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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아함경_30. 세기경_5) 용조품(龍鳥品)
[네 가지 용]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가지 용(龍)이 있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 번째는 난생(卵生)이며, 두 번째는 태생(胎生)이며, 세 번째는 습생(濕生)이며, 네 번째는 화생(化生)이다.
이것을 네 가지라고 한다.
[네 가지 금시조]
네 가지 금시조(金翅鳥)가 있다.
어떤 것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 번째는 난생이며, 두 번째는 태생이며, 세 번째는 습생이며, 네 번째는 화생이다.
이것을 네 가지라고 한다.
[용왕의 궁전]
큰 바다 밑에 사갈(娑竭)용왕의 궁전이 있다.
그 궁전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8만 유순이고, 궁전 담장은 일곱 겹으로 되어 있다.
일곱 겹의 난간, 일곱 겹의 그물, 일곱 겹의 가로수가 빙 둘러 장엄하게 장식하고[嚴飾] 있는데 모두 7보(寶)로 되어 있으며,
나아가 무수한 온갖 새가 서로 화답하며 지저귀는 것까지의 내용은 또한 앞에서와 같다.
수미산왕과 가타라산 사이에 난다(難陀)와 바난다(婆難陀) 두 용왕의 궁전이 있다.
두 궁전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6천 유순이고 궁전 담장은 일곱 겹으로 되어 있다.
일곱 겹의 난간, 일곱 겹의 그물, 일곱 겹의 가로수가 빙 둘러 장식하였는데 모두 7보로 되어 있으며,
나아가 무수한 온갖 새가 서로 화답하며 지저귀는 것까지의 내용은 또한 앞에서와 같다.
[구라섬마라 나무]
대해(大海)의 북쪽 언덕에 한 그루의 큰 나무가 있는데, 그 이름은 구라섬마라(究羅睒摩羅)이고 용왕과 금시조도 이 나무에 함께 살고 있다.
그 나무 밑동의 둘레는 7유순이고 높이는 100유순이며, 가지와 잎은 사방으로 50유순이나 퍼져 있다.
[금시조의 궁전]
이 큰 나무 동쪽에 난생 용왕의 궁전과 난생 금시조의 궁전이 있다.
그 궁전들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6천 유순이고, 궁전 담장은 일곱 겹으로 되어 있다.
일곱 겹의 난간, 일곱 겹의 그물, 일곱 겹의 가로수가 빙 둘러 장식하였는데 모두 7보로 되어 있으며,
나아가 무수한 온갖 새가 서로 화답하며 지저귀는 것까지의 내용은 또한 앞에서와 같다.
[태생 용왕의 궁전과 태생 금시조의 궁전]
이 구라섬마라나무의 남쪽에 태생 용왕의 궁전과 태생 금시조의 궁전이 있다.
그 궁전들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6천 유순이고 궁전 담장은 일곱 겹으로 되어 있다.
일곱 겹의 난간, 일곱 겹의 그물, 일곱 겹의 가로수가 빙 둘러 장식하였는데 모두 7보로 되어 있으며,
나아가 무수한 온갖 새가 서로 화답하며 지저귀는 것까지의 내용은 또한 앞에서와 같다.
[습생 용왕의 궁전과 습생 금시조의 궁전]
구라섬마라나무의 서쪽에는 습생 용왕의 궁전과 습생 금시조의 궁전이 있다.
그 궁전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6천 유순이고 궁전 담장은 일곱 겹으로 되어 있다.
일곱 겹의 난간, 일곱 겹의 그물, 일곱 겹의 가로수가 빙 둘러 장식하였는데 모두 7보로 되어 있으며,
나아가 무수한 온갖 새가 서로 화답하며 지저귀는 것까지의 내용은 또한 앞에서와 같다.
[화생 용왕의 궁전과 화생 금시조의 궁전]
구라섬마라나무의 북쪽에는 화생 용왕의 궁전과 화생 금시조의 궁전이 있다.
