러면 장로님들이 바라는 기대치의 목사상은 어떤 목사상인가?
1)정직, 진실한 인격의 소유자로서, 설교 잘 하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목사
2)사랑과 관용과 아량이 넘치는 인격의 목사
3)어떤 충고를 받아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수용하고, 뉘우치며, 희생 봉사를 실천하는 목사
4)욕심을 버리고 청빈을 신조로 삼고, 자존심과 권위주의와 고집을 버리고, 잘못이 지적되면 즉시 사과하는 목사
5)상대의 의견을 존중하고 수용하여 중화시키는 목사
6)바다 같이 넓은 마음을 갖고 모든 사람을 수용하여 하나의 평화로운 신앙 공동체를 만드는 목사
7)편파적으로 기울지 말고, 언제나 공평한 인간관계를 갖는 목사
8)흐르는 물과 같이 어떤 사람, 어떤 경우에도 잘 적응하는 목사
9)때리고, 찢고, 도려 내는 목사가 아니라, 상처 입고 지친 성도를 싸매고 치료하며 위로하는 목사
10)어느 누구를 만나든지 예수님의 평안을 나누어 주고, 온유하고 겸손한 자세로 섬기는 목사를 원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장로님들의 바라는 것을 목사들이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노력하지만 그 기대에 만족을 채우지 못하는 것을 목사 자신도 한계를 느끼며, 하나님 앞에서 심적으로 자괴감을 가지는 것이 목사의 공통된 양심이다. 그것은 목사의 마음이고, 장로님들은 목사상의 불만을 지적하게 되는데, 그것이 목사에게 스트레스를 축적하여 병이 되게 하는 것이다.
3.당회 내의 두 가지 장로
장로는 두 가지 장로가 있다. 교회 봉사에 항상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다수의 (1)엔돌핀(Endorphin) 장로와, 매사에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극소수의 (2)히스테리(Hystery) 장로가 있다.
1) 엔돌핀 (Endorphin) 장로
①자기의 의견을 제시하나, 다수의 의견을 경청하고 따르는 민주적 장로
②말을 함부로 하지 않으며,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는 겸손한 장로
③감정적이고 인신 공격성 발언을 일체 하지 않고, 이성적인 인격과 신앙적인 발언으로 동료와 목사를 칭찬함으로 기쁘게만 하는 장로
④건설적이고 생산적이고 평화로운 당회가 되도록 항상 여러 당회원들과의 조화를 위해 신경 쓰며, 어려운 갈등이 표출되면 유머러스한 말로 분위기를 잡아 가는 비둘기 같은 장로
⑤목사의 안건이 불법이나 이기적인 것이 아니고 교회를 위한 안건이라면, 자기 마음에 흡족하지 않아도 뜻을 모아 가는 지혜의 장로
⑥목사도 똑 같은 한 인간으로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사자로 알고 존경하고 섬기는 다윗 같은 장로
⑦부족함이 많이 나타 나는 목사를 헐뜯지 않고 불완전한 인간으로 인지하고, 관용과 이해로 협조하며 목사를 키우는 장로
⑧목사가 자기도 모르는 실수를 하여 부덕을 끼치고 문제가 되어 가면 공개 석상이나 당회 시 말하지 않고, 반드시 해야 할 말을 선별하여 은밀히 만나 타이르고 위로하는 장로
⑨목사의 보호막이 되어, 많은 욕을 들으면서도 목회를 잘 하도록 보좌하는 충직한 보좌 장로
⑩봉사는 가장 많이 하고도 자기를 낮추고 침묵하며, 행세하지 않는 장로
이상과 같은 절대 다수의 장로는 영적 엔돌핀을 많이 생산하여 목사의 목회에 활력을 공급하며 교회를 평화롭고, 은혜롭고, 부흥하는 하나님께 영광된 교회로 만들어 간다.
