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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12년(1363) 계묘년 윤 3월 (출처 : 高麗史)>
초하루 신미일. 5경(更)에 김용(金鏞)이 몰래 패거리 50여명을 시켜 왕이 묵고 있던 행궁을 침범하게 했다. 숙위하던 관리와 군사가 모두 도망쳐 버리자 반적들은 환관 안도치[安都赤] 및 첨의평리(僉議評理) 왕재(王梓),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김한룡(金漢龍)을 살해한 후, 우정승(右政丞) 홍언박(洪彦博) 집으로 찾아가 그를 살해했다.
밀직사(密直使) 최영(崔瑩), 부사(副使) 우제(禹磾),7) 지도첨의(知都僉議) 안우경(安遇慶), 상호군(上護軍) 김장수(金長壽)등이 개경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행궁으로 와 반적들을 공격해 진압했으나 이 싸움에서 김장수가 전사했다.
반란이 평정되자 왕이 강득룡의 집에 거처하면서 백관들로 하여금 호위하고 순찰을 돌게 했다. 또한 이인복(李仁復), 정찬(丁贊), 우제, 홍선복(洪善福)을 시켜 순군(巡軍)에서 반적들을 국문(鞠問)하게 했다.임오일.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이순(李珣)을 양광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임명해 장암(長巖 :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장암리)으로 가서 적을 방비하게 했다.
을유일. 왕이 흥왕사(興王寺)에서의 반란을 진압한 사람들의 공적을 다음과 같이 녹훈(錄勳)했다. 삼사우사(三司右使) 이성서(李成瑞), 지도첨의(知都僉議) 안우경(安遇慶), 밀직사(密直使) 최영(崔瑩), 밀직부사(密直副使) 우제(禹磾)·한휘(韓暉),8) 개성윤(開城尹) 양백익(梁伯益),9) 전리판서(典理判書) 오인택(吳仁澤), 판도판서(版圖判書) 김한진(金漢眞), 문예부사윤(文睿府司尹) 김서(金湑), 우부대언(右副代言) 유계조(柳繼祖), 상호군(上護軍) 양백연(楊伯淵)·김유(金庾), 판소부시사(判小府寺事) 김지서(金之瑞),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 이춘영(李春英), 사재령(司宰令) 이분(李芬), 호군(護軍) 이용길(李龍吉)을 일등공신으로 삼았다. 판도판서(版圖判書) 최용우(崔龍雨), 전공판서(典工判書) 이양(李陽), 대호군(大護軍) 권희(權禧)10)·이득림(李得霖),11) 전객령(典客令) 전보(全甫), 판도총랑(版圖摠郞) 문천기(文天起)·박양길(朴良吉), 친종호군(親從護軍) 이송(李松), 삼사부사(三司副使) 공테무르[孔帖木兒],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조신좌(趙臣佐), 호군(護軍) 최담(崔潭),12) 중랑장(中郞將) 김안수(金安壽)를 이등공신으로 삼았다.
또한 왕을 모시고 피난한 공적을 녹훈하여, 서령군(瑞寧君) 유숙(柳淑),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성사달(成士達), 좌대언(左代言) 김달상(金達祥), 응양군(鷹揚軍) 상호군(上護軍) 박봉(朴棒), 환관인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김현(金玄), 상호군(上護軍) 이강달(李剛達)을 일등공신으로, 예의총랑(禮儀摠郞) 유실(柳實), 사재부령(司宰副令) 최충보(崔忠輔), 전교시승(典校寺丞) 김문현(金文鉉), 중낭장(中郞將) 김만(金萬)을 이등공신으로 삼았다.
더불어 병력의 집결을 건의해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좌정승(左政丞) 유탁(柳濯)을 일등공신으로 삼았다.
또한 신축년 왕을 호종한 공적을 다음과 같이 녹훈(錄勳)했다.
우정승(右政丞) 홍언박(洪彦博), 정승(政丞)으로 추증된 정세운(鄭世雲),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암(李嵓), 판삼사사(判三司事) 김일봉(金逸逢),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 홍원철(洪元哲), 찬성사상의(贊成事商議) 경천흥(慶千興)·황상(黃裳), 서녕군(瑞寧君) 유숙(柳淑), 봉화부원군(奉化府院君) 정송수(鄭松壽), 한양부원군(漢陽府院君) 박유문(朴有文), 사성군(泗城君) 목인길(睦仁吉),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허유(許猷), 판도판서(版圖判書) 김한진(金漢眞), 숙옹부좌사윤(肅雍府左司尹) 송인적(宋仁績),13) 전 안동도호부사(安東都護府使) 홍언유(洪彦猷),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성사달(成士達), 문예부우사윤(文睿府右司尹) 장득안(張得安),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차안도(車安道), 지신사(知申事) 원송수(元松壽), 우대언(右代言) 이색(李穡), 좌대언(左代言) 김달상(金達祥), 전 응양군(鷹揚軍) 상호군(上護軍) 홍사우(洪師禹), 전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박원택(朴元澤), 검교평리(檢校評理) 김계(金桂), 전 상호군(上護軍) 허서(許瑞),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이양(李良),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 이춘영(李春榮), 전 판소부시사(判小府寺事) 황대도(黃大都), 검교평리(檢校評理) 이난수(李難守)·이천휘(李天暉)·서준(徐俊)·현지묘(玄之妙)·김생려(金生麗)·정지신(鄭之信)·김용려(金勇麗)·이현(李絢), 감찰집의(監察執義) 이성림(李成林),14) 전 대호군(大護軍) 마천린(馬天麟)·이화(李華), 종부령(宗簿令) 김광(金廣), 전 위위윤(衛尉尹) 유백(兪佰), 전 전객령(典客令) 양빈(楊贇), 사복정(司僕正) 윤송(尹松), 전의부령(典醫副令) 김군정(金君鼎),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조신좌(趙臣佐), 전 전객부령(典客副令) 남대강(南大剛), 전 군기감(軍器監) 김원세(金元世), 호군(護軍) 이방영(李邦英)·현신우(玄臣祐), 전 호군(護軍) 김천좌(金天佐)·김양수(金良壽)·박영우(朴英祐)·이을경(李乙卿)·우련(禹連)·김인우(金仁雨)·이광우(李光祐), 전농부정(典農副正) 손렴(孫廉), 사복부정(司僕副正) 손원(孫元)·유신(劉信), 검교상호군(檢校上護軍) 박자(朴資)·신지선(申之善)·장성길(張成吉)·최백안(崔伯顔), 친종호군(親從護軍) 고(故) 김승덕(金承德), 중랑장(中郞將) 김룡(金龍)·최공(崔公)·박석련(朴石連), 환관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김현(金玄), 영원부원군(寧原府院君) 신소봉(申小鳳), 진원부원군(晋原府院君) 김수만(金壽萬), 상호군(上護軍) 이강달(李剛達),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윤충좌(尹忠佐), 대호군(大護軍) 윤상(尹祥)을 일등공신으로 삼았다.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연(柳淵), 전 개성윤(開城尹) 홍사범(洪師範)·박원경(朴元鏡), 감찰대부(監察大夫) 김속명(金續命), 전 판도판서(版圖判書) 김원명(金元命), 숙옹부우사윤(肅雍府右司尹) 김충신(金忠信), 전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장천지(張天志),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장바얀[張伯顔], 전 상호군(上護軍) 경보(慶補),15) 검교평리(檢校評理) 홍심(洪深)·송경(宋璟), 전교시사(典校寺事) 고(故) 김한룡(金漢龍), 군기감(軍器監) 고(故) 김돈민(金敦民), 전 사의(司議) 박대양(朴大陽), 전 대호군(大護軍) 김아치[金阿赤]·박보안(朴普安), 대호군(大護軍) 나광만(羅光滿)·김입견(金立堅), 삼사우윤(三司右尹) 김광을(金光乙), 군기감(軍器監) 김광을(金光乙) 전 사재령(司宰令) 김휘(金暉), 전리총랑(典理摠郞) 전녹생(田祿生), 전법총랑(典法摠郞) 권주(權鑄), 예의총랑(禮儀摠郞) 유실(柳實), 친종호군(親從護軍) 김세덕(金世德), 삼사부사(三司副使) 박린(朴璘), 전 호군(護軍) 조군옥(趙君玉), 전 수원부사(水原府使) 김흥조(金興祖), 전 전농부정(前典農副正) 정세문(鄭世文), 전 호군(護軍) 김사혁(金斯革)·강복룡(康福龍)·봉인보(奉仁輔), 호군(護軍) 배길(裴吉)·이봉우(李逢雨)·설송(薛松), 전의부정(典醫副正) 우현(禹顯), 군부정랑(軍簿正郞) 박사신(朴思愼), 고공정랑(考功正郞) 홍사원(洪師瑗), 검교상호군(檢校上護軍) 송충(宋忠)·김귀만(金貴萬)·박수영(朴守英), 김쿠두부카[金古都不花], 중랑장(中郞將) 김천로(金天老)·오수(吳守)·이존경(李存敬)·조성(趙成)·박바얀[朴伯顔]·이석축사(李石丑斯)·임우(林祐)·나원(羅元), 낭장(郞將) 이천(李遷)·장룡(張龍)·유덕(劉德)을 이등공신으로 삼았다.