그 궁전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6천 유순이고 궁전 담장은 일곱 겹으로 되어 있다.
일곱 겹의 난간, 일곱 겹의 그물, 일곱 겹의 가로수가 빙 둘러 장식하였는데 모두 7보로 되어 있다.
나아가 무수한 온갖 새가 서로 화답하며 지저귀는 것까지의 내용은 또한 앞에서와 같다.
[금시조가 용을 잡아먹으려고 할 때에는]
난생의 금시조가 용을 잡아먹으려고 할 때에는, 구라섬마라나무 동쪽 가지에서 날아 내려와 날개로 바닷물을 치면 바닷물은 양쪽으로 200순이나 갈라진다.
그러면 난생의 용을 마음대로 잡아먹는다.
그러나 태생ㆍ습생ㆍ화생의 용들은 잡아먹을 수 없다.
태생의 금시조가 난생의 용을 잡아먹으려고 할 때에는, 나무의 동쪽 가지에서 날아 내려와 날개로 바닷물을 치면 바닷물은 양쪽으로 200유순이나 갈라진다.
그러면 난생의 용을 마음대로 잡아먹는다.
태생의 금시조가 태생의 용을 잡아먹으려고 할 때에는, 나무의 남쪽 가지에서 날아 내려와 날개로 바닷물을 치면 바닷물은 양쪽으로 400유순이나 갈라진다.
그러면 태생의 용을 마음대로 잡아먹는다.
그러나 습생과 화생의 용들은 잡아먹지 못한다.
습생의 금시조가 난생의 용을 잡아먹으려고 할 때에는, 나무의 동쪽 가지에서 날아 내려와 날개로 바닷물을 치면 바닷물은 양쪽으로 200유순이나 갈라진다.
그러면 난생의 용을 마음대로 잡아먹는다.
습생의 금시조가 태생의 용을 잡아먹으려고 할 때에는, 나무의 남쪽 가지에서 날아 내려와 날개로 바닷물을 치면 바닷물은 양쪽으로 400유순이나 갈라진다.
그러면 용을 마음대로 잡아먹는다.
습생의 금시조가 습생의 용을 잡아먹으려고 할 때에는, 나무의 서쪽 가지에서 날아 내려와 날개로 바닷물을 치면 바닷물은 양쪽으로 800유순이나 갈라진다.
그러면 습생의 용을 마음대로 잡아먹는다.
그러나 화생의 용은 잡아먹지 못한다.
화생의 금시조가 난생의 용을 잡아먹으려고 할 때에는, 나무의 동쪽 가지에서 날아 내려와 날개로 바닷물을 치면 바닷물은 양쪽으로 200유순이나 갈라진다.
그러면 난생의 용을 마음대로 잡아먹는다.
화생의 금시조가 태생의 용을 잡아먹으려고 할 때에는, 나무의 남쪽 가지에서 내려와 날개로 바닷물을 치면 바닷물은 양쪽으로 400유순이나 갈라진다.
그러면 태생의 용을 마음대로 잡아먹는다.
화생의 금시조가 습생의 용을 잡아먹으려고 할 때에는, 나무의 서쪽 가지에서 날아 내려와 날개로 바닷물을 치면 바닷물은 양쪽으로 800유순이나 갈라진다.
그러면 습생의 용을 마음대로 잡아먹는다.
화생의 금시조가 화생의 용을 잡아먹으려고 할 때에는, 나무의 북쪽 가지에서 날아 내려와 날개로 바닷물을 치면 바닷물은 양쪽으로 1천 6백 유순이나 갈라진다.
그러면 화생의 용을 잡아먹는다.
이상은 금시조가 용을 잡아먹는 경위를 말한 것이다.
[금시조가 잡아먹지 못하는 큰 용]
또 금시조도 잡아먹지 못하는 큰 용이 있다.
