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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의 나라 스페인(Spain/España)
2. 카탈루냐의 주도(州都) 바르셀로나(Barcelona)
카탈루냐 독립 시위 / 줄지어가는 시위대 / Viva Cataluña! 나도..
스페인 북동부의 항구도시 바르셀로나는 인구 150만으로 광역도시를 합치면 500만의 대도시이며, 스페인의 17개 자치주 중 하나인 카탈루냐(Cataluña) 주의 주도(州都)이다.
카탈루냐주는 스페인 영토의 6%에 불과하지만 인구는 16%, 국내총생산(GDP)의 19%, 스페인 총수출의 25.6%를 차지하는 등 스페인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주이다. 그러나 이 지역 카탈루냐 사람들은 스페인정부가 카탈루냐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들이 경제적으로도 정부에 기여하는 만큼 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여긴다.
이곳은 옛 아라곤(Aragon)왕국의 수도였던 곳으로 언어도 스페인어와 아주 다른 카탈루냐어를 사용하며, 문화의 정체성이 여타 스페인 지역하고 많이 다르기 때문에 차별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특히 프랑코 군사정권 때 매우 심한 차별대우를 받아서 원한이 사무쳤다고 한다.
이 지역 사람들은 예전부터 꾸준히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2017년 9월,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정파의 마스(Artur Mas) 의원이 주지사로 당선되고 난 후 10월 1일 곧바로 분리 독립 찬반투표를 실시한 결과 찬성표가 90%가 나오자(유권자 43% 참여, 찬성 의견 90%) 스페인 정부에서는 투표자체가 불법이며 투표결과도 무효라고 선언하고.... 결국 오늘날까지 시위대가 거리로 나서기 시작한 원인이다. 우리가 도착하던 날 마침 길거리를 메우고 시위대가 지나가기에 깃발을 들고 가는 사람을 보고 주먹을 불끈 쥐어흔들며 ‘Viva, Cataluña!’ 라고 소리쳤더니 환히 웃으며 함께 사진을 한 컷 찍자고 한다. ㅎ
바르셀로나 대성당 / 화려한 성당 내부 / 에울랄리아 납골당 / 검은 성모상
바르셀로나 대성당(Barcelona Catedral)은 바르셀로나 중심광장인 카탈루냐 광장(Placa de Catalunya/카탈루냐어)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웅장한 주교좌 대성당으로 대표적인 고딕건물이다. 이 성당은 4세기에 순교한 이 지방 출신의 성녀 에울랄리아(Eulalia/13세에 순교)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1298에 착공하여 150년 만인 1448년에야 완공되었다는데 웅장한 본 건물은 물론 높이 70m의 첨탑을 자랑한다. 그런데 성당의 정문만은 1408년 설계도에 따라 500여 년 만인 1913년에야 완성되었다니......
에울랄리아 성녀는 온갖 잔인한 고문과 회유를 거부하고 신앙을 지키다 Ⅹ형 십자가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이 성당 지하 납골당에는 성녀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고 성당 안쪽 작은 연못에는 거위 13마리가 물장구를 치고 있다. 이 거위 13마리는 성녀가 순교한 나이를 상징한다고 한다. 또 이 성당에는 몬세라트의 검은 성모자상을 조각하여 모시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1992년에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마지막 결승 테이프를 끊은 몬주익 경기장(Montjuic Stadium)이 우리가 4일간 묵었던 호스텔 바로 근처였다.
<1> 몬세라트(Montserrat) 수도원 가는 길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몬세라트 수도원(Monestir de Montserrat)....
몬세라트 수도원은 바르셀로나 시내에서 열차를 타면 북서쪽으로 1시간쯤 거리에 있는데 열차가 도시를 벗어나 평화스러운 농촌 풍경을 즐기며 달리다보면 갑자기 엄청난 바위산을 만나게 되는데 그 바위산 중턱에 수도원이 있다.
케이블카 기다리는 줄 / 몬세라트 수도원 오르는 케이블카 / 케이블카에서 본 계곡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인 바위산은 둥글둥글 기묘한 형상들로 둘러서 있고 그 중턱에 수도원과 성당이 있는데 열차에서 내려 쳐다보면 까마득하다. 이 몬세라트로 가는 방법은 우리처럼 열차를 타고 개인별로 가는 방법과 1일짜리 패키지를 끊어 단체 관광버스로 가는 방법이 있다. 또, 열차를 타고 가서도 몬세라트역에서 내려 케이블카를 타는 방법이 있고 한 역을 더 가서 등산열차(푸니쿨라)를 타는 방법이 있다. 우리는 몬세라트역에서 내려 케이블카를 탔는데 기차역 안내판에는 스페인어와 카탈루냐어 두 가지 언어로 씌어져 있다.