군사를 소집해 왕을 보좌한 공적을 녹훈해 좌정승(左政丞) 유탁(柳濯), 삼사우사(三司右使) 이성서(李成瑞), 첨의평리(僉議評理) 이춘부(李春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구수(李龜壽), 전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전이도(全以道), 대호군(大護軍) 임견미(林堅味)를 일등공신으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윤해(尹海), 전 대호군(大護軍) 목충(睦忠) 전법총랑(典法摠郞) 유충(柳沖)을 이등공신으로 삼았다.
또 개경을 수복한 공적을 다음과 같이 녹훈했다.
찬성사상의(贊成事商議) 황상(黃裳), 정당문학(政堂文學) 한방신(韓方信), 지도첨의(知都僉議) 안우경(安遇慶),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이순(李珣), 밀직사(密直使) 최영(崔瑩),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구수(李龜壽), 밀직부사(密直副使) 우제(禹磾)·유연(柳淵)·한휘(韓暉),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허유(許猷), 개성윤(開城尹) 양백익(梁伯益), 첨의평리(僉議評理) 이인임(李仁任), 전리판서(典理判書) 오인택(吳仁澤)·김귀(金貴), 예의판서(禮儀判書) 홍선(洪瑄), 전공판서(典工判書) 조희고(趙希古), 판도판서(版圖判書) 김한진(金漢眞), 전 판도판서(版圖判書) 김원명(金元命), 전 전공판서(典工判書) 김한귀(金漢貴), 전 판각문사(判閣門事) 김득제(金得齊), 좌상시(左常侍) 김횡(金鈜),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권장수(權長壽),16)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변안열(邊安烈),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이성계(李成桂), 좌대언(左代言) 유계조(柳繼祖), 응양군(鷹揚軍) 상호군(上護軍) 박춘(朴椿), 전 응양군(鷹揚軍) 상호군(上護軍) 홍사우(洪師禹),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지용수(池龍壽),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박원택(朴元澤), 전 상호군(上護軍) 경보(慶補),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김지서(金之瑞), 대호군(大護軍) 임견미(林堅味)·나광만(羅光滿)·조사민(趙思敏)·목충(睦忠), 전 대호군(大護軍) 이원림(李元琳)·김양검(金良劍)·김아치[金阿赤], 정윤(正尹) 노철(魯哲), 전객령(典客令) 전보(全甫), 호군(護軍) 김세견(金世堅)·강영(康永)17)·장룡(張龍)·오륙화(吳六和), 전 호군(護軍) 유부(劉富)·조금강(曹金剛), 친종호군(親從護軍) 김세덕(金世德), 판도총랑(版圖摠郞) 박양길(朴良吉), 전공정랑(典工正郞) 하을지(河乙沚), 전 지문주사(知文州事) 박인계(朴仁桂),18) 중랑장(中郞將) 박윤청(朴允淸),환관인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김현(金玄), 온양부원군(溫陽府院君) 방절(方節)을 일등공신으로 삼았다.
또 연안군(延安君) 송경(宋卿),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김광조(金光祚), 군부판서(軍簿判書) 윤척(尹陟),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우길생(禹吉生),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장바얀[張伯顔], 위위윤(衛尉尹) 염흥방(廉興邦), 광주목사(廣州牧使) 송양우(宋良遇), 한양윤(漢陽尹) 최안소(崔安沼), 안변부사(安邊府使) 이방(李昉), 전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민후
(閔珝), 전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전이도(全以道), 상호군(上護軍) 김유(金庾),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이선(李善), 전 안주목사(安州牧使) 정문우(鄭文祐), 전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 임원(林元), 전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 석말천영(石抹天英), 대호군(大護軍) 신렴(辛廉)·이용장(李用藏)·이득림(李得霖), 전 대호군(大護軍) 이화(李華)·마천린(馬天麟)· 김광부(金光富)·허서(許瑞)·변광수(邊光秀), 전 전의령(典儀令) 김광우(金光宇), 해주목사(海州牧使) 김계생(金桂生), 소부윤(小府尹) 이광대(李廣大), 안변부사(安邊府使) 김언룡(金彦龍), 판전의시사(判典醫寺事) 최영기(崔英氣), 내부령(內府令) 이원계(李元桂), 전 군기감(軍器監) 한방언(韓邦彦), 소부윤(小府尹) 김장주(金長柱), 호군(護軍) 조인벽(趙仁璧)·김윤정(金允精), 전 종부부령(宗簿副令) 강원보(康元甫), 도관정랑(都官正郞) 유구(柳玽), 상주판관(尙州判官) 최중청(崔仲淸), 중랑장(中郞將) 신지혁(辛之奕)·윤선(尹善), 전의주부(典儀注簿) 장하(張夏), 지함주사(知咸州事) 박인천(朴仁蕆), 전 호군(護軍) 한중명(韓仲明)·조군옥(趙君玉)·김사혁(金斯革), 군기소감(軍器少監) 이방년(李芳年), 호군(護軍) 홍구좌(洪久佐), 전리총랑(典理摠郞) 하원(河源), 전 성균사예(成均司藝) 김수(金銖), 서운부정(書雲副正) 정거길(鄭居吉), 침원령(寢園令) 이자수(李子修), 중랑장(中郞將) 조평(趙平)·이자분(李子芬), 전 봉거령(奉車令) 도천우(都千遇)를 이등공신으로 삼았다.
의성김씨 남파공 <12世 김광부(金光富> "남파공파"의 파조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남파(南坡), 증조부는 태자첨사 김용비(金龍庇)이며, 조부는 찬성사 김영(金英)이고, 아버지는 병부상서 김지예(金之銳)이다. 고려 충혜왕 초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1356년 대호군을 거쳐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개경을 침공하자 이를 수복한 공으로 1363년(공민왕 12) 2등공신이 되었다.
1372년 부원분자(附元分子) 고철두(高鐵頭) 등이 변방에 침입하였을 때 수어관(守禦官)으로 이를 격파하였다. 그뒤 계림윤(鷄林尹)을 지냈다.
1379년(우왕 5년)에 8월 합포도순문사(合浦都巡門使)가 되었는데, 9월에 왜구가 단계(丹溪)·거창(居昌)·야로(冶爐)등
을 습격하고, 가수현(嘉樹縣: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에 이르자, 합포(合浦)도순무사 겸 합포원수로 출전하여 이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순성보리공신(純誠輔理功臣) 의성군(義城君)으로 책봉되었다. 남파공의 묘소는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에 있다
<품계 및 관직>
정1품 종1품
정2품 종2품 장(將) 겸직
정3품 당상 정3품 당하 상호군(上護軍)
종3품 대호군(大護軍)
정4품 호군(護軍) 종4품 부호군(副護軍)
정5품 사직(司直) 종5품 부사직(副司直)
정6품 사과(司果) 종6품 부장(部將), 부사과(副司)
정7품 사정(司正) 종7품 부사정(副司正)
정8품 사맹(司猛) 종8품 부사맹(副司猛)
정9품 사용(司勇) 종9품 부사용(副司勇)
일등공신은 공신각에 그 초상을 걸고,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뛰어 작위를 봉하며, 그 아들 한 명에게 7품의 벼슬을 주되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조카나 사위 가운데 한 명에게 8품의 벼슬을 주었다.
구사(驅使)19) 5명, 진배파령(眞拜把領)20) 7명에게 초입사(初入仕)를 허용하고, 그 자손은 음서(蔭敍)로 관직에 올렸으며, 전(田) 1백 결과 노비(奴婢) 10명을 내려주었다.
이등공신은, 그 부모와 처를 세 등급을 뛰어 작위를 봉하고 아들 한 명에게 7품의 벼슬을 주되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조카나 사위 가운데 한 명에게 8품의 벼슬을 주었다.
구사(驅使) 3명과 진배파령(眞拜把領) 5명에게 초입사(初入仕)를 허용하고 자손은 음서로 관직에 올렸으며 전(田) 50결(結)과 노비(奴婢) 5명을 내려주었다.
계사일.
염제신(廉悌臣)을 우정승(右政丞)으로, 유탁(柳濯)을 좌정승(左政丞)으로, 최영(崔瑩)을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우제(禹磾)를 선력협보공신(宣力協保功臣)·밀직부사(密直副使)로, 한휘(韓暉)를 추성대공신(推誠翊戴功臣)·밀직부사(密直副使)로, 오인택(吳仁澤)을 단성양절공신(端誠亮節功臣)·전리판서(典理判書)로, 양연(楊伯淵)을 추성익위공신(推誠翊衛功臣)·개성윤(開城尹)으로, 김한진(金漢眞)을 순성보절공신(純誠保節功臣)·판도판(版圖判書)로 각각 임명했다.
