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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4시 기상.
훈자의 마지막 아침을 발티트성에서 맞이하기 위해 호텔을 나선다 (5:00).
- 아직 잠에 취해있는 조용한 마을의 언덕길을 올라가 발티트성에 도착하니, 일출의 태양빛이 라카포시의 하얀 설산부터
깨우기 시작한다.
발티트성을 거닐며 훈자마을의 풍경을 눈과 마음에 담으며, 훈자에서의 일주일간을 정리해본다.
(발티트성에서)
(알티트마을과 알티트성)
(라카포시와 나가르마을, 훈자강)
(발티트성을 떠나며)
- 발티트성을 나서서 언덕길을 되돌아 내려오노라니, 땀을 흘리며 아침 조깅을 하고 있는 철인님을 만난다.
일년에 몇번씩 철인경기에 참가하고 있는 철인님께서는, 이번 여행중에도 아침운동을 거의 거르지 않고 체력단련을 하고 계신다.
(발티트성까지 갔다가 내려오고 있는 중)
- 아무도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의 아침산책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다 (6:00).
(호텔로 내려가는 중)
- 호텔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에 (7:00), 배낭 정리를 마치고 체크아웃을 한다.
호텔 앞마당에 미니버스 2대가 도착해, 우리일행들의 짐을 차에 싣는다.
- 호텔 입구의 담에 앉아서 호텔 종업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 후에, 미니버스에 올라 7박8일을 머물며 여러 추억을 만들었던
훈자를 출발한다 (9:00).
' 훈자, 굿바이 !'
' 살람 ! 훈자 '
(미니버스에 일행들의 짐을 싣고 있다)
(호텔 종업원들과 함께 기념촬영)
- 훈자를 출발해 카라코람하이웨이를 따라 달리던 미니버스가, 라카포시 뷰포인트에 정차한다.
휴게소의 야외 탁자에 앉아 짜이를 마시며, 라카포시의 아름다운 자태를 바라보며 작별인사를 건넨다.
(라카포시)
(뷰포인트의 휴게소에서)
(휴게소 옆에 있는 다리)
(다리 아래를 찍어보았다)
- 도중에 3회에 걸쳐 검문을 받으며 여권 내용을 기재한 후에, 훈자를 떠난지 4시간이 지나 길기트의 시내 중심에 위치한
'파크 호텔'에 도착했다 (오후 1:00).
(검문소 풍경들)
(길기트의 숙소인 '파크 호텔')
(파크호텔의 정원)
(*) 길기트 (Gilgit) :
- 파키스탄 길기트 발티스탄주의 주도로서, 파키스탄 변경지구의 군사상 거점이며 부근의 소수민족에
대한 행정의 중심지로, 카라코람산맥을 이루는 언덕들 사이에 위치하며 평균 해발은 1,500m이다.
- 길기트는 예로부터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로, 남북으로 카라코람하이웨이가 지나가면서 파키스탄과 중국이
연결되고, 동쪽으로 인더스강을 따라 스카르두와 라다크로, 서쪽으로는 산두르패스를 지나 힌두쿠시산맥에
위치한 치트랄로 이어진다.
- 한때 불교가 번성했던 이곳은 중국에서는 소발률국(小勃律國 / 스카르두, 大勃律國)으로 불렀으며,
중국과 인도를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거점도시라 많은 사람들이 거쳐갔는데, 우리나라의 혜초스님과
고선지장군도 1,300여년 전에 이곳을 방문했다.
- 이슬람교의 수니파와 시아파, 이스마일리파가 혼재하며, 새벽부터 한밤까지 하루 5차례씩 모스크에서
무슬림의 예배소리가 들려오는 곳이다.
- 호텔 방을 배정받아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미리 예약해둔 짚차에 오른다 (오후 1:10).
카르가 마애불과 길기트 현수교, 날타르 계곡 등을 관광하기 위해, 5명이 복마니님을 통해 짚차를 대절한 것이다
(짚차 대절료 6,000루피, 운전기사 팁 500루피).
- 먼저 카르가 마애불쪽으로 향한다.
길기트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가, 좁은 산길로 들어서더니 찻길 끝에서 짚차가 멈춘다.
- 차에서 내려서 얼마를 걸어 조그만 계곡 위의 다리를 건너, 카르가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 앞에 이르렀다.