어떤 용이 그런 것들인가? 그들은사갈(娑竭)용왕ㆍ난다(難陀)용왕ㆍ발난다(跋難陀)용왕ㆍ이나바라(伊那婆羅)용왕ㆍ제두뢰타(提頭賴吒)용왕ㆍ선견(善見)용왕ㆍ아로(阿盧)용왕ㆍ가구라(伽拘羅)용왕ㆍ가비라(伽毘羅)용왕ㆍ아파라(阿波羅)용왕ㆍ가누(伽㝹)용왕ㆍ구가누(瞿伽㝹)용왕ㆍ아뇩달(阿耨達)용왕ㆍ선주(善住)용왕ㆍ우섬가파두(優睒伽波頭)용왕ㆍ득차가(得叉伽)용왕 등이다.
이 모든 큰 용왕들은 다 금시조에게 잡아먹히지 않는다.
그 근처에 있는 다른 모든 용들도 또한 금시조에게 잡아먹히지 않는다.”
[중생이 용과 금시조 등으로 태어나는 인연]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중생이 용의 계(戒)를 받들어 가지고 마음이 용을 향하고 용의 법을 갖추면, 곧 용으로 태어난다.
만일 어떤 중생이 금시조의 계를 받들어 가지고 마음이 금시조를 향하고 그 법을 갖추면, 곧 금시조로 태어날 것이다.
어떤 중생이 토효(免梟)의 계를 가지고 마음이 토효를 향하고 그 법을 갖추면, 토효 가운데 떨어질 것이다.
만일 어떤 중생이 개의 계를 받들어 가지거나 혹은 소의 계를 가지며, 혹은 사슴의 계를 가지거나 혹은 벙어리의 계를 가지며, 혹은 마니바다(摩尼婆陀)의 계를 가지거나 혹은 불의 계를 가지며, 혹은 달의 계를 가지거나 혹은 해의 계를 가지며, 혹은 물의 계를 가지거나 혹은 불을 공양하는 법을 가지며, 혹은 고행의 더러운 법을 가지고서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자.
‘나는 이 벙어리의 법ㆍ마니바다의 법ㆍ불의 법ㆍ해와 달의 법ㆍ물의 법ㆍ불을 공양하는 법과 모든 고행의 법을 지녔다.
나는 이 공덕을 가짐으로써 하늘에 나려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곧 삿된 소견이다.”
[삿된 소견을 가진 사람은 지옥이나 축생에 태어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런 삿된 소견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두 곳에 태어난다고 말할 것이니,
혹은 지옥에 태어나기도 하고 혹은 축생에 떨어지기도 한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러한 주장과 이러한 소견을 가지고 있다.
‘나와 세간은 유상(有常)한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나와 세간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이것은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나와 세간은 유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나와 세간은 유상도 아니며 무상도 아니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나와 세간은 유변(有邊)이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나와 세간은 무변(無邊)이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나와 세간은 유변이면서 무변이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나와 세간은 유변도 아니며 무변도 아니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이 명(命)이 곧 이 몸이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명이 다르고 몸이 다르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명은 있는 것도 아니고 명은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명도 없고 몸도 없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아견ㆍ명견ㆍ신견ㆍ세간견]
어떤 사람은 말한다.
‘그는 죽어도 여전한 것이 있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그가 죽으면 여전한 것은 없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혹은 말한다.
‘그가 죽으면 여전한 것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또 말한다.
‘그가 죽으면 여전한 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저 사문 바라문이 만일 이러한 주장과 이러한 소견을 가지고,
‘세상은 항상한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한다면,
그의 마음에는 아견(我見)ㆍ명견(命見)ㆍ신견(身見)ㆍ세간견(世間見)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나와 세간은 유상한 것이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저 무상한 것이라고 말하는 자의 마음에도 아견ㆍ명견ㆍ신견ㆍ세간견이 있다.