케이블카는 30명 정원의 꼭 새장 같은 모양인데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가서 얼른 줄을 서야한다. 시내에서 열차표를 살 때 이미 포함이 되었기 때문에 따로 표를 살 필요는 없고, 케이블카는 30분마다 한 대씩 운행되는데 오르는데 걸리는 시간은 5분 정도이다.
이곳의 역사는 서기 800년대, 기독교 은둔자들이 이곳 바위산에 은거하고 있던 데서 시작되는데 가톨릭 수도회인 베네딕토(Benedictus) 수도원이 이 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부여받았다고 한다.
몬세라트 수도원 건물 / 수도원 앞 광장 / 드디어 오다!
11세기에서 15세기 초까지 번창하던 베네딕토회는 1410년 대수도원으로 독립하여 1560년 현재의 수도원을, 1755년에는 바실리카 성당을 지었는데 1811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군대에 의해 상당한 부분이 파손되고 많은 수도사들이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 후 19세기 중반에 재건하여 수도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20세기 초에 들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는데, 지금은 베네딕토 수도회의 수도원으로 약 80여 명의 수도사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2> 검은 성모자(聖母子) 목조상
몬세라트 수도원의 정식명칭은 베네딕투스 수도회 소속으로 ‘산타마리아 몬세라트 수도원(Santa Maria of Montserrat Abbey)’인데, 치유의 기적을 베푸는 오래된 ‘검은 성모자(聖母子) 목조상(像)’을 모시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목조상은 성 누가(St. Luke)가 조각하고 사도 베드로(St. Peter)가 스페인으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지며, 무어(Moor)인이 지배할 당시 동굴 속에 숨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잊어버렸는데 서기 880년, 어느 날 저녁 목동들에게 밝은 빛과 함께 천상의 음악이 들려 빛이 있는 쪽을 따라가 보았더니 동굴 안에 검은 성모자상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검은 성모님 뵈러가는 자비의 문 / 몬세라트 성당 제단 / 성당 내부 모습
목동들은 놀라 만레사(Manresa) 주교님에게 알렸고 주교님은 성모상을 옮기려 하였지만 꼼짝도 하지 않아 성모상이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라며 이곳에 작은 성당을 세웠다고 한다. 만레사는 이 근처의 지명으로 이냐시오 성인이 살던 곳이다. 검은 성모자상을 알현하려면 성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으로 뵈러가는 문이 있는데 이곳으로 들어가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본당 정면의 제단 뒤쪽으로 가는 좁은 통로가 이어진다. 이 통로는 참배객들로 항상 기다란 줄이 늘어서는데 제단 바로 뒤쪽 2층의 작은 방에 검은 성모자상이 모셔져 있다. 본당에 있는 사람들도 머리를 들어 제단 뒤쪽을 보면 검은 성모님을 알현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에스콜라니아 성가대 / 성당은 미사 중 / 검은 성모자상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검은 성모님은 둥근 유리로 막아놓고 오른쪽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았는데 그곳에 구슬을 들고 있는 성모님의 손이 보이는데 이 구슬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성모님이 계시는 이 작은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잠벌(暫罰)을 사해주는 전대사(全大赦)의 은혜를 내리는 ‘자비(慈悲)의 문’으로 지정해 주신 문이다.
성모자상을 모신 작은 방으로 오르는 계단 바로 옆에는 성가대 복장의 소년 조각상이 있는데 슬픈 일화가 있다.
이 근방에 살던 한 소년이 큰 병을 앓고 있었는데 소년은 에스콜라니아 성가대에 들어가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한다. 소년의 사연을 알게 된 수도원에서는 단 하루지만 에스콜라니아 성가대원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고 소년은 그토록 원하던 성가대 복장을 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안타깝게도 얼마 뒤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소년의 부모는 아들의 소원을 이루어 준 성당과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에 에스콜라니아 성가대 복장을 한 아들의 조각상을 만들어 수도원에 기증했다고 한다.