2)히스테리(Hystery) 장로
①민주적 방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무엇이든지 교회의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려고 하는 독재형 장로
②자기가 최고 지성인이고 똑똑하다고 자부하며, 헌금은 하지 않고, 타 회원을 무시하고, 협조 잘 하는 장로를 합바지로, 아부형으로 지탄하며 무시하는 꼴두기형 장로
③자기 의견이 가장 신앙적이고 가장 훌륭하며 하나님께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유아독존적이고 독단론적 신앙 교만한 장로
④한 번 뒤틀리면 하나님이고, 신앙이고, 교회고 다 망각하고, 비인격적 인신공격적 발언과 행동을 거침없이 하며, 자기 감정을 있는 대로 발산하는 망나니 히스테리 장로
⑤목사를 독점물로 만들려다 안되면 자기를 무시한다고 하며 배척 운동을 하고, 동료들에게 선동하며 오해를 잘 하며 변덕이 심한 칠면조형 열등병(病) 장로
⑥교회 봉사나 사회생활이나 가족관리에나... 자기 만은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자로 착각하고, 목사와 그 가족을 헐뜯으며, 헐뜯는 말을 안하면 입이 아파 못 견디는 만용 장로
⑦교양과 상식이 결여된 무식한 용기에 혈기를 잘 부리며, 상대를 떠받지 않고는 못 견디는 염소형 장로
⑧남의 눈의 티는 보고 자기 눈의 대들보는 못 보는 자로서, 주변에서 주워 들은 별 것 아닌 비본질적인 것들로 목사의 심장에 바늘을 찌르듯 아픔을 주는 바리새적 장로
⑨하나님을 무서워 할 줄 모르며, 봉사는 하지 않고 항상 문제만 구상하여 파벌을 만들고 비비꼬며, 당회가 소집되기만 하면 당회실을 타구로 알고 각출하는 주제 파악 부지(不知)의 장로
⑩근본적으로 인간성의 겸손과 장로의 자질이 깃털 만큼도 없는 잘못된 악한 기질의 악질적인 장로
이상과 같은 장로는 당회가 모이기만 하면 동료 들에게 반목 질시하며, 분파를 조장하며, 비인격적 언행을 서슴없이 하여, 목사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장로이다.
4.본질적인 일과 비본질적인 일
목사는 교회 행정적 당회의 본질적인 문제로 의논하다가 잘 되지 않아도 그것으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지는 않는다. 지금 안되면 다음에 하고, 정 안되면 안하면 되니까!
목사가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유형은 비본질적인 사사로운 히스테리 장로들의 지탄 때문이다. 사모의 치마가 길다느니 짧다느니, 가슴이 너무 보이는 옷을 입었다느니, 말하지 않아도 될 목사의 사생활을 꼬집는다든지, 대수롭지 않은 것을 꼬투리 잡아 말을 많이 하는 히스테리 장로들 때문이다.
1)함부로 던진 히스테리 장로의 말
어느 목사는 부담없이 함부로 던지는 히스테리 장로들의 말에 스트레스를 받아 신경 쇠약증이 걸려 있으며, 당회 전날 밤은 다음 날 당회 시 기분 나쁜 소리를 들을 것을 생각하면 불안해서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했다.
어느 목사는 너무 장시간 당회 시간을 가짐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주기 때문에, 오후예배 한 시간 전에 당회를 시작하여 예배 시간이 되면 끝낸다는 것이다.
이런 부담과 스트레스를 모든 목사들이 받고 있으며, 이런 것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목사들의 공통된 심리이다. 비본질적인 것으로 목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당회원 본질적 임무를 벗어난 처신이다.
2)히스테리를 사명으로 아는 장로
히스테리 장로들은 자기의 사명을 위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한다.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분명 축복 받을 처신이 아니다. 가룟 유다를 생각한다면 분명 그것이 그의 사명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그 가룟 유다를 가르쳐, 탄식하시면서도 그를 죽으실 때까지 데리고 다니셨다.
오늘 내가 강하게 존재한다고 축복으로 생각하면 착각이다. 그리고 목사들은 이런 히스테리 장로가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정상임을 알면 된다. 과거, 현재, 미래, 저 먼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임이 틀림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게으르고 나태한 목사를 채찍하기 위해 보내셨음을 알고 감사하자. 스테레스를 주는 장로나 스트레스를 받는 목사나 하나님 앞에 다 부족한 사람 들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 봐야 안다.
5.히스테리(Hystery) 장로와 스트레스(Stress) 목사에게 고함
1)히스테리(Hystery) 장로들에게
히스테리 장로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권하고 싶습니다. 엔돌핀 장로님들의 처신을 바보 같다느니, 기회주의자라느니, 줏대가 없다느니, 맹종자라느니, 무식하다느니, 합바지라느니... 비판, 조롱, 적대하지 말고, 엔돌핀 장로님들의 교회 섬김과 처신법을 배우며 따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분명 그 분들이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 부흥은 엔돌핀 장로님들의 협력과 충성심 때문에 일어 나는 결과입니다.
히스테리 장로가 활보하는 교회 치고 부흥하는 교회, 평안한 교회, 사랑의 교회, 눈을 비비고 봐도 이 땅에는 없습니다. 히스테리 장로가 있는 교회는 반드시 교회가 쇠퇴하고, 갈등과 불화와 분열과 시시비비와 냉기류가 흐릅니다. 이런 교회 이면에는 반드시 장티푸스균을 가진 히스테리 장로가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상과 같은 결과를 보면 아무리 옳은 것을 위해 한다고 주장을 해도 잘못된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포도나무 잎사귀를 중요시하지 않으시고 열매를 중시하셨습니다.
