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직 김치만(金致萬:1697~1753)은 자가 화일(華一)이고 호는 고은당(高隱堂)벼슬은 시직을 지냈다. 음직으로 참판을 지낸 김희로(金希魯)의 아들이요 정승 김구(金構)의 손자이고 정승 이세백(李世白)의 외손자이며 판서 홍석보(洪錫輔)의 사위이다.
큰 키에 수척한 모습이 참으로 산야에서 사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문사가 넉넉하였고 해서(楷書)와 반행서(半行書)를 잘 썼으며, 사람 됨이 담박하고 고상하여 벼슬아치 티가 나지 않았다.
마음은 외모처럼 툭 트여 막힘이 없었고 그를 대해 보면 소탈하고, 낙천적이어서 명리와 술수를 몰랐다. 문인 정래교(鄭來敎)가 지은 ‘고운자전(高隱子傳)은 바로 그에 대한 것이다.
우리 아버님이 일찍이 소공동에서 이웃하여 살 때 그가 우리 집에 왕래하였다. 우리 아버님이 그의 선대에 쓴 「예설(禮說)」이란 제목의 책을 빌려 보았다가 잃어버렸다. 그는 몹시 애석히 여기면서도 또 다른 책을 빌려주며 마음의 꺼림을 두지 않았다. 그 「예설」은 마침내 다시 찾아서 돌려 주었다.
그는 문장가로서 자처하지 아니하였고, 또한 학행을 내세우지 않았으나 품행이 자연스럽게 도가 있어 세상에 홀로 우뚝해 보였다. 만약 동시대에서 짝을 구한다면 배와 김상숙(金相肅), 부제학을 지낸 윤심형(尹心衡)과 더불어 하나의 흐름을 이루는 인물이었다. 그의 중부(仲父)인 정승 김재로(金在魯)는 영조의 인정을 받아 가장 중요한 자리를 30년 가까이 맡아 있다가 끝에 대신 이언세(李彦世)의 심한 공격을 받아 김재로의 온 집안이 걸려들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오직 그 맏형 참판 집안만은 한 글자도 비방에 걸려들지 아니하였으니, 세상에서 모두 말하기를 김치만과 그의 두 아들 종후(鍾厚) 종수(鍾秀)가 몸가짐을 잘함 때문이라고 하였다.
김치만은 일생토록 벼슬이 시직을 넘지 못하였으며, 맏아들 김종후는 재야에서 뽑혀 올라 벼슬은 자의(諮議) 남대(南臺)를 지냈다. 막내아들 김종수는 문과로 진출하여 대제학을 거쳐 정승에 이르렀으며 지금 임금(정조) 때에 조정에서 핵심적 위치에 있다.
김치만은 반행서를 잘 하였고 또 청백리로 이름이 나서 지금 임금이 특별히 그에게 사제(賜祭)를 내렸다.
김종수가 조정에 서서 자기를 잘 지켰던 것은, 세상에서 전하기를 “김종후가 가르친 힘이 많았다”고 한다. 『병세제언론 18세기 조선 인물지』
【주】
이 상소는 「영조실록」 20년 10월 14일조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김 제로가 탕평책을 앞세워 그의 일가 친척을 등용하고 있고, 무신년(1728)의 변란에 관련된 역적들을 옹호하며,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팔고 아첨을 일삼는다는 등의 일을 열거 하고 있다. 같은 달 25일조에는 이에 답하는 김제로의 상소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