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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양성교론 제7권
현양성교론_2. 섭정의품_6. 들음, 귀의, 배움, 보리(2)
6.3. 배움
논하여 말한다.
배움[學]에 대한 열두 가지 분별이란,
첫째는 차별에 대한 분별이고,
둘째는 생기(生起)에 대한 분별이며,
셋째는 전이(轉異)에 대한 차별이고,
넷째는 능히 다스림[能治]와 다스려지는 것[所治]에 대한 분별이며,
다섯째는 뛰어난 출생과 결정적으로 뛰어난 것을 능히 이끌어냄에 대한 분별이고,
여섯째는 법에 수순함에 대한 분별이며,
일곱째는 보특가라(補特伽羅)에 대한 분별이고,
여덟째는 하(下)ㆍ중(中)ㆍ상(上)에 대한 분별이며,
아홉째는 유가(瑜伽)에 대한 분별이고,
열째는 작의(作意)에 대한 분별이며,
열한째는 이끌어내는 것[引發]에 대한 분별이고,
열두째는 문답에 대한 분별이다.
1) 차별에 대한 분별
‘차별에 대한 분별’이란 3학(學)의 차별과 증상계학(增上戒學)에 관한 분별을 말한다.
‘차별’이란 경전에서,
“만약 모든 비구[苾蒭]들이 시라(尸羅)를 성취함에 머무르고,
별해탈(別解脫)의 율의(律儀)를 지키고,
궤칙(軌則)과 다니는 곳[所行]이 모두 다 구족하며,
미세한 죄에 대해서도 매우 두려움을 나타내고,
학처(學處)를 받아 배운다면 계를 갖춘 이라고 이름한다”고 말한 바와 같다.
이중에서 ‘시라를 성취함에 머무른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받은 학처에 대해서 신업(身業)으로 범함이 없고, 어업(語業)으로 범함이 없으며, 파괴하지 않고 구멍내지 않으면,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시라를 성취함에 머무른다’고 한다.
‘별해탈의 율의를 지킨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일곱 부류 대중[七衆]의 시라를 별해탈의 율의라고 이름하고, 곧 이 시라의 종류가 차별되기 때문에 많은 종류의 율의를 건립한다.
여기서의 취지는 오직 비구의 율의에 의하여 말한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별해탈의 율의를 지킨다’고 한다.
‘궤칙이 구족함’이란 것은 다음과 같다.
혹은 위의(威儀)에 있어서나, 혹은 짓는 바[所作]에 있어서나, 혹은 방편껏 착한 품류를 닦음에 있어서, 궤칙이 구족하여 세간에 수순하고 세간에 위배되지 않으며, 비나야(毘奈耶)에 수순하고 비나야에 위배되지 않는다.
무엇이 ‘위의 중에 궤칙이 구족하여 세간과 비나야에 수순하고 위배되지 않는 것’인가?
만약 그때 그곳에서 응당 행해야 하고,
그리고 이와 같이 응당 행해야 할 경우에 곧 그때 그곳에서 이와 같이 바르게 행하여,
세간에 꾸지람과 비방을 당하지 않고,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올바르고 매우 착한 사람들과 법을 함께 닦는 사람과 학처를 지니는 사람과 학처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꾸지람과 비방을 당하지 않는다.
걸어다니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머물거나 앉거나 눕는 것에 있어서도 또한 이와 같다고 알아야 한다.
무엇이 ‘짓는 바[所作]에 있어서 궤칙이 구족하여 세간과 비나야에 수순하고 위배되지 않는 것’인가?
의복을 입고, 대소변을 보며, 물과 이쑤시개를 사용하고, 마을에 들어가 걸식하며, 돌아와서 먹고 발우를 씻어서 잘 두고, 발을 씻고 방석을 펴거나, 또는 다시 발우를 만들거나 옷을 만들거나 그밖의 모든 것을 여법하게 작업하는 그것을 이름하여 ‘짓는 바’라고 한다.
그 상응하는 바와 같이 하면, 만약 그때 그곳에서 응당 해야 하고,
이와 같이 응당 해야 할 경우에, 곧 그때 그곳에서 이와 같이 바르게 지어서,
세간에 꾸지람과 비방을 받지 않고,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올바르고 매우 착한 사람들과 법을 함께 하는 사람과 학처를 지니는 사람과 학처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꾸지람과 비방을 받지 않는다.
이것을 이름하여 ‘짓는 바에 있어서 궤칙이 구족하여 세간과 비나야에 수순하고 위배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이 ‘방편껏 착한 품류를 닦음에 있어서 궤칙이 구족하여 세간과 비나야에 수순하고 위배되지 않는 것’인가?
경전을 독송하고, 스승과 어른을 존경하며, 사업을 닦고 받들며,
병든 이를 간호하고, 서로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켜 더불어 널리 말해주려고 하며,
방편으로 닦아 익히고, 청하여 묻고 법을 듣는 것을 부지런히 하여 게으름이 없으며,
총명하고 지혜로운 이와 청정행[梵行]을 닦는 이들에게 몸소 받들고 섬기며,
다른 이에게 착한 품류를 수행함을 권장하고, 깊고 미묘한 법을 널리 말해주며,
조용한 곳에 들어가 가부좌(跏趺坐)하고 앉는다.
이와 같은 모든 것과 그밖의 착한 법을 닦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방편껏 모든 착한 품류를 닦는 것’이라고 한다.
말한 바와 같은 착한 품류를 이처럼 방편껏 닦아 익히는 것에 있어서,
만약 그때 그곳에서 응당 닦고 이와 같이 응당 닦아야 할 경우에, 곧 그때 그곳에서 이와 같이 바르게 닦고,
이와 같이 닦음으로 말미암아 세간에 꾸지람과 비방을 당하지 않고,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바르고 매우 착한 사람들과 법을 함께 배우는 사람과 학처를 지니는 사람과 학처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꾸지람과 비방을 당하지 않는다.
이것을 이름하여 ‘방편껏 착한 품류를 닦음에 있어서 궤칙이 구족하여 세간과 비나야에 수순하고 위배되지 않는 것’이라 한다.
만약 이와 같은 양상으로 궤칙이 구족하면, 이것을 궤칙이 구족한 것이라고 이름한다.
‘다니는 곳[所行]이 구족함’이란 비구로서 가는 곳이 아닌 다섯 가지 처소를 말한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노래부르는 곳이고,
둘째는 음녀(淫女)의 집이며,
셋째는 술을 파는 집이고,
넷째는 왕궁이며,
다섯째는 전다라(旃茶羅)와 갈치나(羯耻那)의 집, 그리고 그밖에 응당 가서는 안되는 곳이라고 여래께서 제정하신 곳이다.
이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닐 수 있는 곳이다.
이와 같이 때에 따라 허물이 없는 처소에 다니면 이것을 이름하여 ‘다니는 곳이 구족함’이라 한다.
‘미세한 죄에 대해서도 매우 두려움을 나타냄’이란 다음과 같다.
작은 어느 것과 작은 학처(學處)를 범하고, 범한 후에 지적할만한 것이면 모두 미세한 죄라고 이름한다.
또한 만약 범한 후에 적은 공력으로도 지적할만한 것이면 미세한 죄라고 이름한다.