2)스트레스(Stress) 목사들에게 고함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시는 목사님들을 위하여 다음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자기의 종을 연단하시고 훈련시키기 위하여 히스테리 장로를 세워 놓았음을 유념하면서, 다음 6가지를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①히스테리 장로를 그대로 보고 수용 하십시오. 그는 당신의 설교와 특별기도(산기도, 금식기도)를 통해 절대로 변화될 분이 아닙니다.
②히스테리 장로들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범죄하는 일이 아니면 수용하십시오. 그의 요구를 들어 주면 히스테리 정신 질환자에게 자극을 덜 주게 됩니다.
③히스테리 장로를 인정과 칭찬을 많이 해 주고, 금반지를 만들어 끼워 주십시오. 그리하면 약간의 치료가 가능합니다.
④히스테리 장로가 싫으면, 그 교회를 떠나십시오. 히스테리 장로를 포용할 능력이 없이 그 교회에 있으면, 그 병이 옮아서 당신도 히스테리 목사가 됩니다.
⑤히스테리 장로를 그 가족을 이용하여 간호케 하든지, 아니면 엔돌핀 장로님들을 동원하여 보호막을 치십시오. 그럴 능력이 없으면 그 곳에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⑥히스테리 장로를 천국에 갈 때까지 잘 모시고 가십시오. 예수님도 가룟 유다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으실 때까지 잘 데리고 갔습니다. 당신이 히스테리 장로를 고치려고 하면 당신은 예수님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교만한 범죄자가 됩니다. 그런 고로 겸손하십시오. 주님은 겸손한 자를 때가 되면 높이십니다.
히스테리(Hystery) 장로는 당신을 병들게 하지만, 긍정적으로 수용하면 당신을 성장 시켜 훌륭한 목사로 큰 목사로 남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Hystery 장로는 빛나는 황금을 만드는 용광로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서 태어 났으며, 당신을 최고의 보화로 만드는 천사입니다.
3-5.목사의 인격보다 더 존경스러운 인격
나는 S교회 위임투표 공동의회를 인도하러 갔다. 일반적인 진행 방법으로 진행해 가다가, 투표하는 순서에 이르러 내 생각엔 모두가 동의하는 마음의 표현으로 할 수 있다면 그 목사의 사기를 더 도와 주는 것이 되겠고, 시간도 단축하여 좋다고 생각해서 나는 다음과 같이 회원들에게 물어 봤다.
“기왕에 위임 청원을 했고, 위임식을 위하여 하는 절차에 불과하니, 시간도 절약하고, 더 즐겁게 하기 위하여 거수로 가결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했더니, 뒤 구석 한 곳에서 중년 남자회원 한 분이 “회장!” 하면서 손을 번쩍 들고 일어 서더니, “법이요”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 “차라리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면서 법대로 투표를 진행했는데, 결과는 절대 다수의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2/3선만 통과하면 되는데 3표 만이 부표가 나왔으니, 평양의 인민대회당 결과보다는 못하지만, 자유주의 제도의 자유 비밀투표의 결과로서는 대단한 지지였다.
나는 사회자로서 만족해 하면서 회의를 끝내고 당회실로 갔다. 그 목사는 “수고했다” 는 인사 한 마디도 없이 경색된 얼굴로 “회의를 잘못 진행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 는 것이다. 곧 이어 당회실에는 장로님 다섯 분이 들어 오셨다. 장로님들이 수고하셨다고 인사를 하는데, 그 목사는 연이어 입을 열었다. 아주 언짢은 톤을 넣은 목소리와 굳은 얼굴 표정을 하고 장로님들에게 하는 말이 “나는 이럴 줄을 몰랐습니다. 실망했습니다.” 하고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어찌 목사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3표의 반대는 만장일치나 같은데! 이어서 나는 또 놀랐다. 아버지뻘 되시는 장로님들이 모두가 침묵하고 계시는데, 그 중 그 교회에서 가장 존경 받고 실권 있는, 사회적으로 그의 직책을 말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 H 장로님이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여셨다. “목사님! 널리 관용 하십시오. 우리 장로들이 다 부족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며 용서를 빌며 관용을 요청하며, 그 목사를 위로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목사와 그 장로님 들을 바라 보는데, 마음 속으로 목사 인격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란 소리가 들리고 (“메네”는 끝나게 됐다, “데겔”은 중량 미달, “우바르신” 은 남에게 넘어 가게 됐다.), 그 교회와 그 목사의 목회 미래가 환히 보이는 것 같았다. “목사의 인격이 이 정도라니! 민주국가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신대원을 졸업하고, 인턴 과정을 거쳐 2년 후, 목사가 된 인격이 이 정도라니!” 그를 보고 있던 내 마음의 저울추는 정량 미달로 땅으로 떨어졌다.