산비탈을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가, 암벽 주위를 돌아다니며 불상과 주변 풍경을 사진찍는다.
(*) 카르가(Kargah) 마애불 :
- 7세기 토번 점령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거대한 수직 암벽에 새겨진 3m 높이의 마애불로,
마애불형식의 동점로에서 중간에 위치한 작품이라는 것과 이미 형상이 몽골로이드형으로 변했다는 점 등으로,
불교사적 상징성이 매우 큰 부처상이다.
- 갸름한 얼굴에 오똑한 코의 아리안족형이 아니고, 펑퍼짐한 얼굴에 낮은 코를 가진 동앙인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이 형상의 불상이 중국과 한국, 일본 등 동쪽으로 전해지게 된다.
- 1931년에 발견된 이 마애불과 인근의 사원 유지, 3개의 스투파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지금은 모두 여러나라의
박물관으로 흩어져있는 상태이다.
(카르가 마애불)
(왼쪽 길에서 오른쪽 길로 이 다리를 건너온다)
- 카르가 마애불의 맞은편에 위치한 언덕 위의 조그만 마을로 올라가본다.
한 현지인으로부터 이곳의 유적에 대해 설명을 들어보니,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 주변에 사원과 스투파 등의 유적지가
있다고 한다.
- 불교 전문가나 학자들에게는 자세히 탐사해볼만한 유적지인가는 모르겠으나, 우리들은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짚차에 오른다 (오후 2:00).
(카르가 마애불쪽에서 바라본 맞은편의 마을)
(마을쪽에서 현지인과 함께)
(언덕 위 마을에서 바라본 마애불)
- 길기트 시내로 되돌아와 길기트강 위에 놓여있는 현수교에 도착했다.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장군인 고선지가 747년 길기트(소발률국) 원정시에, 토번(티벳) 원군이 길기트강을 건너오는 것에
대비하기 위해, 길기트강에 있는 다리를 끊었다는 역사가 깃든 곳이다.
- 우리 선조인 고선지장군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거니와, 당시에 당나라도 두려워할만큼 막강한 국력을 지녔었으나,
현재는 중국의 한 자치구로 전락한 티벳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며, 한 국가의 흥망성쇠를 반추해본다.
- 그런데 강 위에 있는 이런 허술한 다리가, 현재에도 무슨 대단한 안보사항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다리 옆에 천막을 치고
근무하고 있는 경찰관이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한다.
한 회원께서 경찰관과 이야기를 나누며 주의를 분산시키는 틈을 이용해 사진을 찍었다.
(길기트 현수교)
(다리 옆에서 천막을 치고 근무중인 경찰관과 - 경찰관 왼쪽은 짚차 운전기사다)
- 파키스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 하나라는 날타르마을을 향해 출발한다.
안내책자에는, 길기트에서 날타르마을까지 약 2~3시간이 소요된다고 나와있다.
카라코람하이웨이 옆에 있는 훈자강을 따라 북쪽으로 달리다가, 왼쪽 방향으로 들어선 후에 작은 마을을 지나면서
비포장 계곡길을 계속 거슬러 올라간다.
- 그런데 예상치 못한 난감한 상황이 발생한다.
짚차 운전기사가 영어를 전혀 못하는 바람에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데다가, 이 운전기사도 날타르밸리는 초행길인 모양이다.
서로 대화가 되지않는 답답함 속에서, 험한 자갈길과 계곡을 건너 앞으로만 나아가는 형국으로, 지나가는 사람이나 자동차도
눈에 띄지 않는다.
- 사륜구동차인 짚차나 지나갈 수 있는 험한 길을 이렇게 한참을 달리노라니, 넓은 감자밭과 돌담집들이 산속에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는 날타르마을이 나타난다.
- 우리는 마을에서 떨어져있는 외딴 돌담집 앞에 멈추었다.
원래는 날타르호수로 가는 길을 물어보려고 하였으나, 원주민 집안을 구경도 하고 점심겸 음식도 먹어볼 요량으로 돌담집 안으로
들어간다.
낯선 이방인의 방문에 어두컴컴한 집안에 있던 가족들이 반가워하면서, 짜이와 짜파티, 감자 등을 내어놓는다.
