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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2월 25일 안양교도소에선 아버지를 포함한 많은 크리스마스 특사가 있었다. 나가는 이들과 그 가족들은 기뻤겠지만 그 명단에 빠져 뒤에 남아있던 삼총각(이수병, 유근일, 김을수)같은 이들과 그들 가족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 다음 다음 해 그들도 모두 나오긴 했지만 정이든 선배 스승들이 거의 다 나가고 난후 텅빈 듯한 그 곳에서 필경 갑자기 부모잃은 고아같은 쓸쓸함에 시달리었으리라. 일년 후 사면된다는 약정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닌 막막한 세월앞에서.
그리고 이어 그 몇일 후 12월 말에 인사동 태화관(泰和館)에서 안양 교도소에서 나오신 분들이 우리 위문음악회팀들을 위해 졸업축하 겸 특별 감사 만찬회를 열어 주었다. 갓 교도소에서 나와 여전히 궁핍하셨을텐데도 돈을 모아 그 당시 가장 비싼 장소를 택해 고급 요리로 우리의 졸업축하연을 베풀어주신 대 스승님 되시는 분들에게 우리는 고마운 정도가 아니라 황공하였다.
거문고 김선한, 첼로 김양자, 소프라노 모경옥과 사회자인 나 외에도 몇몇 친구들이 참석했고 나의 감사 대표인사에 이어 아버지의 말씀 그리고 이어 박진(朴震)선생님의 환영인사 말씀이 계셨다. 간수들이 없어 마음 껏 말을 서로 나눌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평소에 고급 비싼 요리는 생각도 할수 없었던 우리는 진수성찬도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우리들 외에도 김지하 하일민 김정남 등 문리대 졸업생들도 여럿 참석했는데 이름은 다 생각이 안 난다. 특히 서민호(徐珉濠 1908~1974)선생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었다. 그 분의 중후하고 품위있는 모습은 내 생각에 만일 조용수사장이 살아있어 늙는다면 바로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싶고 그때 처음으로 진짜 남자들의 멋진 외모는 50 이후에 완성되는 것이구나 싶었다.
서민호선생은 일제때 3.1운동,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우었고, 국회의 부산 피난시절 갖은 압력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국민방위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을 국민들에게 폭로한다. 반(反)이승만의 비판적 성향으로 인해 소위 '서민호 의원 사건'으로 8년간이나 실형을 살다가 4.19후 특별사면으로 출옥하였다. 그 때 태화관에 참석한 얼마 후엔 67년에 창당된 대중당(大衆黨) 최고위원으로 대통령선거에도 출마하였으나 다시 반공법위반으로 옥살이를 하는 등 평생 많은 고초를 겪은, 강직한 성품의 양심인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 때 생각하기를 평생 옥살이로 고생했으면서도 외모는 옥골선풍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비결은 아마 스스로의 양심에 만족하며 굴하지 않고 살아오신 순수함 때문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런 순수함이라면 그 날 태화관에 모이신 모든 애국자들의 걸어온 삶이 증명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연세가 높으시고 국내외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오신 박진(朴震 1901~1967)선생님을 나는 먼저 꼽고 싶다.
선생님은 목포상업학교에 다니던 14세 때 이미 민족독립운동사건으로 퇴학이 되고 다음 해엔 서울 기독청년회학관에서 독립운동 지하인쇄물사건으로 쫒기게 되어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여 신채호(申采浩)선생밑으로 들어가 수발을 해드리며 공부를 하여 수제자가 된다. 선생님의 천재성은 그 단재(丹齋)선생아래 공부하면서 중국어, 노어는 물론 영어, 불어까지 능통하게 되어 일어는 이미 능하였으니 우리말까지 모두 6개국어에 능통하신 셈이었다. 그 후 선생님은 대한임정(大韓臨政) 외무부에서 그 외국어의 번역과 통역에 큰 공헌을 하시게 된다. 나는 선생님이 출옥 후 내 친구 모경옥과 몇번 개인적으로 만나 뵈웠는데 영어를 우리말과 다름없이 유창하게 말씀하시어 대학나온 우리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정도라 6개국어 실력이시라는게 사실이구나 싶었다.