반대로 그 장로님의 인격의 중량은 하늘 높이 올랐고, 정말 존경스러웠고, 고개가 숙여졌다. “우리들이 다 부족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장로님의 얼굴이 거룩하게 보였다. 그 후 그 분의 인격의 높고 숭고함이 나의 마음 깊은 곳에 각인되었다.
그 후 그 교회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목사를 10여 년이 넘도록 모셨다. 정말 훌륭한 장로님 들이셨다. 그 교인들은 그 장로님들을 따랐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장로라도 이런 인격의 목사를 존경하며 10년이나 모실 수는 없다고!
한국교회가 이 정도로 현상을 유지하며, 아직도 발전을 하고 있는 것은 이런 절대 다수 인격의 당회원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많다 보면 경중의 차이는 많을 것이다. 하지만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목사가 많으면 그 교회는 언제나 시끄러울 것이고, 침체와 답보와 후퇴를 거듭할 것이다. 침체와 답보와 후퇴를 거듭하며 소란한 교회의 이면에는 반드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당회원이 힘을 발하고 있다.
혹시 그가 나 자신이 아닌가?
목사나 장로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인격자들은 일찌감치 스스로 당회원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최상의 충성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런 인격자일수록 그 자리에 애착이 더 강하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인격자들이 안주하고 있는 한 교회 발전에 크게 방해가 되고, 고통은 더 할 것이다. 나는 한국교회 미래를 위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 싶다.
이런 당회원들을 걸러 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데, 당회원 임기는 4년으로 하고, 매 4년마다 신임투표를 실시하는 것이다. 신임투표는 1/2로 하고, 1/2 미달이면 그 시로 무임토록 하면 교회 발전에 도움이 되며, 교회는 항상 평안할 것이다. 1/2 지지를 받지 못하는 자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은 불법이요,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기준은 2/3선이니까. 죄악된 인격을 그 자리에 두는 것 자체가 죄악이 아닐까? 이런 인격자에게 기득권을 인정하여 그 자리에 그대로 두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교회의 책임이며, 그런 미달자를 그대로 두는 것은 그 교회 미래와 한국교회 미래에 먹구름을 더하는 격이 될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 낡고 잘못된 제도의 개혁 없이는 발전과 성공은 있을 수 없으며, 살아 남기 조차 어려울 것이다. 한국교회 부흥과 발전을 위하여 충성 되고 존경 받는 당회원들을 신임투표를 통하여 더 격려하고 찬사를 보내어 사기를 돕고,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당회원들은 도태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한국교회 모든 당회원들은 미래교회 창조에 주역으로 제도 개혁에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필자가 시무하는 교회는 필자가 부임한지 20년이 지났는데도 한 번도 당회원 들끼리 다툰 일이 없었다. 모든 의논을 민주적으로 했으며, 소수는 다수의 의견에 기쁨으로 승복하는 원칙의 분위기에서 당회원 들끼리 다정한 친구, 또는 형제처럼 20년을 하루 같이 지내 왔다.
그러나 앞으로 교회가 점점 성장하고 당회원들의 수가 늘어 감에 따라, 요나 같은 괴짜가 승선함으로 교회 풍랑의 요인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런 자들을 사고 미연에 걸러 내기 위하여 95년도에 교회 자체 내규를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제정하여, 2,001년부터 시행하기로 당회는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교회 앞에 공고했으며, 현 당회원들이 맨 먼저 시행하여 후배 들에게 본을 보이기로 하고, 이 내규의 절대 권위를 위해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그 시로 그 직에서 해임토록 했다.
내일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위하여 더 존경스러운 인격의 당회원을 더 많이 배출하자. 그것이 주님께서 오늘 한국교회에 요구하시는 음성으로 내 귓전에 절실하게 들린다.
3-6.21세기가 요구하는 목사형(교회를 섬기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와 정신)
21세기는 다변화 세계요, 열린 사회, 또는 투명사회요, 지금보다 더 민주적 사회요, 경제 풍요의 사회가 됩니다. 그런 사회인이 모이는 교회에 오늘 신학생 여러분이 대비하지 못하면, 목회자는 그 사회에서는 훌륭한 목회자로 살아 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고로 21세기가 요구하는 목사상은 어떤 상인가를 생각하며, 25분 동안 웃어 봅시다.
21세기가 요구하는 목사형 8가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1.카멜레온형↔황소형(미련하고 우직하게 힘으로만 밀어 붙이며 일하는 형)
카멜레온은 민감하게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카멜레온의 특성을 지녔다고 했습니다. 20세기 이전에는 황소형이 성공했으나, 21세기 미래에는 안됩니다.
빌4:11-12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고전9:20 유대인에게는 유대인 같이, 이방인에게는 이방인 같이, 약자에게는 약자 같이 되고,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몇 몇 사람들을 얻고자 함이라.