예수님과 12사도(성당입구) / 성당 입구 / 소년 조각상
빈 소년합창단, 파리 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과 더불어 세계 3대 소년합창단으로 꼽히는 에스콜라니아 소년합창단은 이곳을 방문하는 순례객들과 관광객들을 위하여 무료로 매일 오후 1시에 2곡을 부른다고 하는데 한 곡은 하느님께, 또 한 곡은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순례자들을 위하여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에스콜라니아 성가대는 이곳에서만 노래를 부르고 성당 바깥에서는 절대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하느님 앞에 너무나 부족한 제가 이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은총을 모두 입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멘~
성모님께 촛불 봉헌 / 수도원 산의 뒤편 순례길 / 길옆 모든 곳에...
검은 성모자상을 알현하고 뒷문으로 나오면 성당 뒤편에 둘러서 있는 바위절벽을 만나게 된다.
그 절벽 아래로 순례객들이 봉헌한 색색의 촛불들로 온통 꽃밭을 이루고 있다. 초 하나에 2유로....나는 물론 기꺼이, 그런데 장로교 장로님이신 임교장도 선뜻 초를 봉헌한다. 그것도 진지한 모습으로 머리를 숙이고 간절한 모습으로 기도를 드리고.... 임교장은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한다.
수도원 앞 광장으로 나오니 마침 일요일이라서인지 민속공연단이 와서 카탈루냐지방 민속무용을 공연한다. 남녀 무용단의 공연은 물론 성극도 하고 어린이들 무용도 공연하는데 관광객들을 위한 무료공연이다.
카탈루냐 전통무용(수도원 앞 광장) / 수도원 앞 절벽 위의 공연장 / 아슬아슬한 조각 작품
30분 정도 관람 후 수도원 뒤쪽으로 돌아가 보았는데 절벽 끄트머리에 몇 가지 기념 조형물들이 있고 산 뒤쪽으로 돌아가면 산허리를 돌아가는 오솔길이 보인다. 호기심에 오솔길로 들어섰는데 길옆의 모든 바위에 성인들과 성모님 그림이 붙어있고 하나같이 꽃들로 장식되어 있는...
그야말로 순례길이다. 20분 쯤 가다가 되돌아섰는데 계속 가면 아마 산 중턱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수도원이 나올 것 같은데 한 시간 정도로는 될 것 같지도 않아서 포기하고 말았다. 수도원 옆 절벽 위쪽에는 공연장인가 반원형 아치로 둘러싼 마당도 보이고 기묘한 조각도 보인다. 광장에서 보면 훨씬 위쪽 절벽 끝에 십자가상이 보이는데 산 호안(Sant Joan) 성당이라고 한다. 멋져 보였지만 올라갈 자신이 없어 포기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아쉽다.
1881년, 교황 레오 13세는 몬세라트 수도원의 이 검은 성모자상을 카탈루냐의 수호성물로 선포하였다고 한다.
<3> 가우디의 상상력 구엘공원(Parc Guell)
몬세라트에서 돌아와 곧바로 간 곳이 구엘공원(Parc Guell)이었다. 천재 건축가였는지,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이었는지 일반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가우디(Antoni Gaudi) 같은 사람에게 구엘백작은 막대한 돈을 투자하여 집짓기를 맡기는 모험을 했다니 신기하다.
구엘 공원의 의자 / 가우디의 상상력 / 동화 속 같은 예쁜 집
지중해와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엘공원은 가우디의 경제적 후원자였던 구엘백작이 대규모 주택단지를 짓기 위해 가우디에게 의뢰하였다고 한다. 구엘백작은 이곳에 고급 주택 60호 이상을 지어 부유층에게 분양하려고 하였지만 도중에 가우디가 죽는 바람에 3채만 분양되고 나머지는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가우디가 죽은 후 바르셀로나시가 사들여 다음 해 시영(市營)공원으로 재탄생시켰다고 하는데 구엘공원을 돌아보노라면 마치 동화 속 세상을 거니는 듯하다. 공원 입구에 있는 동화 속의 집처럼 예쁜 건물은 관리실과 경비들의 숙소 건물이었다고 한다.
카탈루냐 광장 / 아기자기한 광장 입구 / 광장의 조각 작품
카탈루냐 광장은 바르셀로나의 중심부로 관광객들이 꼭 들르는 광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가족성당을 가느라 입구에서 대충 사진만 몇 장 찍고 서둘러 돌아섰는데 좀 꼼꼼히 볼 걸 하고 나중 후회를 많이 했다. 전철을 타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역에서 나오면 바로 눈앞에 어마어마한 성가족성당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성가족 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ília) 외부 모습
<4> 성가족 성당(Sagrada Família)
이미 구엘공원에서 가우디의 상상력을 엿보기는 했지만 성가족성당의 건물 모습을 보면 정말 인간의 상상력은 어디까지일까? 기기묘묘한, 어쩌면 괴기하기까지 한 모습에 감탄과 함께 소름이 끼치기조차 한다.성당 앞 광장은 넋을 잃고 쳐다보는 수많은 관광객들과 그들이 눌러대는 카메라 셔터소리로 가득하다.