그러므로 그는 ‘나와 세간은 무상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저 ‘유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다’고 말하는 자의 마음에도, 아견ㆍ명견ㆍ신견ㆍ세간견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세간은 유상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저 ‘유상도 아니며 무상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자의 마음에도, 아견ㆍ명견ㆍ신견ㆍ세간견이 있다.
그러므로 ‘나와 세간은 유상도 아니며 무상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저 ‘나와 세간은 유변하다’고 말하는 자의 마음에도, 아견ㆍ명견ㆍ신견ㆍ세간견이 있다.
그러므로 ‘명은 유변이며 몸도 유변이며 세간도 유변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처음 수태(受胎)된 때로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4대[大]로 이루어진 몸뚱이는 이와 같이 전전(展轉)하여, 마지막으로 7생(生)에 이르러서야 신명(身命)의 행이 다하여, 나는 청정취(淸淨聚)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유변이다’라고 말한다.
저 ‘나와 세간은 무변이다’라고 말하는 자의 마음에도 아견ㆍ명견ㆍ신견ㆍ세간견이 있다.
그러므로 ‘명은 무변이며 몸도 무변이며 세간도 무변이다’라고 말한다.
처음 태를 받은 때로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몸뚱이는 이와 같이 전전하여, 마지막으로 7생에 이르러서야 신명의 행이 다하여, 나는 청정취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나와 세간은 무변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이 세간은 유변이기도 하고 무변이기도 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마음에 아견ㆍ명견ㆍ신견ㆍ세간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命)은 유변이면서 무변이다’라고 말한다.
처음 태를 받은 때로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네 요소로 이루어진 몸뚱이는 이와 같이 전전하여, 마지막으로 7생에 이르러서야 신명의 행이 다하여, 나는 청정취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나는 유변도 아니며 무변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가 ‘이 명은 바로 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 몸에 대해서도 명견(命見)이 있다고 보고, 다른 몸에 대해서도 명견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몸은 곧 명이다’라고 말한다.
‘명이 다르고 몸이 다르다’라고 하는 것은,
이 몸에 대해서는 명견이 실재한다는 소견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몸에 대해서만 명견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이 다르고 몸이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그가 ‘몸과 목숨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 몸에 대해서는 명이 있다는 견해를 가지지 않고, 다른 몸에 대해서는 명이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가 ‘신명(身命)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 몸에 대해서도 명이 있다는 견해가 없고, 다른 몸에 대해서도 명이 있다는 견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도 없고 몸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가 ‘그는 죽어도 여전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현세에도 신명이 있고, 후세에도 또한 신명이 있어 돌아다닌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죽어도 여전한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가 죽으면 여전한 것은 없다’고 하는 것은,
그가 금생에는 명이 있고, 후세에는 명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죽으면 여전한 것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가 죽으면 여전한 것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금생에서는 명을 단멸(斷滅)했지만, 후생에는 명이 돌아다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죽으면 여전한 것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가 죽으면 여전한 것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그가 금생에도 신명이 단멸하였고, 후생에도 신명이 단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죽으면 여전한 것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비유]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옛날에 경면(鏡面)이라는 왕이 있었다. 한번은 선천적인 장님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선천적 장님들이여, 코끼리를 아는가?’
그들은 대답했다.
‘대왕이여, 저희는 인식하지 못합니다. 알지 못합니다.’
왕이 또 말했다.
‘너희들은 그 형상이 어떤지 알고 싶은가?’
그들이 대답했다.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왕은 곧 시자에게 명하여 코끼리를 끌고 오게 하고, 여러 장님들에게 손으로 어루만져 보게 했다.
그 중에는 코끼리를 더듬다가 코를 만진 자가 있었다.
왕이 말했다.
‘이것이 코끼리다.’
혹은 코끼리의 어금니를 만진 자도 있고,
혹은 코끼리의 머리를 만진 자도 있으며,
혹은 코끼리의 등을 만진 자도 있고,
혹은 코끼리의 배를 만진 자도 있으며,
혹은 코끼리의 넓적다리를 만진 자도 있고,
혹은 코끼리의 장딴지를 만진 자도 있으며,
혹은 코끼리의 발자국을 만진 자도 있고,
혹은 코끼리의 꼬리를 만진 자도 있었다.