이상의 말씀은 바울 자신이 카멜레온 형임을 자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2.돌고래형↔상어형(사납고 힘세고 약육강식하고 홀로 다님(독재형). 보기가 흉칙하고 협오감이 생깁니다.)
돌고래는 보기가 좋아서, 보는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돌고래를 보고 두려워 하거나 협오감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친구들과 공동생활을 잘 하고, 팀웍 형성을 잘 하고, 머리가 좋아서 훈련 시키면 잘 됩니다. 돌고래는 보는 모든 이를 기쁘게 합니다.
고전10:31-33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많은 사람을 유익케 하라.
21세기 목사는 돌고래처럼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곽선희 목사는 돌고래 형입니다.)
3.고객 만족형(대인관계 서비스형)
앞으로는 고객 만족을 주지 못하는 회사는 전부 파산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①백화점에는 구매자가 고객, ②병원에는 환자가 고객, ③요정에는 부자가 고객입니다. 이들은 고객을 만족하게 하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교회 고객은 누구입니까?
교회 고객은 교인들이 고객인데, 특히 장로님들은 vip 고객입니다.
21세기에는 더 더욱 교회 vip 장로님 들에게 만족형이 아닌 목사는 살아 남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 vip 고객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가?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섬김입니다. 목사의 주가와 섬김은 정비례 합니다. 21세기의 목사는 고객 만족형이라야 합니다. 목회실제세미나에서 내가 장로를 섬기고, 기쁘게 해 주고, 마음을 맞추어 주어야 교회가 평안하고 잘될 수 있다고 했더니, 참석한 목사 한 분이 손을 번쩍 들고 말하기를, “우리가 창녀입니까? 장로 비위나 맞추게...” 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는 복음의 창녀입니다.”
4.충노형↔상전형(과거는 상전형이 성공했으나, 지금은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당회장으로서 말하노니, 주의 제자로서 말하노니...” 하지 않고 서신 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상전을 위해 목숨을 버렸으니, 충노입니다. 장로회신학대학 뒷동산에 세워져 있는 유일한 돌비는 무엇을 말합니까? 주기철 목사님은 충노였다는 기념물입니다. 나는 무궁교회에 부임하여 전임 목사들이 악마라고 한 장로님께 종 노릇으로 그의 신발 돌려 주는 일을 했더니 그가 죽을 때까지 나의 신발을 돌려 주었고, 죽을 때까지 내 말에 절대 순종하는 종 노릇 하다가 먼저 소천 하셨습니다.
5.청빈형↔그랜저형(나도 목사지만, 목사가 그랜저 타고 다니는 것 보면 거부감이 생깁니다. 하물며 교인들이야?)
20세기 말 세계를 떠들썩 하게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가 테레사 수녀입니다. 몇년 전 한국을 떠들썩하게 한 죽음이 있었는데, 성철 스님이었습니다. 그들은 청빈한 종교 지도자의 모델 케이스였습니다.
아무리 경제 부국시대를 맞이해도 성직자의 거룩은 청빈과 정비례 합니다. 21세기는 청빈한 목사를 요구합니다. 바울은 시간을 뛰어 넘은 청빈자였습니다. 바울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렸다.” 고 했습니다. 바울은 청빈형의 모델입니다. 그런 고로 나와 여러분은 바울을 존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6.T형(Truly type)형(진실형)↔영등포 구치소 J와 서울구치소 N씨(전직 대통령)
여러분 21세기는 열린 사회요, 또는 투명 사회요, 보다 발전한 민주 사회가 됩니다. 과거 닫힌 사회는 상어형이 성공 했습니다.(대표적으로 흑석동 국군묘지에 B씨 하고, 영등포구치소 J씨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상어형은 안됩니다.
21세기는 열린 사회, 투명 사회요, 민주 사회인 고로, 21세기 지도자는 진실해야 살아 남습니다. 진실해야 신뢰성이 생깁니다. 신뢰성이 있어야 사람들이 따릅니다. 신뢰성 없는 목사는 설 곳이 없습니다. 투명 사회는 T형(진실형)이 아니면 살아 남지 못합니다.
컨닝하는 신학생은
①삯꾼 목사는 될지라도, 성공적인 목사는 될 수 없습니다.
②사기꾼 목사는 될지라도, 선한 목사는 될 수 없습니다.
③거지 같은 삯꾼 목사는 될지언정, 존경 받는 목사는 못됩니다.
④교회에 오물을 뿌리는 목사는 될지라도, 인간 구원의 목사는 못됩니다.