만약 이것에 대해서 매우 두려움을 나타내며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이것을 범함으로 말미암아, 곧 아직 얻지 못한 바를 얻거나, 아직 깨닫지 못한 바를 깨닫거나, 아직 증득하지 못한 바를 증득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해서는 안된다.
또한 나로 하여금 살기 괴로운 세상[惡趣]에 떨어져서 그 살기 괴로운 세상의 행을 일으키게 해서는 안된다.
또한 나로 하여금 나중에 스스로 후회하게 해서는 안된다.
위대한 스승과 모든 하늘과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과 청정행을 함께 닦는 사람들에게 법으로써 꾸지람을 받아서는 안된다.
또한 나의 나쁜 이름 등이 시방에 퍼지게 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은 현재의 법ㆍ후래의 법과 좋지 못한 일들을 봄으로 인하여 매우 두려움을 나타낸다.
이와 같기 때문에 작은 어느 것과 작은 학처 나아가 목숨이 어려운 인연에 이르기까지 끝끝내 일부러 범하지 않는다.
또한 설사 잊어버리고 어느 때 범한 후에는 빨리빨리 허물을 뉘우치고 여법하게 고백한다.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미세한 죄에 대해서도 매우 두려움을 나타냄’이라고 한다.
‘학처(學處)를 받아서 배우는 것’이란 다음과 같다.
먼저 별해탈의 율의를 받을 때에 한번 사뢰고 세번 갈마(羯磨)를 하고서 구족계를 받기 때문에,
대략 학처의 체성과 『별해탈경』에서 말하는 허물과 150학처를 얻고,
오직 스스로 맹세하되, “나는 장차 일체의 학처를 모두 배워야겠다”고 한다.
또한 오파타야(鄔波柁耶=親敎師)와 아차리야(阿遮利耶=軌範師,즉 아사리) 그리고 함께 담론할 사람들, 서로 묻고 따지는 사람, 자주 익히고 가까이 할 사람, 뜻이 잘 통하는 사람들의 처소에 가서 자주자주 듣고, 또한 보름마다 『별해탈경』을 설함을 듣는다.
이와 같이 일체의 학처를 받기 때문에 ‘별해탈의 율의를 얻음’이라고 이름한다.
그 이후에는 온갖 착한 학처에 대해서 헐거나 범함이 없고, 설사 헐거나 범함이 있으면 곧 여법하게 고백하며,
만약 이전에 맹세하고 받은 학처에 있어서 잘하지 못하고 통달하지 못하면, 마땅히 이전에 받을 때와 같이 다시 오파타야와 아차리야 등의 처소에 가서 자주자주 청하여 묻고 들어서 잘 통달하도록 하며,
높은 분들이 말씀한 대로 보태지도 않고 빼지도 않으며, 잘 닦고 배운 뒤에는 또한 문장이나 뜻을 뒤바뀜이 없이 받아 지닌다.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학처를 받아서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간략히 정리함]
이와 같이 시라(尸羅)ㆍ율의의 차별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 뜻을 간략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이 가운데 박가범(薄伽梵)께서 세 가지 양상으로 계온(戒蘊)을 밝히셨다.
첫째는 잃거나 무너뜨림이 없는 양상이고,
둘째는 자체의 양상이며,
셋째는 자체의 공덕의 양상이다.
이중에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시라를 성취함에 머문다’는 이것은 시라ㆍ율의의 잃거나 무너뜨림이 없는 양상을 나타낸다.
다음에 ‘별해탈의 율의를 지킨다’고 말하는 이것은 자체의 양상을 나타낸다.
다시 ‘궤칙과 다니는 곳이 모두 구족한다’고 말하는 이것은 받은 바 별해탈의 율의대로 타인(他人)에게 공덕과 명망을 더욱 향상시킴을 보이는 것을 나타낸다.
무슨 까닭인가?
이 궤칙과 다니는 곳이 구족한 모습을 타인이 봄으로써, 아직 믿지 못하는 이는 믿게 되고, 이미 믿는 이는 증장한다.
아직 믿지 못하는 이가 이것에 의지해서 믿게 되기 때문에 마음에 업신여기거나 헐뜯는 일이 없고 나쁜 소문이 나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않는 이는 비록 시라를 구족하더라도 궤칙과 다니는 곳을 탈선하기 때문에 곧 타인에게 공덕과 명망을 더욱 향상시키는 것을 볼 수 없다.
만약 이것과 반대라면 곧 과실이 없다.
뒤에 ‘미세한 죄에 대해서도 매우 두려움을 나타내고 학처를 받아서 배운다’고 말한 이것은 공덕과 명망을 더욱 향상시키는 것을 자신에게 보이는 것을 나타낸다.
무슨 까닭인가?
또한 비록 궤칙과 다니는 곳이 구족함으로써 공덕과 명망을 더욱 향상시키는 것을 타인에게 보이더라도, 시라를 무너뜨리게 되면,
이 인연으로 인하여 혹은 살기 괴로운 세상에 태어나게 되고,
혹은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거나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거나 아직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함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만약 능히 미세한 죄에 대해서도 오히려 두려움을 나타낸다면, 어찌 하물며 상품(上品)의 죄이겠는가?
또한 학처를 받아서 배우면, 이 인연으로 인하여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다하면 살기 좋은 세상[善趣]에 태어나고,
또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고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고 아직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함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시라ㆍ율의로 공덕과 명망을 더욱 향상시키는 것을 자신에게 보이는 양상’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이중에서 박가범께서 세 가지 시라의 성품을 나타내셨으니,
첫째는 받음의 시라의 성품이고,
둘째는 벗어남의 시라의 성품이며,
셋째는 닦아 익힘의 시라의 성품이다.
처음에 ‘시라를 성취함에 머문다’고 말한 이것은 받음의 시라의 성품을 나타낸다.
다음에 ‘별해탈의 율의를 지킨다’고 말한 이것은 벗어남의 시라의 성품을 나타낸다.
무슨 까닭인가?
① 증상계학의 차별에 대한 분별
별해탈의 율의에 포함되는 시라를 증상계학(增上戒學)이라 이름하고,
증상계학에 의지함으로써 능히 증상심학(增上心學)과 증상혜학(增上慧學)을 익히게 된다.
이것에 의지함으로써 능히 일체의 괴로움으로 하여금 영원히 다하여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벗어나는 것은 먼저 시라에 의지해서 행한 연후에 비로소 얻어지며,
이런 까닭에 별해탈의 율의를 말하여 벗어남의 시라의 성품이라고 한다.
뒤에 말한 바 ‘궤칙과 다니는 곳이 모두 다 구족하고 미세한 죄에 대해서도 매우 두려움을 나타내며 학처를 받아서 배운다’는 이것은 닦아 익힘의 시라의 성품을 나타낸다.
만약 이러한 양상에 의지해서 별해탈의 율의ㆍ시라를 닦아 익힌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닦아 익히며 잘 닦아 익힌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증상계학의 차별에 대한 분별이라고 이름한다.
② 증상심학의 차별에 대한 분별
증상심학(增上心學)의 차별에 대한 분별은 다음과 같다.