<공민왕 21년(1372) 임자년 (출처 : 高麗史)>
• 봄 정월
계축일. 왕이 궁중에서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했다.을묘일. 왕이 혼전(魂殿)에서 친히 제사를 지냈다.무오일. 재추들을 시켜 카라장동지[哈刺匠同知]를 위해 잔치를 열어주게 하고 그에게 대장군 벼슬을 내려주었다.을축일. 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태후전(太后殿)으로 가서 숭경왕태후(崇敬王太后)라는 존호를 올렸으며 태후의 부(府)인 문예부(文睿府)의 이름을 숭경부(崇敬府)1)로 바꾸는 한편 참형과 교수형 이하의 죄수들을 사면했다.갑술일. 에산부카[於山不花]·나하추[納哈出]·고가노(高家奴)·고제두(古提豆)·왕조승(王曹丞) 등이 이성(泥城(昌城))과 강계(江界) 등지를 침구해 왔다.병자일. 지윤(池奫)을 서북면 원수(元帥)로 임명했다.
• 2월
경진일. 간관(諫官)이, 전라도에서 조운(漕運)2)이 늘 왜적에게 약탈당하므로 육로로 수송하도록 지시할 것을 건의했다.임오일. 왜가 백주(白州 : 지금의 황해남도 배천군) 금곡역(金谷驛)을 침구했다.병술일. 사헌규정(司憲糾正)3) 임태달(林台達)·김맹(金孟)·허온(許溫)과 군기주부(軍器注簿)4) 임헌(任獻)을 유배 보냈다. 앞서 규정들이 대장(臺長) 유원(柳源)·안경(安景)·김존성(金存誠) ·최사정(崔斯正)을 깔보고 규정들의 집무실 벽에다가,“김존성은 성실하지 못하고 최사정은 정직하지 못하며, 유원은 원숭이 같은 자이고 안경은 진짜 개다.”라고 낙서했다.
대사헌 권호(權鎬)와 자지사헌부사(知司憲府事) 최을의(崔乙義)5) 등이 왕에게 보고한 후 방주(房主) 임태달과 유사(有司) 허온을 순위부(巡衛府)에 하옥시키고 벽에 낙서한 자가 누구인지 문초했다. 허온이 혹독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전 규정 임헌이 썼다고 자백하자 이들 모두를 유배 보낸 것이다.
을미일. 공주의 기일(忌日)을 맞아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해 설법을 듣고 승려들에게 베 3백여 필을 하사했다.기해일. 공주의 생신이라 혼전에서 잔치를 열도록 명했다.경자일. 카라장동지[哈刺匠同知]가 가주(家州)로 귀환하자 그곳 사람들이 우리가 보낸 호송관과 수행인 및 통역관을 살해했다.
신축일. 호발도(胡拔都)와 장해마(張海馬) 등이 이성(泥城)과 강계(江界) 등지를 침범하자 이성만호가 적의 머리 셋을 베어 바쳤다.계묘일. 왕이 혼전에 행차했는데, 관음전의 규모가 너무 작다며 고쳐지으라는 지시를 내렸다.갑진일. 판사(判事) 조인벽(趙仁壁)6)을 시켜 가주를 토벌하고 사람들을 멸살시키게 했다.
• 3월
경술일. 명나라의 정요위(定遼衛)7)에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멸망한 원나라 기황후(奇皇后)8)의 형제들이 황후의 권세를 등에 업고 온갖 폐해를 자행했는 바, 황후의 오빠되는 기철(奇輟)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탄로 나 사형 당하자 기씨 일족들은 앙심을 품고 온갖 방법으로 우리나라를 중상모략해 왔습니다. 그 중 기철의 자식되는 평장사 기샤인테무르[奇賽因帖木兒]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 요양로(遼陽路)9) 및 동녕부(東寧府)의 관리들과 결탁해 여러 차례 국경지역에서 변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때문에 두 번이나 군대를 동원해 두 지역의 요새를 공격 함락시켰으나 정작 기샤인테무르는 몸을 빼쳐 도주해 버렸으므로 체포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더구나 왜적이 도성 가까운 지역을 침구해 그 세력이 더욱 강성해 졌기 때문에 그를 재차 추격해 체포하기가 불가능해져 버렸습니다.
홍무(洪武) 5년(공민왕 21 ; 1372) 정월에 동녕부의 잔당인 호발도(胡拔都) 등이 파아구자(波兒口子)에 잠입해 수어관(守禦官) 김천기(金天奇) 등을 살해하고 사람들을 사로잡아 갔으며 2월에는 산양회구자(山羊會口子)를 급습했으나 수어관(守禦官) 장원려(張元呂) 등에 의해 격퇴되었습니다.
또 이번 달에는 첨원(簽院) 조가아(曹家兒)와 만호(萬戶) 고철두(高鐵頭)란 자들이 군사를 이끌고 음동구자(陰童口子)에 잠입하니, 수어관 김광부(金光富) 등이 다시 몰아낸 후 압록강 건너까지 추격해 거진 몰살시켜버렸습니다.
의성김씨 남파공 <12世 김광부(金光富> "남파공파"의 파조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남파(南坡), 증조부는 태자첨사 김용비(金龍庇)이며, 조부는 찬성사 김영(金英)이고, 아버지는 병부상서 김지예(金之銳)이다. 고려 충혜왕 초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1356년 대호군을 거쳐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개경을 침공하자 이를 수복한 공으로 1363년(공민왕 12) 2등공신이 되었다.
1372년 부원분자(附元分子) 고철두(高鐵頭) 등이 변방에 침입하였을 때 수어관(守禦官)으로 이를 격파하였다. 그뒤 계림윤(鷄林尹)을 지냈다.
1379년(우왕 5년)에 8월 합포도순문사(合浦都巡門使)가 되었는데, 9월에 왜구가 단계(丹溪)·거창(居昌)·야로(冶爐)등
을 습격하고, 가수현(嘉樹縣: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에 이르자, 합포(合浦)도순무사 겸 합포원수로 출전하여 이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순성보리공신(純誠輔理功臣) 의성군(義城君)으로 책봉되었다. 남파공의 묘소는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에 있다
동녕과 요양은 아직도 상국에 투항하지 않고 있으니 이들이야말로 황제의 감화를 받지 않은 자들이며 게다가 우리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 의당 방비태세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측에서는 주요 지점을 지키다가 놈들이 변란을 일으키면 즉각 공격해 체포하도록 조치해 두었으니 만일 귀측에서 기샤인테무르를 사로잡을 경우 우리에게로 압송해주길 바랍니다.”
갑인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홍사범(洪師範)10)을 명나라 조정으로 보내 촉(蜀)지역을 평정한 것11)을 축하하게 했는데 그 표문은 다음과 같다.
“황제폐하께서 등극하셔서 중국 천하를 평정하시고 중원땅에 수도를 정한 후 군사를 엄격히 훈련시켜 출전하기만 하면 승리해 추악한 무리들은 모조리 섬멸 당했습니다. 승전보가 멀리까지 퍼져 나가니 온 천지에서 기쁨의 환호가 터져 나왔습니다.
황제폐하는 요(堯)임금이나 순(舜)임금같은 신성한 천품을 타고 나시어 은(殷)의 탕왕이나 주(周)의 무왕처럼 폭군을 정벌하셨습니다. 강회(江淮 : 長江과 淮水)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와 월나라를 지나가니 진군하는 앞에 가로막는 자가 없었으며, 제나라와 노나라 땅을 평정하고 연운(燕雲)12)지역을 소탕하니 폐하의 군대가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경축했으며 개국의 훈업(勳業)이 드디어 이룩되었습니다.
더럽혀진 풍속이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고 남녀 백성들이 가정을 이루어 다들 평안한 삶을 누리게 되었으며 모든 문물제도가 하나로 통일13)되었으니 누가 감히 조근(朝覲)해오지 않겠습니까?유독 저 촉(蜀)지역만 황제의 칭호를 참칭하며 지세가 험준한 것만 믿고 황명을 거역하니 이는 실로 사마귀가 수레바퀴에 대항해 보려는 어처구니없는 짓이었습니다.
그 죄를 만천하에 알린 후 처형해 버리니 마치 기러기 털을 횃불로 불태우듯이 손쉬운 일일 뿐만 아니라 험준한 검각산[劍閣]14)도 탄탄대로였고 소용돌이치는 염여퇴[灩澦]15)도 편안한 물길 같았습니다. 이것은 천운을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나 실제로는 황제폐하의 신령스러운 계책에 따른 결행의 결과라 할 것이니 천하 통일이 빨리 이루어진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다행히 좋은 때를 만나 승전보를 듣게 되었으니 동쪽 변방에 책봉을 받은 제가 어찌 폐하께서 베푸신 재생의 은혜를 잊겠습니까? 제후로서 큰절을 올리며 삼가 폐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나이다.”
또 우리 자제들의 입학을 요청하는 표문은 다음과 같았다.