충성된 집사가 동생 교수 채용으로 필요한 수세 증명서를 요청 -거절- 거북했습니다. 21세기는 신뢰성과 도덕성이 있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7.골드 칼라형↔무광채형
황금은 다른 모든 물체가 갖지 못한 불변과 광채를 갖고 있습니다. 21세기에는 불변의 신앙 고백과 남이 갖지 않은 독특한 은사, 즉 달란트를 가진 목사라야 합니다. 배운 신앙과 지식 만으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소명 의식과 사명감이 투철하여 희생 봉사적인 자 만이 성공적인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8.슈퍼 리드형↔인간관계 무능형
자기를 잘 다스리고 이끌며,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을 종횡무진 일을 잘 하도록 도와 주며, 많은 능률을 내게 하고, 상호 조화를 잘 이루어 내는 사람입니다. “장기 목회는 설교보다 정치가 더 중요합니다. 설교 잘 하는 자는 1년 목사라면, 정치 잘 하는 자는 10년 목사가 됩니다. 슈퍼 리드형은 자기를 잘 다스리고, 교회 정치, 즉 교통 정리를 잘 하고, 모두가 신바람 나게 하는 목사입니다.
21세기는 이상의 7가지 형 목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상 7가지 형을 발휘할 수 있는 목사 만이 ①신바람 나는 목회, ②영광스러운 목회, ③존경 받는 목회, ④권위주의 목회, ⑤예수님 같이 대접 받는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1).“나와 같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라.”
신학생 여러분! 고객 만족을 주는 복음의 창녀가 되십시오. 교회 고객을 만족케 못하는 목사는 안됩니다.
(2).“인자가 온 것은 섬기러 왔다.”
강단에서는 하나님의 권위로 전하고, 내려 오면 성도를 섬기는 종이 되십시오.
(3).“네가 내게 발씻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섬기는 자 만이 주의 제자의 신분을 갖게 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러 왔노라.”
3-7.교인의 얼굴은 목사 얼굴의 반사경
1. 교인에게 좋은 반응을 원하면,
1)내가 먼저 변하면, 상대도 변한다.
2)내가 상대를 사랑하면, 상대도 나를 사랑한다.
3)내가 상대를 칭찬하면, 상대도 나를 칭찬한다.
4)내가 상대를 섬기면, 상대도 나를 섬긴다.
5)내가 욕심을 버리면, 상대는 나를 존경한다.
6)내가 상대를 존경하면, 상대는 나를 하나님의 전권대사로 섬긴다.
7)내가 상대를 관용하면, 상대도 나를 관용한다.
8)내가 부드러우면, 상대도 부드러워진다.
9)내가 상대의 신발을 돌려 주면, 상대도 돌려 준다.
10)내가 상대에게 주면, 상대는 나에게 더 많은 것을 준다,
2. 교인의 나쁜 반응의 원인은?
1)내가 변하지 않으면, 상대도 불변한다.
2)내가 고집을 부리면, 상대도 고집을 부린다.
3)내가 상대를 미워하면, 상대도 나를 미워한다.
4)내가 상대를 밟으면, 상대는 나를 부셔 버리려 한다.
5)내가 상대를 험담하면, 상대는 나를 중상 모략한다.
6)내가 상대를 멀리하면, 상대도 나를 멀리한다.
7)내가 군림하면, 상대는 나를 증오한다.
8)내가 겸손하면, 상대도 겸손하여진다.
9)내가 혈기 내면, 상대도 혈기 낸다.
10)내가 상대가 없어졌으면 생각만 해도, 상대는 몇 배나 나를 쫓아 낼 궁리한다.
11)내가 근위대를 만들면, 상대는 특수부대를 만들어 쿠데타를 준비한다.
3. 교인의 모습은 내 얼굴의 반사경
1)그 교회 교인들의 모습은, 곧 그 교회 목사 얼굴의 반사경
2)그 교회 교인들이 평안하고 즐겁게 교회를 섬기면, 그것이 곧 목사 목회의 반사경
3)그 교회 교인들이 어두운 얼굴을 하고 교회 다니면, 그 얼글이 목사 얼굴의 반사경
4)그 교회 교인들이 건방지고 무례하면, 그 모습이 목사 모습의 반사경
5)그 교회 교인들이 양 같이 양순하면, 그 얼굴이 목사 얼굴의 반사경이다.
4. 예수님의 섬김의 설교와 제자의 도
1).마20:26-28.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라.
2).눅20;23.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3).고전 10:31-33.먹든지 마시든지 다 -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 - 나와 같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많은 사람에게 유익하게 하라.
4).요12:24.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 밀일이 썩지 않으니,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
5. 바울 사도가 스스로 종이 되는 이유
바울은 서신마다 서두에는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썼다.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의 “종”, “종”, “종” 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하는 그것이 종이 되는 바울의 “목적”, “목적”, “목적” 삶의 목적이었다.
루터는 말했다. 나는 스스로 하나님의 머슴이 되었노라.
종은 자기가 없다. 종이 되지 않으면, 목회를 성공할 수 없다.