박진선생의 대스승이신 단재 신채호 손생은 1936년 2월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신다. 그 10년 후 박진선생이 귀국하실 때는 많이 발전이 되어있어 사학력(史學力)으로는 이미 단재선생보다 훨씬 높아 있었다. 1945년 8.15 이후 12월엔 서울로 오셔서 "특별한 대중조직없이 맞는 이 8.15는 앞으로 여러가지 문제성이 있는데 가장 문제되는것은 북(北)의 관념론적 공산주의세력과 남의 회개하지 못한 일제 세력들의 대립으로 인한 남북분계사태(南北分繼事態)이다. 지금이라도 가장 효과적인 길은 민족사의 건설(建設)과 그 역사적 책임당(責任黨)인 사책당(史責黨)과 그 대중운동 조직의 수립이다" 라 주장하신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함께 정치참여기관인 '민족건양회(民族建揚會'를 수립하신 후 그 민양(民揚)의 초대 책임간사로 일하신다. (2대 책임간사는 문한영 선생)
선생님은 그 당시 공산주의측 주장같이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계급혁명이나, 친일이든 항일이든 묻지말고 무조건 뭉치자는 이승만노선이 아닌, 어디까지나 민족사의 건설과 그 인간사 방향의 지양을 주장하셨다. 그로인해 선생은그 후 구속 등 많은 고초를 당하게 되신다.
1961년엔 아버지와 함께 조직한 민족자주통일(民族自主統一, 약칭 민자통) 중앙협의회에서 사무총장자리에 계시다가 군사정권에 의해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루시면서 말년엔 교도소 병원에 지내시다가 아버지와 같이 출옥하신 터였다.
출옥 후 서울 도봉산 아래 어느 조용한 마을에 방을 빌려 요양을 하고 계셨는데 그 얼마 후 2월에 모경옥 친구와 한번 방문해 보았더니 2층 비닐장판이 깔린 방에 침대를 두고 방안엔 연통을 밖으로 연결한 연탄 난로를 피우고 계셔 아무리 그래도 연탄깨스가 샐텐데 해롭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 되었다. 왜 온돌방을 얻지 않으셨냐니까 자신은 오랫동안 해외에서 침대생활을 하여 이제 온돌방은 불편해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하시던 말이 생각난다. 아무리 정신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노심초사하여도 몸은 이미 현지의 생활에 익숙해 지는 것이구나 싶었다.
선생님은 빨리 회복이 되어 민족의 일을 계속해야 한다시며 그 이듬 해 온천도 있고 공기도 좋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계신 곳 가까이 오고 싶다 하시어 부산 동래온천장에 오셔서 요양하시다 얼마 후 한 작은 병원에서 병사하시었다. 선생님은 숨을 거두시기 전에 순진(!)하시게도 아버지와 주위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민족통일운동하다 옥살이를 했다고 정부에서 무슨 보상금이 나오거든 그 돈을 민족운동사업에 기부해 달라'하셨다.
보상금은 커녕 그 몇년 후 많은 조작사건이 더 있었고 안양교도소에서 자신이 그렇게도 아끼던 이수병후배가 잔혹하게 죽임을 당하는 등의 일을 아셨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겠는가, 나는 차라리 선생님이 그런 희망을 가지고 후일의 비극을 모르신 채 일찍 가실 수 있었다는 것이 더 나은 것 아니었나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렇게 조국의 해방과 통일을 위해 평생 자신의 인생을 다 바쳐 힘쓰신 분들을 우리 정부에선 어떤 대우를 해 드리었나. 그런것이 바로 우리는 아직도 진정한 해방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 날 태화관(泰和館)에서의 모임은 그 장소의 역사적 의미때문에 더욱 감회가 있었다. 태화관은 인사동에 있는 명월관(明月館)의 분점으로 그 전에는 친일파의 거두 이완용(李完用)의 집이었다. 그가 이또 히로부미와 정사를 논하던 그의 집이 되기 전엔 원래 세종대왕의 손녀가 살았고 헌종의 후궁 경비의 사당이 모셔진 왕가의 집이었다. 그랬던 곳이 경술 국치후 이완용의 소유로 그냥 넘어간 것인데 어느 날 정원에 있던 고목에 벼락이 떨어지자 이완용은 무언가 짚히는게 있었던지 팔려고 내 놓은것을 명월관 주인이 사 들였던 것이다.
그 공짜로 국가 왕실재산을 하사받은 이완용은 명월관에 엄청난 가격으로 팔았을 터인데 그 돈은 대대로 그 후손들의 학비와 부로 충당되었을 것이다. 이는 역사를 일제에 팔아먹은 우리 역사왜곡의 주범인 그의 조카 이병도(李丙燾), 그리고 서울대 24대 총장을 지낸 이완용의 증손자 이장무(李長茂), 이장무의 친동생인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이건무(李健茂)등 후손에게 면면히 그 매국 정신과 부(富)가 이어 내려오고 있음이다.