만약 비구가 애욕ㆍ악ㆍ불선법을 여의고 유심유사(有尋有伺)이며 이생희락(離生喜樂)의 초정려(初靜慮)를 구족하여 머물고,
다시 심구[尋]과 사찰[伺]이 고요하고 내면에 청정한 마음이 두루하여 한 갈래의 성품에서 무심무사삼마지(無尋無伺三摩地)에서 기쁨의 느낌ㆍ즐거움의 느낌을 내어 제2정려를 구족하여 머문다.
다시 기쁨의 느낌을 여읨으로써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느낌[捨受]에 머물러서 생각이 바르게 알고 몸이 즐거움을 받으며,
성자들이 널리 말하는 생각을 버려 낙에 머무름이 있는[捨念樂住] 제3정려를 구족하여 머문다.
다시 즐거움의 느낌을 끊고 이전에 이미 끊은 바 괴로움의 느낌ㆍ즐거움의 느낌ㆍ슬픔의 느낌이 다하여 불고불락사념청정(不苦不樂捨念淸淨)의 제4정려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 차별의 뜻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것을 증상심학의 차별에 대한 분별이라고 이름한다.
③ 증상혜학의 차별에 대한 분별
증상혜학(增上慧學)의 차별에 대한 분별은 다음과 같다.
만약 비구가 고성제(苦聖諦)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괴로움을 알고,
집성제(集聖諦)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집기(集起)를 알며,
멸성제(滅聖諦)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적멸을 알고,
괴로움의 소멸로 나아가 행함의 거룩한 진리[苦滅趣行聖諦]에 대해서 여실히 나아가 행함을 안다면,
이것을 증상혜학의 차별에 대한 분별이라고 이름한다.
2) 생기(生起)에 대한 분별
‘생김[生起]에 대한 분별’은 다음과 같다.
시라를 성취함으로써 후회가 없고,
후회가 없음으로써 기쁨이 생기며,
기쁨이 생김으로써 마음이 기쁘고,
마음이 기쁨으로써 몸이 편안하며,
몸이 편안함으로써 즐거움을 누리고,
즐거움을 누림으로써 마음이 집중되며,
마음이 집중됨으로써 관찰이 여실하고,
관찰이 여실함으로써 싫어하는 생각을 일으키며,
싫어하는 생각을 일으킴으로써 애욕을 여의고,
애욕을 여읨으로써 해탈하며, 해탈함으로써 스스로 “나는 해탈을 증득했다.”고 말한다.
또한 이와 같은 지견(智見)을 일으키되,
“나는 태어남이 이미 다했고, 청정행[梵行]이 이미 이룩되었으며, 할 바를 이미 끝냈고, 다음 생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3) 전이(轉異)에 대한 차별
‘전이(轉異))에 대한 분별’은 다음과 같다.
혹은 증상계학(增上戒學)만 있고 증상심학(增上心學)이 없고 증상혜학(增上慧學)이 없으며,
혹은 증상계학과 증상심학만 있고 증상혜학이 없으며,
만약 증상혜학이 있으면 반드시 증상계학과 증상심학이 있음을 말한다.
4) 능히 다스림와 다스려지는 것에 대한 분별
‘능히 다스림과 다스려지는 것에 대한 분별’이란 다음과 같다.
증상계학은 번뇌의 현행[纏]을 지식(止息)시켜서 다스리고,
증상심학은 번뇌의 현행을 굴복시켜서 다스리며,
증상혜학은 번뇌의 수면(隨眠)을 영원히 단멸하여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5) 뛰어난 출생과 결정적으로 뛰어난 것을 능히 이끌어냄에 대한 분별
‘뛰어난 출생과 결정적으로 뛰어난 것을 능히 이끌어냄에 대한 분별’이란 다음과 같다.
증상계학과 증상심학은 능히 청정한 지위 및 청정하고 뛰어난 출생을 이끌어내고,
증상혜학은 출세간의 결정적인 뛰어난 덕을 능히 이끌어내는 것을 말한다.
6) 법에 수순함에 대한 분별
‘법에 수순함에 대한 분별’이란 교법을 배우는 것에 수순하는 열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과거의 원인이고,
둘째는 교법에 수순함이며,
셋째는 이치에 맞는 방편이고,
넷째는 끊임없이 간절히 닦는 것이며,
다섯째는 맹렬하게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닦고 지니는 힘이며,
일곱째는 몸과 마음의 추중(麤重)을 편안히 쉬는 것이고,
여덟째는 자주자주 관찰함이며,
아홉째는 겁과 두려움이 없는 것이고,
열째는 증상만(增上慢)이 없는 것이다.
‘과거의 원인’이란 전생의 근기가 성숙함과 근기가 성숙하여 원만해지는 것을 말한다.
‘교법에 수순함’이란 뒤바뀜이 없이 순서가 있는 교법을 말한다.
‘이치에 맞는 방편’이란 교법에 맞게 수행하고 이와 같이 수행할 때에 능히 정견(正見)을 내는 것을 말한다.
‘끊임없이 간절히 닦음’이란 이와 같은 방편으로 시간을 헛되이 보냄이 없고 착한 법[善品]을 닦아 익히며 지성껏 착한 법을 빨리 이끌어내는 것을 말한다.
‘맹렬하게 좋아하고 원함’이란 증상해탈에 대하여 증득함을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일으켜서,
“나는 여러 성인께서 구족하고 머무시는 자리를 어느 때에야 증득할 것인가?”라고 생각함을 말한다.
‘닦고 지니는 힘’이란 두 가지 인연으로 닦고 지니는 힘을 얻게 되나니,
첫째는 본성이 예리한 근기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오랫동안 순숙(純熟)하게 닦았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의 추중(麤重)을 편안히 쉬는 것’이란 다음과 같다.
만약 몸이 피곤함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의 추중을 일으키면 곧 위의(威儀)를 손상시키기 쉬우므로 편안히 쉬도록 한다.
만일 지극한 심구[尋]와 사찰[伺]로 인하여 몸과 마음의 추중을 일으키면, 곧 내면적으로 고요함을 닦아서 편안히 쉬도록 한다.
만약 의지를 책려하고 마음을 지극히 거두거나 마음을 침잠시키거나 혼침ㆍ수면(睡眠)의 얽음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의 추중을 일으키면, 곧 지혜롭게 관찰함 및 청정하고 뛰어난 작의(作意)를 닦아서 편안히 쉬도록 한다.
만일 자성에서 번뇌를 끊지 못하고 번뇌의 품류에 순응함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의 추중을 따라다니고 여의지 못하면, 곧 성스러운 수도를 바르게 닦아서 편안히 쉬도록 한다.
‘자주자주 관찰함’이란 다음과 같다.
시라(尸羅)에 의지해서 나쁜 행동과 착한 행동을 자주자주 관찰하고 사실 그대로 분명히 알되,
만약 나쁜 행동에 대하여 해서는 안될 것이라면 마땅히 버리고,
만일 착한 행동에 대해서 하지 않았으면 곧 마땅히 버린다.
만약 나쁜 행동에 대하여 그것을 했으면 마땅히 버리고,
만일 착한 행동에 대하여 그것을 했으면 마땅히 버리지 않는다.
이와 같은 관찰과 작의가 더욱 향상되는 힘으로 인하여,
일체의 번뇌를 이미 끊음과 아직 끊지 못했음을 자주자주 관찰하고,
만약 이미 끊었음을 알면 마땅히 매우 기뻐하고 좋아하며,
만일 아직 끊지 못했음을 알면,
이것을 다스리는 수도를 자주자주 마땅히 닦아야 한다.