상전이면서 성공하는 목사는 비범한 초능력을 가진 카리스마 목사이다. 카리스마 은사가 없는 목사가 그 흉내 내면 100전 100패 한다.
자기가 있다면 종은 아니다. 그래도 그 종은 실존한다. 그 실존은 종으로서 실존하는 예수 상전을 모신 자기 실존이다. 그 실존이 참된 목사의 실존이다.
후배 목사님 여러분!
제가 하는 말이 목회에 절대 진리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목회 하시는데, 선배의 경험을 하나의 참고로 하시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목사가 바울의 말씀과 같이 날마다 죽으면서 이상의 모습을 끝까지 비춰 주면, 상식 수준 이상의 성도들은 목사를 닮아 오고, 절대 다수의 성도들은 예외를 제외하고 모두 목사를 존경하며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절대 다수란 성도의 절대 다수와 장로의 절대 다수가 비례합니다. 교인 1,000명에 장로 5명이면, 한 명의 장로가 200명의 대표성을 갖고 있습니다. 한 장로가 반대하면 200명이 반대하고, 두 장로가 반대하면 400명이 반대하고, 3명이 반대하면 그 교회서 목회하기 어렵습니다. 고로 우리 장로교회는 문자 그대로 장로 교회입니다. 당회 인간관계가 무너지면 절대 다수의 교인의 지지는 무너집니다. 교회가 분열되는 것은 당회 인간 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로 젊은 후배 목사 여러분!
목회에 있어서 당회원과의 인간 관계를 일보다 최우선 하여야 함을 명심 하십시오. 교인이라는 가지를 붙들고 춤추는 자는 아마추어 목회자의 행태입니다. 상식 이하의 예외인은 도토리가 됩니다. 극소수의 도토리는 그를 따르는 도토리들을 데리고 외진 곳으로 가면 됩니다. 어느 공동체나 가롯 유다 도토리가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사는 사회입니다. 많은 양들 무리 속에 염소 몇 마리 섞여 풀을 뜯는 것은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그것은 큰 문제 되지 않습니다. 목사들에겐 골치 아픈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목사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하여 세워 놓은 하나님의 일꾼들이요 보배입니다. 야당이 없는 공동 집단은 북한 김정일 당 뿐인데, 어떻게 보십니까? 야당이 있어야 하고, 야당과 조화를 잘 이루어 가는 것이 민주의 원칙입니다. 교회는 민주주의 공동체입니다. 목회를 잘하는 목사는 그것을 잘하는 목사입니다.
우리 교단에 신흥 교회인 N목사는 동문회에 와서 강의를 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어떤 장로는 발로 차버리고 싶은 마음이 날 때가 있다고 하였는데, 사회하던 증경 총회장이 그 말 들으니 속이 시원하고, 내 마음하고 똑 같다고 하였습니다. 목회는 그런 것인데, 그 분들은 그러면서 잘 리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식 이하의 예외의 뿔난 사람들은 가룟 유다의 심성과 같이 변치 않고 못된 짓만 계속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혹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목사의 본질을 상실하고, 이성을 잃고 상식 이하의 목사가 되어 그를 대항하면, 목사 똑 같은 가룟 유다가 됩니다. 예수님도 상식 이하의 가롯 유다를 고치지 못하시고 잘라 내지 않으시고 대항하지 않으시고 탄식하시며, 그대로 끝까지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목회 철학이요, 공동체를 리더해 가는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보다 위대합니까? 그런데 왜 우리가 장로를 고치려고 합니까? 예수님 보다 더 위대합니까?
어리석은 오버한 사고입니다.
우리 목사 중에도 상식 이하의 목사들도 있습니다. 상식 이하의 목사들은 가룟 유다를 고치겠다고 가룟 유다가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큰 착각입니다. 그 결과는 아프리카 초원에 누우가 물을 먹으러 습지 진흙탕에 들어 갔다가 점점 빠져 들어 가는 모습의 형국이 됩니다.
교인들의 얼굴은 내 얼굴의 반사경! 교인들의 얼굴은 내 얼굴의 반사경! 이것은 진리입니다. 교인을 원망하면 엄격한 의미에서 곧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것으로 알면 지혜로운 것입니다. 돈 내고 예수 믿는 애꿎은 교인들을, 돈 받고 예수 믿는 목사가 원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꾸어 생각하여 보세요. 욕심을 버리세요. 허영을 버리세요. 과시욕을 버리세요. 오늘날 과시욕이 목사의 주가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본질이 아니거든 전부를 설득해서 안되면, 전부를 양보 하십시오. 비본질은 양보하여도 교회가 잘못되지 않습니다. 비본질 가지고 고집 부리는 목사는 항상 시끄럽습니다. 비본질 가지고 싸우는 목사는 잘못된 목회를 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새로운 아파트 지역에 옮기는 문제로 교인 반반이 갈라져 갈등하다가 결국 목사가 밀어 부치니, 옮기기로 결의는 되었습니다. 교회를 이전 건축하자 오래도록 그 교회를 섬기든 많은 교인들이 상처를 안고 1/3이 떠났습니다. 그 곳에 가서 많은 사람을 모은다고 과연 그것이 옳은 결단입니까?