“올바른 도리를 지키고 덕을 좋아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지혜로운 이나 어리석은 자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또한 이민족의 문화를 중국과 같이 변화시키는 길은 시(詩)·서(書)·예(禮)·악(樂)을 익히는데 있으니 비천하다고 부족한 채로 그냥 버려두면 언제 학업을 닦아 문명된 시대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는 진작 한나라 때부터 젊은이들을 보내 스승을 찾아 중국의 국학에 입학하게 했으니, 이러한 사실은 당(唐), 송(宋) 이후 나온 여러 문헌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다만 중국을 우러러보는 마음에서 나온 것일 뿐만 아니라 태평성대를 더욱 찬란하게 장식하는 방도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황제폐하께서는 신이한 무공으로 천하를 평정하고 문덕(文德)으로 먼 곳의 사람들까지 귀복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경전과 사서(史書)를 반포함으로써 학문의 규범이 드러나게 하셨고, 예복과 아악(雅樂)을 내려주심으로써 제례의 면목이 일신되게 하셨습니다. 다만 크게 염려되는 것은 저희들의 습속이 경박한 까닭에 유학의 기풍이 실추될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한갓 지엽적인 부화(浮華)한 문장 따위를 짓는 데 있어서도 그것을 잘 짓는 자가 드문 형편인데, 하물며 성현께서 가르쳐 주신 주된 의리(義理)의 학문의 경우 누가 그것을 제대로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문물을 변화시켜 번성하게 만들려면 반드시 종주국인 중국의 문물을 두루 살피는 것이 급선무라 할 것입니다.상국의 뛰어난 문물을 배우려는 저의 성심을 어여삐 여기시고 올바른 인재를 양성하려는 저의 충정을 감안하시와, 위와 같은 저의 건의를 허락하시는 조칙을 내려주실 것을 엎드려 바라옵니다.
우리 젊은이들을 받아들여 상국의 학생들과 나란히 학교에서 공부하게 해 주신다면 저는 마땅히 폐후의 덕화를 높이 받들어 옛날 기자(箕子)의 봉토였던 이 땅을 길이 잘 다스리고 상국에 충성을 다할 것이며 폐하의 복록과 만수무강을 빌 것입니다.”
또 명나라 중서성에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최근 병란이 벌어진 이후 아악(雅樂)이 완전히 망실되는 바람에 상국 조정에서 보내주신 악기를 종묘에서 사용하고 있으나 그 외 사직(社稷)·경적(耕籍)·문묘(文廟)에 올리는 제례에는 사용할 악기[鐘磬]16)가 없는 실정이라 이번 사신편에 돈을 들려보내 매입하게 했습니다.”
○ 예부상서 오계남(吳季南)17)을 명나라로 보내 말을 바치게 하면서, 비서감(秘書監) 유경원(劉景元)을 유지별감(宥旨別監) 겸 간선어마사(揀選御馬使)로 임명해 오계남과 함께 탐라로 보냈다.
계해일. 왜적이 순천(順天)·장흥(長興)·탐진(耽津 : 전남 강진군)·도강군(道康郡)18)을 침구했다.경오일. 왕이 손수 성산군(星山君) 이포(李褒)19)의 초상을 그려 그 아들인 수시중(守侍中) 이인임(李仁任)에게 하사했다.신미일. 충숙왕의 기일을 맞아 왕이 광제사(廣濟寺)에 행차했다가 왕륜사(王輪寺)에 들러 영전(影殿) 공사의 진척 상황을 둘러보았다.
• 여름 4월
기묘일. 탐라 사람들이 유경원(劉景元)과 목사 겸 만호 이용장(李用藏)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오계남이 결국 섬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갑신일. 나하추[納哈出]가 사자를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신묘일. 가뭄이 계속되자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했다.경인일. 전 평리(評理) 안우경(安遇慶)이 죽었다.임진일. 우인열(禹仁烈)을 제주체복사(體覆使)로 임명했다.
○ 왜적이 진명창(鎭溟倉)을 약탈했다.임인일. 민부상서(民部尙書) 장자온(張子溫)20)을 명나라 조정으로 보내 탐라 토벌을 요청하는 표문을 올리게 했다.
“우리나라가 비록 하찮긴 하지만 상국을 섬기는 도리를 잘 아는데 저 불손한 섬오랑캐가 상국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실정이라 저는 간절한 마음으로 폐하께 호소하고자 합니다.
제가 국가 통치의 방략에 대해 어둡긴 하오나, 진작부터 탐라의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달단인(韃靼人 : 몽고인)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도라는 건의를 올린 바 있습니다. 얼마 후 받아본 폐하의 조서에서는 백성들이 편리한 쪽을 따르라는 방안21)을 제시하셨기에 거기에 언급된 세부 사항에 따라 결국 탐라의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도록 조치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물의 납부가 지체된 것은 사실 저의 본의가 아닙니다.
금년 3월에 저의 신하인 예부상서 오계남(吳季南)을 탐라로 보내 말을 선적한 후 상국 수도로 가서 바치게 했는데 마침 왜적이 바다에 출몰하므로 궁병(弓兵) 425명을 시켜 호송하게 했습니다.그런데 뜻밖에도 달단인 목자(牧子)들이 앞서 파견했던 제주목사 이용장(李用藏)22)과 판관 문서봉(文瑞鳳), 권만호(權萬戶) 안방언(安邦彦) 등을 모조리 살해했으며 오계남이 섬에 도착하기 직전에 먼저 상륙한 궁병 3백 명도 모두 살해하는 바람에 오계남은 더 이상 가지 못하고 그냥 돌아 왔습니다.
도리상 이러한 변란이 발생하면 응당 군대를 보내 그 사유를 따져 물어야 할 것이나 아직 상국에 보고하지 못한 상황에서 의례상 함부로 군사행동을 할 수가 없는 형편이라 다만 한껏 부끄러운 마음으로 간곡히 호소드리는 것입니다.엎드려 바라옵건대 일월과 같은 밝으심과 천하 백성들을 다 같이 사랑하는 넓은 마음으로 저의 충성을 보시고 저의 분한 마음을 애틋이 여기시어 덕음을 반포함으로써 적절히 처리해 주신다면 뼈가 가루가 되어도 그 감격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갑신일. 이무방(李茂芳)을 시켜 강안전(康安殿)에서 비를 빌게 했다.병오일. 제주의 반란 때문에 말의 공납이 불가능해지자 본국의 말 여섯 필을 예부상서 오계남편에 명나라에 바치게 했다.
• 5월
무신일. 진변원수(鎭邊元帥) 달마대(達麻大)와 여진 만호 궁대(弓大)가 사자를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했다.임자일. 김흥경(金興慶)이 사면을 건의하자 왕은,“태후의 생신에는 사면령을 내려도 좋지만 내 생일에는 사면할 수 없다.”고 거부하고 김용휘(金用輝)23)만 사면했다.계축일. 가뭄이 계속되자 신돈 일당의 처첩가운데 신돈의 처첩을 제외한 나머지로서 현재 관비로 있는 여자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신유일. 영전(影殿)의 정문이 완성되었지만 그것이 장려(壯麗)하지 않다고 여긴 왕이 철거시키게 했다.계해일. 명나라 황제가 환관으로 과거 원나라의 원사(院使)를 지낸 연다마시리[延達麻失里]와 손내시(孫內侍)를 보내 왕에게 채색 비단·사라(紗羅)24) 48필을 내려주니 왕이 영빈관(迎賓館)25)까지 출영했다. 이와 관련해 중서성에서는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황제께서는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해동의 고려국왕이 연전에26) 우리 조정을 위해 비석을 세우고 그 지역의 산천에 제사를 지내니, 우리 조정에서도 각처에서 거둔 승전의 소식을 알리는 한편 예복도 보내주었다. 이런 일들로 사신의 왕래가 계속 이어지다보니 그 때문에 국왕이 심한 열병까지 앓는 일까지 벌어졌다. 나는 그 나라가 산과 바다로 에워싸여 천연적으로 잘 형성된 국토를 가졌으며 국왕들은 대대로 어진 정치를 베풀어 태평성대를 누려왔다고 생각해 왔다.
뿐만 아니라 나는 우리 조정에서 자주 사신을 보내는 일 때문에 고려국왕의 건강이 악화된 사실도 알고 있다. 때문에 나는 한 해 동안 그리로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이제 너희들 중서성에서는 사라(紗羅)와 단자(段子) 48필을 준비한 다음 옛날 원나라에서 원사(院使)를 지냈던 신하를 시켜 고려로 보내도록 하되, 큰 배 한 척에 완전 무장한 군사들을 태워 호위하도록 하라. 또한 그 편에 진(陳) 황제27)의 가족들과 하(夏) 황제28)의 가족들을 고려의 왕경으로 보내니, 그들을 군인이나 평민에 편입시키지 말고 그냥 원하는 대로 살아가도록 조치하라. 만약 고려국왕이 그들이 고려의 왕경에 체류하도록 허락한다면 남겨두고,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도로 데리고 돌아오라. 너희 중서성에서는 이러한 내용의 성지를 고려에 내려주면서 나의 생각을 분명히 말하도록 하라.’”또한 명나라 우승상(右丞相) 왕광양(汪廣洋)도 이러한 글을 보냈다.
“과거 원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군웅(群雄)29)들이 봉기해 각기 군대를 거느리고 전국 각처에서 영토를 분할해 웅거했습니다. 우리 황제께서는 시운(時運)을 타고 회수(淮水) 서쪽 지방에서 분연히 흥기하시어 양쯔강 동쪽지역에서 왕업의 기초를 닦으신 다음 군대를 동원해 천하를 정벌하고 군웅들을 깨끗이 평정하셨습니다.