왕이 모두에게 말했다.
‘이것이 코끼리이다.’
그때 경면왕은 그 코끼리를 물리치고 장님들에게 물었다.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던가?’
모든 장님들 중,
코끼리의 코를 만진 자는 ‘코끼리는 굽은 멍에와 같다’고 하였고,
코끼리의 어금니를 만진 자는 ‘코끼리는 절굿공이와 같다’고 했다.
코끼리의 귀를 만진 자는 ‘코끼리는 키와 같다’고 하였고,
코끼리의 머리를 만진 자는 ‘코끼리는 솥과 같다’고 했다.
코끼리의 등을 만진 자는 ‘코끼리는 언덕과 같다’고 하였고,
코끼리의 배를 만진 자는 ‘코끼리는 벽과 같다’고 했다.
코끼리의 넓적다리를 만진 자는 ‘코끼리는 나무와 같다’고 하였고,
코끼리의 장딴지를 만진 자는 ‘코끼리는 기둥과 같다’고 했다.
코끼리의 발자국을 만진 자는 ‘코끼리는 절구와 같다’고 하였고,
코끼리의 꼬리를 만진 자는 ‘코끼리는 밧줄과 같다’고 했다.
각각 서로 다투고 서로 시비하면서 ‘내 말이 옳다. 네 말은 그르다’고 하였다.
시비가 그치지 않자 드디어 다투기에 이르렀다.
왕은 이것을 보고 즐거워하며 크게 웃었다.”
경면왕이 곧 게송으로 말했다.
모든 장님의 무리들 모여
이곳에서 서로 다투고 싸움하네.
코끼리의 몸뚱이 원래 하나인데
다른 모습 더듬어 보곤 시비를 내네.
[4성제을 알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다른 학문을 배우는 외도(外道)들도 이와 같다.
괴로움에 대한 진리[苦諦]를 모르고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진리[集諦]ㆍ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滅諦]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진리[道諦]를 알지 못하여,
제각기 다른 소견을 내어 서로 다투어 시비하고 자기가 옳다 하면서 싸움을 일으킨다.
만일 사문 바라문으로서 진실하게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聖諦]ㆍ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ㆍ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ㆍ괴로움의 벗어남에 대한 진리[苦出要諦]를 안다면,
그들은 스스로 생각해 보고 잘 화합하여 동일하게 받아들이고 동일한 스승을 받들 것이며,
물에 젖이 섞이듯 하나, 같이 서로 화합하면 불법은 불꽃처럼 일어날 것이며,
편안히 오래 머물 것이다.”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일 사람이 괴로움을 모르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을 모르며
또한 다시 그 괴로움은
멸하여 없앨 수 있다는 것 모르고
또한 다시 그 괴로움의 원인을
멸하여 없애는 길을 모르면
마음의 해탈을 잃을 것이며
지혜의 해탈도 잃어 버려서
괴로움의 근본인 생ㆍ노ㆍ병ㆍ사의
그 근원을 다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괴로움을 분명히 알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을 알며
또한 능히 그 괴로움은
멸하여 없앨 수 있는 것임을 알고
또 능히 괴로움의 원인을
멸하는 성도(聖道)를 분별한다면
곧 마음의 해탈을 얻고
지혜의 해탈도 얻을 것이다.
이 사람은 능히 고음(苦陰)의 근본을
마지막 끝 간 데까지 환히 깨달아
생ㆍ노ㆍ병ㆍ사와
존재의 근원까지 다해 없애리라.
“모든 비구들아,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부지런히 방편을 세워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ㆍ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ㆍ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ㆍ괴로움의 벗어남에 대한 진리[苦出要諦]를 생각해 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