‘겁과 두려움이 없음’이란 다음과 같다.
어느 때나 마땅히 법을 알고 마땅히 관찰한다.
알지 못하고 관찰하지 않고 깨달아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겁과 두려움이 생겨서 마음에 고달픔이 있고, 마음에 허탈감이 있다.
이와 같이 자주자주 생겨날 때도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제거하여 끊으며 놓아버린다.
‘뛰어난 체함이 없음[無增上慢]’이란 다음과 같다.
얻은 것ㆍ깨달은 것ㆍ증득한 것에 대해서 증상만을 여읜다.
이미 얻은 것에 대해서 이미 얻었다는 생각을 일으키거나, 이미 깨달은 것에 대해서 이미 깨달았다는 생각을 일으키거나, 이미 증득한 것에 대해서 이미 증득했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뒤바뀐 집착을 내지 않는다.
이와 같은 열 가지 법으로 모든 학처(學處)를 바르게 수행함을 좋아하는 것은, 처음에도 중간에도 최후에도 학처를 수순함에 의해서이다. 이
런 까닭에 ‘교법을 배우는 것에 수순함’이라고 이름한다.
이 열 가지 법 중에서 ‘과거의 원인’ 한 가지는 증상계학에 수순함이 가장 뛰어나고,
그 밖의 아홉 가지는 증상심학과 증상혜학을 수순함이 가장 뛰어나다.
7) 보특가라(補特伽羅)에 대한 분별
‘보특가라(補特伽羅)에 대한 분별’이란 이 3학(學)이 모든 범부 중생과 진리를 본 이에게 통하는 것을 말한다.
8) 하(下)ㆍ중(中)ㆍ상(上)에 대한 분별
‘하품ㆍ중품ㆍ상품에 대한 분별’이란 행에 의거하기 때문이고 방편에 의거하기 때문임을 말한다.
‘행에 의거하기 때문’이란, 애써서 더디게 통함[苦遲通行]을 하품의 배움이라 이름하고,
애써서 빨리 통함[苦速通行]과 즐겨 더디게 통함[樂遲通行]을 중품의 배움이라 이름하며,
즐겨 빨리 통함(樂速通行)을 상품의 배움이라 이름하는 것을 말한다.
‘방편에 의거하기 때문’이란, 정성스럽지 못한 방편과 끊임없음이 아닌 방편으로 닦는 이는 하품의 배움이라 이름하고,
어느 하나의 방편으로 닦는 이는 중품의 배움이라 이름하며,
두 가지 방편을 갖추어서 닦는 이는 상품의 배움이라 이름하는 것을 말한다.
9) 유가(瑜伽)에 대한 분별
‘유가(瑜伽)에 대한 분별’이란 네 가지 유가에 의지해서 학처(學處)를 바르게 닦음을 말하나니,
첫째는 믿음이고,
둘째는 의욕[欲]이며,
셋째는 정근(正勤)이고,
넷째는 방편이다.
① 믿음
‘믿음’이란 두 가지 행상(行相)과 두 가지 의지처를 말한다.
‘두 가지 행상’이란,
첫째는 인가(忍可)의 행상이고,
둘째는 청정의 행상이다.
‘두 가지 의지처’란,
첫째는 법의 도리를 관찰함의 의지처이고,
둘째는 믿고 이해하는 사람의 위덕(威德)의 의지처이다.
② 의욕
‘의욕[欲]’에는 네 가지 의욕이 있나니,
첫째는 증득하려는 의욕이고,
둘째는 묻고 논의하려는 의욕이며,
셋째는 증득의 자량(資糧)을 삼으려는 의욕이고,
넷째는 방편으로 닦으려는 의욕이다.
‘증득하려는 의욕’이란, 어떤 수행자가 위의 경지의 해탈에 대해서 증득하려는 즐거운 의욕을 일으키는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다.
‘묻고 논의하려는 의욕’이란, 어떤 수행자가 증득하려는 의욕을 일으키고서 승가람(僧伽藍))에 나아가 유식한 이ㆍ청정행을 함께 하는 이ㆍ바르게 수행하는 지혜로운 이에게 찾아가서, 아직 듣지 못했던 것을 듣기도 하고, 이미 들은 것이면 명확하고 청정히 하기 때문이다.
‘증득의 자량을 삼으려는 의욕’이란 어떤 수행자가 시라(尸羅)ㆍ율의(律儀)가 청정한 것과 음식의 분량을 아는 것과 깨달음의 방편과 바르게 알아 머무는 것과 전진하여 오르는 것에 대하여 증득하려는 즐거운 의욕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방편으로 닦으려는 의욕’이란 끊임없는 방편과 정성스러운 방편과 거룩한 도를 닦는 것에 대하여 희구하고 증득하려는 즐거운 의욕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③ 정근
‘정근(正勤)’이란 네 가지 정근을 말하나니,
첫째는 법을 듣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사유하기 위해서이며,
셋째는 닦아 익히기 위해서이고,
넷째는 장애가 청정해지기 위해서이다.
‘법을 듣기 위함’이란, 아직 듣지 못한 것을 듣고 이미 들은 것은 밝고 맑게 하기 위해서 마음을 경책하고, 잘 알지 못한 것을 방편으로 닦아 익히는 것을 말한다.
‘사유하기 위함’이란 들은 법 그대로 홀로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그 의미를 사유하고 헤아리며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닦아 익히기 위함’이란 고요한 방에 있으면서 지관(止觀)을 자주 닦는 것을 말한다.
‘장애가 청정해지기 위함’이란 온갖 덮음 번뇌[盖]를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 밤낮으로 정진하고 거닐며 고요히 앉아서 마음을 경책하며, 잘 알지 못한 것을 방편으로 닦아 익히는 것을 말한다.
④ 방편
‘방편’에도 역시 네 가지가 있다.
시라를 수호하고 모든 감관을 수호하는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감관과 율의로 하여금 청정하게 하고 정념에 잘 머물며,
정념에 잘 머무는 것으로 인하여 방일하지 않게 되고 마음을 수호하며,
선법(善法)을 닦아 익히고, 방일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그 내면의 마음으로 하여금 지(止)와 상응하게 되며,
증상혜(增上慧)를 얻어서 온갖 법을 관찰한다.
이상과 같은 네 가지 유가를 나누면 열여섯 가지 행이 된다.
이 중에서 믿음으로 인하여 믿음이 장차 의미를 얻게 되고,
믿음이 장차 의미를 얻음으로 인하여 온갖 선법에 대해서 닦고 행하려는 의욕을 일으키며,
닦고 행하려는 의욕으로 인하여 밤낮으로 정진하고 경책ㆍ견고함ㆍ용맹스러움에 머물게 된다.
정근(正勤)으로 인하여 방편을 섭수하여 닦아서,
아직 얻지 못한 의미를 얻게 하기 때문이고,
아직 깨닫지 못한 의미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며,
아직 증득하지 못한 의미를 증득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이 네 가지 법을 유가라고 이름한다.
10) 작의(作意)에 대한 분별
‘작의(作意)에 대한 분별’이란 양상을 분명히 아는 작의[了相作意] 등 일곱 가지 작의를 말한다.