오죽하면 단재(丹載)선생은 '혼이 없는 우리 민족'이라 통탄 했겠는가. 단재선생의 밑에서 공부하신 박진선생은 민족의 혼이 살아있었지만, 이장무총장의 밑에서 공부한 서울대생들은 교수들이나 많은 시스템의 압력속에 얼마나 민족의 혼을 말살 당했을까. 하긴 이장무후손이 총장으로 있었던 2006년 이래 서울대생들은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하였으니, 2006~2010 까지였지만 한번 가지치기로 다스려진 나무가 싱싱하게 되살아나기는 어려운 일이겠다.
이완용의 후손이 옛날 같으면 대제학의 최고벼슬에 해당하는 서울대 총장까지 지내도록 허용하고 있는 우리는 모두 혼이 빠진 자 들인가. 진실한 의미로 해방을 아직도 쟁취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후손들은 온 몸을 바쳐 독립을 위해 싸우다 가신 선조들에게 면목이 없을 뿐이다.
아버지는 6.25전에는 대구 청구(靑丘)대학에 계셨는데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이 합쳐져 후에 지금의 영남대학이 됨) 피란 후 함양군 안의중고등학교 교장대리로 가시어 우리는 그 교장관사에 잠깐 살게 된다. 그 때 부산 동래에서는 민양(民族建揚會의 준말)회원들이 활발하게 모임을 가지고 있어 아버지는 그 민양(民揚)에서 열심히 발족 일을 하고 있는 박진선생과 문한영동지등을 만나러 동래에 가신다. 먼저 경주이씨 집안 할아버지이신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1869~1953)선생댁을 찾아가니 동지들이 그 댁에 모여 있었고, 그 자리에서 이시영선생은 아버지에게 부산에 와서 민양일을 도우라 하신다.
52년 내가 부산 금정국민학교 1학년에 잠깐 다닐 때 아버지가 동래온천동에서 이시영선생을 모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중절모를 단정히 쓰시고 짙은 회색 두루마기에 스틱을 짚으신 아버지보다 훨씬 작으신 체구셨는데 단 한번 뵈웠지만 그 전체적인 모습에서 풍겨나오던 고귀한 위엄이 어린 내가 보기에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아주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으시었고 아버지는 그보다 반걸음 뒤에 읍하는 자세로 걷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가 다른 누구를 그렇게 정중하고 극진하게 대하는 모습을 그 후 본 일이 없다.
어렸을 때 나는 우리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이라 알고 있었는데 그런 아버지가 그렇게 극진히 정성을 다 하시는 걸 보고 그 분이 그렇게 훌륭한 사람인가 경이로웠다. 그래서 그 때 그 분이 누군지 모르지만 대단한 분이구나 싶어 '이시영'이란 성함을 기억해 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분의 증손녀였던 것이다.
1952년 한국전쟁 당시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초대 이승만 대통령 임기만료을 앞두고 대통령을 선출할 국회에서는 반 이승만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었다. 52년 2월에는 국회의원 총 182명 중 123명이 민족건양회에서 추대하는 이시영선생을 대통령으로 하고 대통령책임제가 아닌 내각책임제의 정부를 조직하겠다는 연서를 작성한다.
이 사실을 4월 초에 알게 된 이승만은 불같이 화를 내며 이성을 잃은 듯 모든 불법적인 폭력행사를 가했으니 그것이 '부산정치파동'이란 사건으로 역사에 남게된 것이다. 급기야 5월 26일 출근하는 국회의원 48명은 국회의원 전용 통근버스 채로 헌병사령부로 강제연행되어 이틀간 억류당한다. 그들 중 곽상훈, 서범석 등 핵심 야당 의원들에게는 국제공산주의와 결탁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운다.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위한 정치공작을 펴는 과정에서 부산 일대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어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국회 내에서는 삼엄한 포위 속에서 기립표결로 이승만이 당선되고 60년 4.19 때 까지 이승만 정권은 유지하게 된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 하지만 만일 그때 국회의원들이 강제 납치당하지 않고 정상적인 수순으로 이시영선생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 후 우리나라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어 왔을까? 주위 제국주의 국가들이 한국을 ‘평화통일’되게 놓아 두었을까?