그 와중에 진우량(陳友諒)이 호상(胡湘)지역에 웅거하면서 함부로 나라 이름을 대한(大漢)이라 정했으며, 명정(明貞)은 천촉(川蜀 : 사천지방)을 차지하고서 나라를 대하(大夏)라고 참칭하자, 이에 황제께서는 6사(六師)를 통솔하고 친히 호광(湖廣)의 정벌에 나서시니 세궁역진(勢窮力盡)한 진우량은 그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했습니다.지난 해 봄에는 중산후(中山侯)와 영천후(潁川侯) 등을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육로와 수로 양쪽으로 진격해 곧장 천촉을 공격하게 하니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던 명정은 항복의 예를 올렸습니다.
두 사람은 각별하신 배려로 특별히 죄를 용서받고 생명을 보전하게 되었으나 도리상 항구적으로 우리나라에 살 수는 없으므로 이제 가족과 함께 귀국으로 보내 거주하게 한 것입니다. 국왕의 재량에 따라 괜찮다면 그대로 머물게 하고 안 되겠다면 그냥 돌려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을축일. 진리(陳理 : 한나라 황제), 명승(明昇 : 하나라 황제) 등 남녀 27명이 우리 수도로 왔다. 진리와 명승이 입궐하자 왕이 보평청(報平廳)에 나왔으며 두 사람이 계단에 올라 절을 올리니 왕은 앉은 채로 절을 받았다.
인사를 올린 두 사람은 명나라 사신 다음 자리에 않았는데 당시 명승의 나이는 18세였고 진리의 나이는 22세였다.계유일. 손내시(孫內侍)가 불은사(佛恩寺)30)의 소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했다.
갑술일. 큰 비가 내리자 왕이 영전에 비가 샐까 걱정한 나머지 친히 가서 살펴보았다.○ 정당문학(政堂文學) 한중례(韓仲禮)가 난수산(蘭秀山)지역 해적들의 배를 사들이자 그 말을 들은 황제가,“재상의 신분으로 해적31)의 배를 사들이는 것은 옳지 못하니 즉시 돌려 보내야 한다.”고 지시했는데 배는 이미 파괴되어 있었다.
• 6월
정축일. 한중례를 순군(巡軍)에 하옥시킨 후 파괴된 배를 신속히 수리하도록 지시했다.무인일. 큰 비가 내리자 영전의 공사에 지장이 없도록 해달라고 기청제(祈請祭)32)를 지냈다.신사일. 진리(陳理)와 명승(明昇)에게 모시베 9필을 하사했다.
○ 왜적이 강릉부(江陵府)와 영덕현(盈德縣), 덕원현(德原縣)을 침구했다.
○ 왕이 수릉(壽陵)을 정릉(正陵) 곁에 짓도록 하면서 백관들로 하여금 계급에 따라 석재를 운반할 일꾼을 내게 했다.을유일. 관제를 개정했다.
○ 왜적이 안변(安邊)과 함주(咸州)를 침구했으나 안변부사 장백안(張伯安)이 제대로 수비하지 못했으므로 곤장 87대를 쳤다.무술일. 제주사람들이 반적을 죽이고 투항해 왔다. 앞서 제주목사 이용장(李用蔣)이 살해당했을 당시 판관 문서봉(文瑞鳳)은 도망쳐 죽음을 면했는데, 제주 사람들이 다들 문서봉을 권지목사(權知牧使)로 추대해 놓고 말을 바치면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조정에서는 이하생(李夏生)을 안무사로 임명했다.기해일. 우리 태조를 화령부윤(和寧府尹)으로 임명하는 한편 원수(元帥)로 임명해 왜적을 막게 했다.
신축일. 왜적이 동계(東界)의 안변(安邊) 등지를 침구해 부녀자들을 잡아가고 창고의 미곡 1만여 석을 약탈하자, 존무사(存撫使) 이자송(李子松)을 파직시켜 귀향하도록 조치했다.임인일. 왜적이 다시 함주와 북청주(北靑州)를 침구해오자 만호 조인벽(趙仁壁)이 군사를 매복시켜 두었다가 대파하고 70명이 넘는 적의 목을 베었으므로 봉익대부(奉翊大夫)33)로 승진시켰다.계묘일. 왜적이 홍주(洪州)를 침구했다.
• 가을 7월
무신일. 영전(影殿)의 종루(鐘樓)가 완공되었으나 건물이 장려하지 못하다며 고쳐 지으라고 왕이 지시했다.기미일. 왜적이 양광도(楊廣道)를 침구했다.계해일. 태후의 생일을 맞아 죄수들을 석방했다.신미일.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김서(金湑)34)를 명나라 조정으로 보내 특산물을 바치게 하는 한편, 동지밀직사사 성원규(成元揆)35)는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게 하고, 판도사사(版圖判事) 임완(林完)은 천추절(千秋節)36)을 축하하게 했다.
• 8월
갑진일. 왕이 평복차림37)으로 몰래 영전을 찾아갔다.갑오일. 영전의 취두(鷲頭)38) 모형이 완성되었는데 그것을 장식하는데 황금 650냥과 백은 800냥이 들었다.임인일. 찬성사(贊成事) 강인유(姜仁裕)를 명나라 조정으로 보내 채색 비단을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의를 표하게 하면서 다음과 같은 표문을 보냈다.
“황제폐하께오서 갑자기 사신을 보내 특별히 하사품을 내려주시니 분수에 넘치는 영광에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저는 나라를 통치할 만한 지혜가 없는데다 한 몸을 추스릴만한 재주도 없는지라 자신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하면서 그저 선조가 물려준 가업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는 터에 어찌 쓸데없는 일로 폐하[黈纊]39)께 심려를 끼쳐드릴 수 있겠습니까?
저희나라가 상국에 귀부한 이래 외람되게도 큰 총애를 받았으니 보내주신 예복과 악기를 통해 중국의 문물을 알았으며 졍전과 사서(史書)를 통해 무지몽매함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기왕에 각별한 하사품을 내려주신 큰 은혜도 미처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인데 이번에 또 하사품을 받게 되니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이 더욱 커집니다.
황제폐하께서는 옛날 우(禹)임금과 문왕(文王)을 본받아 아름다운 문물제도를 이룩하셨으니, 백관의 복색(服色)은 옛 제도를 그대로 따랐으며 사랑으로 장수들을 극진히 감싸주셨습니다. 마침내 온 천하만민들을 폐하의 통치 안에 포용하시면서 저와 같이 미천한 자에게도 하사품을 후하게 내리시니 저는 어진 이를 아끼는 폐하의 아름다운 뜻을 받들어 영원토록 정성을 다해 폐하의 만수무강을 빌겠습니다.”
• 9월
무신일. 왕이 승려를 시켜 「무상가(無常歌)」를 부르게 한 후 밤늦게까지 그 노래를 들었다.신해일. 윤환(尹桓)을 파직시키고 경복흥(慶復興)을 좌시중으로 임명했다.갑인일. 왕이 평복차림으로 몰래 영전(影殿)으로 가서 취두를 구경했다.경신일. 양광도 순문사 조천보(趙天輔)가 용성(龍城)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패배해서 전사하자 왕이 관직을 추증(追贈)하라고 지시했다.임술일. 장자온(張子溫)과 오계남(吳季南)이 명나라에서 귀국하는 편에 황제가 왕에게 약재를 내려주면서 장자온 등에게 이렇게 일렀다.
“연전 너희 나라에서 탐라의 목자(牧子)에 관한 일을 아뢰기 위해 표문을 가지고 왔다. 내가 생각해보니 탐라의 목자들은 원나라 몽고인[達達人]으로 당초 가축 기르는 일을 가업으로 삼을 뿐 농사지을 줄도 모를 것이다. 더욱이 오랜 세월 동안 탐라에서 나고 자라 그곳을 고향으로 여기면서 살아온 무리들이다.
그놈들은 지난번 너희 나라에서 목사로 파견한 윤재상(尹宰相)을 살해했다. 하지만 너희들의 국왕은 만약 그놈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면 그들이 자신의 호의를 알지 못한 채 딴 마음을 품고 공연한 사단을 저지를까 우려한 나머지 그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놈들이 어찌 이 같은 반란을 일으켰단 말인가? 내가 지금 국왕에게 편지를 보내니 너희들도 국왕에게 상세히 나의 말을 전하라. 절대로 그놈들을 얕보지 말고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해 깡그리 소탕하라!듣건대 너희들 나라에서는 왜적들이 마구 날뛰며 바닷가 고을들을 약탈하는 바람에 백성들이 피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적들을 막아내지 못한다고 한다.
그 해적들이 바다를 건너와 우리 땅까지 노략질하기에 나는 바닷가 고을의 수어관(守御官)에게 명령을 내려 왜적의 배 13척을 나포하게 했다. 만일 탐라의 목자들이 이 왜적무리들과 합세한다면 토벌하기가 다소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또 너희 나라 동북지역에 사는 여진인들은 예로부터 용맹이 빼어나지만 제멋대로 구는 족속이라고 들었는데, 너희들이 귀국하면 국왕더러 그들을 특히 신경써서 막으라고 하라. 듣기에 너희 나라는 의심이 많은 나라라고 한다.