① 양상을 분명히 아는 작의
‘양상을 분명히 아는 작의’란, 작의로 인하여 욕계의 거친 양상과 나아가 초정려(初靜慮)의 고요한 양상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욕계의 거친 양상을 분명히 아는 것]
무엇이 욕계의 거친 양상을 분명히 아는 것인가?
온갖 욕망의 과실을 여섯 가지로 찾아내어 생각함[尋思]함을 말한다.
첫째는 의미이고,
둘째는 현상[事]이며,
셋째는 양상[相]이고,
넷째는 품류이며,
다섯째는 시간이고,
여섯째는 도리이다.
[의미를 심사함]
‘의미를 심사(尋思)함’이란, 온갖 욕망은 온갖 허물이 많고 온갖 고뇌가 많으며 온갖 질병이 많고 온갖 재앙이 많은 것이라고 심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온갖 욕망이 온갖 허물이 많고 나아가 온갖 재앙이 많은 것이 ‘거친 것’의 의미가 된다.
[현상을 심사함]
‘현상을 심사함’이란 혹은 내면의 온갖 욕망에서 탐욕을 일으키고, 혹은 외부의 온갖 욕망에서 탐욕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양상을 심사함]
‘양상을 심사함’이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심사하는 것을 말한다.
‘자상을 심사함’이란, “이것은 번뇌의 욕망이다.” “이것은 사물의 욕망이다.”라고 하여,
이와 같이 온갖 욕망이 혹은 즐거움을 수순하고 혹은 괴로움을 수순하며 혹은 다시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수순함을 말한다.
즐거움을 수순하는 것은 바로 탐욕의 의지처이고 생각ㆍ마음의 뒤바뀜의 의지처이다.
괴로움을 수순하는 것은 바로 성냄의 의지처이고 분(忿)ㆍ한(恨)의 의지처이다.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을 수순하는 것은 덮힘[覆]ㆍ괴롭힘[惱]ㆍ속임[誑]ㆍ아첨[諂]ㆍ제 부끄럼 없음[無慙]ㆍ남 부끄럼 없음[無愧]의 의지처 및 견해의 뒤바뀜의 의지처이다.
이와 같이 온갖 욕망은 혹은 포악한 느낌이 따라 행하는 것이기도 하고,
혹은 포악하지 않은 느낌이 따라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온갖 욕망의 자상을 심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공상(共相)을 심사함’은 다음과 같다.
말하자면 온갖 욕망은 태어남의 괴로움과 나아가서는 구하나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 평등하며 평등히 좇아 다니고 좇아서 속박함을 심사하는 것이다.
욕망을 누리는 이들도 비록 또한 모든 욕망을 널리 채우더라도 역시 마땅히 “이것은 태어남의 괴로움 등의 법이다.
이 널리 채우는 욕망도 짧은 시간이어서 변하고 무너지는 것이다.”라고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온갖 욕망의 공상을 심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품류를 심사함]
‘품류를 심사함’은 다음과 같다.
말하자면 온갖 욕망이 흑품(黑品)의 번뇌에 떨어지는 것이,
마치 쇠사슬처럼 연결된 마른 뼈와 같고, 더러운 살덩어리와 같으며,
풀의 횃불과 같고, 일부분의 숯불과 같으며,
뱀ㆍ독사와 같고, 꿈에 본 것과 같으며,
마치 임시로 빌린 장엄 도구와 같고,
나무 끝의 과일과 같다고 심사하는 것이다.
또한 일체 유정이 추구하여 짓는 바의 괴로움을 받고,
친한 이ㆍ사랑하는 이와 이별하거나 죽음으로 생기는 괴로움을 받으며,
싫거나 만족함이 없어 생기는 괴로움을 받고,
자재하지 못하여 생기는 괴로움을 받으며,
악행으로 생기는 괴로움을 받는 것을 심사한다.
[온갖 욕망을 익히거나 가까이 함에는 다섯 가지 허물이 있다]
또한 박가범께서 말씀하시되,
“나는 온갖 욕망을 익히거나 가까이 함에는 다섯 가지 허물이 있다고 말하노라.
첫째는 온갖 욕망이 맛이 적음이고,
둘째는 욕망을 익히고 가까이 하는 이는 온갖 고뇌가 많고 온갖 허물이 많으며,
셋째는 욕망을 익히고 가까이 하는 이는 싫어함이 없고 만족함이 없으며 그치지 않고 쉬지 않는 것이고,
넷째는 욕망을 익히고 가까이 하는 이는 온갖 결박 번뇌[結]가 증장하며,
다섯째는 욕망을 익히고 가까이 하는 이는 악을 짓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셨다.
또한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올바르고 매우 착한 사람들은 한량없는 부문으로써 온갖 욕망들을 꾸짖는다.
말하자면 이 모든 욕망은 염오(染汚)를 증가함에 싫어하는 것이 없고, 많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갖는 바이며,
법이 아니고 뒤바뀐 것이고, 온갖 악행의 원인이며, 애욕을 증장하고, 지혜로운 이는 버리고 멀리하는 것이며,
온갖 조건[緣]에 의해서 방일하는 지위이고, 그 속성이 무상하여 공(空)이 되고 허망하며 속임과 과실의 법이며, 환상과 같고 변화와 같아서 어리석은 범부를 유혹하고 속인다. 현재 법의 욕망이거나 미래 법의 욕망이거나 천상의 욕망이거나 인간의 욕망이거나 일체가 모두 마(魔)가 행하는 바이고, 마(魔)가 머무는 곳이다.
또한 그 욕망에 의해서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갖가지 한량없는 악ㆍ불선법을 생겨나게 하나니, 탐욕ㆍ성냄ㆍ원한 등 온갖 장애되는 법을 말한다.
거룩한 분의 제자들이 계율[學處]을 배울 때 장애가 되는 것 등, 이와 같은 차별된 과실들로 인하여 대부분의 욕망들이 흑품류(黑品類)에 떨어진다고 심사한다.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품류를 심사함’이라 한다.
[시간을 찿아내어 생각함]
‘시간을 찿아내어 생각함[尋思時]’이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삼세가 항상 상속하는데 온갖 욕망은 여러 괴로움이 많고 온갖 재앙이 많으며 온갖 허물이 많다고 심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이름하여 시간을 찾아내어 생각함이라 한다.
[도리를 심사함]
‘도리를 심사함’이란 다음과 같다.
이들 온갖 욕망은 큰 재산으로 인하여, 큰 희구로 인하여 큰 시달림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고,
또한 갖가지 잡된 공력과 업과 장소로 인하여 비로소 모두 갖추게 되어 성립하고 증장한다.
또한 비록 이와 같이 외부에서 돕는 생물(生物)들도 증장하고 성숙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원래 빨리 흩어지고 사라지는 속성이다.
또한 부모,아내와 자식, 노비, 갖가지 일을 해주는 이, 친구, 관료, 형제, 친족 등이 비록 잠시 모였더라도 오래지 않아서 흩어지고 무너지게 된다.
또한 내면의 몸인 구체적인 물질은 4대(大)로 생긴 것이고 음식으로 증장하는 것으로서,
항상 더럽고 나쁜 것을 내보내고, 비록 씻고 목욕과 안마 등으로써 생겨난 고통을 잠시 다스린다 하더라도 끝내는 떠나고 흩어지며 무너지고 사라지는 존재이다.