6월 20일엔 이시영, 김성수, 장면, 조병옥, 김창숙, 서상일 등 야당 및 재야인사 60여명이 부산 남포동에 있는 '국제구락부' 양식집에서 '호헌구국선언대회'를 개최하려다 '땃벌떼'라는 괴한들의 습격으로 무차별 몽둥이 세례 속에 무산되기도 하였다. 이승만의 전위부대인 그 무시무시한 서북청년(西靑)들이 중심이 된 단체들은 이름이야 '땃벌떼'니 '백골단' '납골단' 또는 이름을 그럴듯 하게 '민중자결단'이라고도 붙였지만 이름을 무엇이라 하든 이승만 정권하에서라야 존재할수있는 그들로서도 절대절명의 위기로 자신들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실지로 4.19 후 그들은 슬며시 대부분 교회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 당시 52년 내가 금정국민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였으니 아마도 3,4월이었을 텐데 아버지와 나는 금정계곡의 길을 따라 이시영선생의 댁으로 올라가는 길을 배웅해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두 분은 별 말이 없이 매우 침통해 계시던 분위기로 보아 아마 '정치파동'이 이미 시작돼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 장면을 기억한다고 후에 아버지는 놀래셨지만 어쩐지 나는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이시영선생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 다음 해 53년 4월 선생은 그 금정산방에서 눈을 감으시었다. 내 기억으로 그 만큼 빨리 가실것 같지 않아 보였는데 필시 그 '부산정치파동' 이후로 너무도 심노가 크셨던 탓 아닌가 싶다. 그 해 몇 달후인 7월 27일 3.8선에서 휴전협정이 이루어져 남북으로 나뉘어지는 것을 모르고 가신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그 몇일 후 아버지가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어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1892~1956)선생을 만났더니 선생도 아버지에게 '민양 일을 도우라, 부산에 직장을 구해둘테니까 이틀 후에 오라'하였다. 이틀 후에 갔더니 부산대학에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며 윤인구 총장을 찾아가라고 했다.
윤총장은 애국자이신 윤상은 선생의 자제이자 그 자신도 8.15를 경찰서 유치장에서 맞은 애국자이다. 대신동 그 부산대 관사에 살 때 우리는 제일 길가에 면한 집이었고 그 총장 댁은 학교 내 제일 안쪽에 위치했는데 아버지를 따라 가 보면 넓은 마당에 꽃과 야채가 보기좋게 심어져 있었고 윤총장님은 참으로 깨끗한 학자풍이셨다. 더 인상적인 분은 사모님으로 정말 품위있고 인상좋은 분이라 나는 넋을 잃고 바라보곤 하였으니 그 댁엘 간다하면 나는 기분이 좋아 언제나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학교내 그 안쪽 관사엔 우리집 뒤쪽으로 사학과 박인석(朴仁錫)교수댁이 있고 운동장 건너 그 맞은 편엔 영문과 박두석(朴斗錫) 교수댁이 있었는데 그 두분은 형제간이었다. 박인석교수의 큰 딸 박정미는 나와 같은 학년의 부산여중생이라 친구간이었고 그 아래 여동생도 내 동생 우기(雨紀)와 친구로 우리집에 자주 놀러왔었다.
그런데 그 박정미는 부산여중에서 항상 전교 1등으로 월요일 전교모임에서 상장을 받는데 비해 나는 월반후 하위권에서 맴돌아 정말 부끄럽고 창피스러웠다. 박정미는 그 후 서울대 전체수석으로 영문과에 입학하여 여학생이 최초로 서울대 수석을 했다고 신문에서 연일 떠들어 댔었다. 졸업 후에는 수녀가 되어 일본 캐톨릭계 어느 대학에 유학갔다 와서 귀국후에는 성심(聖心)여대 교수에 있다가 후에 총장직에 있었다. 내가 시골에 살다 88년 12월에 서울로 돌아와서 그 다음 해 박정미를 만나러 갔더니 그녀는 총장으로서 학생들 식당으로 나를 데려 가 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점심식사를 하는 등 소탈한 인상이었다.
40대 중반을 갓 넘긴 나이인데도 평생 얼마나 머리를 많이 쓰고 공부를 많이 했던지 머리가 하얗게 된 채 화장끼라곤 없는 수수한 옷차림인데도 비범한 품위와 권위가 배어 있었다. 그녀는 차림새나 외모에는 도무지 관심조차 없는 듯 보였는데 그런 초월한듯한 분위기가 참으로 신선해 보였다. 허지만 한가지 나는 그 특별히 좋은 머리를 후손에게 남겨주지 않고 독신으로 아깝게 자신 한 사람으로 그치고 있다는 것이 늘 아깝게 생각된다.