바르셀로나의 한 출판업자는 가톨릭의 총 본산인 로마 바티칸(Vatican)의 성 베드로 대성당(Basilca di San Pietro)을 가보고 큰 감명을 받아 바르셀로나에도 대성당을 짓자는 운동을 벌여 시민 모금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가우디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성가족성당 내부 모습
1882년 가우디의 스승이었던 비야르(F. de P. Villar)는 감명을 받아 무보수로 성당 건설을 시작했지만 바르셀로나 교구는 싸게만 지으려고 공사비를 제대로 주지 않자 1년 만에 포기하고 제자였던 가우디를 후임자로 추천한다. 가우디는 31세 때 공사를 맡았는데 그는 스승 비야르가 설계한 초기의 디자인을 모두 폐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면서 43년간 이 공사에 모든 정열을 쏟아 붓지만 완공을 보지 못하고 1926년, 교통사고로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이 성당은 지금도 공사가 진행 중인데 가우디의 사망 100주년이 되는 2026년을 완공목표로 삼고 있다고 한다. 가우디의 유해는 이 성당의 지하 납골당에 안장되었는데 원래 이 납골당에는 성인이나 왕족의 유해만 안치될 수 있지만 로마교황청에서는 그의 신앙심과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허락했다고 한다.
우리가 예매한 입장권은 오후 2시부터 입장이라 성당을 한 바퀴 둘러본 후 성당 앞 작은 연못이 있는 공원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우리처럼 기다리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2시가 되어 문 앞에 갔는데 입장하려는 사람들의 줄이 끝이 없다. 입장을 하면 설명하는 오디오가 있는데 한국어 기능이 없어 영어로....
조금 실망한 것은 내부가 너무 휑뎅그레 비어있는 느낌이다. 여러 곳에서 수많은 성당들을 보았는데 내부 모습이 하나같이 화려하고 벽면마다 빼곡히 성화(聖畫)를 비롯하여 성인성녀, 예수님과 성모님의 조상(彫像)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그러나 어마어마하게 높은 천정과 흡사 해골 혹은 갈비뼈 모양의 기괴한 기둥들이 어지럽게 얽혀있고, 아기자기한 문양들로 가득 채워진 건축기법은 가우디의 상상력만이 창조해 낼 수 있는 영역이라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중앙 홀에 신도들의 좌석은 있는데 앞쪽에는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제대(祭臺)도 없고 단지 천정에 매달린 캐노피(노란 우산모양)에 십자가를 지고 있는 예수님이 달랑 매달려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중앙 홀 뒤편에 기도실이 있는데 그곳에서 창문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지하 1층에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제대도 준비된, 중앙 홀보다 훨씬 작지만 예배당이 보인다.
<5> 가우디의 슬픈 최후
가우디는 1926년 6월 7일,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다가 지나가던 전차에 부딪혔다고 한다. 그러나 운전수는 그의 옷차림을 보고 지저분한 노숙인으로 생각하고 그를 길옆에 팽개치고 가버렸다고 한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택시를 잡았는데 노숙인으로 생각한 기사들이 그냥 지나가 버려 3번의 승차 거부 끝에 4번째로 잡은 택시기사가 겨우 병원으로 모셔갔는데 병원도 2곳이나 진료를 거부해 택시기사는 빈민구제 무상병원에 놔두고 가버렸다고 한다. 병원에서 방치된 채로 누워있던 가우디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병원 간호사에게 이름을 말하자 병원 관계자들은 경악하고 가우디의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급히 연락했다고 한다.
서둘러 달려온 그들이 다른 병원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가우디는
“옷차림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이들에게 이 거지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게 하라. 그리고 나는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것이 낫다.”며 그대로 빈민병원에 남았고 결국 사흘 후인 1926년 6월 10일,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를 친 전차운전수는 파직과 동시에 구속되었고, 승차를 거부한 택시기사 3명도 불구속 입건되었다. 결국, 택시기사 3명과 치료를 거부했던 병원은 막대한 배상금을 가우디 유족에게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은 1926년 6월 13일 수많은 군중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유해는 대성당 지하 납골당에 안장(安葬)되었다.
<스페인 여행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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