한 남자가 영어가 가능하고 한국의 태권도를 배웠다고 하며 즐거워해, 이 집에 살고 있는 가족 등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 음식값으로 얼마간의 사의를 표하고 돌담집 밖으로 나와, 날타르호수로 가는 길을 물어본다.
날타르마을의 호텔에서 일하고 있다는 한 젊은이가, 호수로 가는 길과 소요 예정시간을 짚차 운전기사에게 설명해준다.
(날타르마을을 지나 한 돌담집 앞에서)
(외딴 돌담집 풍경)
(어두컴컴한 돌담집 안에서 - 불을 피워 짜이를 끓이고 있다)
(뒷편으로 날타르마을이 보인다)
(주변 풍경)
- 마을을 벗어나 계곡을 따라가다가, 전나무숲으로 둘러싸인 초원지대를 지난다.
아마도 이곳이 여행책자에서 말하고 있는, '목동의 숲'이라고 부른다는 방글라(Bangla)가 아닌가 한다.
한 회원께서 말하길, 이제 전나무숲이 끝나고 자작나무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날타르호수가 멀지 않았다는 글을 읽었다고 한다.
(방글라로 추정되는 곳을 지나며)
- 길도 모르고 말도 통하지 않는 어리고 착해보이는 운전기사는, 우리가 계속 '날타르호수'와 '고, 고'라고 외치자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런 말도 없이, 계곡의 자갈길을 어렵게 어렵게 열심히 지나간다.
- 한참을 가다보니, 호수는 언제쯤 나타날지 모르겠고 돌아가는 길이 걱정된다.
날이 어두워지면 이 험한 산길을 내려가는 게 위험할 것도 같고, 짚차에 기름은 충분히 있는지도 염려스럽다.
- 일행들이 의견을 나눈 결과 여러 정황상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여, 운전기사에게 길기트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차를 되돌려 돌아오는 길에, 산비탈에는 쭉쭉 뻗은 히말라야 삼나무가 그득하고 옥빛 계곡물이 흐르고 있는 다리 위에 차를
세우고, 계곡에 내려가 손도 씻고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휴식을 취한다.
(다리 위에 차를 세우고)
(옥빛 물이 흐르고 있는 계곡으로 내려가)
(손을 씻어본다)
(주변 풍경)
- 날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계곡과 산비탈의 자갈길을 되돌아오는 것이 만만치 않다.
어떤 곳에서는 일행이 하차해 걸어가기도 하는 등, 우리들은 이날 날타르밸리에서 오프로드 체험을 제대로 해본 셈이 되었다.
- 뒤에 정리해보건대, 날타르밸리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맛보기 위해서는, 최소한 1박2일의 시간을 가지고 날타르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에, 날타르호수까지 걸어서 트레킹을 해보기를 추천한다는 여행책자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오늘 우리들은 짧은 시간으로 날타르밸리에 점만 찍고 오는 상황이 되었다.
(계곡 옆에서 녹아가고 있는 빙하를 걸어본다)
(요런 자갈길을 계속 지나왔다)
- 복마니님과 핸드폰을 주고 받던 운전기사가, 험한 길을 벗어나 카라코람하이웨이에 들어서면서부터 엄청나게 달리기 시작한다.
아마도, 저녁식사 시간에 늦지 않도록 돌아오라는 복마니님의 전화였던 모양이다.
- '이렇게 막 달려도 되나 모르겠네?'라며 마음을 졸이던 우리는, 아무튼 운전기사의 과속 질주 덕분에 예상보다 매우 일찍
호텔에 도착했다 (저녁 7:30).
다른 일행들께서는 저녁식사가 끝나가는 중이고, 우리 식사자리는 따로 마련해두었다.
날타르밸리에서의 오프로드 체험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좀 늦은 저녁식사를 한다.
(저녁식사 후에, 철인님이 쏘시는 밀크커피를 마시는 중 - 벽에 K2의 사진이 붙어있다)
- 길기트에서는 무슬림 종파간에 유혈충돌이 잦은 곳이니, 외출할 때 안전에 신경을 쓰도록 하고, 특히 사진 찍는 일에 매우
조심하라는 복마니님의 사전 당부가 있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여행을 떠나기 한달 전인 4월초에도, 시아파와 수니파의 충돌로 인해 여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벌어져,
외국여행객들의 발이 묶이고 군용비행기로 길기트를 벗어나는 사태가 있었다.