예로부터 천하에는 중국과 외국이 있는데, 그 중 고려는 바다 저편의 나라로 진작부터 중국과 왕래하며 사대(事大)의 예를 잘 지켰고 또한 분수에 따라 행동해 왔다. 하물며 지금 조빙(朝聘)의 의례도 빠트린 일이 없는 터에 무엇을 의심하랴? 옛날에 남을 잘 속였던 수나라 양제(煬帝)와 같은 임금은 국토를 확장하려고 함부로 전쟁을 일으켰다가 후세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으니, 이는 내가 가장 혐오하는 일이다. 너희들이 귀국하거든 이러한 나의 말을 국왕에게 똑똑히 전하라.”
또 황제가 친히 써서 보낸 조서는 다음과 같았다.
“7월 25일 장자온이 우리 조정에 도착해 전달한 표문에 의하면, 탐라의 목자가 무도한 짓을 저질러 관리와 군신들을 살해했다고 했는데 이는 매우 가증스런 일이다. 『춘추(春秋)』의 법에 난신적자(亂臣賊子)는 누구라도 그를 죽일 수 있다고 했다.
지금 목자들이 그와 같은 짓을 저질렀으니 토벌해 죽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어떤 나라든 독을 품은 하잘 것 없는 악당들이 있는 법이라 그런 자들을 모조리 소탕한다 해도 이 쪽 또한 반드시 상처를 입게 마련이다.
지난번의 실수도 작은 일 때문에 큰 화를 만들어 낸 것이니 참으로 애석하다. 이는 조급하게 행동한 나머지 그런 결과가 나왔던 것이 아니겠는가? 사정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왕은 우물쭈물하다가 모욕만 당하지 말고 신속히 군사를 동원해 토벌에 나서도록 하라. 다만 전술상의 모든 문제는 왕이 잘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라.”
• 겨울 10월
초하루 갑술일. 자제위(子弟衛)40)를 설치해 젊고 용모가 아름다운 자들을 선발해 소속시킨 다음 대언(代言) 김흥경(金興慶)으로 하여금 조직을 총괄하게 했다. 이때 홍륜(洪倫)·한안(韓安)41)·권진(權瑨)·홍관(洪寬)·노선(盧瑄) 등이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늘 침소에서 시중을 들었다.
왕이 천성적으로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데다 교합(交合)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공주가 살아있을 때에도 동침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공주가 죽은 후 비를 여럿 들여다가 별궁에 두었으나 가까이 하지 못하고 밤낮으로 공주만을 애타게 그리워하다가 결국 마음의 병까지 얻었다.
늘 스스로 아낙네 모양으로 화장을 한 후 먼저 젊은 내비(內婢)를 방으로 들어오게 해 보자기로 얼굴을 가리게 하고는 김흥경과 홍륜 등을 불러 음란한 행동을 하게 했다. 왕은 옆방의 문틈으로 그 광경을 훔쳐보다가 음란한 마음이 동하면 곧 흉륜 등을 침실로 들어오게 해 마치 남녀 사이처럼 자신을 음행하게 했다.
하룻밤에 수십 명과 이런 짓을 벌였으므로 다음날 늦게야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혹 마음에 드는 자가 있으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을 주었다.
왕이 후사가 없음을 걱정한 나머지 흉륜과 한안 등을 시켜 왕비들을 강제로 욕보여 그 사이에서 아들이 생기면 그를 자기 아들로 삼으려 했다. 정비(定妃)42)·혜비(惠妃)·신비(愼妃)가 죽기로 거부하며 따르지 않자 뒤에 왕이 익비(益妃)43)의 처소로 가서 김흥경·홍륜·한안 등을 시켜 익비와 통정하게 했다.
익비가 거부하자 왕이 칼을 뽑아 치려고 하니 익비가 겁이 나서 따랐으며 그 이후로 세 사람은 왕의 명령을 빙자해 익비의 처소에 자주 드나들었다.을해일. 왕이 창릉(昌陵 : 태조의 부 세조릉)을 참배했다.
정축일. 왕이 정릉(正陵)에서 제사를 지낸 뒤 슬픔에 잠겨 묘역을 배회하다가 정자각(丁字閣)에서 공주의 영정을 마주해 술자리를 열었는데, 마치 산 사람을 대하듯 몽고 음악을 들려주며 술잔을 주고받았다.기묘일. 왕이 양릉(陽陵 : 신종릉)을 참배한 후 환궁하는 길에서 온갖 놀이판을 벌이게 했다
○ 환관 김사행(金師幸)44)이 공사를 잘 감독했다 하여 안장 딸린 말을 상으로 주었다.신사일. 왜적의 배 27척이 양천(陽川)을 침구해 사흘 동안 머물렀는데, 장수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했으나 아군은 죄다 성중애마(成衆愛馬)45) 소속으로 수전에 익숙하지 못한지라 전투에서 대패했다.
왜적은 아군 원수(元帥)의 지휘용 깃발과 북을 탈취한 후 강화까지 가서 고을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갔다. 왕이 각 관청의 성중애마와 5부 방리(坊里)46)의 사람들을 오군(五軍)에 분산해 예속시켰다.경인일. 왕이 친히 5군을 거느리고 출전해 승천부(昇天府)에서 유숙했다.
신묘일. 왕 일행이 백마산(白馬山)에서 유숙했다.임진일. 왕 일행이 망포봉(芒浦峰)까지 갔는데 판사(判事) 홍사조(洪師祖)가 갑옷을 착용하지 않은 것을 본 왕이 노하여 그를 마구 때리게 했다. 또 개성 참군(參軍) 김신검(金臣儉)은 교량을 수리해 놓지 않았다 하여 장형에 처했다.계사일. 왕 일행이 안국사봉(安國寺峰)에 유숙했다.
갑오일. 왕이 인월곶(仁月串)에 유숙하면서 불화살을 쏘았다.을미일. 왕이 경포봉(經浦峰)에 올라 함선을 살펴본 후 용천사봉(龍泉寺峰)에 유숙했는데 호위태세가 느슨하다는 이유로 제조관(提調官)들을 장형에 처했다. 왕이 찬성사(贊成事) 안사기(安師琦)47)더러 이렇게 지시했다.
“나의 이번 행차는 그저 놀러온 것이 아니라 군대의 전투대비 태세가 어떤가 점검하려는 것이다. 전번 경자년과 신축년에 침구해온 홍건적48)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으며 경인년49) 이후 계속 침구해오고 있는 왜적도 충분히 당해낼 수 있는데도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가고 온 나라가 이토록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용병에 규율이 없고 명령이 엄격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친히 왔어도 오히려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는데 하물며 나를 대신하는 장수가 지휘하면 도대체 어떤 상황이 벌어지겠는가? 경은 나의 깊은 뜻을 잘 헤아려 사람들을 잘 타일러서 금후로는 군령을 반드시 준수하도록 만들라.”병신일. 왕이 증산봉(甑山峰)에 유숙하면서 밤내내 화산나희(火山儺戱)를 열게 하고 그것을 구경했다.정유일. 환궁하는 길에서도 나희를 열게 했다.
• 11월
기유일. 왕이 친히 공주의 혼전(魂殿)에서 제사를 지냈다.갑인일.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했다.정사일. 팔관회를 열고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했다.신미일.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노진(盧稹)50)을 명나라 조정으로 보내 약재와 약방문을 보내준 것에 대해 사의를 표하게 하면서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멀리서부터 신통한 약재를 보내주시면서 비방까지 알려주시니, 삼가 받자와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원래 체질이 약한데다 평소 몸을 잘 돌보지 않은 결과 마침내 행보가 어렵게 되고 모든 행동이 예법에 어긋나게 되고 말았으니 외람되게 한 나라를 맡아 다스리고 있는 처지에 늘 근심을 마지않고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은총으로 이러한 물품을 거듭 보내주시니 두려움과 영광을 함께 느끼게 됩니다.황제폐하께서는 천지가 이루어진 큰 이치를 잘 아시고 인간이 지닌 성정 가운데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베푸시어 제가 지닌 고질병을 애련히 여기사 약효가 빼어난 약재를 보내주셨으니 앞으로 직무에 충실하여 성은에 보답하려 합니다. 아울러 진심으로 폐하의 만수무강을 축원 드립니다.”
임신일. 대호군(大護軍) 김갑우(金甲雨)를 명나라 조정으로 보내 제주 말 50필을 바치게 했다.
○ 판서(判書) 장자온(張子溫)을 시켜 요동을 빙문하게 했다.갑술일. 왕이 친히 현릉(顯陵 : 태조릉)·경릉(慶陵 : 충렬왕릉)·의릉(毅陵 : 충숙왕릉)·선릉(善陵)·고릉(高陵 :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릉)·숙릉(淑陵)·덕릉(德陵 : 충선왕릉)에 제사를 지냈다.을해일. 왕이 정릉(正陵)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
○ 겨울철인데도 눈이 내리지 않았다.
