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鄕愁)<8>
연이은 흉년으로 살기도 어려웠고 세상인심도 흉흉해졌지만 이듬해 봄에는 비가 맞춤하게 내려 시기를 놓치지 않고 씨앗을 넣을 수 있었다. 곡우(穀雨) 즈음, 진달래가 피어 앞뒤 동산이 울긋불긋해지자 마을의 연중행사처럼 이어져 오던 곡우날 화전(花煎)놀이를 가기로 의논이 되었다.
마을의 화전놀이는 매년 곡우에 칠성암(현 法王寺) 아래쪽 큰골입구인 보아구(堡口) 계곡으로 가곤 했다.
아침이 되면 이른 조반을 마친 남자어른들이 솥단지 등 무게가 나가는 도구들을 지게에 지고 먼저 출발하였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자잘구레 화전놀이에 필요한 도구들을 챙겨서는 이고 들고 나중에 출발하였다.
남녀노소, 심지어 강아지까지 따라 나서는 화전놀이 날은 마을이 온통 텅텅 비었다. 마을사람 모두 모처럼 웃고 떠들며 나들이를 나서면 울긋불긋 차려입은 사람들로 꽃길을 이루었는데 산에 핀 진달래와 어울려 장관을 이루곤 했다.
진달래 화전 / 고로쇠나무 수액 받기 / 고누판(호박 고누)
남자들은 도착하자마자 우선 솥을 걸고는 곡우물을 받을 준비를 하였다.
골짜기 응달진 곳을 찾아 수액(樹液)을 받을 나무를 정하고는 나무 밑 부분을 괭이로 판다. 뿌리가 나오면 곁뿌리 하나를 자르고 뿌리의 흙을 씻어낸 다음 똑똑 떨어지는 수액을 받기위해 병이나 주전자를 받쳐 놓았다.
수액은 고로쇠나무나 다래덩굴이 많이 나온다고 했는데 이따금 자작나무나 느릅나무를 골라 수액을 받기도 하였다.
한 시간 남짓 있다가 가보면 맑은 수액이 그득히 고이고는 했는데 나무에 따라 엷은 분홍색을 띄는 것도 있고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것도 있었다. 느릅나무 수액은 간에 좋다고 하고, 고로쇠나무 수액은 위에 좋다고 하였는데 어른들께 먼저 맛보신 다음 우리차례가 되면 달짝지근하고 시원한 맛에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려고 다투곤 했다.
여자들은 한편에서 쌀을 씻어 밥을 짓고, 한편에서는 알불(숯불)을 내어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화전을 지질 준비를 하면 우리들은 참(진달래)꽃을 따 날랐다. 솥뚜껑이 달아오르면 기름을 두르고는 미리 준비한 찹쌀가루나 녹두가루 반죽한 것을 떼어 올려놓아 누른 다음 그 위에다 꽃잎을 얹어 지져 내었다.
또 녹두전을 지지다가 속에 팥고물을 넣어 부꾸미를 지져 내놓기도 하고, 녹두가루에 참꽃 잎을 넣어 반죽하였다가 썰어서 녹두 참꽃국수를 하기도 하였는데 어른들만 드리고 우리는 맛보기가 어려웠다.
찹쌀가루 위에 참꽃 잎을 얹어 지져낸 화전(花煎)은 약간 새콤한 맛이 나면서 고소한 것이 기가 막히게 향기로웠다.
또 어른들은 바짓가랑이를 걷고 개울에 들어가 돌멩이를 들추며 가재를 잡기도 하였고, 맞춤한 다래덩굴을 골라 송아지 코뚜레를 장만하기도 하였다. 우리 꼬맹이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달음박질도 하고 진달래꽃을 한 아름씩이나 꺾어 자랑을 하거나 꽃잎을 따서 그냥 먹기도 하였다. 또 길바닥에 앉아 꼰지니(고누) 놀이를 하기도 하였다.
농악대의 꽃을 일구던 권씨는 사진기도 가지고 있어 무척 신기하였는데 사진기를 가슴팍에다 대고 네모난 구멍으로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었다. 나중 명함보다 작은 흑백사진을 집에서 직접 만들어 내 놓았는데 사진 밑에다 글씨까지 넣어 한 장에 2원씩 동네사람들에게 팔았다. 젊은 아낙네들이나 처녀들은 앞 다투어 사진을 찍고는 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권씨의 여러 가지 재주에 놀라움을 나타내곤 하였다.
마을의 화전놀이(1962년/ 권씨가 찍은 사진)
골짜기와 산등성이는 진달래꽃으로 온통 붉게 물들었고, 먼데 가까운데서 들리는 뻐꾸기 울음소리와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에 넋을 놓다보면 하루가 아쉽게도 금방 지나가 버렸다. 어스름 산 그림자가 드리워질 즈음 은은한 칠성암(七星庵) 범종소리를 들으며 마을로 돌아오곤 하였다.
*왼쪽 장구메고 서있는 분이 우리 고모, 그 앞 쭈그리고 앉은 빡빡머리가 내모습, 맨뒷줄 하운데 하얀 이는 우리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