서대신동 그 부산대 관사로 이사가기 전 해 54년 동대신동에 살 때 하루는 아버지가 그 당시 부산에서 갑부로 소문 난 김지태(金智泰 1908~1982) 씨댁을 방문하는데 나를 데리고 가셨다.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그 분은 그 때 부산에선 '묵고보자 김지태'라는 유행어가 파다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조용한 주택가에 돌담이 길게 이어져 있는 큰 집이었는데 들어가니 일본식 정원이 아름답고 깨끗한 다다미가 깔린 방이 아주 많이 있었다. 김지태씨는 출타 중이라 했고 대신 그 사모님이 나와 접대했는데 한복을 곱게 입고 체구가 자그마한데 참으로 고운 자태와 분위기가 있어 나는 속으로 아 부자들은 저렇게 보통사람들과 다르게 생긴거구나 싶었다. 당시 아버지가 53세 셨는데 아버지 친구분이라는 김지태씨의 사모님은 생각보다 훨씬 젊고 아름다운 분이었다.
김지태씨는 46년 조선견직한국생사를, 그리고 52년엔 삼화(三和)고무를 창립한 재벌이었으며 자유당 2,3대 국회의원 시절엔 이승만 독재와 장기집권의 반대활동을 하다가 한계를 느낀 후 언론의 중요성을 느끼고 부산일보와 부산 MBC를 창립하여 많은 투자를 하신 분이었다. 53년엔 한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장학사업으로 부일(釜日)장학회를 설립하여 수많은 학생들의 학업을 도와 왔으나 5.16후 중정에 의해 강제 헌납되어 박정희에게 뺏긴 상태이다.
그 부일장학회는 '정수(正修)장학회'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김지태씨의 사모님과 자녀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현재 박정희의 자손들은 하루 빨리 그들에게 그 장학회와 거기 따른 재산들을 돌려 주어야 할 것이다.
그는 부산상고를 졸업한 후 조선청년동맹 부산지부의 간부직을 맡았다가 반일운동으로 부산경찰서에 구속된 적이 있으며 그 후 정묘(丁卯) 야학교를 설립하여 퇴근 후 밤엔 그 당시 학교에 못 간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한 교육에 남다른 열정이 있는 분이었다. 부일장학회(정수장학회)의 장학금을 받고 공부한 수 많은 이들은 이제 그 분의 자손들에게 그 장학회를 돌려 주는데 힘을 써 보답해 드리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라고 본다.
'서울엔 이병철, 부산엔 김지태' 라는 한국의 양대 재벌의 한 사람으로서 부산사람들의 자랑이던 그 분은 그렇게 박정희에게 철퇴를 맞은 후 이제 나이 드신 부산사람들 외엔 그의 이름조차 잊혀진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하루는 부산대 교수회의에서 한 교수인준회의가 열렸는데 경북(慶北)대학 박 모교수로 부산대학에 전직을 희망해 온 것에 대해 가부간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교수의 이력서를 보니 친일파 출신이라 회의 끝에 교수들 투표에서 그는 탈락되었다 한다.
그 교수는 후에 동래(東萊)여고 교장으로 모셔 온다고 동래여고 이사회에서 결정했는데 교사들이 '부산대학에서 친일파라고 인준을 거부한 그 교수를 우리 학교에서 교장으로 모셔 오다니 말이 되는가'하고 일어나 결국 그는 거기서도 취임을 못하였다 하니 후일 나와 언니가 다닌 그 동래여고의 선생님들이 대단히 자랑스럽다.
후에 아버지가 대구에서 한 경북대 교수를 만날 일이 있었는데 그 교수는 아버지를 보자 멀리서 부터 허리를 굽히고 모자를 벗고 다가오고 있었다한다. 왜 그러시냐 했더니 '우리 경북대 교수들은 그 박교수의 인준을 거부한 부산대 교수를이 눈에 띄기만 하면 허리를 굽혀 먼저 절을 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저희들은 그 한사람을 내 보내지 못해 골치를 앓았지요'라 말했다 한다. 그렇게 교수들에게 거부 당했던 그 교수는 후일 그가 대구사범학교 교사로 있을 때 친한 제자였던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자 불러올려 세칭 그 유명한 '암행어사'라는 중요 직책을 맡아 국책에 지대히 협력했다 한다.
그 당시 국립대학교들에서 조차도 얼마나 민족정신이 살아있었나를 보라. 그 때라면 이장무총장이 총장 아니라 평교수직에라도 감히 명함을 낼 수 있었을까. 지금은 반대가 되어 조상이 친일파 아니면 교수직이나 정계에 거의 발을 못 붙이고 있으니 민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삶과 목숨을 바치신 선조들이 하늘에서 보신다면 얼마나 통탄해 하실 것인가.
우리 근대사의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던 그 태화관은 1982년 도시계획으로 허물어져 지금은 태화빌딩이란 이름으로 12층 빌딩이 들어서 있고 그 건물 앞에 '3.1 독립운동 유적지'라고 쓰여진 비석이 하나 서있을 뿐이다.
태화관 구 건물
아래는 현재의 태화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