二十一年 春正月 癸丑 飯僧于宮中. 乙卯 王親祭魂殿. 戊午 命宰樞宴哈刺匠同知, 賜爵大將軍. 乙丑 王率群臣, 詣太后殿, 上尊號曰崇敬王太后, 改文睿府爲崇敬, 赦二罪以下. 甲戌 於山不花·納哈出·高家奴·古提豆·王曹丞等, 來侵泥城·江界等處. 丙子 以池奫爲西北面元帥.
二月 庚辰 諫官以全羅道漕運, 常被倭掠, 請令陸轉. 壬午 倭寇白州金谷驛. 丙戌 流司憲糾正林台達·金孟·許溫, 軍器注簿任獻. 初糾正等, 欺臺長柳源·安景·金存誠·崔斯正, 書于糾正房壁云, “存誠無誠, 斯正不正, 柳源似猿, 安景眞犬.” 大司憲權鎬, 知司憲府事崔乙義等啓王, 下房主林台達, 有司許溫于巡衛府, 拷問書壁者. 溫不忍榜掠服曰, “前糾正任獻.” 皆流之. 乙未 王以公主忌日, 幸王輪寺, 聽法, 賜僧布三百餘匹. 己亥 以公主生辰, 命設宴于魂殿. 庚子 哈刺匠同知還家州, 州人殺護送官及傔從人·通事. 辛丑 胡拔都·張海馬等, 來侵泥城·江界等處. 泥城萬戶斬首三級, 以獻. 癸卯 幸魂殿, 以觀音殿制度卑隘, 命改創. 甲辰 遣判事趙仁璧, 討家州, 屠之.
三月 庚戌 移咨定遼衛曰, “前元奇后兄弟, 憑恃勢力, 爲害百端. 其兄奇轍, 因謀不軌, 事覺伏誅, 奇氏挾讎, 侵陵本國, 靡所不爲. 奇轍子平章賽因帖木兒, 稔惡不已, 結構遼陽路及東寧府官, 屢爲邊患. 以此, 再調兵馬, 攻破兩處城池, 其賽因帖木兒, 挺身逃走, 不獲而還. 爲因倭賊, 近境作耗, 其勢益橫, 未能再行追捕. 至洪武五年正月, 有東寧府餘黨胡拔都等, 潛入波兒口子, 殺守禦官金天奇等, 虜掠人口以去. 至二月, 又突入山羊會口子, 守禦官張元呂等, 擊逐之. 又於本月, 有僉院曹家兒, 萬戶高鐵頭等, 引軍潛入陰童口子, 守禦官金光富等, 又擊逐之, 過江陷沒幾盡. 竊詳, 東寧·遼陽·未曾歸附朝廷, 卽是梗化之人, 况與我構隙, 理宜防備. 已令把守要害, 待變勦捕, 如獲奇賽因帖木兒, 起遣前來.”甲寅 遣知密直司事洪師範如京師, 賀平蜀. 表曰, “皇建極而撫九有, 奄宅中邦, 師以律而出萬全, 畢熸群醜. 捷音遠播, 喜氣交騰. 皇帝陛下, 以堯舜神聖之資, 當殷周征伐之擧. 起江淮, 跨楚越, 所向無前, 平齊魯, 掃燕雲, 攸徂相慶, 大勳斯集. 汚俗維新, 男有室, 女有家, 悉皆按堵, 書同文, 車同軌, 孰敢不庭? 惟彼蜀方, 盜稱名字, 負險拒命, 夫豈知螂臂圖輪? 聲罪加誅, 不啻若鴻毛燎火, 劒閣坦道, 灩澦安流. 玆由天運之方來, 實出聖謀之獨斷, 混一之速, 前古所稀. 臣幸獲逢辰, 想聞奏凱. 鯷封守職, 敢忘再造之私? 虎拜楊休, 恭上萬年之祝.”又請遣子弟入學表曰, “秉彝好德, 無古今智愚之殊. 用夏變夷, 在詩書禮樂之習, 苟因陋而就寡, 奚修業以及時? 故我東人, 肇從炎漢, 遣子弟, 鼓篋而入學, 歷唐宋聯書, 而可稽. 豈徒有尊崇中國之心? 亦足爲賁飾太平之具. 皇帝陛下, 神武定天下, 文德來遠人. 頒聖經與史書, 學規斯著, 賜法服兼雅樂, 祀事一新. 第因習俗之澆漓, 深慮儒風之墜軼. 辭藻浮華之末, 罕見其工, 聖賢義理之宗, 孰知其正? 如欲期於變魯, 必先務於觀周. 伏望, 憐臣嚮化之誠, 諒臣成人之美, 特垂明詔, 渙發兪音. 儻容互鄕之童, 得齒虞庠之胄, 臣謹當奉揚聲敎, 永綏箕子之封, 罄竭忠誠, 益貢華人之祝.”又咨中書省曰, “近因兵後, 雅樂散失, 見蒙朝廷, 給降樂器, 用於宗廟, 外社稷·耕籍·文廟, 鍾磬並闕, 今將錢物前去, 收買.” 遣禮部尙書吳季南, 獻馬, 以秘書監劉景元爲宥旨別監兼揀選御馬使, 偕季南, 往耽羅. 癸亥 倭寇順天·長興·耽津·道康郡. 庚午 王手寫星山君李褒眞, 賜其子守侍中仁任. 辛未 王以忠肅王忌日, 如廣濟寺, 遂幸王輪寺巡視影殿工役.
夏四月 己卯 耽羅殺劉景元及牧使兼萬戶李用藏, 以叛, 吳季南不克入, 乃還. 甲申 納哈出遣使來, 獻土物. 辛卯 以旱禱雨. 庚寅 前評理安遇慶卒. 壬辰 以禹仁烈爲濟州體覆使. 倭掠鎭溟倉. 壬寅 遣民部尙書張子溫如京師, 請討耽羅表曰, “海邦雖陋, 唯知事上之心, 島夷不恭, 敢阻朝天之路, 玆殫愚懇, 仰瀆聰聞. 伏念, 臣昧於爲國之方, 嘗有徑情之請, 謂致耽羅之安業, 莫如韃靼之移居. 尋奉詔書, 示以烹鮮之訓, 欽遵條約, 遂其按堵之生. 第貢獻之稽期, 非陳告之本意. 於本年三月, 差陪臣禮部尙書吳季南, 前往耽羅, 粧載馬匹, 赴京進獻, 以倭賊在海, 差弓兵四百二十五人防送. 不期韃靼牧子等, 將先差去秘書監劉景元及濟州牧使李用藏, 判官文瑞鳳, 權萬戶安邦彦等, 盡殺之, 及季南至, 又將弓兵先上岸者三百餘名, 亦皆殺之, 以此, 季南不能前進, 廻還. 如斯變故, 義當往訊其由, 未及奏陳, 禮無擅興之理, 祇增愧赧, 庸切籲呼. 伏望, 遠垂日月之明, 一視輿圖之廣, 明臣效忠之實, 愍臣抱屈之情, 俯頒德音, 爲之區處. 則臣之感戴, 粉骨何忘?” 甲辰 命李茂芳禱雨于康安殿. 丙午 以濟州叛, 遣禮部尙書吳季南, 獻本國馬六匹于京師.
五月 戊申 鎭邊元帥達麻大, 女眞萬戶弓大遣使, 賀誕辰. 壬子 金興慶請赦王曰, “太后誕日, 可赦, 予之誕日, 不可赦.” 唯赦金用輝. 癸丑 以旱, 放辛旽黨人妻妾, 沒爲官婢者, 惟旽妻妾不赦. 辛酉 影殿正門成, 王以不壯麗命撤之. 癸亥 帝遣宦者前元院使延達麻失里及孫內侍來, 錫王綵段紗羅四十八匹, 王出迎于迎賓館. 中書省移咨曰, “欽奉聖旨, ‘那海東高麗國王, 那裏自前年, 爲做立石碑, 祭祀山川, 飛報各處捷音, 及送法服. 使者重疊, 王好生被暑熱來爲那般. 我想着限山隔海, 天造地設生成的國土, 那王每有仁政, 管撫的好時天地也喜. 我這裏勤勤的使臣往來呵, 似乎動勞王身體一般. 爲那般上頭, 我一年光景, 不曾敎人去. 于今恁每中書省省收拾紗羅段子四十八匹, 差元朝舊日老院使送去, 選海船一隻, 用全身掛甲的軍人, 在上面防海. 就將那陳皇帝老少, 夏皇帝老少去王京, 不做軍, 不做民, 閑住他自過活. 王肯敎那裏住呵留, 下不肯時節載回來. 恁省家文書上好生說得子細了.”右丞相汪廣洋又致書曰, “曩因元政不綱, 群雄並起, 各擁兵衆分據土疆. 我聖上, 乘時啓運, 奮興淮右, 肇基江左, 命將四征, 削平群雄. 陳友諒竊據湖湘, 妄稱大漢, 明貞據有川蜀, 僭號大夏, 是以, 聖上統御六師, 親臨湖廣, 其陳氏勢窮力屈, 率衆就降. 去年春, 命中山侯·穎川侯等, 摠率師旅, 水陸並進直擣川蜀, 明氏力不能支璧請命. 皆已欽蒙聖恩, 特加赦宥, 保全其生, 然揆之以理, 不可使久處京師, 今令各將家屬, 往王國, 閑居. 如可則, 留之, 其不可則, 仍發廻還. 尙冀裁度.”乙丑 陳理·明昇等, 男婦共二十七人入京. 理·昇詣闕, 王出御報平廳, 理昇拜于階上, 王坐受之. 禮訖坐於使臣之下, 昇年十八, 理年二十二. 癸酉 孫內侍自縊于佛恩寺松樹. 甲戌 大雨, 王慮影殿漏濕, 親往觀之. 政堂文學韓仲禮買蘭秀山賊船, 帝聞之曰, “宰相不當買賊船, 宜速推還.” 船已壞.