굶주리고 목마른 고통을 다스리기 위해서 온갖 음식을 먹고, 차갑거나 더운 고통을 다스리기 위해서거나 수치스러운 곳을 가리기 위해서 의복을 입으며,
혼침이나 수면으로 시달리는 고통을 다스리기 위해서나, 또는 다니거나 서 있는 것이 피곤한 고통을 다스리기 위해서 여러 침구를 사용하고,
온갖 질병의 고통을 멎게 하기 위해 여러 의약(醫藥)을 사용한다.
이와 같이 온갖 욕망은 모두 고통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므로 마땅히 탐착하지 않아야 하며,
오직 중병(重病)에서 병을 치료하는 약을 집착하는 것과 같아서 없애야 한다.
혹은 거룩한 교법에 의지해서 이러저러한 온갖 욕망의 거친 양상을 심사하고,
혹은 다시 내면적으로 스스로 지견(智見)을 일으키기도 하며,
혹은 다시 수순하는 도리를 심사하기도 하고,
혹은 다시 온갖 욕망의 자성을 심사하여 아득한 옛적부터 본래 성취되어 있는 불가사의한 법을 마땅히 생각으로 논의하지 말고 분별하지 않아야 하다.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도리를 심사함’이라 한다.
이상과 같은 여섯 가지로 온갖 욕망의 거친 양상을 분명히 알고나서 또한 다시 초정려(初靜慮)의 고요한 양상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초정려 중에는 욕계의 매우 거친 양상과 같은 것은 없다.
이와 같이 욕계의 거친 양상을 떠났기 때문에 ,‘초정려의 고요한 양상’이라 이름한다.
이러한 것을 이름하여, ‘초정려의 고요한 양상을 분명히 아는 것’이라 한다.
선정의 지위에서의 작의로 인하여 욕계의 거친 양상 및 초정려의 고요한 양상을 분명히 아나니,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양상을 분명히 아는 작의[了相作意]’라고 한다.
아직은 듣고 사색함에 그 속에 잡염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② 수승한 이해인 작의
‘수승한 이해[勝解]인 작의’란 다음과 같다.
그 상응하는 바대로 욕계의 거친 양상과 초정려의 고요한 양상을 심사하고 요달하되,
듣고 사색함이 그 속에 잡염되지 않고 순수하게 수행을 일으켜서,
거친 양상과 고요한 양상을 승해로 반연하여 지관(止觀)을 닦아 익히고,
그것을 닦아 익힐 때에 심사하는 바대로 거친 양상과 고요한 양상이 자주 승해를 일으킨다.
이런 까닭에 ‘승해인 작의’라고 이름한다.
③ 멀리 여읜 것인 작의
‘멀리 여읜 것인 작의’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종류를 많이 닦아 익힘으로써 초분(初分)의 번뇌를 끊어 없애기 위해서 다스리는 수도와 끊는 수도를 일으키나니,
능히 다스리는 수도와 함께 생겨나는 작의를 이름하여 ‘멀리 여읜 것인 작의’라고 한다.
④ 즐거움을 포섭하는 것인 작의
‘즐거움을 포섭하는 것인 작의’란 다음과 같다.
이미 욕계의 초분(初分) 번뇌를 끊었고, 이미 그 품류의 추중(麤重)ㆍ뒤의 수승한 품류에서 끊을 것ㆍ멀리 여읠 것을 이미 멀리 여의어서 기쁨ㆍ즐거움을 일으킨다.
또한 끊는 자리에서 수승한 공덕을 보고, 약간의 멀리 여읨에서 기쁨ㆍ즐거움을 증득하며,
때때로 청정하고 수승한 작의로써 스스로 경사로 여기고 기뻐하며 혼침ㆍ수면(睡眠)ㆍ도거(掉擧)의 속박을 끊고자 한다.
이것을 이름하여 ‘즐거움을 포섭하는 것인 작의’라고 한다.
⑤ 관찰함인 작의
‘관찰함인 작의’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바르게 닦고, 즐겁게 끊으며, 즐겁게 닦아서 착한 법[善品]을 방편으로 붙들어 지니는 바로서 욕계의 계박ㆍ온갖 번뇌의 속박으로 하여금 다닐 적이나 머무를 적이나 다시는 현행하지 않도록 한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이가 다시 스스로 사유하기를,
“나의 이 몸에는 탐욕이 있는가, 탐욕이 없는가? 온갖 욕심의 경계에 대해서 집수(執受)하지는 않는가?”라 하고, 스스로 관찰하기 때문에,
어느 경계를 대하더라도 수승하고 미묘하며 청정한 모습을 사유하게 된다.
그런데 저 수행하는 이가 온갖 수면을 아직 다 끊지 못함으로 인하여, 이렇게 청정하고 미묘한 모습을 사유할 때에,
염오(染汚)에 수순하는 습관ㆍ염오에 향하는 습관ㆍ염오에 다다르는 습관으로 평정[捨]에 머물지 못하고,
또한 싫어하거나 훼손하거나 막아 그치거나 거스르지 못한다.
수행자가 그때에 이렇게 스스로 아나니,
“나는 온갖 욕망에 대해서 아직 바르게 멀리 여의지 못하고 마음이 아직 해탈하지 못했기 때문에, 온갖 욕망의 행이 나의 마음을 계박하고 포섭하는 것이 마치 물에 젖음과 같다. 그러므로 당연히 포섭하고 조복해야한다. 나는 이제 반드시 다스림의 도를 갑절로 닦아야겠다.”
남아 있는 수면(隨眠)을 남김없이 끊어버리기 위해서 갑절이나 다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수승하게 끊고 수승하게 닦는다.
이것을 ‘관찰함인 작의’라고 이름한다.
⑥ 방편의 궁극적인 것의 작의
‘방편의 궁극적인 것의 작의’란 다음과 같다.
지(止)의 품류를 갑절로 닦아 익히고 즐겨 끊으며 즐겨 닦기 때문에 지(止)와 관(觀)을 함께 닦고 자주자주 관찰한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이가 다스림을 닦고 익힐 때에, 끊음ㆍ아직 끊지 못함을 수시로 관찰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욕계의 계박 번뇌를 멀리 여의도록 한다.
이것은 잠시동안 조복하고 여읜 것이지 궁극적으로 영원히 종자를 뽑아버린 것이 아니다.
수행자가 그때에는 초정려의 방편도와 궁극적으로 일체 번뇌가 다스려지는 작의를 얻나니, 이것을 ‘방편의 궁극적인 것인 작의’라고 이름한다.
⑦ 방편의 궁극적인 과위인 작의
‘방편의 궁극적인 과위(果位)인 작의’란 다음과 같다.
이것으로부터 다음에 끊임없이 앞의 인연에 의거함으로써 근본 초정려(初靜慮)의 선정에 증득에 들어가며 이 근본 초정려와 함께 일어나는 작의를 말하나니, 이것을 ‘방편의 궁극적인 과위인 작의’라고 이름한다.
초정려에 일곱 가지 작의가 있는 것처럼, 이와 같이 제2ㆍ제3ㆍ제4 정려와 나아가서는 비상비비상처정에도 그 상응하는 바대로 모두 알아야 한다.
또한 다음에 ‘거치른 양상[麤相]’이란 다음과 같다.