그 곳에는 그 교회 아니라도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비본질을 가지고 교인 1/3이 떠나게 하는 것은 필자는 잘못된 목사의 고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많은 1/3의 교인을 떠나게 하면서 옮기는 것은 목사의 이상 실현을 위한 것이지, 하나님을 위한 결단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교회 아니면 어떻습니까? 조그마한 교회가 많으면 더 좋지 않습니까?
비본질을 가지고 많은 교인들에게 상처와 실망을 주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다수가 찬성하고 극소수가 반대하는데 옮기는 것은 정상이지요.
비본질은 상대의 주장에 양보하면, 조금 속도가 느릴 뿐입니다. 빨리 가려다 전복되는 것보다 제한 속도가 훨씬 유익합니다. 교회 짓고 떠나는 것은 대체로 비본질을 갖고 고집 부리고 갈등하던 결과입니다. 교회를 조금 적게 지으면 어떻고, 구조가 내 뜻대로 안되면 어떠합니까?
목사들의 갈등과 시험 드는 것을 보면 99.9999%가 전부 비본질을 가지고 싸우고 있습니다. 교회를 ㄱ자로 지으면 어떻습니까? 리모델링을 아니하면 어떻습니까? 장로가 목사 위에 군림하면 어떻습니까? 교회 차를 안 사면 어떻습니까? 사례문제, 의견 차이... 이 전부는 비본질입니다. 비본질을 갖고 싸우면 본질을 훼손하는 비정상 목회가 됩니다.
필자가 목회를 끝내고 되돌아 보니, 더 분명하게 그렇습니다. 필자도 한 때는 비본질 가지고 속상해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후배 목사 여러분!
고급 차 타고 과시하는 목사가 되려 하지 말고, 가짜 박사 사다 놓고 허영심 내세우는 목사가 되지 말고, 교회를 평안으로 이끌고 순리로 부흥 성장시키며 존경 받는 목사가 되어, 한국교회를 발전 시키는 후배 목사님들이 되시길 두 손 모아 기도하겠습니다.
3-8.서울 무궁교회 당회 내규
제 1조.장로의 자격(교회정치 6장 35조)
장로의 자격은 상당한 식견과 통솔의 능력이 있고, 무흠 입교인으로서 7년을 경과하고, 30세 이상된 자로서, 딤전 3:1-7절에 해당한 자라야 한다. 또한 본 교회 5년 이상 출석한 자로서, 가족이 합심되어야 한다.(78.5.7일, 83.1.3일)
3.선거 방법(교회정치 제6장 40조)
장로, 집사, 권사의 선택은 당회의 결의로 공동의회에서 투표수의 2/3 이상의 가표로 선출한다. 1차 투표에서 당선권에 들어 가지 못한 자는 순위별로 배수 공천하여, 2차 투표에서 선출함으로 끝난다.(83.11.6일)
제 30조.항존직 피선자격과 신임투표(1996. 9. 15)
본 당회는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내일의 영광된 교회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항존직 피선자격과 신임투표 내규를 결의하다.
1)장로 피선권은 장립집사와 권사에 국한하고, 타 교회에서 이명 온 장로는 본 교회 등록 후 만 5년 이상 서리집사 자격으로 임무 이행을 한 자라야 한다.
2)항존직 신임투표(장로, 집사, 권사)
장로, 집사, 권사는 임직 후 자기 비판의 제도적 장치가 없고 신임을 물어 보는 기회가 없음으로, 개중에는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하고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음으로, 우리 당회는 오늘과 같이 평화와 사랑으로 하나 되어 무한히 발전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데서, 다음과 같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2001년부터 실시키로 한다.
3).투표방법
①항존직은(장로,집사,권사) 매 4년마다 교회 창립주일 1주 전 공고하고 창립주일(10월 둘째주일) 공동의회를 개최하여 투표로 신임을 묻기로 한다.
②투표인원 과반수의(1/2)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그 날로 자동 해직된다.
③해직된 항존직(장로,집사,권사)은 4년이 지난 후 선거 때에 피선권을 부여하고 피선되면 재시무하게 되고, 다시 4년후 두 번째 기회까지 피선이 되지 아니하면 영원히 피선권을 정지한다.
④새로 피선된 항존직(장로,집사,권사)은 4년이 경과된 다음, 신임을 물을 수 있다.
⑤이 내규는 오직 교회 평화와 발전을 위하여 재정한 것이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며 불복하는 자는 그 시로 자동 해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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