六月 丁丑 下仲禮于巡軍獄, 督令修之. 戊寅 大雨, 王爲影殿之役, 祈晴. 辛巳 賜陳理明昇, 苧布九匹. 倭寇江陵府及盈德德原二縣. 命起壽陵于正陵之側, 百官以秩, 出役夫輸石. 乙酉 改官制. 倭寇安邊咸州. 以安邊府使張伯顔不能備禦, 杖八十七. 戊戌 濟州人殺叛賊, 以降. 李用藏之死, 判官文瑞鳳逃以免, 至是共推瑞鳳爲權知牧使, 遣人請命, 獻馬. 以李夏生爲安撫使. 己亥 以我太祖爲和寧府尹, 仍爲元帥以禦倭賊. 辛丑 倭寇東界安邊等處, 虜婦女, 掠倉米萬餘石, 免存撫使李子松官, 放歸田里. 壬寅 倭又寇咸州北靑州, 萬戶趙仁璧伏兵, 大破之, 斬首七十餘級, 拜奉翊大夫. 癸卯 倭寇洪州.
秋七月 戊申 影殿鍾樓成, 王以爲尙未高大, 卽命改營. 己未 倭寇楊廣道. 癸亥 以太后誕辰, 放囚. 辛未 遣同知密直司事金湑如京師, 進方物, 同知密直司事成元揆, 賀聖節, 版圖判書林完賀, 千秋.
八月 甲辰 王微行幸影殿. 甲午 影殿鷲頭成, 其飾黃金六百五十兩, 白銀八百兩. 壬寅 遣贊成事姜仁裕如京師, 謝賜綵匹, 表曰, “使華忽至, 天貺特加, 揆分踰涯, 措躬無地. 臣智不足以圖治, 才不足以文身, 自愧荒踈, 粗保箕裘之業, 何圖 末, 上煩黈纊之聰? 爰從歸附以還, 叨荷寵靈之被, 禮服樂器, 示華制於方來, 經籍史書, 發良心於久昧. 加匪頒之殊渥, 旣滋至而弗堪, 又此, 拜嘉, 彌用增惕. 皇帝陛下, 師禹致美, 法文卽康, 命服則在笥之是遵, 御將則解衣之尤急. 遂令幅員之廣, 咸入經綸之中, 如臣之微, 受賜亦厚, 敢不推好賢之美意, 弊又改爲, 竭祝壽之卑誠, 服之無斁?”
九月 戊申 王使僧唱無常歌, 聽至夜分. 辛亥 尹桓罷, 以慶復興爲左侍中. 甲寅 王微行, 幸影殿, 觀鷲頭. 庚申 楊廣道巡問使趙天輔, 與倭戰于龍城, 敗死, 王命追贈. 壬戌 張子溫·吳季南還. 帝賜王藥材, 親諭子溫等曰, “前年, 恁國家, 爲耽羅牧子的事, 進將表文來呵. 我尋思, 這耽羅的牧子, 係元朝達達人, 本是牧養爲業, 別不會做莊家. 有又兼積年, 生長耽羅, 樂土過活的人有. 更這廝每, 從前殺了恁國家差去的尹宰相麽道. 把這廝每遷將別處住去呵, 怕那廝不知國王的好意思, 疑惑着別生事端, 所以不准來. 今番這廝每, 又怎的如此作亂有? 我如今國王根底, 與將書去有恁到那裏國王根底備細說者. 休小覰他, 多多的起將軍馬, 盡行勦捕者! 我聽得恁那地面裏倭賊縱橫, 劫掠濱海, 人民避怕逃竄, 不能鎭遏. 致使本賊過海前來作耗的上頭, 我這裏戒飭沿海守禦官, 見獲到前賊船一十三隻有. 若耽羅牧子每, 與此等賊徒, 相合一處呵, 勦捕的較難有. 又聽得女直每在恁地面東北, 他每自古豪傑, 不是分守的人有, 恁去國王根底, 說着用心堤坊者. 又聽得恁國家疑惑大麽道, 自古天下, 有中國, 有外國, 高麗是海外之國, 自來與中國相通, 不失事大之禮, 守分的好有. 况今朝聘之禮, 不曾有闕, 有甚麽疑惑處? 昔日, 好謊的君王, 如隋煬帝者, 欲廣土地, 枉興兵革, 敎後世笑壞他, 我心裏最嫌有. 我這說的話, 恁去國王根底明白說到.”又手詔曰, “七月二十五日, 張子溫至, 表言, 耽羅牧子無狀, 官吏軍兵, 沒於非命, 深可恨怒. 春秋之法, 亂臣賊子, 人人得而誅, 今牧子如此, 所當誅討. 然國無大小, 蜂蠆有毒, 縱彼可盡滅, 在此亦必有所傷. 蓋往者之失, 因小事而搆大禍, 惜哉. 豈非烹鮮之急? 情忌至甚而致然歟? 事旣如是, 王不可因循被侮, 其速發兵以討! 然事機緩急, 王其審圖之!”
冬十月 甲戌朔 寘子弟衛, 選年小皃美者, 屬焉, 以代言金興慶, 摠之. 於是, 洪倫·韓安·權瑨·洪寬·盧瑄等, 俱以寵幸, 常侍臥內. 王性不喜色, 又不能御故, 公主生時, 御幸甚稀. 及薨, 雖納諸妃, 置諸別宮, 不能近, 日夜悲思公主, 遂成心疾. 常自粉黛爲婦人狀, 先納內婢少者房中, 取袱掩其面, 召興慶及倫輩, 亂之. 王從旁室穴隙, 視之. 及心歆動, 卽引倫輩入臥內, 使行於己如男女. 更數十人乃已, 由是, 日晏乃起, 其或稱意, 賞賜無筭, 王慮無嗣, 因使倫安等, 强辱諸妃, 冀其生男, 以爲己子. 定·惠·愼三妃, 死拒不從, 後幸益妃宮, 使興慶·倫·安等通妃, 拒之, 王拔劒, 欲擊, 妃懼從之, 自是矯旨數往來.乙亥 王謁昌陵. 丁丑 王祭正陵, 祭畢, 巡視塋域, 徘徊悲思, 御丁字閣, 對公主眞設宴, 奏胡樂, 獻酬如生平. 己卯 謁陽陵, 於道上, 奏雜戱, 還宮. 以宦者金師幸能督工役, 賜鞍馬. 辛巳 倭船二十七艘, 入陽川, 留三日, 諸將領兵出戰, 我軍皆成衆愛馬, 未習水戰故, 大敗. 賊奪元帥旗鼓, 至江華, 遺邑人而去. 王以各司成衆愛馬及五部坊里人, 分隸五軍. 庚寅 親率五軍, 出次昇天府. 辛卯 次白馬山. 壬辰 次芒浦峯, 判事洪師祖不被甲, 王怒命歐之. 開城叅軍金臣儉, 不脩橋梁, 又杖之. 癸巳 次安國寺峯. 甲午 次引月串, 放火箭.乙未 登經浦峯, 觀舟, 遂次龍泉寺峯, 以宿衛不嚴, 杖諸提調官. 謂贊成事安師琦曰, “予之此行, 非好慢遊, 欲觀行師如何耳. 庚子·辛丑之紅賊, 非不可禦, 庚寅以來之倭賊, 非不可敵, 而民被虜掠, 國至播越者, 以用兵無律, 號令不嚴耳. 今予親臨, 尙有不用命者, 况諸將代行者乎? 卿其體予至意, 曉諭衆人, 自今軍令, 毋或不謹.” 丙申 次甑山峯, 終夜設火山儺戱, 以觀. 丁酉 於道上, 設儺戱, 還宮.
十一月 己酉 王親祭魂殿. 甲寅 幸王輪寺. 丁巳 設八關會, 幸法王寺. 辛未 遣判密直司事盧稹如京師, 謝賜藥材藥方表曰, “遠頒妙藥, 明示秘方, 登受以還, 感銘奚極. 臣禀資旣劣, 攝養多乖, 遂成步履之艱, 動違式禮, 濫處藩維之重, 恒軫虞憂. 寵錫鼎來, 兢榮交集. 皇帝陛下, 體天地生成之大, 推性情惻隱之端, 憐臣痼疾之難瘳, 賜臣良劑之有效. 敢不謹修職而圖報? 益殫誠而祝禧.” 壬申 遣大護軍金甲雨獻耽羅馬五十匹. 遣判書張子溫聘于遼東. 甲戌 親祭顯·慶·毅·善·高·淑·德諸陵. 乙亥 親祭正陵. 無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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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역 고려사: 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