일체의 하부 지위[下地]에서 욕계로부터 나아가서는 무소유처에 이르기까지 대략 세 종류의 온갖 하품(下品) 경지의 법이 있으며, 싫어하고 떠나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지극한 괴로움이 머무는 속성이고,
둘째는 지극히 고요하지 못한 것이 머무는 속성이며,
셋째는 지극히 짧은 수명이 머무는 속성이다.
11) 이끌어내는 것[引發]에 대한 분별
‘이끌어내는 것에 대한 분별’이란 네 가지 이끌어내는 것을 말한다.
첫째는 과위(果位)를 이끌어내는 것이고,
둘째는 욕망 여읨을 이끌어내는 것이며,
셋째는 감관의 전환을 이끌어내는 것이고,
넷째는 뛰어난 덕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12) 문답에 대한 분별
‘문답에 대한 분별’이란 한량없는 부문에서 묻고 대답하는 것에 대한 분별이니, 지금 조금 밝혀보이기로 한다.
【문】 증상계학(增上戒學)은 어째서 청정하지 못하고, 어째서 청정한가?
【답】 열 가지 원인이 있어서 계(戒)가 청정하지 못하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처음에 여법하게 시라(尸羅)와 율의를 받지 않음이고,
둘째는 매우 침체됨이며,
셋째는 매우 들뜨고 산란함이고,
넷째는 방일과 해태(懈怠)에 해당됨이며,
다섯째는 삿된 원을 일으킴이고,
여섯째는 궤칙(軌則)을 어기는 것에 해당됨이며,
일곱째는 삿된 생계수단을 범하는 것에 해당됨이고,
여덟째는 양 극단에 떨어짐이며,
아홉째는 능히 벗어나지 못함이고,
열째는 받은 바를 어기고 범함이다.
① 처음에 여법하게 시라와 율의를 받지 않음
‘처음에 여법하게 시라와 율의를 받지 않음’이란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혹은 왕에게 핍박당하는 고통을 피한다거나,
혹은 강제로 도적에게 핍박당하는 고통을 피한다거나,
혹은 채권자에게 핍박당하는 고통을 피한다거나,
혹은 공포로 핍박당하고 괴로워하기 때문이라거나,
혹은 생활할 수 없는 것 등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출가하여 계를 받고서는, 거룩한 도를 힘써 닦지 않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닦지 않으며, 자신을 조복하지 않고, 스스로 고요하지 못하며, 스스로 열반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이다.
이와 같은 것 등이 ‘여법하게 시라와 율의를 받지 않음’이 된다.
② 매우 침체됨
‘매우 침체됨’이란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제 부끄럼[慙]이 없고 남 부끄럼(愧)도 없으며,
뉘우치는 마음이 미약하고 열등하며,
그 성품이 아주 느려서 온갖 학처(學處)에 대해서 아주 느리게 닦고 익히는 경우이니,
이와 같은 것을 ‘매우 침체됨’이라고 한다.
③ 매우 들뜨고 산란함
‘매우 들뜨고 산란함’이란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편벽되게 집착하여 받게 된 바 바른 도리가 아닌 것에 후회를 일으키고,
마땅히 후회하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해서 후회를 일으키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의 옳지 못한 것에 대해서 능멸하는 마음과 손해 입히는 마음을 내어 자주 익히고 버리지 못하는 경우이니,
이와 같은 것을 ‘매우 들뜨고 산란함’이라고 이름한다.
④ 방일과 해태 해당됨
‘방일과 해태(懈怠)에 해당됨’이란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과거세에 이미 어기고 범함이 있었지만 잊어버렸기 때문에 법답게 그 다스림을 일으키지 못하고,
이렇게 미래와 현재에도 어기고 범하는 것을 일으키고는 잊어버렸기 때문에 법답게 다스림을 일으키지 못한다.
과거에도 역시 다음과 같이 하지 못했다.
즐거운 의욕을 용맹스럽게 일으켜서 장차 금계(禁戒)에 대하여 끝내 어기거나 범하지 않고,
“나는 장차 이러저러하게 행하고 이러저러하게 머물며, 마땅히 행해야 할 바와 같고 마땅히 머물러야 할 바와 같이 해서 범하는 바가 없게 해야겠다.”라고 하지 않았다.
또한 다시 이와 같이 행하고 이와 같이 머물며 으레히 범할 수 있는 것을 훼손하고 범함이 있다면, 이 사람은 이전ㆍ중간ㆍ이후와 과거에 지었던 것에 대하여 모두 좇아서 행할 때에 모두 현재 방일을 이루기 때문이다.
또한 잠자는 것과 누워 쉬는 것에 집착하여 그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아주 느리고 게을러서,
청정행[梵行]을 닦고 영위함을 좋아하지 않고 지혜로운 이를 몸소 받들거나 모시지 않는 경우이다.
이와 같은 것을 ‘방일과 해태에 해당됨’이라 이름한다.
⑤ 삿된 원을 일으킴
‘삿된 원을 일으킴’이란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삿된 원을 일으킨 채 청정행을 닦으면서,
“나는 지금 닦은 계율과 범행으로 장차 천주(天主)가 되거나 혹은 그 밖의 하늘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말한다거나,
혹은 다시 이익과 존경을 탐내어 말하기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온갖 이익과 존경을 구한다.”고 하고, 혹은 “오직 이익과 존경을 얻기 원한다.”고 하는 경우이니,
이러한 것을 이름하여 ‘삿된 원을 일으킴’이라 한다.
⑥ 궤칙을 어기는 것에 해당됨
‘궤칙(軌則)을 어기는 것에 해당됨’이란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온갖 위의(威儀)에 있어서나 혹은 짓는 바에 있어서나 혹은 선품(善品)을 닦음에 있어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무릇 행하는 바가 세간에 어긋나고 비나야(毗奈耶)를 어기는 경우이니,
이러한 것을 이름하여 ‘궤칙을 어기는 것에 해당됨’이라 한다.
⑦ 삿된 생계수단을 범하는 것에 해당됨
‘삿된 생계수단을 범하는 것에 해당됨’이란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성품 됨됨이가 욕심이 크고 만족할 줄 몰라서 제공하기도 어렵고 충족시키기도 어려우며, 또한 비법(非法)으로써 온갖 의복ㆍ음식ㆍ좌구ㆍ침구와 병에 필요한 의약과 그 밖의 생활도구를 구하고 찾는다.
옳은 법으로써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의복ㆍ음식 등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의 공덕을 과시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 앞에서 본성이 아니고 평소 익힌 것이 아닌 위의를 거짓으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모든 감관이 고요하여 들뜸이 없음을 나타내나니,
속마음으로는 다른 이로 하여금 자기가 덕이 있다고 말하게 하여 장차 보시하는 바가 있고 받들어 섬기게 한다.
의복ㆍ음식ㆍ온갖 좌구(坐具)ㆍ침구ㆍ병에 필요한 의약과 그밖의 생활도구와 신업에 공급되는 것을 말한다.
또한 다시 이 사람은 생김새가 추하고 경솔하며,
말하는 것이 거칠고 추악하여 꺼리는 바가 없고,
그 몸을 잘 치장하고, 자기의 이름과 종성(種姓)을 자랑한다.