이때문에 파키스탄으로의 여행을 재고해보라는 주위의 권유도 받았었다.
-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 방에서 쉬고 있노라니, 모스크에서 아잔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지고 있다.
훈자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매혹적인 무슬림의 예배소리에 마음이 끌려, 길기트의 밤거리를 한번 거닐어볼까 하다가,
'아서라. 몸조심하자'라는 생각으로 자리에 눕는다 (밤 10:30).
((*)) 이슬람교의 종파와 현황에 대해서 간략히 정리해본다.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1) 종파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계자 문제 때문에 나누어졌으며, 현재 약 200여개의 종파가 있음) :
ㅇ. 수니 (Sunni)파 : - 사우디아라비아 등 전체 무슬림공동체(움마)의 약 90%를 차지하는 주류.
- 수니란 '무함마드의 순나' (무함마드의 가르침과 관행을 기록한 것)를 따르는 자들을 의미함.
ㅇ. 시아 (Shi'ah)파 : - 이란을 중심으로 10% 정도를 차지.
- 4대 칼리파 (후계자)인 알리를 추종하는 세력.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사촌동생인 알리의 추종자들이라는 의미의 '시아트 알리'에서 나온 말임.
무함마드가 초대 칼리파 (또는 이맘)로 알리를 지명했다고 믿는 사람들을 일컬으며,
따라서 이들은 알리 이전의 세 칼리파들을 찬탈자라고 부르고 있다.
ㅇ. 수피 (Sufi)파 : 신비주의적 분파인 수피즘은 시아파와 수니파에 섞여있으며, 종교라기보다는 철학, 사상에
가깝고, 금욕적인 자기수양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
수피즘의 유일한 목적은 신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춤과 노래로 구성된 독자적인 의식을
갖고 있다.
ㅇ. 이스마일리 (Ismaili)파 : 시아파의 한 분파로, 훈자 주민이 해당되며 파키스탄 인구의 1%정도를 차지함.
ㅇ. 파키스탄 인구의 60~65%는 수니파이며, 북파키스탄 주민은 시아파임.
(2) 이슬람교 현황 :
- 세계인구 65억 중에서, 1/5을 차지하는 13억명의 신도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은 세계 140여개국에 퍼져 살고 있다.
- 이슬람은 세계인구의 22퍼센트로, 33퍼센트의 기독교 다음으로 신도 수가 많으나, 기독교를 가톨릭과 개신교로
나누면, 무슬림 수가 세계 1위이다.
(불교 신도수 : 4억 명, 힌두교 : 7억 명, 유대교 : 2천만 명)
- 인도네시아 (1억 8천만 명), 파키스탄 (1억 4천만 명), 방글라데시 (1억 1천만 명), 인도 (1억명),
아랍인 무슬림 수는 약 3억 명, 터키 (7천만 명), 이란 (6천 5백만 명), 이집트 (5천 9백만 명), 나이지리아 (7천만 명),
미국 (8백만 명 / 미국내 유대인 수는, 약 6백만 명?), 유럽 (1천 7백만 명 : 프랑스 4백만, 영국 4백만,
독일 250만 명 등), 중국 (4천만 명)..
- 한국의 이슬람교 현황 : 무슬림 수는, 약 1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음 ( 한국인 35,000여명, 외국인 65,000여명).
이슬람 모스크 수는, 전국에 5개 (1976.5.21. 개원한 한남동 소재 '서울중앙성원'이 최초).
첫댓글 카르가 마애불을 조성하려고 바위를 일부 절단하고 윗부분은 자연 지붕으로 닷집을 만들었나 봅니다.
원래 바위를 어느 정도 정리 하고 조각하지만 지붕을 만들려고 저리 큰 바위를 이리 싹뚝 자르다니...
최근까지도 닷집이 잘 보존 되어있었든 듯 하네요.
위부분 돌지붕 덕에 1300년이 지나도 조각이 그대로 있으니 만들 때 저리 공을 들여야 훗날에도 영광이 있나 봅니다.
불상이 저 정도면 유적이 많았을 터인데...
불교유적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유적지일 것 같습니다.
박물관대학 경력 20년 이상인 흐니님께서 가셨더라면 좋아하셨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