혹은 들은 것이 많거나 혹은 법을 광범위하게 지녀서 이익과 공경을 얻기 위하여, 여러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가 펴신 법을 남들에게 널리 말한다.
혹은 자기가 참으로 공덕이 있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하고, 혹은 조금 보태기도 하며,
혹은 다른 이로 하여금 (자기가) 특이한 모습을 나타낸다고 칭찬하게 만들어서,
뛰어나고 많은 의복ㆍ음식과 그 밖의 사문에게 필요한 갖가지 생활도구들을 구한다.
또한 비록 의복이 없거나 부족하지 않은데도 일부러 떨어진 의복을 입는 것을 보이나니,
속마음으로는 자기를 믿는 장자와 거사로 하여금 옷이 없거나 부족함을 알게 하여,
곧 상품(上品)의 훌륭한 의복을 많이 보시하게 만든다.
의복과 마찬가지로 그 밖의 사문에게 필요한 생활도구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게 한다.
또는 믿거나 존경해주는 바라문과 여러 장자들로부터 욕심난 물건을 얻지 못하거나 혹은 없다거나 혹은 수용할 것을 주지 않으면, 곧 핍박하여 조르고 꾸짖어서 구하기도 한다.
혹은 하열(下劣)한 물건을 얻게 되면 가볍게 여기고 헐뜯으며 다시 돌려주면서 시주(施主) 앞에서 이런 말을 하되,
“예끼, 선남자여. 다른 선남자와 선여인을 당신과 비교하면 종성도 낮고 재산도 가난한데도 오히려 능히 이러저러한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보시하거든, 하물며 당신은 그들보다 종성도 높고 재산도 풍부하거늘 이와 같은 비천하고 좋지 못한 물건을 나에게 보시한단 말인가?”라고 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이 혹은 거짓으로 위의(威儀)를 나타내는 것에 의해서나,
혹은 법이 아닌 언설에 의해서나,
혹은 특별한 모습을 나타낸다고 칭찬함에 의해서나,
혹은 핍박하여 조르고 꾸짖음에 의해서나,
혹은 이익으로써 이익에 견주는 것에 의해서 법답지 않게,
의복ㆍ음식ㆍ좌구ㆍ침구ㆍ병에 필요한 의약과 그밖의 생활도구를 구하고 찾는다.
옳은 법으로 구하지 않는 것을 ‘삿된 생계수단’이라 말하고,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삿된 생계수단을 범하는 것에 해당됨’이라 한다.
⑧ 양 극단에 떨어짐이
‘양 극단에 떨어짐’이란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온갖 욕망과 미묘한 즐거움에 즐겨 집착하고 수용하여 다른 이로부터 의복 등의 물건들을 얻되,
혹은 법답게 하고 혹은 법답지 않게 하여 허물을 보지 못하고 벗어남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수용하면, 이것을 첫 번째 극단이라 이름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스스로 고행을 닦아서 한량없는 갖가지 고통스러운 일로 그 몸을 핍박하고, 몹시 고통스러운 갖가지 금계(禁戒)를 받아 행하되,
혹은 가시덤불에 의지하여 있기도 하고,
혹은 재(灰)에 의지하여 있기도 하며,
혹은 판자 바닥에 의지하기도 하고,
혹은 해골에 의지하기도 하며,
혹은 다시 걸터앉기도 하고,
혹은 걸터앉는 선정을 닦기도 하며,
혹은 다시 불을 섬기기를 하루에 세 번씩 하기도 하고,
혹은 물 속에 있기를 하루에 세 번씩 하기도 하며,
혹은 한쪽 발을 들고 태양을 바라보며 따라서 돌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것 등과 그 밖에 스스로 고행을 닦는다.
이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
이와 같은 것을 ‘양 극단에 떨어짐’이라 이름한다.
⑨ 능히 벗어나지 못함
‘능히 벗어나지 못함’이란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시라(尸羅)와 그 밖의 금계를 고집하여,
“오직 시라와 금계를 닦아 익혀야만 장차 청정한 해탈과 벗어남을 얻는다.”고 말하고,
또한 다시 고집하여,
“온갖 외도의 계를 잘 지키고 훌륭히 청정하게 하면 장차 청정한 해탈과 벗어남을 얻게 된다”고 말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두 종류는 청정이 아니기 때문에 능히 벗어나지 못한다.
이와 같은 것을 ‘능히 벗어나지 못함’이라 이름한다.
⑩ 받은 바를 어기고 범함
‘받은 바를 어기고 범함’이란 다음과 같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전혀 부끄러워 함이 없고, 일찍이 사문의 의범(儀範)을 돌아보지 않아서 온갖 악법을 행하여,
안으로 썩고 낡은 것만을 생각하고, 열등한 무리들을 순종하여 마치 더러운 달팽이와 같고 벌레ㆍ소라의 소리ㆍ개같은 행동을 하며,
사문이 아니면서 사문이라 칭하고,
청정행[梵行]이 없으면서 청정행을 닦는 자라고 칭하는 경우이다.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받은 바를 어기고 범함’이라 한다.
이러한 열 가지 원인에 의하면 증상계학은 청정하지 못하며,
만약 이것과 상반된다면 곧 청정함이 된다.
‘증상심학의 청정과 청정하지 못함의 의미’는 「섭사품(攝事品)」의 ‘청정한 정려(靜慮)’에서의 설명과 같다.
또한 이러한 청정에 의거하여 증상혜학의 청정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종류들의 문답과 분별이 한량없고 가없음을 그 뜻에 준하여 알아야 한다.
6.4. 보리
‘보리에 대한 다섯 가지 분별’이란
첫째는 종성(種性)이고,
둘째는 방편이며,
셋째는 시간이고,
넷째는 깨달음을 증득함이며,
다섯째는 해탈이다.
1) 종성
‘종성(種性)’이란 성문의 보리는 둔한 근기의 종성에 의지하고,
독각의 보리는 중간 근기의 종성에 의지하며,
무상정등보리는 예리한 근기의 종성에 의지함을 말한다.
2) 방편
‘방편’이란 성문의 보리는 6처(處)의 선교방편(善巧方便)을 행함에 의해서이고,
독각의 보리는 매우 심오한 연기(緣起)의 선교방편을 다분히 행함에 의해서이며,
무상정등보리는 5명처(明處)의 선교방편에 의한 것임을 말한다.
3) 시간
‘시간’이란 성문의 보리는 최소한 3생(生)을 수행하여 증득하고,
독각의 보리는 백대겁(百大劫) 동안 수행하여 증득하며,
무상정등보리는 삼대겁 아승기야(阿僧企耶) 동안 수행하여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4) 깨달음을 증득함
‘깨달음을 증득함’이란 성문의 보리는 스승으로 인하여 깨달음을 증득하고,
독각의 보리는 오직 자신의 이익을 맹세하고 스승 없이 증득하며,
무상정등보리는 자신도 이롭고 다른 이도 이롭게 하며, 스승 없이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5) 해탈
‘해탈’이란 성문의 보리와 독각의 보리가 증득한 전의(轉依)는 번뇌장(煩惱障)을 해탈한 해탈신(解脫身)에 포함되고,
무상정등보리가 증득한 전의는 일체의 번뇌장과 소지장(所知障)을 해탈한 해탈신에 해탈되고 법신에 포함되는 것을 말한다.